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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 대신 닭'의 유래!

허구인물 전우치 2022. 2. 5. 10:35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떡국에서 유래했다는 낭설이 수 십년째 떠돌고 있다.

과거 떡국엔 꿩고기를 넣어 국물을 끓인 것을 으뜸으로 쳤다. 국물을 만드는 주재료 중 꿩고기가 단연 맛과 식감이 좋아서다.
꿩고기는 맛은 좋은데 사냥을 하지 않으면 구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일반 가정에서는 닭을 잡아 닭고기를 떡국에 넣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도 여기서 유래됐다.
- 중앙일보 2022. 1. 30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떡국에서 나온 말이라는 주장은 6.25 동란 때 월남한 여성에게서 처음 나왔다. 

흰 떡국은 쇠고기 또는 닭고기 국물에 끓이지만 원래는 꿩고기 국에 끓이는 것. 그러나 꿩은 갑자기 쉬운 일이 아니고, 또 일반적으로 닭을 많이 길렀기 때문에 꿩대신 닭을 쓰고 닭이 없을 때는 쇠고기를 사용했다.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말이라고 최여사가 설명한다.
- 경향신문, 1976. 6. 17

설날 떡국에는 원래에는 꿩고기를 넣어서 끓였다. 그러나 꿩 대신 집에서 사육하는 닭으로 대치하게 되면서부터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 민속학 임동권, 경향신문 1981. 1. 1

이러한 주장은 과거 떡국에서 꿩고기 활용법과 전혀 다르다. 개인이 막연하게 상상했던 내용을 사실로 믿고 주장하였을 뿐이다. 

떡국 조리법의 변천을 보면 이 모든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1.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은 떡국에서 기원하지 않았다.

1818년 조운종(趙雲從)은 세시기속(歲時記俗)에 "餠湯 以打白餠 細截作湯(떡국은 흰떡을 치고 나서 잘게 끊어서 끓인다)"이라고 떡국 조리법을 최초로 소개하였다.

1819년 김매순(金邁淳)은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好稻米作末細篩, 淸水拌勻蒸熟, 置木板上 用杵爛搗, 分作小段 摩轉作餠體團而長如八梢魚股, 名曰拳模. 先作醬湯候沸 將餠細切如錢形投之以不粘不碎爲佳. 或和以豬牛雉鷄等肉(좋은 멥쌀을 가루 내어 체로 걸러서, 맑은 물을 골고루 뒤섞어서 쪄서 익히고, 목판 위에 놓고 공이로 곱게 치고 나서, 작은 덩어리로 나누어 문지르고 굴려서 문어발처럼 길고 둥근 모양으로 떡을 만든다. 이르기를 가래떡이라고 한다. 미리 준비한 장국을 끓이면서, 무릇 떡을 엽전 모양으로 가늘게 썰어서 넣으면 붙지 않고, 부서지지 않아서 좋다. 간혹 돼지, 소, 꿩, 닭 등의 고기를 넣기도 한다)"이라고 하였다.

떡국을 육수에 끓이는 것이 아니라, 장으로 간을 해가며 물에 끓였다. 떡국에 꼭 고기를 넣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떡국에 고기를 넣더라도 반드시 꿩고기가 아니라, 형편에 따라 돼지고기, 소고기, 꿩고기, 닭고기 등 가리지 않고 아무 고기나 넣었다.

이 기록을 끝으로 닭고기는 완전히 떡국에서 사라졌다. 즉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떡국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849년 홍석모(洪錫謨)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 "蒸粳米粉 置大板上 以木杵有棅者無數擣打引 作長股餠. 名曰白餠. 因細切薄如錢 和醬水湯熟, 調牛雉肉番椒屑. 名曰餠湯(멥쌀 가루를 쪄서 목판 위에 놓고 자루가 있는 나무 공이로 무수히 치고 나서, 늘여서 긴 가닥의 떡을 만든다. 이를 흰떡이라고 한다. 연이어 엽전처럼 얇고 잘게 썰어서 장국에 넣어 끓여서 익히고, 소고기와 꿩고기로 꾸미고 후추가루를 갈마들인다. 이를 떡국이라고 한다)"이라고 하였다.

여전히 장으로 간을 하며 물에 떡국을 끓이고, 냉면처럼 소고기와 꿩고기를 고명으로 올렸으며, 후추가루를 뿌렸다.

