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파
1653년
6월 18일
인도 총독과 평의회의 지시로 우리는 스뻬르베르호(the Sperwer hawk)를 타고 자카르타(Batavia)에서 대만(Taijoan)으로 항해했다. 물러 날 니꼴라스 베르베흐경의 후임인 대만총독 꼬르넬리스 께이사르경이 승선해 있었다.
7월 16일
순조로운 항해로 대만 정박지에 도착하여 꼬르넬리스 께이사르경이 하선하고, 화물을 풀었다.
7월 30일
대만에서 일본(야빤Iapan)으로 가라는 대만 총독과 의회의 명령에 따라 신의 이름으로 우리의 여정이 계속 되도록 빌며 떠났다.
7월 31일
날씨가 매우 좋았지만 저녁 무렵부터 대만 연안에서 폭풍이 불어오더니 밤새도록 더욱 거세졌다.
8월 1일
새벽녘 우리는 작은 섬 근처에 있었다. 섬 뒷편에서 피신할만한 곳을 찾아 닻을 내리려고 최선을 다해 시도했다. 드디어 우리는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서 성공했다. 하지만 우리들 뒤에는 커다란 암초가 있었고 그 위로 파도가 크게 요동치며 굉음을 냈기에 닻줄을 조금만 풀어야 했다. 선장은 이 섬을 순전히 우연하게 발견했다. 운 좋게 그는 배 뒤편에서 창문 밖으로 보았는데, 아니었다면 우리는 섬에 좌초되어 배를 잃었을 것이다. 매우 어두웠기에 나중에야 우리가 섬에서 겨우 화승총 사정거리(100~200m) 정도 밖에는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날이 밝았을 때 우리는 중국 연안과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완전무장한 중국군이 해변에서 행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그들은 우리 배가 난파되기를 바라던 중이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날 폭풍은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강해져 우리는 밤새도록 닻을 내린채 머물러야 했다.
8월 2일
날씨는 아주 잔잔해졌다. 그 중국인들은 여전히 많은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굶주린 늑대들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또한 심각하게 닻과 줄에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었기에 더 큰 문제를 막기 위해 닻을 걷어 올리고 돛을 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더 이상 그들을 보지 않아도 됐으며 연안에서 멀어 질 수 있었다. 그날, 뒤이어 바람은 아주 약했다.
8월 3일
우리는 해류가 우리를 또다시 약111Km(20 mijlen)나 뒤로 표류하게 했다는 것을 발견했고, 다시금 대만 연안을 봤다. 우리는 중국과 대만 사이로 항로를 정했다.
20 mijlen: 네델란드식 마일. 1mijl=5.5556km
8월 4일~10일
날씨는 매우 조용하고 평온했으며, 우리는 중국과 대만 연안 사이를 이동했다.
8월 11일
우리는 다시 남동쪽에서 불어 오는 사나운 바람을 만나게 되어 동-북동-북 방향으로 항로를 택했다.
8월 12일~14일
날씨는 거친 비와 바람으로 점점 나빠져서 우리는 가끔 돛을 올리거나 반대로 그러지 못했다. 바다가 너무나 거칠어져 견딜 수 없을 지경이기에 우리는 하나의 연안 또는 다른 연안으로 조난당하지 않기 위해 돛없이 그저 표류해야만 했다.
8월 15일
바람이 아주 심해 바다가 포효함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말을 건넬 수 없었다. 우리는 돛의 한움큼도 올릴 수 없었고, 배는 점차 물이 새기 시작했다. 우리는 젖지 않도록 물을 퍼내기에 바빴다. 바다가 매우 흉포했기 때문에 그 시간 우리는 너울거리는 높은 바다에서 침몰할 거라고 생각했다. 해질녘 높다란 파도는 거의 배와 배 뒤 보(고물보)를 휩쓸었다. 파도가 뱃머리 기움돛대를 잃게 만들기에, 뱃머리에서 그것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뱃머리 기움돛대의 돌출된 부분을 단단하게 조이려고 했으나 배가 크게 흔들리고 높은 파도가 출렁거려서 모든 노력은 헛되고 말았다. 우리는 높은 바다를 피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며, 뱃머리 삼각형돛을 약간 올리는게 좋다고 생각했다. 이 방법이 우리 선원, 배와 회사화물을 가능한한 또한 높은 파도로부터 조금이라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도움 외에 이것이 최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큰 파도가 뒤에서 뱃머리삼각형돛을 올리던 선원들에게 물결쳐 와서 거의 활대를 휘몰아 가고 배에는 물이 가득 찼다.
선장이 외쳤다: "여러분, 하나님에게 의지하세요." 파도가 이렇게 우리를 두 번 친다면 죽게 된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더 이상 파도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망루꾼이 "육지다, 뭍이다"라고 외쳤을 때 파도는 야간당직자의 두 안경을 바로 깨뜨렸다. 하지만 어둠과 굵은 빗줄기로 인해 우리는 육지를 일찍 알아 차리지 못했다. 우리는 키가 회전했기 때문에 즉시 닻을 내렸다. 그렇지만 파도, 바다의 깊이와 격렬한 바람 때문에 닻은 고정되지 않았다. 순간 우리는 세 번의 충격과 함께 해안에 부딪혔고, 배는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졌다. 갑판 아래 선실에 있던 선원들은 최후로 할 수 있었던,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올라올 기회를 갖지 못했다. 갑판 위 선원들은 배에서 뛰어 내렸고, 다른 선원들은 이리저리 파도에 삼켜졌다. 우리 15명이 해안가에 다다랐을 때 대부분 알몸으로 심한 부상을 당했다. 처음에는 더 이상 그들의 생명을 구조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바위에 앉아 있다가 여전히 난파선에 갇힌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들었지만 어둠 속에서 누구도 찾을 수 없었고 그들을 도울 수 없었다.
뱃머리 기움돛대: 제1사장 bowsprit
뱃머리 삼각형돛: 제2사장에 달린 돛 jib
제주도 체류
8월 16일
새벽에 그런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해안을 따라 걸으며 혹시라도 더 뭍으로 올라온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고함쳤다. 여기저기서 적은 수가 나타났다. 36명만이 남겨진 것으로 보였으며 대부분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다. 난파선을 살펴봤다. 한 사람을 발견했는데 큰 두 기둥 사이에 끼어 있었다. 우리는 즉시 그를 구해냈다. 그의 몸이 아주 심하게 눌려 있었기에 3시간 후에 죽고 말았다. 우리는 슬프게 서로를 쳐다 봤다. 15분도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름다운 배는 산산히 부서졌고, 우리는 15분도 되지 않은 사이에 64명의 영혼이 36명으로 줄어들었다. 우리는 즉시 뭍으로 밀려 왔을지도 모를 시신을 수색했다. 우리는 해안선에서 10~12길(10fathoms 약18m) 떨어진 곳에서 한 팔을 머리 아래에 둔 암스테르담출신 선장 레이니어 에흐베르스를 발견했다. 우리는 여기저기서 발견한 7명의 죽은 선원들과 함께 그를 즉시 묻어 줬다.
A fathom: 1.698 미터
착륙지점: 대야수(大也水), 지영록(知瀛錄)- 제주목사 이익태(李益泰)
우리는 또한 뭍으로 밀려왔을 음식을 찾아 나섰다. 지난 2,3일간 좋지 않은 날씨 때문에 요리사가 요리를 할 수 없어서 조금 밖에 먹지 못했다. 우리는 오직 밀가루 한 포대와 고기로 채워진 통 하나와 베이컨이 들어 있는 통 하나, 여기에다 달콤한 스페인산 포도주가 든 작은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포도주는 부상자들에게 유용했다. 우리가 절실하게 필요로 한 것은 불이었다. 우리는 살아있는 영혼이라고는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무인도에 있다고 생각했다. 정오 무렵 비바람이 잦아 들자 우리는 뭍으로 많은 물건들을 운반해 와서 돛포 조각들로 천막을 쳤다.
8월 17일
힘없이 함께 모여 일본인들이기를 바라면서 우리를 도와줄 사람들이 있는지 주위를 둘러봤다. 배가 부서져 수리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 섰기에 다른 방법은 없었고, 이 길로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대포 사정거리(500m) 정도 거리에서 한 사람을 봤을 때는 정오가 되기 바로 전이었다. 우리는 그를 손짓하며 불렀으나 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곧바로 되돌아 가버렸다. 이내 정오에 다른 세 사람이 화승총 사정거리 정도까지 다가왔지만 그들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신호를 보내고 행동하는지 이해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들 가운데 용기있는 사람이 그들에게 걸어가 총을 겨누고서 마침내 우리가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불을 얻었다. 그들은 중국인처럼 옷을 입었지만 말총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해적소굴에서 아니면 추방된 중국인들에게 최후를 맞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매우 두려웠다. 해질 무렵 무장한 사람들 100여 명이 천막에 다가왔다. 그들은 우리 인원을 세고 나더니 밤새도록 천막 주위에서 우리를 지켜봤다.
해적소굴, 추방된 중국인: 중국 광동성을 중심으로 한 중국인 해적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도 서구 열강들의 군함이 해적 퇴치에 나서야 했을 정도로 동남아해(중국해)에서는 문제거리였다.
