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우치는 실존 인물인가?

허구인물 전우치 2022. 10. 27. 12:14

문학 작품 비평이 주제가 아니기에 도술을 어떻게 배웠는가 하는 구슬 설화나, 황금 들보로 백성을 구제했다거나, 도술로 악행을 저질렀다는 등의 내용은 배제하였다. 따라서 서경덕을 등장시켜 늘린 내용도 다루지 않았다. 또한 문헌상 시기가 가장 앞 선 문헌설화를 주로 표시하고, 이를 그대로 따른 같은 내용의 뒷 시대의 문헌설화들은 중복에 불과하기에 될 수 있는 한 생략하였다. 다만 출생지에 대해서는 문헌설화가 소설화 되어 가면서 어떻게 변천했는지 보기 위해 같은 내용이어도 중복하여 나열하였다.

 


且余於萬曆甲辰 爲試才御史於本府, 使事未完 淹留幾至旬日. 其時同處有若安四耐陳主翁諸人  年皆八十餘. 以其近古聞見博而閱事多 眞所謂喬木遺老也. 余因二老得聞新異之說久矣. 于今三十餘年 邈然如隔世事也. 常記新舊說話 賴以破寂. 第念前朝往蹟俱在方策 百年故事眞贗相混. 姑以中古以來表著耳目者抄爲小說 以備閑覽. 言雖俚野 不無有助於名敎也云. 辛未仲夏 竹泉病翁書于松岳之衙軒。
(또 나는 만력 갑진년(1604)에 본 부(개성부)의 시재를 감독하는 어사가 되었는데, 업무가 끝나지 않아 거의 열흘이 되도록 오래 머물러야 했다. 그 때 같은 곳에 안사내, 진주옹 같은 여러 사람이 있었고, 나이가 모두 80여세였다. 요즘 일과 옛 일에 견문이 박식하고, 일에 경험이 많았으니, 참으로 이르는 바 곧고 굵은 나무라고 칭하는 살아 남은 노인들이었다. 나는 인하여 새롭고 기이한 이야기를 얻어 들은지가 오래 되었다. 아! 지금 30여년이나 되었으니, 막연하여 먼 세상의 일과 같다. 항상 새로운 옛날 설화를 적는 것을 심심풀이로 삼았다. 단지 생각해 보니 이전 조정의 옛 자취는 모두 방책에 있는데, 백년 전 옛일에는 사실과 거짓이 서로 섞여 있다. 약간 오래 전 옛날 이래로 현저하게 이목을 끄는 것을 골라서 소설을 써서 한가하게 보도록 하고자 한다. 말은 비록 속되어 거칠어도 가르침에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신미년(1631) 중하(음력 5월)에 죽천이라는 병든 늙은이가 송악 아헌에서 쓰다.)
- 이덕형, 송도기이, 1631

구비 설화가 어떻게 문헌 설화가 되는지 그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조선시대 설화는 각 지방마다 민초 사이에서 떠돌다가 기억력이 좋고 만담을 잘 하는 노인들이 이야기를 모아 구술로 들려 주어 후세에 전하는데, 때로는 전국으로 알려지기도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지방 관아 아전들도 아는 이야기가 되어, 발령 받아 온 지방관에게 전해지며, 지방관이 노인들의 구술을 글로 적어 수집해서 도성과 성읍에 들이고, 정리하여 목판 인쇄해서 책으로 엮으며, 다른 이가 필사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이야기를 더 지어내 보태면서 점차 소설의 형태로 발전한다.

전우치 설화는 유학자이면서도 신선사상에 관심이 컸던 양반들에 의해 도교 문헌 설화가 되었다. 이는 고려인이 옆 나라 당송시대 문인들의 도교 문헌 설화와 시를 읽고서 신선사상을 담은 많은 시를 썼던 흐름이 조선에도 이어진 결과다. 또 원 때에 팔선 설화가 나타나, 팔선중 여동빈을 당 시대 실존 인물이라고 주장하여 사실과 거짓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서 설화를 더욱 실감나게 만들었다. 이 개념은 조선에도 이어졌다. 

또한 사람이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된다는 불교의 영향으로 인해 인간이 신선이 될 수 있다는 우화등선의 개념이 생겼다. 북송 때 소동파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적벽부에서 羽化而登仙이라고 하였다.

조선에서는 비록 유학자들이 불교와 도교를 좌도라고 하여 강하게 반대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도교에는 아주 관대하였다. 이는 국가와 개인이 제사를 지내고, 신선사상이 조선의 자연풍경과 잘 어울려서였다. 유학은 정치적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수용한 제도이지만, 신선사상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서다. 무당들마저 도교의 신과 신선들을 자신들의 신으로 섬겼다.

