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다. <12편 >

허구인물 전우치 2015. 8. 23. 09:50


12. 김두한은 징용 당한 조선인을 위해 반도의용정신대를 만들었나?

 

"스물다섯이 됐을 때가 태평양 전쟁 말기인데 해남도로 가라는 징용장이 나왔어요. 그때는 이미 미국 잠수함이 바다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남도에 가면 물귀신 되기 십상이었지요. 나 말고도 서울에 있는 주먹 3천명에게도 징용장이 나왔어요."

- 김두한, 제10화 해방될 때까지 주먹생활 하던 이야기, 노변야화, 동양방송, 1969.10.24

 

"나는 경시청으로 들어가 단도직입적으로 단게 국장을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사복을 입은 한 사람이 어디서 왔느냐고 놀랍다는 어투로 물었다.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김좌진」이라고 새긴 명함을 내밀고 이런 사람이 왔다고 전하라고 했다. 그는 명함을 들고 들어 갔다. 아까와는 다른 융숭한 태도로 나를 국장실로 안내하였다. 단게는 장화를 신고 의자에 푹 빠진 듯이 앉아서 나를 상하로 훑어 본 다음 「장군이 당신입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내가 장군의 아들이라고 답했다. 그제서야 그는「소오데스까」라고 얼굴의 긴장을 푼 다음 앉으라고 했다. 나는 앉았다. 그리고 우리는 부드럽게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면서 내가 징용에 응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 김두한, 죽음을 결심하고, 내가 휩쓸던 거리와 골목들, 세대 제8권 통권81호, 세대사, 1970.04

 

"조선총독부의 경무국장은 ‘단게’라고 나이는 예순 대여섯 정도이고 키가 5척에 불과한 사람이었습니다. 끌려가다 죽나 여기서 죽나 매한가지라 생각하고 단게를 찾아갔습니다. 김좌진이라고 쓴 명함을 턱 갖다 대니 날 위 아래로 훑어보더군요. 내가 ‘나는 가짜다. 김좌진의 아들이다’ 하니 경무국장이 막 웃더란 말입니다."

- 김두한, 제10화 해방될 때까지 주먹생활 하던 이야기, 노변야화, 동양방송, 1969.10.24

 

"김좌진 장군에게 아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아들을 오늘 처음 봤다며 껄껄 웃더니 보안과장을 부르더군요. 보안과장에게 내가 그 유명한 김좌진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고 얘기하니까 보안과장 눈이 휘둥그레졌지. 그때나 지금이나 말단들이나 아무나 잡아가고 그랬지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점잖아요.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길래 앞으로 징용에 내보내는 사람들에게 최소한도의 교육을 시킬 필요가 있는데, 내가 그 일을 맡고 싶다고 했죠. 그러면서 최근에 아사히신문에 기사가 난 큐슈 탄광사건을 예로 들었어요. 조선 징용자들이 가스가 차 있는 탄광에서 촛불을 켜는 바람에 폭발한 건데 이는 징용자들을 교육을 안시켜 몰라서 그런 것이니 앞으로도 교육을 안 시키면 이런 일이 계속 발생할 거라 했습니다.

내게 맡겨주면 군사 훈련뿐 아니라 정신 훈련도 잘 시켜서 보내겠다고 하니 단게 국장이 ‘자네 아버지는 독립군 사령관이지만 당신은 황국신민으로서 이번 전쟁에서 우리에게 협조하겠단 말인가’하고 묻더군요.그래서 나는 아버지도 돌아가셨고 시대도 지났으니 대일본국민으로서 아시아의 대동아 공영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깨달은 바 있다고 대답했지요.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던가요? 그럼요. '대신 사무실과 먹을 것(그때는 배급제였으니까요)과 돈을 좀 주셔야겠습니다' 했더니 보안과장에게 협조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경기도 경찰부장이었던 오카를 소개받아서 지금 국세청 뒷터에 반도의용정신대를 만들게 됐지요. 징용으로 끌려가게 된 5천여 명의 동지들을 구할 수 있었던 거지요. 일정 기간 동안 훈련만 받으면 소집 영장도 안 나오고 배급도 나오니까 금세 1만 천여 명으로 늘어났어요. 종각 뒤 골목으로 들어가면 부병루라는 큰 곰탕집이 있었는데, 그 근방의 1백평짜리 건물을 썼고, 하루 소 두 마리씩, 빵 몇 만 개 등을 배급받았지요. 임시로 훈련받을 장소로는 수색이 선정됐지요. 그 1만 명을 한달에 1천 명씩 돌아가며 훈련시키면서 징용을 연기하다가 해방이 됐지요."

