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협회 4

친일 단체 일진회 대변인 이승만

송병준은 1904년 2월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통역사로 일본군 제12사단 병참감 대곡희구장(大谷喜久藏 오따니 기꾸조) 육군 소장을 따라 청국에까지 진출했다가 대한제국에 들어 왔다. 송병준은 독립협회 회원이었던 윤시병, 유학주, 염중모, 윤길병, 홍귀섭 등을 포섭하여 같은 해 8월 18일 유신회를 조직하였다. 이틀 뒤인 20일에 송병준이 다시 회의를 열었는데, 이때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칙령으로 총순과 순검을 파견하여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일본군 12사단 헌병들이 나서서 막으며 경무청 순검이 칙령을 시행치 못하게 만들었다.1 송병준은 유신회를 일진회로 개명하였고, 회장에 윤시병, 부회장에 유학주를 추대하였다. 윤시병은 1898년 3월 남궁억, 고희준과 더불어 독립협회 총대위원에 선출되었고, 1898년 11월 ..

이승만 2015.11.12

이승만의 감옥생활(1899~1904)<5편>을사오적의 도움으로 감형

이승만, 황제의 성은으로 연속 감형 받다. 1899년 11월 17일 이승만은 징역종신에서 감 1등 15년형으로 감형 받았다.1 1899년 11월 25일 이승만은 징역15년에서 감 1등 10년형으로 감형 받았다.2 1899년 1월 9일 이승만이 무고를 당해 죄 없이 조선은행 광장에서 사복경찰관들에게 체포되자, 그때 함께 있었던 감리교 의사 셔먼은 즉시 미국 공사관으로 달려가 도움을 청했고, 공사 알렌은 대한제국 외부로 찾아가 이승만이 셔먼에게 통역사로 고용되었기에 협정에 따라 사전통고 없이 체포할 수 없으므로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3 조미수호조약 제10조에 따르면 죄를 범한 조선인이 미국인의 주택이나 배에 숨을 경우 먼저 해당국 공사관에 통지한 이후 조선 경찰이 체포할 수 있게 하거나 미국 영사관이 체포하..

이승만 2015.10.13

이승만의 감옥생활(1899~1904)<4편>체포에 저항한 죄로 종신형

이승만, 체포에 불응하며 항거한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다. 1899년 1월 30일 오후 5시경 이승만은 육혈포를 들고 최정식, 서상대의 뒤를 따라 탈옥을 감행하였으나, 불과 몇 분도 안 되어 이승만은 현장에서 시위 2대 병정 최영식에게 체포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맨 앞에 선 최정식이 길을 열려고 육혈포로 총탄 세 발을 쏘아 압뢰 김윤철의 등에 총상을 입히고 말았다. 1899년 2월 1일 경무청은 이승만을 한성 감옥서에서 불러 올려 저녁까지 자세히 신문하고는 도로 한성 감옥서로 보냈고, 고등재판소로 신문 결과를 넘겨 조율하였다. 이승만은 육혈포와 관련한 경무청 신문에서 최정식이 사람을 시켜서 육혈포를 한성 감옥서로 들여 왔다고 진술하였다. 재판을 일주일여 남겨 놓고 고등재판소는 이승만이 사용한 증거물인 ..

이승만 2015.10.06

이승만의 감옥생활 (1899~1904) <1편> 무고로 인해 죄 없이 체포

이승만, 죄 없이 사복 경찰관에게 잡히다. 윤치호, 이상재, 이건호 등이 이끌던 독립협회는 1898년 2월 27일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 조차를 반대하고, 3월 1일 한국 러시아 은행 철수를 요구하며, 3월 7일 일본에게 조차한 석탄기지를 회수하라는 항의문을 대한제국 정부에 발송하고, 3월 10일에는 만민공동회라는 대규모 국민집회를 개최하였다. 이승만은 이 집회에서 총대위원에 선출되어 이후 집회 때마다 선동 연설에 열을 올렸다.1 러시아의 이틀 시한의 러군 철수 위협과 만민공동회 요구 사이에서 갈등하던 대한제국 정부는 3월 11일 밤 만민공동회의 결의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러시아군은 철수했고, 한러 은행도 철폐했다. 일본도 월미도 석탄고 기지를 반환했다. 1898년 10월 12일 친러파를 몰아내고 박정양..

이승만 2015.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