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한국 축구의 역사 - 한국 축구의 유래

허구인물 전우치 2016. 1. 19. 11:34

지난 주 우연히 [신명철의 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축구(1)1라는 기사를 읽었고, 역사적으로 의문점들이 눈에 띄어 전반적으로 한국 축구의 기원을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대한축구협회의 '간추린 축구사'와 '한국 축구 백년사'를 확인하니 내용이 모두 잘 못 되어 있어서 사실을 바로 잡고자 이 글을 작성하였다.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신 대한체육회 황영현님에게 감사합니다.

 

 

들어가는 말

 

 "영국을 모태로 하는 근대 축구가 한국에 전파된 것은 1882년(고종 19년) 인천항에 상륙한 영국 군함 플라잉 호스의 승무원들을 통해서인 것으로 전해진다."
- 대한축구협회, 간추린 축구사.

 

대영제국 왕실 해군 역사에서 플라잉 호스라는 이름을 가진 함정은 존재한 적이 없다. 대영제국 왕실 해군에 플라잉이라는 단어를 덧붙힌 이름을 가진 함정들은 오직 '플라잉 피쉬(Flying Fish)', '플라잉 팍스(Flying Fox)', '플라잉 그레이하운드(Flying Greyhound)' 세 척 밖에 없었다.2

 

1. 영국 군함이 한국에 축구를 전해 주었나?

 

1) 인천에 정박한 영국 함선이 1897년 5월 한국에 축구를 전해 주었나?

 

"1897년 5월 영국 함선이 제물포(인천항)에 닻을 내렸을 때 이 항구의 사람들은 다시 박래선(舶來船)을 보는 호기심에 해변가에 즐비하게 모였다. 그러나 얼마 전에 본 철선과 다름이 없었고, 울긋불긋한 내의(셔츠)를 입은 여남은 명의 영국 수병들이 조그만 보트에 타고 상륙을 하였다. 사람들은 그 야릇한 옷이 우습기도 했으나 보다 관심을 끈 것은 꽃항아리만한 가죽 주머니였다. 영국 수병들은 빈 터를 찾더니 그 가죽 주머니에 바람을 팽팽히 집어 넣이 이것을 서로 차기 시작하였다. 파란 하늘에 빨간 가죽 주머니가 높이 솟구치고 멀리 시원스럽게 날아가는 것을 보았을 때 해변가에 모였던 사람들은 절로 환성이 올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영국 수병들과 마을 사람들은 함께 어울려서 가죽 주머니라고 여긴 볼을 차기 시작하였으니 이 것이 한국 축구의 처음인 것이다."
- 경향신문 1965. 02. 10.

 

"이듬 해인 1897년 인천항에 상륙한 영국 함선의 수병들은 부두 공터에서 그들의 국기인 축구를 선보였다. 어전 통역으로 나왔던 외국어 학교 출신 역관들은 이 희한한 놀이를 보고나서 「대한축구 구락부」(이 해에 대한제국이 수립되었다)라는 것을 만들고 외국어 학교에 축구단을 만들었다. 근대 스포츠는 이렇게 상륙해 들어 왔다."
- 경향신문 1978. 01. 04.

 

첫번째 기사는 언론 최초로 영국 함선 축구 한국 전래설을 주장한 기사다. 하지만 이 주장은 널리 받아 들여 지지 않았다. 1897년 5월에 영국 군함이 제물포에 입항했다는 기록도 찾을 수 없다.

 

두 번째 기사는 전혀 다른 별개의 발언을 묶어 놓았다.3

 

경향신문 이 두 기사를 제외하고는 그 무렵 혹은 그 이전 문헌에 1897년 영국 군함 축구 전래설 기록은 없다.4

 

2) 영국 함선 플라잉 피쉬(Flying Fish) 선원들이 1882년 7월 한국에 축구를 전해 주었나?

 

"1882년 고종 19년 6월. 인천 제물포에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Flying Fish)」호가 입항하였다. 이처럼 영국 군함이 우리나라에 들어 온 것은 개국 이래 최초의 일이었다. 이 때 들어 온 군함의 승무원들은 선상생활의 지루함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는 중에 부두에서 공을 찼다. 당시 우리나라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최절정기에 이었던 만큼 서양인에 대한 배척이 심했다. 따라서 제물포 부두에서 볼을 차며 휴식을 취하던 플라잉 피시호 승무원들은 관가의 허가도 없이 상륙했다 하여 우리나라 군졸들에게 쫓겨가게 되었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에 당하게 된 일이라서 영국 승무원들은 볼을 차다가 그만 볼을 두고 가고 말았다. 이 때 아이들이 볼을 주워 영국인들의 흉내를 낸 것이 우리나라에 축구가 들어 오게 된 연유이며, 이 때 놓고 간 볼이 곧 서구식 축구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 대한축구협회, 대한 축구 백년사, 1986, 136~137쪽.

 

(1) 우리 나라에 최초로 입항한 영국 함선은 플라잉 피쉬가 아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입항한 영국 함선은 1882년 5월 27일(음력 4월 11일)에 인천부 제물포에 입항한 군함 비질란트(Vigilante, 味齊郞)로서 청국함대사령장관인 수군제독 중장 조지 윌스(George Wiilles 韋力士)가 타고 있었다.5 이는 플라잉 피쉬보다 1달이나 앞서 제물포에 입항한 것이다.

 

 영국 군함 비질란트는 철재 뼈대에 목판과 동판을 입힌 복합선으로서 1871년에 실전 배치했으며, 1886년 홍콩에 팔았다.

 

반면 영국 측량선 플라잉 피쉬가 제물포에 입항한 날짜는 1882년 6월 12일 새벽이다.

 

(2) 영국 측량선 플라잉 피쉬 선원들의 제물포 상륙은 불법이 아니다.

 

조선은 1882년 6월 7일(음력 4월 22일) 영국과 3개조의 조영수호통상조규를 맺었다.6 이는 영국 정부를 대표하여 1882년 5월 27일 제물포에 입항한 영국 군함 비질란트 함장 조지 윌스와 맺은 통상조규로서, 일본 신호에 입항해 있던 영국 측량선 플라잉 피쉬가 조선 해역 측량에 나서게 될 경우에 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 목적도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1882년 6월 12일 새벽에 제물포 앞에 닻을 내린 영국 측량선 플라잉 피쉬 선원들은 조영수호통상조규 제2조 '영국 병선은 조선의 어느 항구나 신속하게 들어가 음식물, 담수를 구매할 수 있으며, 또는 선박 수리에 필요한 부품도 구입할 수 있다'라는 내용에 따라 제물포 뭍에 얼마든지 상륙할 수 있었다. 또한 제물포는 원산, 부산과 더불어 조선 정부에서 입항을 허락한 3대 개항장 중 한 곳이다.

 

 따라서 영국 측량선 플라잉 피쉬 선원들이 제물포 뭍에 올라서 맨땅에서 공을 차다가 군졸에게 쫓겨 허겁지겁 공을 놔두고 도망쳐야 할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3) 영국 측량선 플라잉 피쉬 선원들은 제물포에서 공을 차지 않았다.

 

1873년 11월부터 항해를 시작한 영국 측량선 플라잉 피쉬는 동인도 측량을 위해 1880년 12월 홍콩에 정박중에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중국 및 일본을 관할하던 영국 대법원 수석판사 조지 프렌취(George French)가 중국 및 일본 관할 영국 대법원이 있던 일본 신호(神戶 고베)에서 사망하자 장례 절차를 돕기 위해 1881년 11월 일본 신호에 입항하였다.

 

1882년 6월 9일 임오 군사 봉기가 일어났다. 민비가 저지른 죄악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매관매직으로 지방 관직을 팔고도 추가로 공문서로 뇌물 상납금 요구, 강화도 소총 보병대 3천명 해고, 육군 5영을 2영으로 대규모 감축, 정작 일본군을 끌어 들여 자신의 경호부대 왜별기대 신설하기 등이었다, 여기에다 민씨 일족 민겸호의 군량미 횡령과 월급 미지급마저 더해졌다. 분노한 조선 육군이 의기충천 봉기했다. 조선 육군 봉기군은 도주한 민비를 처형하기 위해 검문과 수색에 나섰고, 탐관오리 민겸호와 부패한 경기 관찰사 김보현을 체포하였다. 또한 조선 육군 봉기군은 민비가 자신의 경호부대로 보유하고 있던 왜별기대를 타도하여 민비의 총애를 받던 일본군 공병 소위 굴본예조(掘本禮造 호리모토)를 포함 일본군 교관 몇 명과 일본군 병사 수 십명을 처형하였다.

