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우미관 김두한까지 언론에 나타난 서울 조폭의 역사

허구인물 전우치 2015. 10. 28. 22:14

폭력배의 역사에서 낭만파 주먹 시대가 존재한 적이 없다.

협객도 존재한 적이 없다.

건달도 존재한 적이 없다.

 


조폭 1세대의 출현 배경


서울, 특히 종로에 조선인 조폭들이 집중적으로 출현한 배경을 유흥업종의 등장과 밀집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총독부는 청계천 이남에 일본인 거류 지역을 설정하고 개발에 들어가 황금정(을지로), 본정(충무로), 명치정(명동)이라는 5만명 일본인 거주 신도심을 건설하였다. 상대적으로 종로에 비해 규모가 컸고, 도시적이었으며, 자본을 집중하고 있었다.


반대로 종로는 낙후 지역으로 전락하여 주로 요리점, 다방, 술을 파는 카페, 바, 기생집 등 유흥업종 상점들이 이면도로나 골목길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종로에는  몸을 안 파는 전통 관기 출신 외에 몸 파는 기생이 800명~ 1,000명 규모로 활동할 정도로 매춘업마저 성행하였다. 특히 평양에서 온 기생들과 남산 아래 기생들이 생계를 위해서 성매매를 심각하게 하였다. 평양에서 온 기생들은 평양 출신들의 장점인 예쁜 얼굴을 내세워 몸을 팔았다. 여기에 서양식 카페들과 바들이 생겨나 맥주 등 외국에서 유래된 술을 팔면서 번창하고 있었다. 극장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며 흥행하고 있었다. 1930년대 중후반부터는 담배 연기 가득 찬 속에서 음악을 틀어 주면서 커피와 홍차를 파는 다방들이 번창하여 젊은이들로 붐볐다.


낙후한 종로의 뒷골목에서 태어난 불량 소년들이 주변의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청년이 되어서는 마침 종로 상권의 변화로 우후죽순 생겨난 식당, 술집 카페, 바, 다방, 극장 등 밀집 지역으로 폭력을 휘두를 장소를 옮겼다. 더구나 원주민 폭력배들에게 있어서 종로의 매력은 일본 말을 몰라도 말이 통하는 원주민 상인들이 주로 모여 있었다는 점이었다.



조폭 1세대의 성립 과정


조폭은 유도, 권투 등 외국에서 새로 들어 온 운동을 하다가 뜻이 맞아 싸움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폭력배로 전락한 경우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동네 싸움에서 싸움에 눈을 뜬 자생적인 폭력배로 나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기존에도 전래의 싸움 방식과 오래 전부터 중국에서 유래한 우슈도 있을 터인데, 일제 강점기에 유입한 서양의 권투와 일본의 유도가 폭력배들 사이에서도 인정 받는 무술이 되었다는 부분이다. 사대주의라는 것이 정치판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폭력배들 사이에서도 만연해 있었다.

 


조폭 1세대의 특징


조폭 1세대는 술을 마시기 위해 돈을 갈취하고, 무전취식을 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마치 술에 살고 술에 죽자는듯 하였다.

 

지금도 낙후한 동네에서 볼 수 있는 경범죄 전과 수십범으로 파출소와 동네에 악명을 떨치면서 동네 터줏대감 노릇하며 거의 매일 술에 취해 고성방가, 시비, 욕설, 무전취식, 작은 폭행 등을 저지르는 나이 40~60대의 동네 주취자들의 젊었을 때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쉽게 비속어로 말해서 술 취한 동네 양아치들이었다.

 

극장 앞 길목에 서성이며 먹잇감을 기다리다 생기는 지루함을 지나가는 젊은 여자들에게 희롱하는 말을 던져서 메우려고 했으면서도 실제 강간은 하지 않았다는 점도 특징이다.

 

 

조폭 1세대끼리의 결투 방법

 

시간과 장소, 결투 인원을 정하여 맨손으로 싸웠다. 이러한 결투 방식 때문에 낭만파  주먹 시대라고 부르기도 하나 그 것은 조폭들끼리 서로 불구나 사망을 피하려는 자구책에 불과했다. 쉽게 말해서 당시에는 목숨을 걸고 상대방을 죽여야 할 정도로 지역 이권이 크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들 술 몇 잔 마실 돈이나 행인들에게서 뺐는 상황에서 돈 몇 푼 갈취하는 장소를 차지하자고 목숨을 걸고 흉기를 휘두르며 싸울 이유가 없었다.

 

반면에 조폭 1세대는 먹잇감이 되는 선량하고 나약한 시민들에게는 무자비하게 폭행을 가했다. 그래서 애초에 조폭의 역사에는 낭만파 주먹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었다. 조폭들 속에는 협객이 존재할 수 없었다.

 

 

조폭 1세대의 범죄 수법


매우 원시적이다. 맹수들이 먹잇감을 노리고 길목에 숨어 기다리듯이 낮에는 길목을 지키고, 밤에는 사냥 영역을 도는 방식을 혼용하였다.

 

이들이 낮에는 돈을 갈취하려고  「길목 지키기」로 주로 극장 앞, 극장 주변의 식당 앞, 서울역 앞에서 한구석에 모여 있다가 적당한 대상자가 나타나면 지체없이 앞을 가로 막고 협박이나 폭력으로 돈을 갈취하였다.


밤에는 「구역 돌기」로 주로 술집 주변을 맴돌며 행인에게 싸움을 걸어서 사과하는 의미로 술을 사라고 강요하여 술을 얻어 마시든지, 술집에 들어가 술 자리 손님에게 같은 방식으로 싸움을 걸어 화해의  술을 사게 하여 빼앗아 마시든지 하였다. 이 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아에 술을 마시고 돈을 안 내는 무전취식을 일삼았다.



서울 조폭 1세대 연대기


1928년 이전


극장이 생겨나면서 극장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주변에 음식점도 생기자 불량배들에게 극장 앞은 사냥감을 노릴 좋은 길목이었다.1

 

1928년

 

일용철봉부(一勇鐵棒部)


언론이 최초로 보도한 서울 조폭은 일용철봉부(一勇鐵棒部)였다. 이들은 신정 유곽, 병목정을 주 활동 무대로 하여 폭력을 휘둘렀다. 이들은 총무부, 선전부, 조사부를 두고 마치 운동단체인 것처럼 위장하였다. 그러다 장충단에서 곽인남이 사람을 죽여서 상해치사 혐의로 일망타진 되어 해산명령을 받았다.2

 

철봉단(鐵棒團)


하지만 일용철봉부 잔존 세력들은 철봉단(鐵棒團)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운동부장에 유대희(29), 선전부장에 박태규(20), 회계부장에 홍춘근(29)를 임명하였다. 철봉단은 초저녁에 장충단 공원 철봉에 매달려 운동을 하다가 밤이 되면 신정, 병목정을 돌며 공연히 시비를 걸어 화해의 뜻으로 술을 사라고 위협하여 얻어 마시고 돌아 다녔다.3

 

도박 폭력단
유곽을 돌아 다니며 유곽 주인들을 협박하여 도박판을 벌이는 조폭도 있었다.4

 

1930년


칠복단과 우미단

칠복단 두목 도야지 박종오와 우미단 두목 마적 고희경은 김성기와 함께 1929년 3월에 종로2정목 식당 적옥에서 수차례 2,3원어치씩의 음식을 시켜 먹고 돈을 안 낸 혐의와 종로 2정목 25번지에 사는 도박꾼 강창훈에게 밀고하겠다고 협박하여 3차례에 걸처 십여원을 공갈 갈취한 혐의로 체포되었다.5


최흥천파

최흥천은 행인에게 시비를 걸어 술값을 빼앗아 오던 중 4월 11일 밤 9시경에 신정 사법지 앞에서 행인을 폭행하다가 체포되었다.6 최흥천파는 1933년 겨울 경찰의 강력한 단속으로 사라졌다.7


삼각정패

각정패는 김재방이 이끌던 협박 조직으로서 인쇄소 직원과 구두 제작 직원이 많았으며, 인쇄 업종 종사자가 끼어 있다 보니 교육 수준도 있었다. 이들은 힘으로 굴복시키기 보다는 시비를 건 후 몇 대 맞고서 법률적 피해자임을 내세워 돈을 뜯어 내는 수법을 사용하였다.8


1932년


마적단 도야지 박종오

박종오(25)는 56명으로 마적단을 조직하고는 요리점과 카페 등을 돌면서 무전취식하고, 손님에게 술을 강요하다가 6월 15일 밤 낙원동 태평양 카페에서 맥주를 달라고 했는데 안 주자 주방에서 들고 나와 다른 가게에 팔아서 1원20전으로 술을 마시며 돌아 다니다 체포되었다.9


신마적 엄동옥

10여명으로 폭력조직을 꾸려 신마적을 자칭한 종로 훈정동 83번지 권투선수10 엄동옥(19)은 3월 12일 새벽 4시 종로 1목정 서울카페 근처에서 술 취한 사람과 싸움을 하다가 체포되어 구류 25일의 처분을 받았다.11

 

동대문파

연지동 98 무직 조한수(28)를 단장으로 하는 폭력단 9명이 부녀 희롱, 무전취식, 폭행 등을 일삼다가 체포되었다.12


박우연파

연지동 248번지 박우연(23)이 7명을 모아 갱(깡패)을 표방하며 종로 5정목 일대에서 폭력을 행사하다가 체포되었다.13

 

당시 갱(gang)은 1927년 헐리우드 영화 관련 기사에서 깽스의 오타로 보이는 '깽그'라고 처음 표현한 이후,14 1932년부터는 '깽'이라고 하면서 신조어로 받아 들였다.15 

 

1933년

우미관패 조직원 안국동 19번지 지백수(19)는 관철동 140번지 김익례 음식점에서 2원어치의 술을 마시고는 김익례의 아내 차복녀와 직원을 폭행하여 체포되었다.16

 

1934년


심화룡파

유도 4단의 심화룡파가 크게 문제가 되자 종로서는 2월 폭력단 전멸 방침을 세우고 집중 단속에 나서자 심화룡은 잠적하였다.17


이만근 외 20명

우미관과 탑골공원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이만근 이하 20명이 5월 30일 체포되었다.18 우미관파 조직원들인지 신생 조직인지는 알 수 없다.


올림픽파

유도 2단의 올림픽카페 주인 양점수는 종업원 56명을 가입시켜 웅단(熊團)이라는 폭력조직을 만들어 부하 정인섭을 단장에 앉히고 자신은 고문이 되어 뒤에서 조종하여 종로동을 활동구역으로 삼았다가 8월에 적발되었다.19


대학생, 거북이

대학생은 모 극장 싸움패로 알려져 있으며 권투가 주특기이며, 다음 해인 1935년 2월 서수남(21)과 함께 인사동 225번지 전춘산(23)을 폭행해서 인사불명에 빠뜨리고 도주하였다.20 거북이는 유도를 하는 자였다. 21 대학생은 신마적 엄동욱으로 추측할 수 있다.


