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조선 보부상 시조가 백달원이라니?

허구인물 전우치 2022. 12. 14. 07:56

 

김준근(金俊根 1853~?), 객주, 기산 풍속첩

조선 보부상의 시조가 백달원이라는 황당무계한 말을 논증에 충실해야 할 학위 논문에서 스쳐가듯 그런다더라 하고 언급하여 사실인냥 받아 들이게 하더니, 백과사전은 아예 사실이라고 하고, 공공기관마저 사실로 공개하고 있을 정도다. 이는 한 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믿지 않지만, 세 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거짓말이어도 믿는다는 전형적인 삼인성시호(三人成市虎)다. 

백달원 소설을 처음 쓴 사람은 박달성(朴達成)이다. 박달성은 고향인 평안북도 태천군 원면에 있는 산 이름인 가자봉산(茄子峯山)에 따온 가자봉인이라는 필명으로 1927년 설날에 최초로 백달원 설화를 별건곤에 기고하였다. 이괄의 반란 때 인조가 공주로 피신가던 길에 백달원이 곤경에 처한 인조를 지게에 지고 공주까지 걸어 갔다는 것이다. 이 공로로 전국 부상의 우두머리 자리를 달라고 하여 받아 냈다는 것이다.

남문을 나와 鷺粱津(노량진)을 건너 果川(과천)가지 오고 보니 날은 훤이 밝아 도처에 鷄犬(계견)의 소리 자조 들니는데 다리는 압흐고 발은 부르트고 虛氣症(허기증)까지 나고 누구와 말은 못하겟고 땅에 주저안지도 못하갯고 참으로 딱한 형편이엿다.
「嗚呼天兮(오호천혜)여 굽어 살피소서 一身(일신)의 亡(망)은 無怪(무괴)하옵지만 國家社稷(국가사직)을 엇지 하오릿가.」 하고 暗祝(암축)을 하면서 寸寸步步(촌촌보보) 간신간신이 거러가다가 정 할 수 업는지라 大路邊小石上(대로변소석상)에 걸티고 안저 압흔 다리를 주물으고 잇것다.
이때엿다. 맛츰 저 뒤로부터 등짐장사 하나이 흥그럽게 훨훨 거러 오는데 키가 九尺(9척)이나 되고 얼굴이 떡판갓흔데 氣運(기운)개나 씀즉한 壯漢(장한)이엿다. 갓가이 오기를 기다려 仁祖(인조)-恭遜(공손)히 이러나 揖(읍)하며 「여보십시오. 어듸로 가시는 負商(부상)이신지 잠간 좀 머물너 주십시오.」 하고 간쳥을 하면서 자세히 보닛가 비록 負商(부상)일 망졍 惡人(악인) 안인 好丈夫(호장부)엿다. 그 負商(부상) 亦(역) 仁祖王(인조왕)을 이윽키 보더니 얼굴이며 衣表(의표)가 非凡(비범)한 것을 짐작하고 거름을 멈추며 「네, 저는 南道(남도)로 가는 사람이요. 왜 그러시오.」 하고 무러섯다. 「南道(남도)로 가? 올타 되얏다-」 하고 「네 그러심닛가. 저도 南道(남도)로 감니다. 同行(동행)하십시다. 그런데요. 미안하지만 청할 말슴이 잇는데요......저......저는 서울 삼니다. 평생에 길이라고는 거러보지 못하얏쌉는데 갑작이 긴급한 일이 잇서 公州(공주)까지 가기로 하고 떠낫싸오나 원체 弱質(약질)에다가 限(한) 3, 40里(리) 오닛가 다리가 압흐고 발이 부르터서 寸步(촌보)를 옴길 수 업슴니다. 가기는 꼭 가야될 길이요 갈 수는 업스니 이 일을 엇지함닛가. 미안하지만 그 지게에 지신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버서놋코 저를 그 지게 우에 업어다 주시면 日後(후일)에 크게 갑하드리겟슴니다. 당장이라도 그 지게에 지신 物品代(물품대)의 멧갑절을 드리지오.」 하고 아조 간곡키 청을 햇것다. ...
... 이리하야 公州(공주)에서도 義兵(의병)이 이러나고 鄭忠信(정충신), 李曙(이서) 等(등) 名將(명장)이 이러나서 결국 亂(난)을 平定(평정)하고 仁祖王(인조왕)이 다시 還宮(환궁)하야 새로운 政事(정사)를 펼세 爲先(위선) 白兎山(백토산)을 불너 「너의 소원이 뭐냐. 원대로 말하라.」 하닛가 白兎山(백토산)은 서슴지 안코 御前(어전)에 나와 「賤人(천인)이 무엇이 소원이겟슴닛가. 大王(대왕)께서 還宮(환궁)하신 것만 下情(하정)에 깃부도소이다. 正 所願(소원)을 엿주랍시면 負商(부상)의 領首(영수)가 소원이로소이다.」 하얏다. 「소원이 그럿타니 할 수 잇느냐. 그대로 해주노라.」 하고는 니여 長竹(장죽) 한 개와 手巾(수건) 한 개와 작댁이 한 개를 친히 下賜(하사)하면서 모든 負商(부상)들에도 각각 이 세 가지를 가질 것을 말하얏다. 이리하야 白兎山(백토산)은 영원히 負商(부상)의 首領(수령)이 되얏섯다.
- 가자봉인, 인조대왕을 업고 다러나든 부상의 비조 백토산, 별건곤 제3호, 1927. 1. 1

