김두한 15

김두한과 하야시 결투는 사실인가?

1. 박정희 군사 반란 정권의 영화 검열 친일파 남로당 공산군사반란 핵심 출신 박정희는 2차 군사반란에 성공한지 일주일만인 1961년 5월 23일에 '아아 백범 김구선생'과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등 국내영화 34편과 외국영화 56편을 불순영화로 보고 재검열에 들어갔다.1 내무부, 문교부, 공보부가 공동으로 6개월간이나 심의하여 한국영화 '오발탄'과 외국영화 6편을 상영금지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2 박정희는 1962년 1월 19일 한국 최초의 영화에 관한 기본법인 영화법을 만들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제6차 상임위원회에서 의결을 거쳐 1월 20일 법률 제995로 공포하였다. 제10조에 공연자가 영화를 상영하고자 할 때는 공보부 장관에게 허가를 받아야 하고, 제15조에 일정한 사유가 있을 때 공보부 장관은 ..

김두한 2015.11.06

우미관 김두한까지 언론에 나타난 서울 조폭의 역사

폭력배의 역사에서 낭만파 주먹 시대가 존재한 적이 없다. 협객도 존재한 적이 없다. 건달도 존재한 적이 없다. 조폭 1세대의 출현 배경 서울, 특히 종로에 조선인 조폭들이 집중적으로 출현한 배경을 유흥업종의 등장과 밀집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총독부는 청계천 이남에 일본인 거류 지역을 설정하고 개발에 들어가 황금정(을지로), 본정(충무로), 명치정(명동)이라는 5만명 일본인 거주 신도심을 건설하였다. 상대적으로 종로에 비해 규모가 컸고, 도시적이었으며, 자본을 집중하고 있었다. 반대로 종로는 낙후 지역으로 전락하여 주로 요리점, 다방, 술을 파는 카페, 바, 기생집 등 유흥업종 상점들이 이면도로나 골목길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종로에는 몸을 안 파는 전통 관기 출신 외에 몸 파는 기생이 800명~ 1,00..

김두한 2015.10.28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다. <13편 >끝

13.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인가? 1) 김두한의 출생신고 호적 1부1처제 사회에서는 혼외 관계로 낳은 자식은 혼외자가 된다. 혼외자를 일제 강점기에는 민적사무취급에 관한 건 관통첩 제240호에 의해 1915년 8월 8일부터 사생자라고 기록했다. 이후 1942년 10월 15일 조선호적령을 개정하면서 사생자 용어를 문서에서 기록을 금지했다. 호적에 기록하는 입적 사유는 혼인관계로 태어나면 출생, 서자로 입적되면 인지, 입양되면 양자연조로 구분했다. (민적법 집행 심득, 총훈 제74호 1915.08) 그리고 출생별란에는 서자는 몇 번째 남(녀)이라고 쓰지 못하고 서자 남(녀)이라고만 써야 했다. (민적사무취급에 관한 건, 관통첩 제240호 1915.08.07) 사후양자는 양부의 성을 따라야 한다. (민법 제..

김두한 2015.08.29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다. <12편 >

12. 김두한은 징용 당한 조선인을 위해 반도의용정신대를 만들었나? "스물다섯이 됐을 때가 태평양 전쟁 말기인데 해남도로 가라는 징용장이 나왔어요. 그때는 이미 미국 잠수함이 바다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남도에 가면 물귀신 되기 십상이었지요. 나 말고도 서울에 있는 주먹 3천명에게도 징용장이 나왔어요." - 김두한, 제10화 해방될 때까지 주먹생활 하던 이야기, 노변야화, 동양방송, 1969.10.24 "나는 경시청으로 들어가 단도직입적으로 단게 국장을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사복을 입은 한 사람이 어디서 왔느냐고 놀랍다는 어투로 물었다.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김좌진」이라고 새긴 명함을 내밀고 이런 사람이 왔다고 전하라고 했다. 그는 명함을 들고 들어 갔다. 아까와는 다른 융숭한 태도로 나를 국장실로..

김두한 2015.08.23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다. <11편 >

11. 김두한은 조선 상인들을 보호 했나? 총독부가 청계천을 기준으로 청계천 남쪽에 지금의 명동(명치정)과 을지로(황금정), 충무로(본정) 등 신시가지를 조성하여 서울에 들어 온 5만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은행, 백화점, 극장 등 신흥 상업지구로 개발해서 살기에 좋았기에 거지들마저 종로보다는 본정으로 몰려 들었다. 반면 청계천 북쪽 종로는 기존의 조선인 상권이 신흥 일본 상권의 시장 장악에 밀려 축소되었다. 청계천 남쪽 일본인 백화점 소비자의 60%가 조선인일 정도로 조선인마저도 청계천 이남으로 걸음을 옮겼다. 종로에서는 골목길로 상권이 이동해 주로 다방, 술집, 식당 등이 생겨나 서민층을 상대로 하는 유흥지역으로 변했다. 여기에 극장이 추가 되었다. 불량배들이 돈 안들이고 하루..