희락관파

1921년에 문을 연 카페 은송정에 취직하여 취객 폭력 관리를 맡은 이후 황금정(을지로) 술집 거리 질서를 유지해 오면서 싸움에서 밀린 약한 편을 돕는다 하여 의분아(義憤兒)라고 평가 받은 평양 출신의 은송정태랑(銀松亭太郞)을 이기고서 새롭게 황금정 술집 거리를 장악한 이는 경주 어느 기생의 오빠로서 부산 폭력조직 소라니패의 땅군이었던 자였다. 이 자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극장 희락관에 취직하여 탑동웅(塔洞熊)과 함께 낙원회관, 엔제루 등 지역 술집 이권에까지 닥치는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추악한 범죄를 저질렀다.22


다방골파23

다방골은 더 이상 몰락한 선비들의 마지막 한양살이가 아니었다. 선비들은 사라지고 다방골에는 몸을 파는 청등 기생들이 판을 치게 되었다. 당시의 매춘은 직접적인 접촉이 아니라 기생 문화의 영향력이 발휘되어 음주와 함께 노래, 춤, 악기 연주 관람이라는 단계를 거치며 성립했기에 항상 술에 취한 매춘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즉 술을 마시면서 춤과 노래를 관람하는 돈까지 지불해야만 매춘할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너무 술에 취해 술주정을 부리거나 특정 기생에게 중독되어 죽네사네 행패를 부리는 등 각종 매춘과 관련된 애로 사항을 처리하는 자들이 소위 기둥서방들이었다.


당시에는 인기를 한 몸에 받던 기생들이 자신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엽서로 만들어 명함으로 돌렸듯이 기생의 경제력이 막강해서 기둥서방들은 술에 취한 망종들을 처리하는 댓가로 생활비를 간간히 받아 쓰며 매달려 있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폭력배들에 비해 소득의 수준이 월등하게 높았기 때문에 다방골파 기둥서방들은 양복을 입으면서 보다 돈벌이가 좋은 폭력 조직의 모습을 연출하는데 성공해서 폭력배들의 관심과 동경을 불러 일으켰다.


우미관 사자

1924년에 원동(苑洞)패라는 미성년 불량배들이 창덕궁 옆 원동 골목 4거리에서 중앙학교, 미문(微文)학교, 중동(中東)학교 어린 학생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이후 나이를 먹으며 번잡한 지역으로 나와서 우미관에 취직한 후에는 주먹을 내세워 극장 주변 불량배들을 굴복시키다 보니 우미관 사자라고 불리었다. 우미관 사자는 자신을 숭배하면 극장 사장 몰래 공짜로 입장시켜 주었다. 24

 

1935년


서울역파

삼판통 41번지 윤수남(24), 중림동 27번지 박대원(23)은 서울역에서 시골에서 오는 사람들을 폭행하여 금품을 갈취해 오던 중 1월 11일 또다시 승객을 폭행하다가 체포되었다.25


마적단

마적단 단장 청진동 226번지 김성재(32)에게 부단장 청진동 212번지 김창근(23)이 도전하여 12월 28일밤 11시경에 공평동 123번지 앞에서 결투를 벌여 김성재는 가슴과 허리에 타박상을 입고, 김창근은 얼굴이 6cm 찢어지고, 고환에 상처를 입고서 둘 다 기진맥진 쓰러져 있는 것을 순찰 중이던 종로서원이 체포하였다.26


신마적 엄동옥

엄동옥은 3월 8일 관철동 116번지 식위천이라는 꼬치구이 집에서 술을 마시던 시골 사람 양점수와 지봉수에게 술을 한 턱 내라고 했다가 거절 당하자 30cm 정도의 칼을 꺼내 위협하며 폭행하다가 순찰이던 종로서원에게 발각돼 도주하였다가 지명수배자가 되어 다음 날 아침 7시에 체포되었다.27

 

 

김기환파

김기환은 부하 10여명을 동원해 소년 60여명을 모아 소매치기 조직을 만들어 경의선과 경부선 열차에서 금품을 훔치도록 하였다. 경찰은 우연히 체포한 김기환의 부하 1명이 진술한 덕분에 소년 소매치기 조직을 일망타진하여 그 배후가 김기환임을 알고 체포에 나섰다. 김기환은 일본 동경으로 도주하여 권투 관계자들 집을 돌며 피신 생활을 하다가 다시 서울로 들어 와 친구 집에 숨어 지내다가 10월 30일 체포되었다.28


김기환은 권투선수로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기생 치마폭과 술잔에 빠지면서 탕진하여 권투 실력도, 돈도 잃게 되어 유흥비 마련을 위해서 범죄도 서슴치 않게 된 경우다.

 

1936년


신마적 엄동옥

신마적 엄동옥은 대학생 둘과 2차로 술을 마시려고 비 내리는 새벽 1시경 공평동 73번지 평화 카페를 찾아가 술을 청했다가 영업이 끝나서 안된다고 문을 열어주지 않자 유리창과 문을 깨부수고 주인과 종업원들을 피가 낭자하게 구타하였다가 체포되었다.29


보나마나 학생들이야 대학까지 다닐 정도면 다들 대단한 부자 집안 자식들로서 일부 대학생들은 몇 푼 안 되는 술 사주고 주먹을 쓰는 폭력배와 술 한 잔 했다는 것은 다음 날 학교에서 이야기거리로 삼을 수 있으니 손해 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권투를 배우다 말고 조폭이 된 엄동옥도 대학생들이 사주는 술을 마셨다는 것은 자랑거리가 되었을 터이니 서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였을 것이다.


엄동옥은 대학생 둘과의 술 자리에서 자기가 종로 최고의 주먹이라고 하면서 안 통하는 데가 없다고 말했을 것이다. 엄동옥은 2차도 학생들에게서 얻어 마셔 보려고 데리고 간 술집에서 막상 자신의 말이 안 통하자 무척이나 창피해서 평소보다 더 과격하게 폭력을 휘둘렀을 것이다.


김두한

김두한은 어린 시절부터 일 하던 어느 설렁탕집에서 19세 성인이 되자 그만두고서 1936년에 조선극장 매점에 취직하였다. 6월 방화로 조선극장이 불 타 버리자,30 우미관극장 매점 직원으로 취직을 하였다.31 이후 김두한은 우미단 두목 마적 고희경의 부하가 되었다.

 

용산파

청엽정 1정목 49번지 최성용(33)은 용산 미생정 일대 유곽의 수십명의 폭력단을 이끄는 자로서 29일 오후 9시반경 미생정 중국인 호떡 집에서 무전취식을 하고 돈을 달라는 주인을 구타하다가 용산서원에게 체포되었다.32

 

1937년


김기환파

관동정 163의 49 김기환(26)은 신설동 일대에서 주민들에게 폭력을 일삼다가 6월 20일 오후 4시 체포되었다.33

 

1939년


김기환파

단장 관동정62 김기환(28), 부단장 황금정 2정목86 남광일(26), 봉래정 3정목151 무직 자칭 갱 김영천(21), 종로 5정목15 무직 김귀봉(24), 종로 5정목14 무직 김재철(23), 입정정109 무직 김익제(24), 예지정152 무직 구대현(26), 황금정 2정목286 양복점 점원 황동민(27), 봉래정 4정목149 무직 황창수(26)는 카페와 바 등을 돌아 다니며 손님들에게 술을 사라고 시비를 걸어 협박하여 술과 돈을 갈취하였다. 이들은 낮에는 양복점 점원 황동민의 집에서 소일하다가 밤이 되면 술집 거리를 활보하며 협박과 폭력을 일삼다가 7월 18일 밤 종로 2정목 미야꼬 바에서 술에 취한 청년을 돕는 척 하다가 70원을 훔친 혐의로 체포되었다.34


윤성희파

왕십리정 298번지 윤성희(18)는 원서정 77의 7 장안순(19)을 부단장으로 삼고 16명을 조직원으로 두고서 약초극장 주변에서 부녀자를 희롱하고,  극장 여직원들을 희롱하다가 9월 8일 10시 10분에는 여직원 보호에 나서 집까지 데려다 주던 남자 직원을 폭행하고, 다음 날 밤에는 조직원들을 동원해 약초극장 앞에서 세를 과시하다가 체포되었다.35


김두완파

김두완은 이용식(21)을 비롯해 78명의 조직원을 두고서 우미관 주변을 근거로 하여 매일 밤 극장에서 나오는 부녀들을 힐난하고 주변 식당에서 손님들에게 싸움을 걸어 술을 빼앗아 먹는 등 폭력을 행사하다가 8월 6일 밤 11시경에 종로통 빠1 살롱 앞에서 황금정 7정목 4번지 이석경(24)에게 중상을 입힌 죄로 체포되었다.36


유노마파

종로 1정목 83의 3호 유노마(28)은 우미관 주변을 근거로 하는 불량자의 두목으로서 술에 취해 전차 신호를 하던 경전 임용대에게 무작정 폭력을 행사다가 체포되어 파출소로 옮겨졌으나 파출소 유리창을 깨부수며 난동을 부렸다.37

 

1940년


김두한

삼청정 36번지 무직 김두한은 다른 2명과 함께 7월 12일 밤 관철정 흥아 바에서 야료를 부리다가 체포되었다.38

 

전격대 김기환

김기환은 전격대를 조직해서 여전히 찻집, 바, 카페, 요리점, 야시 같은 곳을 돌아 다니며 손님들에게 싸움을 걸어서 사과 술을 받아 마시다가 다시 수사 대상이 되었다.39

 

1941년


김기환

김기환은 권투에 복귀하였다.40

 

1942년


김두한

대동 일진회는 4월에 시천교와 친일 종교단체 대동일진회간의 시천교당 소유권 분쟁에서 폭력 사태에 대비하여 김두한을 포섭하였다.41 

 

김두한은 대동 일진회 소속이 된 것이 인연이 되어 1944년 4월 12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친일단체 반도의용정신대를 결성하였을 때 부단장이 되었고, 김두한은 이때 시천교당을 강제로 빼앗아 반도의용정신대 본부로 사용하자고 주장하여 강탈에 앞장 섰다.42

 

자신의 두목 마적 고희경(고시경, 별명 고산훈)을 대동 일진회에 끌어 들였으며, 권투선수 출신 폭력배들인 문운경(문영철), 김기환도 소개시켜 주었다.43

 

마적 고희경(고시경)

고희경(고시경, 별명 고산훈)은 부하 김두한의 소개로 친일단체 시천교와 친일단체 대동일진회 분쟁에 개입하여 대동일진회에 소속하였다.44


김기환

김기환은 김두한의 소개로 시천교와 친일종교단체 대동일진회 분쟁에 개입하여 대동일진회에 소속하였다. 대동 일진회는 김기환을 가장 높게 평가하였다. 김기환에게 약2,000엔을 들여서 야외 권투장을 설치해 줄테니 운동부 사업을 맡아 달라고 하면서 끌어 들였다.45

 

1944년


김두한

김두한(25)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4월 12일에 결성한 친일단체 반도의용정신대에서 부단장이 되어 6월 12일 일본 해군에 방위성금을 기부했다.46


김기환

김기환(30)은 조선총독부 경무국 친일단체 반도의용정신대 사찰부장이 되어 6월 12일 일본 해군에 방위성금을 기부했다.47

 

1946년


김두한

김두한(27)은 대한민주청년동맹 감찰부장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친일단체 반도의용정신대에 속했던 조폭들은 갑자기 이승만 충성 단체인 대한민주청년동맹 소속원이 되었다.


