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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우동, 짜장면, 짬뽕의 유래

허구인물 전우치 2022. 1. 14. 19:52

인천에 상륙한 청인의 수는 1883년 72명에서 1884년 4월 2일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을 체결하자 꾸준히 증가해서 1890년에는 정착인이 967명으로 늘었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산동성과 가장 활발하게 교류를 했었다. 자연스럽게 초창기 화교도 95%가 산동성 출신이었다. 이로 인해 한국 초기 중화요리는 산동요리(山東菜)가 중심이 되었다. 

여기에 이후 광동요리와 북경요리가 가세하였다. 한국에서 산동요리는 인천 중화루(中華樓)와 공화춘(共和春)이 중심이었고, 북경요리는 서울 아서원(雅敍園)과 대관원(大觀園)이 중심이었으며, 광동요리는 서울 사해루(四海樓)와 금곡원(金谷園)이 중심이었다. 서울 아서원과 대관원도 산동 출신 화교가 개업했으나, 판매 요리는 북경요리였다.

화교는 초기에 중국인을 상대로 요식업에 뛰어 들었다. 점차 화교 자체 시장에서 벗어나 한국인을 상대로 영업에 나섰다. 1930년에는 전국에 대형 중화요리점과 중형 중화요리음식점이 1,635 곳, 소형 과자점인 호떡집이 1,139 곳이나 되었다. 

이렇게 퍼져 나간 화교들은 대륙의 요리를 한국식으로 바꾸거나 새로운 한국식 중화요리도 개발했다.

 

중구 소공동 105번지 중화요리음식점
1960년대 중구 소공동 중화요리점 거리

일제의 침략 기간 내내 화교의 경제력은 한국에서 성장할 수 없었다. 해방 후에도 6.25 동란 참화로 인해서 화교의 경제력은 미미했다. 화교들은 중구 소공동으로도 모여 들었다. 1960년대 초중반에 소공동에서 화교 30가구가 중화요리 음식점을 했으며, 입학식과 졸업식 대목에는 호황을 누렸다. 그 중 23가구가 2,568평을 소유하고서 1층에서 요리점을 하면서 2층에서 거주하였으며, 일부는 따로 주택을 소유하였다.  1966년 서울시는 7개 지역 재개발 계획에 소공동을 포함하였고, 토지 보상을 다른 지역의 토지와 교환해 주는 기존의 방식 대신에 15층 이상의 건물 세 동 가운데 한 동으로 교환해 주기로 하였다. 화교들은 그 건물을 화교회관으로 삼기로 하였다. 화교들은 1971년 서울시가 마련한 을지로에 있던 내무부 소유의 부지내 가건물에서 영업을 재개하였으나, 영업이 되지 않아서 적지 않은 수가 휴업하였다. 이러한 때 한화기업이 평당 가격을 당시 거래가(2~3만원)보다 최소 10배에서 최대 36배까지 제시하자 소공동 땅을 팔고서 대만으로 귀국 또는 미국으로 나가거나, 극소수가 소공동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흩어졌다. 이로 인해 대만국 장개석마저 나서서 2억원 지원 계획까지 밝혔던 화교회관 사업 추진이 멈췄다. 외교적 파장이 생기자 서울시장이 박정희의 허락을 받아 대만으로 가 사과를 표명할 정도였다. 화교들의 중화요리 음식점 거리에는 플라자 호텔이 들어 섰다.

 

1. 한국식 중국음식 대로면(大滷麵)과 일본 우동(饂飩온돈)

 

현재 우동이라고 부르는 면 요리는 일본 우동이 아니라, 대로면이다. 대로면은 산동성 복산(福山) 지역의 굵은 국수(大麵) 요리를 한국식으로 재료를 바꾼 면 요리다. 인천 중화루와 공화춘 주인이 모두 산동성 복산 출신인 점도 대로면이 복산대면(福山大麵)에서 유래했음을 알게 해준다 .

흔히 대로면(大滷麵)이 울면(溫滷麵 온로면)과 비슷하다고 했었다. 모두 로면(滷麵)이어서다. 그런데 초기에는 대로면 국물과 울면 국물에 녹말을 풀었으나, 이후 대로면은 녹말을 빼고 맑은 국물로 내면서 차이가 생겼다. 다른 차이는 대로면은 계란탕면이고, 울면은 해물면이라는 점이다. 

