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전부터 진주시는 진주성 비거 설화를 지역 관광 상품화 하려고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비거 설화는 일반 야담과 달리 역사적 대사건과 맞물려 있어서 신중해야 하고, 고증이 필요하며, 무작정 역사적 사실이라고 해서도 안 된다. 이를 들어 반대하는 시민도 있어서 논쟁 중이다.
이 와중에도 진주시는 작년 12월에 전국 어린이 비거 상상화 그리기 대회를 개최하였다.
비거의 존재가 역사적 사실이 아닌데도 역사적 사실인냥 아이들에게 주입하는 것은 바른 일이 아니다.
1. 허구 인물 정평구가 비거를 만들었다는 설화가 어떻게 사실인양 퍼져 나갔나?
매일신보 기자 심우섭(沈友燮)이 천풍(天風)이라는 필명으로 1914년 8월 21일자 기사에 정평구라는 이름을 적었다.
일제는 1913년 해군 기술장교 내량원삼차(奈良原三次 나라히라)를 파견해 서울 용산 일본군 주둔지 연병장에서 일제가 제작한 날지 못 하는 초기 프로펠러 비행기 봉호(鳳號 오토리고)를 과시하는 대회를 개최하더니, 그 다음 해인 1914년 8월 19일에 성능을 개량한 비행기를 동원해 비행대회를 열었다.
심우섭은 이 날의 대회 광경을 전하며 조선에도 일찍이 임진왜란 때 정평구가 공중을 나는 기계를 만들어 진주성에 날아 들어가 친구를 구했다면서 후세가 더욱 발전시켜 왔다면 지금과는 반대로 조선의 비행기를 보려고 세계에서 모여 들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임진란리에 경남 진쥬셩이 함낙되얏슬 때에 그 디방에 사는 뎡평구(鄭平九)라는 이가 긔계를 만들어 공즁을 날너 셩 안으로 들어가 자긔의 친구를 구하야 늬엿다는 사젹이 력사에 분명이 잇으니, 그 긔계도 또한 지금 것과 꼭 갓흘는지는 질졍히 말할 슈 없으니 엇지 하얏던지 공즁을 날으기는 일반이라.
일로 볼진데 우리도 얼마나 됴흔 죠상을 뫼셧으며 후셰의 사람은 얼마나 계을너 자포자긔한 것을 가히 알지로다. 만일 우리가 능히 조샹의 뜻을 이어 더욱 발달하얏드면 셰샹에 비행긔 구경군은 몬져 우리 죠션으로 모혓스리로다. (天風)
- 천풍, 매일신보 1914. 8. 21
심우섭이 매일신보에 정평구라는 이름을 등장 시킨지 5년이 지나서 1919년 12월 신한청년당이 발간한 신한청년 창간호에서 가상 인물 정평구의 활약상이 더 늘어났다. 신한청년당은 영자 중국 신문이 실었다고 하였다.
鄭平九는 비행거를 만들어 왜군 小西行長의 진영을 정찰하였다. 또한 임진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 英文滬報(영문호보), 한국민족의 문화 창조, 창간호, 신한청년 1919. 12
심우섭이 끌어 들인 가상 인물 정평구가 날으는 수레를 만들었다는 소설은 급기야 사실이라고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신규식에게까지 독립의 당위성 홍보계획 보고서로 올라 갔다.
鄭平九(정평구)가 飛車(비거)를 發明(발명)함은 3百餘年前(300여년 전)의 事實(사실)이니라.
- 大韓民國臨時政府의 要求書, 國務院 呈文 제27호, 대한민국 임시정부 1921. 9. 8
이 내용을 그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간행지 독립신문 1921년 11월 11일자에도 실었다.
이 허구가 역사적 사실로 급속히 퍼져 나간 이유는 강조하지 않아도 영토를 일시 점령 당한 상태에서 민족의 자긍심과 조국의 일치단결을 위해서 검증 없이 서로 암묵적으로 수용하여서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평구라는 이름만 등장하였을 뿐이다. 그러다 한글학자 권덕규(權悳奎 1890 ~ 1950)가 풍문을 듣고서 1920년 신문 기고문에서 정평구가 전라북도 김제 사람이라고 하였다.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때의 일인데 정유재란 때라고 잘 못 적기도 하였다.