8월 18일
아침에 그들은 큰 막사를 세웠고, 정오에 1,000명 아니면 2,000명의 기병이 나타났다. 그들은 우리 천막 주변에 막사를 만들고 나서 일렬로 늘어서더니 경리원, 상급 키잡이, 부갑판장, 급사를 붙잡아 화승총 사정거리 정도 떨어져 있는 상관에게 데려갔다. 우리가 네델란드에서 양들에게 하듯이 각각 선원들의 목에 방울 달린 쇠사슬을 감았다. 그들은 손과 무릎으로 기어서 사령관 앞으로 가도록 강요당했으며, 얼굴이 땅에 닿도록 눌려 밀려졌다. 병사의 귀청이 터질듯한 호통소리는 우리들 온몸을 전율케 했다. 천막 안과 근처에 남겨진 우리 동료들은 이 것을 듣고 보았을 때 서로 말하기를: "우리 상급선원들이 먼저 죽임을 당할 것이고 우리도 따라서 살해당할 것이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한동안 있은 후에 그들은 우리 동료들이 무릎 꿇고 앉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사령관은 우리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으나 우리 동료들은 그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야빤 낭가사께이키(일본 나가사키)'로 가기를 원한다고 손으로 가르키고 몸짓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가 알아듣지 못했기에 모두 소용 없었다. 그들은 '야빤(일본)'이란 단어를 알지 못했으며 그들은 그 나라를 왜나라(Ieenare) 또는 일본이라고 불렀다.
판관이 소주(arrack)를 한 잔씩 따라주고 그들을 천막으로 돌려 보냈다. 곧바로 그들은 와서 무엇을 먹는지 천막 안을 살폈지만 고기와 베이컨이 절반쯤 찬 두 통 뿐이었고, 그들은 그것을 즉시 판관에게 보였다. 한 시간 정도 후에 작은 분량으로 나눈 쌀밥을 가져왔다. 그들은 우리가 배고플 것이고 (한 번에) 많은 양은 아마도 우리를 해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오가 지나 밧줄을 든 무리들이 나타나자, 우리를 묶고나서 죽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너무나 소스라치게 섬뜩했다. 하지만 그들은 부산한 소리를 내며 아직 쓸만한 물건들을 가져오기 위해 난파선으로 갔다. 밤이 되자 그들은 먹으라고 쌀을 조금 주었다. 정오 무렵 키잡이는 위도를 측정해 위도 33도 32분에 위치한 제주도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아라크(arrack): 야자나 당밀로 만든 중동지역과 동남아시아의 증류주. 몽골에 의해 중동 일부가 점령당하면서 중동에서 증류주 기술이 퍼져 고려에도 들어 왔다. 조선에서는 완전히 정착하였다. 하멜 일행은 경험이 적어 재료는 전혀 다르지만 술맛이 비슷하기에 중동지역의 아라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판관: 노정. 제주목사 이원진의 상소문, 효종실록 4년 8월 6일 무진조(1653년 9월 27일)
8월 19일
그들은 여전히 물건들을 섬으로 옮겨 말리기에 바빴다. 쇠붙이가 달린 목재를 불에 태웠다. 우리 상급선원들은 판관(노정)과 대정현감(권극중)에게 갔다. 그들은 쌍안경들을 바쳤고, 포도주와 함께 바위 틈에서 찾아 낸 회사의 은접시도 가져갔다. 그들은 포도주를 많이 맛보고서는 기분 좋아하며 모든 친밀감을 보이고 확인한 후에 우리 선원들을 돌려 보내 준 것으로 보아 포도주를 좋아한다고 여겨졌다. 그들은 또한 은접시를 되돌려 주었다.
대정현감: 권극중. 제주목사 이원진의 상소문, 효종실록 4년 8월 6일 무진조(1653년 9월 27일)
8월 20일
그들은 쇠붙이를 얻기 위해 배와 널부러진 목재들을 불태웠다. 그러던 중 화약이 장전되어 있던 대포 이문이 터졌다. 상관들과 병사들이 피했다가 금방 되돌아 왔다. 그들은 몸짓으로 또 폭발할 것들이 있는지 물었고 우리는 그들에게 확실하게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8월 21일
사령관은 우리들 몇 사람에게 우리 천막에 있던 물건들을 봉할 수 있도록 운반해 오라고 했다. 운반이 끝나자 우리들 앞에서 봉했다. 우리 선원들은 한참 그대로 그 곳에 앉아 있었고, 난파선 인양 작업 동안에 모피, 철제류 같은 훔친 것들을 등에 묶은 도둑들이 사령관 앞으로 끌려 왔다. 물건들이 흩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암시로 우리들 앞에서 처벌했다. 보통 아이들 팔뚝만한 굵기의 한 길(a fathom=1.698m)쯤 되는 막대기로 발바닥을 때렸다. 매우 심하게 때려 그들 중 일부는 발가락이 떨어져 나갔다. 각각 30대에서 40대씩 맞았다.
오후에 그들은 우리가 떠나야만 한다고 알려왔다. 말을 탈 수 있는 사람에게는 말이 주어졌고 부상으로 말을 탈 수 없는 사람은 들것에 실렸다. 정오가 지나 기병과 보병의 엄한 호위를 받으며 떠났다. 저녁에 우리는 대정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유숙했다. 음식을 먹고 나서 숙박할 집으로 갔는데, 여관이나 숙소라기보다는 마굿간에 더 가까워 보였다. 우리는 약22.2Km(4 mijlen) 정도를 이동했다
8월 22일
동틀녘 아침 우리는 다시 말을 타고 가며 작은 성에서 식사를 했으며, 근처에는 목선 두 척이 정박해 있었다. 오후에 우리는 제주목사(이원진)가 주재하는 목관에 도착했다. 그들은 주지사를 목사라고 불렀다. 도착하니 우리를 현청 아니면 관청건물로 바로 이어지는 앞 광장으로 데려갔고, 우리는 숭늉 한 잔을 마셔야만 했다. 이 것이 마지막 음료이고 곧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장한 3000여명의 병사들이 서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무시무시했다. 그들은 중국식 혹은 일본식 복장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결코 듣거나 본 적이 없었다.
작은 성: 제주 목관까지 가는 길에서 배가 정박해 있는 성은 거리상 명월진 성과 애월진 성이 가장 가까이 있다.
즉시 경리원과 미리 정해진 절차를 숙지한 호명된 세 사람이 목사 앞으로 나가 부복했다. 한동안 그 상태로 있더니 관청의 큰 대청 위로 올라 오라고 크게 소리치며 손짓했다. 그는 왕처럼 좌석에 앉아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싶은지 손짓하며 물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일본 나가사키로 가고 싶다고 손발짓을 반복했다. 그러자 무언가 알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방식으로 남아 있는 우리들 중 네 사람을 목사 앞으로 데려가 같은 방법으로 질문했다. 우리의 대답을 몸짓으로 알리려고 최선을 다했다. 전에도 그랬듯이 우리는 서로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우리를 평생 동안 귀양살이하다 죽은 왕의 숙부가 살았었던 집으로 데려갔다. 그가 유배됐던 이유는 왕위를 찬탈하려다 고향에서 쫓겨났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가 기거하는 집을 대규모 부대로 삼엄하게 지키면서 식량으로 하루에 (각자에게) 약468그램(1cattij=약625g) 정도의 쌀과 밀가루를 줬다. 그들은 적은 양의 반찬을 줬지만 우리는 그것을 잘 먹을 수 없어서 반찬 대신에 소금과 물을 함께 먹어야 했다.
왕의 숙부: 인조의 숙부 광해군.
왕위 찬탈 시도: 유효립을 중심으로 강화도에서 귀양 중이던 광해군 복귀를 꾀하다 실패한 사건.
나중에 알게 됐지만, 목사는 선하고 사려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일흔 살 정도로 한양에서 왔으며 조정에서도 존경받고 있었다. 그는 왕에게 우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교지를 기다리는 상소문을 쓰겠다고 손동작으로 알려줬다. 상소문이 바다로 약66.6~72.2Km(12~13 mijlen), 육지로 약388.9Km(70 mijlen)나 걸리는 까닭에 왕의 답지가 신속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기에 우리는 목사에게 가끔씩 고기와 다른 반찬들을 주도록 간청했다. 물과 소금만을 섞은 쌀로는 우리가 생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약간의 산책과 몸을 씻고 옷을 세탁할 수 있게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자 바로 허가하여 6명씩 교대로 외출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종종 우리를 불러 서로의 언어로 묻고 대답함으로써 막히기도 했지만 우리는 점차 서로간에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가끔 연회와 향연을 베풀어 주고 왕의 교지가 하달되는대로 바로 나가사키로 떠날 수 있음을 완곡하게 말하면서 날마다 기운을 북돋아 주었기에 우리는 그렇게 슬프지 않았다. 그는 또한 부상자를 치료해 주었고, 기독교인으로서 많이 부끄러워 해야 할 정도로 이교도들에게서 베품을 받았다.
10월 29일
오후, 목사가 경리원과 키잡이, 이발사를 호출했다. 그들이 목사에게 갔을 때 길게 붉은 수염을 기른 사람을 발견했다. 목사는 그들에게 그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고, 그들은 그가 우리와 같은 네델란드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곧바로 목사는 웃으면서 이 사람은 조선 사람이라고 몸짓 또는 말을 했다. 서로간에 수 많은 대화와 몸짓을 한 후에야 여태껏 매우 난처한 입장으로 침묵하고 있던 그 사람은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질문했다. 우리는 그에게 "암스테르담에서 온 네델란드 사람들이다"라고 응답했다. 나아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중이었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대만에서 나가사키로 갈 작정이었다고 즉시 대답했다. 어쨌든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호했다. 과거 5일간의 폭풍우 때문에 우리는 이 섬에 좌초되었고 지금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기대했다.