김두한의 활동적인 부하들은 다음과 같다.
 
김관철, 김영태, 김두윤, 김창호, 김태수, 김무옥, 김동회, 김명식, 김영택, 김국진, 강순남, 고경주, 고월환, 남정길, 박기영, 노강, 명호영, 서병룡, 서무남, 송기현, 송지헌, 신영균, 문화태, 이경태, 이기호, 이영근, 이국노, 이용배, 이상무, 이종천, 이창성, 양동수, 임일택, 임수일, 전삼용, 장용학, 조희창, 조병후, 정구영, 지복길, 거팔수, 한응태, 홍수길, 송장환.48

 

이 무렵부터는 김영태와 신영균이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는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문운경(문영철)이라는 이름이 없다. 문운경이 자신의 왼팔이라고 한 김두한의 말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1942년 김두한이 친일단체 대동 일진회에서 활동할 때 자신의 두목 마적 고희경과 김기환 및 문운경을 대동 일진회로 끌어 들였는데, 당시 김두한은 자신이 속한 폭력조직원이 아니었던 김기환, 문운경과는 대등한 관계였다. 문운경은 청소년 시절 권투를 배웠고, 결혼 후에는 부인의 설득으로 남산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영향으로 외아들 문수영은 목사가 되었다. 문운경이 6.25 남침 때 북한군에게 살해 당하였다는 일부 주장이 있다.

 

자칭 김두한의 후계자라던 조일환의 이름도 없다.

  

1947년


김기환

김기환(33)은 3월 9일 반공단체 창의단에 가담하여 특무(특수임무) 부장이 되고, 3월 28일 전조선 프로권투연맹 이사가 되었다.49 창의단은 1947년 8월 23일 이승만이 반공단체들을 대동청년단으로 통합한 후 창의단도 가입할 것을 종용하자 계속 반발하다가 끝내 합류를 거부하고 1956년 5월 1일 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김두한

수도청장 장택상의 지령을 받은 대한민청 감찰부장 김두한은 부하들에게 좌익단체 전위대 태극흥업공사 직원 정진호(정진룡 29)를 납치해 오도록 지시하였다. 4월 20일 조희창이 권총으로 위협하여 정진호를 납치 하였다.50 김두한의 부하 신영균이 정진호의 가슴에 철봉을 휘둘러 현장에서 살해하였고, 김천호에게도 철봉을 휘둘러 살해하였다.51


정진호 상해치사 혐의인 김두한의 살인에 가담한 가까운 부하들은 김영태, 신영균, 홍만길, 조희창, 박기영, 양동수, 임일택, 김두윤, 이연근, 이창성, 송창환, 고경주, 김관철, 문화태, 송기현, 이창성이었다.52

 

조폭 1세대는 정치 깡패가 되어 한 세대의 막을 내렸다. 하루하루 동냥하듯이 살던 조폭 1세대가 직업적 폭력배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김두한이 개발한 신종 갈취 수법 때문이었다. 김두한은 한국 조폭 역사상 최초로 일정 구역내의 상점들에게서 매월 고정액의 상납금을 갈취하는 방법을 개발해 냈다. 조폭의 월수입이 형성되어 장기간 직업적 폭력배 생활이 가능해 졌다. 반대로 상인들은 김두한의 악랄한 범죄 때문에 훨씬 더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우미관 역사: 일본인 시전복차랑(柴田福次郎 시바타 후쿠지로)과 임전금차랑((林田金次郞 아야시다 킨지로)이 동업하여 1912년 관철동 89번지에 800석 규모 정도의 2층 벽돌 건물로 지어 12월 10일 개관하였다. 시전복차랑이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우미관 경영권을 행사한 것을 보면 지분이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미관은 서울에 거주하던 일본인 5만명을 관객으로 삼지 않고, 인구가 더 많은 한국인을 관객으로 삼았다. 그래서 변사들이 모두 한국인이었다. 1913년 5월 변사 서상호의 여성 관객 대상 음행, 여사무원의 음행 등으로 일시 영업허가 정지 처분을 받았다. 1924년 5월 21일 오후 2시 견습기사 이뢰용의 전기 실화로 전소하였다. 이뢰용은 벌금 100원을 선고 받았다. 같은 자리에 신축하여 같은 해 12월 10일 재개관하였다. 1926년 10월 1일 나운규의 아리랑을 상영하였다. 1926년 3월 직원 공동 운영체를 내세우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시전복차랑이 여전히 경영권을 행사하였다. 1939년 5월에 실내외를 재단장하였다. 이 무렵 김두한이 극장 매점에서 관객이 주문한 음식을 나르는 종업원으로 잠시 일을 했었으나 조직 폭력배가 되면서 그만 두었다. 해방후 정부가 적산으로 분류하여 귀속해서 민간에 관리를 위탁하여 1949년에 엄상진이 사장을 맡았으나, 6.25 동란중 미군의 공중폭격으로 완전히 부서졌다. 
휴전후 명동 조폭 두목 이화룡의 조카사위가 1958년 2월 19일 종로 2가 YMCA 옆 장안빌딩 바로 뒤 인사동 262번지에 우미관이라는 이름으로 극장을 개관하였다. 공중 폭격으로 사라진 기존 우미관하고는 무관하며, 오직 이름만 가져다 썼다. 감옥에서 출소한 이화룡은 1960년에 화성 영화사를 설립하였다. 종로 5가 한일극장 대표였던 도인준은 인사동 262번지 우미관 건물을 인수하여 1969년 1월 1일 아카데미라는 극장명으로 개관하였다. 적자로 인해서 1976년 5월 22일 도로 우미관으로 재개관 했으나, 다시 경영난을 겪으면서 1982년 10월에 폐관을 결정하였다가 이후 번복하였다. 1986년 2월 14일에 최종적으로 폐관하였다.

 