일제 강점기 공화춘 차림표를 보면 대로면은 있으나, 울면은 보이지 않는다. 다른 중화요리 식당에서 울면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으나, 공화춘에서는 울면을 나중에 추가했다.

 

면류: 129 口苿麵(구미면= 주:버섯국수), 130 鷄絲麵(계사면=닭고기국수), 131 三鮮麵(삼선면=해물 대로면), 132 蝦仁麵(하인면=참새우국수),  133 大滷麵(대로면=계란국수), 134  炸醬麵(작장면=짜장면), 135 炒麵(초면=볶음국수), 137 餛飩(혼돈=저며서 작고 둥글게 뭉친 돼지고기 국수), 138 餃子(교자=만두), 139 三鮮餃子(삼선교자=해물만두), 140 蝦仁餃子(하인교자=참새우만두), 141 狀元餃子(장원교자=강소성 소주 만두), 142 炸餃子(작교자=만두튀김), 143 炒干飯(초간반=볶은 마른밥), 144 苜蓿干飯(목숙간반=개자리 볶은 마른밥), 145 火腿炒飯(화퇴초반=절인 돼지다리고기 볶음밥), 146 十錦炒飯(십금초반=모듬 볶음밥), 147 鷄絲炒飯(계사초반=닭고기 볶음밥).
- 일제강점기 공화춘 차림표중 면류 부분

반면 일본인은 라면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모든 밀가루 국수를 우동(饂飩온돈)이라고 했다. 라면이 등장하자 비로소 국수를 단로롭게 우동으로만 부른데서 벗어나 라면이라고도 부른다.

이 온돈(饂飩)이라는 단어는 중국어 훈툰(餛飩 혼돈)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일본 중세 백과사전인 화명류취초에서 확인할 수 있다.

 

餛飩餅. 剉肉麺裹煮之.(혼돈은 떡이다. 고기를 저며서 국수로 싸서 삶는다.)
- 권16 음식부, 화명류취초(和名類聚抄) 934

 

혼돈은 고대 중국 돼지고기 국수로서, 일본 우동(饂飩)의 기원이다. 이는 돼지고기 우동이 되었고, 돼지고기 라면으로 이어졌다.

한국에서 영업하던 중화요리점과 중화요리식당은 초창기부터 돼지고기 국수인 혼돈과 대로면을 팔았으나, 일본의  우동(ウドン)을 팔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인은 중국 면 요리를 종류 불문하고 다 무조건 우동이라고 불렀다. 혼돈을 돼지고기를 넣은 우동, 대로면을 닭알을 넣은 우동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당시에는 일본인이 모든 면 요리를 우동이라고 부르는 것과 구분하기 위해서 청면이나 호면이라고 하면서 면 요리마다 따로 세세하게 구분하여 불렀으나, 이후로 일본인의 호칭이 그대로 굳어져 현재 한국인마저 대로면을 우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일제 강점기만 해도 달걀 가격이 꽤 비싸서 10개 가격이 소고기 1근 가격에 육박했기에 계란탕면으로 판매할 수 있었으나(소고기 한 근(600g) 50전, 계란 10개 47전, 조선일보 1926.2.10), 양계업의 발달로 달걀 가격이 하락하면서 대로면을 계란탕면에서 점차 삼선면이나 안 매운 초마면 형태로 바꾸었다. 

 

2. 한국식 중국음식 짜장면(炸醬麵 작장면)

 

검은 된장(춘장)을 중국 동북 3성에서 먹었다. 산동성 출신 화교들이 인천과 서울에서 같은 청인을 상대로 팔던 검은 된장으로 만든 작장면을 1920년대에 한국 시장에 도시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뛰어 들면서 한국인의 식성에 맞추어 맛을 개선해서 한국화를 이루었다. 

