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김두한과 하야시 결투는 사실인가?

허구인물 전우치 2015. 11. 6. 22:00

1. 박정희 군사 반란 정권의 영화 검열

 

친일파 남로당 공산군사반란 핵심 출신 박정희는 2차 군사반란에 성공한지 일주일만인 1961년 5월 23일에 '아아 백범 김구선생'과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등 국내영화 34편과  외국영화 56편을 불순영화로 보고 재검열에 들어갔다.1 내무부, 문교부, 공보부가 공동으로 6개월간이나 심의하여 한국영화 '오발탄'과 외국영화 6편을 상영금지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2


박정희는 1962년 1월 19일 한국 최초의 영화에 관한 기본법인 영화법을 만들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제6차 상임위원회에서 의결을 거쳐 1월 20일 법률 제995로 공포하였다. 제10조에 공연자가 영화를 상영하고자 할 때는 공보부 장관에게 허가를 받아야 하고, 제15조에 일정한 사유가 있을 때 공보부 장관은 상영허가의 취소와 상영정지, 중지처분 등을 내릴 수 있다고 명시하였다.


박정희는 1962년 12월 26일 제6호 헌법 제18조 제2항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 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다만 공중도덕과 사회윤리를 위하여는 영화나 연예에 대한 검열을 허가할 수 있다'라고 하여 영화에 대한 검열을 헌법에 아에 명시하였다.


박정희는 1966년 8월 3일 개정하여 1967년 4월 4일부터 시행한 제2차 개정영화법에서 기존에 분리하고 있던 사전신고제와 상영허가제를 제11조의 신고와 검열에 관한 조항으로 통합하면서 검열을 강화하였다. 제13조 검열기준에 1. 헌법의 기본 질서에 위배되거나 국가의 권위를 손상할 우려가 있을 때, 2. 공서양속을 해하거나 사회 질서를 문란하게 할 우려가 있을 때, 3. 국가 간의 우의를 훼손할 우려가 있을 때, 4. 국민정신을 해이하게 할 우려가 있을 때 영화는 금지하거나 삭제할 수 있다고 명시하였다.


박정희는 1967년 4월 1일부터의 한국영화업자협회 자체 각본 심의, 1967년 12월 1일 공보부 내규 제 38호에 입각한 공보부 6인 영화각본심의위원회, 1968년 한국영화업자협회와 공보부 영화각본심의위원회 합동 검열 등 중첩적으로 영화에 대한 검열을 더욱 심하게 하였다.

 
국민 계몽에 있어서 박정희는 이후 국민교육 헌장에서 표현하였듯이 자주독립의 자세, 창조의 힘, 개척의 정신, 협동 정신, 국가 건설, 반공 민주정신, 근면한 국민 등을 국민 계몽의 주제로 삼아 추진하였다. 이는 이후 영화인들은 수 많은 관제 계몽 영화를 제작하였다.

 


1) 만주활극 액션영화의 유행

 

액션영화에 대한 검열기준은 '잔인'이었다. 액션 영화에 무엇인가 주제를 담으면 검열기준에서 '잔인'에다가 '사회불합리' 또는 '사상불순'을 추가하였다. 따라서 액션영화는 숙명적으로 '잔인'이라는 검열 항목을 벗어 날 수 없었다. 검열기준 '잔인'을 통과하기 위해서 박정희 정권의 국민 계몽 시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했다. 이렇게 되면 비록 액션영화가 잔인할지라도 정권의 국민 계몽 시책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구성했기에 검열을 통과할 수 있었다.


전쟁영화를 보면 1950년대에는 국군은 늘 허약하고 미군의 도움에 의존하는 보잘 것 없는 존재로 그려지면서 영화의 주제는 우월한 미군의 도움에 감사를 표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1960년대 전쟁 영화들은 때로는 미군에게 대항하듯이 할 말을 하거나, 아에 미군이 등장하지 않은 채, 용감한 국군이 스스로 위기 속에서도 인민군과 중공군을 섬멸하는 자주적, 주체적 군대의 위용을 보여 주었다. 군사 독재 정권을 등에 업은 군부로서는 반대하거나 금지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오히려 반겼다. 따라서 반공 전쟁영화의 잔인한 폭력 장면을 언제나 검열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1960년대 액션영화의 특징은 속칭 만주물이라고 불리는 만주 활극이었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 소만국경(1964), 광야의 호랑이(1965), 불 붙는 대륙(1965), 여마적(1968), 황야의 독수리(1969) 등이 대표적 작품들이었다. 모두 만주를 배경으로 등장인물들이 다양한 위치에 있을지라도 만주라는 지평선이 드넓은 벌판에서마저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한결같이 어떤 식으로든 일본군과 싸우는 민족주의 내용으로 흘러 갈 수 밖에 없었다.

 


2) 조폭 영화와 민족주의

 

반공 영화도 아니고, 계몽 영화도 아니고, 문예 영화도 아닌 액션 영화는 폭력적 오락성과 국민 계몽성이 서로 부딪혔고, 이것은 죄의식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3

 

하물며 조폭 영화는 아에 처음부터 통속적인 이유로 노골적인 폭력을 보여 주면서 권선징악이라는 구도로 폭력에 의미를 부여해서 저질 영화라는 비난을 피하려고 하였다. 액션영화에 비해서 더 강한 폭력을 사용하였기에 검열을 통과하기란 더 어려웠다. 따라서 조폭 영화도 역시 만주활극들이 사용하였던 민족주의 부여라는 장치를 그대로 따라 하였다.

 

만주 활극들이 주로 일본군이라는 거대 집단을 상대했다면, 조폭 영화는 일본 조폭이라는 소수 집단을 상대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폭 영화마저도 민족주의를 내세워 영화 검열을 무사히 통과하였다.

 

 

2. 조폭 영화에 등장하는 김두한과 일본 야쿠자 두목


1967년 2월 9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팔도강산의 흥행 성공은 영화계에 팔도 열풍을 몰고 왔다. 팔도강산은 성춘향(1961) 관객 38만명, 미워도 다시 한번(1968) 관객 37만5천명에 이어 관객 33만명을 동원하여 1960년대 흥행 순위 3위를 기록하였다.


영화계는 팔도라는 제목의 영화들을 쏟아냈다. 팔도유람 관광열차(1967), 팔도 기생(1968), 팔도 사나이(1969), 팔도 사위(1969), 요절 검객 팔도 검풍(1969), 돌아온 팔도 사나이(1970), 팔도 검객(1970), 팔도 가시나이(1970), 팔도 며느리(1970), 예비군 팔도 사나이(1970), 전라도 출신 용칠이와 팔도 식모(1970), 팔도 구두쇠(1970), 팔도 노랭이(1970), 팔도 졸업생(1972), 별난 장군과 팔도 부하(1973)이 제작되었다. 이후에는 팔도 주방장(1987), 팔도 쌍나팔(1987), 팔도 사나이 91(1991), 팔도 난봉꾼(1997)으로 이어졌다.


팔도 사극 액션 영화는 악한 양반을 혼내주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한다는 의협심이 주된 설정이고, 팔도 현대 액션 영화는 대개가 반일 아니면 반공이 주된 설정이다. 반일은 민족주의로, 반공은 애국주의로 흘렀다.


김효천도 팔도강산의 당시 인기몰이에 영합하였다. 김효천은 팔도강산 열풍 속에서 팔도 기생(1968), 팔도 사나이(1969), 팔도 검객(1970)을 감독하였다.


팔도 사나이는 서울에서 펼쳐지는 조폭 영화다. 줄거리는 매우 통속적이다. 의리의 사나이 호는 고아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설움을 당하면서 커서 무술 도장에 들어가 무술을 익힌 후 조선인들을 괴롭히는 일본 야쿠자들에게 맞서 팔도를 대표하는 조선인 폭력배들을 불러 모아 조선인 조직 폭력단을 결성해서 일본 야쿠자들과 싸워 이긴다.


당시 조폭 영화는 조폭대 조폭의 대결이라는 한계를 벗어 날 수 없었다. 검열에서 '잔인'의 사유로 금지 당하지 않으려면 조폭 영화에도 정권의 시책에 맞추어 계몽주의적 요소를 담아야 했다. 조폭 영화에 계몽주의 요소를 담기 위해서는 조선 조폭보다 더 나쁜 조폭이 존재해야 하기에, 결국 악역을 담당할 조폭은 공감대가 넓은 일본 야쿠자 밖에는 없었다. 따라서 이 무렵의 조폭 영화는 검열을 통과하려고 항상 민족주의로 사상 무장을 했다.


이런 관점에서 팔도강산 흥행몰이에 편승하여 김효천이 1969년에 감독한 팔도 사나이는 그냥 통속적인 조폭 영화들 가운데 하나였지 김두한을 염두해 두고 제작한 영화가 아니었다. 영화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조폭 영화에까지 민족주의를 심던 상황은 이후 조폭 영화의 전통이 되었다. 이 팔도 사나이를 1991년에 감독 편거영이 '팔도 사나이 91'로 다시 만들었는데, 역시 이 때에도 주인공은 김두한이 아니었다.

 

김두한을 소재로 한 최초의 영화는 김효천이 감독한 1974년에 나온 '실록 김두한'이다. 이후 협객 김두한(1975, 감독 김효천), 김두한과 서대문 1번지(1981, 감독 이혁수), 김두한 형 시라소니 형(1981, 감독 김효천), 장군의 아들(1990, 감독 임권택), 장군의 아들2(1991, 감독 임권택), 장군의 아들3(1992, 감독 임권택), 대명(1993, 감독 김정용)이 있다. 조폭 영화 감독 김효천이 김두한의 조폭 신화를 시작한 주요 인물이다. 이후 텔레비전 연속극으로는 야인시대(2002.07.29~2003.09.30)가 있다.

 

조폭 김두한을 소재로 삼은 조폭 영화는 확실히 특별했다. 일제 강점기에 실존했던 조폭 김두한을 소재로 삼음으로써 검열을 통과하려고 설정한 일본 야쿠자와의 대결이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관중이 받아들이게 하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는 검열을 통과하기 위한 민족주의 옷 입히기가 좀 더 자연스러워 보이게 했고 , 김두한이 진짜 김좌진의 아들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이 있더라도 어쨌든 법률상으로는 독립군 김좌진의 자식이라는 점이 관중 동원에서도 더 유리했다.


민족주의라는 겉옷을 걸친 조폭 영화에서 소재로 삼은 김두한과 갈등 관계인 일본 야쿠자 두목의 이름은 여러 개였다.


1974년에 나온 「실록 김두한」(감독 김효천)에서는 일본 야쿠자 두목의 이름은 『야마구찌(山口 산구)』였다. 이 영화는 1963년에 김두한이 연우 출판사에서 발간한 '피로 물든 건국 전야, 김두한 회고기'를 기반으로 해서 박창규가 각본을 썼다.


1975년에 나온 「협객 김두한」(감독 김효천)에서는 일본 야쿠자 두목의 이름은 『고노에(近衛 근위)』였다. 1981년에 나온 「김두한 형 시라소니 형」(감독 김효천)에서는 일본 야쿠자 두목의 이름은 1975년 영화 협객 김두한에 나오는 이름인 『고노에(近衛 근위)』로 같다.


1990년에 나온 「장군의 아들」(감독 임권택)에서는 일본 야쿠자 두목의 이름은 『하야시(林 임)』이었다. 「장군의 아들2」(1991)과 「장군의 아들3」(1992)에서도 일본 야쿠자 두목의 이름은 『하야시(林 임)』이었다. 장군의 아들을 김두한이 출연한 1969년 동양방송 라디오의 노변야화를 기반으로 하여 제작했기에 김두한이 말한 이름 그대로 일본 야쿠자 두목의 이름으로 하야시를 선택하였다.


김두한을 소재로 한 텔레비전 연속극 야인시대(2002.07.29~2003.09.30)도 야쿠자 두목의 이름을 하야시로 정하면서 이후 경성에서 활동한 일본 야쿠자 두목의 이름은 하야시로 굳어져 버렸다.

 

 

3. 민족주의를 이용하려고 김두한이 만든 가공 인물 하야시


1963년 김두한의 자서전에는 빨갱이 때려 죽이는 반공은 애국이라는 개념은 드러나 있지만, 일제 강점기의 민족주의는 없었다. 하다 못 해 일본 야쿠자에 맞서 조선 상인을 보호했다는 내용마저도 자서전에 아에 존재하지 않는다. 

 

김두한은 1963년에 발간한 자서전에서는 경성 야쿠자 두목 이름을 「와께지마」(分島 분도)라고 하였다.4 김두한은 사실 경성에 있던 일본 야쿠자 조직의 실체와 그 야쿠자 조직의 두목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두목 이름이 와께지마임을 자서전에서 밝혔다.5 그러다 1969년 동양방송 라디오 노변야화에 출연해서는 「하야시」(林 임)로 바꾸었으며,6 1970년 잡지 세대에 내가 휩쓸던 거리의 골목길이라는 기고에서도 「하야시」라고 하였다.7 

 

경성 야쿠자 두목의 이름을 실명 와께지마에서 지어 낸 이름 하야시로 바꾼 이유는 실존 단체 국수회와 장충단에서 하지도 않은 결투를 해서 이겼다고 거짓말을 해놨기 때문에 들통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 동시에 자신에게 민족주의를 부여하고 싶어하는 속셈에서 짜낸 속임수였다.

 

한편 김두한은 자신을 조폭이 아닌 협객으로 인정 받고 싶어 했다. 그래서 야쿠자를 조폭보다 차원이 높은 협객이라고 등급을 매겨 놓고서 자신도 야쿠자와 같은 위치에 있기에 자신 역시 협객이라는 식이다. 즉 장충단에서 야쿠자와 싸워서 이겼다는 거짓말을 집어 넣음으로써 협객인 야쿠자를 이기고 의형제를 맺은 자신도 협객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이다.

 

경성 야쿠자 두목의 이름이 하야시라는 주장은 김두한이 최초로 하였다. 그런데 하야시는 그 당시 현실에서 존재한 적이 없다. 하야시는 김두한이 민족주의를 이용하기 위해 설정한 가짜 인물이다.


김두한은 자서전을 발표한 이후에 영화의 힘과 민족주의 이용에도 눈을 떴다. 자서전을 발간한지 6년 후인 1969년 10월 21일과 23일 동양방송 라디오 노변야화에서는 같은 해 1969년에 상영한 팔도 사나이가 자신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라고 억지를 부렸다.8 박노식이 연기한 용팔이가 김무옥을 연기한 것이라고까지 주장한 것을 보면 김두한은 당시 조폭 영화에 흐르는 민족주의 덧씌우기를 의식적으로 느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9

 

1) 김두한이 지어낸 거짓말 장충단 결투

 

김두한은 1969년 10월 23일 동양방송 라디오 방송 노변야화에서 있지도 않았던 장충단 결투가 민족의 싸움이라고 스스로 규정함으로써 조폭 싸움을 민족간 투쟁으로 차원을 올리려고 하였다.10

 

김두한이 쓴 장충단 대결은 자서전에서부터 허구로 가득 찬 소설이다. 이후 계속 보완하기는 했지만 실제 전투 현실과도 전혀 맞지 않는 상상 속의 조악한 패싸움이었을 뿐이다.

 

김두한이 일본 야쿠자들과 싸우기로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는 밀림다방은 일제 강점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밀림다방은 6.25 전쟁 휴전 직후에야 서울 종로구 필동과 명동 등 여러 곳에서 생겼고, 명동 밀림다방은 1956년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 때 청부비용이 오간 장소였다.

 

또한 김두한 자신에게 장충단 혈투는 인생 최대의 결투였는데도 언제 장충단에서 일본 야쿠자들과 싸웠는지 그 시기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김두한이 조폭 두목이 되어 장충단에서 일본 야쿠자와 싸우려면 그 시기는 1943년 밖에는 없다. 

 

김두한이 24살 때인 1942년에는 친일단체 대동일진회에서 나이 40세의 마적 고희경을 여전히 두목으로 모시고 있었다.11 1944년 4월부터 해방될 때까지는 총독부 경무국의 관리 아래 친일단체 반도의용정신대에서 사상교육을 받아야 했기에 조폭 활동을 할 수 없었다. 해방 이후 1946년부터는 폭력을 쓰려는 정치판 이승만 일파의 부름을 받고 대한민주청년동맹에 소속해 정치 폭력을 휘둘러야 했다. 따라서 김두한이 구마적단 두목이 되려면 기회가 1943년과 1945년 하반기 밖에 없었다. 그런데 1943년에는 진짜 경성 야쿠자 두목은  김두한이 말한 50세쯤의 중년이 아니라 66세의 노인이었다. 더불어 친일단체 반도의용정신대가 결성될 무렵인 1943년과 1944년 이른 봄에도 김두한의 두목은 고희경이었다.

  

  1963년
자서전 
1969년
동양방송 노변야화 
1970년
잡지 세대 기고문 
 
싸운 연월일        인생 최대의 결투였는데도
언제 싸웠는지 밝히지 못함
참가 인원  3명
김두한,
김무옥, 문철한 
6명
 김두한,
김무옥, 문철한 외
 6명
김두한,
김무옥, 문철한 외
 
무     기 자루를 짧게 자른
곡갱이
쇠파이프,
권투선수화
쇠파이프,
스케이트 구두
 
방 어 구   복부
고무호스
복부
소방용 고무호스
김두한은 고무호스를
3겹 감으면 왠만한 칼은
안들어 간다고 비사실적 주장을 함
야쿠자의 무기 일본도 일본도, 곡갱이 일본도,
화재진압용 곡갱이
 
싸움 시작 시각  아침 6시   아침 6시  아침 6시  
싸운 시간   40분 30분  
참가한 야쿠자 수 15명 수십명    
쓰러진 야쿠자 수 18명 즐비함    
싸움 중지 야쿠자 두목이
그만이라고 외침
해가 뜨자 김두한이
주먹으로
대결하자고 말함
야쿠자 두목이
권총 3발 허공 발사
 
야쿠자 두목 집
방문시간
정오 12시 싸움 직후 함께 싸움 직후 함께  
야쿠자 두목 이름  와께지마  하야시  하야시   
야쿠자
두목의 나이  
  흰머리 50세쯤  흰머리 중년  분도주차랑은
1943년에 66세였음 
의형제   불응 맺음   맺음  말을 바꾼 이유는
협객인 야쿠자와
의형제를 맺은
 자신도 협객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임

 

 

 

2) 김두한 실제 싸움 실력

 

김두한의 실제 싸움 실력은 서울역 가대기(어깨에 짐을 지는 짐꾼)에게도 져서 무릎 꿇고 형님이라고 빌어서 살아 남은 수준이었다.12

 

해방후 남북한에 주둔한 미군과 소련군은 한반도를 38선으로 갈라 놓았다. 이로 인해 더 이상 철마는 북으로 달리지 못했다. 이 틈에 김두한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로를 뜯어다가 용수철 만드는 공장에 넘겨서 돈을 벌려고 하였다. 김두한은 만만한 서울역 가대기들을 협박하여 철로를 뜯어 오게 시켰다. 한 가대기가 거절하자 1대1 싸움을 걸었고, 염천교 아래서 싸움이 시작되었다. 김두한이 번개처럼 발길질을 해오자 그 가대기는 슬쩍 비키면서 파고 들어 두 손으로 김두한의 멱살과 허리춤을 움켜 쥐고 무릎치기로 김두한의 가랑이를 밀어 올리면서 머리 위로 들어 올려서 빙글 빙글 돌며 철로 위에다 패대기 치려고 하자 김두한은 허공에서 내려 달라고 빌었다. 그 가대기가 내려주자 김두한은 무릎 꿇고 빌라는 가대기의 말에 군말 없이 즉시 무릎 꿇고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김두한의 실제 싸움을 후에 통일 운동가가 되는 어린 백기완이 급성폐렴에 걸린채 목격하였다.