91. 晉州城(진주성)은 慶南道(경남도)의 治(치)니 宣祖(선조) 丁酉(정유) 陷落時(함락시)에 金提人(김제인) 鄭平九(정평구)가 飛車(비차) 곳 今飛行機(금비행기)를 製乘(제승)하고 友人(우인)을 救出(구출)하니라.
- 권덕규, 조선민족과 문화상으로 본 백구백인, 동아일보 1920. 7. 25
한편 친일파 최남선은 권덕규의 발언을 받아 들여서 정평구가 김제 사람이라는 주장을 따랐다.
五四. 朝鮮(조선)의 文化上(문화상) 影響(영향)
嶺南(영남)의 孤城(고성)이 被圍(피위)하였을 時(시)에 飛車(비거)를 制(제) 하여 城外(성외)를 交通(교통)한 것이 古記(고기)에 보이고 혹 傳(전)하되 一代(일대)의 巧人(교인)으로 亂中(난중)의 南地(남지)에 여러 가지 奇蹟(기적)을 나타낸 鄭平九(정평구) 그 作者(작자)라 하니, 이제 그 制(제) 를 詳(상)치 못하나 이 所傳(소전)에 반드시 本(본)한 바 있을지니라.
- 최남선, 임진란(壬辰亂) 1931
185 飛車 - 申景濬(신경준)의 <車制對策(거제대책)>에 가로대, 壬亂中(임란중)에 嶺南(영남)의 孤城(고성)이 바야흐로 重圍(중위)에 빠져 곳 陷落(함락)이 될 참인데, 어느 사람이 城主(성주)로 더불어 親(친)하고 본디 奇技(기기)를 가진지라, 이제 飛車(비거)를 만드러 타고 城中(성중)으로 드러가서 그 友人(우인)을 태워 가지고 다시 飛出(비출)하야 三十里許(삼십리허)에서 地上(지상)으로 나려오니라 한 것이 잇다. 全羅道(전라도) 地方(지방)에서 그를 金堤人(김제인) 鄭平九(정평구)라고 전하야 온다.
- 최남선, 제62장 신무기(新武器), 고사통(古事通) 1943
진주성 1,2차 전투에서 진주목사는 각각 김시민(金時敏)과 서예원(徐禮元)이었으나, 김시민은 왜군의 조총에, 서예원은 왜군의 칼에 전사하였으므로 살아서 진주성을 빠져 나가지 못 하였다. 따라서 허구 인물 정평구는 진주목사를 구한 사실이 없다.
정평구에 대한 설화는 김제시 부량면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말로 전해져 왔으며, 김제 유학자 송기면(宋基冕 1882 ~ 1956)은 사후 1959년에 발간한 유재집(裕齋集)에 정평구전(鄭平九傳)을 따로 실어서 지역에 내려오는 정평구 설화를 채집해 놓았다.
유재집 정평구전에는 막상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와 관련해서 정평구가 비거를 만들었다는 설화가 없다. 癸巳 晉陽之亂 其友在圍中 用計超入 與之俱出(계사년 진양의 난에 그 친우가 포위 가운데 놓이자 계책을 써서 뛰어 들어가 더불어 함께 나왔다)라고만 되어 있다.
그런데 정평구전에 따르면 1593년 진주성 2차 전투에서 활약했던 정평구는 무려 43년 뒤인 1636년 12월에는 청군과 싸웠다.
平九 背負一籠 向軍前放溺戱辱 淸人追之(평구가 대바구니 하나를 등에 진채 군대를 향하여 앞에서 방뇨하면서 조롱하여 욕을 하자 청인이 쫓아 왔다). 棄籠而走, 開其籠 有蜂亂出 螫人(대바구니를 버리고 도망쳤고, 그 바구니를 열자 벌이 있어 어지럽게 나와 사람을 쏘아댔다). 又負籠戱如前棄走, 疑有蜂焚之中 發火藥 近者皆斃(다시 대바구니를 진채 전과 같이 조롱하고는 대바구니를 버려두고 달아났더니, 벌이 있을까 의심하여 태우던 중에 화약이 폭발해 가까이 있던 자는 모조리 죽어 엎어졌다).
