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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사판이라는 말은 어떻게 생겨 났을까?

허구인물 전우치 2022. 11. 7. 19:20

이판사판이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에 생겼다. 

조선시대에도 절은 대낮에 양반들이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면서 시조를 읊으며 놀자 기생집 같다는 소리를 듣다가, 일제의 식민지배를 당하면서 자본주의가 들어오자 더 극심해져서 일상적으로 음주가무를 즐기는 장소가 되고 말았다. 이는 역설적으로 사찰에 많은 수입을 안겨 주었다. 사찰 운영권과 재산 관리권을 오랜 역사 동안 대대로 쥐고 있던 대처승은 세속과 이재에 밝아서 세태를 잘 이용하여 사찰 수입을 극대화하였다. 절간에 돈이 가득 쌓이자 숨 죽이고 있던 선승들이 갑자기 들고 일어나 자신들 비구 선승이 주지승을 맡아서 사찰 운영권을 행사하고, 나아가 사찰 재산 관리도 자신들 선승이 맡겠다고 나서서 돈 버는 대처승은 참된 승려가 아니라, 선승을 보조하는 신도에 불과하니 절에서 나가 시주나 하는 신도로 살라고 주장하면서 불심을 내팽개친 채 돈에 혈안이 돼 진흙탕 개싸움을 일으켰다. 

바로 선승들의 돈 욕심에서 비롯한 선승 이판승과 대처승 사판승간의 돈 싸움에서 이판사판이라는 속어가 생겼다.

절간의 두둑한 돈을 서로 혼자서만 먹겠다고 다투는 이 이전투구는 나라가 해방을 하자 공식적으로 번졌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최근 조계종에 두 파가 갈려서 큰 싸움을 벌렸으며, 그 싸움은 정치적인 힘까지를 끌어 들여서 야단법석을 친 적이 있다. 그 것은 대처승과 비구승과의 싸움이었다. 방대한 불교의 사찰재산을 누가 차지하느냐 하는 문제는 경제적인 흡인력까지 발생하게 되어 아직도 끝이 나지 않고 법원에서 판단을 가리지 않으면 안 될 단계가 된 것이다. 본래 대처승들은 사회적인 활동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정게에 진출한 사람도 많은데 비해서 비구승측은 불교 본래의 은둔적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사실상 사찰의 운영권이 대처승측에 쥐어지고, 그 것에 반발을 한데서 싸움은 불교의 그 근본적 자세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은 채 장기화 하고 있는 셈이다.
- 조선일보, 1959. 2. 13

28일 상오 9시부터 서울 돈암동에 있는 신흥사에서 대처승측이 개최한 불교조계종 제16회 정기 중앙 총회에서는 불교 본래의 정신에 입각하여 비구측과 대처측이 서로 화합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하는 등 동시에 화동안 3대 원칙을 채택하였다고 한다. 한편 동 화동안은 앞으로 문교 당국자 입회하에 대처승측과 비구승측 대표가 각각 절충할 것으로 보이는데, 화종 3대 원칙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종단은 수행승과 교화승으로 구성하며, 2. 종정 및 주요 사찰 주지는 원칙적으로 수행승으로 하되 수행승 중에서 자격자가 없는 경우에는 교화승으로 충당하고, 3. 종회 구성은 수행승과 교화승 양측에서 동반수로 구성한다. 그리고 수행승이라는 것은 독신자로서 이판승을 말하며, 교화승이라는 것은 비독신자로서 사판승을 말한다.
- 조선일보, 1957.6.29

절간에 쌓인 돈을 두고 벌인 이권 싸움은 선승들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후로는 돈을 주무르는 총무원장 자리가 바뀔 때마다 선승들끼리 서로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면서 패가 갈려 벌이는 각목 패싸움은 불교계의 전통이 됐다. 최근에는 각목 패싸움 전통이 사라졌으나, 여전히 싸움은 이전투구다.

한국 대처승의 시조는 원효(元曉 617∼686)대사다. 원효는 귀족 집안에서 태어서 황룡사에서 수계를 받아 승려가 된 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설파하여 고승의 반열에 올랐다. 무려 240권의 불교 서적을 편찬하여 역대 승려중 가장 많은 저작물을 남겼다.