전우치 설화가 조선 최초의 우화등선 신선 설화다. 그래서 초기에는 전우치 설화의 저자가 자신이 지은 시까지 허구의 인물 전우치가 지은냥 기록으로 남겨서 신선 설화의 주인공이 실존 인물로 보이도록 했을 정도다. 하지만 후기 문헌 설화로 갈 수록 전우치를 우화등선한 신선보다는 요사스러운 술법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악인으로 깎아 내리기가 주를 이루었다. 이후의 전우치 설화에서 얼마든지 전우치를 도사 영웅으로 만들 수 있었으나, 서경덕 설화와 윤세평 설화에 의해 전우치는 악인으로 몰려 제거 당한다. 

이는 같은 도교 설화인 윤세평 설화와 서경덕 설화를 띄우려고 견제하는 의도, 아니면 유학자이자 관리였던 서경덕 도술 설화와 윤세평 도술 설화를 만들어 전우치 도술 설화를 제압하려는 유학자들의 의도도 있을 수 있다. 재령 군수 박광우 시절 전우치의 자살 설화 역시 마찬가지다.

전우치 설화는 사라지지 않았고, 새로운 저자는 20세기 초에 전국적으로 알려진 기존의 구슬 설화와 담양군 설화인 황금들보 설화를 섞어서 현대 소설로 완성하였다. 

1. 문헌 설화 속 전우치

시간 배경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은 죽창한화(1645) 전우치 문헌 설화에서 허균의 국조시산을 인용해서 전우치를 중종 때 사람으로 설정하였다(中宗朝有田禹治者). 이덕형의 문헌 설화에서만 전우치가 어느 때 사람인지 밝히고 있다. 또한 여러 필사자와 가필자가 설정한 등장 인물들이 중종 때 사람이므로 이로써 설화의 시대 배경을 알 수 있다.

공간 배경
최초의 전우치 문헌 설화인 이기(李墍 1522~1600)의 송와잡설에서는 전우치는 황해도 사람이다.
(田禹治海西人也)
이수광(李晬光 1563~1628)의 지봉유설(1614)에서는 한양 사람이다.
(本洛中賤儒)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1622)에서는 개성 사람이다.
(田禹治松京術士也)
김명시(金命時 1592-?)의 무송소설(1676)에서는 개성 사람이다.
(田禹治松都人)
정창순(鄭昌順 1727~?)의 송도지(1782)에서는 집이 개성 동문 바로 안쪽에 있다.
(田禹治家在影殿之傍)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한죽당섭필(1783)에서는 담양 사람이다.
(田禹治潭陽人)
김려(金鑢 1766~1822)의 한고관외사에서는 황해도 사람이다.
(田禹治海西人也)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담양 사람이다.
(有田禹治潭陽人)
호서읍지(1871)에서는 전우치는 화성 사람이다.
(田禹治南陽人)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의 숭양기구전(1896)에서는 담양 사람으로서 한양에서 살았다.
(本潭陽人居州東古崇仁門內)
강효석(姜斅錫)의 대동기문(1925)에서는 담양 사람으로서 개성에서 살았다.
(田禹治潭陽人 世居松都)
부여지(1929)에서는 화성 사람이다.
(田禹治南陽人)

창작자가 설화를 지어내는 과정에서 자유롭게 한 명의 인물을 창조하고, 시공간 배경을 부여하기에 창작자의 생각에 따라 이름, 시대와 출신지가 정해진다. 또 저작권법이 없던 과거라서 누군가 저자에 떠도는 구비설화를 정리해 글로 적어 놓으면, 그 문헌 설화 필본이나 판본을 필사하면서 자신의 생각도 투사하기에 필사자가 자신의 생각에 따라 고향을 바꾸는 등 여러 이본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설화에 나타나는 가공 인물의 가공 출신지를 서로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차피 모든 것이 사실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만 다양하게 변한 것을 살펴 볼 뿐이다.

 

사건 배경

수학
이덕형의 죽창한화에서는 전우치는 한양 삼각산 어느 절에서 공부했다.
(捿三角山寺讀書)
여지도서(輿地圖書, 1765)에서는 전우치는 부여 파진산 어느 절에서 공부했다.
(縣西五里有波鎭山山崖石壁有白石如懸袴形 故又稱所之山. 山有古寺道士田禹治讀書于此遇山神得秘訣以其術名於世云 현 서쪽 5리에 있는 파진산 산 낭떠러지 석벽에 하얀 돌이 있어 바지를 걸어 놓은 형상이고, 옛날에는 또 소지산이라고 칭하였다. 산에 오래된 절이 있어서 도사 전우치가 책을 읽다가 이에 우연히 산신에게서 비결을 얻어 그 술법으로써 이름이 세상에 있었다고 전한다.) 