 

조선 육군 봉기군은 일본이 공사관으로 사용중이던 청수관을 주민들과 함께 공격하였다. 일본 별리공사 화방의질(花房義質 하나부사 요시모토)은 더 이상 반항이 힘들자 자정 무렵에 해군 군의관 좌천 황(佐川 晃 사가와 이코) 등에게 명령하여 청수관에 석유를 뿌려 불지르게 한 다음 기밀서류를 태우고 인천부로 도주하였다.

 

일본 별리공사 화방의질은 경기 관찰사 김보현에게서 미리 비상용으로 받아 놓았던 통행증을 제시하거나 막아 선 민간인들을 마구 죽이면서 부하들을 이끌고 인천부에 도착하여 인천부사 정지용과 차비역관 고영희의 호의로 관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화방의질 일행을 척살하라는 대원군의 밀서가 도착하였고, 화방의질은 다시 응징을 받아 부하 6명을 잃고 5명이 부상을 당하면서 활로를 뚫어 제물포로 빠져 나갔다.

 

화방의질은 제물포에서 한 매국노 별장의 도움으로 월미도로 건너가 지금의 북성동 지역에 숨어 있다가 다음 날 6월 12일 새벽 정박한 영국 측량선 플라잉 피쉬에 올랐다. 플라잉 피쉬 함장 대위 리차드 호스킨(Richard J. Hoskyn)은 즉시 출발하여 6월 15일 밤 일본 장기(長崎 나가사키)항에 도착하였다.7

 

따라서 화방의질이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인 6월 11일에는 영국 측량선 플라잉 피쉬가 제물포에 없었다. 화방의질은 제물포에서 육군 중위 송강이치(松岡利治 마쓰오카 토시하루), 외무어용괘 삼림준(杉林濬)과 구수삼랑(久水三郞 히사미즈 사부로), 어학생 1명, 보조 직원 1명을 만나서 합류시켰기 때문에 제물포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만약 영국 측량선 플라잉 피쉬가 정박중이었다면 화방의질은 바로 플라잉 피쉬에 승선하지 구태여 월미도까지 건너가서 새벽까지 숨어 있었을리가 없다.

 

급박하게 인천부에서 싸움이 일어 났고, 제물포에서도 창칼을 들고 수색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영국 측량선 플라잉 피쉬 승무원들이 새벽에 제물포 앞 바다에 닻을 내리자 마자 심심하다고 플라잉 피쉬에서 내려 뭍에 나가서 축구를 할 수는 없었다.

 

3) 영국 군함 인카운터(Encounter) 병사들이 1882년 8월 한성 훈련원에서 축구 공을 건네 주었나?

 

"그로부터 약 1개월이 지난 뒤인 7월, 이번에는 영국 군함 「엥가운드」호가 제물포에 다시 입항하였다. 양국간의 친선을 목적으로 들어 온 이들은 관가에 한성에 들어 갈 것을 요청하였다. 이같은 요청이 계속되자 인천 제물포에 있던 부사에 의해 조정에 상신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사실을 접한 조정에서는 이를 쾌히 승낙하는 한편 이들을 환영하는 뜻에서 이재황 훈련대장으로 하여금 군졸 6백명을 인솔케 하여 과천현까지 나가 맞아 들이게 하였다. 제물포에서 김포를 거쳐 곧바로 한성으로 들어오지 않고 우회하여 과천을 거쳐 들어오게 된 것은 당시 과천대로는 한성에 들어오는 공식적인 길로서 조정에 들어 오려면 반드시 이 길을 거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아뭏든 한성에 들어 온 영국 승무원들은 「플라잉 피시」호 승무원들과 마찬가지로 휴식을 취하며 훈련원 공지에서 공을 찼다. 물론 오늘과 같은 형태의 축구 경기를 했을 것이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 공차기 놀이를 신기하게 구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영국인들은 그들이 차던 공을 구경하던 사람들에게 주었는데 영국인들이 떠난 뒤 훈련원에서는 한동안 공 차기를 했다는 것이다."
- 대한축구협회, 한국 축구 백년사, 1986, 137쪽.

 

영국 군함 인카운터(Encounter)는 대영제국 왕실 해군이 왕실 조선소에서 건조한 마지막 목선 세대에 속하며, 증기 실린더를 빼면 스크류까지 나무로 제작한 목선이었다. 1873년 건조하여 해군 함정으로 사용하다가 1888년 민간인에게 판매하였다.

 

(1) 영국 군함 인카운터는 친선 목적으로 제물포에 오지 않았다.

 

영국 군함 인카운터는 조선에서 육군 군사 봉기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1882년 7월 11일에 제물포에 입항하였다.8

 

(2) 영국 군함 인카운터 병사들은 한성에 가지 않았다.

 

우선 훈련대장 이재황이 병졸 600명을 이끌고 과천으로 나가 영국 군함 인카운터 승무원 일행을 맞이 했다고 했지만, 이재황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은 사람이다. 영국 군함 인카운터가 제물포에 들어 온 6월에는 훈련대장직이 공석이었음으로 훈련대장이 영접하러 갈 수 없었다.9 조선 정부는 영국 군함 인카운터가 제물포에 입항했다는 보고를 받고는 부평 부사 김호균을 임시 승지로 임명해서 인카운터에 찾아가 위문하고 호의를 전하게 하였다.10

 

임오 군사 봉기 직후 제물포에는 영국 군함 인카운터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미국 군함 모노카시(Monocasy)가 6월 30일에 입항해 정박 중이었다. 그 무렵 일본 공사 화방의질은 일본군 대대병력 1,500여명과 함께 제물포에 상륙하였다. 화방의질은 중대 병력을 이끌고 한성에 입성하여 7월 7일에 고종을 알현하였다. 조선 정부는 7월 11일에 협상 7개항에다 '대관을 특하여 국서를 갖추어서 일본에 사과할 것'이라는 내용을 하나 더 추가하라는 화방의질의 요구를 최종적으로 거절했다.11 화방의질은 국교 단절 운운하면서 영사 근등(近藤 곤도)에게 마무리를 맡기고 당일 11일 저녁에 인천부로 철수하였다. 화방의질은 일본을 떠나기 전에 받은 기밀 훈령대로 협상이 결렬되자 제물포를 점령하려는 속셈이었다.12 하지만 제물포에는 미국 군함 모노카시와 영국 군함 인카운터가 입항에 있었음으로 마찰이 발생할 것을 우려한 화방의질은 제물포 점령을 포기하였다.

 

영사 근등도 다음 날인 7월 12일 인천부로 와서 청군이 한성에 들어왔음을 전하였다. 이에 화방의질은 협상 관련자들을 모두 타고 온 화가포환(和歌浦丸)에 태우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따라서 제물포에서 비상 대기 중이던 영국 군함 인카운터 병사들은 한성에 입성하지 않았고, 훈련원에서 공을 차지도 않았다.

 

4) 영국 군함 한국 축구 전래설을 주장한 서병희의 말을 믿을 수 있나?

 

"이같은 이야기는 당시 관찰사로 있던 서병희(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축구 심판원)씨가 선친 서승원씨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한다. 이같은 증언을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에 서구식 축구가 들어 온 시기와 경로를 대략 알 수 있겠다. 즉 서병희씨 증언이 사실이라면 1983년이 영국과의 수교 1백주년이 되는 해였으니, 고종 원년(고종19년) 7월에 들어 온 「엥가운드」호의 방문은 한영수교 때문이 아니었나 추측할 수 있다."
- 대한축구협회, 한국 축구 백년사, 1986, 137쪽.