역사는 다르다. 1624년 3월 25일 기탄 전투에서 이괄 반란군에게 관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당시 순번이 되어 도성에 올라 와 수비하고 있던 전라도 병사를 호위로 삼아 공주로 향하기로 하였다. 다음 날인 3월 26일 반란군이 예성강을 건넜다고 하자 자전(慈殿)과 중전(中殿)을 공주까지 호위할 부대로 기병을 각각 103명과 34명을 배정하고, 별궁에도 기병 17명을 배정하고는 저녁에 공주를 향해 차례로 출발하였다. 

且以全羅思歸之兵, 仍使扈駕而行, 則其勢順矣.

또 고향에 돌아가기를 바라는 전라도 병사에게 그대로 대가를 호위하여 가게 하면, 즉 그 형세가 순탄할 것입니다.
- 인조2년(1624) 2월7일(양력 3월 25일), 인조실록

啓曰, 慈殿中殿擧動, 人馬幾許整齊乎, 察啓事傳敎矣. 慈殿應入馬一百三匹, 內殿應入馬三十四匹, 別宮應入馬十七匹, 依件記已爲整齊, 由前定公州作路爲當, 敢啓, 答曰, 知道.
아뢰기를 자전과 중전의 거동에 사람과 말을 얼마나 배정하였는가? 살펴서 일을 아뢰어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자전에 맞춰 인마 103필, 내전에 맞춰 인마 34필, 별궁에 맞춰 인마 17필을 목록에 의하여 이미 배정했습니다. 전에 결정한 이유로 공주로 길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시기를 알았다고 하셨다.
- 인조2년(1624) 2월 8일(양력 3월 26일), 비변사등록

따라서 애초부터 백달원 이야기는 전형적인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운운하는 창작 소설에 불과하다.

박달성이 1월에 백달원 전설을 창작하여 물꼬를 트자, 차상찬(車相瓚 1887 ~ 1946)이 같은 해 3월과 4월에 연이어 박달성이 쓴 백달원 소설에 살을 더 보태서 스쳐가듯 백달원을 언급하였다. 

适(괄)은 다시 항위로 靑石鎭(청석진)을 습하야 李曙(이서)를 擊破(격파)하고 狻猊古道(산예고도)를 종하야 개성을 함락한 후 임진강을 건너 이월 구일에는 高陽碧蹄館(고양백제관)까지 돌입하니 도하의 인심이 흉흉하야 남부여대에 피난하는 자가 도로에 불절하고 군신상하가 엇지 할 줄을 모르다가 李貴(이귀)의 계로 공주에 파천할 사를 결정하고 일방으로 向者累獄(향자누옥)하얏든 奇自獻(기자헌) 등 사십여인을 참살하며 심야에 군신이 남대문을 出(출)하야 한강에 至(지)하니 야색은 혼흑하고 인민은 다 逃歸(도귀)하야 渡船(도선)의 가망이 업섯다. 군신은 다만 강변사장에 坐(좌)하야 頓足痛哭(돈족통곡)할 뿐이러니 마츰 선전관 禹尙重(우상중)이 수영을 잘 함으로 彼岸(피안)에 在(재)한 오육의 船隻(선척)을 운반하야 간신이 한강을 건너 종야도주하다가 그 익일 즉 이월십일에 沙坪院(사평원)까지 至(지)하얏스나 식량이 업고 발병이 나서 百般(백반)의 고초를 다 맛보게 되얏스니 그 때에 누가 군주를 귀하다 하며 대신을 장하다 하얏스랴, 엇지 하얏든 인조는 여러 가지의 환란을 참으며 겨우 공주 雙樹山城(쌍수산성)으로 파천하얏다. 부상 白兎山(백토산)이 인조를 업고 간 것도 이 때의 사실이다.
- 차상찬, 별건곤 제5호, 1927. 3. 1