김두한 2015.08.22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다. <10편 >

10. 김두한은 16세부터 요시찰 대상이자 주거이전 제한을 당했나? "내가 16세의 봄을 맞이할 때 나는 이미 일본 경찰의 요시찰인(要視察人)이 되어 서울 밖의 주거이전을 제한 당했다." - 서문,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 김두한 회고기 1963 1931년에 총독부 경무국 경무과에서 전국 경찰서에 하달한 '형사 요시찰인 취급 내규 시행 세칙의 건'을 보면 요시찰 대상을 "1종. 상습적으로 도당을 조직하여 집단적 위력을 악용할 우려가 있는 자, 2종. 타인과 소송사건 또는 기타 분의를 일으켜 부정이익을 도모하려는 자, 3종. 토목 건축 공사 입낙찰에 개입하여 부정이익을 도모하려는 자, 4종. 금지된 제품을 밀수이출입이나 부정수수를 도모하려는 자, 5종. 상습적 외설행위 및 외설문서 또는 도화 등을 밀매 반포..

김두한 2015.08.22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다. <8편 >

8. 김두한을 오숙근이 키웠나? 원 노인이 키웠나? 1) 오숙근이 김두한을 키웠다는 주장 자기 아버지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김을동만이 김좌진의 모 이중규가 김두한을 13살 때부터 키웠다고 유일하게 주장한다.1 김좌진의 장례를 1930년 3월 25일 오전 9시 만주 신시에서 사회장으로 치뤘다. 김좌진이 일군 생활 터전과 조선인 지역사회를 김좌진의 동생 김동진이 이어 받아 유지했음으로 김좌진의 처 오숙근은 계속 신시에 머물렀다. 김좌진과 혼외 관계였던 나혜국은 어머니와 동생이 있던 해림으로 옮겨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1931년 9월 19일 일본군은 앞날 조작했던 류타오후 사건을 내세워 전격적으로 만주를 침략하였다. 1932년 3월 1일 일본은 괴뢰 만주국을 수립하었다. 국민당 패잔병들은..

김두한 2015.08.22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다. <7편 >

7. 김두한은 청계천 다리 밑에서 거지 생활을 했나? "어머니와 할머니가 예비검속을 했어요. 어머니 할머니가 안 계시니까 여덟 살 먹은 놈이 완전 거지가 된 거죠. 외삼촌이 집과 땅을 팔아 먹었으니까. 어머니의 오빠인데, 매일 도박하고 술 먹고 하는 게 일인 사람이었어요. 인사동 집이 백여 칸 됐고, 식모 한 사람이 집안 일을 거들어 주었는데, 어느날 인력거 타고 학교 다녀 왔더니 외삼촌이 도망갔다고 집달리가 와서 절 내쫓아 버렸어요.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되어 종로 2가 장자구 다리 밑에서 지냈습니다." - 김두한, 제4화 부친 김좌진장군을 만주에서 만나고 온 얘기, 노변야화, 동양방송 1969.10.17 "해가 저물면 남의 집 처마 밑에서 한데 잠을 자고, 또 날이 세면 걸어가면서 구걸 행각을 했다. ..

김두한 2015.08.22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다. <6편 >

6. 김두한은 학대하는 외숙 때문에 개성에서 가출했나? 김두한은 고아가 된 자신을 외숙이 돌봐 줬다고 주장한다. 김두한이 외할머니 빼고 언급한 유일한 친척이다. "졸지에 외조모와 어머니를 잃고 거리에 나온 일곱 살의 소년 김두한을 맞아주는 안식처는 이 땅 위에 그 아무 곳도 없었다. 나는 어렸을 때의 기억을 일일이 전부를 엮어낼 수 없지만 얼마 후 개성에 사는 외숙댁에 일시 정착하게 되었다." - 김두한, 예비 검거된 외할머니와 어머니,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 김두한 회고기 1963. "내가 개성의 외숙댁에 있을 때 우리 외숙집 옆에는 계란빵 장사를 하는 노인 한 분이 있었다. 그때 나는 학교에 안가고 놀고 있었으므로 곧잘 계란빵 장사 가게에 들리곤 했다." - 김두한, 아버님 비보에 우는 빵집 영감님,..

김두한 2015.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