우리는 그에게 이름과 어느 지방에서 왔으며,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는 "내 이름은 얀 얀스 벨떠프레이(Jan Janse Weltevree)이고, 리프(De Rijp) 지방출신이다. 1626년 네델란드에서 홀랜디아(Hollandia)호를 타고 (아시아에) 왔으며, 같은 해에 범선 아우버께르크(De Ouwerkerk)호를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역풍을 만나 조선 연안에 좌초 됐다. 우리는 물이 필요 했기에 딸린 배(자선子船)를 타고 뭍으로 갔다가 그 중 세명이 주민들에게 붙잡혔다. 딸린 배에 남아 있던 동료들은 곧바로 달아났고 배는 떠나 버렸다."라고 대답했다. 그가 말하기를 그의 두 동료는 17년 혹은 18년 후, 청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그들은 리프 지방에서 온 디르크 헤리스베르즌(Dirk Gijsberszn)과 암스테르담에서 온 삐떠르스 베르바스트(Pieterse Verbaest)였다.
그에게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 때문에 이 섬에 오게 되었는지 질문했다. 그는 왕도(한양)에서 머물렀다고 말했다. 그는 왕의 칙명을 받아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조사하기 위해 파견을 나왔다. 그는 왕과 다른 대신들에게 일본으로 보내 달라고 간청했었다고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를 제지했다. 그는 '우리가 만약 새라면 그곳으로 날아 갈 수 있다, 이 나라에서는 외국인들을 내보내지 않는다, 그들은 당신들에게 의복과 생활물품을 공급해 줄 것이며 당신들은 이런 방식으로 이 나라에서 생애가 끝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를 이런 식으로 위로하려고 노력했다. 우리가 만약 왕의 면전에 가게 될지라도 우리는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음므로, 통역인을 찾았다는 우리의 기쁨마저도 거의 슬픔으로 바뀌었다. 주목할만한 것은 이 사람은 쉰 일곱 혹은 쉰 여덟살로 모국어를 대부분 잊어 버렸기에, 우리는 그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으며, 그는 한 달여 간 다시 모국어를 배웠다.
목사의 명령으로 모든 앞서의 진술들을 벨떠프레이가 큰 소리로 통역해서 읽은 다음에 합당하게 문서로 작성했으며, 이는 다음 순풍에 조정으로 보내지게 될 것이다. 목사는 첫 배에 실려 올 대답을 기대한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매일 기운을 북돋아 주었고, 그의 바람대로 짧은 답지에 우리가 일본으로 떠날 수 있다는 대답이 들어가 있기를 ,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따라야만 했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오직 친밀함만을 보여 주었다. 그는 벨떠프레이와 관원 한 명 또는 고위 무관과 함께 매일 우리를 방문해서 무슨 일이 있지나 않은지 알려고 했다.
12월 초순
전임 목사의 3년 재임기간이 끝났음으로 신임 목사가 도착했다. 우리는 신임 목사가 새로운 법을 적용할까봐 걱정되어 몹시 근심했다. 날씨가 추워지고 우리가 약간의 의복만 가지고 있자 이전 목사가 우리에게 양말과 가죽 신발 한 켤레와 함께 길게 옷감을 댄 의복을 주었기에 추위를 견디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었다. 또한 전임 목사가 못쓰는 책들(폐지)과 큰 통의 기름을 주어서 겨울을 날 수 있었다.
송별회 만찬에서 전임 목사는 우리를 융숭하게 대접했으며, 우리를 일본이나 내륙으로 보내주지 못한 점에 대해서 벨떠프레이를 통해서 유감을 표시했다. 우리는 그가 궁궐에 도착하는대로 우리를 섬에서 궁궐로 데려가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기에 그가 떠나는 것을 지나치게 낙담하지 않아도 됐다. 우리는 전임 목사에게 그가 베풀어준 모든 호의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감사를 표했다.
신임 목사가 공식업무에 착수하자 추가적인 음식공급을 허락하지 않아 식사의 대부분은 약간의 쌀과 소금, 소량의 물로 차려졌다. 우리는 해상풍으로 인해 아직 섬에 있던 전임 목사에게 호소했지만 부임기간이 끝났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그는 신임 목사에게 편지를 작성했으며, 전임 목사가 머무는 동안에는 불평하는 것을 막기 위한 신임 목사로부터 몇 가지 반찬을 더 얻어 낼 수 있었다.
신임 목사 : 소동도(蘇東道 1592~1671)이다. 1653년(효종4년) 12월 초순(음력 10월 중순)부터 1655년(효종6년) 10월(음력 9월)까지 제주목사를 역임했다.
1654년
1월 초순
전임 목사가 떠나고 나서 상황이 악화됐다. 신임 목사는 우리에게 어떤 반찬도 없이 쌀 대신에 가루, 조와 보릿가루를 주었다. 우리는 반찬을 원했기에 조를 내다 팔았다. 날마다 우리는 3/4 분량의 보릿가루에 만족해야 했다. 동시에 6명 밖에는 나갈 수 없었지만 날마다 외출은 할 수 있었다. 추수철과 계절풍(몬순) 기간이라서 우리는 매우 낙담하며 [생존을 위한] 모든 수단을 찾아야 했다.
왕의 답지가 도착하기도 전에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섬에서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 것과 우리의 삶이 감옥에서 끝나는 것이 두려워 탈출할 가능성을 모색했으며, 아마도 필요한 모든 물건들이 실린 배가 한밤중에 해안가에 정박해 있었으면 탈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4월 말
이 일은 일어났다. 우리 선원들 중 일부, 그들 가운데 1등항해사와 다른 3명의 동료는 첫번째 (탈주) 시도를 했다. 일행 한 명이 배와 물때를 살피기 위해 담장을 넘었다. 개가 짖기 시작했고 아니면 다른 식으로든지 간에 그 때문에 경비대가 알아차렸다. 그들이 매우 삼엄하게 경계했기에 우리 동료들은 계속 진행하기도 전에 되돌아 와야만 했다.
5월 초순
다섯 명의 동료들[그 중에는 이전에 (탈주를) 시도한 3명이 있음]과 함께 (외출이) 허가된 키잡이는 도시로부터 멀지 않은 마을에서 필요한 모든 것이 실려 있는 배 한 척이 정박해 있는 것을 보았다. 즉각 그들은 한 사람을 숙소로 보내 각 자를 위한 빵 두 조각씩과 엮어 만든 물건[단순하게 꼬아 만든 줄]을 가져 오도록 했다. 그들이 다시 함께 했을 때 배 안에서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채 각자 물 한 모금씩 마시고서 (탈주 진행을) 계속했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를 정도로 너무나 놀라서 쳐다보고 있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배를 모래톱 너머로 끌어 당기고 있었다. 결국 주민들 속에서 한 명이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 화승총을 꺼내 들고서 배 안의 사람들을 뒤쫓아 물길따라 들어 갔다. 밧줄을 놓쳐버린 때부터 뭍을 선택함으로써 배에 오르지 못한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앞바다로 나아 갔다. 배 안의 한 사람이 돛을 올렸지만 그들은 장비를 능숙하게 조종하지 못해서 돛과 돛대는 배 밖 물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갖은 노력으로 돛대를 다시 바로 세웠다. 그들이 돛을 돛대와 횡으로 (조종석과 더불어) 연결했을때 못으로 고정시킨 부러진 돛대는 돛과 함께 다시 배 바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더이상 돛대를 바로 세울 수 없어서 도로 해변으로 밀려났다. 이것을 목격한 일부 주민들은 바로 다른 배를 타고 그들을 뒤쫓았다.
해안가에 다다르자 우리 동료들은 갑자기 다른 배로 뛰어 들었고, 주민들이 무장했음에도 주민들을 갑판에서 내던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배는 거의 물로 가득 차서 항해가 힘들었기에 뭍으로 향했다. 그들은 목사에게 끌려갔다. 목사는 그들의 목에 칼을 채우고 정말 단단하게 묶었으며, 한 손은 (목에 채운 칼의) 널판지와 연결하여 죄임쇠로 고정시켰다.
칼: 탈옥할 기미가 농후한 자나 탈옥하다 잡힌 자에게 씌웠다. 다만 노인, 여자, 허약자에게는 칼을 채우는 것을 금하였다.
그들은 목사 앞에 내동댕이쳐졌다. 다른 이들도 또한 각자 감금되어 있던 숙소에서 끌려 나왔다. 그들도 역시 꽉 묶여서 목사 앞으로 끌려왔다. 거기에서 우리는 동료들이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목사는 이 일을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했는지 물었다. 그들은 만일에 동료들이 괴롭힘을 당하거나 처벌되지 않도록 다른 이들은 알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목사는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질문했다. 그들이 일본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대답하자 목사는 묻기를 물도 없이 약간의 빵에다가 그렇게 작은 배로도 끝마칠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했다. 그들은 질질 끌며 죽는 것보다는 빨리 죽는 것이 낫다고 대답했다.
목사는 그들을 풀어주고서는 한 길(대략1m83cm)정도 되는 길이에 아랫 부분과 그 주변 둘레가 손가락 두께만한 곤장으로 각각 벌거벗긴 엉덩이를 25대씩 쳤다. 그 결과 그들은 한 달여 동안 침상에서 지내야 했으며, 추가로 우리는 경계 강화일이나 밤에는 외출이 허가되지 않았다. 이 섬은 주민들에 의해 제주(Scheluo)라고 불리지만 우리에게는 퀄파트(Quelpaert)였다.
