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다. <11편 >

허구인물 전우치 2015. 8. 22. 23:00

11. 김두한은 조선 상인들을 보호 했나?

 

총독부가 청계천을 기준으로 청계천 남쪽에 지금의 명동(명치정)과 을지로(황금정), 충무로(본정) 등 신시가지를 조성하여 서울에 들어 온 5만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은행, 백화점, 극장 등 신흥 상업지구로 개발해서 살기에 좋았기에 거지들마저 종로보다는 본정으로 몰려 들었다.

 

반면 청계천 북쪽 종로는 기존의 조선인 상권이 신흥 일본 상권의 시장 장악에 밀려 축소되었다. 청계천 남쪽 일본인 백화점 소비자의 60%가 조선인일 정도로 조선인마저도 청계천 이남으로 걸음을 옮겼다. 종로에서는 골목길로 상권이 이동해 주로 다방, 술집, 식당 등이 생겨나 서민층을 상대로 하는 유흥지역으로 변했다. 여기에 극장이 추가 되었다.

 

불량배들이 돈 안들이고 하루를 보내기에는 북적북적한 극장 앞이 좋은 장소였다. 불량배들이 극장 앞으로 하나 둘 모여 들어서 자연스럽게 주먹 다툼이 일어났고 이로 인한 서열이 매겨지면서 패거리가 되었고, 폭력단으로 변질되었다.

 

더구나 종로에 사람들을 모으는 극장과 더불어 800~1,000명의 기생이 활동하고, 술 파는 카페, 바, 다방, 음식점 등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종로가 유흥지역으로 전락하자 유흥을 찾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종로에서는 조선 조폭이 모르는 일본 말이 아닌 조선 조폭이 당연히 알아 듣는 조선 말이 기본어였다.

 

사람이 많이 모인다는 것은 불량배들이 어리숙한 희생자를 찾아낼  확률이 높다는 의미다. 이는 서울역 앞에 불량배들이 숨어 있다가 시골에서 갖 상경한 사람들 중 어리숙하면 바로 나타나 등을 쳐서 돈을 갈취한 것과 같다. 그런 일이 극장 앞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그리고 사람이 많이 모인 극장가 주변에는 식당이 있었기에 음식을 무전취식하기에도 좋았다.

 

우미관 극장 앞을 장악한 우미단과 칠복단이라는 폭력단의 마적 고희경, 박도야지 박종오, 김성기는 전년에 종로 2가 적옥이라는 음식점에서 주인 중서구좌웅을 공갈 협박해서 2~3원어치의 음식을  여러 차례 무전취식하고, 도박상습자 강창훈에게서 신고한다고 협박하여 세번에 걸쳐 10여원을 갈취한 혐의로 서대문서에 체포 되었다.1 

 

 

<마적단 두목 박종오, 매일신보1932.06.17>

 

부하 56명으로 마적단이라는 폭력단을 조직한 박종오(25)는 음식점과 카페에서 무전취식을 일삼고 손님들에게 행패를 부리던 중 15일 밤 낙원동 태평양 카페에서 맥주(ㅽㅣ루)를 요구하고는 안 주자 주방에서 맥주 절반을 강탈하여 1원20전에 팔거나 마시면서 돌아다니다 종로서원에게 체포 되었다.2

 

 

 

 

<마적단 두목 김성재, 조선중앙일보 1935.12.30>

 

28일 장안에서 유명한 싸움패 마적단 단장 청진동 226번지 김성재(32)와 부단장 청진동 212번지 김창근(23)이 말다툼 끝에 싸워서 이긴 자가 단장을 하기로 하고 오후 11시경 종로구 공평동 123번지 앞 거리에서 일대결투를 벌였다. 격투 끝에 김성재는 가슴과 허리 등에 타박상을 입었고, 김창근은 얼굴이 6cm 찢어지고 고환을 다쳤다. 둘 다 힘이 빠져 누워 있는 것을 종로서원이 발견해서 체포하였다.3

 

 

 

 

<

신마적단 두목 엄동옥, 매일신보 1932.03.13>

 

신마적이라는 10여명의 불량단이 종로에 출몰하여 두목 엄동옥(19)은 카페와 술집 등을 돌아 다니면서 손님들에게 싸움을 걸거나 술을 내라고 행패를 부렸다. 새벽 4시경 종로 1가 서울 카페 부근에서 술 취한 사람과 싸우던 중 체포되어 25일간 구류 처분을 받았다.4

  