  1. 매일신보 1928. 07. 15 부내 관철동 우미관 앞 통로는 교통이 빈번한 곳으로 왕래하는 사람이 많음을 따라 우미관 앞에는 불량자들이 다수히 모여 있다가 그 앞으로 오고 가는 부녀자 및 극장에 구경 다니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공연히 트집을 잡고 싸움을 걸며 농락하는 일이 많음으로 종로서에서는 그 부근을 특별히 주목하고 있는 터인데 13일 밤에도 그곳에서 얼음 장사를 하는 부내 운내동55 김효득(23), 관철동115 오용봉(19), 사직동251 이복만(19) 등 3명이 지나가는 사람에 대하여 싸움을 거는 것을 경관이 발견하고 본서도 데려다가 모두 5일간 구류에 처하였다더라. [본문으로]
  2. 동아일보 1928. 04. 30 목하 시내 본정서에서 검거 취조중인 장춘단 상해치사 사건의 피의자 곽인남 외 수십명은 신정(新町) 유곽 병목정 방면으로 돌아 다니는 유명한 폭력단들로 가택을 수색한 결과 소위 일용철봉부(一勇鐵棒部)의 부원 명부를 차압하였는데, 동 단은 표면으로는 운동구락부와 같이 조직하여 총무부, 선전부, 조사부를 두고 부원이 수십명이라는바 기실은 완력 단체인 것이 판명되어 동 서에서는 계속 엄중 수사중이라더라. [본문으로]
  3. 매일신보 1928. 07. 17 부내 본정서에서는 14일 밤에 동서 수하사법계 주임 이하 형사 다수가 수 대로 분하여 부내서 사헌정, 광희정 방면으로 활동하여 동 야 11시경에 18,9세 내지 28,9세의 청소년 등 십 수명을 검거하여 엄중 취조중인데, 그들은 신정, 병목정을 근거로 하고 있는 소위 철봉단(鐵棒團)으로 초저녁에는 장충단 공원 철봉에 모여 철봉 운동을 하다가 밤 12경부터 오전 1,2시경까지는 수 대로 나뉘어 병목정과 신정에 버려저 공연히 타인과 싸움을 하고 화해 술을 강제로 빼앗아 먹는 일종의 폭력단인데 얼마 전 상해치사 사건도 있음으로 그 때 동서에서 해산을 명하였던 그 잔당이 아직 남아 있어 소위 운동부, 선전부, 회계부의 3부를 두고 유대희(29 劉大熙), 박태규(20 朴太奎), 홍춘근(29 洪春根) 등이 각각 3부의 장을 맡고 있었다더라. [본문으로]
  4. 동아일보 1928. 08. 21 시내 용산 경찰서에서는 18일밤에 도산 유곽에서 큰 도박단 일파 21명을 검거하여 유치장이 대만원이 되었는데 그 범인들은 항상 도당을 지어 가지고 유곽으로 다니며 유곽 주인들을 협박하여 도박을 하던 폭력단의 일봉이라더라. [본문으로]
  5. 동아일보 1930. 10. 08 활동사진 상설관을 중심으로 우미단, 칠복단의 폭력단. 박 도야지라는 박종오 이하 마적이라는 고희경, 김성기 등에 대한 공갈, 무전취식 등 사건은 그동안 시내 서대문 고등계에서 엄중한 취조를 하다가 금7일 사건 관계자를 일건 서류와 한가지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하였는데 사건의 내용을 보면 전기 3명은 작년 3월중에 시내 종로 2정목 적옥이라는 음식점에서 주인 정수구좌웅을 공갈 위협하고 한번에 2,3원어치의 음식을 돈 엇이 그대로 먹은 것이 여러 번 되고, 그 밖에 종로 2정목 25번지 도박상습자 강창훈을 경찰에 밀고한다고 협박하고 전후 3회 십여원을 공갈 취재한 사실 등을 비롯하여 공갈 사실이 많았다 한다. [본문으로]
  6. 동아일보 1930. 04. 14 행인을 야료(惹鬧)하는 폭력파 대청결 지내가는 사람을 괴롭게 구는 폭력한들은 본정서에서 잡어 작금 수일 동안에 시내 본정서 관내에는 폭력단이 출몰하야 지내가는 사람을 붓들고 공연히 싸움을 걸어서 술갑을 강청하는 등 해괴천만의 폭행하는 일이 잇다 하야 소관 본정서에서는 그 방면에 경계를 하고 잇든 중 지나간 십일일밤 아흡시경에 신정 사법지 압헤서 전긔 방법으로 폭행하는 자가 잇슴을 순행 순사가 발견하고 인치 취조 중인데 그 자는 최흥천이라는 자이며 공범도 상당한 모양으로 더욱 엄중히 취조중인데 이와 가튼 도당이 발견되는대로 엄벌할 터이라 한다. [본문으로]
  7. 매일신보 1934. 02. 21 요즘 일기가 차차 따스하여 짐에 따라 외출하는 사람이 많아서 서울 거리는 자못 복잡하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각 극장과 카페, 음식점 등도 대번창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출입이 빈번하고 복잡하여 지는 것을 기회로 하여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극장이나 또는 카페 등지에 폭력단이 근거를 두고 크게 발호를 하여 길거리로 지나가는 사람이나 또는 극장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무단히 싸움을 걸어 때로는 유혈의 참극을 연출하여 평화로운 첫봄 거리를 일장의 수라장을 만드는 사실이 빈번한데 19일만 해도 종로서 관내에서만 4건의 폭력단을 검거하였다. 그 폭력단 중에는 『도야지』니 또는 『대학생』, 『거북이』 등의 괴상한 별명을 지어 가지고 권투와 유도까지 하는 자도 섞여 있어 보통 사람은 좀처럼 대항할 수가 없는데 작년에는 종로서에서 폭력단체를 엄중히 한 관계로 싸움으로 유명한 최모 일파가 전멸이 되었다가 최근에는 경찰의 취체가 다소 완화한 틈을 타서 권투선수 엄동옥 일파와 유도 4단 심화룡 일파가 다시 대발호를 하는 중임으로 방금 동서에서는 금번에 폭력단을 전멸할 방침을 세우고 엄충한 취체를 할 터이라는데 전기 엄, 심의 양 수괴는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말았음으로 방금 각 방면으로 그 범인을 엄탐중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8. 마면생(馬面生), 좀먹는 문화도시!! 대경성의 두통거리, 거리의 「갱스」 3대 폭력단 해부기, 별건곤 제71호 1934. 03. 01, 종로로 뻗힌 그 세력에 불만을 가지고 호시탐탐하게 엿보고 있는 패가 삼각정 삼각다리 김재방이다. 그리하여 흔히 본정으로부터 밤 열두시 쯤 되어 북촌으로 오는 틈을 타서 청계천 어귀에 들어서서 일대 격투를 하게 되는데 전적은 삼승삼패의 현상에 있다. 삼각다리의 유래는 오년 전에 다옥정 폭력단과 결투할 때에 부상하여 오른 편 다리를 치료 하다가 절단하게 되어 그는 의족과 지팡이로써 행보의 자유를 의지하여 가면서 부하의 통일에 전심전력을 하고 있다.삼각정패는 대개가 인쇄 직공, 구두방 직공 등이 많은데 폭력단 중 가장 문명분자가 많은만큼 결투 준비도 대단히 정돈되었다. 필자도 사년 전에 어느 친구와 함께 삼가정패에게 봉변을 당하여 며칠 동안 치료를 한 전례가 있지만은 실로 우습게 볼 수 없는 패들이며, 그 대 개천 아래로 떨어진 구두직공(삼각정패)이 필자의 여관에 까지 따라와서 며칠을 두고 가지를 않음으로 기어이 몇 십원을 주고 타협한 일이 있다. 그들이 싸움하다가 손님에게 부상을 당한다면 으레것 몇 십원을 얻어야만 막설이 되니 서울 거리의 한심할만한 두통거리의 하나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들의 나이는 대개 이십세로부터 삼십이며, 그들의 체질과 기상은 실로 용감성이 많으나 이러한 청춘기의 용감성을 좋은 방면에 응용치 못하고 악마주의적 폭력단에 바친다는 것은 실로 한심스럽고 참학한 사회문제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9. 매일신보 1932. 06. 17 부내 인사동 39번지 박종오(25)는 부하 56명을 두고 마적이란 폭력단체를 조직한 후 부내 각 요리점과 카페 등지로 배회하며 무전취식을 하고 걸핏하면 손들과 싸움을 걸어 술을 강요하는 등 여러가지 난폭한 행동을 감행하던중 작 15일 밤에는 부내 낙원동 태평양 카페에 가서 꼐루를 강청하자 그 집 주인이 불응함으로 그 자는 동 카페의 주방으로 가서 뻬루 반타를 강탈한 후 모상점에다 1원20전에 팔아 가지고 술을 먹고 돌아 다니는 것을 종로서원이 발견하고 검거하였는데 동 서에서는 그 부하까지 검거코저 계속 활동중이라 한다. [본문으로]
  10. 매일신보 1934. 02. 21 [본문으로]
  11. 매일신보 1932. 03. 13 최근에 종로통 일대에는 신마적이라는 10여명의 불량단이 있어서 각 음식점과 카페 등지로 출몰하며 걸핏하면 손들과 싸움을 걸고 무리로 술먹기를 강요한다는 밀고가 종로서에 수차 들어오레 괴었는데 동 서에서는 매전 사법주임이 형사대를 지휘하여 이래 밤마다 엄중한 경계를 거듭하던중 금12일 새벽 4시경에 종로1목정 서울 카페 근처에서 술 취한 사람과 싸움을 하고 있던 부내 훈정동 83번지 엄동옥(19)을 검거한 후 엄중취조를 한 결과 그 자가 바로 신마적단 두목인 것이 판명되어 구류 25일에 즉결처분을 하였다는바 그 부하를 일망타진코저 지금도 맹령한 활동을 계속 중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12. 동아일보 1932. 12. 08 시내 동대문 안팍으로 어둠을 타서 출몰횡행하는 부녀의 희롱과 술집 무전취식은 커녕 이외에 때때로 폭행을 가하는 일종의 폭력단은 일전 동대문서에서 현장에서 6명을 검거하여 25일간 구류에 처분하여 있는 중인데 금 7일 오전 0시 10분경에 연지동 203번지 김정숙의 술집에서 연지동 98 무직 조한수(28), 와룡동 12 무직 김교성(27), 숭일동 105번지 동 정길성(24) 등 3명을 체포하여 즉시 인치시키고 그 여죄를 조사중인데 일전 6명의 수괴되는 자들로서 조한수는 이들 폭력단의 총단장격으로 전일 6명이 체포되든 당시는 인천의 동료의 요구에 의하여 구원을 가려고 하다가 드디어 체포된 것이라하며 앞으로 이들의 소굴을 일소시킬 방침이라 한다. [본문으로]
  13. '동아일보 1932. 12. 04 시내 종로 5정목 부근 일대에는 초저녁이 되면 음식점이며 극장 등지를 배회하며 폭력단이 출몰하여 행악이 심한 터인데, 이에 소관 동대문 경찰서에서는 작 2일에 연지동 248번지 박우연(23) 외 7명의 일당이 종로 5정목 일대에 횡행하는 것을 일망타진 하였다는데 이들 한패는 소규모의 [본문으로]
  14. 동아일보 1927. 01. 13 내가 할로치 촬영소로 아와 깽그를 차젓슬 때는 작년 십월 이십일께인데 맛츰 촬영을 나가고자 하는 때이엇섯다. 아와 깽그 코믹 이라고 쓴 커다랏케 써 부친 승합 자동차 흑인종, 로서아, 중국인, 중등의 아희들을 가득이 실고 근처 농촌으로 촬영을 나갈 때이엇다. [본문으로]
