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다. <8편 >

허구인물 전우치 2015. 8. 22. 13:32

8. 김두한을 오숙근이 키웠나? 원 노인이 키웠나?

 

1) 오숙근이 김두한을 키웠다는 주장

 

자기 아버지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김을동만이 김좌진의 모 이중규가 김두한을 13살 때부터 키웠다고 유일하게 주장한다.1

 

김좌진의 장례를 1930년 3월 25일 오전 9시 만주 신시에서 사회장으로 치뤘다. 김좌진이 일군 생활 터전과 조선인 지역사회를 김좌진의 동생 김동진이 이어 받아 유지했음으로 김좌진의 처 오숙근은 계속 신시에 머물렀다. 김좌진과 혼외 관계였던 나혜국은 어머니와 동생이 있던 해림으로 옮겨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1931년 9월 19일 일본군은 앞날 조작했던 류타오후 사건을 내세워 전격적으로 만주를 침략하였다. 1932년 3월 1일 일본은 괴뢰 만주국을 수립하었다.

 

국민당 패잔병들은 지역 주민들에게서 식량을 약탈했고, 전쟁을 피하려는 피난민들이 안전한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 혼란스러운 틈에서 나혜국은 자녀를 데리고 1932년 1월 귀국하여 서울 종로구 운니동 21번지에 방을 얻어 정착하였다.

 

오숙근이 언제 귀국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1932년 12월 23일자 중앙일보 기사가 유일하다.2 그런데 기사의 내용을 아에 신뢰할 수 없다.

 

애초에 김좌진의 동생 김동진이 이어 받아 잘 유지 하고 있던 한인 지역사회가 신시에 있었기에 오숙근은 신시역에서 기차를 타고 바로 귀국하면 될 것을 구태여 위험지역 석두하자까지 갔다는 주장부터가 설득력마저도 없다.

 

나혜국은 김좌진의 동생 김동진이 마련해 준 돈으로 1932년 1월 기차를 타고 다음 날 서울에 도착했다. 중앙일보의 주장대로라면 오숙근도 다음 달인 1932년 2월에 출발했기에 기차를 탔으면 다음 날이면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더구나 피난민에 대한 배려로 철도국은 열차 요금의 절반을 할인해 주고 있었으며, 총독부는 안동현에서 귀향하는 사람들에게는 여비까지 보조해 주었다.3

 

중앙일보는 오숙근이 1932년 봄(2월)에 '석두하자로 은신하여 8월까지 중국 패잔병의 식량 요구에 시달렸으며, 6개월간 지냈다'고 주장하였다. 이 부분부터 사실과 맞지 않다. 이미 4월 중하순에 석두하자는 3천여명의 국민당 패잔병들이 방화하고 약탈해서 폐허가 되었기 때문이다.4 국민당 패잔병들이 석두하자에서 식량을 약탈했다는 기사들은 모두 1932년 4월에 집중해 있고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중앙일보는 오숙근이 이미 4월에 황폐해진 석두하자에서 추수철도 아니라서 식량을 조달할 길이 없는데도 8월이 될 때까지 식량을 빼앗기면서 무려 6개월이나 살았다는 허황된 주장을 한다.

 

중앙일보는 오숙근이 8월에 '하얼빈 피난민 수용소에 입소하여 아침에는 조 죽을 먹고 저녁에는 강냉이 떡을 먹으면서 생활을 하다'가 '하얼빈 수용소 생활 2개월째에 4살 된 딸 김석한을 잃었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인 피난민들이 한국 국경 방향으로 이동한 것에 반해 오숙근은 반대로 북만주로 깊숙히 이동했다는 것도 이상하다. 또한 오숙근에게는 1932년에 4살 된 딸이 없었다. 그리고 8월에는 하얼빈에 피난민 수용소 자체가 없었다. 하얼빈에 수용소가 생긴 것은 물난리가 나서 한국인 수재민 1,991명이 발생하고, 동시에 콜레라가 발병하여 사람들이 죽어 나가던 9월 초로 이는 피난민 수용소가 아니라 이재민 수용소였다.5

 

중앙일보는 '오숙근이 1932년 10월 14일 하얼빈에서 일본군 군용 열차를 타고 조선 땅을 다시 밟았다'고 주장하였다. 일본군 군용 열차가 조선인 피난민을 실어 나른 적이 없다. 1932년 4월 12일 동철철도회사에서 일하던 백광승(25), 석수림(24), 윤승재(33), 화(44) 및 농부 이양자(22) 등이 하얼빈 초입에 있는 성고자역을 통과하던 일본군 군용열차를 전복시켜서 수송중이던 가솔린이 폭발하여 일본군 50여명이 사상 당했다.6 이로 인해 일본군 군용열차에 대한 민간인 접근을 더욱 금지하였다.