 

 한국 축구 초창기 축구 심판 서병희에 대한 정보는 정확하지 않다. 1893년생이라는 주장과13 1901년생이라는 주장이14 있다. 서병희는 영국계 회사에서 1937년 일본의 점령하에 있던 중국 천진으로 발령 받아 근무하면서 현지 교민회장을 맡아 다까미네(高峰 고봉)라는 일본 이름으로 횡포를 일삼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천진에 진출한 중국 주재 한국 임시정부군 '한국 광복군'에게서 친일파로 판결 받아 일가족 5명 모두 처단을 맞이했다고 한다.15

 

대한축구협회 발간 한국 축구 백년사는 서병희의 학력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이라고 적고 있다. 서병희가 킹스 대학을 중퇴하였으며, 심판을 볼 때마다 킹스 대학 문양과 머릿 글자 S를 수 놓은 웃옷을 입었다는 주장도 있다.16 정작 서병희 본인은 1931년 동아일보 대담에서 자신이 영국 헬리버러 칼리지를 졸업한 후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하였다고 말하였다.17

 

하지만 서병희의 학력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서병희가 7살에, 즉 1893년생이라면 1900년에, 1901년생이라면 1908년에 영국에 가서,18 1913년에 귀향했다면 20살이나 12살에 귀국한 것이 된다.19 이로 보아 서병희가 1893년에 출생했다는 설이 더 타당하다. 서병희가 1893년생이고 20살 때인 1913년 귀국한 것이 맞다고 해도 일반적으로 20살 이전에 대학을 졸업할 수 없다. 

 

귀향후 서병희는 인천 북성동 4층 건물에 있던 영미 연초주식회사(Chemulpo Tobaco. co), 함경남도 덕원군 문평리에 공장 및 부산 영도에 저장 창고가 있었던 라이징 선(Rising Sun) 석유회사, 수원에 있던 미국 싱거 재봉틀 한국 지사에서 근무하였다고 한다.20 이러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서병희가 심판으로 활동하기 전에 이미 조선에서 직장 생활을 여러 해 동안 하고 있었기에 1913년 귀국설은 설득력이 있다. 1921년 2월 11일에 최초의 축구선수권 대회인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를 개최했고, 서병희는 이 대회 이튿날부터 심판을 보았다. 서병희는 눈이 나빠 안경을 착용해야 사물을 볼 수 있었다.

 

서병희는 영국 군함 플라잉 피쉬와 인카운터 병사들이 각각 제물포 부두와 서울 훈련원에서 축구를 했다는 이야기를 선친 경기 관찰사 서승원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하였으나 사실이 아니다. 영국 군함 인카운터가 제물포 앞에 정박하던 1882년 7월 경기 관찰사는 서병희의 선친 서승원이 아니라 홍우창이었다.21 영국 군함 플라잉 피쉬가 제물포에 입항 직전의 경기 관찰사는 김보현으로 임오 군사 봉기군에게 처형당하자 즉시 홍우창을 임명하였다. 서병희의 선친은 인천 세관원이었다는 설이 더 타당하다.22

 

2. 한국에 현대 축구를 언제 누가 전해 줬으며, 한국인 최초로 누가 축구를 하였나?

 

한국에 현대 축구를 최초로 전해 준 사람은 한성 영어 학교 영국인 교사 서간 박스웰(Sergant Boxwell 박사위)이며, 1896년에 학생들에게 축구를 가르쳐 주었다.

 

한국 최초의 축구는 한성 영어 학교 학생들이 1896년에 시작하였다.

 

한국 최초의 성인 축구단은 1897년 한성에서 결성한 '대한축구 구락부'이다.

 

한국 최초의 유소년 축구단은 1898년에 공을 찬 강화도 강화학당 유소년 축구단이다.


1) 1896년 한성 영어학교 청년 학생들이 영국인 교사 서간 박스웰에게서 축구를 배워 공을 차기 시작했다.

 

 "영어 학교 학도들은 근일에 발 공 차는 법을 배워 오후면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데 달음질 하는 것이며 성벽내는 게며 활발한 거동이 일본 아이들 보다는 백 배가 낫고 미국 영국 아이들과 비스름 한지라 이런 것을 보거드면 조선 사람도 인도만 잘 하거드면 세계에 남만 못 하지 안 할 인종이요 결단코 일본 사람 보다는 낫게 될 듯 하더라."
- 독립신문 1896. 12. 03.

 

조선 정부는 1893년 3월 22일 해군학교 설치령을 공표하고, 같은 해 9월 강화도 갑곶리에 총제영 건물을 완공하여 30명의 사관생도를 입교시켰다. 영국인 교관을 때에 맞춰 확보하지 못 해서 우선 교장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윌리엄 허치슨(William du Flon Hutchinson 할치신)을 총제영 영어 교육 담당자로 임명해서 10월부터 영어 교육을 먼저 실시하였다.

 

이후 예비역 대위 윌리엄 콜웰(William Henry Callwell)과 예비역 하사관 존 커티스(John W. Curtis)가 1894년 4월 15일 총제영에 도착하여 사관생도 30명과 해군 300명을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1893년 3월 조선 해군학교 설치령을 발표하고 강화도 갑곶리에 시설이 들어 설 준비를 하자 마자 동시에 성공회 주교 찰스 코프(Charles John Corfe 고요한)는 미리 갑곶리에 교회 겸 사택으로 사용할 주택을 매입하여 두었다가 해군 학교가 10월에 개교하자 12월 22일에 신부 레너드 워너(Leonard. O. Warner 왕란도)를 파송하였다.

 

이는 조선 해군학교에서 영어와 해군 교육을 하는 영국인 교사들과 성공회 신부들간에 의사소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의미다. 신부 레너드 워너의 선교 대상이 해군학교 조선인 교육생들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지식 선교를 조선 지식인층 대상으로, 의료 선교를 부유층 중심으로 시도하였다. 조선에 들어 온 모든 나라의 선교사들 중에서 영국 성공회 신부들이 가장 열성적으로 선교 활동을 하였다.23

 

정식으로 조선 선교를 내걸고 조선에 들어 온 성공회 주교 찰스 코프가 영국 해군 군종 사제였다는 점과 역시 일시 함께 활동했던 성공회 주교 제임스 스캇(James Scott 살윤격)은 인천 영국 영사관에서 부영사로 근무하고 있었던 점을 보면 성공회와 영국 해군의 관계가 밀접했다.24

 

이렇듯 조선 정부는 영국과 손을 잡고 해군 육성에 공을 들였고, 해군 학교 개교에 맞추어 그동안 육영공원에서 영어 교육을 담당했던 미국인 교사들과 더 이상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다. 1894년 총제영 영어 담당관 영국인 윌리엄 허치슨을 육영공원 교장에도 임명하고, 이후 영국인 토마스 핼리팩스(Thomas E. Hallifax 해래백사)와 서간 박스웰(Sergant Boxwell 박사위)을 교사로 임명하였다. 기존 학생 4명, 강화도에서 데려 온 학생, 정부가 파견한 64명에 대한 영어 교육을 시작하였다. 육영공원을 영어 학교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영어 학교에서 교장과 교사까지 모두 영국인으로 임명한 후, 1896년부터 영어 학교에서 축구를 시작하였다. 토마스 핼리팩스는 영어 학교 교사 부임 전에 한성과 부산간 전보 선로 기사로 일하였는데 축구와의 연관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영어 학교에서 축구를 가르친 교사는 윌리엄 허치슨 아니면 서간 박스웰이다. 

 

강화도 갑곶리 조선 해군학교 총제영에서 학생들이 축구를 한 사실이 없으면, 한국에 현대 축구를 최초로 전해준 사람은 자연스럽게 1896년에 영어 학교 교사로 부임한 영국인 서간 박스웰이다. 서간 박스웰은 1896년부터 영어 학교에서 조련(교련) 교사로서 정식으로 체조를 가르쳤고, 동시에 경무청에서는 순검들에게 기예를 지도하였다.25 서간 박스웰이 여러 가지 운동을 익혔음을 알 수 있다.

 

영어 학교 학생들이 축구를 했다는 사실은 같은 영어학교 출신으로 상해에서 교육자로 활동하였던 김종상의 증언에서도 나타난다.26 김종상도 역시 궁내부 참리관과 통관 등 영어 학교 출신들이 다른 축구 동호인들과 함께 훈련원과 삼선평 등에서 영국인 교사에게서 축구를 배웠다고 하였다.27

 

2) 1897년 가을 한성에서 한국 최초의 성인 축구단 '대한축구 구락부'를 결성하였다.