원래 褓負商(보부상)은 仁祖(인조) 李适(이괄) 亂(난) 때에 負商(부상) 白兎山(백토산)이 仁祖(인조)를 업고 公州(공주)로 피난한 후로 그 공을 尙(상)하야 정부에서 특히 商工局(공상국)을 設(설)하야 관리 보호하고 국가에서 有事(유사)한 때에는 비상 소집을 하야 義勇奉公(의용봉공)케 하니 지방에 在(재)하야 그 세가 자못 강대한 동시에 儼然(엄연)히 황실의 私設(사설) 儀仗兵(의장병)과 如(여)한 感(감)이 잇섯다. 
- 차상찬, 별건곤 제6호, 1927. 4. 1

중전이 남대문 밖 관왕묘 앞(현 용산구 동자동)에 이르러서 자전이 길을 잘 못 들어 다른 데로 갔다는 사실을 알고는 동양위 신익성을 보내 잠두봉 부근 양화나루까지 가서 다시 모시고 되돌아 와 한강을 건너느라고 밤 사이 시간을 지체하였다. 새벽에 강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인조와 합류하였다.

癸巳 平明, 上猶在舟中, 東陽尉 申翊聖奉慈殿, 追到上謁 上命去胡床, 平坐引見. 初翊聖奉中殿, 行到關王廟前, 始知慈殿誤取楊花之路, 承中殿下敎, 追謁於蚕頭江上, 遂奉還大妃殿渡江, 御駕於沙上.
계사(9일) 해 뜰 무렵에 상께서 그대로 배 안에 계셨는데, 동양위 신익성이 자전을 모시고 뒤따라 이르러 상을 뵈니, 상이 호상을 치우라고 명하시더니 편하게 앉아 만나셨다. 애초에 신익성은 중전을 모시고 관왕묘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전께서 양화의 길로 잘 못 취했다는 것을 알고서 중전의 하교를 받아 잠두 부근 강 위쪽까지 따라가서야 마침내 대비전을 모시고 되돌아 와서 강을 건너서 어가를 모래 위에 내렸다.  
- 인조 2년 2월 9일(1624. 3. 27), 인조실록

공상국을 1895년에야 조선 최초로 설치하였으니, 인조 때 공상국을 설치했다는 말은 틀리다.

第四條(제4조), 農商工部(농상공부)에 左開五局(좌개5국)을 置(치)홈.
農務局(농부국)、通信局(통신국)、商工局(상공국)、鑛山局(광산국)、會計局(회계국). 農務局(농무국) 及(급) 通信局(통신국)은 二等局(2등국), 商工局(상공국)、鑛山局(광산국) 及(급) 會計局(회계국)은 三等局(3등국)이라.
- 고종 32년(1895), 고종실록

그런데 보부상 마지막 세대는 백달원이 조선 태조 공신이라고 시기를 끌어 올려서 조선 초기 인물로 둔갑시켰다.

지난 18일 오후 2시부터 부여군 홍산에서는 상인으로 조직된 좌우사 8상 저산 8읍(부제, 정산, 은산, 홍산, 남포, 비인, 한산, 임천의 지부두령 총회를 개회하고 아래와 가튼 강령을 걸고 동아상무조합이라는 조합적 기관을 창설하엿다는바 전귀 좌우사라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530년전 리태조 공신 백토산 선생이 창설한 상민의 유일한 단체로서 위상대당 병구사장을 정대목적으로 한바 좌사는 부상인, 우사는 보상인으로 각각 분계하야 우금 500유여년을 내려 온 중 현금은 회세가 심히 침체되여, 
- 조선일보 1934. 10. 26  

그런데 어떻게 백달원을 조선 태조의 공으로 둔갑시켰는지 살펴보면, 1938년 한시 비평가 이승규는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토비의 난 때 위기에 처한 이성계를 행원이라는 부상이 구해 줬는데, 행원이 곧 백달원이라고 한데서 엿볼 수 있다.

이태조께서 잠룡하실 때에 토비의 난을 백토산중에 피하섯는대 토비들은 사면에 포위하야 태조의 거취를 살피는 중이다. 이 때에 행원(涬遠)이라 하는 부상이 잇서 태조의 곤궁하시믈 알고 태조를 구원키 위하야 오동나무 작댁이에 그 속을 파서 백미수합을 너코 그 끄테는 철촉을 꼿고 머리에는 평량자를 쓰고 그 끈 달은 양방에는 백면 뭉치에 물을 축여 달고 태조 계신 곳을 찾저가서 작댁이 속에 너흔 백미를 쇼다노코 평원자 양방에 물 축인 솜뭉치를 착취하야 밥을 지어 태조께 듸렸다. 그는 이 방법으로 매일 출입하야 양식과 물을 잇끄러 듸렷다. 태조께서는 이로 인하야 기갈을 면하시고, 토비들은 달원이 단신으로 작댁이를 집고 댜니는 것을 보고 조금도 의심치 아니하고 또는 태조가 어디로 탈출치 아니하엿으면 반듯이 기시하엿스리라 인정하고 대로를 거더 퇴거하였다. 그 후에 태조께서 보위에 오르시며 달원의 구은을 잇지 못하야 달원을 불너 보시고 백토산 선생의 칭호를 주시고, 촉작댁이와 인을 맨드러 친수로 하사하셧다. 이로부터 전국의 부상들이 백토산 선생을 수령으로 추대하고 공고한 일단체가 성립 되얏다. 이 단체가 이태조 13년 8월에 창립되얏는데 일시는 전선적으로 보급하야 국초로부터 오조략백개간(五朝略百個間)은 부상전성시기이엿섯다. 
- 이승규(李昇圭), 조선일보, 1938. 6. 11