신분
술사, 도사, 방사, 우사 등 도교 계열의 호칭으로 불렀지만, 유생(지봉유설), 진사(천예록초, 오주연문장전사고, 동패낙송, 송천필담, 파수록, 청야담수, 화헌파수록 ), 생진(부여지 1929) 등 유학자로 부르기도 한다. 이덕형의 죽창한화 전우치 설화에서는 전우치는 과거시험에서 연이어 낙방하였다(屢擧不中 嘗捿三角山寺讀書 누차 과거에 급제하지 못 하자 일찌감치 삼각산 절에 머물며 책을 읽었다).

결혼
전우치가 결혼했다고 설정한 문헌 설화가 한 편 있다. 임방(任埅 1640~1724)의 천예록초이다. 一日禹治謂其妻曰 今日尹世平當至此殺我, 吾欲变化而避之. 若來有問我者輒云出去 切勿違誤語也. (하루는 우치가 그 처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오늘 윤세평이 이 번에 나를 죽이려고 당도할 것이니, 나는 장차 변신해서 피할 것이오. 이에 와서 내가 있는 곳을 묻거든 오로지 나갔다고만 이르고, 절대로 어긋나거나 그르치는 말을 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친척
외삼촌 박천서가 있다. 따라서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박씨 성이다. 
(靑坡朴僉知令監天敍外三寸也. 청파에 사는 첨지 영감 박천서가 외삼촌이다.)
- 홍만종(洪萬宗 1643년~1725년), 무송소설, 1676

사망
어우야담(1621)에서는 재령에서 목을 매서 자살했다.
(時朴光祐爲載寧郡守 愛其博識群書 款洽. 一日對座衙軒. 有一封私書及公文, 自監司所來密事也. 光祐坼見之 色動藏之席下. 禹治問曰 何事也. 光祐墨而不答 盖朝廷庭深惡禹治妖幻 期必捕致之死 知光 祐款遇爲私書使勿失也. 然光祐不忍於心 欲使遁逸密言于禹治 禹治笑曰 我當有以處之. 是夜稚頸而死 光祐痛之 厚資其喪葬. 박광우가 재령군수였던 때에 여러 책에 그 박식함을 사랑하여 정성으로 친절하게 대하였다. 하루는 동헌에서 마주 앉아 있었는데, 한 통의 봉한 사사로운 편지와 공문이 있었으니, 감사의 관아에서 온 비밀스러운 일이었다. 광우가 열어 보고는 얼굴색이 변하여 자리 밑으로 숨겼다.  우치가 물어 가로되 "어찌된 일이시오?"라고 하였다.  광우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모두 우치의 요사한 술법을 깊이 미워하는 조정에서 기필코 추포하여 죽이려고 하는데, 광우가 우치와 친하다는 것을 알고 사적인 편지로 놓치지 말도록 하였다. 그런데 광우는 마음으로 차마 못 하겠기에 달아나 숨게 하려고 우치에게 비밀리에 말을 했다. 우치가 웃으며 가로되 "내가 마땅히 처리하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밤에 목을 매고 죽었다. 광우는 애통해 하며 그 장례를 후하게 치루었다.)

천예록초(17세기 중반 추정)에서는 윤세평에게 살해 당했다.
(即以杵擊瓮碎散之, 瓮底小䖝見焉. 女人即化爲大蜂 亂螫之其小䖝. 便出禹治本像而死. 바로 몽둥이로 항아리를 쳐서 깨뜨리자, 항아리 밑에 있던 작은 벌레를 발견하였다. 여인은 즉시 큰 벌로 변하여 그 작은 벌레를 어지러이 쏘았다. 문득 우치의 본모습이 드러나더니 죽었다.)  

동해이적(1666)은 어우야담(1621)이 출처라면서 전우치가 신천 감옥에서 죽었다고 하였다. 
(後以左術惑衆 逮繋信川 死於獄中 太守吏人埋 及親戚發埋移葬 啓棺視之只空棺矣. 出於于野談. 후에 좌술로 군중을 미혹하자 체포하여 신천에 가두었으나 감옥 안에서 죽었다. 태수가 사람에게 시켜 매장하였더니 친척이 이르러 매장에서 파내어 이장하려고 관을 열어 보니 단지 빈 관일 뿐이었다. 출처는 어우야담이다. )

정작 어우야담에는 목을 매고 죽었다고 하였다.

무덤
어유야담에서는 재령에 있다고 한다.
(今載寧郡有田禹治墓)

동해이적에서는 신천에 매장하였으나, 시신을 찾지 못 하였다고 한다.
(太守吏人埋 及親戚發埋移葬 啓棺視之只空棺矣. 出於于野談.)