  15. 동아일보 1932. 06 미국의 깽이 조선에까지 파급되어 걸핏하면 깽이라는 신술어가 범죄계를 풍비하게 되었다. 감수성이 극히 예민한 경무당국에서는 우선 총기의 거취를 엄중히 단속하기로 하여 무적 총기라는 간 곳 모르는 총과 지팡이 칼을 엄밀히 조사하기로 하였다. 현재 통계에 의한 무적 총기를 권총 2백정을 비롯하여 사냥총, 지팡이 칼, 지팡이 총을 합하여 2천여정에 달한다고 한다. [본문으로]
  16. 매일신보 1933. 12. 12 10일 오후 7시경 부내 관철동 140번지 김익례 음식점에 19세 가량된 소년이 와서 2원어치의 술을 먹은 후 김익례의 아내 차복녀와 고용인에게 폭행을 가하여 고용인은 수 개소에 부상을 입게하고 달아나고 말았는데 종로서에서는 그 자의 소재를 엄탐중이던바 우미관 앞 어떤 음식점에 잠복한 것을 체포하여 엄중한 취조를 한 결과 그 자는 부내 안국동 19번지 지백수(19 池白守)로 우미관패 폭력단이 한 사람인 것이 판명되어 방금 폭행죄로 엄중한 취롤 거듭하는 중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17. 매일신보 1934. 02. 21 [본문으로]
  18. 동아일보 1934. 06. 01 작 30일 오후 12시경에 부내 종로서에서는 부내 우미관 앞과 탑골 공원 앞에서 폭력단의 혐의자 이만근 이하 20명을 일제히 검속하였다. 금 31일에도 그들을 엄중히 취조중인데 그들은 우미관과 탑골공원 등을 근거지로 하여 여러가지의 폭력행위가 있었다는 혐의다. [본문으로]
  19. 매일신보 1934. 08. 18 올림픽 주인 양점수는 유도 2단까지 하는 스포츠맨인 것을 기회로 하여 동 카페에 종사하는 고용인 56명을 망라하여 웅단(熊團)이라는 폭력단을 조직하고 자기가 고문이 된 다음 부하 정인섭을 단장으로 하여 종로동 일대로 횡행하며 싸움을 맡아 놓고 하게 되었다. [본문으로]
  20. 매일신보 1934. 02. 21 요사이 폭력단이 발호가 심하여 길거리로 다니기가 위험하다 함은 별항과 같거니와 19일 오전 2시경에 부내 종로 2정목 낙원회관에서 어떤 청년 2명이 단도를 빼들고 폭행을 한다고 종로서에 고발이 있음으로 동 서에서 검거하였는데 그 자는 부내 사직동 27번지 신한기(23)외 1명으로. 또 동일 오전 8시경에 부내 간동 90번지 김동순(19)은 술이 취하여 부내 공평동 150번지 박훈서의 집에 침입하여 그 아내 김씨에게 구타 폭행을 하다가 종로서에 검거 되었고, 동일 오후 11시 반경에는 종로 2정목 3번지 앞으로 지나가던 부내 인사동 225번지 전춘산(23)을 어떤 자가 덤벼들어 빈사의 중상을 입게하여 전기 전춘산은 인사불성에 이른 것을 때마침 종로서원이 발견하고 구타하는 자를 체포하려 하자 그대로 달아나는 것을 추격 체포하였는데 그 자는 시외 성북리 36번지 서수명(21) 외에 모 극장 싸움패로 유명한 『대학생』이라는 별명을 가진 자도 있었는데 대학생은 어디로인지 달아 나고 말았다. 그리고 또 19일 오후 9시 반경에는 부내 낙원동 185번지 박하춘의 3남 박창득(21) 외 3명이 인사동 132번지 조재남과 민충식(41), 김용흥(24) 등에게 폭행을 하여 전치 3일간의 치료를 요할 부상을 입게 하였는데 이 계출을 받은 종로서에서는 전기 폭행자들을 전부 검거하여 목하 엄중히 취조하는 중이다. [본문으로]
  21. 매일신보 1934. 02. 21 [본문으로]
  22. 마면생(馬面生), 좀먹는 문화도시!! 대경성의 두통거리, 거리의 「갱스」 3대 폭력단 해부기, 별건곤 제71호 1934. 03. 01, 은송정태랑(銀松亭太郞)북촌 폭력단은 이상으로 그치고 남촌 폭력단의 대장 은송정태랑을 쓰려 한다. 이 은송정태랑은 평양 출생이며, 아홉살 때 황금정 네거리 은송정 카류손(boy)으로 들어 갔다. 그래 그의 이름이 은송정태랑이라고 여급들이 불렀다. 본정(本町) 부근에 큰 싸움이 있을 때에는 으레것 복면강도처럼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우물쭈물 덤비다가 어느 편이라도 형세가 약한 편이 있으면 그는 약한 편에 응하여 조력을 하게 되나니 실로 폭력단 중에서도 가장 의분아(義憤兒)이다. 그의 기술이야 말로 일당백이다.그의 배경은 본정 한계에 있는 음식점원들이니 실로 은송정태랑이라고 하면 어떠한 싸움일지라도 그가 옆에 있으면 비온 뒷날 돌담 허물어지듯이 헤치고 마나니 그의 수입은 음식점에 들어 와서 장내를 문란케 하는 주정꾼들을 격퇴시키는데 얼마씩 받는다.그러나 일당백의 이 남촌 대장도 지금으로부터 3년 전 희락관최(가성)서방(喜樂館崔書房)과 남대문통 3정목 경전회사 뒤 빈터에서 금전 분배 관계로 결투를 하다가 좌편 복부에 부상을 당한 것이 원인이 되어 오랫 동안 병상에 누었다가 작년 12월에 평양으로 가서 그만 돌아오지 못한 길손이 되어 그 뒤의 세력을 인계한 폭력단 대장이 태랑(太郞)의 원수인 희락관최서방이다. 이 사람은 경주 모 기생의 오빠로 몇해 전에 부산에 유명한 폭력단 소라니패의 땅군으로 있다가 서울에 와서 희락관에 취직하게 되자 그의 선천적 악마성이 여실히 발현되어 지금은 본정으로부터 종로 카페 거리까지 그 세력을 뻗히어 활동을 하고 있으며 탑동웅(塔洞熊)과 함께 낙원회관, 엔제루 등지에 일어나는 싸움은 이 사람이 청부를 하는 모양이다. [본문으로]
  23. 마면생(馬面生), 좀먹는 문화도시!! 대경성의 두통거리, 거리의 「갱스」 3대 폭력단 해부기, 별건곤 제71호 1934. 03. 01, 다방골 평양 서방(書房)필자가 아래와 같이 쓴다면 평양 선생님들 중에 노하실 분이 계실 것도 각오합니다.그러나 사실은 사실대로 기재하오리다.10년 전에는 서울 다방(茶房)골이라면 부자가 많이 살던 곳으로 유명하였지만 지금의 다방골은 평양 기생 많기로 유명한 것은 오입쟁이가 아닌 필자도 서울 오기 전에 많이 들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산보를 좋아하는 필자가 다방골 앞으로 오면 반드시 기생을 태운 인력거 서너채가 광교의 좁은 개천가로 솔솔 부는 종로 바람에 머리털을 날리면서 나오는 것을 으레것 보게 된다. 실상 말이지, 어느 날 다방골 십자 골목 친구 몇 사람과 동반하여 기웃기웃 문패를 엿보며 다녔더니 90퍼센트는 기생들의 집이었다. 그런데 이 많은 기생 골목에 이상하게도 긴장미를 주는 것은 술주정꾼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 그 주정꾼이 어찌하여 다방골에 없을까.서울의 폭력단 중 이 다방골 폭력단처럼 정돈된 조직을 가지고 있는 폭력단을 구할래야 구할 수 없을 것이다.우미단 폭력단, 삼각정(三角町)패, 은송정태랑(銀松亭太郞) 등은 모두 수입이 없다. 그러나 다방골패는 일정한 수입이 있으니 이 수입의 근원이 그들의 조직을 강고하게 함이었고, 그들의 태도는 일견 신사요, 훌륭한 모던 보이(modern boy)다. 이 신사가 밤이면 무서운 폭력단으로 변하여 밤거리의 사자가 되어 우미관패와 세력을 다툰다.그러나 그들은 함부로 덤비지를 아니한다. 선전을 포고한 후에 어느 날, 어느 때, 어느 곳에 마치 서양식 결투하는 것처럼 회합하여 두 마리 맹수가 고기를 약탈하는 듯이 주먹과 주먹이 허공에 날며, 대지에 거꾸러지는 사람과 사람의 다툼이 악착하였다. 지금은 다방골패가 완전히 패북을 당하고 쑥 들어 갔다. 그러나 그들은 밤마다 철봉과 중량 연습을 하고 있으니 이제 이번 봄에는 그들의 커다란 결투가 재현될 것이다. 이야 말로 폭력단 세력의 승부의 분수령을 지을 획기적인 기회인 것이다.그런데 다방골이 이상하게도 긴장한 것은 한 사람의 주정꾼이 지나더라도 그들은 벌떼와 같이 덤비며 가진 폭행을 하나니 부디 취하신 분은 다방골로 가지 마소서. 만약 가신다면 지옥에다 미리 통지라도 하여야 할 것이외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가 기생 오빠가 아니면 기들에게서 푼전을 얻어 쓰는 자칭 기둥서방이다. [본문으로]
  24. 마면생(馬面生), 좀먹는 문화도시!! 대경성의 두통거리, 거리의 「갱스」 3대 폭력단 해부기, 별건곤 제71호 1934. 03. 01, 우미관 사자10년 전에는 원동(苑洞)패라고 하면 서울서 가장 독하고도 모진 싸움꾼들이었다. 이역 그 시대에는 폭력단의 일군이었으니, 지금은 원동패들은 간 곳도 모른다. 그 때에는 창덕궁 옆 원동 골목과 네거리에 그들이 진을 치고 있다가 지나가는 중앙학교, 미문(微文)학교, 중동(中東)학교 어린 학생들을 얼마나 울게 하였으며, 괴롭게 하였는지 지금 생각하더라도 찬 땀이 흐르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북촌에 있는 군들이 차차 무대를 이동하여 극장으로, 카페로 진출하였다.그리하여 원동패 중에 강 모(가성)라는 자가 우미관에 취직하게 되었다. 이것이 우미관을 중심으로 발전한 폭력단의 시초이다. 이 강모를 그 한계(限界)에서는 통칭 우미관 사자라고 부른다.강 모를 숭배하는 사람은 우미관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이 무료로 입장 시키는 곳에 그 세력을 발전시켰으니 독자 중 누구나 우미관에 가서 활동사진 가운데 나타난 할극보다도 그 앞 길거리에서 연출된 실연에 더욱 흥미를 느끼시는 분이 있을지라도 만약 한 자리에 오래 서서 구경하시면 불의 손이 손님의 허리 밑으로 들어 올 것이외다. 그들이 싸움하는 위치는 대개 골목이 많은 곳이니 그들은 구경하는 손님에게 돌연히 후딱 따귀를 먹이고 그 암흑한 관철동 골목을 쥐구멍에 들어가는 쥐새끼처럼 달아날 터이니 이 것은 참말 기막힌 활극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또 다음 날 우미관에 모여 전 날의 연출을 재현 시켜가며 무상의 쾌감을 느끼며, 밤 거리의 갱스(gangs)가 되어 도회의 암흑가의 주인공이 된듯이 카페를 지켜주고, 극장을 지켜 준다.그들은 형사를 가장 두려워 한다. 그러나 어떠한 형사의 얼굴이라도 딱 알아 두었다가 일이 긴급한 때에는 남이 모를 암호로써 전하여 캄캄한 골목길로 피신하고 만다.실로 거리의 큰 두통거리의 하나이다.그들의 직업은 대개가 무직이며, 혹은 극장 안에 일을 보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자유노동자가 많다. 그리하여 그들의 악마주의적 쾌감은 바야흐로 거리로 폐여지며 선량한 자제를 휴인하여 내는 일도 흔히 많다. [본문으로]