- 송기면(宋基冕 1882 ~ 1956), 정평구(鄭平九), 전(傳), 유재집(裕齋集) 1959
이 애국 설화는 계절을 무시하고 있다. 벌은 겨울을 버티려고 벌집 안에서 서로 맞대고 뭉쳐 몸을 떨어 열을 내서 체온을 유지한다. 밖에 나가 날아 다니면 매서운 추위에 바로 얼어 죽는다.
정평구는 가상의 인물이다. 정평구를 언급한 사람들은 정평구의 실존 여부에 대해서 다들 옛 기록에 있다고들 하지만 그 옛 기록을 보여 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김제시에서 정평구를 실존인물로 둔갑시키기려고 애를 쓰고 있다.
디지털김제문화대전에 따르면 김제시 부량면 신두리에 있는 묘가 정평구의 묘이며, 평구는 호이고, 본명은 정유연(鄭惟演)이며, 부량면 제월리에서 1566년 3월 3일에 태어나 1624년 9월에 죽었다고 한다.
묘비에 平九東萊鄭公惟演之墓(평구 동래 정공 유연지 묘)라고 새겨 놓기까지 하였다. 심지어 소시적부터 호학천재였고, 병법과 축지법에 능통하기조차 했다는 황당한 글까지 새겨 놓았다.
정유연이 1591년(선조 24년) 25살에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으로서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 의해 진주병영 별군관(別軍官)이 돼 진주성 1차 전투에서 김시민 휘하에서 화약을 다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유연이 16세가 되던 해인 1582년(선조15년)에서 임진왜란 발발 전년도인 1591년(선조 24년)까지 실시한 식년시, 증광시, 별시 합격자 명단 어디에도 정유연이라는 이름은 없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선조 25년에는 무과 시험을 실시하지 않았다.
또한 별군관은 중앙 군영인 금위영, 어영청, 수어청, 훈련도감 소속이라서 서울 동부와 경상도 병력을 관할하던 용양위에는 없었다. 육군의 지방 무관 말직은 중앙 무관 별군관이 아니라, 계급은 종9품 전력부위로 보직은 병졸 400명으로 구성하는 초(哨)를 지휘하는 초관(哨官)이다.
정평구 설화를 채집해 기록으로 남긴 동향 사람인 송기면조차도 정유연을 알지 못 했다. 그래서 지역 설화에 떠도는 이름인 정평구를 그대로 가져다 정평구전을 기술하였다. 비거 설화가 한국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기 훨씬 전인 1980년에 출판한 구비문학대계에 따르면 지역 민담에서도 평구는 호가 아니라, 본명이었다.
옛날 한 대감이 계신데 꿈을 뀌니깨 달이 입으루 넘어가. 이것이 태몽 꿈이거던. 물론 마누래하구 교제를 하면은 큰 놈을 낳게 생겼다 이 말이야. 그래서 마누래를 가서 겁탈을 할라니 마누래가 입태(入胎)를 했다 그 말이여. 그러니 좋은 꿈을 그대루 할 수두 없구 꿈을 뀌면은 그 꿈을 그걸 내우간에 교접을 허구 말을 하는 것이라누만. 그냥 말 않는 것이래야. 그래서 헐 수 없이 자기 밑에 있는 그 종을 가서 그대루 했단 말이여. 히여 가지고 그 애를 낳는데 남자여. 그래서 이름을 짓는데, 대갬이 정대감인데, 정평구로 이름을 졌어.
- 조희웅, 서울특별시 도봉구편, 구비문학대계 1-1, 1980
1884년과 1895년에 각각 발간한 김제읍지와 김제군지에 托蹟 滑稽, 遊心放狂(탁적하면서 익살스러웠으며, 마음 씀을 이치에서 벗어나 함부로 하였다). 丙亂赤身通格淸陣(병자호란 때 알몸으로 오가며 청군 진영에 맞섰다)라고 적었다.
