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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반(湯飯), 장국밥과 무교탕반옥

허구인물 전우치 2021. 11. 16. 19:56

1. 장국밥과 장국밥 식당

국은 선사시대 이래로 인류의 공통 음식이었다. 위도와 경도에 따라 국에 넣는 건더기만 달랐다. 다만 한반도의 국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바로 장이다. 조선은 고래로 장이라는 조미료를 잘 만들어 온 나라라서 소금이 아니라, 장으로 음식의 간을 하였다. 이렇게 해서 장국밥(湯飯 탕반)도 생겼다. 

1919년 필사본 시의전서에 현재의 장국밥 원형을 묘사하고 있다. 

湯飯(탕반) 장국밥
조흔 백미 졍히 씨려 밥을 잘 짓고 장국을 무우 너허 잘 끓혀 나물을 갓초하여 국을 말되 밥을 훌훌하게 말고 나물 갓초 언고 약산젹 하여 우에 언고 호초가로 고초가로 다 뿌리나니라.
(좋은 백미를 깨끗하게 씻어 밥을 잘 짓고, 무를 넣어 장국을 잘 끓여서, 나물을 갖추어 국을 말되 밥을 훌훌하게 말고, 나물 갖추어 얹고, 약산적 (藥散炙=양념한 다진 소고기 산적)을 위에 얹고 나서 후추가루와 고추가루를 뿌린다.)
- 시의전서(是議全書)

장국밥은 문헌에는 1701년에 처음 나타났다. 숙종이 장국밥을 비롯해서 여러 음식을 먹고 숙면을 취하였다. 장국밥은 고종에 이르기까지 꾸준하게 승정원 일기에 기록이 이어졌다.

藥房啓曰 伏未審夜來 聖體若何? 中宮殿症候 伏聞醫女來傳之言, 昨日所進 白粥一升三合, 湯飯三合, 薏苡粥五合, 夜間寢睡 一樣安穩云矣 敢此問安, 答曰 知道, 無事矣. 
(약방에서 여쭈며 아뢰기를 엎드려 밤 사이 마음을 졸였사온데 성체는 어떠하시옵니까? 중궁전의 증후를 의녀가 와서 전하는 말로 삼가 듣자온데, 어제 올린 것은 흰 죽 1되 3홉, 탕반(장국밥) 3홉, 의이죽(율무죽) 5홉으로, 야간에 침수를 한결  편안히 하셨다기에 감히 이에 문안 드리옵나이다라고 하였다. 대답하시기를 알았느니라, 아무 일 없노라 하셨다.)
- 승정원일기 1701. 7. 15 

이로 보아 장국밥은 최소한 17세기에 왕실에서 왕도 먹던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愛會進食) 日前에 獨立協會에셔 再疏를 上할 時에 特別事務委員 五十人을 選定ᄒᆞ야 仁化門外에셔 經夜ᄒᆞᄂᆞᆫ더 傍聽人 洪仁範 朱聖根 姜敬欽 三氏가 該委員의 冷處露宿ᄒᆞᆷ을 見ᄒᆞ고 湯飯 一器식 這這히 進饋ᄒᆞ엿다니 此三氏의 同胞를 愛ᄒᆞᄂᆞᆫ  心이 卽國家를 爲ᄒᆞᆷ이니 우리ᄂᆞᆫ  三氏의게 無限致謝ᄒᆞ노라.

((모임을 사랑하여 식사를 선사하다.) 일전에 독립협회에서 다시 상소를 올릴 때에 특별사무위원 50인을 선정하여 인화문 밖에서 밤을 지새우는데 방청인 홍인범, 주성근, 강경흠 세 씨가 해당 위원의 차가운 곳에서 노숙함을 보고 탕반 한 그릇씩 일일이 보내어 선사하였다니, 이 세 씨의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이 즉 국가를 위함이니, 우리는 세 씨에게 무한하고 지극한 감사를 하노라.)
- 황성신문 1898. 10. 14

 