  25. 매일신보 1935. 01. 16, 부내 삼판통 41번지 윤수남(24), 중림동 27번지 박대원(23), 등 두 명은 상당한 힘을 가진 자들로 항상 자기의 폭력을 자랑하며 경성역을 중심으로 시골서 들어오는 승객들에게 폭행을 하는 악당으로 11일밤 경성역에서 열차 승객에게 폭행을 하는 것을 본정서원이 인치 취조중인바 동 서에서는 각각 29일 구류에 처하였다. [본문으로]
  26. 조선중앙일보 1935. 12. 30, 28일 오후 11시경에 부내 공평동 123번지 앞거리에서 무시무시한 마적이란 별명을 가진 장안에 유명한 싸움 대장인 청진동 226번지에 거주하는 김성재(32)와 무명의 신진 싸움 대장인 청진동 212번지 김창근(23)가 서로 서울 싸움패의 넘버1을 시새워서 피를 흘리며 일대결투를 연출하는 것을 소관 종로서원이 발견 인치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주먹이 강한만큼 싸움의 결과 쌍방이 피투성이의 상처를 받았다. 매일신보 1935. 감8일 오후 11시경 부내 청진동 226번지 싸움패 마적단의 단장 김성재(32)와 동동 212번지 부단장 김창근(23) 등은 각각 세력 다툼으로 말다툼을 하다가 결국은 격투를 하여 승리하는 사람이 단장이 되기를 약속하고 공평동 123번지 앞에서 윗자리를 다투는 최후의 결전으로 영화의 장면같은 전투식의 대격투를 하였는데 결국은 김성재는 가슴과 허리 등 수개소에 타박상을 입고 김창근은 얼굴에 6센치의 파열상과 고환의 상처를 입어 2명이 전부 피투성이가 되어 기진력진하여 넘어져 있는 것을 행순중이던 종로서원이 발견하고 공안상 좋지 아니하다 하여 전부 검속을 한 후 방금 엄중취조중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27. ①동아일보 1935. 03. 09 서울의 밤거리를 피로써 물들이는 폭력다느이 패왕 신마적을 부내 종로서에서 체포하였다. 극장 앞 음식점 앞을 근거로 진을 치고 어수룩한 시골의 손님, 나약한 여성 등을 피와 완력으로 유린하는 불량 폭력단이 장안의 밤거리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일반이 주지하고 있는 바이다. 그 불량 폭력단의 수령 신마적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는 부내 청진동 121번지 엄동옥(28)은 8이 오전 2시경 부내 관철동 116번지 식위천 꼬치구의 집에서 술 먹고 있는 시골 손님 양점수와 지ㅗㅇ수에게 술을 내라고 무리한 요구를 핟가 들어주지 않는다고 무수히 구타하고 그대로 도주한 것을 소관 종로서원이 탐지하고 체포하였는데 동 서에서는 엄중히 처벌할 방침이라고 한다.②매일신보 1935. 03. 09 밤거리의 신사로 부내 각처 빠와 카페 등지에서 토주 잘 하기로 유명한 신마적이라는 칭호를 가진 엄동옥(28)은 8일 오전 5시경 부내 관철동 116번지 모 음식점에서 술을 먹다가 같이 옆에서 술 먹던 지봉수와 양점수 등에게 싸움을 걸어 나중에는 1척여 단도를 빼어 휘두르며 위협을 하는 것을 때마침 종로서원이 발견하고 제지한 다음 신문을 하려고 하자 비호같이 날새게 달아 나는 것을 부내 각서에 지명수배를 하고 대활동을 하여 오전 7시경에 이르러 필경 체포하였는데 이자는 완력이 센 것을 믿고 밤의 종로에서 독판을 치던 자로 일반음식점 영업자들은 그의 자체만 보아도 벌벌 떨던 폭한으로 종로서에서는 철저히 응징코자 목하 엄중함 취조를 하는 중이다. [본문으로]
  28. ①동아일보 1935. 11. 01 부내 서린동 124번지 김기환(24)은 부하 수십명을 인솔한 경부, 경의선 양선의 열차 소매치기의 수령임을 부내 종로서원이 탐지하고 수십일 전에 체포코저 노력중이었던바 30일 오후 6시경에 전기 주소에 잠복하여 있는 것을 격투 끝에 체포하였다 한다.②조선중앙일보 1935. 11. 01 전 권투선수 김기환, 절도단체장으로 전락, 그는 살인 『뽀삐』도 이긴 맹장, 60명 악당을 조종, 젊은이의 피가 뛰는 링 위에서 의기 있는 남아의 자랑을 마음껏 누리며 조선 권투계에 용명을 높히 날리던 박서가 여자와 술 때문에 타락되어 마침내 60여명으로 조직된 소년 소매치기 절도단의 단장으로 둘러 떨어진 사실이 있어서 시정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 부내 종로서에서 며칠 전에 부내 각 처에서 대담무쌍하게 조직적으로 소매치기 절도를 감행하는 60여명으로 조직된 소년 소매치기 절도다능ㄹ 일망타진적으로 검거하고 엄중히 취조중이라 함은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동 사건을 취조한 결과 그 소매치기 절도단의 배우헤는 2년 전에 경성운동장에서 어메리카 권계의 챔피언인 저 딴스튜워드 마저 1회전에서 넉 아우스로 링 위에 한일자를 그리게 하고, 또한 일반의 기억에 인상기피 배인 무서운 살인 뽀비를 역시 판정승으로서 물리치고 단연 이 땅의 권투계에 데뷰하여 천하에 이름을 날리던 신진 맹장인 부내 서린동 124번지에 거주하는 웨터급 김기환(24)이가 단장으로 잠재하여 모든 범죄를 세계적 범죄왕 카보네식으로 지휘한 사실을 탐지한 동 서에서는 즉시 글 체포하려 하였으나 이 검거중에 기미를 알아 차린 그는 동경으로 도망을 하여 이래 잡지를 못학 있던 중에 며칠전에 다시 부내 서린동에 있는 자기 동무의 집에서 와서 잠복해 있는 것을 30일 오후 6시경에 동 서 형사대가 탐지하고 건기 장소에 이르러 일대 격투를 연출한 끝에 체포하였다. [본문으로]
  29. 동아일보 1936. 04. 10 종로 뒷거리의 대장인 신마적과 최고학부 적을 둔 학생들이 한패가 되어 비 내리는 봄 거리의 술집을 습격하여 수라장을 이룬 사건이 발생하였다. 9일 오전 1시경 폭우가 쏟아지는 때 부내 공평동 73번지 카페 평화에는 5인의 폭행단이 습격하여 문을 열어 달라 요구하였으나 시간이 지났다는 구실로 문을 열어주지 아니하자 돌연 영창을 부수는 동시에 그들의 폭행을 만류하는 동 카페 주인을 비롯하여 여급들을 무수히 구타하여 현장에는 유혈이 낭자하였다 한다. 이 급보를 받은 소관 종로서에서는 즉시 서원이 출동하여 그들 일당을 일망타진하였는데 그 중의 수령은 유치장을 제 집 드나들듯이 들어 다니는 종로 뒷거리의 대장 신마적이엇음을 발견하고 그들을 즉시 유치하고 엄중히 취조중이라는바 그 중 2명은 부내 최고학부에 학적을 둔 당당한 학생인 것이 판명되었다는바(하략). [본문으로]
  30. 동아일보 1936.06.13 朝劇火災(조극화재),放火(방화)로 判明(판명)! [본문으로]
  31. 동아일보 1982. 11. 18, 1920년 우미관의 변사로 들어 가 해방될 때까지 일류변사로 이름을 날렸던 성동호(79 서울 서댁문구 연희3동 350의 10)씨는 그때의 우미관 내부 모습을 이렇게 설명한다. (중략) 우미관 하면 김두한씨와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성동호씨는 김두한씨가 우미관과 조선극장 매점 관리권을 쥐고 극장 안에서 음식을 파는 가 하면 영화제목이 적힌 깃발을 들고 광고하는 일도 도맡아 했다는 것. [본문으로]
  32. 동아일보 1936. 03. 31 유곽지대를 무대로 횡행하든 폭력단 수령이 체포되었다. 부내 청엽정 1정목 49번지 최성용(33)은 용산 미생정 일대 유곽을 횡행하는 폭력단의 수령으로 유명한 작자인데 29일 오후 9시 반경에는 미생정 모 중국인 호떡집에 이르러 무전취식을 하고 음식값을 요구하는 주인을 구타하는 현장을 소관 용산서원이 발견하고 체포하였다 한다. 동서에서 취조한 바에 의하면 그들 일당은 수십명에 달한다는데 짙어 가는 봄 기운에 따라 그들의 발호도 있을 것임으로 동 서에서는 철저하게 취체할 방침이라 한다. [본문으로]
  33. 동아일보 1937. 06. 22 부내 관동정 163의 49 김기환(26)은 일즉 권투 배운 것을 믿고 신설정 일대에서 주민들을 구타 혹은 위협을 일삼다가 마침내 20일 오후 4시 본정서원에게 체포되었는데 그때야 비로소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운동가여! 먼저 운동정신을 배울지어다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한다. [본문으로]
  34. ①매일신보 1939. 07. 21 종로 네온 거리로 돌아다니며 협박공갈을 하고 술을 빼앗아 먹던 일당 9명의 폭력단이 20일 새벽 종로서에 검거되었다. 그들은 한때 권투계의 웰터급! 선수권을 가진 이름이 높은 김기환(28)을 단장으로 하고 부단장에는 역시 권투선수 남광일=일명 이기환(26)이 되어 부내 각처 카페와 빠 등지로 돌아 다니며 손들에게 술을 내라고 협박을 하고 술과 돈을 빼앗는 것으로 일을 삼으며 낮에는 황금정 2정목 186번지 양복점 (직원)황동민(27)의 집에 모여 한담으로 소일을 하다가 저녁만 되면 종로 네온 거리로 출몰하며 여급을 협박하고 금품을 빼앗기와 또는 손님에게 폭력을 써서 총후치안을 어지럽게 함으로 이번에 단연 검거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18일밤에도 종로 2정목 미야꼬 빠에서 어떤 청년이 술에 취하여 있는 것을 어서 회계를 하라고 호령한 다음 친절히 안내를 하는체 하고 그 주머니에서 70원을 훔쳐 낸 것을 비롯하여 수십여회의 범행을 하였으나 피해자들은 겁에 나서 경찰에 계출 못하고 있던 중 이번에 내사만 거듯하던 종로서에서 검거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누구이고 그들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은 경찰에 계출하기 바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일당의 주소성명을 다음과 같다. 부내 관동정62 소매치기 전과 1범 권투선수 김기환(28), 황금정 2정목 86 권투선수 남광일(26), 봉래정 2정목 151 자칭 종로 갱 김영천(21), 종로 5정목 15 김귀봉(24). 종로 5정목 140 김재철(23), 입정정 109 김익제(24), 예지정 152 양대현, 황금정 2정목 186 양복상 황동민(27), 봉래정 4정목 194 황창수(26).②동아일보 1939. 07. 21, 장안의 도심 종로 밤거리를 중심으로 최근 불량 청년들이 출몰 거리에 나온 부녀를 농락하는가 하면 장대한 체구를 뽐내며 네온의 뒷거리에 나타나 무전취식, 폭행, 협박 등 갖은 행동을 감행하여 장안의 도심을 혼란 전률케 하는 밤 거리의 폭군이 최근 점차 증가함에 눈쌀을 겨눈 종로서에서는 다수의 형사를 동원시켜 작 19일밤 우선 9명을 검거 유치코 엄중 취조에 착수하였다. 여름은 대개가 거대한 체구만 가진 무직자들이고 또한 권투 선수도 끼어 있어 이 패들이 드나드는 네온가 기타 음식점에서는 상당한 피해를 받으면서도 후일을 염려하여 경찰에 고발도 못하는 실정에 비추어 취조 결과는 장차 상당한 악질적 행장이 폭로될 것으로 보고 있다. 더욱이 때가 여름철이고 하룻동안 땀에 젖은 도회의 부녀들이 마음놓고 거리에 나올 수 없어서야 되겠느냐고 동 서에서는 엄중한 취조를 행하는 동시에 시국하 거리를 숙청하는 의미에서 금후도 계속하여 거리의 폭군을 극력 소탕하기로 되었다. 이번 검거망에 들은 9명은 다음과 같다. 관동정62 권투선수 전과2범 김기환(28), 황금정 2정목86 권투선수 이기환(26), 봉래정 3정목 151 무직 김영천(21), 종로 5정목15 무직 김귀봉(24), 종로 5정목14 무직 김재철(23), 입정정109 뭊기 김익제(24), 예지정152 무직 구대현(26), 황금정 2정목286 양복점 점원 황동민(27), 봉래정 4정목149 무직 황창수(26). [본문으로]