제주도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위도 33도 32분, 본토 혹은 조선의 남쪽 지점으로부터 약66.6~72.2Km(12~13 mijlen) 떨어져 있다. 만의 북쪽이나 안쪽으로 배들이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본토로 항해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은 위험하다. 보이지 않는 절벽들로 인해 그것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항해할 수 없다. 그곳에서 항해하는 많은 이들이 만을 찾지 못해서 마지막에는 일본으로 표류했다. 게다가 만에는 정박지나 대피 항구가 없다. 섬에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수 많은 절벽들이 있다. 그 지방에는 많은 주민들이 거주하고, 가축들이 살기에 비옥했다: 많은 말과 소들이 있다. 매년 그들은 왕에게 상당한 공물을 진상한다. 주민들은 매우 가난한 사람들로 본토인들에 의해 천대당해 높게 존중 되지 못했다. 섬에는 나무들이 빼곡한 높은 산이 있으며, 게다가 대부분 아에 나무가 없는 민둥산들과 많은 계곡이 있어
5월 하순
오랫동안 고대하던 답지가 왕에게서 왔다. 슬프게도 우리는 궁궐로 가야만 했지만 감금에서 풀려난 것 때문에 기쁨으로 바뀌었다. 6~7일 후에 우리는 4척의 범선에 나뉘어져 배 안 한 구역에서 양발과 손이 묶였는데, 그들은 우리가 한 배 혹은 다른 배들에서 달아날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우리를 호송하던 병사들이 도항 중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내내 배멀미를 했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풀려 있었다면 우리는 반드시 탈주를 실행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틀 동안이나 그렇게 묶여 있은 후에, 역풍으로 인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어서 우리는 다시 (손발이) 풀려서 감금되어 지내던 집으로 이송됐다. 4~5일이 지나서 바람이 직각으로 불어왔고, 우리는 이전처럼 같은 방법으로 묶여서 새벽녘에 범선들에 태워졌다. 닻과 돛을 올렸다. 벌써 같은 날 밤에 우리는 닻을 내린 곳이 본토와 가깝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 차릴 수 있었다.
6월 중순
다음 날 우리는 배에서 풀려나 뭍으로 옮겨졌다. 군인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하고 있었다. 다른 날 우리는 해남이라고 불리는 도시로 말을 타고 갔다. 범선들은 다른 장소들에 정박했고, 책임자들에게서 인수인계되어 어려움과 피곤을 예방하기 위해 해남에서 밤에 36명 모두 합류했다. 우리는 다음 날 식사를 마친 후 다시 말을 타고 영암이라는 도시에 밤에 도착했다. 밤중에 포수 빠울루스 얀스 꼬울이 죽었다. 배가 난파됐을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영암군수의 명령으로 우리가 참석한 가운데 장례를 치뤘다. 무덤에서 우리는 나주로 이동했다.
다음 날 다시 이동해서 밤에는 장성에서 머물고, 다시 아침에 떠나서 그날 크게 보강해서 쌓은 입암산성이라는 높은 성을 지나서 정읍에서 체류했다. 정읍에서 숙박한 후 아침에 떠나 같은 날 태인에 도착했다. 이튿날 아침 말을 타고 떠나서 오후에 금구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은 후에 다시 길을 나서 고대에 왕이 궁궐을 지었으며 전라도 관찰사가 주재하고 있는 전주라는 큰 도시에 밤이 되어 도착했다. 이 도시는 전국적인 큰 상업 중심지로 중요하며, 해상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내륙에 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말을 타고 전라도 지방의 마지막 도시인 여산에 밤에 당도했다. 충청도 지방에 있는 은진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머물렀으며, 다음날 연산으로 향해 밤에 머물고 다음 날 아침 다시 말을 달렸다. 밤에 충청도 관찰사가 있는 공주에 도착했고 다음 날에는 큰 강을 건너서 왕도가 있는 경기도에 들어 섰다.
고대 왕의 궁궐: 후백제의 궁궐. 전주시 노송동 일대.
서울 체류
6월 하순
우리는 이처럼 몇날 며칠간 여러 도시와 마을에서 밤에 머물고 여행한 후에 마침내 도르드렉흐트 부근의 마스강처럼 넓은 강에 이르렀다[북쪽과 약간 서쪽으로 약388.9~416.6Km(70~75 mijlen)의 여행]. 강을 건너 약 5Km 정도 더 가서 거대한 성벽의 도시에 다다랐다. 이 도시는 왕이 주재하는 한양이다. 우리 모두는 2~3일간 한 집에서 숙박했다. 그리고서는 3~4명씩 나뉘어 한양에 살고 있는 중국인 망명자들과 함께 지냈다. 왕의 면전으로 소환되어 얀 얀스 벨떠프레이를 통해서 묻는 모든 질문에 힘들게 대답했다.
우리는 열의에 찬 일본으로 떠날 수 있게 만들려는 소망에 따라 이 질문들에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우리는 폭풍 때문에 절반에 가까운 동료들과 배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왕이 상기하도록 했다. 즉 우리는 가정과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외국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알게되었고, 부모님, 부인, 아이들, 친구들과 친척을 몹시도 다시 만나기를 갈망한다는 점이었다.
이에 왕은 다시 벨떠프레이를 통해서 이것은 나라의 관습이 아니라고 하답했다. 외국인들은 결코 나라를 떠나도록 허가 받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들 생명이 영면할 때까지 이 나라에서 지내야 하는 것을 우리 스스로 감수해야 했다. 나라의 관습은 익살스런 행동과 노래, 춤으로 왕을 즐겁게 하도록 왕이 우리를 초대한 것이다. 우리가 작은 열의와 약간의 재능으로 명령대로 이행한 우리의 공연은 왕과 왕실의 맘에 들었다. 우리는 이 나라의 방식대로 대접을 받은 후에 각자 아마포 두 필씩을 받았기에 이 나라 풍습대로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었다. 그런다음 우리가 머물던 숙소로 옮겨졌다.
다음 날 훈련대장이 우리를 호출했는데, 벨떠프레이를 통해 우리를 왕의 호위병으로 선발한 것은 왕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각자 매달 약 44Kg(약70 cattij)의 쌀을 급여로 받게 됐다. 우리는 각자 우리들의 이름, 나이, 출신국가, 궁궐에서의 직책이 조선 문자로 새겨진 호패를 받았다. 호패의 윗부분에는 왕과 훈련대장의 화인이 찍혀 있었다. 그 다음에는 화승총과 화약을 받고, 매월 초순과 보름에는 왕에게 경의를 표해야 하는 의무를 지시 받았다.
호위병: 실제로는 훈련도감에 배속 받아 소총수가 된 것이다. 비변사등록- 효종5년 5월 13일조
1 katti: 약625g
이것은 말하자면 조선의 관습으로 왕의 신하들은 매달 두 번씩 그들의 왕에게 존경심을 표해야 했다. 남성들은 확실하게 병적에서 제외되는 나이가 될 때까지는 일년에 6개월간은 병사로서 징집됐다. 그러니까 봄에 3개월간, 가을에 3개월간이다. 이 기간에는 매달 세 번씩 훈련을 받으며 또한 매달 세 번씩 사격연습을 한다. 벨떠프레이와 그 외 중국인 한 명이 우리의 사격교관으로 임명됐다. 왕의 호위병으로 병적에 오른 수 많은 중국인들이 있었다.
병적: 조선시대에는 병역의 의무를 자영농인 양인에게만 부과했다. 양인은 조선인구의 20%에 불과했다. 조선 초기에는 양반 5%, 양인 20%, 노비 60%와 천민 15%라는 계급구조로 이뤄져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신분제가 무너지면서 신분 세탁이 활발해져 노비가 줄어 들고, 양인과 양반이 늘어 나기 시작했다.
7월
우리는 날마다 여러 고관대작들의 초대를 받았는데 그들과 부인들, 자식들이 우리를 보는 것에 호기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괴물처럼 보인다는 소문이 퍼졌다. 우리가 자맥질하는 새처럼 금발머리카락을 가졌기 때문에 뭔가 마실 때 코를 귀 뒤로 제쳐 놓아야만 했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를 가까이 대면한 사람은 우리가 더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 흰 피부를 가진 것은 뭔가 매력적인 것이라고 응시했다. 처음에 우리는 길거리나 우리를 따라다니는 군중 혹은 우리를 둘러싸고서 멍하니 바라보는 사람들 속에 스스로를 내보일 수 없었다. 우리를 또한 크나 큰 관심의 대상으로 취급했을지라도 제주도에서는 그로 인해서는 한층 더 적은 방해를 받았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우리를 제외하고 재미를 느끼려는 외부 폭도들은 우리를 끌고 가기 위해서 어느 밤에 우리들의 침실을 부쉈다. 우리는 이에 대해 훈련대장에게 항의를 제기했다. 그는 어느 누구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금했다. 그 때부터 우리는 군중이 모이는 원인이 되지 않고서 주변을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었다.
8월
청나라 사신이 조선이 모아 둔 공물을 모으기 위해 한양에 왔다. 사신이 방문하는 동안 왕에 의해 도시 밖으로 추방되어 성에서 지내야 했다. 성은 도시에서 약 33.3~38.9Km(6~7mijlen) 떨어진 아주 높은 산에 있었다. 이 성은 피신처였다. 적이 나라에 쳐들어 왔을 때에 왕이 여기로 몽진했다. 그곳에는 언제나 1,000명이 3년 동안 살 수 있는 식량이 준비되어 있었다. 성은 또한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들을 위한 공관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 성의 이름은 남한산성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9월 2일부터 청나라 사신이 떠나는 3일까지 머물렀다.