 

김두한은 그 가대기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가 대한민주청년동맹 감찰부장이 되자 패거리를 데리고 가서 위협하여 끌고 갔다. 대한민주청년동맹 시절 김두한과 그 핵심 부하들은 권총 한 자루씩 들고 다니면서 권총으로 사람들을 위협하였다. 김두한을 1대1 싸움에서 무릎 꿇린 서울역 그 가대기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김두한은 1대1 싸움에서 한 번도 져 본적 없다는 거짓말을 죽을 때까지 하였다.

 

김두한은 1972년 11월 21일 09시 05분에 혼외관계로 동거하던 정릉에 있는 박정인의 집에서 54세에 뇌출혈로 죽었다. 김두한 밑에서 함께 깡패로 살았다고 주장하는 김동회의 발언에 따르면 김두한 사망 4~5개월전인 1972년 6~7월에 종로 금봉빌딩 3층 사무실 앞에 있던 곰탕집 하동관에서 식사 도중에 뇌출혈로 오른 손이 마비되어 충무로 앞 노박사 병원13, 청구동 이박사 병원, 화신 백화점 뒤 장박사 병원을 거쳐, 성모병원에 입원하여 개인적으로 불러 들인 50대 여성 침술가에게 침을 맞고 퇴원하였다고 한다. 김두한은 6월에 뇌출혈에 의한 중풍 증상으로 성모병원에 입원하였다.

 

김두한은 성모병원에 침 놓는 여자를 불러 들여 침을 맞았다. 설령 침 시술을 받아서 호전되었다고 김두한이 믿었다고 해도, 뇌출혈을 침술로 치료할 수 없다. 김두한은 다섯달 뒤인 1972년 11월 18일 09시에 걸려 온 중앙정보부 요원의 전화를 받고 10시에 집을 나서 약속 장소인 청계천 3가에 있는 센트럴호텔에 도착하여 중정 요원과 긴 시간 동안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토하면서 쓰러졌다. 김두한은 302호로 옮겨서 누워 있다가 상태가 좋아지지 않자 18시경 서대문구 고려병원14 응급실에 도착하여 혼수상태에 빠져서 산소호흡기를 착용하였다. 그런데 토요일이라서 병원 의사들이 모두 퇴근하였고, 일요일은 휴일이라서 출근하지 않았다. 이로 보아 입원 즉시 연락 받고 고려병원에 온 김두한 불륜녀 박정인은 김두한의 상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다른 병원으로 옮기지 않고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면서 방치하였다. 이틀 뒤인 20일 월요일에 출근한 의사들중 손관수가 김두한의 상태를 살폈다. 혈압이 무려 260mmHg이나 되었다. 손관수는 09시 20분 김두한이 쓰러지던 당시의 상황 설명을 듣고 바로 뇌출혈을 의심하여 김두한의 몸을 뒤집어 목 뒤 척추에 주사기를 꽂아 빨아 올려서 피가 솟아 나오자, 뇌출혈로 진단하였다. 당시에는 척추에 주사기를 꽂고 빨아 들여 피가 나오면 뇌출혈로 판단하였는데 정확도가 90%였다. 손관수는 김두한의 상태가 심각하여 회생불가 판정을 내리고 퇴원하여 임종 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김두한은 다음 날 오전 동거녀 박정인의 집에서 사망하였다.

 

김두한의 사망원인인 뇌출혈에 대해서 일부에서는 얼토당토 않은 거짓 억지들을 늘어 놓으면서 김두한을 정치 권력의 희생냥으로 둔갑시키려고 하였다. 불륜 관계였던 박정인은 김두한이 중앙정보부원에게 뒷통수 공격을 받았다는 식으로 주장하면서 사망 2개월 전인 9월에도 무교동 맘모스 호텔에서도 뒷통수 공격을 당해 피를 흘렸다고 하였다. 자칭 폭력배 김두한의 후계자라고 하던 폭력배 조일환은 김두한이 수 차례 뒷통수 공격을 받았으며, 사망 10여일 전에도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친하게 지내 온 사람에게서 자택 부근에서 뒷통수를 가격 당하였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조일환은 누가 뒷통수를 때렸는지 알고 있다는 거짓말을 하였기에 막상 죽을 때도 누구인지 밝히지 못하였다. 정작 김두한 사망 직전 담당의였던 손관수는 2002년 11월 첫째 주에 그 당시 김두한의 몸에서 사망 원인이 될 수 있는 외상을 발견하지 못 했다고 언론에 밝혔다. 조일환의 주장대로 사망 10여일 전에도 뇌출혈을 유발할만큼 심하게 뒷통수 공격을 당했다면 열흘쯤 뒤에도 그 상흔이 남아 있어야 정상이지만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 손관수는 김두한의 몸에 칼자국 등 많은 오래 된 흉터들은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이는 김두한이 결투에서 많이 맞았다는 뜻이다. 아니면 겁을 주기 위해 일부러 만든 자해흔일 수도 있다.

 

또한 상식적으로 주먹황제라고 하던 김두한이 한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 뒷통수 공격을 허용했다면 주먹황제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조심성도 없고, 싸움 실력도 형편 없었다는 소리가 된다. 보통 이런 경우 경호를 해줄 부하들을 늘리는 것이 상식인데도 여전히 혼자 다녔다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싸움에 자신이 있어서 혼자 다니면서 한 번은 뒷통수 공격을 허용했다고 쳐도 그 뒤로는 본능적으로 방비하면서 다니게 되는데도 김두한이 계속 뒷통수만 공격 당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나아가 김두한의 뒷통수만 노려서 가격에 성공한 사람들은 김두한보다 더 몸이 빠르고 더 강력한 타격력을 가졌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뒷통수를 가격 당해 힘이 빠진 김두한을 그 자리에서 더 짓밟지 딱 한 대씩만 때리고 도망칠 이유가 없다.

 

김두한이 뇌출혈을 겪은 요인으로 정치 깡패로 활동하면서 머리를 다친 것들도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김두한은 정치 깡패로 뛰던 시기인 1947년 2월 24일 오후 4시경 기독교 단체 관련 집단 패싸움 중에 상대방이 던진 돌에 맞아 머리에 피를 흘리는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각목을 든 정치 깡패들의 패싸움도 발생하였다. 이러한 여러 상황에서 당한 두부 외상들이 누적되어 뇌출혈을 불러 왔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김두한은 국회 분뇨 투척 사건으로 투옥 되었을 때 병 보석으로 풀려 나려고 소금이 고혈압을 유발한다고 믿고 소금을 불법으로 밀반입하여 대량으로 섭취했다. 소금 섭취와 고혈압은 상관 관계가 없다, 김두한은 평소에 심각하게 높은 고혈압 상태로 생활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김두한은 1966년 12월 21일에 고혈압에 의한 신장염을 원인으로 한 병보석 판결을 받았다. 권력의 희생냥이었다면 이러한 농간을 부렸다고 해서 쉽게 병 보석으로 풀려 나지 못하였다.

 


4. 경성 야쿠자 두목 와께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


국수회(國粹會 고쿠스이파)는 동경의 대동(臺東 다이토), 육본목(六本木 롯폰기), 은좌(銀座 긴자)를 주요 기반으로 하는 일본내 소규모 야쿠자 조직이었다.

 

와께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 이하 분도주차랑)는 송본가태랑(松本嘉太朗 마쓰모토 카타로)과 함께 1922년 12월 22일 경성부 신당정 427번지에 주소지를 둔, 황실중심주의로 동지를 규합하여 사회 개선 등의 활동을 함을 목적으로  내세운, 국수회 조선본부를 설립하였다.15 국수회 조선본부 간사장 분도주차랑은 문화 사업을 담당하였으며, 국수회 조선본부 상임이사 송본가태랑은 토목 사업을 담당하여 이권을 추구하였다.16

 

분도주차랑은 온 힘을 다해 국수회 조선본부를 설립하는데 성공하여 간사장이 되었으나, 국수회 부회장 선임 과정에서 내분이 발생하여 1923년 8월 상순경에 국수회 자하현 본부장 길정천대길(吉井千代吉 요시이 치요키치)이 동경 총본부 회장 대리로 경성에 파견 나와 기존 간부들을 전부 해임하고, 수리사업 회사인 황금사 중역 도변정일랑(渡邊定一郞 와타나베 사다이치로)을 국수회 조선본부장에 임명하였다.17

 

이에 반발한 분도주차랑(46)은 동년 9월 14일 오전에  판동청일랑(板東淸一郞)(37), 신전우일(新前宇一)(24), 소야학태랑(小野鶴太郞)(24)과 함께 조선호텔에서 이발을 하고 나오던 도변정일랑(52)과 시비를 벌여 전치 8주의 자상과 타박상을 입히고, 왼쪽 눈을 실명시키고 자수하였다.18


도변정일랑 폭행 사건을 계기로 분도주차랑은 확고하게 국수회 조선본부를 장악하게 되었다. 분도주차랑은 1925년 8월 16일 장곡천정 공회당에서 열린 4개 사상단체 강연회에서 사회주의자 중서이지조(中西伊之助)가 인간예찬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던 중 3차례나 감시하러 나온 경찰관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부인하는 주장을 하면서 남묘호렌게쿄교를 비판하자, 내려 오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부하들을 동원해서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강연회를 무산시키는 등 권력과 손을 잡았다.19

 

그런데 1932년에는 반대로 조선인 사회주의 연극단인 신건설이 돈이 없어서 서부 전선 이상없다를 공연하지 못하고 있자 분도주차량은 공연할 수 있게 도와 주었다.20


1929년에는 한 일본인 공예회사가 직원들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않아서 인부 40여명이 회사에 모여 경성역 앞 탑 건설과 길거리 장식 공사 노역비를 달라고 하자 그 공예회사는 분도주차랑에게 전화를 하였고, 분도주차랑은 부하를 보내 위협하여 해산시켰다가 검찰에 송치되기도 하는 등 기업들로부터 폭력 청부를 맡기도 하였다.21


분도주차랑은 경성에서 영화 제작업을 주로 하였다. 1930년 경성촬영소를 설립하여 조선인 감독을 통해서 방아타령(1931, 신흥프로덕션), 전과자(1934), 아리랑 고개(1935), 미몽(1936), 장화홍련전(1936), 홍길동전(1936), 오몽녀(1937) 등 수 많은 조선 영화를 제작하였으며, 특히 한국 최초의 발성 영화인 춘향전을 1935년에 제작하였다.


1931년에는 영화협회인 경성흥행협회가 창설되자 초대 회장을 맡았고,22 1936년 일본 대판(大阪 오사카)시의 특고과에서 대판에 사는 조선인들의 일본화에 방해가 된다면서 대판내 조선영화 상영을 금지하자 철회 운동에 앞장 섰다.23 이는 조선인에 대한 이해보다는 자신의 영화 사업에 대한 타격을 우려해서였다.


1935년에는 겨우 4천원을 들고 극장 설립을 하려고 한다면서 도와 달라고 찾아 온 홍순언 배구자 연극인 부부에게 상업은행을 연결해 줘 19만5천원을 빌릴 수 있게 도움을 줘서 동양극장이 탄생하게 되었다.24

 

궁리와 생각 끝에 그 돈 4천원을 들고 찾아간 곳이 「분도」라는 일인이었다. 「분도」란 그때 「와께지마」라 해서 경성극장, 경성촬영소를 가지고 있던 흥행사로서 서울내지 전반도에 세력을 펴고 있던「야꾸자」의 「오야봉」(親分)이었다. 이 일본인들의 「야꾸자」란 좋게 말해서 정치적 낭인이요, 나쁘게 말해서 깡패인데 우리가 말하는 들치기, 날치기 깡패는 아니다. 「오야봉」이란 두목이란 말인데 두목과 「오야봉」과는 「맛」과 「멋」이 다르다. 이 「야꾸자」를 「낭인」이라고 치고 일본적인 「오야봉」은 정치 낭인 두산만을 그 「오야봉」의 「오야봉」으로 칠 수가 있다. 이 낭인에도 계통이 있어서 족보를 따지게 된다. 가령 관서의 어느 파의 낭인이 관동 어느 파의 낭인을 찾아 갔을 때 그 찾아간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징기오기루』라는 제 신원을 밝히는 법이다. 그러면 이쪽에서는 그 신원을 듣고 난 다음 환대를 하거나 칼을 빼거나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무라이」일본의 한 풍류인데 이것이 「분도」라는「와께지마」에게 묻어 와서 서울에서 「오야봉」노릇을 했다. 돈 4천원을 손에 쥔 의주 출생 홍순언이란 「조센징」이 이「와께지마」를 찾아가서 자기의 포부를 말한 다음 그 돈 4천원을 「와께지마」앞에 내놓았다. 이 「야꾸자」요, 낭인의 「오야봉」인 「와께지마」는 서울에 앉아서 판을 치는 대흥행사이기도 했다. 그래서 「와께지마」의 『요로시』 한마디로 이야기가 성립되어서 서대문 고개 비탈길에 터가 마련되어 동양극장이 지어지는데 그 홍순언의 4천원이 밑천이 되어서 상업은행에서 19만5천원의 대부를 받아서 순연극 전문극장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 박진, 일본서 이름 날린 3류급 소녀가극단도 경영, 세세년년: 한국의 연극 비장의 화제, 경화출판사 1966


흥행업에 종사하던 분도주차랑은 전시동원 체제에 접어 들면서는 1938년 4월에 총독부의 종합선전 총동원에 실행위원을 맡았으며,25 전월 3월에는 자신의 분도흥업부 소속 연예부원 뿐만 아니라 만담가, 가수, 한성권번 등과 계약하여 육군병원에서 부상병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펼쳤었다.26

 

분도주차랑은 경성촬영소와 경성극장을 소유한 상태에서 철원에 있던 낡은 극장을 인수해서 2만원을 들여 증축하여 1939년 10월 25일 오후 3시에 다시 극장 문을 열기도 하였다.27


1942년 여름에는 가수, 무용수, 만담가, 나니와부시 가수 등 분도흥업부 소속 공연단을 이끌고 만주 일본군을 위문하는 순회공연에 나섰다.28 1943년에는 일본 씨름 협회 경성 대회도 주관하였다.29 1943년 이때 분도주차랑의 나이는 어느 덧 66세가 되었다.

 

5. 한반도 토목 건축 사업 복마전


이익이 큰 토목 건축이 조선에서도 크게 일어나자 일본인 건설 업자들이 경성에 몰려 들었다. 토목담합사건 예심 결정서에 등장하는 건설업체들만 해도 그 수가 엄청나다.