 

이승규는 백달원이 부상 단체를 조선 태조 13년 8월에 만들었다고 하였으나, 태조의 재위 기간은 6년에 불과하다. 한시 비평가인 이승규가 이 사실을 몰랐을리 없다. 어차피 소설이니까 신경을 쓰지 않은 것 같다. 내용도 구체성이 없이 부실하다. 어떤 전투인지도 전혀 밝히지 않았다.

 

나아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까지 지어냈다. 수 많은 풍속화에서 볼 수 있듯이 지게꾼의 작대기는 생각보다 가늘고, 또한 오동나무를 쓰지 않았기에 상징적으로나 만들지 않으면, 일상에서는 작대기 속을 파내 빈 공간을 만들기 어렵다. 또 패랭이 모자 좌우 양쪽에 달은 솜뭉치를 적셔서 물을 아무리 머금게 해서 쥐어 짜 봐야 밥을 지을 물의 양이 되지 않는다. 

이후 많은 아류 문헌 설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1940년 유자후(柳子厚)는 조선보부상고에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할 때 백달원이 보부상 80여명을 규합해 은, 돈, 쌀을 경대에 싸서 어깨에 둘러 매고 이성계군에 합류해 혁명에 성공했다고 하였다. 또한 불 타 버린 삼척 광적사에 있던 500 나한을 안변 석왕사로 옮겨 안치할 때 역시 공교롭게도 80여명의 보부상을 모아 날랐다고 하였다. 

이 소설을 이어 받아 1958년 조흔파는 김영주 그림 경향신문 연재 소설 주유천하에서 태조가 500나한을 운반한 공로로 태조가 백달원의 부상단체에 생선, 소금, 목기, 토기, 철에 대한 전매권을 주고, 개성 발초산에 보부상들이 모여서 노는 임방을 설치했다는 내용을 창작하였다. 그런데 이 소설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호도하는 사람마저 있다.

또 이성계가 남원 지리산 자락 황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왼쪽 다리에 화살을 맞았을 때 백달원의 부하가 솜 뭉치로 지혈해 줬다는 소설도 있다. 그러나 실록에서는 이성계가 워낙 민첩하여 화살에 맞았다는 사실을 병사들은 모르고 있었다. 왜적을 베면서 묻은 피인줄 알았던 모양이다.

太祖馬中矢而仆, 易乘又中仆, 又易乘. 飛矢中太祖左脚, 太祖抽矢, 氣益壯, 戰益急, 軍士莫知太祖傷. 賊圍太祖數重, 太祖與數騎突圍而出, 賊又衝突太祖前, 太祖立殪八人, 賊不敢前. 太祖誓指天日, 麾左右曰, “怯者退. 我且死賊!” 將士感厲, 勇氣百倍, 人人殊死戰, 賊植立不動. 有一賊將年纔十五六, 骨貌端麗, 驍勇無比. 乘白馬, 舞槊馳突, 所向披靡, 莫敢當. 我軍稱阿只拔都, 爭避之, 太祖惜其勇銳, 命豆蘭生擒之. 豆蘭白曰 “不殺必傷人.” 其將身被堅甲, 又帶銅面具, 無隙可射, 太祖曰 “我射兜牟頂子, 兜牟落, 汝便射之.” 遂躍馬射之, 正中頂子, 兜牟纓絶而側. 其將急整之, 太祖卽射之, 又中頂子, 兜牟遂落, 豆蘭便射殺之.
태조의 말이 화살에 맞아 넘어지고, 바꿔 탔더니 또 거꾸러져서 다시 바꿔 탔다. 날아온 화살이 왼편 다리를 맞췄으나, 태조는 화살을 뽑아버리고 기세를 더욱 올려 전투를 더 빠르게 몰아가니 군사는 태조의 부상을 알지 못하였다. 적이 태조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니 태조는 기병 몇 명과 함께 부딪혀 포위를 뚫고 나왔으며, 적이 또 태조의 앞으로 충돌해 오니 태조가 바로 8명을 쓰러뜨리자 적이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태조가 하늘의 해를 가리켜 맹세하며 좌우의 부하들에게 말하기를, "겁나는 자는 물러가라. 나는 장차 적과 싸우다 죽으리라!"라고 하니 장수들이 감동하여 용기백배해서 모두 죽다시피 싸웠으나 적은 직립부동하였다. 나이 겨우 십오륙세 되는 적장 하나가 있었는데 용모가 수려하면서 날래고 용맹하기가 비할 데 없었다. 백마를 타고서 창으로 춤 추듯 하며 질주해 부딪치니 향하는 곳마다 바람에 풀이 쓰러지듯 하여 당해내지 못 하였다. 아군은 아지발도(阿只拔都)라고 부르며 다투어 피하니, 태조가 그 용맹과 날램을 보고 아깝게 여겨 이두란에게 생포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두란이 말하기를,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사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장수가 견고한 갑옷을 입고, 또 구리 면구를 쓰고 있어 화살이 들어갈 틈이 없으므로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투구의 증자를 쏠 터이니 투구가 떨어지면 네가 즉시 쏘아라"라고 하였다. 마침내 말을 달리며 화살을 쏘아 바로 증자에 명중하니 투구의 끈이 끊어져서 투구가 기울었다. 그 장수가 급히 바로 잡는 순간 태조가 즉시 화살을 쏘아 재차 증자를 명중시키니 투구가 드디어 떨어졌고, 이두란이 곧 활을 쏘아 죽였다.
- 열전 권39, 고려사