 

서간 박스웰이 영어 학교에서 축구를 가르치기 시작한 다음 해인 1897년 정유년에 영어 학교에서 공부하였던 궁내부 참리관과 통관들이28 뜻을 모아 대한축구 구락부라는 축구단을 결성하였다.29 

 

조선 정부가 영어 학교에 입교 시킨 관리 64명이 영어 학교에서 최소한 1896년부터 축구를 배웠고, 그들 중 궁내부 참리관과 통관들이 대한제국이 출범한 1897년에 다른 축구 동호인들과 함께 한국 최초 축구단인 '대한축구 구락부'를 결성하였다. 대한제국이 1897년 10월 12일 출범하였기에 대한축구 구락부를 10월 중순에서 12월 사이에 결성하였다. 이 기간 궁내부 참리관을 역임한 사람은 양종언, 이학균, 이승기이며, 이학균이 11월 27일에 궁내부 참리관에서 면직되면서 대신 이승기가 임명 받았다.30 이들은 모두 영어 학교 이수자들이기에 대한축구 구락부 결성이나 활동에 관여하였다.


3) 1898년 봄 강화도에 한국 최초의 유소년 축구단 '강화학당 유소년 축구단'이 있었다.

 

"통신문. 1. 제물포: 1901년 3월 21일. 존경하는 편집장님, 저는 여기에서 편집장님께서 모닝 캄 지면을 채울만큼 충분히 흥미를 찾으실만한 사진 몇 장을 추가해서 보냅니다. 겨울 내내 저는 사진을 구하려고 심혈을 기울여 왔으며, 하지만 부활절 이후에나 며칠간의 방문으로 강화에 가기를 원하고 있는데, 거기에 찍을 사진 거리가 많이 있을 것이고, 흥미 있는 사진들로 기사를 쓰시게 될 것입니다. 동봉한 사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강화학당 축구단은 브라이들 신부님에게서 몇 년째 정성스럽게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소년들은 시합을 매우 잘 하며, 조금 더 훈련 받은 후에는 영국에서 대회 일정의 일부를 담당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 더 모닝 캄, 1901. 08, 82쪽31

 

신부 시드니 파커(Sidney J. Parker)는 1901년 3월 21일에 통신문을 작성하여 영국 런던 성공회로 보내서 더 모닝 캄에 기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신부 시드니 파커의 기고문을 1901년 8월호 더 모닝 캄에 실어 주었다.32

 

통신문을 보면 강화학당 유소년들이 축구를 배우기 시작한지는 1901년보다 최소한 3년 이전부터다.33 강화학당 유소년들은 늦어도 1898년 봄부터 신부 브라이들(G. A. Bridle 부재열)에게서 축구를 배웠다. 강화학당 유소년 축구단을 지도한 신부 브라이들은 1897년 11월 7일 인천 미카엘 교회에서 주교 제임스 스캇에게서 부제 서품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신부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시기적으로 신부 브라이들은 부제 서품을 받자 마자 강화도 선교에 합류하여 강화학당 유소년 축구단에게 체계적으로 축구를 가르쳐 주었다.

 

신부 브라이들이 강화도 강화학당 유소년 축구단을 결성했는지, 아니면 강화학당 유소년 축구단이 그 이전부터 존재했는지는 그 여부를 알 수 없다. 신부 브라이들이 강화 유소년 축구단을 창단했다는 것이 더 타당하다.

 

신부 시드니 파커가 입수하여 더 모닝 캄에 기고한 사진에서 강화학당 유소년 축구 선수들이 들고 있는 공이 정식 축구공임을 확인할 수 있는데, 성공회 선교사들이 축구를 체계적으로 지도했다는 뜻이다. 이는 축구 도입 초기에는 돼지 오줌통에 짚이나 솜을 넣어 찼다는 터무니 없는 통설과 다르게 한국 축구는 도입 초기부터 정식 축구공으로 배우고 익혔음을 보여 준다.

 

당시 축구공은 모두 영국산을 들여 왔는데, 성공회 같은 영국 종교 단체에서 지원 받거나 수입품을 사서 썼다. 1897년에 축구공 가격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1920년의 기록을 보면 10원쯤 한다고 하였으니,34 비슷한 시기의 최저 소득계층에게는 한달치 소득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할 만큼 비싼 운동 도구였다.35 하지만 상대적으로 저소득 계층에 비해 경제적 여건이 좋았던 영어 학교 학생들을 비롯해서 다른 학교 학생들에게 큰 부담이 아니었다. 

 

영어 학교에 입학하려면 미리 상당한 한문 실력을 갖추어야 했는데,36 이는 학부모가 교육에 투자할 수 있는 충분한 경제력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조선 정부는 영어 학교 학생들에게 잉크, 잉크용 종이, 잉크 펜, 연필, 청연필 등을 미국에서 수입해서 무상으로 지급하여 학습비 부담을 줄여 주었다.37 조선 해군학교 총제영에서는 학생들에게 매달 급식비와 수당도 지급하여 궁핍하지 않게 하였다.38 이처럼 영어 학교를 비롯해서 각 학교 학생들은 축구공을 구비할 여력이 되었다.

 

강화도 성공회 교회 행사 때마다 축구 시합을 하고 1900년대 초에는 강화도에서 전국적인 선수를 배출하였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1900년 이전에 축구가 넓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39 

 

덧붙혀 1890년 축구 전래설이 있는데,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40

 

 

 

 

 

                            <1931년1월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서병희 사진>

 

 

 

    <강화도 강화학당 유소년 축구단, 두번째 줄 가운데 선수가 정식 축구공을 들고 있는 것을 

     수 있다. 마당에는 짧게 베어 낸 풀 아니면 잔디가 깔려 있다.>

 

 

 

 

<일본 경찰 형사과에서 입수하여 1927년 2월 3일 작성한 감시 목록철에 붙혀 놓았던 복사 사진으로 첫번째 줄 왼쪽에서 세번째 인물이 영어 학교 출신 김종상이다. 김종상은 1906년 황성 기독청년회(YMCA) 축구단을 결성하여 주장을 맡기도 하였다.>

 

 