토목담합사건 예심 결정서 1. 토목건축청부업 법화진정장(49), 동 법화진토태랑(62), 동 암기계육(56), 동 파칠태랑(52), 동 좌등외길(57), 동 전부봉지조(64), 동 진야금차랑(47), 동 지전각평(59), 동 궁본태조(49), 동 좌등복태랑(42), ○○○동 천뢰수평(38), 동 전중반사랑(62), 무직 소전문응(43), 경성부건축기사 구전덕삼랑(48), 동기수 장곡천진작(31), 경성신문사지배인 화전저삼랑(46), 이육신문 경성지국장 이궁수(40), 토목건축청부업 ○○○○○○회사원 정상삼치랑(48), 토목건축청부업 암촌조 목재상, 유선탄광주 암촌장시(52), 신곡조 성출정웅(43), 동 암하진일(39), 철도공업회사 우산작태랑(45), 조선 유마조 빈보좌지조(48), 서송조 서송원길(58), 서송조 전중강일(36), 삼택조 서천박(56), 토목건축 진내무청부업 진내조 굴내만길(60), 삼(43), 근강조 근강상길(69), 아천조 강부신태랑(61), 황해사 도변정일랑(61), 황해사 복도우이(44), 남견조 하촌중행(45), 남견조 광강현차랑(35), 송본조 수전훈삼(47), ○○○ ○○○○○○○○ 송본조 아부희지조(49), 지기공업주식회사 미촌가평(52), 대림조 다라보(48), 대림조 중도일랑(39), 강조 죽내정지(42), 고영조 고영경일(48), 고영조 산구행삼랑(33), 곡구조 곡구소차랑(65), 비도조 총본공사(44), 진전조 진전풍삼(35), 중촌조 중촌번작(48), 내전조 내전원치랑(55), 녹도조 해야비응(43), 성양사 포전다희인(69), 야촌조 야촌청차랑(55), 산기조 굴내조 산기승일랑(41), 간시조 산기무태랑(50), 대창토목주식회사 양천소시(62), 동 상 소야일삼(52), ○○○ ○○○○○ 전전조 전전평태(60), 전전조 경산일치(49), 계전조 계전승차랑(54), 소삼조 등전민웅(35), 장문조 오도영장(65), 장문조 주길구희(45), 삼목합자회사 소사충행(57), 삼목합자회사 매미행관(52), 용산 소사조 소사언병위(57), 후등공업합자회사 후등호웅(67), 황정조 황정초대랑(65), 황정조 환산충작(62), 황정도 삼정문사(41), 유원조 유원이평(56), 추산조 추산독차(46), 간조 청목덕삼랑(62), 간조 삼포청해(55), 간조 일궁근장(38), 경성토목합자회사 ○○○○○○○ 일본공업합자회사 판서수광(53), 수곡조 수곡암송(59), 웅성조 시지주조(52), 웅성조 송정구길(49), 시전조 시전령오랑(57), 시전조 고지종십랑(45), 중앙토목합자회사 하연수장(43), 서본조 천전수이(47), 서본조 팔도뇌장(54), 수수목조 수수목권차랑(58), 말길조 농업 말길정십(60), 법화진정장이하 소전문웅까지의 십사명에 대한 증회, 구전덕삼랑 급 장곡전진작에 대한 수회, 화전저삼랑 급 이궁수에 대한 공갈, 소사충행 급 매미행관에 대한 증회 급 사기, 기 여 68명에 대한 사기 피고 사건에 대하여 예심을 좌와 여히 결정함. 주문. ○○○○○○○○○○○피고사건에 대하여는 차를 면소함 이여의 피고인에 대한 본건을 차를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부함. 이유 제일 증수회 피고인 구전덕삼랑은 명치 43년 3월 20일 명 고옥고등업 학교 건축과 졸업후 육군성 방면에 봉직하여 대정 11년 5월 3일 경성 토목기사에 피명되어 기후 제도의 개정에 의하여 대정 ○년 6월 30일 동부 건축기사에 임하고, 내무과에 속하여 영선계장은 이래 소화 7년 4월 18일 의원퇴직이 되기까지 계속하여 동 부 영선계장으로서 영선에 관한 사항 병 첨부 공사의 기성부분 급 준공의 검사 등에 관하여 일절을 지휘감독 ○○○○○○.
- 동아일보 1932. 11. 01


1919년 조선토목건축협회 설립 당시 전형위원이었으며,30 1922년 야쿠자 조직 국수회 조선본부 상임이사이자  토목청부업자 송본가태랑(松本嘉太郞 마쓰모토 카타로)이 토목 건설 청부업체 선정에 개입하여 지속적으로 이익을 취했다. 송본가태랑은 자선단체 동인회를 조직하여 토목청부업자들에게서 청부액 1만원당 7원50전씩 수수료를 받아 왔으며, 주주총회에도 개입하였다.31  중간 하청을 받아 노동자들의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착복하기도 하였다.32 결국 1931년 송본가태랑(46)는 채권 채무에 관여하여 권총으로 위협하며 해결해 주다가 폭력 행위 등으로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33

 

 

6. 김두한 폭력단 수준의 일본인 폭력단


일본인 조폭에는 굵직 굵직한 건설 이권에 개입하는 자나 사업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김두한처럼 술집에서 행패나 부리는 일본인 조폭도 있었다.

 

1937년 6월 이태원정 456번지 야구삼랑(野口三郞)(24), 이태원정 455번지 일뢰진(一瀨進)(24) 등 7명은 동경 은좌 등지에서 공갈협박을 일삼다가 체포되어 처벌 받은 뒤 만주 봉천으로 건너 가 공갈협박을 계속하다가 추방당하자 경성에 들어와 여관에 투숙하면서 카페, 식당 등에서 무전취식을 하면서 수만명의 조직원을 가진 혈맹단 경성지부단이라는 공갈과 협박을 하면서 폭력을 행사하다가 체포되었다.34

 


7.  허구 인물 하야시를 실존 인물 선우영빈이라고 거짓말 한 김동회


김두한이 지어 낸 가공 인물인 하야시를 실존 인물 선우영빈으로 둔갑시킨 사람은 자칭 김두한의 주먹 친구라고 하던 김동회였다.


해설자: 후에 김두한과 우정이 돈독해지면서 하야시패를 떠나 김두한패에 가담하기도 하는데, 하지만 그가 하야시패의 중간 보스로 활약할 무렵 하야시의 세력은 대단했다. 집안의 식객만도 40명이나 됐다는 조선내 일본 야쿠자 조직 우두머리 하야시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김동회: 한국 분, 평안도 사람이야. 선우영빈. 한국으로 하면 선우영빈씨고, 일본 말로 창씨를 하야시지. 그 양반이 어려서 일본을 들어 갔어, 부모를 따라서. 그래 가지고 일본에서 모든 걸 배웠어. 일본서, 일본서 성장하면서 일본 그 즉 말하자면 야쿠자 두산만이, 두산만이 밑에서 일을 봤단 말이야.

 

김동회: 정무부장(정무총감)이, 그 사람이 이제 지금 그 총리나 마찬가지지. 그 사람도 하야시가 부르면 와. 저녁이면 술자리 같이 하고 놀다 가고. 그런 정도로 파워가 있다고 봐야지. 그러니까 지금 뭐 서장 정도는 문안 안 올 수가 없는 거지.


김동회: 지금 예를 들어서 양복점 같은 거 할라면 몇 억을 줘야 하나 차릴 거 아니겠소. 그 때도 이제 액면은 적지만 그런 정도의 뭐를 하나 차려서 이제 나를, 식생활은 자연적으로 해결이 되잖아. 자기가 나를 안 도와줘도. 그러니까 자기 일 봐줄 수 있는 거지. 그렇게 안정을 시켜놓고 하니까 당연히 그 형님의 말을 안 들을 수가 없지.


김동회: 지금 중앙우체국 앞에 그 전에는 거기가 자전거가 수백대 이렇게 있어요. 그 때는 자전거 밖에 없었으니까. 자동차라는 건 몇 대 없었고. 그 거 한 대 맡기면 예를 들어서 10원을 받든, 100원을 받든 수입이 몇 백대 하면 그저 들어가고 나오고 수입이 그 게 노다지야. 거 기가. 그 노다지를 우린 줬으니까. 두한이한테 넘겨 줬어. 니가 운영해라. 표시로 그 거 해주쇼, 내가 원했고. 그래서 형님, 동생이 된 거야. [김두한하고 하야시가요?] 어, 어. 형님 동생이 되어 가지고, 술 자리도 같이 나누고, 그 때부터는 완전히 친해졌지.  

 - 깡패와 건달로 본 대한민국 100년, MBC, 1999


김두한이 만들어낸 가짜 인물 하야시를 실존인물 선우영빈으로 바꿔치기한 김동회의 말 역시 사실일 수 없다.


우선 두산만(豆山滿)의 현양사(玄洋社) 세력은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에 진출한 적이 없다. 현양사는 1895년 10월 8일 민비 시해를 실행한 집단이었기에 한반도에서의 민심 악화 및 무장 항쟁을 야기할 수 있었던 탓에 한반도에 진출할 수 없었다. 또한 현양사가 조선총독부와 대립관계였기에 한국 진출을 더욱 허용하지 않았다.

 

두산만의 현양사와 내전양평(內田良平)의 흑룡회가 손을 잡고 일본 동경에서 만든 동광회(同光會)가 1922년 2월에 경성에 총지부를 설치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동광회는 야쿠자 조직이 아니라 친일 정치 조직으로서 친일파 박영효를 회장에 앉힐 계획이었으나 뜻대로 안 되자 친일파 이희간을 회장에 앉혀 총독부와 힘겨루기를 하다가 총독부가 내정독립기성회를 해산시키자 덩달아 급속도로 힘이 쇠약해져 동년 10월에 스스로 해체하였다.


경성 야쿠자 두목 분도주차랑의 검은 힘은 국수회 내분 때 국수회 동경 총본부에서 파견한 길정천대길이 자신을 조선본부 간사장에서 해임하고, 대신 도변정일랑을 조선본부장에 앉히자 분개하여 도변정일랑에게 전치 8주의 폭력을 행사하고 바로 경찰에 자수한대서 볼 수 있듯이 정무총감은 커녕 경찰서장 한명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국수회 동경 총본부의 지시로 분도주차랑을 제치고 국수회 조선본부장이 되었다가 분도주차랑에게 폭행당하고 물러 난 도변정일랑도 전형적인 야쿠자가 아니었다. 도변정일랑은 1922년에는 경성미술구락부 이사를 맡아 골동품 거래에 개입하였고,35 폭행 당하던 당시에는 수리사업 회사인 황금사 중역이었으며, 1926년에는 경성상업회의소 회장이 되었다.36 황해사라는 건설회사를 설립한 도변정일랑은 1930년대에는 60대의 나이에도 불법 담합 및 사기 등으로 여러 차례 경찰의 수사를 받았다.37


시간이 흐를수록 분도주차랑은 영화와 공연, 극장 등 주력하던 흥행업이 성공 가두를 달리면서 막대한 돈을 벌게 되자 기업인들과의 교제 폭을 넓히면서 정치 거물과도 친분을 쌓게 되어 폭력에서 점점 멀어졌다.


김동회는 자전거 보관소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하였다. 1940년 본정 경찰서 통계를 보면 1년 동안 4,200대의 자전거 도난 신고가 접수되었는데, 중앙우편국 앞 450대, 경성역 300대, 삼월 앞 250대, 천자옥 앞 230대, 경성부청 앞 210대, 조선은행 앞 150대, 나머지 관청과 회사들 앞이었다. 38


이에 본정 경찰서장은 1941년 3월 '공인 자전거 예소'를 중앙우편국, 경성역, 삼월 앞, 천자옥 앞, 경성부청 앞, 조선은행 앞에 설치하여 상임 간수를 배치하기로 하고, 1대당 2전씩을 보관료로 책정하였다.39 다음 달 4월에 공식적으로 공인 자전거 보관소 제도를 실시하였으며, 차차 회수권 제도를 도입하기로 하였는데, 경성역 앞 공인 자전거 보관소는 본정 경찰서에서 관리하지 않고 경성역 직영으로 해서 5전씩 받는 것을 허용하였다.40 따라서 본정 경찰서가 상임 간수를 임명하여 직접 관리하고 있는 공인 자전거 보관소를 조폭 김두한이 개인적으로 관리했다는 김동회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만약 김두한이 중앙우편국 자전거 보관소를 차지했다고 한다면, 일본 패망후 일본 경찰이 철수하고 나서 무주공산이 된 뒤였겠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본정 경찰서의 교통법 위반 단속을 내세운 집행 강제성이 있었지만, 해방 후에는 자전거 보관소에 자전거를 맡겨야 한다는 법률적 강제성이 사라졌기에 시민들이 조폭 김두한이 차지한 자전거 보관소에 돈을 내고 자전거를 맡길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8. 야시장 경매업으로 시작해서 건설회사를 세운 사업가 선우영빈


사업가 선우영빈은 김동회의 거짓말 때문에 엉뚱하게 평생 한 번 해 본 적이 없는 경성 야쿠자 두목이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몇 차례 선우영빈을 언급하는 기사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대한연감 단기4288년(1955년)편 684쪽에 따르면 선우영빈은 1909년 7월 25일생으로 평안남도에서 출생하였고, 일본 중앙대학을 졸업했으며, 건설산업주식회사 사장에 이어 일본 삼영무역주식회사 사장을 역임한 후, 1954년 11월 30일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1가 7번지가 주소지이고, 서울국제시장 주식회사 부사장으로 재직중이었다.

 

선우영빈은 나이가 김두한보다 9살 밖에 더 많지 않다. 따라서 김두한이 20대 초반의 나이 일때 하야시의 나이를 50대라고 설정하였으니 선우영빈은 하야시가 결코 될 수 없다.

 

선우영빈이 살인 사건에 연루된 기사가 일제 강점기에 남긴 공식적인 삶의 흔적이다. 1936년 7월 4일 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 수산리 929번지 선우영빈(23)은 평산원의(49), 고교홀일(22)과  대구 중앙통 야시장에서 경매업을 하다가 알게 된 지역 주민 동성정 78번지 원민남(29)이 자꾸만 돈을 요구하기에 없애버리기로 공모하던 중 당일 밤 10시경 원민남이 또 찾아와 돈을 요구하였고, 이에 격분한 고교홀일이 사람이 붐비는 야시장 아스팔트 도로 현장에서 칼로 살해하고 말았다.41


물론 선우영빈이 1909년생으로 1936년 당시 27살로 신문이 알린 23살보다는 더 나이가 많아 4살 차이가 나지만, 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 수산리 선우씨 집성촌에 동명이인 선우영빈이 2명일리는 없다.42 

 

선우영빈이 대구 중앙통 야시장에서 일본인들과 함께 경매업을 한 것으로 보아, 일본 중앙대학을 나왔다는 것을 검증할 수는 없으나, 최소한 일본어로 소통을 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자본도 함께 한 일본인 사업가들만큼 갖고 있었다. 선우영빈은 경매업으로 돈을 벌어서 서울시 중구 충무로에서 여관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43 

 

해방 전인지 해방 후인지는 시기가 불분명하지만  건설산업이라는 건설회사를 설립해 경영하였다.44

 

해방을 맞이하고 나서, 1919년 전국민의 3.1 독립만세 운동 염원을 모아 대한제국을 계승한 대한민국을 건국하고서 망명정부로서 임시 정부를 상해에 임시 배치하고서 독립운동을 하던 임시 정부의 법통을 이어 정식 정부를 수립한 이후, 6.25 남침이 있자 부산으로 피난 가서 삼영무역 주식회사를 차려서 일본을 오가며 무역업을 하였다. 이 때 선우영빈은 여동생의 소개로 정씨를 부인으로 맞아 결혼식을 올렸다.45 족보에 정씨를 부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46 둘 사이에 5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47


휴전후 선우영빈은 서울 국제시장 주식회사 부사장을 맡았다. 서울 국제시장 주식회사는 서울시가 1953년 가을부터 구상한 재건복구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 안 동대문, 남대문, 오장동(충무로 5가)에 각각 3억환씩을 투입하여 신설하는 현대식 시장 건설 계획에서 오장동에 새롭게 건설할 2층짜리 상가를 갖춘 대형 시장이었다.48


선우영빈은 서울시 중구 명동1가 7번지에 16층짜리 건물을 짓고 1956년 7월 건설산업이라는 건설회사를 다시 설립하였다.49 선우영빈의 부인은 태양빌딩이라고 불렀다고 하였으며,50 지금은 이름이 태흥빌딩이다.


1958년 2월 1일 자유당에 서울시 중구 갑 공천후보 등록을 하였다.51 1958년 3월 외자청이 추진한 잉여농산물 대맥 도입에 뛰어 들어 9,500톤을 낙찰 받았다.52 1959년 5월 서울시 수상경기연맹 부회장이 되었다.53 1960년에 대한건설협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54 1962년 9월에는 한전 전기시험소 신축을 맡아서 하던 중 공사장 현장에서 인부가 낙하한 시멘트 덩어리에 맞아 즉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55 1964년 9월 남강댐 방수로 입찰 과정에서 경쟁회사 제일건설의 사장을 납치 감금 위협하여 입찰을 포기하게 만든 혐의로 12월에 구속되기도 하였다.56 1968년 6월 21일에 건설협회 초대 서울지부장에 선출되어 2대까지 연임하였고,57 1969년 10월 28일에 건설공제조합 운영위원에 선정되었으며,58 1970년 2월 12일 건설협회 이사에 선임되었다.59 1974년 8월 15일 광복절에 서울 지하철 공사에 참여한 공로로 지하철 유공자로 선정되어 철탑산업 훈장을 수여 받았다. 60


선우영빈은 부인이 질병을 얻자 용인으로 이사하였으며, 용인으로 이사한지 몇 년되지 않은 1978년 무렵 선우영빈은 피곤하다고 자리에 누운 후 10여분 뒤에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다.61 신문에 1977년까지만 건설산업 기사가 실린 것으로 보아 선우영빈이 1978년 무렵에 사망했다는 부인 정씨의 말이 맞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부인 정씨는 회사를 정리하고 종교 시설 및 수련원을 설립하였으며, 자녀들이 모두 출가하자 남은 재산마저 모두 자신의 기독교 종교재단에 투입하였다.

 

결론적으로 하야시는 김두한이 지어 낸 자서전 속의 배역일 뿐 실존한 적이 없다.