남한산성: 원문에는 산아래서 남한산성까지 오르려면 약11Km를 더 걸어야 한다는 문장이 더 있다. bergh wel 2: mijl opte gaen(mountain 2 mijlen up to go). 너무나 틀리기에 영문역에서는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11월 말
이미 얼어붙은 한양 근처의 큰 강[한강]이 딱딱하게 얼기 시작했다. 얼음이 아주 단단해서 짐을 다 실은 약 300명의 기병대가 아무런 위험없이 강을 건널 수 있을 정도였다. 추위가 심해질 때부터 날씨는 우리를 방해했다. 우리는 혹시 방한복을 챙겨줄 수 없는지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훈련대장에게 갔다. 그러자 그는 난파된 스뻬르베르호에서 인양한 가죽의 일부를 우리에게 되돌려 주라는 상소문을 가지고 왕에게 나아갔다. 이 요청은 승인됐다. 가죽은 다 말랐으며 따라서 한양으로 수송되어 창고에 보관 됐었다. 조사를 하자 많은 가죽들이 썩어 있었고 다른 부위들은 쥐가 갉아 먹었다. 우리는 수익금으로 집을 사기 위해 아직 쓸만한 가죽들을 팔기로 결정했다.
우리와 숙박하고 있는 중국인들은 우리를 너무나 즐겁게 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예를 들면 주기적으로 나무를 해올 것을 요구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산 너머까지 왕복 약33.3Km(6mijlen)를 걸어야만 했다. 이후로 우리는 등에 장작더미를 지고 산에 오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이 일이 몹시도 불쾌했다. 오직 이교도 국가의 중국인들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추위를 견디는 것을 선택하겠다는게 우리들 모두의 의견이었다. 그렇지만 가죽을 팔아서 얻은 수익금은 우리들의 기대보다 훨씬 더 많아서 작은 집 3채를 사기에 충분했다. 한 채당 은화 8~9따일렌 혹은 28~30플로린(네델란드 화폐)씩 하는 주택 세 채를 구입하기 위해 각자 은화 3~4따일렌씩 갹출했다. 우리는 남은 돈으로는 방한복을 살 수 있었다. 이 방법으로 우리는 엄동설한을 지낼 수 있었다.
1655년
3월
청나라 사신이 다시 한양에 왔다. 우리는 그가 머무는 동안 집안에서만 지내도록 억류됐다. 하지만 우리가 청나라 사신이 떠나는 날이라고 알고 있던 그날, 암스테르담출신 헨드릭 얀스(Hendrik Janse)와 할렘출신 헨드릭 얀스 보스(Hendrik Janse Bos)는 땔감이 모두 떨어졌다고 우겼다. 그들은 숲으로 갈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그들은 숲으로 가지 않고 청나라 사신이 지나길 길로 갔다. 그들은 수 백명의 기병대 호위를 받고 있는 청나라 사신이 근처에 오자 경계선을 무너뜨리면서 권세를 보이고 있던 사신의 말고삐를 움켜 잡았다. 황급히 그들은 조선 겉옷을 벗고는 속에 입고 있던 네델란드 복장을 내보였다.
이 일은 엄청난 소동의 원인이 됐다. 놀란 사신은 두 사람이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조선에 붙들려 있는 네델란드 사람들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에 대해 필경 무슨 곡절인지 물었다. 불행하게도 사신은 그들이 소리치는 것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신을 수행하고 있던 조선인들도 또한 기꺼이 사신에게 해명하지 못했다. 그들은 누구도 외침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지 못했다.
이후 청나라 사신은 자신이 하룻밤 지낼 숙소로 키잡이를 보내 줄 것과 통역사가 해결되기를 요청했다.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그러는 사이 다른 네델란드 사람들은 집에서 끌려나와 의금부로 옮겨졌다. 담당관은 우리에게 두 사람이 한 일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물었다. 당연히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부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산으로 가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의금부는 유죄라고 판결했지만 반대로 그 두 사람은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이것을 즉시 보고했어야만 했었다.
판결은 각각 곤장 50대씩이었다. 그렇지만 이 판결은 왕에 의해 윤허를 받아야만 했다. 왕의 판단은 우리가 이 형벌을 받을만 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왕은 우리가 약탈자나 정복자로서 이 나라에 들어 온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폭풍에 의해 여기로 바람에 날려 왔을 뿐이라는 점을 고려했다. 왕은 후속 통보가 있을 때까지 우리들 집에 돌아가서 머물도록 한 후에 판결을 무효로 했다.
한편, 키잡이는 통역관을 통해서 모든 상황을 알고자 하는 사신의 질문을 받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조선인들은 어려운 상황에 빠져 들었다. 청나라 사신은 북경의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보다 많은 약속과 수 많은 돈을 뇌물로 받았다. 사건의 모든 것은 두 동료에게 나쁘게 끝났다. 그들은 감옥으로 내던져 졌고, 우리는 다시는 그들을 볼 수 없었다. 한참 이후에야 우리는 그 사이에 그들이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자연사 했는지 아니면 판결에 따라 죽었는지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보다 많이 알고 있는 벨떠프레이 조차도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없었다.
6월
청나라 사신이 다시 한양에 왔다. 즉시 훈련대장 앞으로 소환되었는데, 훈련대장은 제주도에서 새로운 배가 좌초되었지만 벨떠프레이가 책임을 맡아 고된 여행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기에 우리들 중에서 가장 많이 언어(조선어)를 알고 있는 세 사람이 통역관으로서 그곳에서 활동하라고 했다. 우리는 동료들 가운데 세 명을 정했는데, 보조자, 선원들과 장비 통제를 맡은 하급관이었다. 세 사람은 며칠 후 부사관과 함께 남쪽으로 향했다.
남겨진 우리는 사신이 떠난 이튿날까지 집에서만 머물라는 엄한 명령을 받았다. 간섭하기를 좋아하던 그는 무자비한 태형에 의존했다. 한참 이후에 우리는 제주도로 떠났던 세 동료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섬의 최남단에 수용되어 있으며 엄한 감시를 받고 있다고 알려왔다. 좌초된 배는 아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세 사람을 한양 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속임수였다. 의도가 명확하게 무엇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추측한다면 조선인들은 청나라 황제가 조선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 차려서 우리를 송환해 주도록 요청할까봐 세 사람을 숨기기를 원했던 것이다.
12월
그 해 말 사신은 다시 공물을 요청하기 위해 빙판을 건넜다. 이전처럼 우리는 사신이 머무는 동안 집안에 갇혀 지내면서 엄격하게 감시당했다. 사신의 몇 몇 대궐 관리들 방문 이후 왕에게 우리에 대한 처형이 주청 됐다. 그들은 우리에게 진절머리를 내던 고관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이 문제로 3일간이나 회합했다. 왕, 왕의 형제, 장군(종2품)과 다른 관리들은 우리와 진심으로 가까워질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제의에 대해 반대했다.
장군은 말하기를 누군가 우리를 죽여야 한다고 결정했다면 같은 방식으로 무장해야 하고 우리들 각자와 조선인 2명씩의 결투가 아닌 일대일 대결을 펼쳐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자신들의 의지가 아닌데도 나라에 들어 온 외국인들을 단순히 죽이기 보다는 조선인과 네델란드인 양쪽이 보다 명예로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은 호의적인 통보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비밀리에 전해졌다. 우리는 너무나 불안하여 벨떠프레이에게 이 소식을 확인했는지 물었다. 벨떠프레이는 우리가 3일후까지 살아 남으면 위험은 지나 갈 것이라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우리에게 말하기를 꺼려했다.
회의를 주재한 왕의 형제는 회의 직전에 우리 집을 지나 갔다. 우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앞에서 연신 굽신거리면서 목숨을 살려 달라고 빌었다. 그는 우리가 몰인정하면서 질투심이 강한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검게(나쁘게) 보이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면서 우리들 마음을 안심시켰다. 그리고나서 이것은 실현됐다.
우리가 쓰러지도록 겨누던 적에 의해 가해진 압력에 굴하지 않고 아주 가까이 있어 준 왕에게 우리는 목숨을 빚졌다. 하지만 왕은 또한 양보해야만 했다. 우리가 청나라 사신과 접촉을 시도함으로써 미래에 다시 문제의 원인이 되는 것에 대한 예방은 우리가 전라도 지방으로 추방 당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왕에게서 매달 약 31Kg(약50 cattij)의 쌀을 하사 받았다.
전라도 체류
1656년
3월초
우리는 말 등에 올라 한양을 떠났다. 벨떠프레이와 다른 친한 이들과 강까지 동행했다. 우리가 나룻배에 오르자 그들은 되돌아 갔다. 우리가 벨떠프레이를 본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우리는 다시는 그에 관한 어떠한 것도 듣지 못했다.
우리는 길을 따라 여행하여 영암으로 들어갔고, 전과 똑같은 도시들을 지났다. 우리는 머물던 모든 새로운 도시에서마다 관공비로 숙박했으며, 이전처럼 새로운 말들과 음식을 공급해 주었다. 며칠이 지난 후 강진(지금의 강진 병영면)에 도착했다. 이 도시는 관찰사 직속의 전라도병마사(Pyongsa)의 관할하에 있었다. 호송관에 의해 한양에서 멀리 보내진 세 사람을 인수하라고 명령 받은 도병마사에게 넘겼다. 그들은 엄격하게 법을 집행했는데, 수군절도사(vice admiral 도병마사가 겸직)는 그 곳에서 66.7Km(12mijlen)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에게 즉각 현지 가옥이 주어졌고 우리는 함께 살았다. 삼일 후에 3명의 동료가 합류해서 이번에는 33명이 함께했다.