  1. 스포티비뉴스 2015. 11. 04, 이 땅에 언제 근대적 의미의 축구가 들어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대한축구협회가 펴낸 '한국 축구 100년사'에 따르면 1882년 6월 제물포항에 입항한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호의 승무원들이 부두에서 공을 찼다고 한다. 이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 관련 내용이다. 이어 7월에는 영국 군함 엥가운드호가 제물포항에 입항했는데 이 배의 선원들은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있던 훈련원에서 축구를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ship_names_of_the_Royal_Navy_(D%E2%80%93F) [본문으로]
  3. 한국 최초의 축구 심판이라고 잘 못 알려진 서병희의 증언과 기독청년회(YMCA) 축구단 창설에 관여했던 독립운동가 김종상의 증언을 합쳐 놓았다. 서병희는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 이튿날부터 심판을 보았음으로 조선 최초의 축구 심판이 아니다. [본문으로]
  4. 베스트 일레븐 2010년 01월 04일자 이의재의 축구야사 ①이라는 기사에서 「한국에 처음 축구가 도입된 시기에 대해 축구협회에서 편찬한 ‘한국축구백년사’에는 1882년으로 돼 있다. 하지만 대한체육회에서 발간한 '대한체육 50년'에는 1897년으로 돼 있다」라고 하였으나 대한체육회 50년이라는 책에는 그런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 '대한체육회 50년'에서 축구편은 108쪽부터 시작되는데, 108쪽과 109쪽에 「그러면 오늘날 융성을 거듭하고 있는 축구는 언제 어떻게 수입되었는가. 이 수입 경로에 대하여는 구구한 것이 많으나 1905년 외국어 학교의 외국인 교사들의 지도로 불완전 하나마 학생들이 축구에 친하게 되었으며 운동회의 경기 종목으로도 채택되고 나아가서는 그 학교출신들의 손에 의하여 구락부가 조직되고 하여 축구가(108쪽) 퍼지게 된 것이 그 요람이라 하겠다(109쪽)」라고 되어 있다. [본문으로]
  5. 국사편찬위원회, 고종19년 4월 11일, 고종시대사 2집, 英國의 淸國艦隊司令長官 海軍中將 「죠시·윌스」(韋力士)가 軍艦 「비질란트」(vigilante, 味齊郞)에 搭乘하여 仁川 濟物浦에 到泊하다. [본문으로]
  6. 일성록 1882. 04. 22, 全權大臣 趙寧夏·副官 金弘集 等이 仁川 濟物浦에서 英國全權委員 「윌스」와 會同하여 朝·英修好通商條規를 講定하여 1. 通商口岸은 日本을 위하여 開港한 元山·金山·仁川의 3港口로써 辦理할 것, 2. 英國兵船은 朝鮮의 어느 港口나 駛入하여 食物 淡水를 買取하며 또는 修船에 必要한 것도 可能케 할 것, 3. 朝鮮沿海는 아직 精密하게 測量된 것이 없으므로 船舶航行에 甚히 不便을 느낀다. 그러므로 英國船舶으로 그 沿岸島嶼를 測量하여 海圖를 作成할 것이 있다면 이를 許容할 것 등이다. / 조영수호통상조규와 조영수호통상조약은 별개의 사안이다. 조영통상조약(Treaty of friendship and Commerce Between Great Britain and Corea)은 1883년 11월 26일 조선과 영국 사이에 전문 13조의 조영수호통상조약(朝英修好通商條約), 부속통상장정(附續通商章程), 세칙장정(稅則章程), 선후속약(善後續約)의 영문 필사본으로 이듬해인 1884년 2월 8일에 해리 파크스와 김병시 사이에 비준이 교환되었다. 또한 고종실록 음력 1883년 10월 27일 기사에 '조선영국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문으로]
  7. 국사편찬위원회, 임오군변의 발단과 그 경과, 임오군변, 개화정책과 그 반발, 개화 척사 운동, 한국사 16 근대, 月尾島에서 하루를 묵은 일행은 다음날인 6월 12일 새벽 仁川앞바다에 정박중인 英國測量船 푸라잉 피시號(The Fling Fish)에 의하여 구조되었으며 함장인 海軍大尉 호스킨(Richard J. Hoskyn)은 공사의 조난 사실을 듣고 그의 희망에 따라 그날로 출항하여 6월 15일 밤 공사일 행은 長崎에 도착하였다. [본문으로]
  8. 승정원 일기, 1882. 07. 11, 議政府啓曰, 英國船, 聞我國有事, 來泊仁川地云。 不可無勞問之擧。 富平府使 金澔均, 假承旨差下, 卽速專往, 以爲致意之地, 何如? 傳曰, 允 [본문으로]
  9. 1882년 6월 9일 임오 군사 봉기가 발생하였고, 정부는 그 다음날인 6월 10일에 선혜청 제조 겸 훈련대장 신정희를 어영대장으로 발령을 냈다. 임오 군사 봉기의 혼란 탓에 훈련대장은 공석으로 남았다가 1882년 7월 20일에야 임상준을 훈련대장에 임명하였다. / ①고종실록 1882. 06. 10, 이재면(李載冕)을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훈련대장(訓練大將) 선혜청(宣惠廳)의 제조(提調) 신정희(申正熙)를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조희순(趙羲純)을 금위대장(禁衛大將)으로, 이회정(李會正)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②고종실록 1882. 07. 20, 임상준(任商準)을 훈련 대장(訓練大將)으로, 김기석(金箕錫)을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이도재(李道宰)를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삼았다. 이도재(李道宰)는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본문으로]
  10. 승정원 일기, 1882. 07. 11, 같은 글 [본문으로]
  11. 국사편찬위원회, (2) 淸·日 兩國의 介入과 大院君의 被囚 , 2.임오군란, IV. 개화정책과 그 반발, 개화 척사운동, 한국사 16 근대, 한국사, 제 1. 지금으로부터 20일 내에 兇徒의 괴수와 그 무리들을 체포하여 엄중하게 懲辦할 것.제 2. 살해된 자에 대하여서는 優禮厚葬하여 써 其終을 厚하게 할 것.제 3. 5만원을 피살자의 유족과 부상자에게 급여하여 써 體恤을 가할 것.제 4. 무릇 兇徒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日本國이 입은 손해 및 출병준비 등의 일체의 경비를 그 액수에 따라 배상할 것.제 5. 元山·釜山·仁川 등 각 항구의 閒行里程을 넓혀 사방 100里로 하고, 새로 揚花津을 開市場으로 하며 咸興·大邱의 왕래통상을 허가할 것.제 6. 日本의 公使·領事 및 그 수행원과 가족들의 內地遊歷을 허가할 것.제 7. 이제부터 5년동안 日本육군 1개 대대를 두어 日本公使舘을 호위케 할 것.花房公使는 다음 날 아래와 같은 1개조항을 추가 통고하였다. 즉제 8. 大官을 특파하여 國書를 갖추어서 日本에 사과할 것. [본문으로]
  12. 국사편찬위원회, (2) 淸·日 兩國의 介入과 大院君의 被囚 , 2.임오군란, IV. 개화정책과 그 반발, 개화 척사운동, 한국사 16 근대, 한국사,「朝鮮에 파견되는 육·해군의 임무는 花房公使의 중대 사명을 협조하기 위한 것으로 폭도의 습격을 받을 우려가 있을 때는 이를 충분히 호위하고, 또한 교섭이 결렬되면 仁川府 濟物浦를 점령하나 정부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開戰하지 말 것. 또 함대의 진퇴는 함대장관과 花房公使가 협의하여 지휘하고 수병 상륙시는 육군지휘관의 명령에 따를 것」 [본문으로]
  13. 스포츠에픽 2013. 09. 10. 국내 최초의 축구심판은 서병희 심판(1893~1945)으로 전해진다. 그는 인천 출신으로 1900년대 초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가 접한 축구 문물을 1913년 귀향하여 전파하는데 앞장섰다. 1925년에 직접 경기규칙집을 엮어 제6회 전조선 축구대회의 운영에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국내 1호 축구심판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1928년 조선심판협회 위원으로서 창설에 기여했다. [본문으로]