 

 

 

 

  1. 이순진, 냉전체제의 문화논리와 한국영화의 존재방식: 영화 오발탄의 검열과정을 중심으로, 기억과 전망 통권 29호 2013 겨울호, 393~396쪽, 박정희는 쿠데타 발발로부터 불과 일주일이 경과한 1961년 5월 23일 내무부에서 문교부로 불순영화 금영조치 요망에 대한 여론 보고라는 제목의 문건이 전해졌다. 이 문건은 4.19 이후 영화검열 제도의 폐기에 편승하여 영리에만 몰두하는 업자들이 제작, 수입한 도덕적 사상적 불건건한 영화를 일제히 재검열하여 제한 내지 몰수처분해야 한다는 여론을 전하면서 1958년 이후 상영된 영화들 가운데 재검열 대상을 적시하고 있다. 1961년 5월 23일 오발탄 검열서류철에서 재구성. 국내영화: 돈(사상불순, 자본주의 배격), 아름다운 악녀(사회풍기), 지옥화(사회풍기), 마도의 향불(사회풍기), 초설(사회문란), 사십대의 여인(사회풍기), 길 잃은 사람들(사회문란), 어디로 갈까(사회문란), 종말 없는 비극(사회문란), 오 내 고향(사상불순), 훌쭉이 뚱뚱이 논산훈련소에 가다(사회 및 군기 문란), 고바우(사회문란), 조춘(사회풍기), 내가 낳은 검둥이(사회문란, 사상불순), 젊은 안해(사회풍기), 춘희(사회불합리), 10대의 반항(사회문란), 72호의 죄수(사회문란),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사상불순), 영광의 침실(사회풍기), 피 묻은 대결(사회문란), 카츄사(사회불합리), 철조망(사상불순), 백백교(사회문란), 투명인의 최후(사회불합리), 제 멋대로(사회풍기), 하녀(사회풍기), 한 많은 강(사상불순), 백주의 암흑(사회문란), 아아 백범 김구선생(사상왜곡), 마부(사상불순), 오발탄(사상불순), 쟌발쟌(사회불합리), 3등 과장(사회문란), 외국영화: 템페스트(사상불순, 적성국 유고 현재), 차타레이 부인의 사랑(사회풍기, 유부녀의 음란), 젊은 연인들(사상불순, 적색국과 자유국 간의 대사관), 로마의 여성(사회풍기, 윤락관계), 적과 흑(사회풍기), 위기의 순간(사회풍기), 아들과 여인(사회풍기), 열쇠구멍(사회풍기, 의부와의 불의, 잔인), 연인들(사회풍기, 사회문란), 호세와 칼멘(사회풍기), 폭력교실(사회풍기, 반윤리), 비비 자유부인(사회풍기, 반윤리), 무정 7번가(사회풍기), 젊은 육체들(사회풍기, 소녀의 방탕), 뜨거운 것이 좋아(사회풍기), 위험한 고빗길(사회풍기), 피서지에서 생긴 일(사회풍기, 반윤리), 여성은 노예가 아니다(사회풍기), 여성은 한번 승부한다(사회풍기),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사상불순), 복면의 약탈자(사회문란, 잔인), 불란서 여성과 연애(사회풍기). [본문으로]
  2. 이순진, 냉전체제의 문화논리와 한국영화의 존재방식: 영화 오발탄의 검열과정을 중심으로, 기억과 전망 통권 29호 2013 겨울호, 397쪽, 6개월여에 걸친 면밀한 검토 끝에 오발탄, 템페스트, 차타레이 부인의 사랑, 적과 흑, 젊은 육체들, 위험한 고빗길,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 등 7편이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다. 재검열에는 내무부, 문교부, 중앙정보부, 공보부의 관계자들이 참여하였으며, 이 네 부서의 검열간이 모두 상영부가를 내린 작품들이 상영금지로 결정되었다(상영보류 작품 합동심사 결과보고, 1962년 3월 22일). 한국영화로는 유일하게 오발탄이 상영금지 작품에 포함되었다. [본문으로]
  3. 박유희, 만주웨스턴 연구, 대중서사연구 제20호 2008. 12, 40~42쪽 이때 정권은 반공영화, 계몽영화, 문예영화를 권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락영화라 하더라도 국책에 부합하는 표면적 명분이 필요했다, 대륙물은 이 부분에서 강점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만주는 교과서에서도 자세히 다루지 않는 공간으로 상상적 재구가 가능하였기에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해방의 공가능로 기능할 수 있었다. 벌판가 지평선으로 상상되는 대륙의 표상은 이러한 해방감을 투영한다. 또한 만주는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내세웠던 오족협화에서 드러나듯이 다민족이 모였던 공간이기에 다양한 갈들과 모험의 창출이 가능하였고, 이에 따라 다양한 욕망이 발현될 수 있었다. 임권택 감독의 황야의 독수리는 1950,60년대 할리우드 웨스턴의 유연한 서사와 스파게티 웨스턴의 오락성이 강고한 이분법과 부딪힐 때의 파탄을 드러낸다. 이 영화는 이분법의 가부장적인 권위와 오락으로서의 폭력이 불편하게 공존하다가 마지막에 파국을 맞이함으로써 치명적인 폭력으로 전환되어 버리는 문제적인 텍스트다. 이는 이분법에 내재한 폭력성이 오락성을 잠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극단적인 파국을 통해 그 폭력성이 폭로됨으로써 그 것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는 측면도 있다. 이로써 이 영화는 이분법을 고수하는 강고한 욕망에 의해 간섭되는 도착적인 폭력의 세계를 보여 주는데, 이는 한국 영화에서 지속되고 있는 문제적인 지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계몽적 이분법에의 집착과 그로 인한 오락성의 죄의식은 지금까지도 한국영화의 특성이자 한계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4. 김두한, 와께지마 입회한 새벽의 결투, 김두한 자서전, 연우출판사 1963, 그 이튿날 아침 8시 경이었다. 밀림다방에 가서 문, 김 양군과 함께 차를 한 잔 마시려고 하니까 일인 협객 2명이 나에게 왔다. 권하는 의자에 앉지도 않고 일인 협객이 말했다. 어제 저녁에 마루 비루 카페에서 싸운 일이 있나? 그렇다. 정식으로 우리와 한번 싸울 수는 없는가? 우리는 와께지마 오야붕의 부하이다. 싸움은 싫지 않다. 장소는 어디냐? 장충단 공원이다. 시간은... 내일 아침 6시다. 좋다. 약속했지만 큰 일이었다. 일본 협객들은 아이구찌를 들고 덤빌 것이다. 나는 원래 칼이나 무기를 안 쓰고 싸워 왔다. 이 전통을 깨뜨리기가 아깝지만 일본도를 휘두르는 일본 협객과 싸우자니 내 생명이 위험했다. 또 와께지마라는 일본 협객 오야붕은 전 조선에 이름 있는 일본 협객의 총수였다. 그의 부하가 수천 명에 달했고, 그는 토건업도 하고 도박장도 벌이며 곡마단도 하는 경제계의 실력자이기도 했다. 이들과 싸움이 붙었으니 우리 한국 협객들을 데리고 싸우면 패배당할 것이 뻔했다. 나는 부하를 불러 출전 희망자를 선출했다. 일본도를 든 일본인 협객과의 싸움이라는 말에 손을 들고 앞에 나온 자는 문과 김 두 동지 뿐이었다. 나는 많은 부하들의 배신에 화가 났지만 김두한의 명예를 건 이 싸움에 한국 남아의 실력을 보여 줘야만 했다. 일본도는 참으로 무서운 무기였다. 모든 것을 운명에 같기자며 셋이 같이 술을 마시고 흉기를 만들었다. 쇠곡갱이를 광목척만한 길이로 잘라서 와이어를 감았다. 한국 협객의 명예를 걸고 싸우는데 우리 측은 단 세 사람. 약속한 6시 15분전에 장충단 공원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 날의 날씨는 우리에게 아주 유리했다. 노리는 앞사람이 안보일 정도의 안개 때문에 큰 걱정을 했지만 우리는 방어하는 입장이다. 세 사람이 각각 등을 붙이고 3각형을 만들면서 들어오는 놈을 닥치는 대로 해우겠다는 전법이었다.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속에서 일인측이 먼저 공격해 왔다. 우리는 닥치는 대로 내리쳤다. 15분간이나 싸웠는데 10여명이 쓰러지는 것을 희미한 안개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저들은 일본도를 휘두르며 달려 들었다. 우리는 내리치는 일본도를 쇠곡갱이로 막아내면서 그들의 머리만을 강타했다. 이타이!(아여) 소리가 나는가 하면 아이고! 소리도 났다. 아이고 소리는 우리가 그들에게 맞았다는 증거다. 그러나 나는 우리 말로 흩어지면 죽는다. 뭉쳐라! 만을 연발하면서 3각대전법을 썼다. 아이고 소리보다 이타이 소리가 점점 많아져 가면서 안개가 완전히 걷혀 갔다. 마데!(스톱) 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일본인들은 일제히 퇴진했다. 우리는 너무나 기뻐 셋이 같이 껴안았다. 나의 두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문영철군도 김무옥군도 같이 울었다. 나는 싸움에 이긴 것 보다는 김두한의 명예 때문에 죽음의 사지에 같이 뛰어 들어와 죽음을 면한 두 동지를 생각해서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았다. 이윽고 와께지마 오야붕의 입에서 말이 떨어졌다. 싸움을 중지한다. 오늘 12시에 우리 집에 와 줄 수 없느냐? 가겠습니다. 내가 우리 측의 대표로 대답했다. 맑은 아침 햇살이 결투의 결전장을 환히 비췄다. 꿈틀거리며 쓰러져 있는 일인 협객이 18명이나 되었다. 와께지만 오야붕은 하오리를 입고 일본도를 손에 들고 앉아 있었다. 나는 두 동지와 함께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가서 아침을 먹은 후 약속한 12시에 와께지마의 웅장한 저택으로 가 벨을 눌렀다. 물론 무기는 버리고 비무장으로 갔다. 일본 협객들은 비겁하지 않으니까 자기 집에 초대해 놓고 나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중 나온 와께지마의 부하 2명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일본도와 아이구찌 등 무기가 선반에 수백 개가 걸려 있어 무시무시 했다. 나는 후스마를 열고 안에 들어 갔는데 다다미 30장을 깐 방이었다. 와께지마가 중앙에 앉았고 좌우에는 각 정의 조장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고개를 땅에 떨어 뜨리고 있었다. 나는 와께지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본의 아닌 싸움으로 폐를 끼져 죄송합니다. 정복수라는 권투선수 우승 축하 파티에서 8명의 일인 협객이 먼저 시비를 걸어와서 응전한 것이... 그만. 아니오. 당신들 세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오. 15명을 단 3명이 상대했다니. 나는 오늘의 싸움이 시작되자 당신들이 우리보다 수가 적다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있지 단 세 명이었다는 사실은 안개가 걷힌 뒤에야 알았소. 그러기 때문에 일본 무사도 정신으로 싸움을 중지시킨 것이오. 정당한 싸움이 아니니까. 당신들은 참으로 훌륭한 솜씨를 갖고 있소. 이렇게 해서 우리는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었지만 와께지마는 우리 측에서 세 사람, 당신 측에서 세 사람씩 선택해서 다시 합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 싸움에 응낙할 수가 없었다. 김두한은 생애에 처음으로 굴복했다. 일본도를 든 세 사람과의 싸움은 딱 질색이고, 겨우 목숨을 건진 두 동지를 또 사지에 몰아 넣을 수 없었다. 필요 시에는 타협을 해야만 하는 법이다. 우리가 다시 그들과 싸움을 하게 되면 우리는 꼼짝없이 죽게 될 운명이다. 그렇기 대문에 나는 고개를 숙이고 참으로 죄송하오나 응낙할 수 없으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와께지마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부하들에 대한 와께지마 오야붕의 체면은 이래서 회복된 것이다. 그는 요시이(좋다)라고 말하면서 가까이 오라고 말했다. 차를 마시면서 우리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에라오 오도꼬(위대한 남자)라고 말하며 진작 알지 못했던 것이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그의 의형제가 되자고 했으나 나는 좋게 거절했다. 생활을 어떻게 하느냐고 묻기에 무직으로 놀고 있다니까 그는 매월 1천원씩을 보내 주겠다고 말했다. 그가 8.15 해방으로 귀국할 때까지 매월 1천원을 보내주었는데 그때의 1천원은 큰 돈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3대3의 2차 결투에는 유명한 일본의 검도 선수 세명을 우리와 대결시키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2차 결투에 응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었다고 생각했다. [본문으로]
  5. 김두한, 내가 휩쓸던 거리와 골목길, 세대 제8권 통권 81호 1970. 04, 333쪽, 일본의 깡패란 어떤 의미에서 전통적인 것이다. 일본의 무사도로부터 시작한 그들은 그 무렵 야쿠샤라는 유명한 폭력 단체를 조직하고 전국에 그 조직망을 펼치고 있었고, 그 지부가 바다 건너인 우리 나라에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지금의 충무로 거리인 본정 1,2,3,4,5정목이 그 세력권이었다. 그 곳에서 그들은 토목, 건축, 영화, 흥행, 도박 등의 모든 이권과 관계하고 모든 파와 결탁하고 있었다. [본문으로]
  6. 김두한, 제9화 장충공원에서 일본깡패와 겨루던일, 노변야화, 동아방송 1969.10.23한국 건달과 일본 건달패의 싸움이지만 일본과 조선 민족의 싸움이 된 거지요. 술집에서 한판 했으니까 중간 오야붕과 겨루는 거지요. 이번에 이기면 일본 마을로 쳐들어가 진짜 오야붕과 겨루는 겁니다.아침 6시, 장충단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어요.제 오른팔은 김무옥이라고 전라도 광주 출신인데, 유도 4단이에요. 나중에 ‘팔도사나이’란 영화 보면 박노식이가 연기한 주먹이 바로 김무옥이지요. 왼팔격인 문영철은 상해에서 직업 권투 선수였죠. 권투 선수도 싸움꾼 출신과 운동만 한 두 종류가 있는데 영철인 평소 싸움을 잘 하다가 프로로 전향한 선수였기 때문에 실전에도 아주 강했지요. 이 둘을 포함해서 제 동지 6명을 데리고 갔어요.우리는 저들이 일본도를 가지고 올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쇠파이프를 준비해 손잡이에 고무를 감아서 미끄러지지 않게 하고 가죽장갑을 끼었어요. 배에는 고무 호스를 세 겹으로 감았지요. 그러면 웬만한 칼로 찔러도 들어가질 않아요. 금만 가지. 심장하고 복부만 안 맞으면 되거든요. 그래서 광목 감듯 쭉쭉 감는 거죠. 구두도 신으면 안 됩니다. 시합 때 권투선수들이 신는 신발을 신어야 돼요. 그냥 신발은 벗겨지니까.그날 따라 안개가 자욱했어요. 잘 보이지 않는데 갑자기 옆에서 뭐가 번쩍 해요. 일본놈들이 곡괭이를 들고 온 거예요. 소방수들이 불 끄기 위해 들고 다니는 것 있잖아요. 손잡이부터 전부 쇠로 만든 곡괭이가 있어요. 옆으로 피하면서 슬쩍 치니까 곡괭이 하나가 떨어지는데, 맞아서 떨어질 때 일본놈들은 ‘이타이이타이’ 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아야야야’ 하는 것처럼. 근데 ‘아야야야’ 하는 놈도 몇 놈 있는 거예요. 평소엔 일본놈처럼 일본말 하고 행동하지만 맞을 땐 본색이 드러나는 거예요. 일본놈보다 엽전이 더 밉더구만. 내가 서로 등을 지라고 했어요. 6명이 3명씩 붙어서 등을 지고 휘두르고 때리고 치고 나가다 보니 먼동이 트더군요. 한 40분 정도 후다닥거리니까 햇빛이 장충단 공원을 비추면서 안개가 걷히는데, 즐비하게 쓰러져 있더구만요. 근데 저 앞에 일본도를 턱 쥐고 앉아 있는 놈이 있어요. 누군가 했더니 바로 하야시 구미 원오야붕이에요.저는 쇠파이프를 버리고 오야붕 앞으로 나갔어요. 충무로 2가의 오야붕도 그 옆에 서 있더군요. ‘당신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 곡괭이나 일본도 안 쓰고 단도까지는 괜찮다고 했는데 뭐냐, 일본 무사도 정신에 위배되는 것 아니냐. 당신 언제부터 이렇게 비겁했느냐. 칼 놓고 다시 하자’고 하니 하야시가 칼을 버리고 일대 일로 붙으라고 명령하더군요. 우리는 6명, 저들은 수십 명이었어요. 부하들은 가만 있으라고 하고 내가 수십 명의 가운데로 척 들어가니까 내 허리를 잡으려고 무더기로 들어오는 거예요. 사람 조지는 것이 내 직업인데 좀 잘합니까. 10여 명 즐비하게 떨어지니까 안 되겠거든. 원오야붕이 그치라고 명령을 하고 ‘긴또깡, 이리 오너라’ 합디다. 오야붕들은 대접을 할 줄 아니까. ‘너 훌륭하다, 너와 같은 부하가 옛날부터 필요했다. 나와 형님 동생으로 친하게 지내지 않겠느냐’고 해서 하야시 구미 원오야붕의 집으로 갔습니다.집 입구에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일본도를 쭉 들고 양 옆으로 서 있더군요.해방될 때까지 주먹생활 하던 이야기가운데 앉아 제가 무릎을 꿇고 ‘나이 어린 동생으로 여러 가지로 잘못한 일도 있으니까 용서해 주기 바랍니다’ 했더니, ‘우리는 형제다. 나는 형님, 너는 동생이다. 술 한잔 하자.’ 그걸로 형님 동생이 됐습니다. 내가 당시 스무살이고 그 사람이 한 쉰쯤 됐어요. 머리가 희끗희끗했으니까.그때부터는 해코지하지 않아요. 원칙적으로 따지면 주먹으로는 내가 이긴 거예요. 대접상 형님 동생 할 뿐이지. 그때부터 한 달에 1천원씩 보내줬어요. 설렁탕 한 그릇에 10전, 담배 한 갑이 10전, 냉면이 15전 할 때였어요. 지금으로 따지면 3천만 원 정도 되는 큰 돈이죠. 인사동에 집 한 채를 사고 남는 돈이니까요.하야시가 돈을 보내주는 이유는 자기 구역을 침범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이죠. 단성사를 비롯해서 조선극장이나 우미관 같은 곳에서도 한달에 1백원이나 50원씩 봉투에 넣어서 보내왔어요. 당시 조선총독 월급이 1만 원인데 내 수입이 2만 7천 원 정도 됐지요. [본문으로]