 

중앙일보는 '오숙근이 1932년 10월 14일에 국경을 건너고, 12월 22일에 서울에 들어 왔다'고 주장하였다. '김좌진의 모는 안성군 양성면 덕봉리 남의 집에서 살고, 오숙근은 종로구 팔판동 158번지에서 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김좌진의 모 이중규는 안성에서 살면서도 왜 남의 집에서 살아야 했는지 의아하다. 김좌진 장례식 때 양아들로 불리며 상주 노릇을 했던 김좌진의 친조카 김문한의 외조모 집이 안성군 안성면(읍내면)에 있었음으로 김문한이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기사의 끝은 '오숙근이 자기 소생은 아니지만 김두한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신문들과 마찬가지로 중앙일보도 역시 먼저 입국해서 서울 종로구에서 사는 나혜국과 김좌진의 공인 받은 혈육 김철한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 오히려 당대 가장 성공한 유명 잡지였던 삼천리가 2회에 걸쳐 나혜국과 김좌진의 친아들 친딸에 대한 특집기사를 실었다. 삼천리는 반대로 김두한을 전혀 찾지 않았다.

 

김두한이 13살이면 김좌진이 암살당한 해인 1930년이고, 오숙근이 서울로 들어 온 때는 중앙일보의 주장대로라면 1932년 12월 22일로 열흘 뒤면 김두한의 나이 16세가 되기에 김을동의 말이 맞지 않는다. 더구나 김을동은 증조할머니가 김두한을 찾아내 키웠다고 주장하는데, 기사대로라면 증조할머니 이중규는 서울이 아닌 안성에 머물고 있었기에 김두한은 안성에서 생활하고 있어야 했다.

 

이렇듯 도올의 주장이 말이 안 되는 게 아니라, 상식적으로 김을동의 주장이 말이 안 된다.

 

2) 원 노인 설렁탕집 사동옥에 취직한 김두한

 

김두한은 원 노인이 자신을 키웠다고 주장한다. 사실 원씨 노인과 사동옥이 존재했는지도 의문이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밥을 구걸하고 있는데, 사동옥 식당 주인이 돈을 받다 말고 저를 가만히 쳐다 봐요. 그리곤 갑자기 버선발로 뛰어 나왔어요. ‘너 두한이 아니냐’ 하더니 저를 붙들고 흐느껴 우는 거예요. 전 설렁탕집이 무슨 음식 파는 집인지도 몰랐고 게다가 아버지가 형평사 회장했던 것도 몰랐으니 그 양반이 왜 우는지 몰랐지요.네 외삼촌이 집을 팔아먹고 도망간 뒤 개성 외삼촌 집으로 이사를 갔다고 하던데 언제 왔느냐고 묻더군요. 외삼촌이 워낙 때리니까 160리를 걸어와 지금은 이렇게 밥 구걸하고 다닌다고 했더니 ‘네가 얼마나 귀한 집 아들인 줄 아느냐’며 날 끌고 이발소에 가서 머리 깎이고, 그 사이 양복을 사오셨어요. 목욕탕에 데리고 가더니 할아버지가 손수 씻겨요. 잠깐 동안에 귀공자가 됐지요. 원씨 노인이 자기 집에 데려가 진국 설렁탕과 소혓바닥 등을 먹여 줬어요. 그후 17세까지 원씨 노인 밑에서 매일 고기 먹으며 성장한 거지요.