  14. 경향신문 1978. 01. 30, 얘기로 풀어 본 한국 스포츠 80년 (14), 여명기 [14] 멋장이 축구 심판 서병희, 본고장 영국서 익힌 정통파, 자기용 2대 굴린 부호 - 난폭 선수도 꼼짝 못해, 절대 권리 갖고 경기장 장악.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는 숭실 배재전에서 일어난 심판 판정 분뱅으로 끝을 맺지 못하게 되었으나 양팀의 선수들은 곧 자신들이 큰 실례를 범했음을 알게 됐다. 이 경기의 주심이 축구 본고장 영국에서 축구를 배워 온 서병희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었다. 서병희(1901~1945)는 곧 심판으로서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갖고 그라운드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됐다. 그의 판정은 움직일 수 없는 최종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며 누구도 감히 항의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서병희는 축구 경기에 못지 않게 그 자신이 좋은 구경거리였다. 인물 좋고 돈 잘 쓰는 이 멋장이 심판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인천 세관원의 아들인 서병희는 7살 때 아버지와 교분이 깊은 영국 실업인 타운센트(인천)에 진출한 타운센트 상사 대표의 알선으로 영국에 건너 갔다. 조선 왕조의 귀족의 자제라는 소개장을 들고 간 서병희는 영국 상류 계급과 어깨를 나란히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결국 명문 케임브리지 대학부설 킹즈 칼리지까지 다니게 되었다. 서병희가 윈저공 에드워드 8세와 동창이라는 말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위저공은 옥스퍼드대학 출신이라서 이는 국내에 잘못 전해진 이야기인듯 하다. 킹즈 칼리지를 중퇴하고 귀국한 서병희는 인천과 수원 등지의 영국계 업체인 영미 연초회사, 아리싱선 석유회사 싱거 미싱회사 등에서 지배인을 번갈아 맡았다. 영국 왕실의 영어를 습득해 온 서병희는 상류 영국인을 만나면 대뜸 그들이 억양만 듣고서도 옥스퍼드 출신인지 케임브리지 출신인지를 가릴 수 있을 정도여서 영국인들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또한 그의 월봉은 당시로선 엄청난 거액인 7백원이었으니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호기심을 끌기에 족했는데는 하물며 멋들어진 제스처로 축구장을 누볐으니 그에게 쏠린 눈길을 가히 짐작할만 하다. 서울과 평양에서 큰 경기가 있다하면 으레 주심으로 초빙된 서병희는 그라운드에 나설 때마다 노랑구두에 캡을 쓰고 영국 귀족들이 사냥이나 골프를 할 때 입는 바지(당꼬바지)를 입었으며 킹즈 칼리지의 마크와 그의 이니셜인 S자가 수 놓인 쉐터를 걸치고 나타났다. 훨칠한 키에 잘 생긴 얼굴을 가진 서병희는 이처럼 멋을 잔뜩 부리고 나타나서는 성큼성큼 뛰어 운동장 한바귀를 돌고 나서 주심에 임했으니 구경꾼들은 더더욱 열광할 수 밖에 없었다. (하략) [본문으로]
  15. 경향신문 1978. 01. 30, 얘기로 풀어 본 한국 스포츠 80년 (14), 여명기 [14] (상략) 서병희의 위용에는 난폭했던 국내 선수들 뿐만 아니라 외국인 선교사들조차 꼼짝하지 못했다. 1922년 5월 평양 숭실학교 구장에서 열인 숭실 선발 반도축구단의 경기에서 판정에 불만을 품은 숭실 응원단이 경기장에 난입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숭실의 교장이던 미국인 목사 마페트까지도 흥분한 나머지 학생들과 함께 운동자에 뛰어 들었다. 이때 서병희가 나타나 유창한 영어로 마페트에게 무례한 짓을 나무라자 아이 시, 아이 시(I SEE 잘 알겠습니다)를 연발하며 학생들과 함께 쩔쩔매며 물러섰다. 전조선축구대회는 제6회(1925년)부터 서병희가 엮은 경기규칙집에 의해 운영 됐으며, 그는 심판부장을 맡아 이 땅에 심판의 권위를 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자가용차를 2대나 굴리며 멋장이 심판으로 날리던 서병희는 1937년 중국 천진에 건너가 계속 영국계 상사에 근무했는데, 해방 직후 그곳에 진주한 광복군에게 일가족 5명과 함께 피살되는 비운을 당하고 말았다. 그곳에서 조선교민회장까지 맡았지만 다까미네(高峰)라는 일본명으로 너무도 도도하게 살아 친일파로 오해 받았기 때문이었다. [본문으로]
  16. 경향신문 1978. 01. 30, 같은 기사. [본문으로]
  17. 동아일보 1931. 01. 01, 일즉 영국에 류학하야 『헬리버러』 컬네지를 졸업하고 옥스포드 대학을 졸업한 서병희씨는 다음과 가티 말한다. 영국인 본래의 성질이 『더듸나 완실하라』는 그들의 교육제도도 더데 보다도 완실하다고 할 것입니다. 국민교육에 긔초가 되는 『컬네지』는 대개 도시를 훨씬 떠난 교외에 위치를 두고 그 구역 안에는 학교 이외의 잡물을 금하야 주위를 학교 분위긔에 에워싸버립니다. 그리고 학생 대다수를 긔숙케하야 공동생활의 단체적 훈련을 밧게 하는 동시에 운동과 가튼 것은 필수과목으로 강제하야 사지백체에 어느 부분을 물론하고 균형적으로 건실히 발달시키고 외래의 잡념을 금하야 정신적으로 공평주의와 독립자존의 정신을 길러 감각성 잇는 신사의 도를 가르치어 대학에 들어 올때에는 별개의 건건한 신사적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야 그들의 점잔은 품이 어데로 보나 대법하고 평범하야 보입니다. 그러타도 조숙한 샌님 모양으로 얌전만하고 나약한 것도 아닙니다. 그 기풍이 늠늠하고 씩씩한 신사지요. 대학의 학풍은 그야말로 신사의 도 그것이 꾸려감으로 문란한 일이 도무지 업습니다. [본문으로]
  18. 위의 같은 기사. [본문으로]
  19. 스포츠에픽 2013. 09. 10. 같은 기사. [본문으로]
  20. 경향신문 1978. 01. 30, 같은 기사. [본문으로]
  21. ①고종실록, 1882. 06. 18. 趙康夏를 全羅道觀察使, 洪祐昌을 京畿道觀察使, 洪淳聲을 開城府留守, 金善弼을 江華府留守, 鄭岐源을 統制使, 李載元·李秉文·趙敬夏를 都摠管, 鄭顯奭을 慶州府尹, 金元性을 驪州牧使, 任孝準을 豊德府使, 李命宰를 南陽府使에 임명하다. ②고종실록, 1883. 02. 26. 京畿道觀察使 金弘集의 所報에 따라 通律宣惠廳 辛巳條 大同米上納米 750石은 每石當 10兩씩으로 代錢上納케 하다. [본문으로]
  22. 경향신문 1978. 01. 30, 같은 기사. [본문으로]
  23. 정치국 제63호, 국사편찬위원회 Direction PolitiqueN° 63Séoul, le 1er Juillet 1893.Tableau statistique de la population étrangère en Corée.1 tableauMonsieur le Ministre,J'ai l'honneur de transmettre à Votre Excellence le tableau statistique de la population étrangère résidant en Corée.Les Japonais sont, de beaucoup, les plus nombreux. Ce sont, en général, des artisans, des pêcheurs, des bateliers et des petits marchands.Les Chinois, qui viennent en seconde ligne, se divisent en ouvriers et petits boutiquiers.Les Américains sont, pour la plupart, membres des sociétés bibliques protestantes;ils habitent des maisons européennes plus confortables et plus spacieuses que le Commissariat de France, ont beaucoup d'enfants et font peu de propagande religieuse.Sur les 45 Anglais, plus des trois quarts sont missionnaires appartenant à la « High Church » d'Angleterre. Ils portent le même costume que nos protégés et sont assez remuants.Quant aux étrangers appartenant aux autres nationalités, ils sont tous membres du corps diplomatique et consulaire ou bien négociants.Les femmes et les enfants sont compris dans le tableau ci-joint.Je suis avec le plus profond respect, Monsieur le Ministre, de Votre Excellence, le très humble et très obéissant serviteur.H. Frandin.Son Excellence, Monsieur Develle, Ministre des Affaires Etrangères, etc., etc., etc. Paris.조선 주재 프랑스 공화국 공관정치국 제63호 서울, 1893년 7월 1일 장관님,조선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통계표를 귀하에게 송부하는 바입니다.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한 격차로 일본인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장인, 어부, 뱃사공, 상인들입니다.두 번째로 많은 중국인들은 주로 노동자들과 소매상인들입니다.미국인들은 대부분 개신교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로 프랑스 공관보다 안락하고 넓은 유럽식 주택에서 거주하며, 아이들이 많고, 선교 활동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영국인은 45명으로 이중 3/4이상이 영국 성공회(high church) 소속 선교사들입니다. 이들은 우리 국민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으며 꽤 활동적입니다.그 외 외국인들은 모두 외교 영사단에 속하거나 무역업자들입니다.여자와 아이들에 대한 통계는 첨부한 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H. 프랑댕파리의 외무부 장관 드벨 각하께, 등등 [본문으로]