이런 일련의 흐름에서 설화 속 창작 인물 전우치를 문헌 설화를 거치면서 점차 역사 안으로 들여서 실존 인물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남양 전씨 집안에서는 심지어 족보에까지 수록하였다. "말제 우치의 신출기묘한 도술 기행이 백성들을 현혹시켜 나라를 불안케 했다는 죄로 관의 추척을 받게 되자 가문의 화를 피하기 위하여 우치와의 인적관계를 인멸시키려고 집안 사람들이 우치의 부친과 장형인 공의 묘기를 없애 버렸고, 묘 역시 무관한 묘인체 하여 오래도록 방치하였기에 후세에 와서는 실묘하게 되었다. 지금의 공의 묘와 비는 후손들이 다시 설묘 입비한 것이니, 남양 전씨 수난의 시기였던 것이다. 우치 신출기묘한 도술가, 그 행적이 백성현혹죄로 몰림. 전우치전이 있음"이라고 적었다. 

1982년 유재근은 자신의 논문 전우치 전설과 전우치전에 종친회장 전중호의 구술을 채록해 놓았다. "그 분은 결혼도 하지 않아서 직계 후손이 없어요. 전우치 할아버지는 진사시에 급제한 후 마을 뒷산에 있는 파진산 절골 암자에서 책을 읽다가 신선을 만나 비결을 배워 가지고 도술로써 세상에 이름을 날렸지요. 그 당시에는 흉년과 질병으로 민심이 흉흉하고, 벼슬아치들이 사화를 일으켜 서로 죽이던 판이라 도술로써 벼슬아치들을 놀라게 하고, 빈민을 구제하고 다녔지요. 조정에서는 미관말직으로 회유했으나, 1519년 을묘사화 때 조광조 일파로 몰리어 삭직되어 주유천하하면서 다니니 조정에서 백성을 현혹시켰다는 죄목으로 체포령이 떨어졌지요. 전우치 할아버지는 계속 도망다니다가 결국은 황해도 신천에서 잡혀 감옥에서 옥사하게 되었지요. 나중에 친척들이 시체를 이장하려고 관을 열어 보니 빈 관만 남아 있더라는 것이지요. 전우치 그 분이 국가에 죄를 짓고 도망다니고, 잡히지 않으니까 조정에서는 체포에 혈안이 되어 집안 식구는 물론 친척들을 몹시 괴롭혔고, 혈안이 되어 집안 식구는 물론 친척들을 몹시 괴롭혔고, 남양 전씨에게는 절대로 벼슬을 주지 말라는 어명이 떨어졌지요. 그래서 남양 전씨들은 그 화가 두려워서 우치의 아버지 전지와 형 되는 전우평의 묘비석을 몰래 파내어 어디엔가 묻어 버리고 , 우리는 남양인이 아니다. 우리는 전우치와는 관계가 없는 담양인이다하며 근계마저 숨기면서 수대를 살아 오게 된 것이지요."

구술한 내용은 모두 문헌 설화와 소설에서 가져 온 이야기들에 불과하다. 빈민을 구제하고, 조정이 회유하려고 미관말직을 주고 하는 등의 이야기는 시대 배경이 조선 초인 1915년 발행 신문관본 전우치 소설 내용 그대로다. 진사라고 설정한 것은 여러 전우치 설화들에 나온 것이다. 1519년 을묘사화는 1519년 기묘사화의 오류이며, 실제 역사 기록에는 전우치라는 이름이 어디에도 없다. 신천 옥사는 해동이적과 이를 따른 지양만록이나 숭양기구전의 설화를 무작정 수용했다. 그런데 해동이적은 신천 옥사의 출처가 어우야담이라고 하였으나, 어우야담에서 전우치가 재령에서 목을 매고 죽은 것으로 설정하였다.

파진산에서 공부했다는 말을 여지도서, 송도지나 호서읍지 등에서 가져 왔지만, 그 내용에 신빙성이 전혀 없다. 이는 종종 볼 수 있는 현상으로서, 설화 속 인물을 자기 고을의 실제 인물로 실어 버린 경우다. 

예를 들면, 여말과 조초 사이에 진주에서 비거를 만들었다는 설화 속 허구 인물 정평구를 실제 인물인냥 하여, 정평구가 병자호란 때 청군과 싸웠다고 김제읍지(1884)에 실었다(鄭平九 托蹟 滑稽, 遊心放狂. 丙亂赤身通格淸陣. 정평구는 속세를 떠나 산에서 살면서 익살스러웠으며, 일에 마음 씀을 이치에서 벗어나 함부로 하였다. 병자호란 때 알몸으로 오가며 청군 진영에 맞섰다). 또한 정씨 집안에서는 평구는 이름이 아니라 호라면서 평구 동래 정공 유연지묘라는 묘비까지 세우기도 하였다.