 

장롱 밑에서 아버님 사진을 슬그머니 끄집어내더니 ‘너 이 양반이 누군 줄 아느냐’ 그래요. 잘 모른다고 했더니, ‘이게 네 아버지다, 잘 봐라’ 하고는 한 달에 한 번씩 보여줍디다. ‘네 아버님이니까 잊어버리지 마라. 네 아버님은 독립군 대장이다. 훌륭한 분이지만 너는 공부는 하지 마라. 공부하면 나쁜 사람 된다. 공부 안 해도 스스로 깰 때가 있으니까 밥만 먹고 운동 해라’는 말을 틈날 때마다 하셨지요. 그리고는 하루에 50전씩 주셨어요. 설렁탕 한 그릇에 10전 했고, 극장은 5전 할 땐데 제가 설렁탕과 고기 먹고 운동만 하니까 키가 쭉쭉 자라요." - 제5화 소년시절 걸어온 이야기, 노변야화, 동양방송 1969.10.18

 

 

 

<분쟁 시기의 조선극장, 1936년 6월 11일 오후 4시 방화로 불에 타 사라졌다.>

 

김두한은 8살 때부터 활극에 빠져 사동옥 앞에 있던 조선극장에 출입했다고 주장하였다.7 어린 김두한의 눈에는 새로운 세계였다. 김두한은 자신은 무료로 조선극장에 들어 간다고 주장하는데 결국 몰래 숨어 들어가는 거였다.8

 

 

 

<형평사 전국대회. 1926년 4월 25일 오후 1시 30분경, 견지동 시천교당>

 

당시 설렁탕은 전국적으로 식당에 따라 15전 아니면 20전을 받았다가 식습관이 변해 많이 먹지 않는데 여전히 양을 많게 해서 비싸게 받는다는 여론에 따라 총독부 지시로 1930년 12월부터 10전으로 가격을 내렸다.9 그런데 김두한은 원 노인이 8살인 자신을 품에 안아 재워 주고,10 자신에게 하루 3끼를 먹여 주면서 날마다 50전씩 그냥 줬다고 말했다. 직원이 아니면 어떤 식당 주인도 생면부지의 사람을 먹여주고 재워 주면서 하루에 50전씩 그냥 주지 않는다.

 

1928년에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는 여관의 경우 보통 1원 정도였다. 관광지는 3원까지 받았다. 8살 김두한이 숙식을 제공 받으면서 매일 50전의 현금을 받았다면 매달 45원을 버는 꼴이었다. 1928년 당시 사범대를 나온 교사 초급 월급이 42원이었고, 1940년대 초반에도 일용직 육체 노동자가 식사를 제공 받고 일당으로 1원을 넘게 받으면 썩 적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김두한은 원 노인이 자신에게 잘 해준 이유로 형평사를 내세우고 있다.11 김좌진 장군이 천대 받던 백정들을 위하여 백정들의 조합 형평사를 조직해서 권리를 갖게 해주고, 사비를 털어서 시내에 푸줏간을 차려 줬기에 원 노인이 그 은혜를 잊지 못해서 자신을 길러 준 것이라고 주장한다.12

 

형평사를 김좌진이 만들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김두한은 원 노인이 형평사 부회장 출신이라고 주장하지만 형평사는 회장제가 아니라 의장제였다. 1926년 최초 전국 대회에서 임시의장은 장지필, 부의장은 강상호를 선출했다.13 또한 형평사 핵심 인물에도 식당 주인 원씨 성은 없다. 따라서 원 노인은 김좌진을 만난 적이 없으며, 김두한 역시도 이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로 고아 김두한은 원 노인이 운영하던 설렁탕집 사동옥에서 8살 때부터 허드렛 일을 시작하였다. 설렁탕은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하루 종일 물을 채우고, 둥둥 뜨는 기름을 걷어 내고, 불을 봐줄 노동자도 필요하다.14 또한 당시에는 설렁탕 집들은 설렁탕을 자전거로 배달하는 사람을 두고 있었다.15

 

3) 극장 매점 직원으로 취직한 김두한

 

김두한은 자신에게 잘 해준 원노인이 자신이 19살 때 죽어서 자립해야 했었다고 말했는데,17 이는 자신이 19살이 되자 설렁탕집 일을 그만 뒀다는 소리다. 김두한이 자신은 조선에서 최고 큰 조선극장에서 무료로 영화를 보고 극장 옥상에서 모래 주머니를 치고, 철봉을 하고, 아령을 들며 체력 훈련했다고 말한 것은 김두한이 그토록 원하던 조선극장에 취직했다는 뜻이다.

