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다. <6편 >

허구인물 전우치 2015. 8. 21. 23:00

6. 김두한은 학대하는 외숙 때문에 개성에서 가출했나?

 

김두한은 고아가 된 자신을 외숙이 돌봐 줬다고 주장한다. 김두한이 외할머니 빼고 언급한 유일한 친척이다.

 

"졸지에 외조모와 어머니를 잃고 거리에 나온 일곱 살의 소년 김두한을 맞아주는 안식처는 이 땅 위에 그 아무 곳도 없었다. 나는 어렸을 때의 기억을 일일이 전부를 엮어낼 수 없지만 얼마 후 개성에 사는 외숙댁에 일시 정착하게 되었다."

- 김두한, 예비 검거된 외할머니와 어머니,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 김두한 회고기 1963.

 

"내가 개성의 외숙댁에 있을 때 우리 외숙집 옆에는 계란빵 장사를 하는 노인 한 분이 있었다. 그때 나는 학교에 안가고 놀고 있었으므로 곧잘 계란빵 장사 가게에 들리곤 했다."

- 김두한, 아버님 비보에 우는 빵집 영감님,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 김두한 회고기 1963.

 

"나는 나의 외숙에 대해서도 쓰고 싶지 않다.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투옥된 후 다만 얼마간이라도 외숙 댁에 있었으니까. 그러나 외숙 집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그렇게 유쾌한 추억이 못된다. 아버지가 만주의 영안현 산시역전에서 고려 공산 청년 회원인 박상범의 저격으로 피살된 후부터 외숙은 나를 그렇게 귀중히 보아주지 않았다. 냉대는 갈수록 심했고, 그때 이미 열 살이 된 나는 어느 정도의 눈치를 살필 수 있었기에 독립생활을 뜻하고 도보로 서울을 찾아 남하 허기 시작했다. 다 떨어진 신발에 남루한 옷을 걸치고 어렸을 때(7세) 학교 다니던 서울……. 가물가물한 기억에 의지하여 서울을 향해 개성을 떠났다."

- 김두한, 도보로 180리 서울 찾아 남하,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 김두한 회고기 1963.

 

"내가 여기에 일곱 살 때 (청산리 대첩으로) 일본 경찰이 외조부님과 모친을 투옥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천애 고아가 되었다. 열살 되던 해 독립군 대장인 부친의 별세를 듣고 울었다. 그래서 혁명아가 나는 되겠다고 서울로 혁명아가 600백리 길을 걸어 왔다"

- 김두한, 제1부 옥중기, 명인옥중기, 희망출판사 1966

 

1963년에는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사망후 개성에서 2년 정도 외숙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았는데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갑자기 외숙이 태도를 바꿔 냉대하니까 힘들어서 10살 때 가출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6년 후인 1969년에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던 100여칸 짜리 커다란 어머니 집은 식모도 한 사람 둘 정도로 큰 살림집이었는데, 어느 날 학교에서 인력거를 타고 돌아와 보니 외숙이 도박과 술로 집을 날려 먹고 도망가자 법원에서 집달리가 나와서 차압 딱지를 붙히면서 쫓아내는 바람에 그 길로 종로 2가 청계천 다리 밑으로 가서 거지가 되었다고 다른 주장을 했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예비검속을 했어요. 어머니 할머니가 안 계시니까 여덟 살 먹은 놈이 완전 거지가 된 거죠. 외삼촌이 집과 땅을 팔아 먹었으니까. 어머니의 오빠인데, 매일 도박하고 술 먹고 하는 게 일인 사람이었어요. 인사동 집이 백여 칸 됐고, 식모 한 사람이 집안 일을 거들어 주었는데, 어느날 인력거 타고 학교 다녀 왔더니 외삼촌이 도망갔다고 집달리가 와서 절 내쫓아 버렸어요.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되어 종로 2가 장자구 다리 밑에서 지냈습니다."

- 김두한, 제4화 부친 김좌진장군을 만주에서 만나고 온 얘기, 노변야화, 동양방송 1969.10.17

 

한편 개성에서 살 때 자주 들렸다는 빵집의 영감과 외숙은 놀라운 정보력을 자랑한다. 김좌진 장군이 사망한 날짜는 정확히 음력으로 1929년 12월 25일이다. 양력으로는 1930년 1월 24일이다. 암살설 보도가 나온 것이 1930년 2월 9일(동아일보,중외일보)이고, 확인 보도가 나온 게 1930년 2월 13일이다. 하지만 개성 빵집 영감과 외숙은 2년 먼저 범인이 공산당 청년이라는 것까지 알려 준다.

 

"하루는 밖에서 놀다가 집으로 가는 길에 계란빵 영감님 집을 들렀는데, 빵을 굽던 영감님이 일은 안하고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이상히 생각한 내가 "아저씨 왜 우세요, 무슨 일이 있어요?"하고 물으니, "우리나라의 훌륭한 애국자 한 분이 돌아가셨단다"하고 대답했다. 나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이것은 혈연에서 나오는 작용이었다) 돌아가신 독립투사가 누구이며 계란빵집 주인 영감이 왜 우는지 알 길이 없었다. 외숙댁에 돌아온 나는 또 다시 외숙의 우는 얼굴을 보았다. 나는 또 물었다. "아저씨, 왜 우세요?" "너의 부친이 돌아가셨단다. 그것도 우리나라 공산당 청년에게."

- 김두한, 아버님 비보에 우는 빵집 영감님,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 김두한 회고기 1963.