[주]
托蹟(탁적) : 의탁하여 따른다는 뜻으로, 속세를 떠나 마음과 몸을 자연에 맡긴채 산, 골짜기, 광야 등에서 사는 것을 말한다. 불교의 중들도 간혹 산 속 사찰에서 사는 일을 탁적이라고 표현하였다.
김제시에 따르면 정유연은 1624년에 사망했다고 했으니, 1636년에 발발한 병자호란에 참전할 수 없다. 따라서 정유연은 병자호란에 참전한 설화 속 허구의 인물 정평구가 될 수 없다. 허구의 인물 정평구 역시 정유연이 될 수 없다.
2. 조선 실학자 이규경이 상상한 날으는 수레
한국 역사에서 글로써 최초로 날으는 수레(비거)를 논한 사람은 신경준(申景濬)이다. 신경준은 1754년 여름 호남좌도 증광시 향시에 응시해서 영조가 수레를 논하라며 책문을 내리면서 방외로 괴이한 이야기인 삼륜거와 비거에 대해서도 논해 보라는 말에 답하면서였다.
問(묻노라). 車之爲器 其利博哉(수레의 기물됨은 그 이로움이 크다). 隨其所用 名亦各異(그 소용에 따라서 이름 역시 각각 다르다). 有路車焉 有戎車焉 有乘車焉 有田車焉 有水車焉( 제후가 타는 수레(노거)가 있고, 싸움에 쓰는 수레(융거)가 있고, 이동할 때 타는 수레(승거)가 있고, 짐을 싣는 수레(전거)가 있으며, 물을 나르는 수레(수차)가 있음이라)! 其制可得詳聞歟(그 제도를 어찌 얻는지 상세하게 들려 줄 수 있겠는가)? 始刱昉於何代 而取衆亦在何物歟(시초가 비로소 어느 시대에서 비롯하였으며, 취하는 많은 물건에는 또 어떤 물건이 있는가)? 車服以庸 書稱命德之器, 大車以載 易取求贒之象(수레와 옷으로써 사람을 씀을 서(書)에서는 덕이 있는 자에게 벼슬을 내리는데 쓰는 기물이라고 칭하고, 큰 수레에 태우다를 역(易)에서는 어진 이를 구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其義安在(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數車以對 見於戴經, 乘殷之輅 著於魯論(수레가 몇 대인지 물어서 답한다 함은 대경(예기)에서 볼 수 있고, 은나라의 수레를 탄다 함은 어론(논어)에 나타나 있다). 其義云何(그 뜻이 어찌 되는가) ? 三輪自運 漢儒著論, 飛車從風 博物記異(세 바퀴가 저절로 움직인다고 한의 유학자가 적어서 논하였고, 비거는 바람을 따른다고 박물지에 괴이한 일로 기록하였다). 其制可得聞歟(그 제도를 어찌 얻는지 들려 줄 수 있겠는가)?
對(답하옵니다). 三輪自運之論 曾所未覩(세 바퀴가 저절로 가는 것을 논한 바를 일찍이 보지 못 했나이다). 何敢強瞞爲解(어찌 감히 억지로 속여서 풀이를 하겠사옵니까)? 而嘗有臆揣者(전에 생각하여 헤아려 본 바는 있사옵니다). 設二輪如常車之制 而作一牙輪 置於兩輪之前 以機挑之 則可以自運(일상적인 수레를 만듬과 같이 두 바퀴를 설치하고, 톱니바퀴 하나를 만들어 양쪽 바퀴의 앞에 배치하여 틀을 돌리면 곧 가히 스스로 움직일 것이옵니다). 漢儒之說 或與是近乎(한나라 유학자의 논함이 혹시 이에 가깝게 따르지 않았겠사옵니까?)