 

김두한은 19살이 되자 설렁탕집을 그만 두고 조선극장 매점에 취직했지만, 얼마 안 있어 6월에 조선극장이 방화로 불에 다 타버렸기에 몇 개월 밖에 일을 할 수 없었다. 김두한은 우미관 극장 매점에 다시 취직하여 관객들에게 음식을 팔았다.18 

  

결론적으로 김두한은 8~18살 때까지 설렁탕집에서 일을 하다가 19살 때부터 극장 매점에서 일했다.

 


 

  1. 90년 도올 글, 이슈화 싫어 참아 왔다, CBS 김현정의 뉴스쇼, 2011. 11. 4, 김현정: 그러니까 아버지 김두한 전 의원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확실하다는 말씀이신데요. 확실한 근거를 요구한다면 제시할 수 있는 게 있습니까? 김을동: 물론이죠. 우선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도올의 주장이 말이 안 되는 게 우리 증조할머니께서 우리 아버지(김두한)를 찾은 나이가 13살입니다. 그때부터 할머니 슬하에 있었어요. [본문으로]
  2. 중앙일보 1932. 12. 23 고 백야 김좌진의 최근 활동하던 경로와 그의 최후가 어찌나 비절참절하였든 것은 우리 조선 사람치고는 모를 이가 없을 것이다. 그가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남 못할 고생을 하였으며, 어찌하여 비참한 최후를 지었나? 이것을 생각하면 누구나 형용 못할 느낌이 돌며 가슴이 부질없이 쓰라림을 금치 못하리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도 말 못할 참경에 빠졌다면 측은한 눈물이 스미어 돌거든 우리의 기억에 가족이 인생으로 막다른 생사의 기로에서 방황한다면 누구나 한줌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으랴. 백야의 자친은 내일이 어떨지 모를 칠십이 넘은 극노인으로 지금 안성군 양성면 덕봉리 남의 집에서 마른 창자를 축이지 못하고 지내며 백야의 미망인 오씨는 시내 팔판동 158번지 김준한씨의 집에서 현순백결의 인생으로 견디지 못할 고생을 하고 있다. 만리이역 간도 강산에서 이런 고생을 함은 오히려 분수이지만 고국에서 와서도 이런 지경을 겪음은 조선 사람의 사회가 너무나 얼음장 같음을 그러서도 저주 하리라! 오씨가 이 강산을 밟기는 음력 9월 15일이오. 서울은 작일에 들어 왔는데 여기까지 오게 된 사세와 그 동안 지나 온 갖은 고생 갖은 참경은 듣는 우리의 니에서도 신물이 나거든 당자 그러서야 간장이 몇번이나 녹았으며 금창이 몇번이나 터졌을까. 백야가 작고한 후에 의지 없는 홀몸이 늙은 시어머님과 어린 딸을 데리고 끊어지지 않은 목숨을 보전하노라고 이리 굴고 저리 굴다가 작년 만주 사변이 난 후에는 총끝 칼끝으로 돌게 되었다. 금년 봄에는 북만주 석두하자에 숨어 있었는데, 패잔병들이 떼를 지어 이 촌락 저 촌락을 노략하며 굶고 있는 그에게까지 쌀을 내놓으라 돈을 내놓으라 하는 가진 위험을 6월까지 지났으니 그의 가슴은 줄에 앉은 새와 같았을 것이오, 포수 만난 노루와 같았을 것이다. 그렇게 6개월을 지나다가 약한 다리, 연한 발바닥으로 시어머님을 업어 끌며 할빈으로 나왔다. 그때는 할빈의 천지도 연관이 되었다. 미우나 고우나 좋으나 싫으나 할 수 없이 피난민 수용소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조선인 일인, 중국인, 로서아 사람 할 것 없이 한 곳에서 복작거리었다. 아침엔 조죽, 저녁에는 강랑떡으로 2개월 가까이 지나는 동안 그 부인에게 단 하나 혈속인 4살된 딸 석한을 잃었으니 남편도 죽고 혈속까지 끊치는 이 악착한 경우를 할빈 수용소에서 당한 그 광경을 생각하면 그 부인의 모양이 조선에 다시 나타난 것을 의외라 아니 할 수 없다. 