  35. 매일신보 1939. 09. 13 약초극장 부근을 근거로 한 폭력단 2명이 11일 밤 본정서에 체포되었다. 그들은 부내 왕십리정 298번지 윤성희(18)를 단장으로 하고 원서정 77번지의7 장안순(19)을 부단장으로 하여 부하 16명을 둔 불량단인데 극장에서 돌아가는 부녀자를 농락하기와 극장 여자 안내인을 놀리다가 그것을 말리는 사람이 있으면 폭력으로써 싸움질을 하는 것으로 일을 삼는 사나이들이다. 그런데 지난 8일 오후 10시 10분에는 방공훈련중이라 어두워서 극장 여자 안내인 서원양자(17), 오봉애자(16), 김영애(18) 등은 영화계원 신치선(22)이가 집까지 데리고 가던중 황금정 3정목 조일 택시 앞에서 전기 불량단이 덤벼 들어 힐난을 하여 싸움을 건 것을 비롯하여 그 이튿날인 9일밤 11시 10분에는 윤, 장 두명은 부하 16명을 거느리고 약초극장 문전에서 싸움을 하려고까지 하여 그 극장 종업원 2명은 겁이 나서 극장을 사임까지 하고 말인 일이 있어 이 계출을 받은 본정서에서는 그 일당을 검거코자 활동중이던바 11일 밤 단장과 부단장이 황금정 남본상회 앞에서 배회하는 것을 발견하고 체포하였는데 그 잔당을 전부 검거코자 활동을 계속중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36. 매일신문 1939. 08. 08, 6일 오후 11시쯤 부내 종로통 빠1 살롱 앞에서 어떤 청년 두 명이 황금정 7정목 4번지 이석경(24)을 난타하여 중상을 입히고 달아 나는 것을 때마침 행순중이던 종로서원이 발견하고 체포하여 취조한 결과 그들은 일정한 직업이 없는 김두완과 이용식(21)들로 김두완을 수령으로 하고 78명의 폭력단을 조직한 후 우미관을 근거로 하고 매일 밤마다 극장에서 구경하고 가는 부녀자들을 힐난하기와 또는 각 음식점으로 돌아다니며 손들에게 싸움을 걸고 술을 빼어 먹는 사실을 자백하여 방금 여죄를 조사중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37. 매일신문 1939. 08. 10 8일 오후 7시 반쯤 부내 종로 1정목 83번지의 3호 유노마(28)는 술이 얼근히 취하여 종로 4정목 전차 교차점에 이르서 전차 신호를 하고 있던 경전 임용대에게 공연히 트집을 잡고 달려 들어 무수 난타하는 것을 동대문서원이 발견하고 파출소로 데려다 ...유를 할 즈음 그는 파출소 유리창을 산산히 때려 부수고 마침내는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그는 종로 2정목에 있는 우미관을 근거로 네온 거리에서 행패를 부려오던 불량자의 두목이라 한다. [본문으로]
  38. 동아일보 1940. 07. 14 종로 거리의 다방, 빠는 부량패들이 우글우글 차 한 잔 마음 놓고 마실 수 없다는 비난이 점고, 종로서에서는 이를 숙청하고자 눈초리를 노리고 있는 중 과연 작 12일 밤 관철정 흥아 빠에서 야료를 치는 부내 삼청정 36번지 무직 김두한 외 2명을 검거하고, 다시 종로 2정목 경성 다방에서 삼청정 63번지 이부규(31)를 이의 한패인 명대 흥아과 학생, 이윤선(23), 전 자동차 운전수 김영범(28)을 청진정 63번지 1호 조선권번 기생 오금홍의 집에서 숨어 있는 것을 검거하였은데, 이들은 종로 2정목 한양 빠에서 손님들에게 폭력행위를 가한 것이다. 현재 도합 9명을 잡아 들였고, 계속 활동하여 부량패의 소굴 네온가의 숙청을 철저 단행할 터이라 한다. [본문으로]
  39. ①매일신보 1940. 07. 18 각 빠, 요정 또는 찻집 같은 곳에 드나들며 주인 도는 손님들에게 금품이나 술을 내라고 협박하여 듣지 않으면 싸움을 걸어 가지고 폭행을 하고 돌아다니니 소위 종로 뒷골목의 전격대 10여명은 얼마 전 종로서에 검거되어 취조를 받고 있거니와 그들의 취조에 따라 정말 수괴는 권투선수 또는 또는 빠 같은 것을 경영하는 업자 자신이 뒤어 숨어서 그들 일당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 판명 종로서에서는 이미 몸을 피하고 만 그들 수괴를 다시 수배하고 엄탐중이다. 즉 전에 권투선수이던 김기환과 부내 관철정에서 빠를 경영하는 김모 외 수명은 소위 오래 전부터 폭력단을 조직해 가지고 종로 네거리를 중심으로 찻집, 빠, 카페, 요점, 야시같은 곳으로 횡행하며 손님과 행인들을 괴롭혀 오던 터로 그 서에서는 이번에 이러한 분자들을 철저히 응징할 방침으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회에 브로커 고리대금업자들의 거래하는 소굴로 되다시피 어지럽고 또는 남녀의 풍기가 어지러워 일반의 비난이 자자한 찻집에 숙청의 손을 더욱 강화하여 철저한 태도로 나아가리라 한다. ②매일신보 1940. 08. 14 자칭 전격대라는 괴상한 간판을 내걸고 빠나 카페 같은 데를 돌아 다니며 손님들에게 싸움을 걸어 가지고 폭력행사를 하여 뜻하지 않은 봉변을 보인 다음 나중에는 사과 술이니 하며 도리어 피해자들의 술까지 뺏어 먹는 폭력단 숙청의 제일착으로 종로서에서 며칠전부터 관내를 횡행하는 폭행단을 검거하여 취조 중이거니와 이번에는 동대문서에서 폭력단 숙청의 메스를 내리게 되었다. 즉 지난 번 숭인정, 왕십리정 두 곳에 연거퍼 일어 난 협박 사건의 정체가 판명되지 않아 인심을 산란케 하고 있는데, 6일 아침 신설정 30번지 음식점 박씨(40)가 동대문서 사법계 형사실에 나타나서 불량자 때문에 한시를 부지할 수 없으니 당국에서 선처하여 주시요하고 눈물로 호소한 일이 있어 다음과 같은 용납치 못할 사실이 드러났음으로 그 서에서는 즉시 그 동리 105번지 김영선(28)과 60번지 이상순(23)을 인치 취조중이다. 그리하여 이 기회에 암흑가를 횡행하는 폭력단을 철저히 숙청하기고 되었다. 즉 이 자들은 전기 박씨가 혼자 몸으로 음식점이라고 간신히 경영해 나가는 것을 밤낮으로 와서 살며 술을 내라 돈을 꾸어달라는 등 공갈을 하다가 듣지 않으면 폭력행사를 하여 중상을 입혀 놓고 하였다. 그리고 또 한편 손님들을 협박하여 술을 뺐어 마시기 일쑤고 폭행하는 것을 일과로 삼는 자들이라는바 그 밖에도 다른 음식점이나 카페 같은 데를 돌아 다니며 어떠한 폭행을 하고 돌아 다녔는지도 모르며 어쨌든 그들이 전기 음식점에 드나들며 한 행동으로 보아 여죄를 추궁할 나머지가 있다고 그 서에서는 엄중취조 중이다. [본문으로]
  40. 매일신보 1941. 09. 25 수년전 살인 뽀비를 KO시켜 권투계에 성명을 휘날리던 김기환(27)군은 그간 부득이한 사정으로 권투생활을 중지하고 있었으나 최근 그의 친우들의 비호를 힘 입어 링크에 재기의 봄을 맞이하게 되어 방금 동양권투회 도장에서 맹훈련을 하고 있는바 금월 말경에는 오랫동안 동경하던 시합에도 출장하리라고 한다. [본문으로]
  41. 사상에 관한 정보(경찰서장), 경종고비 제1721호의 1, 1942.04.07 14쪽, 侍天教側との民事訴訟和解条件たる教会堂共用方折衝を重ね、同年2月17日共用することに決定するや、侍天教者側の幹部の河正旭は予てより凶計に長じ相当腕力強気故、之等と事務所を同じくすることは自然対立衝突の場合あるべく、且つ侍天教側も何等暴力の斯種準備を為すものと予測し、訴外申徳成の紹介にて被疑者金斗漢を知り、先ず同人の歓心を買うべく夕食を饗応し、自分は、金斗韓の父故金佐鎮と共に朝鮮民族運動を成し親しきものなるが時勢により自分は転向大東一進会幹部として活動して居るが将来自分を真の兄として考えてくれ、そして大東一進会の運動として有望なる腕力青年を募集して善導してやり度く存じていると好弁を述べ、同人の承諾を得て之を獲得し. 시천교쪽과의 민사소송 화해 조건인 교회당 공동 사용에 관한 절충을 거듭해서 동년 2월17일 공동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자 시천교쪽 간부인 하정욱(河正旭)은 예부터 흉계를 잘하고 완력이 강하기 때문에 그들과 사무실을 같이 하면 자연히 대립하며 충돌할 가능성이 높아, 그 위에 시천교쪽에서도 이런 폭력에 대해 준비를 할 것이라는 예측 아래 소외(訴外) 신덕성(申徳成)의 소개로 피의자 김두한(金斗漢)을 알게 되어 먼저 동인의 환심을 사려고 저녁 식사를 향응해서 자신은 김두한의 돌아가신 아버지 김좌진(金佐鎮)과 같이 조선민족운동을 하면서 아주 친한 사이였지만 때가 이러니까 자신은 전향해서 대동일진회의 간부로서 활동하고 있고, 앞으로는 자신을 진짜 형이라고 생각해 주라면서, 그리고 대동일진회의 운동의 일환으로 유망한 힘이 강한 청년을 모집해서 선도해 주고 싶다라는 능변을 펼쳐서 동인의 승낙을 얻어 이(김두한)를 획득하였다. / 이로보아 김두한은 자신이 김좌진의 아들이라고 떠들고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시천교, 즉 대동일진회측 오건영은 김두한의 거짓말에 교묘하게 맞장구를 쳐주면서 자신의 목적 달성에 이용하였다. 시천교 분열되어 일부가 친일단체로 변절하여 대동일진회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변절하기 이전에도 오건영이 김좌진의 독립운동을 도와 준 사실이 없다. / 김두한이 김좌진을 정말로 자신의 아버지로 생각했다면 친일단체 대동일진회 내분에 개압하여 협작질에 동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문으로]