  24. 제임스 스캇(James Scott)은 1884년 인천 주재 영국 부영사로 한국에 들어와 1892년까지 9년간 머물렀다. 1891년 영한사전(English-Corean Dictionary, being a Vocabulary of Corean Colloquial Words in Common Use)을 편찬하였다. [본문으로]
  25. 국사편찬위원회, 英國 艦弁博斯衛를 延聘하야 英語學校의 敎習과 警務의 佐辦할 請議書, 右는 昨年夏間븟터 英國 艦弁博斯衛가 英語學校生徒의 體操를 演習케 하고 警務廳巡檢의 技藝를 敎導하야 效勞가 旣多하온데 該艦弁을 仍爲延聘하야 英語生徒와 警務巡檢의 才藝를 成就케함이 妥合하기로 昨年九月의 該艦弁을 訂約延聘할 意로 英公館에 知照하얏더니 該覆을 現接하온즉 該弁延聘하는 合同을 訂送하라 하얏기로 該合同草件을 添附하야 會議에 提出事.大朝鮮外部內部學部 與大英水師 艦弁博斯衛互立合同 照得前由朝鮮外部 爲延聘英國 艦弁博斯衛 充當敎習之任 敎授學習英語之生徒習練操演 幷兼佐辦警務事任 玆經英海政衛門各爵大臣該定允准庸特互之合同議定各條開列于左 一 延聘博斯衛爲敎習 自本年三月一日起始 以一年爲滿任之期 若至滿期 預擬續聘 則應由朝鮮外部大臣 照會英總領事 轉申辦理.二 議定敎習薪水 每月一百五十元 於月底 由朝鮮海關發給 其于居住屋宇 則由敎習自賃 朝鮮政府無庸給與租金.三 敎授生徒 於總敎習 轉傅其學校之該管官員所指點者 在敎習則必從而爲之 佐辦警務於顧問官 轉傅其廳之該管官員所指點者 在敎習亦必從而爲之.四 如於合同一年未滿期內 敎習若有誤事之處 朝鮮政府擬辭其任 則應由朝鮮外部大臣 會同英總領事 商量辦理.建陽二年三月一日. 西曆一千八百九十七年三月一日. 外部交涉局長 金珏鉉. 內部地方局長 金重煥. 學部學務局長 韓昌洙. 英國水師 艦弁博斯衛. 議政府贊政外部大臣 李完用. 議政府參政內部大臣 南廷哲. 議政府贊政學部大臣 閔種默. 議政府議政 金炳始 閤下 査照. 建陽二年三月十六日. 奏七十三. [본문으로]
  26. 朝鮮總督府警務局, 國外ニ於ケル外容疑朝鮮人名簿, 彰文閣, 1978, 76쪽, 김종상(金鍾商) 은 1881년 1월 18일생으로 서울 교북동 108번지에서 태어났다. 1914년 상해로 건너가 영국 해군 통역사로 일했으며, 이후 귀향하였다가 1920년 1월 다시 상해로 들어가 임시 정부에 투신하였다. 상해 미국인 지역인 동유항로 621번지에서 기거하면서 임시 정부 활동을 하고 있다. 민족주의와 배일 사상을 가지고 있다. [본문으로]
  27. 윤경헌, 최창신, 국기 축구 - 그 찬란한 아침, 국민체육진흥공단, 1997, 1900년경에 영어학교를 졸업한 김종상씨의 증언에 의하면 궁내부 참리를 비롯하여 어전통역관 등 외국어 학교 출신자들, 또는 축구 동호인들이 휴일을 이용하여 훈련원과 삼선평 등지에서 영국인 교사의 지도로 축구를 배우며 공차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 뒤 김종상씨는 1906년 봄 황성기독교청년회에 들어가 운동부를 조직하는 한편 황성기독교청년회 축구팀 주장을 지내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 이 책은 1986년에 대한축구협회에서 발행한 한국 축구 백년사를 그대로 옮겨 놓았다. 토씨만 약간 바꿨을 뿐 문장은 그대로 똑같다. [본문으로]
  28. 어전 통역관은 어전 통사라고 하며, 중국어 통관을 말한다. 고종 27년 고사에 등장하고 그 뒤로 언급된 기록이 아직은 없다. 대한제국이 출범한 직후에는 보통 통관이라고 불렀고, 1899년에 궁내부 직제를 개편하면서 번역과가 증설되어 영어 통관을 번역관이라고 불렀다. [본문으로]
  29. 파하생, 동아일보 1929. 01. 01, 한말전후의 조선체육계 십년이전을 회고함 1. 씨름, 택격, 궁술, 추천 등 춘하삼절의 운동과 남자의 연날리기, 여자의 널뛰기 등 동절 운동에 대하야는 조선 고대로부터 전하야 오는 고유의 운동이거니와 문호개방과 아울러 외래의 운동이 조선에 수입된 것은 최근 삼십년 전후의 일이니 그 중에 가장 오랜 것은 지금 우리가 흔히 행하는 소위 우리식 축구이다. 당시의 축구단체로는 33년전 정유년에 궁내부 참리와 어전통역 등의 벼슬 가진 외국어 학교 출신들로 조직 대한축구락부라는 것이 교시이었다. 그후로 대창구락부와 사직골위대, 새문축구단 등이 족생하였으니 그 당시 상대팀은 황성기독교청년회관과 배재학당 및 외국어 학교 등이었다. 그 당시에 경기장은 일정한 무슨 촌법이 없음은 물론이오, 문에 대하여도 광과 고가 일치하지 않고 문지기 키가 높이의 한정이오, 문지기의 한발 심(尋)이 넓이의 한정이었다. 페날티 킥이니, 골 에리어 라인이니 하는 선은 커녕 하프라인이며 터취라인도 없었으며, 골 주(기둥)는 선수의 두루막이나 모자를 모아 놓아서 문의 양주를 표하였고, 경기 용어는 골키퍼를 문지기라고 하였으며, 윙은 공을 문에 넣는다고 해서 넘포라고 불렀다. 선수의 복장은 놀라지 마라. 머리에는 상투 튼 위에 망건 감고, 탕건 쓰고 의복은 조끼 입은 통상복 그래이었으며, 한 팀의 선수가 제한이 업었으니 11명이라는 규칙까지도 모르던 것이 분명하다. 덮어 놓고 축구 매취를 하자고 택일한 뒤에는 당장에 모인 사람 수로써 정원을 삼고 그 후로 지작하는 선수는 상대편에도 그 수효에 달하기를 기다려 얼마든지 추가하여 시작할 때 8,9명 되는 한편 끝날 때에는 한 편이 15,6명 되는 일이 항례이며 선수의 직명을 말할 줄 모르고 참모격의 주장이 도안을 그려 가지고 누구는 어디를 지키고 누구는 어디를 몰며 누구는 어디를 맡는다고 배치하여 경기를 하였다. 그뿐이랴 경기의 시간이 일정하여 있지 않고 다만 차기 싫을 때까지 문에 볼이 들어 갈 때마다 문을 박고아차다가 쌍방협의에 의하여 비로소 중지하고 승부는 점수 많은 편이 기기게 되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약자가 백기를 들 때까지 경기는 계속 되는 원시시대 같은 무법의 경기를 하였던 것이다. 이 얼마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냐. 기술은 어떠 하였는가 볼을 드리블링 한다든가 패스하는 것은 염두에도 없었으며, 높이 차는 것을 들어 뽕이라고 불러 이 들어 뽕을 제일 장기로 알아 주었으니 이 이름은 '들어서 뻥하고 높이 찬다'는 때문이다. 축구의 초창시대 이야기가 너무 길어진다마는 이 운동이 제일 인연을 깊이 맺었고 도 현금에도 그러함으로 약간을 더 소재하고 제를 옮기려고 한다. 그 후로 생긴 팀은 지금 서태문 외 갑자철공장주 이승복씨 등의 일광구락부가 생겨 금강 한양구락부로 변하였으니 이것은 22년전 융희4년의 일이다. 일광 팀의 이씨는 당시 청년학원(지금은 없어진 학교의 학생으로 당대 축구계의 공수에 능란하기로 제일 가는 명선수)이었으며, 수비에는 얼마 전 조선축구단의 감독이던 이연표씨이오, 몰기로 유명하기는 지금 철도국에 있는 김동철, 문지기로는 현 중외일보에 있는 피교설씨 등이 강장이었다. 당대 학원 선수로 일세에 명성을 떨치기는 아까 말한 청년학원의 이승복, 배재학당의 신국권(현재 연전체육주임 신기준씨), 황성기독교 청년학관의 허성(지금 미주 유학중)씨 등이오. 보성초년시대에는 김상익 임흥순씨 등이 일류이었다. [본문으로]
  30. ①국사편찬위원회, 통첩 1897. 10. 07, 陞正三品 宮內府參理官 梁宗彦, ②국사편찬위원회, 통첩 1897. 11. 04, 宮內府參理官 李學均 依願免本官, 三和郵遞司主事 李承基 任宮內府參理官 敍奏任官三等. [본문으로]
  31. The Morning Carm, No89, Vol12 (1901. 08), 82쪽, Correspondence. 1. Chemulpo: March 21, 1901. Dear Mr. Editor, I here whith send you a few more photographs which you may find interesting enough for the pages of Morning Carm. During the winter I have been able to do much in the way of photography, but after Easter I am hoping to get to Kang Hoa for a the day's visit, when there will be heaps of photographs to take and photography of interest to write about. The photographs enclosed are as follows:... 1. Kang Hoa School football team, which has been carefully trained for some years by Rev.G.A Bridle. The boys play a very good game, and after a little more training would be quite capable of taking part in some of the league matches in England. [본문으로]