이 일을 당하고 군용 열차로 고비의 외로운 몸이 조선을 다시 밟게되고, 갈 때아 올 때가 불과 14년이란 세월이었만은 인사의 변천이 이렇듯 허무하여 남편과 딸 둘 합하여 세 해골을 저 만주에 두고 오는 그의 생각... 고국은 고국이나 생소하기 짝이 없고, 친척이 많으나 인심과 사정이 전과 달라 역시 안돈할 곳을 얻지 못하고 유리표박을 아직 계속 중이오. 그 부인의 소생은 아니나 백야의 아들 두한을 보고자 하되 그도 여의치 않아 애를 태우는 중이다. 그도 호강하던 가정에 나서 호강하든가 가정에 시집를 갔었고, 그의 일가는 아직도 비전호강을 자랑하는데 이 부인 홀로 이 고생은 과연 무슨 까닭인가? [본문으로]
  3. 중앙일보 1931.12.17 총독부 경무국 조사에 의하면 지난 12월 10일까지 압록강 철교를 건너 내지로 입국한 피난민이 1,575명이나 된다는데 이와 같은 피난민에게 대하여는 철도국에서는 차비를 반할인하고 안동현으로부터 고향까지 가는 여비는 총독부에서 보조한다고 한다. [본문으로]
  4. 동아일보 1932.04.29 중동철도 동부선 석두하자는 잔병단의 방화 약탈로 전멸이 되었다. 그래서 이 방면으로부터 피난 온 러시아, 만주 조선인들은 1천명에 달한다. [본문으로]
  5. 동아일보 1932.09.09 설상가상의 악역 호역환자만 육십 전긔 할빈 방면의 수해 리재민의 상태는 그야말로 물 지나간 뒷터에서 알몸동이만가지고나온 사람들이라 의복 등 범절이 맛당치 아니할 뿐더러 수해 이후에 반드시 오는 악역으로 인하여 비상한 고통을 밧고 잇다한다. 더욱 호열자의 창궐은 될 때로 되어 조선인 이재민에게만 지난 3일 현재 64명의 환자를 내이엇다 한다. 그러나 사망률은 비교적 적어 그중 15명이 사망하얏고 목하 45명이 격리 치료를 밧고 잇다 한다. 이외에 의란 지방의 호역은 동 지방을 쓸다시피 하야 조선인으로 호역에 사망한 수가 30명에나 달하얐다는바 그 환자의 수는 상상하고 남을 것이다. [본문으로]
  6. 동아일보 1932. 07. 14 4월 12일 동중남부선 성고자역을 통과하는 일본군 군용열차를 전복시켜 기차에 적재했던 가솔린이 폭발하며 50여명의 사상자를 내어 처참한 광경을 이루었었다. 그 후 범인들을 검거하기 위하여 보병, 기관총대, 사격대 등이 6월 10일 합이빈에 출동하여 일제 검거를 했는데 그 씨명은 아래와 같다. 수괴 동철공부두 백광승(25) 도망, 동철공부 석수림(42) 도망, 동철수리공 윤승재(33), 농업 이양자(22), 동철감독부왕 화(44) 도망. [본문으로]
  7. 김두한, 제5화 소년시절 걸어온 이야기, 노변야화, 동양방송 1969.10.18, 식당 앞에 서울에서 제일 큰 조선극장이 있었어요. 나는 무료로 들어 가거든. 극장 옥상에서 샌드백 치고 철봉, 아령하면서 매일 영화를 봤어요. 그때는 무성영화인데 거의 전부 서부활극이나 칼싸움이었어요. 8세 때부터 한 10년 동안 사람 때리는 것만 봤는데, 아마 그 때문에 주먹대장이 된 거 같아요. 18살 때부터 주먹대장으로 나갔고, 스무살 때 전국의 주먹대장 오야붕이 됐어요. 먹고 살 도리가 없으니까 그렇게 된 거죠. 원노인은 내가 열아홉살 적에 돌아가셨으니까 자립해야 했죠. 힘은 있는데, 울분을 터트릴 데는 없고, 그러니까 사람을 치기 시작한 거예요. [본문으로]
  8. 김두한, 제12화 어린시절 일생 일대의 망신, 노변야화, 동양방송 1969.10.27, 13살 때 원노인이 50전을 주는데 호떡집엘 가서 애들 호떡을 다 사줬어요. 조선극장 구경은 들어가야겠는데 돈이 있어야지. 조선극장 뒤로 들어가면 쌍과부집이라고 있는데 사닥다리를 빌려서 여자 변소로 들어갔는데 고장난 칸이 하나 있었어요. 그리로 구멍이 나 있어서 극장으로 들어간 거에요. [본문으로]
  9. 동아일보 1928.11.27, 1930.11.12 [본문으로]