1924년  이인수(李寅洙)는 풍속조사(風俗調査)에서 "설날 접대에 빈부에 의해 차등이 있지만, 떡국(雜煮) 같은 것을 상하 공히 모두 한 모양으로 낸다. 즉 멥쌀(粳米)을 쪄서 그 것을 찧어 양초(西洋蠟燭)처럼 길게 뽑아 늘여, 비스듬히 옆으로 둥글고 얇게 썰어 이 것을 쇠고기국(牛肉汁)에 넣어 끓이는데, 이를 흰떡국(白餠汁)이라고 한다. 여기에 꿩 고기 및 야채를 넣고 후추 가루를 흔들어 넣어 섞는다"라고 하였다.

이 무렵부터 떡국을 소고기와 함께 끓이기 시작했고, 여전히 부차적으로 꿩고기를 고명으로 얹었다.

1935년 조선일보 기사에서는 "꿩의 고기로 맨드는 요리라면 첫재로 천리찬을 만들어야 하겟습니다. 천리찬은 꿩의 살을 아조 곱게 다져서 복가 가지고 정월 초하로날 떡국 위에 언저 먹는 것이랍니다"라고 하였다.

천리찬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꿩고기를 육수를 내는데 사용하지 않고 고명으로만 썼다. 

한편 1930년대에 꿩고기 요리가 다양해졌다. 서울에서는 꿩고기 만두가 유행하여 퍼져 나갔고, 평양에서는 꿩고기 냉면이 등장했다. 궁중 꿩고기 요리인 관전자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1930년대에 서울에서 꿩고기 요리 열풍이 분 것은 꿩이 시장에 넘쳐 나서였다. 북만주에서 대량으로 꿩을 수입해서 시장에 공급하면서 꿩을 쉽게 살 수 있었다. 여기에 1933년에 서울 공원화를 추진하여 한강 이북 서울 시내와 경기도 접경 지역을 금렵구로 설정해서 허가 기간을 제외하고는 새를 사냥할 수 없게 하였던 여파도 심리적으로 평소보다 꿩고기를 더 찾게 하였다.

설날 물가를 보면 북만주에서 꿩을 수입하기 이전에도 꿩은 닭과 비교해서 비싸지 않았다. 1925년에는 떡국에 들어가는 재료로 소고기 1근(600g) 50전, 꿩 한쌍 2원, 달걀 10개 47전, 움파 1동(東묶음) 70전, 마늘 1접 70전, 후추가루 1홉 25전, 깨소금 1홉 10전이었다. 이 중에서 꿩 한 쌍이 2원인데, 닭 중간 크기 1마리가 1원 10전인 점에 비추어 전혀 비싸지 않은 가격이라서 떡국에 꿩 대신 닭을 넣을 이유가 없었다.

 

1925년 서울 설날 물가

1958년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재래의 떡국을 조금 변경해서 누구나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보았읍니다. 떡국= 재료: 흰떡 두 가락, 표고 세 조각, 우육 반 근, 파 한 뿌리, 당근 한 개, 메추리알 네 개, 쑥갓 너 덧 잎, 고명 약간씩(깨소금, 후추가루, 기름, 간장, 마늘, 맛나니(미원) 등)"이라고 하였다. 

1950년대에 떡국에서 꿩고기가 사라졌다. 이후 떡국은 소고기 떡국으로 통합을 이루었다.

1950년 설날만해도 계속해서 동대문 시장을 비롯하여 각 시장에서는 점포 입구에 꿩을 매달아 놓고 팔았으나, 이후에는 전란으로 인해서 시장에서 꿩이 사라졌다. 하지만 꿩 대신 닭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에 꿩고기를 빼버리고서 소고기로만 떡국을 끓여서 차리는 방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저자=동대문 시장 할 것 없이 양력설에 보지 못 한 설 채림의 물건으로 저자는 풍성댄다. 일년중 한 번 점두에 걸리는 꿩이 달린 것이나, 유과 등속으로 울긋불긋한 제과도 대목장을 보려는 저자 다웁다. 그리고 장 보러 온 손님들로 장은 대혼잡이다. 저자에서 본 음력 과세는 틀림 없다.
- 동아일보 1950. 2. 13

1950년 설날까지만 해도 흔하게 시장에서 꿩을 살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은 한글 문장으로는 1951년보다 훨씬 이전인 1923년에 신문 기사에 등장하였다. 