  32. 신부 시드니 파커(Sidney J. Parker)의 통신문이 1901년 3월 21일 작성되었으면서도 8월에야 실린 이유는 조선 성공회에서 더 모닝 캄 원고를 영국 성공회로 보내면 영국 런던에서 더 모닝 캄을 인쇄하여 책자로 다시 조선 성공회로 보내는 체계였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33. 원문에 some years라고 하였다. few years는 보통 2년 이상을 말하고, some years는 보통 3년 이상을 말하며, several years는 some years보다 더 오랜 경우에 쓴다. [본문으로]
  34. 김원태, 개벽 5호, 1920. 11. 01, 또한 1개의 뽈은 拾圓쯤으로 살 수 잇스니 설비가 지극히 간단하고 비용이 적은 점에 대하야서는 爲先 이 운동에 지나는 것이 업는 줄로 안다. [본문으로]
  35. 시대일보 1924. 05. 15, 통계에 나타난 조선인의 생활난, 제일 적은 수입이 이십이원이오, 가장 많다는 것이 오십원 가량. 경성부에서 훈련원과 봉래정에 사는 조선 사람의 생계에 대하여 조사를 하였는데, 가장 빈약한 사람의 일개월 수입이 겨우 십이원 오십전인데 작년 여름에 비하면 오원 오십전이나 줄었고, 가장 고급 생활을 한다는 사람이 현재 사십칠원 오십전인데 작년 여름에 비하여 팔원이 줄었다. 이와 같이 몸뚱아리 하나 밖에 없는 사람의 경우 방탕한 젊은이의 저녁 한끼 값도 못되는 생활비가 날마다 줄어 들어 가니 어떻게 많은 가족을 데리고 생활할 수 있으랴. 그들은 거기 따라서 지출도 말할 수 없이 적고 그들이 일상 먹고 쓰는 것은 쌀, 나무숯 그뿐이요 다른 기호, 조미, 의복용 돈은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데 지금 그 아흡 계급에 대하여 작년 여름과 지난 겨울에 수입비교와 지출 비교를 보면 아래와 같다. [본문으로]
  36. 국사편찬위원회, 각급 학교 학생의 선발기준과 나이, 공문편안, 각사등록 근대편, 本月二十一日學務衙門牒報內開 先設師範小學兩學校于京內 各置敎授一員 擬選師範四十人 小學六十人 且外國語學校 一體開學 擬置學員各四十人 而該各學校 原有學員 加選各二十人 以足四十人之數 竝由各衙門 薦拔幾人 則恐合於廣取人才之道故 備文牒呈 通知各衙門 妙揀師範學員各四人 小學學徒各六人 漢語日語英語學員各二人 薦送于各學校事等因前來 準此査學校創設 允爲人才作成之方 學員揀選 實合公道廣取之意 貴衙門亦應諒悉 望須妙揀學員 其齡年本貫居住父名及薦主保人 詳明懸錄 準於來九月初五日內 如數起送學務衙門宜當者.後. 師範學員 自十七八歲 以至二十二三歲 能有漢文之力者 小學學徒 自九歲十歲 以至十三四歲 稍知漢文字者 外語學徒 自十四五歲 以至二十四五 或六七歲 能有漢文之力者.甲午八月二十八日. 第四十四號 [본문으로]
  37. 국사편찬위원회, 관립 영어학교에 필요한 수입 비품을 면세토록 요청, 각사등록 근대편, 爲關飭事 昨接學務衙門來關內開 官立英語學校所需筆墨等物 要仁川港美商陀雲仙 業經購貿 先爲到港 玆將諸品開錄 竝行關移請 煩貴大臣査照 轉知總稅關 將該物確許免稅 交付海關可也等因 準此査 係是公用物料 玆爲關飭 仰貴總務司 轉知仁海關 俾行免稅可也 須至關者 右關.計開, 洋墨 十八甁一箱, 靑鉛筆 二同, 鉛筆 一百五十同, 鐵筆 十匣, 墨水紙 一箱, 外務大臣 金. 總稅務司 柏. 開國五百四年三月二十六日. [본문으로]
  38. 권태억, 배항섭, 2) 海軍 軍事學校의 창설, 5.해연총제영의 설치와 해군 군사학교의 폐치, 갑오개혁 전후 군사제도의 변화, 제2부 갑오개혁 전후 정치 경제의 변화, 한국 근대사회와 문화1,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212쪽, 총제영에서 해방학당 혹은 해군학당(Royal Corean Naval School)을 설치하고 군함을 구입하려 하였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군함 1척을 구입하려는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해군학당은 강화도 갑곶진에 세워졌다. 1892년 12월 해군교관 파견 요청을 처음으로 할 때는 수군 몇 개 소대를 훈련시킬 계획이었으나, 이 때는 해군학교를 만들고 학도를 모집하여 교육시키겠다는 것으로 그 계획이 진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 사이에 해군학교 설치령이 공식적으로 내려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해군학교 설치령은 1893년 3월 22일 발포되었다. 1893년 5월 1일 독판교섭통상사무 남연철은 총세무사 모건(F. A. Morgan, 馬根)에게 해군 군사학교 건립비용으로 6,000원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해군학교에서 학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10월부터였음을 미루어 볼때 학교 건물은 늦어도 1893년 10월에는 완공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영어 교육은 영국인 허치슨(W. Flon Hutchison)이 담당하였다. 그는 홍콩 우체국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으며, 조선 해관에서도 촉탁으로 근무하다가 묄렌도르프가 해임되자 일시 귀국하였던 영국인으로 교장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애초에 15세 이상 20세 이하의 생도 50명과 수병 500명을 모집하여 훈련시킬 예정이었다. 그러나 처음에 모집하였을 때 응모한 학도는 38명에 불과하였다. 이에 따라 총제영에서는 지방 중둥관리의 자제를 중심으로 14~20세의 신체가 장건한 학도들을 무시험으로 모집하고 매월 식료비와 수당을 지급하며 통학 가능한 자에게는 통학을 허용하였다. [본문으로]
  39. 김옥룡, 대한성공회 강화선교 100년사, 대한성공회 강화선교 100년 기념사업회, 1993, 37쪽, 교회 행사 때마다 축구시합을 하고 축구가 전파되어 1900년대 초에는 강화지방에서 전국 축구선수가 배출되기도 하였다. [본문으로]
  40. 2003년에 나온 대한성공회 강화선교 100년사 보완 자료집에 「강화의 축구경기 시작은 성공회 선교사들이 어린 학생에게 가르치기 시작한 때와 서울에 축구가 전파된 시기가 대충 비슷한 시기인 1890년」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는 좀 더 검증이 필요하다. 영국제국 왕실 해군 군종 사제였던 성공회 찰스 코프는 조선 선교를 목적으로 1889년 11월 1일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켄터베리 대주교 프레더릭 템플(Frederick Temple)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고 조선 교구장이 되었다. 1890년 9월 29일 주교 찰스 코프는 6명의 신부들과 함께 인천부 제물포에 입항하였다. 주교 찰스 코프는 서울 정동에 주거지를 정했으며, 신부들은 서울과 인천으로 담당 지역을 나누어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렇기에 입국하자 마자 조직이 두 군데로 분산된 상태에서 한성과 인천 전역에서 동시에 축구 선교에 나섰다고 보기 힘든 면이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주교 찰스 코프가 입국한 그 다음 날인 1890년 9월 30일에 송학동 인천 성당 축성식을 하고 그 다음 달인 10월 18일에 성당 부근에 성 누가 병원을 개원하고, 인쇄소를 만들어 주교 제임스 스캇의 영어 사전 편찬에 가장 먼저 착수할 정도면 이전 성공회 신부들이 상당한 선교 기반을 구축해 놓았고, 주교 찰스 코프 일행이 입국 전에 세밀한 계획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이 정도 준비 수준이면 이미 축구 선교를 진행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조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청 고향은 황해도일까?  (0) 2022.10.27
허구 인물 전우치와 시  (0) 2022.10.27
전우치는 실존 인물인가?  (0) 2022.10.27
하멜, 조선왕국 보고서  (0) 2021.12.05
하멜 표류기, 헨드릭 하멜 보고서  (0) 2021.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