- 김두한, 제11화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것을 총독부국장에게 밝힘, 노변야화, 동양방송, 1969.10.25

 

1938년 4월 1일 법률 제55호로 국가총동원령법을 공포한 후, 1939~1941년에는 '기업체 모집 형식'으로, 42~43년에는 조선징용령을 내려 '조선총독부 알선 형식'으로 사람을 끌고 갔다. 하지만 김두한이 말하는 '징용장 발부 형식'은 조선징병령에 근거해 1944년부터 조선인 징병을 실시하기로 한 일본각의(42년5월8일) 결정에 따라 1944년부터 대상자에게 영서(명령서,징용장)를 발부한 것이다.

 

따라서 김두한이 25살이던 때는 1942년으로 조선인 징병제를 실시하지 않고 있었기에 김두한에게 영서가 나올 수 없었다. 즉 김두한을 남양군도로 보낼 생각이었다면 노동자로 보내는 것이었기에 그냥 달콤한 말로 취직시켜서 발령 보내면 충분하였다.

 

김두한은 1969년에는 자신이 반도의용정신대를 결성하여 징용장을 받은 수 많은 조선인 폭력배들을 구해 냈다고 말했다. 그런데 1970년에는 전혀 다른 말을 한다. 김좌진 아들이라는 것을 밝혔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혔다고 거짓말을 한다. 김두한은 해방 전에는 단 한번도 감옥에 간 사실이 없다. 경찰서 유치장에나 들락거렸던 파락호에 불과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 속에 칼날이 숨어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었고, 그랬기 때문에 경찰에 몸을 바쳐 일생을 살면서 오늘의 경무국장의 지위에까지 오른 그를 존경했었다. 그랬었는데 그는 간악하게도 그 부드러움 속에 독소를 품고 있었고, 그 독소를 내가 그 방을 나가자 마자 내뿜었다.

나는 그의 방을 나가는 길로 체포 되었다. 그리고 독립군 총사령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았었다. 나는 그 선고를 담담히 받아 들였다. 담담히 받아 들였기 때문에 나는 살아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감옥에 들어간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방이 되었고, 그래서 나는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 나왔었지만, 감옥이란 사슬은 그 뒤로도 너무나 많이 나를 찾아 왔다."
- 김두한, 죽음을 결심하고, 내가 휩쓸던 거리와 골목들, 세대 제8권 통권81호, 세대사 1970. 4

 

반도의용정신대는 우연한 사건이 가져온 결과물이었다. 

 

1944년 초봄 총독부 경무국장 단하욱태랑(丹下郁太郞 단게 이구다로)이 엄청나게 큰 돈인 34만원과 서류를 분실하자, 경찰관 정년 퇴직후 총독부 촉탁으로 있던 삼륜화삼랑(三輪和三郞 미와 와사부로)에게 맡겨서 조사에 착수 했다. 삼륜은 종로 네 거리에 소매치기 등 특수범죄자가 많이 있어서 종로쪽을 의심하고서 종로 불량배들을 내사한 결과 심각한 수준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을 발견 했다. 이에 삼륜은 경무국장 단하에게 전시체제에 위협이 될 수 있으니 종로 폭력배들을 남양군도로 보내던지, 수 십명의 수배자들만이라도 바다에 수장 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장명원 피의자 신문조서 제3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1949. 8. 31)

 

이 소문을 들은 김두한과 두목 고희경은 살아 남으려고 여기저기 구명에 나섰다. 이준영(李駿榮)이 총독부 보안과장 팔목신웅(八木信雄 야기 노부오)과의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했고, 총독부 보안과 직원 문 모가 상담 역할을 했다. 경무국장 단하는 폭력배들을 교화시키며 관리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총독부 보안과장 팔목, 경기도 경찰부장 강구웅(岡九雄 오카 쿠시오), 형사과장 최연(창씨개명 高山淸只 다카야마 기요타다), 본정 경찰서장 겸전청(鎌田淸 가마다 기요시)이 실무를 추진했다.