이성계가 여진족과 싸우다 화살을 맞았을 때 백달원이 구해 줬다고도 하였다.

상무사의 유래는 이성계가 아직 함경도 만호로 있을 때 여진족의 유시에 맞아 황야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보부상 백달원씨가 솜으로 응급치료를 한 다음 집으로 데려가 상처를 낫게 한데서 비롯된다. 그 뒤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생명의 은인인 백씨에게 소금과 인삼의 전매권을 주고 지게를 지고 장사하는 모든 보부상들에게 상업율령과 특권을 주도록 하명을 한데서 보부상은 체를 갖게 됐다는 얘기다. 그래서 지금도 상무사 초대령위는 백달원씨로 되어 있다.
- 동아일보, 1969. 5. 1

여진족의 화살에 이성계가 맞았다는 기록이 없다. 

상무사는 1899년 5월 21일 고종의 명령으로 칙령 19호에 의거해 상무회의소를 상무사로 개칭하면서 생겨 났다. 사장(社長)에 의정부 참정 신기선(申箕善) , 구관사장(句管社長)에 농상공부 대신 민영기(閔泳綺), 도사무장(都司務長)에 종2품 이근호(李根澔), 부사무장(副事務長)에 친위연대 2대대장 이한영(李漢英)을 임명하였다. 13부(府) 분사장(分社長)에 각 도 관찰사, 334개군(郡) 분사무장(分司務長)에 각 군 군수가 겸임하도록 하였다. 부사무(副司務)에 남당 소속 김광희(金光熙), 중당(육의전) 소속 조영순(趙永淳), 북당 소속 이규환(李圭桓)을 임명하였다.(정교(鄭喬 1856∼1925), 大韓季年史, 1910)

1876년 일제의 무력에 의해 강화도에서 강제로 조일수교조약을 맺고서 부산항을 일본에게 개항하자, 일본은 부산상업회의소를 조직하였다. 1880년 다시 인천을 개항하고, 일본이 원산상업회의소를 조직하자, 조선 정부는 이에 맞서 조선 상업을 보호하려고 1881년 부상청을 설치하였다. 

연이어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1883년 조영수호통상조약과 조독수호통상조약을 맺어서 외국인 유입이 늘자 조선 상업인을 보호하려고 혜상공국을 개설하였다. 

1882년 일본인이 서울로 진출해서 한성상업회의소를 조직하고, 1883년 일본이 인천상업회의소를 조직하고, 1884년 조이수호통상조약, 조러수호통상조약을 맺자, 위기 의식을 느낀 서울 시전 상인들이 같은 해 한성상업회의소를 개설하여 현재의 상공회의소의 기원을 열었다. 

1885년 일본인이 인천상법회의소를 조직하고, 서울에 45개소의 상점을 열자, 조선 정부는 상업의 현대화를 꾀하는 상무회의소를 설치하고, 8월 혜상공국을 상리국으로 개칭하여 내부 산하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산업의 현대화를 위한 농상공부를 신설하였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1889년 상리국을 농상아문에 소속시켰다. 1895년 상리국을 폐지하고, 보부상의 범죄 조직 임방을 강제 해산하였다. 