종로 폭력단 두목 신마적 엄동옥은 극장 앞이나 식당 앞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시골에서 올라 온 사람이나 여자를 힘으로 유린했다. 엄동옥은 술 마시고 돈 안내기로 가장 유명했다. 식위천이라는 꼬치구이 가게에서 술을 마시던 시골 사람 양점수와 지봉수에게 술을 사달라고 요구했다가 거절 당했다. 엄동옥은 30cm 길이의 칼을 꺼내 위협하면서 구타하다가 순찰중인 종로서원에게 발각되자  도망쳤지만 지명수배로 다음 날 아침 체포 되었다.5 

 

신마적을 사칭하던 임만천은 우연히 알게 된 강대형에게 여러 차례 돈을 달라고 요구하다가 말을 듣지 않자 사직단 공원으로 끌고 갔다. 옷을 강제로 벗긴 후 불로 태워 죽이겠다고 위협하면서 구타하여 중상을 입혀 체포  되었다.6

 

신마적을 사칭한 자동차 수리공 고성만은 단성사에서 입장권 몇장을 그냥 달라고 했다가 사장 박창현이 거부하자 폭행해서 체포 되었다.7

 

신마적 엄동옥 등 3명은 대학생2명과 함께 술에 취해 새벽 1시에 공평동 카페 평화를 찾아가 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가 영업이 끝나서 안된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에 유리창을 부수고 만류하는 주인과 여종업들을 핏물이 낭자하도록 구타했다. 엄동옥은 출동한 종로서원들에 의해 일망타진 되었다. 8

 

 

 

 

<체포된 김기환 일당, 동아일보 1939.07.21 >

 

전직 권투선수 김기환은 소년 60여명을 잡아다 소매치기 조직을 만들어 범죄를 저질렀다. 소년 소매치기범들이 일망타진 되어 배후가 김기환임이 밝혀 졌다. 김기환은 체포 기미를 알아 차리고 동경까지 도주하였다가 돌아와 친구 집에 숨어 지내다가 체포 되었다.9

 

김기환의 범죄 활동 무대는 서대문구 영천동과 동대문구 신설동이었다. 김기환은 같이 권투하던 후배들을 모아서 동네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여자를 희롱했다.10

 

1939년 7월 20일 새벽 단장 김기환(28), 부단장 남광일(26), 행동대원 이기환(26), 김영천(21), 김귀봉(24), 김재철(23), 김익제(24), 양대현, 황동민(27), 황창수(26)로 하는 폭력단이 검거되었다. 낮에는 양복점 점원 황동민(27)의 집에 모여 소일하다가 밤이 되면 카페와 술집을 돌며 손님들에게 술을 사라고 협박해서 술을 얻어 마시고 돈까지 뺐으면서도 심지어 여종업원마저 협박하여 돈을 뺐는 등 범죄를 저질렀다. 18일 밤 종로 2가 미야꼬 술집에서 술에 취한 청년을 돕는 척 하면서 호주머니에서 70원을 훔친 혐의로 체포 되었다.11

 

 

 

<김기환 권투 복귀, 매일신보  1941.09.25. 이후 김기환은 1944년 4월 반도의용정신대 사찰부장을 맡는다.>

 

이들은 협객이나 건달하고는 아에 거리가 멀었다. 그저 동네에서 주먹을 휘두르면서 돈 뺐으면 술이나 마시며 하루를 사는 거지떼에 불과했다.

 

생전 경험하지 못한 도시 개발 단계에서 불량배 몇명이서 폭력시장을 개척하고 확대하여 고정적인 수입을 확보하는데까지는 생각이 미치기 힘들었다. 따라서 직업적 폭력배로 평생을 살기에는 월소득이 없었음으로 어린 나이에 거지떼처럼 몰려 다니다 나이 들면 흩어지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수단껏 여자를 꼬드겨 결혼도 하게 되는데, 극소수만 꾸준히 직업을 유지하며 살고, 상당수는 취직과 실직을 반복하는 불안정한 삶을 살며, 어떤 이들은 부인이 벌어 오는 돈으로 술이나 마시며 동네 주취범으로 산다.

 

김두한은 19살이 되자 원씨 노인이 하던 설렁탕집 사동옥 배달부를 그만두고 꿈에 그리던 극장 직원이 되었다. 처음에 김두한은 조선극장 매점에서 음식 판매를 담당하였으나 같은 해 6월에 방화로 조선 극장이 다 타버리자 우미관 극장 매점에 다시 취직하였다.12

 

"식당 앞에 서울에서 제일 큰 조선극장이 있었어요. 나는 무료로 들어 가거든. 극장 옥상에서 샌드백 치고 철봉, 아령하면서 매일 영화를 봤어요. 그때는 무성영화인데 거의 전부 서부활극이나 칼싸움이었어요. 8세 때부터 한 10년 동안 사람 때리는 것만 봤는데, 아마 그 때문에 주먹대장이 된 거 같아요. 18살 때부터 주먹대장으로 나갔고, 스무살 때 전국의 주먹대장 오야붕이 됐어요. 먹고 살 도리가 없으니까 그렇게 된 거죠. 원노인은 내가 열아홉살 적에 돌아가셨으니까 자립해야 했죠. 힘은 있는데, 울분을 터트릴 데는 없고, 그러니까 사람을 치기 시작한 거예요." - 제5화 소년시절 걸어온 이야기, 노변야화, 동양방송 1969.10.18