 

한편 비근한 예로 황진이 이야기가 거짓인 것과 같다. 기생 황진이 설화는 조선 양반들이 이상적 성매매 형태로 가정해서 성매매 기생이 이 정도 풍류 수준을 갖췄으면 하는 조건적 염원을 투사한 설화였다.  연주, 노래, 춤 등 공연을 하는 관비인 관기는 악공 등 관노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 자식을 낳아 길렀기에 성매매를 하지 않은 기생이었고, 반면 사기는 성매매가 주였다. 일제강점기에도 평양 출신 기생은 가무 실력은 형편 없으면서 예쁜 얼굴만 내세운다고 비판을 받았을 정도다. 따라서 성매매 기생을 고급화 하려고 창작한 기생 설화 사례가 황진이이다. 

 

사찰연기 설화에서도 홍랑 설화에서 보듯이 어린 소녀가 중국으로 팔려가 황비가 돼 고국을 잊지 못 해 고국에 불상을 보냈고, 그 인연으로 세워진 절이 바로 흥법사다라는 식의 내용으로 종종 볼 수 있다. 


남양 전씨 족보에 허구의 인물 전우치를 실존 인물이라고 실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한 전우치로 인해서 남양 전씨에게 절대로 벼슬을 주지 말라고 했다고 주장하지만, 국조방목에 따르면 1637년 전응룡과 전희길이 무과 병과에 급제하였고, 그 외 생원진사시에 4명이 급제하였다. 전희길은 정3품 겸사복까지 승진하였다. 1982년에는 전우치 설화의 내용대로 전우치가 진사였다고 구술하였으나, 정작 그 이후 족보에는 당연히 전우치가 허구 인물이라서 진사에 급제했다는 근거가 있을 수 없으니 진사였다고 기록하지 않았다. 

게다가 저마다 족보를 만들어 가문을 과시하던 강력한 신분제 사회에서 남양 전씨들이 모조리 남양 전씨임을 감추려고 담양 전씨 행세를 했다면, 과연 담양 전씨 문중에서 가만 있었겠냐를 따져도 전우치가 실존 인물이라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설화 및 소설 전우치가 유명해지자 담양 전씨 측에서도 소설 전우치에 나오는 황금 대들보 설화가 담양군 설화임을 내세워 전우치가 담양 전씨라고 하였다.

최초의 조선 소설사를 쓴 김태준도 1930년에 "담양에 나서 처음에는 낙중에 다니면서 신비로운 행신 하다가 방사로 변하야 내조에 송도에 숨은 듯 하며 계산시화(桂山詩話)에 "일개의 병졸이엇다고 한 것은 천유라고 말한 것과 상사(相俟) 하야 우치가 비천한 가정에 나서 입신의 처지에 심히 불운이엇음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전우치가 실존 인물인냥 하였다. 김태준은 이수광의 지봉유설 설화와 이덕무의 한죽당섭필 설화를 수용해서 전우치가 담양 출신이고, 천한 유생이 될 수 밖에 없었던 몰락한 양반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하지만 어차피 전우치는 설화 속 창작 인물이기에 남양 전씨냐, 담양 전씨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2. 전우치 문헌 설화 속 실존 인물

전우치 설화와 전우치 소설에는 실존 인물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나식(羅湜 1498 ~ 1546)의 장음정유고(1578, 1678) 설화에 최초로 전우치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시(詩), 戲贈田禹治에  田公來容李同知希輔家라는 대목이 있다. 이희보(李希輔 1473~1548)가 대사성동지가 된 해는 1536년으로 나이 63세였다

나식은 설화 속 전우치를 이희보와 동시대 사람으로 설정해 놓았다. 이렇게 해서 전우치는 작자 나식과도 동시대 사람이 된다.

다만 나식이 도를 추구하는 전우치가 출세욕이 심한 이희보와 교류한 것으로 설정한 점은 어색하다. 이희보는 왕조실록에 사관이 사실을 기록할 정도로 청렴하지 않은 세속적인 인물이어서다. 우화등선을 추구하는 도사가 행실이 나쁜 사람과 교우한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아서다. 