  7. 김두한, 내가 휩쓸던 거리와 골목길, 세대 제8권 통권 81호, 334~336쪽, 1970년 4월, 그 날 나는 새벽 5시경에 일어나 전라도 광주 출신인 김두억을 위시한 6명의 동지들과 함께 장춘단 공원으로 향했다. 그날 일대에는 지척을 가릴 수 없이 안개가 자욱하고 이따금 지나 가는 트럭의 발동 소리를 제외하고는 사위는 소리 하나 없이 숨 죽인 듯이 고요했다. 그러한 고요란 싸움패들에게도 이상한 감을 안겨다 준다. 그 분위기란 싸움하며 사는 우리들의 발길을 들뜨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싸움이 어떤 신성한 것, 남자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크고 담백한 것으로 착각하게 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바로 지척을 가길 수 없이 흘러가고 있는 안개, 그 것은 그 다음에 일어 날 그렇게도 살벌한 싸움을 미화해 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 날 새벽의 대지를 가득히 싸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안개를 헤치고 우리들은 걸어 갔다. 만약을 예비해서 가슴에다 소방차에서 사용하는 호수를 감고 가죽장갑 속에 파이프를 끼고, 스케이트 구두를 신고... 싸울 때는 일반의 구두는 착용하지 않는다. 벗겨질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걷어 찰 때의 위력이 발휘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정통을 거쳐서 장춘단에 이르렀을 때, 그 때 시계는 벌써 6시 정각을 가르키고 있었고, 일본 패들도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비겁하게도 처음의 약속을 어기고 닙본도에 소방서에서 쓰는 곡갱이를 들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싸워야 한다. 그리고 싸웠다. 우리들은 33으로 짝을 지어 등을 맞대고 장갑 속에 숨겼던 파이프를 휘둘러 댔다. 이 쪽에서 휘둘면 저 쪽에서 물러 서고 저 쪽이 찌르면 이 쪽이 물러 서고, 닙본도와 파이프가 부딪히는 소리가 그때마다 챙챙하고 날카롭게 안개 속에 울려 퍼졌다. 실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조금치도 마음을 놀 수 없는 무서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30분이 지나 갔다. 그러자 동쪽 하늘로부터 해가 비스듬히 떠오르려고 자욱하게 끼었던 안개가 걷혀 갔다. 공원의 나무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 아래 둘러 서서 관전하고 있던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 중에 끼어 있는 일인 두목과 그 두목의 두목인 우두머리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이미 그 때 50이 넘어 머리가 새하얀 사람으로서 암흑가의 보스답게 늠름하게 주위를 제압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당신들은 남자로서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 단도까지는 용인한다더라도 닙본도가 무엇이냐. 너희들의 무사도란 것이 이 것이냐. 빨리 걷어 치우고 정정당당하게 싸워라. 좋다하고 일인 두목이 말했다. 그리고 칼을 버리라고 그들의 졸개들에게 외쳤다. 그들은 칼을 버렸다. 칼이 없는 그들, 그러니 그 것들을 여섯명이서 대항할 필요가 있겠는가. 너희들은 뒤에서 구경이나 해라 하고 동지들에게 말하고 나 혼자서 그들 앞으로 걸어 갔다. 그들이 우르르 몰려 들었다. 일시에 때려 눕혔다. 싸움을 직업으로 살아 온 장사 김두한에게 일인들의 조무라기들이 감히 상대가 되겠는가. 중과부족일 수 밖에 없는 일이다. 나의 주먹을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는 조무라기들을 보다 못해 최고 우두머리가 권총을 세 발 공중에 대고 쐈다. 그것을 신호로 그들은 손을 내렸다. 굴복한 것이다. 우두머리가 나를 불렀다. 참 훌륭하다. 나에게는 너와 같은 부하가 이전부터 필요 했었다. 이제부터 우리 의형제를 맺기로 하자. 나는 좋다고 했다. 그리고 그 길로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으 집에 들어서자 제왕을 맞은 대신들처럼 닙본도를 든 장정들이 늘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의 내실로 안내되었다. 그리고 그가 그의 자리에 앉자 나는 그 앞에 꿇어 엎디어 인사를 했다. 일종의 동생으로서의 예를 갖추는 것이다. 그는 내게 술잔을 내밀었다. 나는 받았고, 우리는 함께 의를 약속하며 건배했다. 이로서 그는 나의 형님이 되었고, 나는 그의 동생이 된 것이다. 아마도 그 때 내가 그에게 굴욕감 없이 머리를 숙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마 위를 덮고 있는 하얀 머리칼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나이의 세계에서 뼈가 굵어 자란 사람의 흰머리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각도에서 보여졌던 것이다. 그에게는 그의 힘과 의지가 그의 전부이고 그것으로서 그는 그 백발을 맞이한 것이다. 그는 나에게 그 날부터 매달 봉투를 보내주었는데, 그 속에는 언제나 제 두한에게라고 쓰고 천원이 들어 있었다. 나의 수입은 그 것만이 아니었다. 종로 거리의 단성사, 황금좌, 포목전, 우미관 등으로부터 매달 5백원, 백원, 50원을 거두어 들였었는데, 그것들의 총계를 무려 2만5천원이 넘었다. 그때 조선총독의 월급이 1만원이었는데 내 수입은 그 3배를 육박한 것이다. 그 때 암흑가의 보스는 깊이 거리에 뿌리 박고 있었고, 거리를 총독부보다도 힘 세게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8. 김두한, 제7화 우미관에서 시작하여 전국 어깨를 지배, 노변야화, 동양방송 1969. 10. 21, 일정 시대적에는 어깨라고 그러고, 건달이라고 그러고, 그 계급 위에는 일본 말로는 야쿠자라고 그러고, 한국 말로는 고상하게 협객이라고 했습니다. 국제극장에서는 팔도 사나이라는 영화가 했습니다. 그게 나의 일대기를 그린 것입니다. [본문으로]
  9. 김두한, 제9화 장충공원에서 일본깡패와 겨루던일, 노변야화, 동아방송 1969.10.23 같은 글 [본문으로]
  10. 위의 글 [본문으로]
  11. 사상에 관한 정보(경찰서장), 경종고비 제1721호의 1, 1942.04.07 16쪽, 同年2月19日自宅において被疑者金斗漢の紹介により其親分俗称旧馬賊こと高時亨(京)改め高山勲を知り、前掲両名に対する如き好言を述べて獲得し. 동년 2월19일 자기 집에서 피의자 김두한의 소개로 그의 두목인 속칭 마적(馬賊), 곧 고시형[高時亨(경京)], 별명 타카야마이사오(고산훈高山勲)를 알게 되어 위의 두 사람에게 한 것과 같은 감언으로 획득하였다. [본문으로]
  12. 백기완, 우리 모두가 함께하는 백기완의 통일이야기, 청년사, 2003, 237~241쪽, 거리에서 이겨내던 급성폐렴. 급성폐렴에 걸려 다 죽게 된 나는 마지막으로 이왕에 죽을 바엔 북쪽으로 가는 기차라도 한 번 얻어 타고 가다가 죽어도 죽자 하고 북쪽으로 가는 기찻질 염천교 다리 밑 으슥한 곳에 쭈그렸습니다. '북쪽으로 가는 기차만 올 것이면 무턱대고 타고 보리라, 암.' 그런데 기다리는 기차는 아니 오고 난데없이 덩메가 집채기만 한 두 사람이 마주 서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러더니 서로 주먹을 쥐며 으르는 꼴이 맞짱이 붙는가 보았습니다. 야 이 새끼야, 지금 북쪽으로는 못 가게 되어 있지 않아. 또 너는 서울역전에서 짐을 져먹고 사는 가대기(어깨에 짐을 지는 짐꾼)구. 그래서 북쪽으로 뻗은 철로를 떼다가 좋은 일에 쓰자는데 왜 못하겠다는 거야. 돈만 받으면 될 거 아니야. 이 봐, 네 놈이 아무리 깡패 우두머리라고 하더라도 그래 눈물도 콧물도 없어? 지금 당장 북쪽으로는 못 간다고 해서 철로를 떼다가 팔아먹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우리가 우리 다리를 자르는 거 아니야. 그것도 장사라고 해먹겠단 말이야? 야 이 새끼, 이거 말따구 보라. 다시 북쪽으로 가자고 한다면 그것 빨갱이야 이 새끼야. 그러니까 선택하라고. 너 오늘 내 손에 죽을래, 아니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할래. 너 이 새끼, 그래도 깡패인 줄 알았더니 양아치였구나. 이때다, 번개처럼 뱃길이 올라오는가 싶은데 슬쩍 비키면서 무릎치기로 엥기고 이어서 몸통째 번쩍 하늘 높이 들더니만 뱅글뱅글 돌리다가 철길 위에다 태맹이를 치려고 할 때였습니다. 그만, 그만, 내가 졌어, 그만. 그런 소리가 났습니다. 그러자 진짜 태맹이를 치는듯 하다가 내려 놓고서는 웅쿠르는 것이었습니다. 네 놈의 뼈다귀를 추리려다가 그만 둔 까닭을 알아? 네 놈도 주먹으로 먹고 사는 놈, 차라리 아주 죽여야지, 나간이(병신)를 만들 수가 없어서 내려놓는 거야 이 새끼야. 그러니까 꿇어, 꿇고서 형님 그래, 그러면 목숨은 살려줘. 안 꿇어?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도 떵떵거리던 놈이 무릎을 꿇고 가대기 형님, 이제부터 참말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하고 큰 절까지 하는 것을 본 나는 급성폐렴이고 나발이고를 잊은 채 벌떡 일어나며 혼자서 울부짖었습니다. '그렇다, 나도 이 다음 커서 저 가대기처럼 견줄 놈 없는 힘꾼이 되자.'하고 그 가대기의 뒤를 쫄쫄 따라 갔는데 뜻밖에도 그 가대기가 나를 알아 보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나와 우리 아버지가 서울역, 그 너른 마당에서 야 아바이, 야 기완아. 그렇게 서로 부르면서 달려와 꽈당하고 껴안더니만 땅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이 그렇게도 멋졌다는 것입니다. 갈라짐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던 아, 가대기 형. 어쨌거나 나의 급성폐렴을 말끔히 씻어준 그 싸움에서 가대기 형의 한 방에 떨어지던 그 덩메는 누구였을까요. 그때 종로 바닥을 뒤흔들던 김두한이었습니다. 이와 맞싸운 가대기는 누구고. 가대기는 말 그대로 서울역 둘레에서 어깨에다 짐이나 져먹고 사는 이름 없는 노동자고. 그런 그들이 왜 싸움을 했느냐. 그때 삼팔선이 생기면서 북쪽으로는 기차가 못 가게 되자 김두한 패거리들이 뚱속(욕심)을 부렸던가 보았습니다. 북쪽으로 뻗은 철로를 떼다 용수철 공장에 팔아먹으면 철이 없이 용수철을 못 만들던 우리나라에서 돈을 많이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철로에 마주해 좀 알고 또 힘도 쎈 가대기를 앞세워 철로를 뜯어오게 하려고 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할 수가 없다는 가대기와 김두한의 뚱속이 맞짱을 불렀던 것이지요. (중략) 가대기 형과 만나곤 하던 그 무렵 나는 난민수용소에서 살구라는 애와 그렇게 가찹게 지낼 수가 없었습니다.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하고'라는 노랫말처럼 이 살구라는 애는 정이 그리 많았습니다. 하지만 또 한켠으로 남을 업신여기는 못된 버릇도 있었습니다. 수용소에서 있게 되면 누구나가 다 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이가 모두 나한테서 나왔다고 하도 구박을 하는 통에 참을 수 없어진 어느날, 남산 꼭대기에 가서 한판 붙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살구는 서울 애, 나는 촌놈. 그러니 택이나 있겠어요. 내가 처음엔 실컷 주어맞았습니다. 그러다가 얼결에 촌놈 씨름 솜씨로 번쩍 들었다 엎고선 디리 갈겨 내가 이길 만했을 적입니다. 누가 툭툭 쳐 돌아다보니 아이고머니나, 내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가대기 형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나는 대뜸 형, 오늘은 내가 이겼지. 그랬을 때입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젖더니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봐, 싸움은 나쁜 놈, 가진 놈들하고 해야 이기고 지는 것이 있는 법이야. 가진 것이라곤 이 밖에 없는 놈들끼리 백날 붙어보면 뭘해, 서로 죽는 거야 이놈들아, 알겠어? 그러시는 게 아닌가 말입니다. 나는 그 말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부터는 서울역 둘레엔 아예 가질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가 가대기 형이 철도파업 때문에 깡패들한테 끌려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알아보니 알만한 사람들은 쉬쉬하고 양아치들은 그 자식 그거 빨갱이 새끼 벌써 골로 갔을 거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말입니다. 이때 나는 그 가대기 형을 꼭 내가 죽인 것만 같아 가대기 형과 김두한이가 싸우던 북으로 가는 철로를 바라보며 날마다 울고 또 울었습니다. [본문으로]
  13. 대원호텔 정면 충무로 3가 30번지에 있던 노덕삼 심장내과병원 [본문으로]
  14. 강북 삼성병원 [본문으로]
  15. 치안상황, 부표- 주요단체조- 대일본국수회 조선본부 1938. 09, 국사편찬위원회, 목적: 황실중심주의로 동지를 규합하여 사회 개선 등의 활동을 함. 설립 연월일: 대정 11년 12월 22일. 주소지: 경성부 신당정 427 역원: 분도주차랑, 송본가태랑 [본문으로]
  16. 매일신보 1929. 05. 13, 기보. 11일 용산 한강통 13번지 십서적점 앞 큰 길에서 국수회 조선지부 상임이사 토목청부업자 송본가태랑의 처 미네(42)를 칼로 찔러 중상을 당케한 사실은 당시 보도한 바이어니와 가해자는 그 집에서 밥을 짓고 있던 고곡천수남(21)으로 원인은 사소한 일로 전기 미네에게 질책을 당하고 그를 혐의하여 당일 미네가 외출하는 것을 보고 식도를 품에 품고 나아가서 그와 같은 범행을 한 것이라는데 피해자는 3주일 치료를 요할 중상을 당하고 가해자는 용산서에서 취조중이라더라. [본문으로]
  17. 매일신보 1923. 09. 15 백주 대로상에서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려더 사건이 있다. 14일 오전 11시에 국수회 조선 지부장으로서 구룡산에 있는 수리사업 황해사 중역으로 있는 도변정일랑(渡邊定一郞)(25)씨가 장곡천정 조선호텔에서 이발을 하고 나오는 길에 동편 안동병원 앞 담 밑에서 국수회 전 간사장 황금정 1정목 192번지 분도주차랑(分島周次郞)(46)과 및 그의 부하 신전우일(新前宇一)(24)를 만나 국수회의 신구 사건에 대하여 언성을 하던 중 갑자기 그 부분으로부터 어떤 청년 2명이 달려 들어 전기 분도, 신전 2명에게 가세하여 예리한 단도와 굵은 몽둥이로써 도변을 함부로 때리며 찔러 도변은 머리와 얼굴과 좌우 팔에 무수한 중상을 받고 선혈이 임리한 현장에 거꾸러졌으며 범인 4명 중 2명은 도망하고 전기 분도주차랑과 신전우일은 즉시 본정 경찰서에 자수 하였더라. [본문으로]
  18. ①매일신보 1923. 09. 15 별보와 같은 사건이 돌발하자 부근의 사람들이 갑자기 모여 들어 현장은 혼잡사였으며, 피투성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도변씨는 조선호텔에 보이들과 토목협회 소산(小山)이라는 사람이 협력하여 그 옆 안동병원으로 운반하여 응급치료를 하게 하였고, 범인의 자수로 사건을 발각한 본정서에서는 사법고등 양주임 이하 다수한 경관이 현장에 달려가서 사건의 전말을 조사하였는데 도변정일랑씨는 안동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즉시 자동차로 다시 총독부 의원으로 가서 입원치료 중인 바 머리 뒤와 전면에 깊이가 5센치, 3센치씩 되는 칼에 찔린 상처와 몽둥이에 얻어 맞은 타박상이 6,7개소나 되고 왼팔에는 20센치나 되는 칼 맞은 큰 상처 외에 수개 소의 상처가 있으며, 외편 눈은 고친다 하여도 영원히 볼 수 없이 눈알이 빠져 떨어질 중상을 당하였는데 2달 동안의 치료를 받아야 완치되리라고 안동병원장은 말하더라. ②매일신문 1923. 11. 14 시내 황금정 1정목 192번지 분도주차랑(46)은 이왕부터 조선에 국수회(國粹會)를 설립하고자 진력하여 이것이 성립된 후 경성 본부의 간사장으로 상당히 세력을 가지고 오던 바 경성본부 부회장의 선임에 관하여 분요가 생긴 까닭에 지난 8월 초순경에 국수회 동경 총본부회장 대리로 동회 자하현 본부장 길정천대길(吉井千代吉)이 경성에 건너 와서 종래의 간부를 전부 사직케 하고 새로이 조선 국수회 경성 본부장으로 용산 영정 6번지 도변정랑(渡邊定一郞)을 선임하였더니 분도는 생각하되 이것은 도변이가 동경 총본부에 운동한 결과이라 하여 이것을 깊히 함원하여써 오랫 동안 국수회의 분요가 계속하던 터에 이것으로 더욱 분기가 팽창되었으며 도변이가 조선 본부장으로 취임한 후 분도 등이 구간부에 대하여는 한마디의 인사도 없었으매 이것은 간부를 멸시함이요, 면목을 유린함이라 분만하여 필경은 도변에게 한번 욕을 보이기로 결의하고 항상 그 기회를 엿보아 왔었더라. 그런데 그 후 9월 14일 오전 열시 도변이가 조선호텔로 들어 감을 보자 그 나옴을 습격하고 전기 황금정 2정목 192번지 자기 집으로 급히 가서 자기 집에 동거하는 판동반평, 소야학태랑에게 그 말을 하고 분도와 소야는 단장을 가지고 판동은 일본 장검을 휴대한 후 조선호텔 앞길에 이르렀더니 마침 이때에 역시 분도의 집에 유하는 신전우일도 달려와 서너명이 함께 도변이가 아노기를 기다리던 바, 동일 오전 11시에 도변이가 나와서 남대문통을 향하여 걸어감을 보자 분도는 도변을 불러서 정지 시키고 그와 같이 무례한 말을 힐책하면서 곧 단장으로 도변의 머리를 구타하자 계속하여 신전이는 권에 쓰는 쇠덩어리를 씌운 철권으로, 소야는 버드나무 단장으로, 판동이는 일본 장검으로 일제히 습격하여 함부로 구타하며 칼로 찔러서 도망하는 것을 추격하면서 때려 중상과 경상을 여러 곳에 내이게 하였었는데, 이것은 당시 이목을 놀래킨 일이라 곧 경찰에서도 활동하여 동 사건은 경성 지방법원예심으로 넘어 갔더니 이자들은 4명은 모두 살인미수죄로 모두 동 법원 공판에 부치리고 예심결정이 되었더라. [본문으로]
  19. 동아일보 1925. 08. 18, 16일 오후 3시경 시내 장곡천정 공회당에서 4개 사상단체 주체 제2회 강연회 석상에서 일본 국수회 조선지부 일파와 충돌되어 장내는 일대 혼란을 일으키고 강연은 중지가 되었다는데, 이제 그 자세한 내용을 듣건데, 대옥 여사의 부인의 지위라는 강연을 마치고 이어 중서씨가 인간예찬이라는 제목 아래에서 강연을 하던 중 3차례나 경관의 주의를 받아 가며 개인주의로부터 종교부인론에 들어가 작년 여름에 대판 교통노동조합 주최로 고야산, 진언종의 본당 앞에서 아동 강습회를 열고 그 아동들에게 남무대사 등의 불경을 가르치는 것을 중서씨가 목격하였다는 예를 들어 종교를 논박할 때에 청중 가운데로부터 국수회 조선지부 간사장 분도 주차랑이가 벌떡 일어서서 준서야 이 놈아 내려 오너라 소리를 치며 연단에 뛰어 올라가려는 것을 군중이 제지하였는데, 필경 국수회 일파와 주최자 사이에 약간의 충돌까지 있었고, 300여명이나 모여 풍기는 공기가 매우 불온함으로 경관은 강연을 중지 시켰다는 바 국수회 지부원들은 품에 칼까지 품고 왔었다는 말도 있더라. [본문으로]