 

1944년 4월 12일 친일단체 반도의용정신대가 출범했다. 단장에 대구 경찰서 고등계 형사 장명원(일본명 야기), 부단장에 김두한, 교도부장에 김남산, 사찰부장에 김기환을 임명했다. 용산도변(龍山渡边)이 시공하던 능곡-의정부간 철도 공사에 투입해 가을에서 겨울까지 일당 1원 10전씩 받고 일하게 했다.(장명원 피의자 신문조서 제3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1949, 6. 2, 1939. 8. 31)

 

김두한이 수 만명을 모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으나 실제 모인 불량배들은 100여명이었다. 이 불량배 100여명은 머리를 빡빡 깎임을 당한채 일본의 사상교육을 받더니 두 달 뒤에는 전쟁동원령에 따라 집안 살림까지 가져다 팔아 일본군 해군에 방위성금을 바쳤다.

 

"폭력을 행사하여 한때 종로 뒷거리의 밤의 풍기를 어지럽히던 무직 청년, 즉 뒷거리의 싸움패라고 불리워 지는 그들도 가열한 시국하 180도 전환을 하여 조금이라도 총후의 도움이 되겠다고 지난 4월 12일 야기(주: 대구 경찰서 고등계 형사 정명원)씨를 두령으로 반도의용정신대를 조직한 이래 매달 10일, 20일, 30일의 3회에 걸쳐 부내 견지정 80번지 사무소(주: 김두한이 친일단체 대동 일진회에서 폭력 용역으로 활동할 때 알게 된 소유권 분쟁 소송 상대였던 시천교의 교당으로, 경무국에 빼앗아 사용하자고 건의하고는 탈취에 앞장 섰었다)에서 대원 100여명은 인격수양에 시국인식에 연성을 거듭하여 오던 바, 지난 5월 말일의 수양회 석상 야기 두령으로부터 『먼저 금속 회수로부터 봉공하자』는 훈시를 듣자 그들은 넉넉치 못한 가세임에도 정성으로 놋그릇 등을 백 수십점, 동화, 니켈화, 고화 등 50여원을 가져 왔음으로, 야기 두령은 12일 해군 무관부를 방문하고 대원의 갱생을 자세히 말한 후 금속회수 대금 315원 85전과 동화, 니켈화 등 50원을 헌납하였는데, 단장 야기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금후의 활동을 맹서한다. "한때는 쌈패로서 말썽을 부리던 그들도 시국을 인식하고 총후의 봉공에 매진하고 있는 자태는 참으로 믿음직스럽다. 그러나 아직도 폭력행동을 하는 자가 있다면 규칙에 비추어 단호한 처벌을 할 터이다. 금후는 오로지 당국의 지도 밑에 활동을 하려 한다"."

- 매일신보 1944. 06. 13

 

김두한을 비롯한 폭력배들은 여기에서 권력과 결탁하는 법을 배우고, 권력의 지시를 이행하는 댓가로 보호 받는 것에 눈을 뜨게 된다. 친일단체 반도의용정신대는 이후 김두한이 이승만이 조직한 정치 테러 조직 대한청년단의 감찰부장이 되자 그대로 흡수되어 한국사에서 본격적인 정치 폭력배 세상을 연다.

 

결론적으로 김두한은 일제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

 

 

 

<김두한이 일본이 조직한 반도의용정신대 소속으로 1944년 가을부터 12월까지 일당 1원 10전과 숙식을 제공 받으며 용산도변(龍山渡辺 류잔 와타나베)이 시공하던 능곡-의정부간 철도 공사판 인부였을 때 찍은 사진>

<능곡-의정부간 철도를 1946년 6월에야 완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