 

放在中間的案上左邊是五大碗白麵右邊兩大碗一碗湯中央是一大碗烏鴉肉做的炸醬. 羿吃著炸醬麵自己覺得確也不好吃. 偷眼去看嫦娥. 她炸醬是看也. 不看只用湯泡了面吃了半碗又放下了. (중간에 놓아 둔 상 위에 흰 국수가 왼쪽에 다섯 큰 사발, 오른쪽에 두 큰 사발 그리고 국이 한 사발 있고, 가운데에는 까마귀 고기로 만든 작장(炸醬)이 한 큰 사발 있다. 예는 작장면(炸醬麵)을 먹고는 확실히 깨달았다, 맛이 없음을. 상아를 감시하려고 가서 훔쳐 보았다. 그녀는 작장(炸醬)을 보았다. 거들떠보지도 않고서 단지 국에 국수를 말아서 반 그릇을 먹고는 다시 내려 놓았다.) 
- 노신(魯迅, 1881~1936년), 분월(奔月), 고사신편(故事新編) 1936

 

짜장면은 매우 빠르게 한국인이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다. 짜장면은 1920년대 초에 가난한 사람마저 무리해서라도 즐겨 먹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물산장려운동을 독려하면서 부자는 양식을 즐기고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는데, 빈자마저도 미국의 면화로 만든 옷을 즐겨 입으며, 매일 먹는 음식이 궁중 잔치 음식이 아닐진데, 손님과 식사를 하면 항상 짜장면과 양장피를 먹는다면서 외국 음식 소비를 질책하였다. 

과거에 우리가 富饒(부요)한 자는 양식을 喫(끽)하고 양복을 着(착)하고, 양화를 用(용)하야 母財(모재)를 蠶食(잠식)하며, 빈궁한 자도 그 喫(끽)하고 着(착)하고  用(용)하는 물품의 가격은 비록 저렴하다 할지라도 그도 또한 자아의 고유한 물품이 아니라 그 着(착)한 의류가 박래품인 西洋木(서양목) 美國綿(미국면)이며, 그 끽하는 바가 비록 일상음식의 전부가 進宴(진연)함은 안이로대 療飢會客(요기회객) 등에 항상 복용하는 것이 작장면, 양장피 등이며, 
- 조선일보, 1923. 1. 23

춘장에 국수가 잘 안 비벼진다. 이를 해결하려고 고소한 맛을 내려고 기름에 볶은 춘장에 물을 부어서 묽게 만들어 녹말을 섞어서 국수가락에 춘장이 잘 달라붙게 만든 것이 지금의 한국식 짜장면이다. 여기에 설탕 단 맛을 추가하여 완성했다. 

한편 간짜장면(乾炸醬麵건작장면)은 옛방식에 가깝다 보니 되어서 녹말 짜장에 비해서 비비기 힘들고, 단 맛이 거의 없으면서 훨씬 더 짜다. 오래 전에 녹말 춘장에 고기와 양파 등을 조금 더 넣고는 간짜장이라고 파는 데가 늘어 나서 간짜장의 본래 맛이 사라지고 있다. 건작장면이 간작장면으로 발음이 변해서, 간짜장 하니까 개인이 자신의 입맞에 맞게 간을 맞춰서 먹을 수 있게 해준다라고 오해해서 다른 건더기를 조금 더 넣고서 따로 다른 그릇에 담아 주고서 돈을 더 받고 팔던 것이 이어지고 있다.

 

3. 한국 초마면(炒馬麵)과 일본식 중국음식 짬뽕(ちゃんぽん 짠뽐)

 

초마면은 한국인이 짬뽕이라고 부르면서 잃어버린 이름이다. 한국 짬뽕의 본 명칭은 초마면이다. 한국 초마면은 일본식 중화요리 짠뽐과 연관성이 전혀 없다.

1982년 증보판 민중서림 국어대사전에서도 "짬뽕: 일본어 ちゃんぽん. 1. 종류가 다른 술을 섞어 마시는 일. 혼음 2. 중국 음식의 하나. 국수에 각종 해물과 야채를 섞어서 볶아, 돼지뼈나 쇠뼈, 닭뼈를 우린 국물을 부은 것. 초마면"이라고 하고 있다. 초마면에서 한국 짬뽕이 유래한 것이 아니라, 초마면이 한국 짬뽕 그 자체다.

일제강점기 공화춘 차림표에 초마면이 없는 것으로 보아 초마면은 한참 이후에 나온 면 요리임을 알 수 있다. 