  42. ①피의자 장명원, 피의자신문조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1949. 06. 02 김두한이가 말하기를 장소로서는 일진회시천교가 되어 있는 堅志洞 侍天敎會를 교섭하도록 하라고 하며 김두한의 말이 일진회가 시천교회 내에 사무소를 설치할 때 우리들의 힘으로 되었으니 우리도 잘 알뿐 현상으로는 일진회가 사무를 중지하고 있으니 가장 그 장소가 유도도장을 하든지 기계체조에 적당하□□ 되도록 말을 당국에 하여 달라하기로 본인은 장소 사용 건을 교섭하는 일방 仁川島 중 훈련 운운은 불가능하다고 당시 형사과장 泉川(日人)에게 말한즉 경찰부장 岡(日人)에게 상의하겠다 하기로 부탁하고 있던 중 수일 후에 형사과장 泉川으로부터 통지가 있기로 가본즉 그 장소 사용 문제는 종로서 고등계에 부탁하였으니 우리 형사과에 있는 경부 일본인 某와 같이 일진회로 가림하기로 堅志洞에 간즉 동학당 대표 강노인과 시천교 대표 한씨, 김씨, 일진회 대표 김태홍[金台虹]씨와 종로서원이 있는 곳에서 서로 협의한 결과 동학당과 일진회는 사무가 수면상태에 있으나 시천교는 강당에 신전이 있으니 조심하여 공동사용하자는 협의가 되어 그 장소를 사용하기로 하고 4월 중순에 반도의용정신대라는 간판을 걸고 청년이 오는 대로 수습 지도하기로 하였습니다. ②증인 한문관, 증인신문조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1949. 06. 02, 단기 4276년[1943] 봄 경에 당시 경기도 경찰부 재하齋賀(일인) 경부가 전화로 경찰부로 오라 하기에 갔더니 팔목八木(장명원)이라는 사람이 보안과장(일인) 팔목八木과 친근해서 본부 방침에 따라 시내에 있는 불량배를 모아다가 교양을 시키도록 其 사업을 하게 되었으니 시천교당 일부를 대여함이 어떠한가 하기로 고려한다, 그러나 본인이 책임자가 아님으로서 책임자와 협의한 후 확답하겠다고 돌아왔는데 其後 2, 3일후에 장명원이 증인을 찾아와서 당국에서 시천교당을 사용하라고 하였으니 쓰겠다고 하기에 못한다고 증인은 거절하였으나 其後에 반도의용정신대가 와서 불법 점유하였습니다. [본문으로]
  43. 사상에 관한 정보(경찰서장), 경종고비 제1721호의 1, 1942.04.07 16쪽, 同年2月19日自宅において被疑者金斗漢の紹介により其親分俗称旧馬賊こと高時亨(京)改め高山勲を知り、前掲両名に対する如き好言を述べて獲得し. 동년 2월19일 자기 집에서 피의자 김두한의 소개로 그의 두목인 속칭 마적(馬賊), 곧 고시형[高時亨(경京)], 별명 타카야마이사오(고산훈高山勲)를 알게 되어 위의 두 사람에게 한 것과 같은 감언으로 획득하였다. [본문으로]
  44. 위의 글 [본문으로]
  45. 사상에 관한 정보(경찰서장), 경종고비 제1721호의 1, 1942.04.07 16쪽, 同年2月20日頃被疑者金斗漢の紹介により喧嘩常習団の親分格にあり窃盗前科を有する拳闘選手権保持者金基煥を知り、前掲の如き甘言を述べ、特に同人に対しては同会に於いて運動部事業として約2000円余を以って野外リング場を設置すべきに付師範として援助されたい旨依頼して承諾を得たるが. 동년 2월20일경 피의자 김두한의 소개로 싸움 상습자이자 절도 전과가 있는 권투선수권보유자 김기환(金基煥)을 알게 되어 같은 감언을 하며 특히 동인에게는 동회의 운동부 사업으로서 약2,000여엔을 가지고 야외 링장을 설치해야 하니 당신이 사범으로서 도와 달라고 의뢰하여 승낙을 받았다. [본문으로]
  46. 매일신보 1944. 06. 13 폭력을 행사하여 한때 종로 뒷거리의 밤의 풍기를 어지럽히던 무직 청년, 즉 뒷거리의 싸움패라고 불리워 지는 그들도 가열한 시국하 180도 전환을 하여 조금이라도 총후의 도움이 되겠다고 지난 4월 12일 야기(대구 경찰서 고등계 형사 정명원)씨를 두령으로 반도의용정신대를 조직한 이래 매달 10일, 20일, 30일의 3회에 걸쳐 부내 견지정 80번지 사무소(시천교당)에서 대원 100여명은 인격수양에 시국인식에 연성을 거듭하여 오던 바, 지난 5월 말일의 수양회 석상 야기 두령으로부터 『먼저 금속 회수로부터 봉공하자』는 훈시를 듣자 그들은 넉넉치 못한 가세임에도 적성으로 놋그릇 등을 백 수십점, 동화, 니켈화, 고화 등 50여원을 가져 왔음으로, 야기 두령은 12일 해군 무관부를 방문하고 대원의 갱생을 자세히 말한 후 금속회수 대금 315원 85전과 동화, 니켈화 등 50원을 헌납하였는데, 단장 야기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금후의 활동을 맹서한다. 한때는 쌈패로서 말썽을 부리던 그들도 시국을 인식하고 총후의 봉공에 매진하고 있는 자태는 참으로 믿음직스럽다. 그러나 아직도 폭력행동을 하는 자가 있다면 규칙에 비추어 단호한 처벌을 할터이다. 금후는 오로지 당국의 지도 밑에 활동을 하려 한다. [본문으로]
  47. 위의 기사 [본문으로]
  48. 경향신문 1987. 04. 01 더우기 김두한은 대한민청 감찰부장이 되어 그의 직계 동지들을 별동대로 망라시킨 다음부터 진짜 김두한 혈투사를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정진용 일파는 물론 좌익노조 정벌작전에 신명을 내걸었던 별동대의 주요 대원은 이러했다.별동 임원 및 주요 대원 무순: 김관철, 김영태, 김두윤, 김창호, 김태수, 김무옥, 김동회, 김명식, 김영택, 김국진, 강순남, 고경주, 고월환, 남정길, 박기영, 노강, 명호영, 서병룡, 서무남, 송기현, 송지헌, 신영균, 문화태, 이경태, 이기호, 이영근, 이국노, 이용배, 이상무, 이종천, 이창성, 양동수, 임일택, 임수일, 전삼용, 장용학, 조희창, 조병후, 정구영, 지복길, 거팔수, 한응태, 홍수길, 송장환. [본문으로]
  49. 동아일보 1947. 03. 28 3월 20일 정기총회에서 결정된 전조선 프로권투연맹 역원은 다음과 같다. 고문: 안재홍, 방응규, 양근환, 이○근, 회장: 보류, 부회장: 최○규, 석인오, 상무이사: 정복현, 박용만, 김헌수, 이사: 김기환, 김석우, 김진용, 양정○, 홍응규, 김영복, 박용○, 방순갑, 김만진, 홍○○, 최상린, 이용규, 평의원: 정복수, 이찬우, 김춘만, 권순조, 김리남. [본문으로]
  50. 경향신문 1987. 04. 29 (중략) 이때 장택상 수도청장으로부터 정진용 일파가 21일에 귀국하는 이 박사에게 위해를 가할 음모를 꾸밀는지 모르므로 대한민청 감찰부에서 정진용 일당을 붙잡아서 손을 좀 본 다음에 주동자급을 가려서 경찰에 넘겨 달라는 부탁이 왔다. 이를테면 예비검속의 사전지원을 부탁해 온 셈이다. 이에따라 김두한은 정진용 일파를 납치해 오도록 지시하게 되는데 정진용을 직접 납치해 온 당시 특수공작과장 조희창씨(현재 서예가)의 생생한 증언을 들어 본다. 그날 국제극장(후에 시공관)에서 좌익선전 악극 청춘의 봄이 상연되어 정진용 일당은 극장 경비에 동원되어 있었어요. 이 박사 귀국일정이 하루 연기되었으므로 정 일당은 극장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던 거죠. 나는 정진용의 옆구리에 권총을 들이대고 남산 본부 감찰부로 납치해 왔어요. 같은 방법으로 김천호를 비롯한 몇명을 끌어 왔고, 다른 동지들도 여러 명 납치해서 모두 20여명을 감참부 사무실에 결박해 꿇어 앉혔어요. 김두한 동지의 지시는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의 은밀한 협조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들었어요. [본문으로]
  51. 경향신문 1987. 04. 29 납치해 온 정진용 일당에게 이미 상당한 매질을 한 상태에서 김두한 감찰부장이 하필이면 신영균 조사부장을 부르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꼬집어 규명할 수 없지만 그 시각에 신영균이 나타났다는 것은 서로에게 있어서 악운의 작희였음이 분명하다. 내가 김두한 동지 앞에 갔더니 그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신형이 정진용이 그 자의 팔다리 동맥 정도를 끊어 더 활동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죽이라는 말은 안했어요. 나는 알았다고 대답한 후 정진룡, 김천호에게로 갔어요. 결박되어 있는 그들에게 상당한 매질이 있었던 것 같지만 아직 약과였어요. 그 순간 정진용의 시선과 마주 친 순간 번개처럼 스치는 충격이 있었어요. 바로 전날 밤 명동장에서 좌익이 이기면 남한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정진룡이 지껄인 폭언 말입니다. 나는 피가 역류하여 다른 동지들에게 철봉대를 빨리 가져 오라고 했죠. 전진용 가슴에 3대, 김천호에게 두대, 그랬더니 그만... . [본문으로]
  52. 동아일보 1948. 03. 17 조선인 재판소에서 이미 판결을 받은 김두한, 김영태 등 16명에 관한 군률 재판은 조사위원회에서 지난 2월 12일 그 심리를 마친 후 그 내용 발표를 보류하고 있던 바 지난 15일 조선 주둔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즉 동 조사위원들은 김두한, 김영태, 신영균, 홍만길, 조희창, 박기영, 양동수, 임일택, 김두윤, 이영근, 이창성, 송창환, 고경주, 김관철 등 14명에 교수형으로 문화태, 송기현 등 2명은 종신형으로 판결하였는데, 하지 중장이 다시 재판한 결과 김두한 교수형, 김영태, 신영균, 홍만길, 조희창 4명은 종신형으로, 박기영, 양동수, 임일택, 김두윤, 이영근, 이창성, 송창환, 고경주, 김관철 등 9명은 30년형으로 문화태, 송기현 2명으 20년형으로 각각 감향 수감되었는데 하지 중장으로부터 수감 장소가 명령될 때까지는 미군 제7사단 구금소에 임치 수감중이라 한다. 그리고 김두한의 교수형에 대해서는 교수 집행 전에 미국 극동 사령관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