  10. 김두한, 명인옥중기, 희망출판사, 1966. 03.10, 55쪽, 元영감은 나를 매일 밤 품에 껴안고 주무시었다. 그리고 새벽 4시가 되면 자는 나를 꼭 깨워 설농탕 한 그릇을 먹이고 또 재웠다. 그야말로 진짜 설농탕이다. 조악했던 건강 상태는 곧 회복되었다. 그리고 나는 운동을 했다. 얼마 가지 않아 나는 왼손 하나만 짚고 파고다 공원 담을 훌쩍 뛰어 넘을 수 있게 되었다. [본문으로]
  11. 김두한, 제5화 소년시절 걸어온 이야기, 노변야화, 동양방송 1969.10.18 형평사는 이조 5백년 동안 압제를 받아 동소문 밖에서만 살았어요. 그런데 아버님이 안동 김씨들한테 공갈을 쳐서 돈을 마련해 낙원동을 비롯해 인사동, 돈의동에 푸줏간을 차려줬어요. 형평사 부회장을 하던 분 중에 원씨라는 노인이 있었어요. 아버님보다 약 30년 위신데, 그 분이 인사동에서 사동옥이란 설렁탕집을 하고, 아들은 낙원동에서 고깃간을 하고 있었어요. [본문으로]
  12. 김두한, 나를 길러 준 원씨 할아버지, 내가 휩쓸던 거리와 골목들, 세대 제8권 통권81호, 세대사 1970.04, 백정들을 천민의 지위에서 구제하여야 된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조합을 조직하고, 집안의 돈을 끌어 내어 그들에게 시내 각처에 푸줏간을 신설하여 주었다. 그때까지 푸줏간을 성 안에는 낼 수 없었고, 밖에서만 영업을 할 수 있었다. 천민으로 규정 지워진 그들은 성 안에 발을 들여 놓을 자격까지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런 사회적인 푸념을 양반이라고 콧대가 드높던 안동 김씨의 일족인 아버지께서 과감하게 실현한 것이다.그때의 뼈속에 사무친 고마움이 늘 노인의 가슴에 서려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릴 때 본 나를 알아보고 불러다가 길러 준 것이다. [본문으로]
  13. 동아일보 1926.04.25 [본문으로]
  14. 조풍연, 서울 설렁탕, 통째 고아 우려내는 짓이 투박스럽고 거칠기는 하지만 소라는 짐승의 맛을 이보다 더 한꺼번에 느끼는 방법은 달리 없다. 한때 이름난 설렁탕 집이 서울에 몇 군데 있었다. 이문옥, 대창옥, 사동옥, 이남옥, 대성관 등을 들 수 있다. ... 옛날의 설렁탕 집에서는 소 한마리에서 우피와 오물만을 제해 놓고 큰 가마솥에 넣어 새벽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끓인다. 오늘날의 뜨물국 같은 설렁탕의 맛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본문으로]
  15. ①나일, 그와 감방 12, 동아일보 1929.11.03 설렁탕 그릇의 탑을 둘러 맨 뽀이의 자전거가 사람의 물결을 바느질한다. ②동아일보 1931.11.06 만주 피난 동포의 참상은 귀보를 통하여 듣사옵고 다과를 불게하고 저희들의 주머니를 털어 보내나이다.=형평사원, 설렁탕 배달부, 수육 점원 등. [본문으로]
  16. 전두한, 제5화 소년시절 걸어 온 이야기, 노변야화, 동양방송 1969. 10. 18 원노인은 내가 열아홉살 적에 돌아가셨으니까 자립해야 했죠. [본문으로]
  17. 동아일보 1982. 11. 18, 1920년 우미관의 변사로 들어 가 해방될 때까지 일류변사로 이름을 날렸던 성동호씨(79. 서울 서댁문구 연희3동 350의 10)는 그때의 우미관 내부 모습을 이렇게 설명한다. (중략) 우미관 하면 김두한씨와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성동호씨는 김두한씨가 우미관과 조선극장 매점 관리권을 쥐고 극장 안에서 음식을 파는 가 하면 영화제목이 적힌 깃발을 들고 광고하는 일도 도맡아 했다는 것.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