與元曉法師同志西遊行至本國海門唐州界 計求巨艦 將越滄波, 倏於中涂遭其苦雨 遂依道旁土龕間隱身, 所以避飄濕焉. 迨乎明旦相視 乃古墳骸骨旁也. 天猶霢霂地且泥塗 尺寸難前逗留不進 又寄埏甓之中 夜之未央俄有鬼物為怪. 曉公歎曰 前之寓宿謂土龕而且安, 此夜留宵託鬼鄕而多崇. 則知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 又三界唯心萬法唯識, 心外無法胡用別求. 我不入唐. (원효법사와 뜻이 같아 서역에 가려고 본국의 바닷길과 당국의 주 경계에 이르러 큰 배를 구해 장차 큰 바다의 파도를 넘으려고 했으나, 갑자기 길을 가는 도중에 그 많은 비를 만나서 마침 길 옆의 흙감실에 의지하여 사이에 은신하였는데, 이렇게 해서 회오리 바람과 습기를 피할 수 있었다. 아침이 되어 날이 밝아 서로가 보았더니 옛날 무덤 해골 옆이었다. 하늘에서는 오히려 가랑비가 내리고, 땅은 또 진흙탕이라서 전날처럼 머물기도 어렵고 앞으로 나갈 수도 없어서 도로 무덤 통로 벽돌에 기대고 있던 중에 한 밤중이 아닌데도 갑자기 귀물이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효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전 날에는 흙감실로 생각하니 잠시 묵었어도 편안했는데, 이 밤에는 머물면서 초저녁부터 귀신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고 핑게를 대고 있습니다. 즉 마음에서 (이 곳이 어디인지) 알고 나니 그로 인해 온갖 형상이 나타났습니다. 마음에서 (구별을) 없애니 감실과 무덤은 둘이 아닙니다. 또 3계도 오로지 마음에서 만 가지 형상으로 오직 아는 만큼 생기고, 마음 바깥에는 형상이 없으니 어찌 용도별로 (지식을) 구하겠습니까? 나는 당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  
- 당신라국 의상전(唐新羅國 義湘傳), 송고승전(宋高僧傳) 권4, 988

원효는 식자우환, 아는 것이 병임을 지적하면서 세상의 고뇌라는 것은 아는 만큼 마음에 생긴 고뇌이니, 잡스러운 생각을 떨치고, 무념무상으로 마음을 편하게 먹고 살면서 마음에 극락이라고 믿으면 극락이라면서 요석 공주와 결혼해서 아들 설총을 낳고 행복하게 살면서 한민족 대처승의 시조가 되었다. 태평성대에는 들어 맞는 말이다.

이렇듯 절도 돈 대는 사람이 있어야 들어 서고, 승려도 돈 주는 사람이 있어야 굶지 않고 놀면서 먹고 살 수 있으니, 사판승인 대처승이야말로 불교사의 양 기둥중 하나이자, 두 뿌리중 하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와서는 사농공상에서 보듯이 유교 사회에서 장사로 돈 버는 사람이 가장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특히 불교를 좌도라고 해서 의도적으로 멸시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돈 버는 사판승 대처승에 대한 시선은 특히나 더 좋지 않았다. 돈을 만지면 돈 냄새가 배듯이 대처승들은 이권 사업에서 부정을 저지르기도 해서다.

庚辰 持平宋翠啓 惠賛以商賈爲業, 帶妻無子僧也. 曾代納忠淸各官吐木, 欲徵其價往本道, 【國人謂燔瓦木曰吐木】 經歷崔敬明給驛馬帶行, 本府聞之, 推劾未畢, 例蒙恩宥, 未得科罪 然其情綢繆莫甚, 請罷其職, 以懲後來. 
경진일 지평 송취가 아뢰기를, 혜찬은 장사를 업으로 삼은 자식이 없는 대처승입니다. 일찍이 충청도 각 관청에 대신 납부해주고서 그 값을 징수하고자 본 도로 가는데 【나라에서 사람들이 기와 굽는 나무를 토목이라고 함】 경력 최경명이 역참의 말을 주어 데리고 가므로, 본 부에서 듣고 추핵을 마치지 않았사온데, 은유를 받아 죄에 대해서 형벌을 내리지 못 하오나, 그 성정이 꼬일대로 꼬인 것이 막심하오니, 그 직에서 파면하여 뒤에 올 것을 그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 1439, 세종실록

李則曰 今之僧徒, 率多帶妻者也. 若不屬公, 則必作妻家, 或營昆弟之家. 上曰 監司守令若能奉法, 何有新創寺刹? 若破寺材木, 不可屬公.
이칙이 아뢰기를 지금 승려의 무리들에 대개 대처자들이 많으니 만일 관청 재산으로 귀속하지 않는다면 즉 필시 처가의 집을 짓거나 혹은 형제의 집을 지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 말하시기를 감사와 수령이 만약 능히 법을 잘 받들었다면 어떻게 새로 사찰을 만들 수 있겠는가?  이에 허문 절의 목재를 관청 재산으로 귀속시킬 수는 없다라고 하셨다.
- 1478, 성종실록

先是, 司諫院啓 全羅道 羅州居僧覺頓卽永膺大君 琰代身僧也。 廣占田園, 多積財穀, 帶妻子家居, 混處閭閻, 多作弊, 令司憲府鞫之. 
이보다 앞서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도 나주에 사는 승려 각돈은 곧 영응대군 이염의 대신승입니다. 널리 전원을 점유하여 많은 재물과 양곡을 쌓아 두고서 처와 자식을 데리고 집에서 사는데, 처소에 여염이 섞여 있으면 많은 폐단을 만드니 사헌부에 국문하도록 명하셔야 합니다. 
-  1497, 연산군일기

 

한민족 대처승의 시조 원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