飛風之車 奇肱之人所乘而來於殷湯之世者(날으는 바람의 수레는 기굉의 사람이 지역에서 타고 온 것으로서 은나라 탕왕 시대 것이옵니다). 而不過張華之志怪也(장화의 괴이한 기록에 불과하옵니다). 不足煩說(번거롭게 말하기에 조차 부족하옵니다). 而洪武年間 倭寇圍嶺邑(홍무 연간에 왜구가 영남의 읍을 에워쌌었습니다). 有隱者敎邑守以車法 登城放之一去三十里, 此亦飛車之類也(은둔하던 자가 있어 읍의 수령에게 수레의 법을 가르쳐서 성에 올라 일거에 30리(12km)를 달아나게 하였으니, 이 또한 비거의 종류이옵니다). 人之才智 不可測度 有如是夫(사람의 재주와 지혜로 척도하기 불가한 이와 같은 사내가 있었사옵니다).
- 신경준(申景濬 1712 ~ 1781), 거제책(車制策), 잡저, 권8, 여암유고(旅菴遺稿) 1910
신경준은 가장 먼저 삼륜거와 비거에 대해 말을 하였다. 그런 다음에야 험준한 조선도 전쟁 중에 짐을 나르는데 수레에 의존했다면서 수레의 이로움과 필요성을 논하였다. 차례로 싸움 수레(戎車), 타는 수레(乘車), 물 나르는 수레(水車)제도를 중국의 예를 들어 가면서 조선의 형편에 맞추어 논하였다.
신경준은 비거에 대해서 논하기에는 번잡한 중국인의 괴이한 이야기라면서도 조선에도 비거 이야기가 있다고 답하였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사이에 영남에 노략질을 온 왜구가 읍성을 포위하자 은자가 나타나 수령에게 비거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줘서 비거를 타고 30리를 날아가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이 설화를 진지하게 받아 들인 사람도 있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이었다. 이규경은 자신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비거변증설(飛車辨證說)로 비거를 고찰하여 남겼다.
이규경의 비거에 대한 호기심은 서양에 관한 소문에서 비롯하였다. 상식적으로 수레는 땅으로 다니고, 배는 물로 다녀야 하는데, 서양에서는 수레가 하늘로 다니고, 배에 바퀴가 달려 있어서 굴러 간다고 하니 믿을 수 없지만, 기록이 있기에 안 믿을 수도 없어서 의혹을 풀고자 한다고 하였다.
러시아에 하루에 천리를 날아 가는 비거가 있으면, 조선에도 비거가 있었다면서 인용한 내용이 신경중의 여암유고의 거제책에 나오는 이야기였다.
今鄂羅斯距中夏數萬里(지금 악라사(러시아)는 중하(중국)에서 수 만리나 떨어져 있고), 介處歐邏巴中國之間(구라파(유럽)와 중국 사이에 있는 곳으로), 而製飛車輪凡四 而日行千里云(바퀴가 무릇 4개인 비거를 제작하여 하루에 천리를 다닌다고 한다). 且西隖人有飛車 全用橐籥 轆轤之術 鼓風生氣 浮行空中 水陸無礙 利於臨亂禦敵云(또 서오인(사라센인)에게도 비거가 있어서 온전히 풀무를 이용하는 도르래의 기술로 바람을 보내 기운을 일으켜 공중으로 떠올라서 가니 물과 뭍에 거리낌이 없어서 난리에 직면해도 적을 막는데 유리하다고 한다). 不能目擊 則其有無 不可知者, 苟求其理 則亦出氣法(능히 직접 눈으로 볼 수 없으니 곧 그 유무를 아는 것이 불가하나, 겨우 그 이치를 구한다면 곧 역시나 기운을 쓰는 법에서 나왔을 것이다) .