司憲府推啓 李希輔以烏川副正女壻, 依附內人綠水, 驟得美官, 罪當決杖一百、告身盡行追奪. 雖經赦宥, 以文官依附內人, 至爲無狀. 請依律治罪, 永不敍用. (사헌부에서 받들어 아뢰기를 "이희보는 오천부정의 사위로서 내인(나인) 녹수에게 붙어서 갑자기 좋은 관직을 얻었으니, 죄를 장 일백대와 고신을 모두 추탈하는 것으로 결정해야 마땅합니다. 비록 사유를 받았다고는 하나, 문관이 내인에게 붙어 의지하였으니 지극히 무상합니다. 율대로 죄를 다스려 영원토록 임명하지 않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 중종실록 중종 2년(1507)

命罷曺繼衡金壽卿辛殷尹李希輔之職. 從臺諫之言也. (조계형, 김수경, 신은윤, 이희보를 직에서 파면하라 명하시니, 대간의 말을 따른 것이다.)
- 중종실록 중종 2년(1507)

史臣曰. 希輔性本邪諂, 又極貪鄙, 不容於士林, 長斥於外. 至是, 攀附金安老, 得爲大司成 及上視學, 乃獻頌褒贊, 卽命賞加二品, 下情憤鬱, 駁奪之. 因此臺諫, 更論邪鄙之失, 啓罷其職, 館中之士, 皆賀. 
(사관이 말 한다. 희보는 성품이 본래 사특하고, 또 극히 욕심이 많으면서 야비하므로 사림에서 용납하지 않고, 오래 외방으로 내쳤다. 이 때에 이르러 김안로에게 달라 붙어 대사성이 되더니, 상께서 학교(성균관)를 시찰 하시자 이에 찬미하는 글을 바쳐 치켜 세우니, 상께서 즉시 2품을 더하도록 명을 하셨다. 아랫 사람들이 분이 쌓여 그 직을 파직하라고 논박하였다. 인하여 이에 대간이 다시 사특하고 더러운 잘못을 논하여 그 관직에서 파면하시도록 하니, 관 안의 선비들이 다 축하하였다.)
- 중종실록, 중종 32(1537)

한편 청백리 이기는 개인적 관점에서 이희보를 호의적으로 평가하였다.
李先生希輔字伯益 號安分堂. 學於朱溪君. 天性穎悟. 聰明過人. 博覽强記. 無書不通. 與申企齋蘇贊成鄭湖陰 齊名於一時 人獨以公爲博物云. 爲銓郞歷玉堂陞堂上. 中年蹇滯 沈於閑局 專以訓誨後進爲事. 士子之受業於公門 而成就者甚多. 至其晩年 朝廷啓以斯文老成 數奇可惜 特陞嘉善授同知. 年七十六而沒. (이희보 선생은 자가 백익이고, 호가 안분당이다. 주계군에게서 배웠다. 천성이 영리하고 총명이 넘치는 사람이다. 책을 널리 읽고도 기억을 아주 잘 하여 통하지 않는 글이 없었다. 신기제(신광한), 소찬성(소세양), 정호음(정사룡)과 더불어 일시에 다 같이 유명하였으나, 사람들은 유독 공이 사물에 박학하다고 하였다. 정랑이 되었고, 옥당을 지냈으며, 당상관에 올랐다. 중년에 고생하며 막혀서 오래도록 한가한 관청에서 오로지 후학을 위하는 일로 훈회를 하였다. 공의 문하에서 수업한 선비에 성취한 자들이 아주 많았다. 그 말년에 이르러 유학자로서 노련한데도 기구한 운명이 아쉽다고 아뢰니, 특별히 가선으로 올리고, 동지사직을 제수하였다. 나이 일흔 여섯에 죽었다.)
- 이기, 송와잡설, 1678

나식은 을사사화로 귀양지 강계에서 1546년 11월 3일에  사약을 받았다. 나식 사후 30여년이 흐르고 나서 전라도 관찰사 심방숙은 나식의 사위 이만춘이 나식의 시조라면서 건넨 시조 50편을 가지고, 문인 허엽에게 간행을 부탁하였다. 허엽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시조들에서 나식의 시조라고 판별한 수 십편을 더 보탠 뒤 서를 붙혀서 1578년에 발간하였다. 현재는 나식의 5대손 나양우가 송시열의 묘표를 덧붙혀 1678년에 간행한 중간본이 존재한다.