  20. 동아일보 1939. 03. 17 이 땅 연극의 조류(완) 사조 따라 좌익극과 학생극이 대두. 기자. 이때의 신극으로는 어떤 것이 있었습니까? 임화씨. 소화5년에 신극단으로서 신흥극장이 생겼습니다. 홍 선생이 잘 아시겠군요. 연출자이었으니까요. 홍해성씨. 그래서 모란등기를 상연하고 제2회 준비를 하다가 안되고, 반승히씨가 대장안을 만들다 안돼서 태양극장이 되었지요. 서항석씨. 신파 극단으로 그 당시는 연극사, 연극시장, 신무대, 황금좌 이렇게 내려 오겠군요. 이 극단들은 모두 막간을 시작해서 이것이 후에 막간 신문의 예원좌를 낳게 했습니다. 하긴 예원좌는 활동사진 변사가 토키 때문에 실업된 탓도 있으니까 토키와도 관계가 깊겠습니다. 이기세씨. 전에도 막간으로 퉁소 같은 걸 불기도 했습니다. 임화씨. 취성좌가 경성에까지 올라 왔을 때에는 신극의 조류는 없어졌을 때입니다. 30년대(1930년대)부터는 조선에는 사회사조가 바뀌고 청신한 조류가 생겼습니다. 안종화씨. 신극의 장래가 어찌 되겠느냐하면 극연좌 같은 데서 잘 발전시켜 나가리라고 믿습니다. 임화씨.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토월회면 토월회라는 대표적 단체가 그 때에는 있어서 연극의 르네상스를 만들었었지만 그 후는 극연좌가 생길 때까지 대표적인 단체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토월회의 분열에는 큰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그 후부터는 처음의 토월회에 정열을 계승하지 못하고 점점 쇠퇴해 갔으니까요. 기자. 아까 말씀하신 사회 사조의 변천에 따라 일어난 프롤레타리아 연극 운동은 어떠했습니까? 임화씨. 좌익극은 실제의 활동공로는 없었지만 그 의기는 컸고 이론적으로는 적지 않은 공로가 있었다고 봅니다. 사항석씨. 실제 활동에 있어서는 결국 그 한도를 넘지 못했습니다. 기자. 좌익극이라면 신건설이 생각나는데 공연 활동은 어떠했습니까? 임화씨. 1932년 신건설은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상연하고 이듬 해에 그 사건(신건설 관계자 피검사건)이 일어났지요. 이 것도 그 때 극장 주인 분도씨가 애를 쓴 탓으로 공연을 가지게까지 되었는데 단돈 5원인가 8원이 없어서 2층 무대가 중도에 꺾어져서 그만... 기자. 새로운 사조에 따라 한때 학생극이 성행하였는데 기억 나시는대로 말씀해 주셨으면... 임화씨. 그 것이 성행한 것은 소화5년경이리라고 기억되는데 굉장히 많을 걸요. 일동 (서로 서로 기억 나는 것을 부른다.) 연전 3회 (후에는 바다의 부인 등 야외극), 세전 5회 (누구가 제일 바보인가? 등), 이전 (앵원, 벌레의 생활, 말광량이 길들이기 등), 문우회 (어둠의 힘, 시관의 끝 등), 여자청년회 (출영, 낸의 비극 등), 중앙불전, 근화, 배재 등등. 임화씨. 이 학생극도 그후 당국의 정책으로 그만 줄이 끊겨 버렸습니다. 기자. 이 때가 지나면 곧 극연좌에 들어가겠습니까? 임화씨. 아마 그렇게 되겠습니다. 기자. 그럼 그 이후 것은 후일로 미루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하겠습니다. 바쁘신데 오랫동안 말씀 많이 해주셔서 고맙습니다.(끝) [본문으로]
  21. 매일신보 1929. 09. 20일 오전 10시경에 본정서 사법계에서는 비밀리에 장공천정 분도주차랑(分島周次郞)과 동인의 부하격인 산본산기(山本山崎) 양명 외 2명을 호출하여다가 취조한 사건이 있다. 탐문한 바에 의하면 지난 17일에 부내 욱정 1정목 71번지에 있는 일본 공예회사에 인부 40여명이 와서 경성역전의 조박환영탑(朝博歡迎塔)을 비롯하여 가로 장식 등에 노역한 599여원의 임금지불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동 사에서는 무슨 까닭인지 임금은 내주지 않고 동 사 영업주임 관소사랑(管沼四郞)은 전거 분도에게 전화하여 무뢰한인 산본산기 외 2명이 단도를 휴대하고 동 사로 달려와 인부들에게 향하여 너희들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고 고함을 지르며 단도를 빼어 들고 폭행을 하려 함으로 인부들은 놀라 사방으로 도주하여 버린 일이 있었다. 동 서에서는 20일에 이 일을 탐지하고 전기와 같이 불러다가 취조를 시작한 것이더라. [본문으로]
  22. 동아일보 1933. 04. 03 경성흥행협회대표 분도주차랑 50원. [본문으로]
  23. 매일신보 1936. 07. 25 국상영화의 적극적인 장려 정책에 따라 작년 이래로 조선영화계는 갑자기 활기를 띠는 동시에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일대 진전을 보여 종래 조선 안에서만 상영되던 조선영화가 금년부터는 멀리 내지 영화시장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내지 거주의 조선인의 유일한 위안 기관으로서 비상한 환영을 받아 오던 바 금번 돌연히 대판부 특고과 내선사에서 조선영화 상영금지라는 해괴한 처사를 내리기 때문에 재판 20만 조선인과 조선내 각 영화 관계자들은 물론 각 방면에서 비상한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이게 그 자세한 내용을 들어보면 경성촬영소 제작의 조선어 토키 장화홍련전이 동경 대판 신호 각지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음으로 동촬영소에서는 뒤이어 홍길동전을 삼영사의 손을 거쳐 지난 15일부터 대판 신세계파크 극장에서 2주간 속영의 예정으로 상영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판부 특고과에서는 동 영화의 상영을 1주간으로 중지시키는 동시에 금후로는 대판부내에서는 일체로 조선영화 상영을 금지시키로 하였다. 그 이유로는 조선영화의 관객은 전부가 조선인임으로 그 결과 내지 풍속에 순응시키려는 동화운동의 일대 장해가 된다는 것이라고 한다. 일단 내무성 검열계에 허가를 맡은 영화를 일개 지방 관청에서 금지시킨다는 것은 해괴한 일일 뿐 아니라 이 문제는 조선영화 발전상 중대한 문제임으로 작 15일 시내 부민관에서 시내 각 영화배급자측과 영화제작소 대표 10여인이 모여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는 동시에 맹렬한 반대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우선 관계자 대표로 분도주차랑, 고인문, 정은규 3씨를 총독부로 진정 시키는 한편 방금 총독부에서 내무성과 대판부에 조회중인 공문의 회답을 기다려 가지고 다시 내무성과 대판부로 대표를 파견하기로 하였는데 앞으로 이 문제가 어떻게 진전될지 각 방면으로 주목되고 있다. [본문으로]
  24. 박진, 일본서 이름 날린 3류급 소녀가극단도 경영, 세세년년: 한국의 연극 비장의 화제, 경화출판사 1966. 乙巳條約으로부터 韓日合倂의 元兇 伊藤博文의 養딸이라 해서 일찍부터 洋裝을 해 붙이고 外交舞臺에서 한때 날리던 裵貞子라는 女傑이 있었다. 그의 조카―오라버니의 딸에 裵龜子라는 少女가 있었고―그 少女 龜子가 일본에서 유명한 女魔術師「天勝」의 弟子로 갔다. 龜子는 본시가 재주가 있는데다가 天勝에게서 온갖 재주를 배워서 首弟子가 되었다. 天勝은 龜子를 저의 2代로 襲名까지 시키려 했었다. 龜子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 榮譽를 마다 하고 夜半逃走하여 玄海灘을 건너와서 北으로 北으로 정처없이 기차에 몸을 실은채 가기만 했다. 龜子가 자기의 生父母 집에도, 姑母인 裵貞子의 집에도 안간 이유는 當代의 裵貞子가 當代의 天勝과 약속을 할 때 그生父母의 승낙을 받은 바 되었으니 어디고 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北으로 北으로 가던 것인데 또 무슨 생각으로 내렸는지 내린 곳이 平壤이었다. 龜子는 쉴겸「야나기(柳)·호텔」이라는 鐵道 「호텔」에 집을 풀었다. 목표도 방향도 없는 龜子는 며칠이고 그 「호텔」에 묵었다. 돈도 떨어졌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호텔」의 支配人이 最大의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마치 물에 빠진것 같은 龜子는 지푸라기 한올이라도 잡고 싶은 터인데 뜻밖의 친절을 베풀어 주는 支配人은 恩人이라기보다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났던 것이었다. 龜子는 그때는 벌써 少女가 아니라 芳年의 女人이었다. 또 그 支配人은 능히 龜子의 마음을 끌만한 靑年이었다. 그 支配人이란 다름 아닌 平北義州出生의 朝鮮人 洪淳彦으로서 年少時부터 列車食堂「보이」로, 構內食堂「보이」로 多年間 성실히 動務한 결과 信任을 받고 또 받고 昇進에 昇進을 하여 平壤鐵道「호텔」支配人에까지 昇進한 것이다. 사실 인물도 그만하면 잘났고 첫째 溫順하고 高聲을 내는 법이 없고 남과 言爭이나 시비를 하는경우에도 敬語를 쓰는 것을 잊지 않는 사람이다. 물론 日語常用이지만― 이러한 性品과 熊度가 어려서부터 젖은 第2의 天性인가 싶다. 어쨌든 이러한 사람이 친절을 베푸니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身上을 呼訴도 했을 것이다. 洪淳彦이란 支配人은 龜子를 救出하여 保護者가 되었다가 順序에 의하여 남편이 되었다.이들의 새로운 생활설계는 이 「야나기·호텔」에서 세워졌다. 2代天勝이도, 襲名도, 榮譽도 다 버리고 새로운 길을 트고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기에 餘念이 없었다. 그들은 서울로 왔다. 裵龜子는 魔術師가 되기 보다도 舞踊家가 소원이었다. 종달새같이 조그마한 몸매는 舞踊家로서 알맞는 龜子였다. 그래서 서울에 裵龜子舞踊硏究所라는 간판을 달았다. 소문에 洪이라는 「패트런」이 생겼다더니 그걸 그렇게 선전했었다. 그런 후 얼마 있다가 지금의 中央劇場의 前身인 中央館에서 裵龜子舞踊發表會를 가짐으로써 舞踊家로서의 裵龜子로 인정을 받은후 裵女는 弟子를 많이 뽑아서 가르치고 洪男은 일본으로 왕래하더니 裵龜子樂劇團이라는 것을 만들어 가지고 일본으로 大擧移住했다. 洪男의 周旋으로 일본으로 가서 各地를 巡廻하며 日本國內에서 인정을 받게 되자 대번에 吉本興業이라는 大會社와 계약을 한다음 日本에 있는 吉本系統의 劇場을 巡廻하면서 日本서 弟3流級에 까지 올라갔다. 洪의 활약이 대단했음이요, 裵龜子의 재주가 非常했던 까닭이다.裵龜子樂劇團은 純少女만으로 되었었다. 日本의 「다까라쯔까」(寶塚少女樂劇團)만큼 큰 規模는 못되어도 吉本興業의 능숙한 商術로서 점점 충실해져 갔었다. 그 樂劇團의 才幹童으로 男子役하던 裵龜子, 女子役을 하던 洪淸子는 한때 기대가 컸었으나 洪女는 問題의 阿編騷動으로 이야깃거리가 되었었다. 洪淸子란 洪淳彦이가 딸을 삼아서 洪哥가 되었다. 그러나 이 裵龜子樂劇團은 國內에서는 말만 들었지 본적은 없었으나 이것이 洪淳彦으로 하여금 興行業에 造詣를 쌓게했고 또 東洋劇場을 建立하게한 動機이기에 東洋劇場 이야기에 앞서서 참고로 前提해두는 것이다. 이 「가메꼬」를 年前에 「도오꾜」에 가서 만나 그녀의 눈물 두어방울을 선사받은 일이 있었다. 그녀가 丙午生이다.家財를 털어 4千圓 19萬5千圓을 貸付받아 세워 1935年末頃 演劇專門劇場으로 東洋劇場이 섰다. 우리 나라에서 우리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 연극을 전문으로 하던 극장은 1924年에 土月會가 傳貰契約으로 1年間 했던 光武臺가 있고 또 咸興에 東明劇場을 꼽을 수 있으나 빛을 내지 못했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洪淳彦이가 裵龜子樂劇團을 조직해서 日本吉本興業의 專屬으로 있는 동안 興行業에 눈을 뜨고 경험을 얻어 劇場經營에 뜻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생각은 남다른 점이 있어 연극을 專門할 것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심은 좋았는데 資金은 마음같이 돌지 않았다.그때 裵龜子樂劇團이 吉本興業에서 받은 돈은 月千圓也― 적지 않은 돈이지만 그것으로서는 團維持에 겨우 充當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舊義州에 있는 집을 팔고 平壤에 있는 조그만 店鋪와 電話까지 팔아서 몽뚱그린 돈이 전부 4千圓이었다. 노부와 식구를 거리에 내세워 놓다 시피하고 돈 4천원을 들고 서울로 왔으나 극장을 짓기에는 조족지혈이었다. 궁리와 생각 끝에 그 돈 4천원을 들고 찾아간 곳이 「분도」라는 일인이었다. 「분도」란 그때 「와께지마」라 해서 경성극장, 경성촬영소를 가지고 있던 흥행사로서 서울내지 전반도에 세력을 펴고 있던「야꾸자」의 「오야봉」(親分)이었다. 이 일본인들의 「야꾸자」란 좋게 말해서 정치적 낭인이요, 나쁘게 말해서 깡패인데 우리가 말하는 들치기, 날치기 깡패는 아니다. 「오야봉」이란 두목이란 말인데 두목과 「오야봉」과는 「맛」과 「멋」이 다르다. 이 「야꾸자」를 「낭인」이라고 치고 일본적인 「오야봉」은 정치 낭인 두산만을 그 「오야봉」의 「오야봉」으로 칠 수가 있다. 이 낭인에도 계통이 있어서 족보를 따지게 된다. 가령 관서의 어느 파의 낭인이 관동 어느 파의 낭인을 찾아 갔을 때 그 찾아간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징기오기루』라는 제 신원을 밝히는 법이다. 그러면 이쪽에서는 그 신원을 듣고 난 다음 환대를 하거나 칼을 빼거나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무라이」일본의 한 풍류인데 이것이 「분도」라는「와께지마」에게 묻어 와서 서울에서 「오야봉」노릇을 했다. 돈 4천원을 손에 쥔 의주 출생 홍순언이란 「조센징」이 이「와께지마」를 찾아가서 자기의 포부를 말한 다음 그 돈 4천원을 「와께지마」앞에 내놓았다. 이 「야꾸자」요, 낭인의 「오야봉」인 「와께지마」는 서울에 앉아서 판을 치는 대흥행사이기도 했다. 그래서 「와께지마」의 『요로시』 한마디로 이야기가 성립되어서 서대문 고개 비탈길에 터가 마련되어 동양극장이 지어지는데 그 홍순언의 4천원이 밑천이 되어서 상업은행에서 19만5천원의 대부를 받아서 순연극 전문극장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洪淳彦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生前에 그는 남과 是非言爭을 할때도 敬語를 쓰는 사람이라고 紹介할만큼 誠實하고 實踐的인 사나이였다. 全財産 4千圓은「分島」에게 맡겼고 建物은 商業銀行에서 지어주니까 手中에 다른 돈이라고는 있을 수가 없었다. 잠도 工事場에서 자고 朝夕은 막걸리 한사발에 순대국 한뚝배기로 平洞 고개 길가에 순대국집 신세를 졌다. 그야말로 피나는 苦生을 했다. 지금의 東洋劇場은 主人도 몇번인지 달라지고 映畵館으로 變身했지만 젊은 興行師 洪淳彦의 慧智로 이룩된 東洋劇場은 우리나라 演劇中興에 있어 크고도 남는 공헌을 했다. 全半島에 우리 사람의 손으로 된 劇場이 다섯 손가락을 꼽지 못할때 그는 서울 새 문턱에 큰 劇場을 세웠고 더구나 그것을 演劇專門劇場으로 했다. 그땟 돈 4千圓이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19萬5千圓짜리 建物을 단돈 4千圓으로 시작한 洪淳彦 제가 그 劇場의 主人이면서도 事務室 한 구석에 나무 침대를 놓고 거기서 잠을 자고 순대국으로 滿足하던 洪淳彦― 나는 지금 東洋劇場을 생각하면서 洪淳彦의 명복을 새삼 빈다.東洋劇場은 1935年 11월 演劇專門劇場으로서 李雲芳(故人)作「國境의 밤」을 제1회公演으로 開館했다. 劇場主는 洪淳彦이요, 支配人은 獨鵑 崔象德이었다. 崔象德은 洪淳彦과 外戚으로 건건찝질하게 연줄이 닿아서 한몫 본 것이다. 演出部에는 洪海星, 나는 그때도 여전히 「뷔너스」에서 惠淑언니 술만 축내고 있었다. [본문으로]
  25. 매일신보 1938. 04. 02 오는 4월 29일부터 1주일간 실시할 예정인 종합선전주간 실시에 대한 타합회는 1일 오후 2시반부터 총독부 제1식당에서 군부, 관공서, 각 학교, 회사, 은행, 공장, 기타 각종 사회단체, 총독부 정보위원회 간사 70여명이 착집하여 개최하였다. 벽두에 정보위원회 간사장 정판 문서과장으로부터 인사가 있은 후 연합청년단장 전전 소장을 좌장으로 추천하지 동씨로부터 인사가 있었다. 이어서 총독부 정보위원회에서 제출한 초안인 실시요항에 대하여 질문가 응답이 있어 이것을 지명하고 타합회를 마쳤다. 그리고 참석일동은 가미시바이 영화 등을 구경한 후 오후 6시에 산회하였다. 이에 결정된 사항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종합선전주간 실시 기일은 4월 29일부터 5월 5일까지 1주간. 1.지도방침. 1.지구전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중요물자의 절약과 저축의 려행에 향하게 할 것, 2.각종 기관과 각종 단체를 총동원하여 소위 민중선전망이 수립을 도모하여 종합선전의 효과를 최대한으로 발휘 시킬 것, 3.민중의 중요 물자의 절약, 폐품 회수, 자원해오와 저축의 여행 등 비상시에 있어 국민으로서 협력할 사항을 철저히 시킬 것, 4.조회와 목면과 연료를 절약하는 의미를 철저케 할 것 등인데 정보위원에서 제시한 사항을 참고로 다시 실행위원회는 전기 취지하에 각 단체가 실시하려는 구체안을 모아 가지고 실행위원회를 중심으로 각종 단체는 전선의 소속 단체 혹은 은행회사는 각기 기관을 만들어 가지고 실행게 할 터이어서 금후는 실행위원회에서 지도하여 실행에 착수하게 되었다. 실행위원 길영정(애부주사), 백석기길(저은상무), 본전수부(금연금융부장), 하전직치(상공회두), 송도청(경성부총무부장), 전전승(부연합청년단장), 비총정태(교화단체연합회이사), 율전책(녹기연맹장), 최린(시중회이사장), 양규삼(기독교감리회), 분도주차랑(흥업조합장), 어수선진웅(춘추회간사),모전의신(DK방송부장), 석단대좌(국부), 안부소장(재향군인회장), 개천소좌(조선군), 길전대좌(20사단). [본문으로]
  26. 매일신보 1938. 03. 27 경기도 군사후원회에서는 27일 오후 1시부터 육군병원 구내에 가무대를 설치하고 전상병 전원을 초대하여 대위한 연주회를 개최하기로 되었다. 이 위안 연예에는 분도흥업부의 여러가지 연예부원이 출연하는 외에 본권번과 한성권번 등 기생들의 응원 연예가 있을 터이며 그 외에 유행가 가요곡 딴스, 만담 등 가진 여흥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장병들에게 유쾌한 오후를 가지게 하리라 한다. [본문으로]
  27. 매일신보 1939. 11. 01 철원극장은 지난 여름에 경성 분도주차랑씨가 인수한 후 2만여원의 증축비를 던지어 착공하여 최근에 완전히 준공되어 지난 10월 25일 오후 3시에 새로이 낙성된 극장에서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본문으로]