(醉金心黑)日前夜에 冷洞居 金永根이가 泥醉ᄒᆞ야 西署宗橋邊에 橫倒ᄒᆞ엿거ᄂᆞᆯ 該坊 交番所 巡檢 丁義岱氏가 見ᄒᆞ고 凍死ᄒᆞᆯ가 慮ᄒᆞ야 其隣湯飯家로 扶送經宿ᄒᆞ엿더니 金永根이가 及其醒起ᄒᆞ야 交番所에 來告ᄒᆞ되 我髻에 揷ᄒᆞ엿던 純金同串이 不知去處라 ᄒᆞ거ᄂᆞᆯ 丁氏가 驚訝ᄒᆞ야 其湯飯家에 卽住ᄒᆞ야 搜索ᄒᆞᆫ즉 房隅에 頭塗金ᄒᆞᆫ 銀同串一個가 有하거ᄂᆞᆯ 持往該署하야 顚末을 說明ᄒᆞᆫ즉 署長 魏洪奭氏曰 此事ㅣ 易辨이라 하고 卽時 金永根을 招問ᄒᆞᆫ즉 答曰 果是一錢重金同串이라 하거ᄂᆞᆯ 又問하되 汝於何銀房에 造來耶아 該房을 指道하기로 其匠色을 招問ᄒᆞᆫ즉 答曰 其時銀同串에 價五兩아치 金을 塗하엿노라 하니 金永根의 誣告가 自露하거ᄂᆞᆯ 魏署長이 其無理함을 大責하고 笞三度로 警送하엿다니 金漢의 惡習은 可憎하거니와 該署長과 巡檢의 衞生 警察하ᄂᆞᆫ 實心은 可히 致謝할너라.

((금을 탐내어 마음이 검어지다.) 전날 밤에 냉동에 거주하는 김영근이 술에 곤죽이 되어 서서의 종교 주변에 갑자기 쓰러졌거늘, 해당 방의 교번소 순검 정의대씨가 발견하고 동사할까 염려하여 그 근처 탕반집으로 부축하여 보내서 묵도록 하였더니, 김영근이 급기야 깨어 일어나 교번소에 와서 고하되 "내 상투에 꽃았던 순금 동곶이 간 곳을 모르겠습니다"라고 하거늘, 정씨가 놀라면서도 의아하여 그 탕반집에 즉시 가서 수색한즉 방구석에 머리에 금을 도금한 은 동곶 한 개가 있거늘, 해당 서로 데려 가서 전말을 설명한즉 서장 위홍석씨가 말하기를 "이 일은 쉽게 밝혀질 것이오"라고 하고, 즉시 김영근을 초문한즉 답하기를 "정말로 일전 무게의 금 동곶입니다"라고 하니, 또 묻기를 "당신은 어느 은방에 가서 만들었소?"라고 하기에, 해당 은방을 가르키며 가므로 그 직공을 문초한즉 답하여 말하기를 "그 시간에 은 동곶에 가격 다섯 냥어치 금을 칠하였습니다"라고 하니, 김영근의 무고가 저절로 드러나자, 위 서장이 그 무리함을 크게 꾸짖고서 태형 세 대로 경찰로 이송하였으니, 김이라는 사내의 악습은 가증하거니와 해당 서장과 순검의 생업을 지켜 주려고 경계하여 살피는 성실한 마음은 가히 치하하고 감사할만 하다.)
- 황성신문 1899. 2. 3

 

[주]

1. 서서: 西署. 서울 5부중 서부에 배치한 경무관서 관할지역. 서부경찰서 관할.

2. 종교: 宗橋. 현 지번 종로 내자동 71번지 부근 종교 교회 앞에 있었던 다리.

3. 해당 방: 該坊. 인달방(仁達坊). 현 종로구 내자동, 내수동, 당주동, 봉래동 1가, 신문로 1가, 필운동에 조금씩 걸쳐 있었던 방이다.

4. 교번소: 交番所. 파출소

 

이렇게 문헌적으로 최소한 19세기에 장국밥 장사가 일상적이었다.

1770년대에 조선에서는 매일 500마리의 소를 도살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인구수에 비해서 소고기 유통이 엄청났기에 장국밥 장사에서 소고기 수급이 어렵지 않았다.

 

計我國日殺牛半千. (세어 보니 내 나라에서 하루에 죽이는 소가 천마리의 반이다.)
- 박제가, 북학의

2. 무교탕반옥

무교탕반옥은 당시에 유명했던 것이 아니라, 1960년대에 한 사람의 허풍과 이후 다른 몇 사람의 기억에 의해 현재에 이르러서야 유명해진 특이한 사례다. 