이기(李墍 1522~1600)는 송와잡설에 처음으로 소설 형식을 갖춰 가는 전우치 문헌 설화를 실었다. 이 의미는 기존에 전우치 설화가 구전해 왔다는 뜻이다. 구비 설화가 문헌 설화로 자리 잡는데 오랜 기간이 걸려서다. 과거일 수록 문자를 읽고 쓰는 사람들은 권력층이자, 부유층이라서 시중의 설화에 이들 지배계층이 흥미를 느끼고 글로 정리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田禹治海西人也. 不學而能文 詩語洒落. 人皆以有道術役鬼神稱之. 縣監李佶與禹治相知. 佶之田莊在富平. 嘉靖年間癘氣熾發 佶之奴與隣居十餘人臥,  痛方劇. 佶令禹治禳之. 禹治許諾. 仍問曰 其地有高邱可坐處乎. 曰有林亭可坐矣 禹治曰 某日當往姑置坐席於亭上而候之. 至其日禹治坐林下  發數聲若招號者. 然四隣病者皆倏然起坐. 一時俱應曰 愈自此疾平. 無復傳染之患.
(전우치는 해서 사람이다. 배우지 않았어도 글월에 능해서 시어가 씻듯이 시원하다. 사람 모두가 도술이 있어서 귀신을 부린다고 칭하였다. 현감 이길은 우치와 더불어 서로 아는 사이었다. 길의 전장이 부평에 있었다. 가정 연간(1522~1566)에 피부병이 성하게 발생하여  길의 노비와 더불어 이웃 십 여명이 누웠고, 통증이 심하였다. 길은 우치에게 물리치라고 명하였다. 우치는 허락하였다. 이에 묻기를  "그 땅 높은 언덕에 앉을 자리가 있습니까?"라고 하자, 말하기를 " 숲에 가히 앉을만한 정자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우치가 말 하되 "모 일에 마땅히 갈 터이니 그 동안 정자 위에 좌석을 배치해 놓고 기다리시오"라고 하였다. 그 날이 되자 우치는 숲 아래 앉아서 사람을 부르는 것 같은 소리를 수 차례 내었다. 그리하여 이웃 병자들이 다 빠르게 일어나 앉았다. 일시에 모두 화답하여 가로되 "이 병이 편안하게 저절로 나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시는 옮는 병이 없었다.)
- 이기, 송와잡설

이기의 송와잡설에 나오는 전우치 설화에 이길(李佶)이 등장한다. 시대를 가정 연간으로 설정했으니, 1522년에서 1566년 사이가 시간 배경이다. 연대상으로 이광형(李光亨)의 아들로 1552년 식년시에서 진사 3등을 한 이길(李佶)이 가장 근접하다. 하지만 문헌 설화 속 전우치는 1536년 무렵에 재령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다. 문헌 설화 속에서 이길은 현감으로 나오지만, 어느 고을의 현감인지 정확하게 설정하지 않아서 알 수 없다. 집안의 논밭이 부평에 있다고 설정했기에 거주지가 부평이라는 것 뿐이라서 부평 부사였다고 할 수 없고, 또한 16세기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부평 부사 전체 명단에도 이길이라는 이름이 없다.

이기는 임진왜란을 겪었으나, 관료 생활도 무탈할 정도로 순탄한 인생을 살았다. 이기는 매우 청렴하게 살아서 사후 1602년 청백리에 뽑혀 영의정 추증을 받았다.

차천로(車天輅 1556∼1610)는 오산설림(五山說林)에서 전우치 고사를 언급했다. 아버지 차식(車軾 1517~1575)이 전우치에게 두보 시집을 빌려 줬으나, 알고 보니 오래 전에 죽었다는 것이다. 先君言 一日治來借杜工部詩一帙 先君不知其死借之 後聞之死已久矣 (돌아 가신 아버지 말씀에 하루는 전우치가 와서 두공부 시집 한 권을 빌렸는데, 아버지는 그 죽은 자가 빌린 것을 모르셨고, 후에야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고 들으셨다고 하셨다). 

차식 혹은 차천로가 의도적으로 전우치 고사를 지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차식이 도교 성향이 강했던 유학자 서경덕의 문인이었다는 점에서 신선 설화를 적은 것은 이상하지 않다.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쓴 어우야담과 이본인 동화(東話)의 전우치 문헌설화에는 박광우(朴光 ), 송기수(宋麒壽 1507~1581), 신광한(申光漢 1484 ~ 1555), 김의원(金義元 1558~)이 등장한다. 설화 속 박광우는 朴光祐이고, 실제 재령군수였던 박광우는 朴光佑(1476~1545)이다. 창작자의 단순착오로 보인다. 

최초로 전우치의 죽음을 설정한 유몽인의 문헌 설화에서 전우치는 박광우가 재령군수일 때 목을 매고 죽었다. 

박광우는 1536년에 재령군수였고, 나이 41세였다. 제도에 가족과 함께 가면 재임기간이 5년, 가족과 함께 안 가면 2년 6개월이나, 인사 적체가 심해서 통상적으로 짧으면 2개월, 길면 4년으로, 보통 1~2년 정도 재임하였다. 그러므로 전우치는 시간 설정상 1536년 무렵에 죽은 것이 된다.

이원명(李源命 1807~1887)의 동야휘집(1869)에 김의원이 전우치에게 집안의 병을 치료해 달라고 했다는 설화가 들어 있다.

 

左郞金義元闔家妖病 請禹治. 治曰 是緣讐人屑人頭骨 撤之遍一家故衆鬼虐人 可符呪之(좌랑 김의원의 온 가족이 요사한 병에 걸리자 우치에게 청하였다. 우치가 말하기를 "이는 원수가 사람의 두골을 가루 내어 일가에 두루 없앤 연고로 무리 지은 귀신이 사람을 해치는 것이니, 가히 부적으로 주술을 쓰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어우야담 이본인 동화에 나오는 황철 문헌 설화에서 이름만 바꾼 것이다.

