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다. <7편 >

허구인물 전우치 2015. 8. 22. 09:40

7. 김두한은 청계천 다리 밑에서 거지 생활을 했나?

 

"어머니와 할머니가 예비검속을 했어요. 어머니 할머니가 안 계시니까 여덟 살 먹은 놈이 완전 거지가 된 거죠. 외삼촌이 집과 땅을 팔아 먹었으니까. 어머니의 오빠인데, 매일 도박하고 술 먹고 하는 게 일인 사람이었어요. 인사동 집이 백여 칸 됐고, 식모 한 사람이 집안 일을 거들어 주었는데, 어느날 인력거 타고 학교 다녀 왔더니 외삼촌이 도망갔다고 집달리가 와서 절 내쫓아 버렸어요.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되어 종로 2가 장자구 다리 밑에서 지냈습니다." - 김두한, 제4화 부친 김좌진장군을 만주에서 만나고 온 얘기, 노변야화, 동양방송 1969.10.17

 

"해가 저물면 남의 집 처마 밑에서 한데 잠을 자고, 또 날이 세면 걸어가면서 구걸 행각을 했다. 1주일 남짓을 걸어서 서울로 내려올 때, 밤에 가끔 울었다. 달밤은 아주 질색으로 싫었다. 어린 나를 센티멘탈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행복한 소년들이 저녁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초가집으로 휘파람을 불며 달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 눈시울이 저절로 뜨거워졌다. 심지어 주인에게 끌려 마구간으로 들어가 따뜻한 소죽을 맛있게 먹는 소가 나보다 팔자가 좋다고 생각했다. 캄캄한 밤을 홀로 외롭게 지내면서 나는 반항을 배웠다. 무엇이든지 반항하고 싶었고 어떤 뚜렷한 반항의 대상도 없었지만 “왜놈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왜놈을 없애야겠다” 이러한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찼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대망의 서울에 도착한 것은 해가 져서 사방이 어둑어둑한 겨울밤이었다. 입김까지 어는 어느 몹시 추운 겨울 날씨였다." - 김두한, 도보로 180리 서울 찾아 남하,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 김두한 회고기 1963.

 

"해 저문 전차 정거장에 쭈그리고 앉아서 네온사인의 불빛만을 바라보다가 왕초에게 붙들렸다. 왕초에게 이끌려 다리 밑에 도착해보니 남녀노소 여러 걸인들이 있었다. 한 늙은이가 어린 놈의 몸이 건장하다고 칭찬해 주었다. 나는 이곳에 정착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의 애국자 독립군 사령관의 실자(實子)가 열 살의 나이에 장차구 다리 밑의 고아가 된 것을 일본 경찰도 몰랐고, 안동 김씨 명문도 몰랐으며, 뜻있는 동족도 몰랐다. 낮에는 밥을 얻어 먹고, 저녁엔 다리 밑에서 잠을 자고, 구걸한 돈을 왕초에게 바쳐야 하고, 적으면 얻어 맞고 ……. 그러나 신은 나에게 이런 생활을 오래 계속 시키지 않으셨다." - 김두한, 왕초에 잡혀 장차구 다리 밑에,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 김두한 회고기 1963.

 

김두한은 자신이 어떻게 거지가 됐는지조차 말이 일치하지 않는다.

 

종로 2가에 있는 청계천 장자구 다리는 광통교다.(국회20년, 485, 585 쪽) 장차구가 아니라 장자구가 바른 표현이다.

 

조선시대에 떠돌던 서울 다리 밑 빈민들의 이야기는 다리 밑이 아니라 청계천변이 무대다. 천재지변으로 대흉년이 들어 고향을 떠난 유민들이 서울에 들어 와 물이 흐르는 곳을 찾다보니 청계천이었고, 왕이 관심 가질만한 번화한 곳을 찾다보니 돌다리 주변이었다.

 

예를 들어 영조 초기에 가뭄과 홍수가 빈발하여 사람을 잡아 먹는데도 방치한 지방 관리가 처벌 받았고, 주민이 굶어 죽자 세금을 독단적으로 면제해 준 관리가 처벌 받았을 정도로 전국적인 흉년이 들었다. 이에 굶주린 사람들은 유민이 되어 서울로 몰려 들어 광통교를 중심으로 청계천변에 움막을 짓고 구걸을 하거나 채소밭을 일구며 나라에 식량 구호를 요구했다. 조정은 겨울에 이불과 옷을 구호 물품으로 제공하여 얼어 죽지 않게 했으며, 서울에서 일자리를 구한 사람들에게는 서울에서 계속 살도록 하고, 나머지는 고향으로 돌아 가도록 회유했다.

 

구조적으로도 옛날 다리 밑에서 거지들이 일년 내내 모여 산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 장마가 오면 청계천 상류에서 토사가 흘러 와 쌓여서다. 하천 바닥이 높아지자 비가 오면 물이 천변에 넘쳤다. 그래서 천변에 둑을 쌓아 집터를 높혀야 했다.

 

하물며 다리 밑은 비만 오면 휩쓸려 갈 정도로 순식간에 거센 물에 완전히 잠겼으니 거지들이 다리 밑에 움막을 짓고 안정적으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 했다. 한때 영조가 1760년에 청계천 준설 작업을 했지만, 토사가 도로 쌓였다.