  28. 매일신보 1942. 07. 16 대동아건설의 성전에 용전분투하는 제1선의 황군장병을 위문하고자 군인원호회 경성분회에서는 작년 가을 중지로 위무난을 파견하였는데 금년에는 찌는듯한 더위를 무릅쓰고 묵묵히 북방진호에 가진 힘을 다하는 재만제 1선부대를 위문하기로 되었다. 위문단은 센다 경성부 총무부장을 단장으로 하여 우에마와리 군사계장을 안내역으로 하여 와께지마 흥업부의 만사이, 가요, 무용, 나니와부시, 만담 등의 일류 8명을 데리고 오는 20일 경성발 각지로 위문의 꽃다발을 전하고 오는 9월 2일경 경성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본문으로]
  29. 매일신보 1943. 06. 07 분도주차랑씨 대일본상박협회 경성하장소대회 무사종료 인사차 26일 래사 [본문으로]
  30. 매일신보 1919. 10. 21 기보와 같이 19일 오전 10시반부터 조선토목건축협회 제1회 임시총회를 경성호텔 개최하였는데 출석자 백여명에 달하였으며 먼저 송본(宋本) 회장의 개회의 사가 유한 직후에 의사 일정에 들어가 동협회 규칙 제3조 말미에 관청 기타의 의뢰에 응하여 토목건축공사에 관한 제 조사 도는 차후 사정 및 제 청부업자의 추천 혹은 알선이라 하는 1항을 추가 할 일을 부의하고 전중(田中) 부회두는 본협회는 과반 공회당 건축에 관여한 이래 본안 제출에 필요를 감한 차제이고 차가 전혀 시대의 요구라 운할지나 연이나 본안을 제출하였다 하여 협회로는 직접 물질상의 이해관계를 유한 것이 아니라 설명하여 23 질의가 유하였으나 이의가 없이 가결하고 11시 임시총회를 개하고 인속하여 송본 회장의 개회사에 차하여 규약에 의하여 평의원 유임자의 추첨을 행한 결과 당방유차랑, 백신전일, 계광풍, 포전희인의 4명이 차에 임하고 更히 평의원의 반수 개선에 대하여 전형위원 송본가태랑, 소삼근팔, 정○조태랑, 단귀일황정초태랑, 지기신태랑, 등전안지진씨 등을 거하고, 잠시 휴게를 선하고 기간에 전형위원회를 개하고 11시반 회재회 기 결과 34명의 당선자를 발표하고 종하여 송본 회장의 폐회사가 유하고 차에 동씨의 발성으로 동회의 만세를 3창하고 후정에 기념 촬영을 행하였더라. [본문으로]
  31. 매일신보 1930. 10. 14 권총과 단도 등을 휴대하고 백주에 횡행하며 공갈과 협박을 마음대로 하던 폭력단 일파가 요정 가무천산장의 권총 위협 사건을 발단으로 본정서에 검거되어 취조를 받고 13일에 일건 서류와 함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넘어 갔다. 이들의 범죄 내용은 아산군 인주면 문방리 매지 공사 청부 때문에 부내 남산정 2정목 원전강(原田剛 45)을 8월에 수 차 협박하고, 이어서 일파의 숨었던 과거의 죄상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것은 송본가태랑(松本嘉太郞)이 목도군 실업자와 불구자를 구원한다는 목적을 가진 동인회(同仁會)라는 것을 조직하고, 경성 시내에 널려 있는 토목 청부업자에게서 청부액 일만원에 대하여 7원 50전씩을 증수하여 먹었고, 이 외에 여러 곳에서 협박을 하여 먹었다. 더우기 이들의 범죄 가운데 놀랄만한 것은 년전에 경남철도 주식회사에서 내홍이 일어 났을 때 송본 일파는 현재 부산장인 추본의 청탁으로 단도와 권총을 가지고 온양으로 가서 주주들을 위협하여 무난히 통과 시킨 일같은 일이다. 이때에도 사례금으로 오백원에 주권 25주를 받었다. 잡힌 피고의 성명은 다음과 같다. 한강통 11의 134호 백판칠웅(白坂七雄 59), 한강통 13의 96 북원주작(北原周作 46), 한강통 13의 111호 송본가태랑(松本嘉太郞 45), 한강통 13의 111호 목촌태랑(木村太郞 34), 원정 1정목 83의 1 정전증장(正田增藏 56) [본문으로]
  32. 중외일보 1929. 10. 11 시내 창신동 65번지 사는 김홍석과 재동 25번지 김갑제 양명은 부내 한강통 13번지 토목 청부업자 송본가태랑과 동인의 대리인 부내 남미창정 대가봉길 양명을 걸어 사기 횡령으로 고소를 제기하여$다는데 그 내용을 들은즉 전기 산본과 대가 양명은 금년 정워부터 충남 보령군 남포와 웅천면 사이에 경남철도 부설공사를 하는 경성 도변조(渡邊組) 밑에서 재청부를 하여 다수한 인부를 사용하던 바 전기 인부의 청부를 한 댓가를 노동자에 임금을 현금으로 지불하지 아니하고 금년 칠월 이래로 전부 전표를 발행하여 그동안 모인 액수가 3,585원이라는 거액에 달한다는데 그 전포를 받은 노동자들은 대개 규정된 초하루 보름에 연금으로 인환하는 날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받은 전표로써 현금과 마찬가지로 그 근처 상인에게 쌀도 사고 일반 일용품을 사는데 통용하여 왔는데 전기 전표를 3,500여원어치나 가진 김홍석과 김갑제 양명은 산본의 대리인 대가에게 누차 청구하였으나 아직까지도 도변조로부터 찾을 돈을 찾지 못하였다는 핑게로 몇달 동안 연하여 나오다가 9월 중순경에 전기 대가는 어디로 가버리고 보이지 않음으로 책임자 되는 산본에게 청구하였으나 역시 대리인 되는 대가가 현금 3,000원을 가지고 도망하였다느니 이러 저러한 핑게로 돈을 지불하지 않음으로 마침내 고소를 제기 하였다는 것이라더라. [본문으로]
  33. 매일신보 1931. 12. 06 송본가태랑(松本嘉太郞), 백판칠웅(白坂七雄) 등의 4명에 대한 폭력행위 취체 규즉 위반사건의 공판은 4일 오전 10시부터 경성지방법원에서 개정하였는데 소림 재판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판결을 언도하였다. 징역 8개월(미결통산100감일) 송본가태랑, 동8개월(동120일 통산 2개년 집행유예) 백판칠웅, 동8개월(동200감일 통산) 북원전작, 동8개월(동60일 통산) 정전증장. [본문으로]
  34. ①매일신보 1937. 06. 10 공갈협박을 목적으로 조직한 불량폭력단 8명을 본정서에 일망타진하여 엄조중이다. 부내 이태원정 456번지 야구삼랑(野口三郞 24)외 7명은 전부 내지인으로만 조직한 폭력단인바 그네들은 소화 9년에 동경에서 공갈협박죄로 전부 전과 1범의 낙인을 받은 사람인데, 그후 봉천에 가서도 역시 그런 행동을 하다가 퇴거명령을 받고 작년 가을에 경성에 와서 각 여관에 투숙하면서 무전취식 또는 식당, 카페 등에 가서는 역시 무전취식후 대금을 청구하면 폭력으로 협박하는 등 이것이 광범위로 공갈하여 금전을 편취하는 사실까지 있어 드디어 본정서에 얼마 전에 체포되었 목하 엄조 중이다. ②동아일보 1937. 06. 10 본정통 일대를 무인지경처럼 횡행하며 깽의 버릇을 감행하던 일당이 체포되었다. 그들은 이태원정 455 일뢰진(24)외 7명으로 작년 10월 본정 2정목 86 부전상점 주인 복정씨를 무근한 구실로 협박하여 금품을 뺏은 것을 비롯하여 본정통 일대를 활무대대로 하고 우리는 전국에 수만명의 단원을 가진 혈맹단의 경성지부단이다. 만일 돈을 안내거나 혹은 경찰에 고발할 때는... 운운하며 폭행, 공갈, 협박, 무전취식 등을 일삼고 오다가 본정서원에게 탐지되어 7일 호우 5시 일당 8명이 일망타진되었다. 동 서원의 담에 의하면 이들은 일즈 동경 은좌 등지를 휩쓸고 다니다가 경찰의 신세를 수차 졌다 하며, 작년 9월에는 8명이 작당하여 조선에도 동경식 폭력단을 부식시키자는 사명을 띠고 건너 와서 단원을 모집하는 일방 직접 행위를 감행하였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35. 경성미술구락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경성미술구락부의 초대 사장은 고미술상(古美術商) 경영자였던 이토우 도이치로(伊藤東一郞)가 맡고, 상무에는 모리 이노시치로(毛利猪七郞), 이사에는 유카와 우키치(祐川宇吉), 사사키 쵸지(佐佐木兆治) 등, 감사에는 아가와 시게로(阿川重郞), 아라에 쇼타로(荒井初太郞), 와타나베 사다이치로(渡邊定一郞), 마츠모토 다미스케(松本民介)가 선출되어 합의제로 운영되었다. 창립 당시의 주주는 총 85명이었고 이 가운데 고미술상은 18명이었다. 한국인으로는 우경(友鏡) 오봉빈(吳鳳彬)이 유일하게 참여하였다. [본문으로]
  36. 국사편찬위원회, 檢察事務에 關한 記錄 3 문서번호昌警 제1179호 문서제목국수회원 入門에 관한 건. 발신자 창덕궁경찰서장. 수신자 경성지방법원 검사정. 발신일1926년 05월20일. 이름 : 渡邊定一郞(경성상업회의소 회장), 分島周次郞,小鹽繁(창덕궁경찰서 근무 道巡査部長), 竹上勇吉(창덕궁경찰서 근무 도순사), 本地榮次(창덕궁경찰서 근무 도순사), 高山孝行, 佐藤虎次郞. 단체 : 국수회,경성상업회의소. 기타 : 돈화문,李王職醫務室 [본문으로]
  37. 동아일보 1932. 11. 01 토목담합사건 예심 결정서 1. 황해사 도변정일랑(61) [본문으로]
  38. 매일신보 1941. 03. 20 자전거 도난 방지에 이런 명안은 어떨까? 작년 1년동안 본정서 관내에서만 자전거를 잃어버린 건수가 4,200대라는 놀라운 숫자를 보이고 있는데 그 중에도 가장 많이 도난을 당한 장소는 중앙우편국 앞으로서 450십대, 그 다음이 경성역 300대, 삼월(三越) 앞이 250대, 천자옥 앞이 230대, 경성부청 앞이 210대, 조선은행 앞이 150대 등 각 관청 회사 문전이 그 4할5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곳의 도난은 날을 거듭할 수록 늘어가고 있음에 비추어 본정서 하야(河野) 서장은 마침내 하나의 명안을 생각해 내었다. 즉 자전거 도난 예방 대책으로 서는 자물쇠를 반드시 채울 것을 장려하고, 길 가에 함부로 세워 두는 것을 한층 취체할 것이오, 두 말 할 것도 없지만 새로운 방법으로써 자전거 맡기는 곳을 중앙우편국, 경성역, 삼월 앞, 정자옥 앞, 경성부청 등 5군데에 설치하고 거기에는 상임 간수를 두어 자건거 한 대 맡기는 데에는 보관료로 2전씩 받기로 계획을 세우고 불일간 이를 실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기 5군데에는 적당한 곳에 구역을 선정하여 반드시 볼 일이 있는 사람은 자전거를 간수에게 맡기는 것인데 그 장소 이외에다가 자전거를 세우는 경우에는 교통취에도 지장이 큼으로 절대 엄금시키고 반드시 보관소에 맡기도록 하리라고 한다. 이 자전거 보관소 실시와 아울러 자전거 도난방지에도 큰 도움이 되려니와 교통취체의 철저도 꾀할 수 있어 1석2조로 그 효과가 기대된다. [본문으로]
  39. 위의 기사 [본문으로]
  40. 매일신보 1941. 04. 03 하루에도 보통 10건 이하로 내려가 본 일이 없으리만큼 자전거 도난 건수가 많은 본정서에서는 생각다 못해 한 꾀를 낸 것이 기보한 바와 같이 관내 요소에 보관소를 설치하고 도난방지에 힘 쓰기로 한 것인데, 드디어 1일부터 가장 도난 건수가 많은 삼월, 중앙우편국, 경성부청, 경성역전, 조선은행 앞 등 5군데에 실시를 보았다. 첫날 성적을 보건데 아직 선전이 덜 된 탓도 있을터이지만 그래도 200여대 내니 300대씩이나 아침 9시부터 6시 사이에 좋은 성적을 보였다. 그리고 도난 건수는 보관소 설치 장소로부터는 한 건도 없었고, 딴 곳에서 4,5건 있었을뿐인데 하루 십수건씩 발생하던 도난 건수에 비하여 장차 그 방지에 상당히 기대를 갖게 한다. 보관료는 2전씩인데 장차는 전표를 회수권으로 발행하여 일반의 편의를 꾀하리라는 바 특히 경성역만은 본정 경찰서의 지도를 떠나 역에서 직영하기로 되어 보관료는 5전씩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41. ①동아일보 1936. 07. 06 4일 오후 10시경 대구 야시장에서는 살인 사건이 돌발하여 일시 대혼잡을 이루었다. 범인은 평남 대동군 출생의 선우영빈(23)과 좌하연 출생의 고교홀일(22), 장양현 출생의 평산원의(47) 등 3명이고, 피해자는 대구 동성정 78번지에 있는 원이남(29)인데 전기 가해자 3명은 얼마 전에 대구에 와서 야시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던바 피해자는 이전에 노동터에서 친하게 알던 관계로 자주 그들 3명을 찾아가서 돈을 달라고 조르는 일이 있었는데 이들은 귀찮게 생각하고 죽이기로 공모한 끝에 그날 밤에 그가 찾아 간 것을 고교가 단도로 찔러 그 같이 직사케 하였다. 범인들은 곧 도망하였으나 5일 6시까지에 전부를 잡았다고 한다. ②매일신보 1936. 07. 06 인파 잡답하는 야시장 아스팔트를 선혈로 물들인 살인사건이 있다. 4일 오후 10시경 대구 중앙통 야시장 한가운데서 단도로 사람을 찔러 즉사케 하고 사람이 혼잡한 틈을 타서 도망한 사건이 돌발하였다. 정영 검사 이하 경찰이 총동원으로 비상선을 늘리는 동시에 피해자의 신원을 조사한 결과 피해자는 동성정 78번지 원민남(29)으로 판명되고 범인은 탐사한 결과 5일 오전 3시 평남 대동군 부산면 수산리 929번지 선우영빈(23)과 장야현 출생 평산원의(49), 등 종범 2명을 체포하여다가 취조한 결과 좌하현 출생 고교총일(22)이가 주범으로 하수한 것이 판명되어 5일 오전 6시 경정 경일여관에 잠복하고 있던 것을 체포하였다. 원인은 모두 야시에서 경매 장사하는 동료끼리의 싸움 끝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42. 취재 정연진 기자, 사진 이명헌.황순정 기자, 야인시대 하야시는 한국인 선우영빈, Sa Vie(싸비) 2002, 법조계 출신 선우씨 종친회 관계자 단독 인터뷰 겉은 일본인이었는지 몰라도 속은 조선인이었다 본지에 처음으로 선우영빈 씨의 존재를 확인시켜준 종친회 관계자는 하야시와의 인연도 함께 소개했다. 이 관계자의 기억에 의하면, 선우씨는 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에서 태어났다. 평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선우씨는 젊었을 때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이 종친회 관계자는 선우씨에게 먼 친척이 된다. 다음은 종친회 관계자와 인터뷰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선우씨와는 정확히 어떤 관계인가? 촌수로 따지면 그가 아버지의 할아버지쯤 된다. 그래서 그 사람을 만났을 때 대부님이란 호칭을 썼다. 나도 평양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함께 자라지 않아 성년이 되어서야 그를 만났다. 선우씨를 처음 만난 게 언제였나?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해달라. 내가 공부를 위해 서울로 유학을 왔을 때였다. 난 배고픈 유학생 신분이었고, 그는 사회에서 이미 자리를 잡은 사업가였다. 한번은 무작정 그를 찾아가 고학생의 어려움을 얘기했다. 물론 내가 선우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같은 집안 사람끼리 도움을 청하면 그래도 나을 것 같았다. 그는 나에게 밥을 주면서 열심히 공부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당시 선우씨는 충무로에서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를 만나더니 종친회 사람이라고 하면서 잘 대해주었다. 그를 처음 본 느낌은 아주 호탕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그가 조선인이란 사실을 알고 만났나? 물론이다. 만약 그가 일본인이었다면 찾아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서울 생활을 시작할 때 그가 집안 사람이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하야시라는 이름을 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그때는 조선인은 누구든 창씨개명을 강요받았다. 내선일체라는 미명 아래 조선 사람은 일본 이름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또 하나 그가 권력과 가까이 하기 위해 일본인 행세를 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나를 만났을 때는 조선인이라는, 선우 집안 사람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겉은 일본인이었는지 몰라도 속은 조선인이었다.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당시 그의 권력은 막강했나? 당시 그가 야쿠자 두목의 수양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정확한 사실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내가 알고 있기로 그는 사업가였지 주먹패의 보스는 아니었다. 그의 실질적인 권력은 경무대(지금의 경찰청)에서 나왔던 것 같다. 그는 경무대의 고위급 인사와 두터운 친분을 맺고 있었다. 그가 당시 일본인들의 거리라고 하는 충무로나 명동에서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은 배경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처럼 그가 조선 사람에게 악랄하게 굴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 사람들이 조선인을 괴롭혔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처음 만난 이후에도 선우씨와 친분 관계를 유지했나?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 몇 차례 만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해방 후에는 뜸한 편이었다. 다른 사람을 통해 서로의 소식을 듣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 사람은 사업가였고 나는 공직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친분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시간이 많았다. 해방 후에는 건설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금강댐이 부실 공사로 문제가 됐는데, 이 문제로 선우씨는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종친회에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는데. 주로 경제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다. 종친회에 어떤 행사나 사업이 있으면 그때마다 돈을 전해주곤 했다. 30년 전 선우씨의 족보를 만들 때도 그의 도움이 컸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았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이름과 얼굴을 밝히지 않은 채 주위 사람들을 도와줬다. 아마 일본인 거리에서 일본인처럼 살았다는 사실이 부담이 됐던 모양이다. [본문으로]
  43. 위의 글 [본문으로]
  44. 대한연감 단기4288편 684, 선우영빈 1909년 7월 25일생. 평남 출생.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1가 7번지. 일본 중앙대학. 건설산업 주식회사 사장. 일본 삼영무역주식회사 사장. 1954년 11월 30일 서울국제시장 주식회사 부사장. [본문으로]