1897년 목포항을 개항하자 일본은 목포상업회의소를 조직하고, 서울에 경성상업회의소를 조직하였다. 1898년 일본은 군산상의회를 조직하고, 진남포상업회의소를 조직했으며, 마산상업회의소를 조직하였다. 조선 정부는 같은 해 5월 21일 상무회의소를 상무사로 개칭하였다. 

초기에는 상업 조직인 외세 상인의 침투로부터 보부상을 보호하는 목적의 부서를 설치했으나, 점차 기존의 원시적인 보부상 상업 형태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상업체계를 갖춰서 외세의 상업 진출에 맞서려는 정책으로 변화하였다. 하지만 상업 현대화 제도를 안정화하기도 전에 외세 제국주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따라서 백달원 소설은 문명의 진보 앞에서 사라져 가기 시작한 보부상 마지막 세대가 매달려서 확대한 꺼져가는 촛불같은 이야기라고 할 것이다.

소금과 관련해서 태조는 왕 즉위 교서에서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는 해양 기선군이 소금을 생산하여 팔아서 얻는 이윤에 대해서 세금을 징수하지 않도록 하였다. 즉 태조는 보부상이 아니라, 해안 방어 수군인 기선군에게 소금 생산과 판매에 특권을 주었다.

一, 騎船軍, 委身危險, 盡力扞禦, 在所矜恤. 其令所在官司蠲免賦役, 加定助戶, 輪番遞騎, 其魚鹽之利 聽其自取, 毋得公榷. 하나, 기선군은 몸을 위험에 맡겨 진력으로 방어하니, 있는 곳에서 아끼고 돌보아야 한다. 그 소재 관사로 하여금 부역을 감면해 주도록 하고, 후원하는 가옥을 더 정하여서 차례로 번을 들어 번갈아 기선을 하게 하며, 그 물고기와 소금의 이윤을 그 스스로 취하도록 맡기고서 관아는 세금을 걷지 말도록 할 것이다.
- 태조 1년(1392), 태조실록

인삼에는 무역할 수 있는 무삼(貿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궐에서 예단으로 주는데 쓰는 단삼(單蔘), 도성으로 보내는 공삼(貢蔘), 세금으로 바치는 세삼(稅蔘), 해마다 바치는 세공삼(歲貢蔘), 부(府)에 바치는 체삼(體蔘)과 약삼(藥蔘)이 있었다. 용도별로 인삼을 바치는 역을 삼역(蔘役)이라고 하였다. 삼역은 가장 힘든 역이었다. 강계의 경우 1762년 산삼 채취 농가가 2만호였으나, 상납량을 채워야 하는 자체가 고통인 삼역을 피하여 도망치다 보니 1772년에는 9천호로 감소할 정도였다. 남은 채취 농가가 감당해야 할 삼역은 더욱 고단해졌다(영조 48년(1772), 영조실록).

 

조선은 인삼의 사무역을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었기에 보부상은 인삼 무역을 아에 할 수 없었고, 인삼의 조달도 선혜청에 등록한 도성의 공인(貢人)이나 지방의 영주인(營主人)만 할 수 있었으니, 태조가 보부상에게 인삼 독점권을 주었다는 말은 아에 맞지 않다.


백달원 관련 소설은 보부상 패랭이 모자에 달린 솜뭉치 이야기로까지 늘어 났다. 

공문제의 참가 집사들은 모두 패랭이에 두 송이의 솜을 달고 있다. 하나는 이태조를 구출해준 응급 탈지면의 상징이요, 또 하나는 병자호란 때 인조 대왕의 아사를 면케 해주었던 물솜의 상징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난하고 있을 때 양도가 막히게 되자 보부상들이 촉작대 속에 빈 구멍을 뚫어 쌀을 넣고 솜에 물을 축여 전국에서 번갈아 모여 들어 쌀을 꺼내고, 솜을 짜서 물을 부어 메를 해드렸다는 유사의 상징이라고 한다.
- 동아일보, 1968. 5. 1

언제부터 보부상이 패랭이에 솜뭉치를 달았는지 알 수 없으나, 다만 항상 달았던 것은 아니고, 보부상 일부만 솜뭉치를 달고 다녔다는 점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전일지견) 작일 하오 2시에 부상 수 3백명이 종로로 과하는 데서 패랭이에 목화송이 덤북 달고 혹 자대이 집고 좌우로 나열하야 가니 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此(차) 儀樣(의양)을 5,6년만에 복견(復見)하얐다는데, 그 길로 경무청 전으로 가셔 商會所(상회소) 文簿(문박) 搜探(수탐)하여간 거슬 還出(원출) 하여 달나고 하니 警務廳(경무청)에셔 말이 本廳(본청)에셔는 農商工部訓令(농상공부훈령)을 據(거)하야 擧行(거행)이라 文簿(문서와 장부) 出給(출급) 與否(여부)는 不關(불관)하니 農商工部로 가셔 말하라고 하니 負商(부상)들이 곳 농상공부 문전으로 갓다더라.
- 황성신문, 1898. 11. 18