 

1899년 대한제국은 전차를 종로에서 남대문까지 확장하는 공사를 하면서 광통교 동쪽에 바짝 붙혀서 선로를 깔았는데, 일제 강점기인 1910년에 종로-남대문 노선을 복선화 하면서 광통교 위에 상당한 두께로 콘크리트를 붓고 그 위에 선로를 깔았다. 그렇지만 광통교 아래는 준설 작업을 하지 않았다. 

 

<1930년대 사진. 광통교 위로 전차 선로가 깔려 있다. 우측 아래를 보면 교각  대부분이 물에 잠겨 있다.>

 

<1930년대 사진. 광통교 우측 하단을 보면 토사가 높게 쌓여 있고 그 토사에 광고 깃발을 꽂고 있다.>

 

<1953년 사진. 준설 작업으로 토사를 제거하자 비로소 광통교 교각이 완전하게 드러났다.>

 

1920년대와 1930대 광통교 다리 밑은 토사가 쌓여 숙이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낮았으며, 물이 고여 있어서 사람이 누워서 잘 수 없었다.  

 

종로에서 자란 김두한이 자신은 8살 때부터 인사동에 있던 조선극장에 출입했다고 주장하였는데(소년시절 걸어온 이야기, 노변야화, 동양방송 1969.10.18), 김두한이 8살 때인 1925년에 이뤄진 실제 조사에 의하면 종로에는 거지라고는 오직 남자 6명, 여자 1명만이 있었다. 

 

"삼십만이 산다는 경성부내에 오만여호의 집이 있으되 오척의 작은 몸뚱이를 붙힐 곳이 없이 창천을 덮고 대지를 까는 거지와 행려병자며 또는 이리저리로 정처 없이 떠다니는 부랑민은 얼마나 되는지 일일 오전 한시부터 경성부 국세조사에서 계원이 총출동하여 시내 각 경찰서 서원과 협력 조사한 결과, 종로서 관내 남자 6명 여자 1명, 본정서 관내 남자 258명 여자 333명, 서대문서 관내 남자 144명 여자, 동대문서 관내 남자 6명 여자, 용산서 관내 남자 15명 여자, 계 남자 483명 여자 44명, 총계 527명. 이와 같이 527명이라는 놀랄만한 생령이 십자가두에 방황하는 형편인데 이는 물론 조사의 눈에 뜨인 것으로 이밖에도 성벽 밑과 들판 사이에 얼마나 끼어 있는지 모를 것이라는 바 이런 주소가 없는 사람이 제일 많기는 본정 경찰서 관내의 291명으로 무너진 광희문 일대의 성터가 가장 참혹하더라." (동아일보 1925.10.02)

 

왜 종로에는 거지가 7명 밖에 없었을까? 종로에는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청계천 남쪽 본정(충무로)에 거지들이 가장 많이 몰린 이유는 신흥 일본인 동네여서다. 반면 청계천 북쪽 종로는 원시시대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로 개발이 이뤄 지지 않고 있었다.

 

"오늘날 당국의 방침이라는 것보다도 실행 광경을 살펴보면 40만 경성부민의 주머니 돈을 모아다 그 시설이 대부분은 본정 일대에 큰 힘을 빼앗기고 마는 터이라. 북부 일대는 아직도 원시시대의 그림자가 그대로 남아 있지마는 본정 일대는 길에 밥이 떨어져도 주워 먹게 되었다."(조선일보 1927.11.06)

 

반대로 청계천 남쪽, 조선 궁궐로부터 일직선으로 내리 뻗으며 청계천 건너 위치한 지금의 중구 서곡동 조선호텔 앞 조선은행 입구에서는 일고여덟살 되는 아이가 아랫도리를 내놓은채 가짜 거지 행세를 하며 구걸하는데 하루에 오십전에서 일원씩 한달에 십오원에서 이십원이나 벌 정도였다.(동아일보 1925.12.25)

 

두한이 13살 때인 1930년 본정 경찰서 직원이 총출동하여 밤사이 잡아 들인 거지가 80명에 불과할 정도로 1925년에 비해 거지들이 삼분의 일로 줄어 들었다.(동아일보 1930.11.28)

 

조선시대처럼 천재지변, 즉 흉년이 들면 살기 위해 일시적으로 몰려 들었다가 기아가 해소되면 귀향했던 것이지 항상 거지가 넘치지 않았다.

 

"이 거지는 거의 전부가 경상도 전라도 거지로 그 가운데는 문둥병자도 적지 않은 모양인데 한재를 거듭하여 그 지방에서는 얻어 먹을 수가 없이 되어 몇몇씩 떼를 지어 이같이 먹을 길을 찾아 서울까지 몰려온 것이라는데 작년까지는 삼사백명에 불과하던 거지가 요사이에는 천명이 넘는다하여 이 해결책으로는 별수 없이 자선가의 독지를 기다릴 뿐이라고 당국에서도 수수방관할 뿐이라더라." - 동아일보 1924.09.11

 

결론적으로 김두한은 종로 2가 청계천 다리 밑 거지 생활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