동대문 경찰서에서는 폭탄 범인을 수색하다가 뜻밧게 시국에 관계 잇는 중대범인 몃 명을 잡앗는대 동 서에서는 꿩 대신에 닭도 관계치 안타고 매우 활긔잇게 방금 그들을 취조중이며
- 동아일보 1923. 1. 17

이 또한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떡국에서 유래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꿩이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기 수 십년전부터, 즉 꿩이 흔했던 때에 이미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을 흔하게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2. 꿩 대신 닭의 유래는 조선 고종의 고사에서다.

옛 사람들도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비롯하였나 하고 궁금해 하였다.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의 기원에 대한 언급은 1954년에 처음 나왔다.

祝賀(축하)나 慰問(위문)을 위하여 무엇을 선물할 경우에 술을 꼭 보내어야 할 일에 肉類(육류)를 보내든지, 옷감(衣類)을 보내어야 할 일에 器具(기구)로 대신하는 수도 있다. 이러할 경우에 「이만하면 꿩 대신 닭은 되겠지」하는 傳來(전래)의 流行語(유행어)를 쓰는 것이다. 꿩 대신 닭이라는 것은 보내는 편에서는 보내어야 할 實物(실물)만은 못 하여도 큰 失禮(실례)는 아니 되고, 情(정)의 表示(표시)도 넉넉히 된다는 것이요 또 받는 사람편에서도 이 것이 本物(본물)만은 못 하나 情(정)답기는 對等(대등)하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出處(출처)는 어떤 것인가? 예전에는 남을 처음 交際(교제)할 경우에 반드시 幣帛(폐백)을 한다. 臣下(신하)가 임금에게도 폐백을 獻納(헌납)한 뒤라야 벼슬을 하게 되고, 임금이 賢士(현사)를 招聘(초빙)하는데도 폐백이 있은 뒤라야 나와서 出仕(출사)하고, 弟子(제자)가 先生(선생)에게도 폐백을 올린 뒤라야 敎導(교도)를 받게 되고, 친구도 서로 폐백이 있은 뒤라야 벗(友)이 되는 것이다. 고사에 「委質爲臣(위지위신)」이라는 것은 폐백을 바치고 신하가 되었다는 말이요, 「卑辭厚幣(비사후폐) 以迎賢士(이영현사)」라는 것은 임금이 폐백 하였다는 말이요, 「執質爲第子(집지위제자)」라는 것은 선생에게 폐백하였다는 말이요, 「傳質爲友(전지위우)」라는 것은 폐백 주고 벗을 하였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폐백의 限度(한도)가 없더니 그 것을 制限(제한)하는 準則(준칙)으로 儀禮(의례)하는 글이 나왔다. 儀禮(의례)에 天子(천자)의 폐백은 最少(최소)로 牛(소)로 하였고, 諸侯(제후)는 羊(양)이라 하였고, 大夫((대부)高官級(고관급))은 雁(기러기)라 하였고, 士(사)·庶人((서인)(低官級(저관급)·平民(평민))은 치(꿩)라고 限定(한정)하였다. 이것이 몇 千年(천년)을 내려오며 風俗化(풍속화) 하여 지금에도 무슨 일에 선물 보내는 것은 폐백의 遺習(유습)이다.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은 士(사) · 庶人(서인)의 경우와 같은 最低級(최저급)의 폐백도 못 되어 남 부끄럽다는 뜻도 있지만, 닭은 꿩과 비슷하여 꿩 대신 쓸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處變(처변)은 얼숭덜숭 精誼(정의)나 表(표)하고 失禮(실례)나 免(면)할 수 있다 할 것이다.
- 김화진, 고속금어15, 경향신문 1954. 12. 19

위지위신(委質爲臣)이 꿩과 관련이 있다. 위지는 몸을 바친다는 말로, 스스로 엎드려 절을 하여 공경을 표한다는 뜻이다. 또한 위지는 예물을 바친다는 뜻이다. 위소(韋昭)는 위지위신에 대해 설명하기를 "質 贄也. 士贄以稚 委質而退(지는 폐백이다. 선비는 폐백을 꿩으로 하여 폐백을 바치고 물러난다)"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선비가 출세를 하려면 예물로 꿩을 바치는 것이 의례이고, 여기에서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하기에는 동떨어진 이야기다. 