 

중외일보의 주장에 따르면 심지어는 글을 전혀 읽을 줄 모르는 김두한은 중외일보를 척척 읽으면서 스스로 김좌진의 죽음을 알아 낸다. 중외일보는 김두한이 8살 때 사망했다는 외할머니가 1930년 3월 15일에도 13살의 김두한과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개성 서본정으로 계월의 모친을 방문한즉 그는 눈물을 머금은 얼굴로 『두한이가 어느 날 중외일보 한 장을 얻어 가지고 들어와서 「할머니! 아버지가 돌아 가셨대요!」하고 목이 메이면서 신문을 읽어 나에게 들려 주더니 읽고 나서는 그만 목을 놓고 웁디다. 그러더니 한열흘 동안이나 밥을 아니 먹고 울며불며 하여서 그 꼴을 보니 내 가슴이 미어집디다. 그래서 할미와 손자가 눈물로 날을 보냈습니다. 그게 참말입니까? 꿈이거든 어서 깨이기나 했으면 좋겠습니다.』만주의 비극을 보는듯이 방불케 하더라.【개성지국일기자】"

- 중외일보 1930.03.16

 

김두한은 40살이 넘도록 한문은 커녕 그 쉬운 한글마저도 읽을 줄 몰랐다. 첫 혼외 관계 상대였던 김부미에게서 한글을 배우고는 선거 유세장에서 '베개 동무가 언문을 가르쳐 주었다'고 외쳤다.(동아일보 1991. 01. 25)

 

중외일보는 김계월도 여전히 살아 있다고 주장한다. 서울 인사동에서 살다가 김두한이 12살 때인 1929년 11월에 개성으로 이사해서 지내다 함남 흥원에서 기생들을 데리고 기생집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시기가 맞지 않다. 1929년 11월에 개성으로 이사왔기에 1929년 3월에 개성을 떠나서 함남 흥원에 기생집을 차릴 수 없다.

 

"고국에 돌아 온 계월은 경성부 인사동 176번지에다가 집을 정하고 늙은 어머니의 신병을 요양하여 그의 병은 나았고 두한은 충실히 자라나나 남편 김좌진에게서는 소식이 그치고 한쪽으로 닥쳐 오는 것은 생활고의 핍절함이었다. 그리저리 생활고와 싸워가며 지내던 계월은 견디다 못해 작년 11월에 개성으로 내려와서 서본정 253번지에서 살며 여러가지로 생도를 구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아니하여 하는 수 없이 지난 봄에 늙은 어머니와 어린 아들은 개성에 남긴채로 함경남도 흥원에 가서 기생들을 모아서 조합 비슷한 것을 하여가며 다달이 얼마간의 수입을 개성으로 보내서 가족들의 생활비를 대는 중이라 한다."

- 중외일보 1930.03.16

 

박 상궁의 딸 박계숙은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기생 김계월은 한성권번 명단에 없는 유령 인물이므로 역시 박계숙이나  청진동 기생 김계월에게 오빠나 남동생은 존재할 수 없다.

 

낙원동 기생 김계월이 김두한의 어머니라면 모른다. 낙원동 기생 김계월에게 오빠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1925년 시가 8천원인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성복리 16,400평짜리 땅을 겨우 2,500원에 취득하려고 사기치면서 그 돈마저 안주려고 개성으로 데려가 유흥에 탕진하게 했다는 내용의 고소 사건 기사에서 "많은 재산을 허비하였다는바 몇 천원 이상의 돈을 먹은 기생은 시내 고소담을 비롯하여 마채봉 장녹엽(張綠葉) 적은 김란홍(金蘭紅) 김계월(金桂月) 다옥정(다동)의 박옥희 등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더라"라고 기생 김계월이 많은 돈을 번 것으로 나온다.(미성년자제를 유인해 부정이득과 호유, 동아일보 1925.11.30)

 

이 낙원동 종로권번 기생 김계월은 인기가 많았던 모양이다.

 

충북 제천 금성면 북진리에서 미곡상을 하던 천조석이라는 사람이 여관에 머물며 찾아 왔다가 시골로 여행가서 없다는 소리를 듣자 형사를 사칭하면서 해외 여행이라도 간 줄 알고 여행권을 가지고 갔느냐면서 집안 일꾼들을 폭행했을 정도다.(형사라고 자칭하고, 동아일보 1921.05.23)

 

"휘문고보교장 임경재씨의 긴 얼골과 6,7월 장마에 알강이 다 떠러지고 웃둑하게 선 밀집대 가튼 키도 볼만하다. 학교 선생님을 기생에 비하는 것은 미안하지만은 선생이나 기생이나 생은 일반인즉 비해 말하야도 무관할 듯하다. 그로 만일 기생의 배죽엽(裵竹葉), 김계월(金桂月), 창령 부호 하재구의 애첩된 김취홍(金翠紅), 요새이 또 기생 나오랴고 들먹들먹한다는 윤옥엽(尹玉葉) 등과 일석에 회합하야 춤을 한번 춘다 하면 그들의 양수(주: 양쪽 소매)는 남산, 북악의 소나무 가지를 툭툭 치고 그림자는 한강철교에까지 비칠 것 갓다. 이것은 좀 풍장이 말 갓다."
- 관상자, 경성의 인물백태, 개벽 제48호 1924.06.01

 

 

결론적으로 김두한이 개성에서 산 적이 없다. 외숙 역시 만들어 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