도병마사: 관찰사 다음가는 관직은 도병마사다. 주州와 진鎭에는 도병마절도사가 주둔했다. 당시 전라도병마사는 류정익이었다.
전라도에는 수군절도사를 3명 배치했다. 그 중 1명은 관찰사나 도병마절도사가 겸임했기에 정직(正職) 수군절도사는 2명이다. 강진에서는 도병마사가 수군절도사를 겸임했다. 강진은 전라우수영 12관 중 하나다.
3명: 문단의 흐름으로 보아 앞서 제주도로 갔던 3명의 합류다.
4월
오랜 기간 제주도에 보관했던 가죽을 받았는데 한양으로 보낼만큼 귀중하지도 않았으며 중요하지 않아서였다. 이 장소는 섬 북쪽으로 55Km(10mijlen)에 못미치는 해변가에 있으며 그곳에서 지정된 품목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 가죽들로 옷을 만들었으며 새로운 숙소에 필요한 것들을 구할 수 있었다. 도병마사는 우리들에게 매달 두 번씩 현청 앞 광장과 시장의 풀을 뽑아서 깨끗하게 유지할 것을 명령했다.
1657년
1월
도병마사(류정익)는 뇌물로 인해 파직 됐다. 그는 지역민들에게 사랑 받았고, 그를 너그럽게 처분해주기를 양반들과 지역민 대표들이 왕에게 주청을 올렸다. 고맙게도 그들의 중재 덕분에 그는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 그는 다른 직무를 부여 받았다.
2월
신임 병마사가 도착했다. 그의 도착과 함께 우리의 상황은 악화됐다. 이전 병마사에게서 우리는 마음껏 땔감을 하사 받았으나 지금은 우리 스스로 베어야만 했다. 그는 우리에게 최고로 혹독하게 일을 시켰다. 나무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산악지대를 약33.3Km(6mijlen)나 일주해야 했다. 우리는 그가 심장병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뻐했다.
11월
새로운 병마사가 왔다. 병마사는 우리 일에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에게 의복비나 다른 비용에 대해 부탁하자 그는 왕으로부터 오직 할당된 쌀만을 공급하도록 하교 받았다고 대답했다. 우리 스스로 안식을 유지해 나가야만 했다. 쉬지않고 나무를 나른 탓에 우리의 옷이 헤졌기에 새로운 옷들이 절실하게 필요했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병마사에게 구걸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나라에서는 그것은 뭔가 예의 없는 신중하지 못함이고, 특히 중들에게서나 널리 행해진 것이었다.
병마사는 일주일에 4일간은 지방에 여기저기 많이 있는 농가와 절에서 구걸할 수 있는 허가를 승인해 줬다. 이러한 구걸 행각은 대단한 재정적 성공이었는데, 농부들과 스님들 모두 흥미를 느꼈고 약간의 돈을 우리들과 네델란드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들을 듣는 즐거움과 맞바꿨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겨울을 날 새옷을 살 수 있었다. 다행이도 이 번 겨울은 한양에서 보다는 더 춥지 않았다.
1658년
봄
우리는 전임 병마사를 대신하는 신임 병마사를 맞이했다. 신임 병마사는 우리의 자유와 행동을 제한하려는 계획과 함께 각자 아마포 세 필과 교환하는 것으로 매일 그를 위해 일하기를 원했다. 우리는 치뤄야 할 노동으로 우리의 옷은 더욱 빨리 낡았기에 좋게 여기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심각한 것은 음식 부족이었기에 우리의 생활비는 증가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나무를 해서 일부를 농부들에게 팔아서 우리의 생활을 유지했다.
아마포 세 필: 1년 혹은 임기 동안의 노동력 제공의 댓가로 강제로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베 1필은 폭 7치(촌寸: 1치는 3.3cm)에 길이 35자(척尺: 1자는 30.30cm)에다 실오라기 400가닥(수數) 이상으로 짜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또한 옷감을 재는 포백척(布帛尺) 기준에 따르면 7치는 32.8cm이고 베 1필의 길이는 약 16m 38cm정도였다. (1자는 46.8cm)
병마사는 우리 숙소에서 죽음이 발생하면서부터 보다 더 많이 허락했다. 우리 동료들 중 일부가 심각한 열병을 앓았다. 조선인들은 열병을 너무나 두려워 했다. 우리들 행동의 자유가 제한되는 한에는 한양이나 일본인 거류지로 갈 수 있도록 승인되지 않았다. 그래도 매달 두 번씩 잔디를 가꿔야 하는 의무는 남아 있었다. 이런 조건 속에서도 우리는 두 사람을 병간호를 위해 뒤에 남겨 두어야 했다.
열병: 장티푸스일 것이다.
1659년
4월
왕이 붕어했다. 청나라의 인정 속에서 장자가 왕위에 올랐다. 우리는 이제까지 변함없이 해온 것을 지속했다. 우리는 나무를 팔았고 특히 스님들에게 구걸했다. 우리는 다시 말하자면 스님들이 농부들에 비해서 더 후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스님들은 매우 호기심이 많았다. 그들은 우리의 관습과 우리나라 그리고 우리가 접했던 다른 나라들에 대해 모든 것들을 알고 싶어했다. 우리가 원했을 경우 밤새워 줄줄이 우리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장자: 현종
1661년
봄
다시금 다른 병마사가 왔다. 그는 우리와 흔쾌히 가까워 지려고 했다. 그는 가끔 말하기를 이 일이 자신의 권한 안에 있었다면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우리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가 받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가 다스리는 동안 우리는 원하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다. 불운하게도 들판에 계속된 가뭄으로 인해 그 해와 다음 해에 대흉작이 들었다.
1662년
봄
기근으로 수 천명이 죽었다. 도처에서 유랑민들이 나라를 떠돌았다. 이 때문에 왕의 군대는 거리마다 순찰을 계속했다. 그들은 또한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시체들을 치우는 임무를 맡았다. 몇 몇 마을들은 유랑하는 폭력배들에게 약탈당했으며, 왕의 창고들은 강제로 열렸다. 기근에서 살아 남은 백성들 일부는 도토리, 나무껍질(소나무 속껍질)과 잡초들로 스스로 연명했다.
1663년
1월
기근이 벌써 3년간이나 계속되어 많은 사람들이 배고픔으로 숨지자 모든 지방에서 인구가 감소했다. 강에 접한 하구 쪽에서는 늘 비에 의존하는게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직 얼마간의 벼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만일 그러한 실정이 아니었다면 모든 인구가 사실상 죽었을 것이다. 어떤 순간에는 도병마사는 매월 할당된 양의 쌀을 공급하기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그는 우리를 다른 곳으로 보낼 수 있도록 주청하는 상소문을 왕에게 올렸다.
도병마사: 이태연. 비변사등록- 현종 3년 정월 20일조
2월
우리를 세 도시로 분산하라는 교지가 왔다. 우리는 아직 22명이었다. 이로부터 12명은 여수좌수영(SaesOng)으로, 5명은 순천으로 또한 다른 5명은 남원(Namman)으로 보내졌다.
우리는 이 이동을 크게 후회했다. 강진에서는 우리 모두 멋진 정원이 있는 조선 양식으로 꾸며진 좋은 집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새롭게 다른 곳에서 시작해야 했기에 모든 것을 단념해야만 했다. 또한 시간도 촉박했다. 뒤늦게 깨닫고 보니 이 이동이 나가사키로 끝을 맺어 우리 동료들의 행복한 사실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순간을 예견할 수 없었다.
1663년
봄
우리는 병마사에게 우리에게 해준 모든 것에 대한 감사와 작별을 고했다. 우리는 다른 목적지를 향해 떠났다. 우리는 걸어서 여정에 올랐다. 오직 환자와 약간의 것들을 위해서 몇 마리의 말들이 우리의 재량에 맡겨졌다. 순천과 여수좌수영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은 초기에는 같은 길로 갔다. 4일 후 우리는 순천에 도착해서 현청 창고에서 밤을 지냈다. 다음 날 우리는 순천에서 머물게 될 4명과 이별하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같은 날 저녁에 우리는 여수좌수영에 도착해서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게 인계됐다.
그는 우리에게 가구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집을 제공했고, 평상시와 같은 일정량의 쌀을 공급했다. 그는 우리에게 호의적이면서 또한 유쾌한 사람으로 보였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도착한 이틀 후에 떠났다. 삼일 후에 신임 좌수사가 당도했다. 그는 우리에게 철저한 고난으로 나타났다. 한여름에 우리를 뙤약볕 아래 세워두고, 한겨울에는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빗속이나 진눈깨비 속에 서 있게 했다.
화창한 날에는 활쏘기 훈련에 쓸 화살을 만들기 위해 나뭇가지를 자르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최고의 궁수들을 거느리는 것은 수군절도사들에게는 명예인듯 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 차마 말로 하기 힘들 정도의 역겨운 일들도 시켰다.
겨울이 거의 다가오자 우리는 새옷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우리는 좌수사에게 우리들 중 6명은 일을 하게 하고 다른 남은 6명은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구걸하거나 나무를 팔아서 약간의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허가가 승인될 수 없었지만 결국에는 묵과됐다. 이런 일은 1664년까지 이어졌으며, 좌수사는 더 높은 관직으로 영전됐다. 후임자는 보다 관대했던것 같다.