左郞金義元族姪闔家病 請轍治 轍曰 是緣讐人屑人頭骨 撤之遍一家 故衆鬼虐人 可符呪之. 

김의원은 1558년에 출생했으며, 1597년에 이조 좌랑이 됐기에 이미 죽은 전우치에게 부탁할 수 없으니 시간 배경 설정이 안 맞다. 김의원은 붓글씨를 아주 잘 썼다고 한다. 

박광우는 1545년 을사사화로 하옥중 고신 후유증으로 동선역으로 유배를 떠나다 돈화문 밖에서 죽었다

송기수는 1538년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부임하였다. 신광한은 기묘사화와 관련해서 1519년 파면 당했다가 1537년 직첩을 다시 받아 1538년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신광한은 이희보와 더불어 문장으로 당대에 명성이 있었다. 1519년 기묘사화로 유배를 가고, 1521년 신사무옥에 연루해 다시 파직 당하는 등 풍파를 겪었으나, 김안로가 죽자 비로소 순탄한 관직 생활을 하였다. 

최초로 설화 속 인물 전우치를 언급한 장음정유고를 편집한 허엽의 아들 허균(許筠 1569~1618)도 자신의 저술 성소부부고(1612) 25권 설부, 성수시화에 羽士田禹治人言仙去(우사 전우치가 사람들 말로 신선이 되어 갔다)"라고 적었다.

한편 허균 이전에는 홍길동 문헌 설화가 없었고, 전우치전이 먼저 존재했기에 홍길동전은 전우치 문헌 설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아버지 허엽이 전우치 설화를 알고 있었음으로 부친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여기에 더 해서 허균은 오래도록 세간에 널리 퍼진 연산군 때의 궐내 관리들과 결탁한 도적 홍길동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홍길동전을 썼을 것이다.

又曰 先王朝, 卜相得人, 風俗淳美, 無有綱常之變, 只洪吉同李連壽兩人而已, 閭里詬謾, 必以此兩人辱之, 今則相不得人, 風俗乖敗, 綱常之變, 在在皆然, 吉同連壽之名沒矣.
(또 말씀하시기를 "선왕조에서 정승을 천거로 가려 뽑아 풍속이 순미하였음으로 강상의 변이 있지 않았고, 단지 홍길동과 이연수 두 사람 뿐이라서 마을마다 욕하고 헐뜯을 때면 꼭 이 두 사람을 들어 모욕하였다. 지금은 곧 재상을 사람에게서 구하지 않으니, 풍속이 어그러지고 무너져 강상의 변이 곳곳마다 일어나서, 길동과 연수의 이름이 사라졌다"고 하셨다.)
- 선조실록, 선조21(1588)

혹자는 홍길동전에 정종실록 1697년 기록에 나오는 장길산이 등장한다는 점을 들어 홍길동전은 18세기 소설이라고 하나, 근거가 타당하지 않다. 균이 또한 수호전을 따라서 홍길동전을 지었다(筠又作洪吉童傳以擬水滸)고 한 이식(李植)은 생몰년이 1584~1647년으로서 장길산이 태어나기 전 인물이고, 그의 저술을 모은 택당집(澤堂集) 역시 장길산 출현 이전인 1674년에 발행했기에 사실이 아니다. 원본이 아닌 후세의 이본에서 장길산을 등장 시켰으며, 관청 등의 명기에서도 후세의 명칭으로 적은 것이다.

또한 황일호(黃一皓 1588~1641)가 쓴 지소선생문집에 실린 노혁전에 "盧革傳 丙寅秋 ... 革之本性洪其名曰吉同 實我東望族也. 노혁전 병인년 가을 ... 혁의 본래 성은 홍이고, 그 이름을 길동이라고 말하니, 실로 내 동방의 명망가이다)라는 대목을 들어서 허균이 홍길동전을 쓴 지은이가 아니라고 하면서 아무런 근거도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막상 노혁전을 보면 오히려 황일호가 허균의 홍길동전을 모방한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 

황일호는 노혁전을 병인년 가을에 썼다고 했다. 당시에 병인년은 1506년, 1566년, 1626년이다. 1566년 병인년에는 황일호가 태어나지 않은 때이니, 황일호는 1626년 병인년 가을에 노혁전을 썼다. 하지만 허균은 이미 홍길동전을 쓰고 1618년에 죽었다. 따라서 황일호는 허균보다 먼저 홍길전을 쓸 수 없다.

 

허균은 1618년 선동 벽보가 들통나 혁명을 모의했다고 하여 도성 저자거리에서 공개 처형으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