近世申丞宣【景濬 湖南淳昌郡人 卽申末舟後裔云】嘗對策車制曰(근세에 신승선【이름이 경준이고, 호남 순창군 사람으로, 즉 신말주의 후예라고 한다】이 수레 제도의 책문에 답하여 말 하기를), "壬辰倭酋猖獗也(("임진년에 왜추가 창궐하였습니다). 嶺南孤城 方被重圍 亡在昕夕(영남의 고립된 성은 바야흐로 겹겹히 포위 당해서 망하는 것이 아침 저녁에 있었사옵니다). 有人與城主甚善 而素抱異術, 迺作飛車 飛入城中 使其友乘而飛 出行三十里 而卸於地上 以避其鋒(성주와 친하여 사이가 돈독한 사람이 있어서 평소에도 이상한 술법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에 비거를 만들어 성 안으로 날아들어 그 벗을 태우고 날아서 30리를 출행하여 땅 위에 내려 놓음으로써 그 칼날을 피하였나이다)"라고 하였다). 若然 則自昔有其制 而東人亦能之 特未之傳於世也(만일 그러했다면 곧 자연히 옛날에도 그 법도가 있었고, 동쪽 사람도 역시 능히 그러했을텐데, 다만 세상에 전해지지 아니 했을 따름이다).
신경준이 고려말에서 조선초 사이에 왜구의 침입 때 비거를 만들어 탈출했다고 했는데도 이규경은 과거시험 답안지 내용을 다르게 전해 들어서인지, 임진왜란 때 비거를 사용했다고 하였다.
이규경은 원주와 평창이 비거에 관한 책이 숨겨진 곳이라는 헛소문도 전해진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새로운 인물도 추가하였다. 바로 효자로 알려져 왕에게서 정려(旌閭), 동몽교관(童蒙敎官)이라는 포상까지 받은 효자이자 가난한 농부인 윤달규(尹達圭)이다. 윤달규가 비거 만드는 법을 적어 둔 책을 감춘채 보여 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有人傳 北原與魯山藏飛車之書者云, 無乃齊東之說也歟(북원(원주)과 노산(평창)이 비거의 책을 숨긴 곳이라고 전한 사람이 있는데, 어찌 제동지설이 아니 겠는가)? 有人以爲嘗見原州人所藏一書, 則飛車制(옛날에 원주 사람이 소장한 한 책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는데, 곧 비거의 제도라고 한다). 以草乘四人而作鵠形 鼓腹生風則浮上空中 能行百丈(풀로 네 사람이 탈 수 있게 고니 모양으로 만들어 배를 두들겨 바람을 일으키면 곧 공중으로 떠올라 능히 백장(303m)을 간다고 한다). 然過羊角風 則不得前進而墜, 遇狂風則不可行(회오리 바람이 지나가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하고 떨어지며, 광풍을 만나면 다니지 못 한다고 한다). 制詳尺度云(제도의 상세한 척도를 정해 놓았다고 한다).
[주]
제동지설(齊東之說): 맹자 만장상(萬章上)편에 나오는 말로 제나라 동쪽(산동성 동쪽) 농민은 간사한 무리로서 말에 근거가 없어 믿을 수 없다는 뜻이다. "此非君子之言 齊東野人之語也." (군자의 말이 아닌 이 것은 제나라 동쪽 야인의 말이다.)
全州府人金時讓言 "湖西魯城有尹達圭者, 明齋之支裔 善造巧器(전주부 사람 김시양이 말 하기를 "호서(충청도) 노성(논산)에 윤달규라는 자가 있는데, 명재(윤증)의 방계 후예로 정교한 도구를 잘 만든다). 又有飛車制度記載以置 然祕不示人云, 未知其詳"也( 또한 비거 제도도 있어서 기재하여 두었지만 비밀로 하여 사람에게 보여 주지 않는다고 하니, 그 상세함을 알지는 못한다"라고 하였다).
윤달규는 1778년생이고, 이규경은 1788년생이다. 동시대 사람이므로 비거에 대해서 정말 궁금했으면 제3자가 그러는데 윤달규가 비거 설계도를 숨겨 놓고서 안 보여 준다더라 하고 말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 가서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서울에서 논산까지라서 험한 길도 아니었다.
서양 비거의 구조와 작동법을 궁금해 하던 이규경은 북경에 가는 사람들이 왜 서양의 비거에 관심이 없는지 안타까워 하였다.
我人每入燕都 或接鄂羅人 而未嘗叩其制度 但求其玻瓈鏡窯 何哉短於經濟故也(내 나라 사람이 매양 연도에 들어 가서 어쩌다 악라 사람을 접촉하여도 그 제도를 시험 삼아 물어 보지 않고, 단지 그 구워 만든 유리거울이나 구하는데, 왜 그러하냐면 경제에 단순해서이다).