천자에서 제후, 대부를 거쳐 선비까지 각각 신분의 차등에 맞추어 지정한 예물을 보면, 신분이 낮아 질수록 소, 돼지, 기러기, 꿩 순으로 점차 구하기 쉬운 산물로 폐백을 정하였다. 가장 낮은 선비가 바치는 꿩이 예물 중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저비용으로 구하기 쉽다. 꿩의 가치가 가장 떨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시장에서 구입하기 쉬운 꿩마저 구하지 못 해서 닭으로 대신 주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은 고종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1788년 5월 정조는 공인들이 모든 전궁에 매일 납품하기에는 꿩의 수효가 부족하다고 하자 모자라는 꿩의 마리수만큼 닭으로 대신 납품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사옹원은 최대한 꿩으로 납품 받고자 하여 꿩 대신 닭으로 바치면 꿩 1마리당 닭 3마리로 납품하도록 요구하였다. 납품하는 공인들은 지속적으로 손실을 입자 1800년에 궁에 민원을 제기하였다. 이에 정조는 꿩 1마리당 닭 1마리로 대신 납품하도록 하고 법규로 명문화하게 하였다. 

꿩 1마리의 가치는 닭 1마리의 가치로 서로 동일 했다. 그만큼 꿩은 흔했다. 매일 사옹원에 꿩을 공급하는 응사계 공인들이 공급물량을 채우지 못한 이유는 산에 꿩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납품을 해야 하는 시기가 이른 절기라서 숲이 우거져 꿩사냥이 어려운 탓이었다. 그래서 꿩을 겨울철 고기라고 부르는 이유다.

1867년 사옹원에 꿩을 공급하는 응사계 공인들이 10월 1일부터 매일 산 꿩을 바쳐야 하였지만, 미처 겨울이 되지 않아서 여전히 수목이 울창하다 보니 매가 날며 사냥하기 힘 들어서 꿩을 쉽게 잡지 못하였다. 이에 공인들은 낙엽이 더 져서 사냥이 가능해질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꿩 대신에 닭을 납품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고종의 윤허가 있어서 꿩 대신 닭으로 바칠 수 있게 되었다.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은 바로 이 옛 일들에서 생겨났다.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을 흔히 쓰기 시작한 때와의 시간 차이를 보면, 고종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命各殿宮日供生雉, 以活鷄隨乏代捧, 仍著爲式.
각 전궁에 매일 바치는 산 꿩을 모자라는대로 산 닭으로 대신 바치라 명하시니, 그대로 따라 법도로 정하였다.
- 정조실록 1788.5.1(양력 1788. 6. 4)

傳曰, 近始聞之知其日供雉鮮之代鷄捧三倍云, 此後雉鮮代捧, 易以一鷄事定式, 該堂登筵稟處.
전교하시기를, "그 날 산 꿩을 대신하여 닭으로 올리도록 하자 세 배로 바치도록 했음을 근래 처음 듣고 알았으니, 이후로는 산 꿩 대신에 올리게 되면 (꿩 한 마리 당) 닭 한 마리로 바꾸도록 하는 일을 법도로 정하도록 해당 당상관이 등연하여 아뢰고 처리하라"고 하시었다. 
- 비변사등록 1800. 5. 22 (양력 1800. 7. 13), (정조 24)

司饔院啓曰, 卽者鷹師契貢人等所訴內, 今十月初一日爲始, 所封日下生雉, 以節序差早, 草樹尙密, 鷹獵無路, 萬無本色封進之望, 限捉得間, 願以活鷄, 仍爲代封矣, 莫重供上, 自下不敢擅便, 惶恐, 敢啓. 傳曰, 知道代封.
사옹원에서 아뢰기를, "얼마 전에 응사계 공인들이 안으로 하소연 하는 바, '이 번 10월 1일에 시작하는 매일 하사 하시려는 산 꿩을 바치는 것이 절기가 약간 일러 풀과 나무가 여전히 빽빽하여 매가 사냥할 길이 없어 본색대로 바칠 가망이 만무하니 잡을 수 있을 때까지로 한하여  산 닭으로 이에 대신 바치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하였기에 막중한 진상을 아래에서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사온지라 황공함으로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전교하시기를 "알았으니 대신 바치라"고 하시었다.
- 승정원 일기 1867. 9. 29 (양력 1867. 10. 26). (고종 4년)

 

1935년 기사 "식욕을 동케 하는 꿩. 북만에서 잡혀 진열장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