 

 

당시 극장은 지금과 다르게 굉장히 관객들의 수준이 높았기에 극장 안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13 문제가 된다면 극장 밖이었다. 김두한은 새로운 영화가 나올 때마다 영화 제목이 적힌 깃발을 들고 우미관 극장 주변을 돌면서 영화 길거리 홍보도 해야 했다. 이때 극장 앞 불량배들과 시비가 붙었다. 이들과 싸워서 우연찮게 이기게 되자 김두한은 자신의 주먹에 자신을 갖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우미관 주변의 폭력조직 마적패에게 포섭되었다.

 

다른 한편 김두한이 우미관 매점에 취직하기 전에 우미관에는 우미관 사자라고 불리우는 싸움꾼이 있어서 우미관패라고 불리우고 있었다. 우미관 사자는 어릴 적에는 원동에서 살면서 원동 주변 학교 학생들을 괴롭히다가 나이가 들자 1930년대 초중반에 우미관에 취직을 하여 주먹을 휘두르면서 우미관패로 불리게 되었다.14

 

우미관 사자가 하는 일도 역시 김두한이 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매점에서 관객들에게 음식을 팔고 깃발을 들고 영화 홍보를 하면서 극장 주변에서 부딪히는 불량배들과 싸워야만 했기에 어느 덧 싸우는 일도 월급 받는 일에 포함되어 버렸다.  구사대와 폭력배가 뒤엉켜 계속 싸우다 보니 누가 폭력배고 누가 구사대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면서 서로 형님 동생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우미관 사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마적 고희경(고시경, 별명 고산훈)은 아니다. 고희경은 1942년에 김두한의 소개로 친일단체 대동일진회에서 함께 일할 때 김두한을 부하로 두고 있었다. 김두한은 친일단체 대동일진회에서 권투 선수 출신 폭력배들인 김기환,  문운경과도 함께 일했다.

 

김두한의 두목 마적 고희경은 1944년 4월에 총독부 경무국이 경성 조폭들을 모조리 불러 모아 결성한 친일단체 반도의용정신대 출범 직전에도 함께 움직였다. 하지만 출범 직후에 찍은 단체 사진에서 김두한은 보이지만 고희경은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1944년 초에 나이도 이미 42세로 중년이라서 친일단체 반도의용정신대에서 활동하지 않으려고 반도의용정신대 결성 직전에 아에 조폭 생활을 그만 둔 것으로 추정한다. 김두한이 고희경의 자리를 자연스럽게 물려 받았을 것이다.

 

종로에서 조선인 상인들을 괴롭힌 조폭에 일본인 조폭은 전혀 없었고 모두 조선인 조폭들 뿐이다. 

 

조선인 조폭들은 점차 조직화 되면서 구역내의 조선인 상인들에게서 보호비 등의 명목으로 매월 고정적으로 일정액의 돈을 갈취하는 수법을 고안했다.

 

이로서 폭력으로 매월 안정적인 액수의 돈을 갈취할 수 있게 되자 더 많은 폭력배들을 부하로 두는 등 폭력조직을 오래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신종 갈취 수법으로 인해 구역을 뺐기거나 감옥에만 가지 않으면 수십년간 직업적 폭력배 생활이 가능해졌다. 대신 늘어난 폭력배들 숫자만큼 다시 조선 상인들의 고통은 더 커졌다.

 


(2000년대 조폭들까지 술집에서 매달 상납금을 뜯어 냈을 정도로 상납금 갈취 수법이 널리 통용 되었다. 그만큼 반대로 상인들이 입는 피해는 큰 악랄한 갈취 수법이었다. 이정재는 이 수법을 배우고, 반도의용정신대 생활에서 명분을 내세우는 것을 배웠다. 이정재는 6.25전쟁후 동대문에 가게 하나를 내더니 자신도 동대문 상인임을 내세워 동대문 상인연합회를 강제로 결성해 이를 명분으로 매달 일정액을 여러 명목으로 상인들에게서 뜯어내 가로챘다. 이정재식 수법은 21세기에도 집합상가 상인들이 갑자기 나타나 사무실을 열고 앉아 있는 정체불명의 상인연합회 등에게 매달 여러 명목으로 돈을 뜯기는 구조로 여전히 이어졌었다.)

 


결론적으로 김두한 조폭세력은 고정상납금을 받는 신종수법으로 조선상인들을 조직적으로 갈취했다.