이규경은 자신이 상상한 비거 제작 방법을 설명해 놓았다.
苟欲倣象其制 先作一車如飛鳶而摶羽翼焉(만일 그 제도의 형상을 모방하기 원하면 먼저 하나의 수레를 만들어 날으는 솔개처럼 깃과 날개를 붙혀야 한다). 設機其內, 人乘其中 轉機若泅人之游泳, 似尺蠖之屈伸 俾生風氣, 則雙翮自能翶翔 奄作一瞬千里之勢(그 안에 기계를 설치하고, 그 안에 사람이 타서 수영하는 사람이 헤엄치듯이, 자벌레가 굽히고 펴듯이 기계를 부려 바람의 기운을 일으키면, 곧 양쪽 날개가 저절로 능히 날아 올라 문득 한 순간에 천리를 가는 형세를 이룬다). 列寇旬五之返, 大鵬三千之擊 何以過此(열구(열자)가 보름만에 돌아오고, 대붕이 삼천리를 치는 것이 어찌 이보다 나을 것인가).
其機專在於絙索 縱橫聯絡 伸縮互纏(그 기계에는 오로지 줄이 있어 가로세로 연속으로 이어져 늘어나고 줄어들며 서로 얽혀 있다). 絙行機中 鼓橐生風 則兩翅扇動 劃然浮泛於勁風大氣之上(줄이 기계 안에서 행하여 풀무질로 바람을 일으켜서 곧 양 날개와 부채를 움직이면, 문득 저절로 센 바람에 의지하여 대기 위로 떠오른다). 其勢有不可遏, 此是以氣爲機, 以烏爲師 則思過半矣(그 기세에는 저지하는 것이 불가함이 있는데, 이는 무릇 기운으로써 기계를 다스리고, 새를 모범으로 삼았음을 바로 반 이상 깨닫는다). 理在其中, 然自歸臆說, 存而不論可矣夫(이치가 그 안에 있으나, 자연스럽게 억지 소리라서 끝내고서, 놓아 둔채로 논하지 않음이 옳으리라).
사람의 힘으로 톱니바퀴와 도르래를 이용하여 커다란 연을 타는 모습에 가까운 설명으로, 깃과 날개를 단다는 면에서 장화가 쓴 박물지라는 괴기 소설에 나오는 깃털을 다듬는 기굉국 사람을 연상하게 한다. 奇肱民善為拭扛以殺百禽(기굉의 백성은 온갖 날짐승을 죽여서 둘러 매고 깨끗하게 닦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의 힘으로는 풀무로 도르래를 이용해서 날 수 있는 센 바람을 일으킬 수 없다.
이경규 본인도 자신의 상상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이치를 알 것도 같지만 막상 보면 억지스러우니 논하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해국도지에 비거 그림이 있으니 보라고 하며 비거변증설(飛車辨證說)을 마무리 한다.
海國圖志 有飛車圖 以俟後考(해국도지에 비거 그림이 있으니 기다려서 나중에 살펴보기 바란다).
임칙서는 1839년 흠차대신으로 광동성 광주로 나가 아편 무역을 단속하는 업무를 수행하며 영국과 교섭하던 중 휴 머레이(Hugh Murray)가 1834년에 저술한 지리백과전서(An Encyclopedia of Geography)를 입수하였다. 임칙서는 지리학자 위원(魏源)에게 이 책을 번역하여 편집하도록 하였다. 위원이 이 책을 기반으로 하여 사주지(四洲志)를 추가해 둘을 편집해서 1842년에 50권짜리로 펴낸 지리서가 해국도지(海國圖志)이다. 위원은 1848년에 60권으로 늘렸으며, 1852년에 100권으로 다시 늘렸다.
이규경이 비거에 대해 관심을 갖은 계기가 해국도지의 존재였다. 그렇지만 이규경은 해국도지에 대한 소문만 들었지, 실제로 읽은 적은 없었기에 해국도지에 비거 내용과 비거 그림이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결론적으로 임진왜란 비거 설화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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