초마면(炒馬麵)은 중국에 없는 국수 요리다. 다만 호남성에 초마면(炒碼麵)이 있으나, 한국의 초마면(炒馬麵)과 다르다. 한국의 초마면은 화교들이 창조한 한국의 독자적인 면 요리다.

碼는 국수를 비벼 먹을 때 얹는 잘게 썬 야채와 고기를 뜻하는 채마(菜碼)라는 단어의 용법에서 보듯이 요리에서는 부재료를 의미한다. 호남성 초마면은 돼지 육수에 삶아 건진 국수 위에 따로 볶은 부재료인 야채와 돼지 고기를 가늘게 썰어서 조금씩 덜어 얹어서 양념에 비벼 먹는 비빔 국수다. 따라서 호남성 초마면(炒碼麵)은 부재료를 볶은 국수라는 뜻이다. 이에 반해서 한국의 초마면(炒馬麵)은 각종 해물과 야채를 함께 볶은 후에 고아서 우려낸 사골 육수를 부어서 흥건하게 먹는 방식이라서 전혀 다르다. 아니면 중국이 초마면의 기원을 가로채려고 최근에야 초마면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炒碼麵을 중국의 근대사에서 찾을 수 없어서이다. 더구나 한국은 중국과 1992년에야 수교를 했기에, 설령 호남성에 먼저 초마면이 있었다고 가정을 해도 인적 교류가 전혀 없었기에 그 영향을 받을 수도 없었다. 따라서 초마면은 한국 거주 어느 뛰어난 화교 주방장이 한국인을 위해 독자적으로 개발한 한국의 초마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식 중국요리인 짠뽐(ちゃんぽん)을  1899년 일본 장기(長崎)에 청국 요리집 사해루(四海樓)를 개업한 복건성(福建省) 출신 진평순(陳平順1883~1939)이 자신의 고향 음식인 탕육사면(湯肉絲麺)을 응용해서 만들었다고 그의 후손이 알리고 있다.

ちゃんぽんのル-ツは福建料理の『湯肉絲麵(とんにいしいめん)』である. 湯肉絲麵は麵を主体と して豚肉、椎茸、筍、ねぎなどを入れたあっさりしたス-プ. これに四海樓の初代 陳平順(ちんへ いじゅん)がボリュ-ムをつけて濃い目のス-プ、豊富な具、独自のコシのある麵を日本風にアレン ジして考案したものが『ちゃんぽん』である. (짠뽐의 뿌리는 복건성 요리의 '탕육사면(湯肉絲麵)'이다. 탕육사면은 주재료인 국수에 돼지고기, 표고버섯, 죽순, 파 등을 넣은 담백한 국이다. 사해루(四海樓) 창업자 진평순(陳平順)이 양을 더 늘려 진한 육수, 풍부한 건더기, 독자적인 쫄깃한 국수로 일본식으로 다듬어 고안한 것이 '짠뽐'이다.)
- 일본 사해루 자체 홍보문

정작 일본인은 지나우동(支那饂飩)이라고 부르면서 일본식 국수로 인정하지 않았다. 

보다시피 한국의 초마면은 해물 국수인데 반해서 일본식 중국 요리 짠뽐은 돼지고기 국수다. 또한 한국의 초마면은 고추가루를 풀어서 얼큰한데 반해서 일본식 중화요리 짠뽐은 과거나 지금이나 담백하다. 이렇게 재료와 조리방식, 맛이 엄연히 다르다. 

 

돼지고기 국수라면 이미 혼돈(훈탕)이라는 음식명으로 일제 강점기에도 판매하고 있었기에 따로 일본식 중국요리 짠뽐을 따라서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돼지고기는 지금과 다르게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지 않은 육류였다.

한국에 귀화한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어느 위대한 화교 주방장이 개발한 한국의 독자적인 국수 요리인 초마면이 처음 등장한 이후 계속 초마면이라고 불렀으나, 짠뽐이라는 일본어 단어가 끼어 들면서 1960년대 들어 명칭이 초마면과 짬뽕으로 혼재하고 있다가 이후로는 아에 초마면이라는 말을 밀어내고 짬뽕이라고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

 

산동 대로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