그는 곧바로 우리들의 의무적인 노동을 덜어 주었다. 우리는 오직 본래의 합의대로 한달에 두 번 상황보고만 하면 됐다. 더 나아가 우리는 떠날 때나 어디로 갈 때에 부관실에 항상 보고해서 그들이 우리를 필요로 할 경우에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몹시도 비참하게 했던 야비한 인간한테서 구원 받았음을 신에게 감사했으며, 후임자는 우리에 대해 아주 인정 많게 호의적이었다. 그는 우리를 자주 집으로 초대하여 술과 함께 정성어린 접대를 베풀어 줬다. 그는 게다가 우리 네델란드에 대한 모든 것들을 알기를 원했다. 그는 진심으로 우리를 가엾게 여기면서 왜 일본으로 가려고 노력하지 않느냐면서 의아해 했다. 이에대해 우리는 그렇게 하도록 허가받지 못했으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적당한 배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해안 마을들에 우리가 맘껏 쓸 수 있는 배들이 충분하다면서 장난기 섞인 한 마디를 했다.
만약 실패했을 경우에 탈출시도로 처벌 받는 것 뿐만 아니라 절도죄도 추가됨으로, 우리는 우리 소유가 아닌 배는 결코 함부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점을 그에게 확신시켰다. 우리는 그가 의심하지 않도록 이렇게 말했다. 항상 우리는 이것을 말했고, 좌수사는 크게 웃었다.
그는 하나의 제안을 했으며, 우리는 이를 결행할 것인지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연안에서 어업할 수 있는 선박을 구입하려고 했지만 우리가 아는 한 어디에서도 팔려는 배가 없었다. 아무도 우리에게 배를 팔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전 관리들의 엄한 다스림 아래서 오랫동안 살아왔기에 매우 충실하면서도 어떻든지 간에 충분히 나중에 책임져야 할 수도 있는 뭔가를 쉽게 자발적으로 하려고 하지 않았다.
12월
그 해 말 우리는 얼마 있지 않아 하늘에 두 개의 혜성이 출현하는 것을 보았다. 남동쪽에 나타난 첫번 째 혜성은 거의 두 달 동안이나 보였다. 뒤이어 다른 하나가 남동쪽에서 모습을 보였다. 천체의 출현은 나라에 커다란 돌연한 공포의 원인이 됐다. 함대가 대비태세를 갖추고 항만의 경계가 강화되고, 기병과 보병이 매일 훈련하는 동안 모든 성에는 추가적인 식량과 군수품이 공급됐다. 특히 해안 도시들에서는 어떠한 등불도 켜지 못하게 했다. 이 두려움은 청나라의 침입 뿐만 아니라 일본과 전쟁을 시작할 때에도 비슷한 징조가 하늘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이다. 많은 조선인들은 우리에게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령 나쁜 징조와 같은 이들 천체의 출현에 주의를 기울이는지 질문했다. 우리는 네델란드에서 비슷한 징조의 현상은 하나의 조짐 혹은 다른 재난의 조짐으로 전쟁, 홍수, 전염병이 된다고 대답했다.
경계 상태로 인해 배를 얻기란 더욱 어려워졌다. 함선의 집중적인 순찰 때문에 선박을 이용한 탈출에 중대한 차질이 빚어 졌다. 상황은 절망적이었지만 우리는 운명에 순응해야 했다. 우리는 결국 낯선 나라에서 사로 잡힌 자였고, 우리 머리 위에 지붕이 있으며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점에 기뻐해야 했다.
1666년
4월
그러는 사이 좌수사들은 서로의 뒤를 이었다. 그들 가운데 몇 명은 우리에게 친절하고 호의적이었다. 다른 이들은 우리에게 은혜 베풀기를 싫어했다. 한 좌수사는 온종일 쌀 방아를 찧도록 했다. 다음 좌수사는 100여길이나(100 fathoms. 1길=1.83m, 1fathom=1.698m) 새끼를 꼬도록 했다. 언제나 우리는 강력하게 항의도 하고, 우리를 노예상태로 만들 의향이 없는 왕에게도 호소했다. 하지만 암흑의 시간은 항상 날이 밝기 전에 있었다. 우리에게 쌀 방아를 찧게 했던 좌수사는 우리가 기적적으로 그로부터 자유로울 때에도 필요하다면 강력한 수단으로 우리를 강압하려고 위협했다. 매일 실시하던 함대훈련 중에 부주의로 함선 한 대에서 화약 한 통이 폭발해서 함선이 침몰하고 5명이 갑판에서 사망했다. 좌수사는 비밀로 덮으려고 시도했으나 나라 도처에 있던 암행어사(spies)를 통해서 왕은 어떻게든 알게 됐다. 그 결과 그 좌수사는 체포되어 조정으로 압송됐다. 판결은 불명예 삭탈관직, 90대의 곤장에다 종신 귀양이었다. 신임 좌수사가 우리에게 새끼를 꼬도록 했을 때 우리는 새로운 기적을 바랐다. 그렇지만 그것은 당분간 실현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 그는 심장병도 조정과의 마찰도 없었다. 이 상황은 이제 확실히 불쾌해졌다.
함선폭발: 좌수사 이민발. 현종실록-현종7년4월 정묘일조
탈출
우리는 남은 여생을 노예처럼 일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한 빨리 몰래 탈출하려고 결심한 이유다. 우리는 배를 구입할 자금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배를 기꺼이 우리에게 팔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정기적인 방문자로서 우리의 꼭두각시처럼 일을 해주는 이웃 한 사람을 설득했다. 그는 의심스러워 하면서 배로 무엇을 할 작정이냐고 물었다. 우리는 양털을 사기 위해 섬들 중에서 한 곳으로 출항하려고 한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우리가 양털을 팔아서 생기는 이익금을 나누어 주겠다고 약속하자 동의하고는 다음 날 지역의 한 어부에게서 배 한 척을 사왔다. 그 다음 날 우리가 배에 장비를 설치하는 것을 (배를 팔았던) 이 어부가 보았기 때문에 하마터면 일들이 잘못될 뻔 했다. 그는 우리가 이 배로 탈출하려는 것을 알아 차렸기 때문에 배를 팔지 않겠다고 했다. 만일 좌수사가 우리가 이 배로 탈출하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부는 의심할 것도 없이 죽임을 당할 것이다.
필시 그가 옳았다. 우리가 그에게 우리가 떠난 후에 즉시 좌수사에게 가서 네델란드 사람들이 그의 배를 훔쳐 갔다고 말하라고 조언한 이유다. 그 사람은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우리가 가지고 있던 조선 화폐를 모두 그에게 주자 승복했다. 우리는 그가 너무 일찍 좌수사에게 가지 않도록 그에게 명기시켰는데, 그 경우에 우리가 함선에 의해 충분히 따라 잡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공범 가운데 한 명으로 그 어부를 지목할 것이다.
우리가 반달(상현:매월 음력 7~8일경의 달)이 뜨면 떠나려고 한 것은 그 때는 대부분 날씨가 좋기 때문이었다. 내내 우리는 윤달(이 든 윤년閏年)에 있었다. 우연히도 그동안 서로간에 자주 방문 했던 것처럼 순천에서 두 명의 동료가 찾아 왔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계획을 전했고, 그들은 우리와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맡은 일이 없었던 이발사 마퇴스 이보껜과 꼬르넬리스 디륵세였다. 우리는 그 두 사람과 떨어져 있는 확실한 얀 삐터젠을 데려오기를 원했는데, 그가 배를 조종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동료 중 한 명이 그를 데려오기 위해 서둘러 순천으로 갔다. 운없게도 하필 그 때 삐터젠은 약83.3Km(15mijlen)나 더 떨어진 남원에 있는 동료들을 방문한 것 같았다. 이것은 더 힘든 걸음을 의미했다. 이틀 후에 두 사람 모두 여수좌수영으로 돌아 왔다. 데리러 간 동료는 4일 동안에 약277.8Km(50mijlen)를 걸었던 것이다.
9월 4일
우리는 9월 4일이 되면 달이 지고 나서 썰물 직전에 닻을 올리고 출항하기로 했다. 그동안 이웃들은 점점 더 수상쩍어 했다. 우리는 여전히 배에 모든 종류의 물건들을 날라야 했기에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성벽을 올라야만 했다. 이러한 일은 자연스럽게 주의를 끌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들에게 말해서 해변에서 잔치를 베풀었던 것이다. 우리는 아주 즐거운 것처럼 하면서 모래사장에 크게 불을 피웠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와서 지켜 보았고 다행이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한 두명씩 점차 뒤를 이어 떠났다. 어부들은 일찍 일어나야 했기에 역시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모두가 떠난 후 우리는 지폈던 불을 끄고나서 달이 완전히 수평선 뒤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먼저 우리는 물이 필요했기에 해안 앞쪽에서 섬의 오른쪽으로 항행했다. 우리는 섬 오른쪽을 따라 공해상으로 항해했다. 우리는 전방 왼쪽에서 어둠에 쌓인 도시와 그 앞쪽에 정박에 있는 함선들을 보았다. 우리가 섬을 지났을 때에 거기에 맞춰 돛을 올리자 돛에는 바람이 가득 찼으며, 우리는 공해상으로 빠르게 나아갔다.
별들을 따라서 우리는 남-남동쪽 방향으로 직진 항로를 잡고 항해하려고 시도했다. 날이 밝았을 때 우리는 우리들 오른편에 있던 배 한척을 보았다. 동시에 그 뱃사람들도 우리를 알아차렸다. 그들은 우리를 큰 소리로 불렀지만 우리는 거기에 반응하지 않고 배가 바람과 일직선이 되게 해서 되도록 빨라지게 했다. 우리는 그들과 충분히 멀어지자 떠오르는 태양을 등대 삼아서 다시 오른쪽으로 항로를 수정했다.