[참 부샹의 말] 엇던 사람이 쟈긔의 머리에 쓰는 흑립은 버서셔 지계 가지에 매고 툭박이 그릇들은 지계 우희 많히 언져셔 등에다 지고 땀을 흘니며 서울 각 동리로 팔너 다니면셔 하는 말이 요사이 셔울셔는 엇던 부샹패라 하는 사람들의 소요하는 까닭에 매우들 경동 하엿다지요. 참 가이 업셔라. 내 말 잠간 드러 보시요. 부샹이라 하는 것은 뎨 등에 다 무삼 물건이던지 지계에 언져 지고 땀 흘니고 이리 뎌리 시셰만 좃차다니면셔 파는 것이 부상이지요. 뎌 패량이에 목화숑이 달고 패량이 꼭지에 글자 쓰고 손에 몽동이만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실상 부샹이 아니요. 먹고, 놀고, 입고, 참 짐 지고 다니는 우리 갓흔 부상들의게 돈이나 뼈서 먹고 임방이나 셜시 하고셔 지게 지고 장사 다니는 사람의게 세젼이라 칭하고 억늑으로 빼으며 즁도희 붓쳐 여간 슐잔 썩게 먹이고, 돈을 리면 업시 밧는지라 만일 부샹이 또 복셜 될 디경이면 민간에도 폐가 이스려니와 첫재 우리 짐 지고 다니는 장소들은 더욱 부지를 못 하겟쇼. 참 부샹들은 각기 장사질만 잘 하려니 동무끼리 셔로 논히여 단니고 당도 아니 모히며 패량이 아니 쓰고 샹리국도 샹관 업고 샹무쇼도 샹관 업고 남의 꾀음에 들지도 아니 하고, 리해 업시 남과 시비도 아니 하고 공연히 남의 츙동에 들어 남과 싸홈도 아니 하고 지계 밧치는 작다기나 가졋지 지계도 아니 지고 몽동이 가지는 일도 업는지라 부샹을 혁파하면 우리게는 도로혀 리가 되고 부샹을 복셜하면 우리게는 대단 해가 되야 장사질을 셜혹 잘 한다 하더라도 뎌 부샹패로 칭호만 하고 다니는 사람들의 량식 자루 노릇이나 할따름이로라고 하엿다더라.
- 독립신문, 1898. 12. 1 

패랭이 솜뭉치는 5,6년만에 볼 정도로 자신들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같은 특별한 사건이 발생해서 집단 행동에 나섰을 때에나 쓰는 것으로 부정기적 착용임을 알 수 있다. 근거를 찾을 수 없으나, 아마도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삼군부 지휘 아래 병인양요에 참전해서 군수 물자를 수송하면서부터 소속 구분을 위해 죽립에 솜뭉치를 달았을 것이다. 이후에는 보부상에게서 돈을 갈취하는 범죄를 저지를 때 위압을 드러내는 표식으로 사용하였다. 솜뭉치를 양쪽에 달고 꼭대기에 글씨를 쓴 패랭이 모자를 착용한 자들은 보부상들에게서 강탈한 돈으로 자신들이 임의로 설치한 소굴 임방에서 먹고 놀았다. 그리하여 정부는 범죄의 온상 임방을 강제로 폐쇄하였다.

보부상의 역사는 무척 오래다. 동이위지전에 마한인이 지게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후기 부상청 개설 서문이 입증이 없는 뜬 구름 잡기식이지만, 위지동이전의 마한 지게 기록으로 이를 뒤받침할 수 있다.

涉獵古史 則箕聖時 略載之其文 使負商植柳木 使民變强爲柔. 新羅時 其記曰 使負商運石治石以補成頹. 至于麗朝 寂然無聞 抵恭讓王時 使負商運鹽寧丁浦, 其說不記於靑簡微著於江月亭擔翕日記中可嘆.
옛 역사를 섭렵하면 즉 기자 임금 때에 부상을 부려 버드나무를 심어서 백성으로 하여금 거센 기질을 부드럽게 변하게 하였다고 한다. 신라 때에는 그 기록에 이르기를 부상을 부려서 돌을 운반해 다듬은 돌로써 무너진 성을 보수하였다고 한다. 고려조에 이르러서는 적연하게 들리는 바가 없다가 공양왕 때에 이르러 부상을 부려 소금을 영정포까지 운반하였다는데, 그 설을 푸른 죽간에 기록하지 않아서, 강월정의 담옹일기 속에 작게 적혀 있으니 가히 한탄스럽다.
- 부상청 개설 서문, 1881

보부상의 황금기는 1866년 병인양요로부터 약 35년간이라고 할 수 있다. 병인양요 발발 1년 전인 1865년 5월에 흥선대원군은 갑자기 비변사를 폐지하고 삼군부를 다시 설치했다. 보부상을 삼군부 예하로 편제하였다.