 

 

  1. 동아일보 1930.10.08 [본문으로]
  2. 매일신보 1932.06.17 [본문으로]
  3. 조선중앙일보 1935.12.30, 매일신보 1935.12.30 [본문으로]
  4. 중앙일보 1932.03.13, 매일신보 1932.03.13 [본문으로]
  5. 동아일보 1935. 03.09, 매일신보 1935. 03.09 [본문으로]
  6. 매일신보 1935.10.03 [본문으로]
  7. 조선중앙일보 1936.01.11 [본문으로]
  8. 동아일보 1936.04.10 [본문으로]
  9. 조선중앙일보 1935.11.01 [본문으로]
  10. 동아일보 1937.06.22, 1939.07.21 [본문으로]
  11. 매일신보 1939.07.21 [본문으로]
  12. 동아일보 1982. 11. 18, 1920년 우미관의 변사로 들어 가 해방될 때까지 일류변사로 이름을 날렸던 성동호(79. 서울 서댁문구 연희3동 350의 10)씨는 그때의 우미관 내부 모습을 이렇게 설명한다. (중략) 우미관 하면 김두한씨와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성동호씨는 김두한씨가 우미관과 조선극장 매점 관리권을 쥐고 극장 안에서 음식을 파는 가 하면 영화제목이 적힌 깃발을 들고 광고하는 일도 도맡아 했다는 것. [본문으로]
  13. 경향신문 1955. 01. 09, 무성영화 전성기에 명영화 해설자로 이름을 떨쳤던 성동호(국도극장 영업부장)씨는 흰 머리를 득득 긁으며 기자를 맞았다. (중략) 그때야 관객들의 감상수준도 상당히 높았고 지금 같이 심심풀이로 본다든가 극장에서 싸움을 한다든가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답니다. 매우 진지한 태도로 영화를 감상했지요라고 그는 먼 회고에서 희망을 향수처럼 씹고 있었다. [본문으로]
  14. 마면생(馬面生), 좀먹는 문화도시!! 대경성의 두통거리, 거리의 「갱스」 3대 폭력단 해부기, 별건곤 제71호 1934. 03. 01, 우미관 사자10년 전에는 원동(苑洞)패라고 하면 서울서 가장 독하고도 모진 싸움꾼들이었다. 이역 그 시대에는 폭력단의 일군이었으니, 지금은 원동패들은 간 곳도 모른다. 그 때에는 창덕궁 옆 원동 골목과 네거리에 그들이 진을 치고 있다가 지나가는 중앙학교, 미문(微文)학교, 중동(中東)학교 어린 학생들을 얼마나 울게 하였으며, 괴롭게 하였는지 지금 생각하더라도 찬 땀이 흐르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북촌에 있는 군들이 차차 무대를 이동하여 극장으로, 카페로 진출하였다.그리하여 원동패 중에 강 모(가성)라는 자가 우미관에 취직하게 되었다. 이것이 우미관을 중심으로 발전한 폭력단의 시초이다. 이 강모를 그 한계(限界)에서는 통칭 우미관 사자라고 부른다.강 모를 숭배하는 사람은 우미관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이 무료로 입장 시키는 곳에 그 세력을 발전시켰으니 독자 중 누구나 우미관에 가서 활동사진 가운데 나타난 할극보다도 그 앞 길거리에서 연출된 실연에 더욱 흥미를 느끼시는 분이 있을지라도 만약 한 자리에 오래 서서 구경하시면 불의 손이 손님의 허리 밑으로 들어 올 것이외다. 그들이 싸움하는 위치는 대개 골목이 많은 곳이니 그들은 구경하는 손님에게 돌연히 후딱 따귀를 먹이고 그 암흑한 관철동 골목을 쥐구멍에 들어가는 쥐새끼처럼 달아날 터이니 이 것은 참말 기막힌 활극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또 다음 날 우미관에 모여 전일의 연출을 재현 시켜가며 무상의 쾌감을 느끼며, 밤 거리의 갱스(gangs)가 되어 도회의 암흑가의 주인공이 된듯이 카페를 지켜주고, 극장을 지켜 준다.그들은 형사를 가장 두려워 한다. 그러나 어떠한 형사의 얼굴이라도 딱 알아 두었다가 일이 긴급한 때에는 남이 모를 암호로써 전하여 캄캄한 골목길로 피신하고 만다.실로 거리의 큰 두통거리의 하나이다.그들의 직업은 대개가 무직이며, 혹은 극장 안에 일을 보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자유노동자가 많다. 그리하여 그들의 악마주의적 쾌감은 바야흐로 거리로 폐여지며 선량한 자제를 휴인하여 내는 일도 흔히 많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