우리는 그날 온종일 나아갔다. 날씨는 좋았으며 흔들거리지 않는 미풍이 불었다. 우리는 차례대로 돌아가며 잠을 청하기로 약속했지만 모두가 커다랗게 눈을 뜨고 있었기에 보람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두 번째 밤에 접어 들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기에 별들을 따라 직진 항로로 항해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우리는 솥, 장작, 쌀과 소금을 배에 실고 있었기에 굶주리지 않아도 됐다.
9월 5일
다음날인 9월 5일에는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바람이 완전히 사라졌다. 우리는 먼 거리에서 쉽게 눈에 뜨이지 않게 돛을 내리고 노를 저어 배의 속도를 높히려고 했다. 오후가 되면서 바람이 서쪽에서 조금씩 일어 오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돛을 올리고 태양을 주시하면서 남동쪽 방향으로 항로를 정했다. 밤이 되자 바람이 같은 방향에서 거세졌다. 우리는 등뒤로 비스듬한 조선의 마지막 남쪽 끝을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붙잡힐 것을 더 이상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됐기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9월 6일
아침에 우리는 멀지 않은 곳에서 일본의 첫번째 섬들 가운데 하나를 보았다. 그날 저녁 우리는 나중에 듣기로 히라도라는 섬에서 떨어져 있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일본에서 지낸 적이 없었기에 우리는 그 해안을 알 수가 없었다. 조선인들에게서 나가사키로 가려면 어떤 섬도 우현 쪽에 있게 해서는 안된다고 들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처음으로 보이는 매우 작은 섬을 끼고 돌려고 시도했었고, 밤이 되어서 일본의 서쪽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9월 7일
우리는 섬들에 접하여 약하고 변화하는 바람으로 항해를 했다. 우리는 섬들이 연속해서 통채로 늘어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저녁이 되자 돛을 내렸고 만에 닻을 내리기 위해 밤 동안 해안으로 노를 저었다. 우리는 변덕스러운 바람 때문에 밤에 항해를 계속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만에 들어가려고 하던 때에 많은 배들의 불빛을 보고는 되돌아 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등뒤에 바람을 두고서 돛을 올리고 밤새도록 항해했다. 다시 날이 밝자 우리는 전날 밤에 있었던 같은 장소에서 여전히 머물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조류에 밀려 뒤로 표류한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우리는 해안으로부터 섬 위쪽의 좀 더 나은 곳으로 가기 위해 배를 움직였다.
해안에서 약11Km(2mijlen) 쯤 떨어진 지점에서 정면으로 강한 바람을 맞았다. 부서지기 쉬운 작은 배를 대피시킬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으려고 만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 보다 엄청난 노력을 했다. 우리는 돛을 내리고 닻을 끌어내린 다음 식사 준비를 했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가끔 일본인 어선 몇 척이 지나쳐 갈뿐 우리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저녁에는 바람이 그쳤고, 6명이 탄 배가 만으로 들어 오고 있을 때에 우리는 바로 우리의 행로를 계속해 나갔다. 우리가 이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바삐 닻을 거둬 올리고 빠르게 달아 날 수 있도록 돛을 올렸다. 맞바람만 아니었다면 우리는 성공했을 것이다. 그 밖에도 더 많은 배들이 만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돛을 내리고 이런 용도로 쓰기 위해 특별히 우리가 만든 오렌지 왕자의 연대를 상징하는 작은 깃발(오렌지색-백색-청색)을 내걸었다. 일본인들이 큰 소리로 듣고 말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때 -그것이 그들의 방식인줄로 이해했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음높이로 "네델란드, 나가사키"라고 외쳤다. 제일 먼저 만에 들어왔던 배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 중 한 명이 우리 배에 올라와서 그 때 키를 잡고 있었던 우리 동료에게 자신의 배로 승선하라는 몸짓을 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우리를 견인해서 작은 곶 근처로 배를 몰았다.
건너편에는 조그만 어촌이 있었다. 여기에서 그들은 우리 배를 큰 닻과 굵은 밧줄로 동여 맸다. 조타석에 있었던 한 명은 그렇다고 치고 그들은 우리 중에서 누군가를 해안으로 데려갔다. 그들을 심문하려는 시도는 끝났다. 양쪽 모두 서로를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우리의 키잡이가 계속해서 "네델란드, 나가사키"를 외쳤다.
점차 일본인들이 확실한 방향을 가르키면서 우리에게 끄덕였기 때문에 어쨌든 그들은 마지막 단어는 알아 들은 것으로 보였다. 우리의 출현은 한편으로 아주 많은 당황스러움의 원인이 됐다. 모든 것이 혼란 속으로 빠져 들었다. 마을 전체가 우리를 보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저녁이 되자 큰 범선 하나가 돛을 내린채 만으로 노를 저어 왔다. 우리는 배에 올랐는데 꽤 인상적인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나중에 우리가 나가사키에 있을 때 그가 그 섬에서 세 번째 지위의 고관이었다고 들었다. 그는 친절한 남자였다. 그는 우리에게 미소 지었다. 그는 우리를 가르키며 말하기를 네델란드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서 그는 우리를 4~5일 안에 나가사키로 데려다 주겠다고 말했다. 다섯 척의 네델란드 선박이 그곳에서 정박하고 있었다.
우리가 말할 차례가 되자 우리는 조선에서 왔다는 것을 그에게 명확하게 하려고 시도했다. 우리 배는 13년 전에 난파되었고 그때로부터 조선에 머물렀었다는 점이다. 그리고서 우리는 지금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나가사키로 가려고 시도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대우가 좋았기에 매우 안도했다. 조선인들은 모든 외국인들이 일본 땅에 발을 들여 놓기만 하면 즉각 때려 죽임을 당한다고 말하면서 우리를 우롱했다. 이로부터 많은 국가들에서 서로에 대해 얼마나 터무니 없는 일들을 말하는지 알 수 있다.
조그만 어촌: 고토(五嶋=가미고토上五島)의 나마(なま 지금의 奈摩鄕)마을. 분류기사대강(分類紀事大綱) 33권 아란타인조선강표착지일건(阿蘭陀人朝鮮江漂着之一件). 일기(日記)-관문(寬文) 6년(1666)에 기록.
9월 9일, 10일, 11일
우리는 정박한 상태로 배 안에서 체류하고 있었다. 해변으로 가기를 원하면 허락했다. 그렇지만 삼엄하게 경계했다. 우리는 일본인에게서 식량, 물, 장작을 공급 받았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는 배를 덮기 위한 무언가가 더 필요했다. 비가 계속해서 내렸기에 우리는 젖지 않게 앉기 위해서 그들에게서 짚으로 만든 거적을 받았다.
9월 12일
나가사키로 갈 모든 것이 갖춰졌다. 오후에 닻을 들어올리고, 저녁에는 섬 반대편에 도달해서 닻을 내리고 밤을 보냈다.
9월 13일
동틀 무렵, 전에 보았던 그 고관이 큰 범선에 올라 왔다. 그는 왕궁에서 보낸 것으로 여겨지는 문서와 물건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우리의 닻을 올렸다. 우리는 두 척의 큰 범선과 두척의 작은 범선과 동행했다. 앞서 해안으로 옮겨졌던 동료 두 명은 큰 범선 한 척에 승선해 있었다. 우리는 나가사키에서 얼마간 지난 후에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밤에 우리는 나가사키 만에 당도해서 한밤중에 정박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선명한 밤이었기에 그들이 우리에게 말한 5척의 네델란드 선박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감동의 순간이었다. 우리들 대부분은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서로 얼싸안으며 기뻐서 목이 쉬도록 소리 질렀다.
9월 14일
아침에 우리는 우리의 모험에 대해 문서에 따라 모든 질문을 해대는 네델란드 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의 통역사에게 환영받으며 나가사키 해안에 발을 내딛었다.
오후 내내 질문들에 답하고 있을 때, 현청 안에서 우리 옆에 있던 지방관은 위대한 모험 속에서 낡고 작은 배로 자유를 얻기 위해 광대한 바다를 극복한 우리를 매우 칭찬했다. 그런 다음에 우리 방식인 네델란드 옷을 다시 지급 받았다.
그 후 우리는 지방관이 데려간 곳에서 (네델란드 동인도회사의) 빌렘 폴허 각하의 대리인 단장 니꼴라스 드 루에이, 그리고 네델란드 동인도회사 직원들에게서 환영 받았다.
우리는 정확히는 13년 28일간 지속된 위험한 모험의 끝을 믿기 어려웠다. 우리는 좋은 결실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우리의 수고에 응답해 주신 위대하신 하나님에게 감사드렸다. 우리는 조선에 남아 있는 8명의 동료가 그들의 억압된 생활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언젠가는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마도 그들을 그렇게 되도록 도와 주실 것이다.
지방관이 데려간 곳: 출도出島(데지마섬). 일기(日記)-관문(寬文) 6년(1666)에 기록. 十三年以前ニ高麗之前ニ而阿蘭陀壹?破損仕候內, 阿蘭陀七人高麗より五嶋之內なまと申村ニ逃參, 寬文六年午ノ八月十六日ニ長崎江參, 則出島御入被成候事.
(과거에 올렸던 것으로 다시 올립니다. 번역 원본은 네델란드 그로닝겐대학 헨니 사브나이에Henny Savenije 교수의 영문판을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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