  45. 취재 정연진 기자, 사진 이명헌.황순정 기자, 야인시대 하야시는 한국인 선우영빈, Sa Vie(싸비) 2002, (상략) 다음은 정씨와 나눈 얘기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드라마 야인시대를 보고 있나? 남편이 일본인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처음엔 드라마가 방영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다 조카한테 TV에 작은 아버지가 나온다는 전화를 받고 드라마를 보게 됐다. 사실 난 드라마의 내용이 얼마만큼 정확한 건지 잘 모르겠다. 결혼 전 남편의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들은 것이 없다. 남편은 일단 집에 들어오면 바깥일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과거에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다만 주변 사람들로부터 남편의 과거에 대해 조금 전해들은 게 있다. 그렇더라도 남편이 일본인 행세를 했다는 것은 드라마를 통해 처음 알았다. 그럼 드라마에 나오는 하야시가 남편인 것은 어떻게 알았나? 드라마에는 남편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조카가 내게 신문에 난 기사를 보여줘 알게 됐다. 신문에 작은아버지 기사가 실린 것을 보고 내게 말해주었고, 난 신문을 본 다음에 드라마를 본 것이다. 하지만 신문에 실린 기사 내용 중 세 가지는 틀리게 나왔다. 그분(김동회 씨)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기자가 잘못 쓴 건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우선 남편이 지금의 보림빌딩에서 건설업체를 운영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그 건물은 태양빌딩이었다. 또 한 가지 남편과 나 사이에는 1남 1녀가 아니라 5남 1녀의 자식을 두고 있다. 특히 남편이 임모 씨와 재혼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난 임씨가 아니라 정씨다. 그리고 재혼이 아니라 초혼이다. 호적등본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선우 씨와는 언제 처음 만나 결혼을 하게 됐나? 처음엔 남편을 본 게 아니라 그의 동생을 먼저 알게 됐다. 시누이와는 예전부터 알고 지냈다. 시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오빠를 만나보라고 그러더라. 시누이는 오빠는 나이는 많지만, 멋진 사나이라고 소개했다. 실제 만나보니 참 남자다웠다. 무뚝뚝한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다정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결혼을 결심했는데, 그때는 한국전쟁이 막 터진 후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할 때였다. 그래서 부산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선우씨의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관계자들마다 증언이 엇갈리고 있다. 아내 정씨는 일본인 여자가 있었다는 내용은 듣지 못했다고 하면서 결혼 당시 그는 분명 총각이었다고 주장했다. 결혼 전 남편에게 많은 여자가 따랐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자신과 만난 이후에는 가정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친회 관계자와 김동회 씨는 일본인 아내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의견에도 다른 점이 있다. 종친회 관계자는 해방 후 선우씨가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일본 아내를 만난 것 같다고 말한 반면, 김동회 씨는 해방 후 일본 아내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고 말했다. 물론 족보상에는 정씨 이외의 아내는 등장하지 않는다. 정씨는 기자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 민감한 질문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마다 모르겠다 대답할 수 없다는 말로 일관했다. 예를 들어 30여 년을 함께 살았는데, 어떻게 남편의 과거를 모를 수 있냐고 물어봤을 때 남편이 얘기하질 않아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남편에게 일본인 아내가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그런 일 없다고 잘라 말했다. 결혼 후 남편은 주로 무슨 일을 했나? 부산에 머무를 때는 주로 일본과 무역업을 했다. 그러다 서울로 삶의 터전을 옮겼는데, 정확한 시기는 잘 모르겠다. 명동으로 이사하고 나서는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사업 때문에 일본에 자주 다녀오곤 했다. 사업이 썩 잘된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가족은 비교적 풍요로운 생활을 했다. 선우씨와 친분을 나누었던 사람들은 그를 ‘통 큰 사나이’라고 표현했다. 실제 성격은 어땠나? 말 그대로 남자다운 성격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들은 얘기로는 의리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어려운 사람을 그냥 보고 넘기지 못했다. 한번은 지금 재벌이 된 회사의 사장 얘기를 했다. 그 사람은 사업적인 능력은 뛰어날지 몰라도 의리는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너무 자기 것만 챙기고 동업자끼리 의리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리를 너무 중요하게 생각해 사업상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 일을 잘못 처리한 부하 직원이 통사정을 하자 대신 형무소에 들어가기도 했다. 의리를 중요시하는 남자다운 성격 정씨는 재단에 전 재산 기증하고 혼자 생활 그럼 가정에서 남편은 어떤 가장이었나? 밖에서는 어땠는지 잘 모르겠지만, 집에서는 정이 넘치는 분이었다. 집에 들어오면 천국에 왔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아이들을 굉장히 귀여워했는데, 집에 들어오면 나보다 아이들을 먼저 찾았다. 아이들에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되, 절대 생색을 내지 말라는 말을 늘 강조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집에 찾아오면 자기 자식처럼 대해줬던 게 기억에 남는다. 그는 자상한 가장이었다. 지금 자녀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여섯 명의 자식 중 세 명은 외국에 나가 있다. 우리 집안이 워낙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자식들 모두 교회에 다니고 있다. 재단 일을 하고 있는 자식도 있다. 얼마 전 손녀가 결혼을 했다. 신랑댁에서 선우영빈 집안 자식이면 볼 필요도 없다고 하면서 결혼을 흔쾌히 승낙했다. 신랑집 어른이 남편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용인에는 언제 왔나?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아마 70년대 중반쯤일 것이다. 그때 내가 병을 앓게 됐다. 서울생활을 정리하려던 참에 병까지 얻어 아예 요양차 이곳으로 집을 옮겼다. 남편도 서울의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곧 이곳으로 내려왔다. 용인에 내려와서는 여느 평범한 부부처럼 살았다. 서로 대화를 나누고 소일거리를 찾고, 교회 일에 전념하고. 남편은 언제 사망했나, 어떤 사람은 10여 년 전에 죽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니다. 내가 기억력이 자꾸 떨어져 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1978년이나 1980년 정도가 될 것이다. 아주 편안하게 저세상으로 떠났다. 점심을 먹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하다면서 자리에 누웠다. 그렇게 누워 있다가 10분 만에 돌아가셨다. 떠나기 전 기독교인으로 살다가 천국으로 갈 수 있게 돼 행복하다는 말을 남겼다. 사실 남편은 예전에는 독실한 신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죽기 전에는 자신이 교인이란 사실을 무척 기뻐했다. 말년에 그가 기댄 곳은 하늘과 이곳 용인이었다. 정씨는 현재 종교재단 업무를 도우면서 혼자 집을 지키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전에는 자신의 소유였는데, 최근 모든 재산을 재단에 기부했다고 말했다. 정씨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는 그녀를 원장님이라고 부르는데, 이전에 종교 관련 수련원을 운영하였기 때문이다. 요즘은 수련원을 비롯해 인근에 있는 건물의 새단장이 한창이었다. 정씨는 최근의 생활을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곳에 남아 있는 재산은 하나도 없다. 원래 내 재산이었던 이 집도 지금은 재단 소유로 돼 있다. 내가 재단에 얹혀 살고 있는 셈이다. 앞으로 이곳에 기독교 성지가 들어설 것이다. 내 황혼의 꿈은 교인들의 쉼터를 이곳에 만드는 것이다. 그 다음 나도 남편처럼 편안하게 천국으로 가고 싶다. 정씨는 주저하면서도 기자의 물음에 여러 가지 얘기를 해주었다. 하지만 남편 사진은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녀가 기억하기에 선우영빈 씨는 따뜻한 가장이었고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녀의 모습에서 하야시의 그림자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저 선우영빈의 아내였을 뿐이다. 정씨는 기자와 헤어질 때 다시 한 번 처음 했던 말을 강조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그냥 굴러가도록 놔 두세요. [본문으로]
  46. 위의 글 [본문으로]
  47. 위의 글 [본문으로]
  48. 경향신문 1953. 11. 04 수도 서울의 웅대한 도시계획이 3대 시장의 건설로부터 시작될 것이라 함은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동3대시장의 완성은 명춘까지는 완료할 예정으로 공사에 착수 중에 있다 하다. 즉 시당국자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동대문 시장, 남대문 시장, 오장동(충무로 5가) 시장 등의 3대 시장을 도시계획의 제1차적인 공사로 방금 추진 중에 있는데 남대문 시장이 제1착으로 건축설계에서 구체적인 착공 사업이 시작하게 되었고, 동대문 시장 관계자는 건축 관계자들이 부산의 국제시장의 실태를 조사차 하부하고 있어 동 조사가 끝난 후 곧 착공할 것이며, 오장동 시장도 유능한 사업가를 전형 중에 있다 한다. 그런데 동 시장들은 명춘이면 다 완료되어 콘크리트 2층 건물로 된 훌륭한 시장을 시민에게 보이게 될 것이라고 한다. 동 시장들은 모두 근대식 시장으로 일찌기 보지 못했던 대규모의 시장으로서 도로를 6미터 내지 8미터 넓이로 하고, 하수도, 주차장 등이 완비된 시장이 될 것이라 한다. 각 시장의 넓이는 약 3천평이라하며 시장 건립 자본금은 한 시장에 약3억환을 예산하고 있으리라 한다. 그런데 이익흥 부시장은 전기 3시장 외에는 시장 허가 한 바 없으니 일반 시민은 시장 예정지라고 허위매매 종용하려는 간상배에 속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본문으로]
  49. 건설산업 1956년 7월, 회사연감, 1956, 국사편찬위원회 [본문으로]
  50. 취재 정연진 기자, 사진 이명헌.황순정 기자, 야인시대 하야시는 한국인 선우영빈, Sa Vie(싸비) 2002, 같은 글 [본문으로]
  51. 경향신문 1958. 02. 02 자유당은 공천 신청 접수 사무를 개시한 제1일에 79명의 신청서를 접수하였다. 동 당은 일요일인 2일에도 접수 사무를 계속할 예정인데 첫날인 1일에 신청된 구역중에서 경합되는 지구는 양평 2인, 영동 2인, 함평 2인, 청송 3인, 평창 3인, 원성 2인, 화천 2인 등 7개이다. 이날의 공천신청자는 다음과 같다. 공천 신청자 (중략) 중구 갑 선우영빈 (하략) [본문으로]
  52. 경향신문 1958. 03, 30 29일 외자청에서는 지난 25일 시행한 58년도 잉여 농산물 도입계획중 대맥 6만톤의 구매입찰에 대한 낙찰자를 결정하였는데, 낙찰상사 및 수량은 다음과 같다. 괄호내는 매톤 단가. 삼성물산 15,000톤(42불57선), 경신산업 9,500톤 (42불 9선), 건설산업 9,500톤 (40불 1선), 대한산업 9,500톤 (43불 1선), 전진산업 8,000톤 (43불 10선), 대한상사 5, 500톤 (43불 14선) 그리고 도입선박에 있어서는 태평양 해운소속 만오천톤급 2척에 낙찰되었는데 운임음 매톤 10불로 되어 있다. [본문으로]
  53. 동아일보 1959. 05. 06, 서울시 수상경기연맹에서는 금년도의 임원 및 사업계획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사업계획 6월 19일부터 3일간 제5회 서울시 남녀 중고대학 대항 수상경기 대회겸 제2회 국민학교 남녀 수상경기대회, 8월 10일 제2회 서울특별시민 남녀원영대회, 8월 중순 8.15 경출 수상경기대회, 8월 하순 제6회 4도시 남녀 대항 수상경기 대회 서울대표파견(어부산). 임원진도 개선 임원명단 회장 김희성, 부회장 선우영빈, 이한상, 방현, 이사 김정복, 이혜봉, 한용환, 황관옥, 한태섭, 강태진, 박경희, 감사 홍관순, 김제은. [본문으로]
  54. 동아일보 1960.07.14 12일 내무부에는 대한건설협회에서 새로 선출된 회장 김석근, 부회장 선우영빈씨 등 명의로 제명처분을 한 회원사를 보고하여 왔다는데 당국에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제명 이유 자체가 자유당 치하에서 독점 공사를 하였다는 것이라고 하는데, 내무당국은 동 이유가 애매하다고 논평하면서 그 이유로 회장 김(한강공영대표)씨는 4.26 전까지만 하여도 자유당 출신 서울시의원 자유당 중앙위원 그리고 자유당 용산구당 감찰부장 그리고 선우(건설산업사장)씨는 임철호의 처남이며, 임도 선우씨 경영회사에 관계하였고, 또한 대한건설협회 자체의 회장이 한희석이었다는 점 등을 들고 그들의 보고 의도가 무슨 곡절이 있는 것만 같아고 논평하고 있다. 그런데 당국은 협회 자체으 제명처분으로 당국의 등록 취소는 도저히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하여 그들의 배후 의도를 시사하고 있다. [본문으로]
  55. 경향신문 1962. 09. 18 한전 전기시험소 신축공사장에서 일을 하던 인부 1명이 떨어지는 시멘트 덩어리에 맞아 현장에서 즉사한 사고가 일어났다.18일 상오 9시경 시내 산당동 176의 5 한전 전기시험소 신축공사장에서 땅을 파고 있던 최선복(25 동대문 근로자 합숙소)씨가 머리 위에 있던 시멘트 덩어리(두께 30센치 길이 2미터)가 떨어지는 바람에 머리를 맞아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 신축 공사는 건설산업회사(주인=선우영빈)가 지난 1일부터 청부를 맡아 해 온 공사이다. [본문으로]
  56. '동아일보 1965. 02. 06 남강 댐 방수로 공사계약 부정사건을 수사 중이던 서울지검 김윤근 부장검사는 6일 상오 도주한 대한전척 상무 김창흘씨 등 5명을 기소중지 하였다. 검찰은 동 사건에 관련하여 건설산업 사장 선우영빈씨 등 7명을 특수협박, 특수감금폭력에 의한 권력 행사 방해 등 죄로 구속기소하였으며, 이날 이미 도주한 김창흘, 유춘영(건설산업 전무), 김희천(하청업자), 선우천(건설산업 직원), 최진후(건설산업 서무과장)씨 등 5명에게 기소중치 처분을 내렸다. 한편 김 부장검사는 앞서 건술부 영남 국토건설국장 김동원씨와 건설부 관리국장 김세종(40)씨를 검찰에 환문, 건설부 관계관의 부정개입 사실여부를 따지고 있었으나 동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 앞서 이 부정공사 계약경위에 해해 김동원씨는 대한전척과 수의 계약 형식으로 공사계약을 체결한 것은 [본문으로]
  57. 경향신문 1968.06.22 건설협회서울지부는 21일 代議員(대의원)총회를열고 지부장에 鮮于永彬(선우영빈)씨(建設産業代表理事(건설산업대표이사))를 선출. [본문으로]
  58. 매일경제 1968.06.22 建協(건협)서울支部長(지부장) 鮮于永(선우영)씨를選出(선출) 건설협회서울시지부는21일하오 대의원총회를 개최하고支部長(지부장)에 鮮于永彬(선우영빈)씨(建設(건설)산업대표이사)를 새로선출했다. [본문으로]
  59. 경향신문 1970. 02. 13 회장 조정구, 이사 이재준(대림산업), 선우영빈(건설산업), 최종환(삼환기업), 정천석(고려개발), 김동환(대신토건), 이선호(남도건설), 이영두(신흥토건), 감사 김영선 (경수산업) [본문으로]
  60. 매일경제 1974. 08. 15 단체 대통령 표창 현대건설, 대림산업, 동아건설산업, 국무총리표창 삼부토건, 극동건설, 개인 동탑산업훈장 이주훈(금강산업대표), 박해원(초석건설대표), 배정일(남광토건대표), 철탑산업훈장 선우영빈(건설산업), 변세우(평화건업사대표), 석탑 산업훈장 오창수(금강산업현장소장), 이희선(동아건설산업현장소장), 산업포장 양근수(현대건설현장소장), 박의현(대림산업현장소장), 박충조(극동건설현장소장), 대통령표창 김영환(초석건설현장소장), 차질금(동금전자공업대표), 윤동선(대흥전기공업대표), 김남흥(철도공업현장소장), 국무총리 표창 황석조(궤도공영현장소장), 윤추성(동아건설공무과장), 안후현(현재건설전기과장). [본문으로]
  61. 취재 정연진 기자, 사진 이명헌.황순정 기자, 야인시대 하야시는 한국인 선우영빈, Sa Vie(싸비) 2002, 같은 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