이는 쇄국 노선에 따라 대두할 외세와의 전쟁을 각오한 것인지, 아니면 천주교 탄압을 앞두고 서양과의 전쟁을 염두해 두고서 미리 실행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다음 해 자신이 천주교인을 박해하여 발생한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치는데 삼군부가 활약을 하였다. 보부상 수뇌부는 군공자로서 포상을 받았다. 이 때부터 보부상이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였다.

서구 제국주의 실체를 알고서 일본 제국주의를 경계하던 반일 극우보수 홍종우는 1884년 갑신반란에 실패한 주동자 친일파 김옥균이 수괴 박영효 등과 더불어 돈을 싸들고 일본으로 도주하자 일본으로 건너 가서 친일 반란 가담 부하들을 칼로 찔러 응징하기도 하였다. 홍종우는 청국의 이홍장과 협상해 보겠다고 상해로 간 친일파 김옥균을 찾아가 끝내 권총으로 처단하였다. 1898년 홍종우는 이기동을 내세워 황국협회를 조직하였다. 미리 약속이나 한듯이 보부상들이 적극 참여 하였다. 그리하여 12월 23일 황국협회의 이름으로 보부상들은 반러 친일 성향의 만민공동회 현장을 습격하여 해산시켰다. 

한편 부상청 설치로 조직을 갖췄었던 보부상들은 조직이 커지자 안하무인 패악을 저지르기 시작하였다. 기고만장하여 전국에서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집단으로 변질하였다. 정부의 관리와 통제에 맞설 정도로 세력을 키웠다. 정부가 파견한 관리를 구금하고 폭행하기도 하였다. 또 지방에서는 양반 토호가 지역 보부상 우두머리 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살인을 같은 양반 친척에게 뒤집어 씌우는 등의 포악을 저질렀다.

하지만 보부상 조직은 자신들에게 닥쳐올 시대의 변화를 전혀 모르다 보니, 순식간에 바뀐 환경과 질서에 대응하지 못 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즉 지게 지고 5일장이나 떠돌던 행상(行商)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였다.  종로 시전 상인들과 지방 객주들은 각자 상업용 건물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신작로와 철도, 트럭과 기차를 활용하는 물류체계 변화에 적응하였고, 현대 상법을 이해하였으며, 시대적 품목 변화에 맞춰 변신하여 현대적인 좌상(座商)의 시대를 열었다. 또한 좌상들은 공장 설립, 은행 설립, 상업학교 설립 등에 나섰다. 이 좌상들이 현 상공회의소의 시초가 되었다.

 

마지막 남은 보부상들은 허구의 백달원을 실존인물인냥 조선 건국자 이성계와 엮어서 보부상의 최초 지도자로 내세워 권위를 역사적으로 조작하여 위안을 삼으려고 하였다.

 

다른 한편 원래는 부보상인데 일제가 보부상으로 명칭을 왜곡했다는 엉터리 말마저 버젓이 하고 있다.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고 총독관방 문서과의 촉탁인 일본사람 선생영조善生永助를 통하여 <조선의 상업>이라는 저서를 발간하였다. 이 책 78쪽에서는 한국의 전통행상傳統行商인 부보상을 보부상으로 교묘하게 변칭 왜곡시키었다.
- 문화재청

 

하지만 보부상이라는 명칭을 일제의 침략 이전에 우리 스스로 먼저 쓰고 있었다. 처음에는 부상이라고 하다가, 보상 부상으로 나누어 불렀고, 마지막에는 부보상과 보부상을 혼용하였다.

 

內務衙門訓示(내부아문 훈시)
第二十八條(제28조), 坐褓負商(좌보부상)을 一切禁斷(일절 금단)할 事(사). 
第二十九條(제29조), 褓負商(보부상)의 奪婦(탈부)와 掘塚(굴총)하는 諸般弊習(제반 폐습)을 一切嚴禁(일절 엄금)할 事(사). 
第三十條(제30조), 褓負商(보부상) 等(등)이 他商民(타 상민)에게 賻儀(부의)하는 討索(토색)하는 弊(폐)를 一切嚴禁(일절 엄금)할 事(사).
- 고종 32년(1895) 3. 10, 고종실록

 

김준근(金俊根), 기산 풍속도첩, 1895년 이후.
김홍도(1745~?), 보부상 부부. 남편은 벙거지를 쓰고 있다.
권용정(權用正, 1801~), 벙거지 쓴 부상
김홍도, 풍속화 속의 한 장면, 죽립(패랭이)을 쓴 중인
흑립(갓)을 쓴 닭장사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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