심지어 헌종이 무교탕반옥에 몰래 가서 먹었다는 거짓말까지 생겼다. 헌종이 야간에 밀행하여 무교탕반집에서 장국밥을 먹었다고 허풍을 떤 사람은 극작가 이서구였다. 이서구는 1968년 조선일보에 무교탕반옥 장국밥을 헌종이 먹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서구는 1967년에 헌종도 몰래 와서 먹었다고 전하는 이야기도 있다더라고 하더니, 1968년에는 헌종이 몰래 와서 먹었다고 단정하였다. 물론 이서구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일절 제시하지 않았다.

무교탕반의 역사는 장구했던가 보다. 전하는 말에는 조선 24대왕 헌종(1834~1849)도 미행으로 다녔다 하며, 남북촌 양반들도 초롱을 든 상노를 앞세우고 무교다리 국밥집을 찾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 이서구, 신동아 1967. 2, 동아일보 1993. 7. 29에서 재인용

무교탕반집은 어찌나 유명했던지 이조 24대왕 헌종이 미행으로 어림했다지만 이제는 얻어 맛보기 어려우니 이야말로 아쉽기 짝이 없다.
- 이서구, 조선일보 1968. 9. 1

이서구와 신동아 대담에 참여 했던 소설가 박종화는 "요릿집이 드물던 시절이었던 갑오경장 전후에 성은 알 수 없지만, 양보라는 사람이 무교동에 낸 집으로 근년에 와서 무교탕반으로 변했다"라고 다른 견해를 밝혔다(신동아 1967. 2, 동아일보 1993. 7. 29에서 재인용). 박종화 역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1967년 이래 무교탕반을 언급한 사람들은 이서구(1899 ~ 1981), 박종화(1901~1981), 김을한(1906∼1992), 조용만(1909~1995), 신태범(1912~2001), 조풍연(1914 ~ 1991)으로, 이들이 무교탕반에 가서 장국밥을 먹은 시기는 1930년대 무렵일 것이다. 그런데 정작 1930년대 당대에는 오히려 대구에서 올라 왔다고 하여 대구탕이라고 하였던 육개장이 탕으로서 설렁탕과 더불어 서울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무교탕반옥을 언급한 당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1930년대에는 무교탕반이 아니라, 무교탕반옥이 상호명이었다. 1939년 4월 8일 오후 2시 30분경 무교탕반옥 계산 직원 20살 박순만은 혜화동 동소문약국에서 조선은행권 1원짜리 지폐 뒷면에 "남차랑 각하 앞, 내 조선을 독립시키시오"라고 썼다가 출처와 경로가 발각돼 동대문경찰서에 끌려가 불온한 낙서를 했다고 엄중한 취조를 받은 후 기소를 당했다. (경기도경찰부장, 지폐에 대한 불온낙서자 검거에 관한 건 1939. 4. 24)

1908년부터 일본은 한국으로 이주한 자국민에게 상호명으로 루나 옥을 사용하는 식당 영업허가 규칙을 시행하였고, 경술국치를 당한 1년 후인 1911년부터 한국인에게도 동일한 식당 영업허가 규칙을 따르게 강제 했다. 다만 상호명 끝에 루나, 옥을 강제로 쓰도록 하지 않았으나, 한국인은 상당수가 자발적으로 루나 옥을 상호명 끝에 붙였다. 따라서 무교탕반옥은 1911년이나 그 이후에 식당 영업 허가를 받았다.  

무교탕반을 예찬하는 그들의 기억에 왜 무교탕반이 좋았는지 조풍연의 설명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무교탕반집은 맛이 특별하다기 보다는 재료를 속이지 않으며, 위생적으로 깨끗하게 장국밥을 조리하고, 오직 장으로만 간을 했다는 점을 칭찬하였다.

유명한 무교탕반도 가마솥이 손님 보는 앞에 걸려 있었다. 여기는 객석(온돌) 앞에 유리미닫이가 있어서 그 많은 것이 다 보이게 되었다. 먼저 밥을 말아 토렴하고 그런 다음 산적과 너비아니(불고기)를 손으로 집어 올린 다음 객석으로 올렸다. 
- 조풍연, 매일경제 1985. 1. 5

무교탕반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재료를 엄선해 쓸 따름이었다. 무교탕반에는 자투리 같은 고기가 없이 양지머리 고기만을 넣고 끓였다. 특별히 간장을 소중이 여겼다. 요즈음 국 끓이는데 간장은 빛깔만 내고, 소금으로 간을 하는 것이 유행하지만 탕반에는 소금을 절대로 쓰지 않고 말간 간장만 썼다.
여기에 밥을 말고 그 위에 산적을 얹어 준다. 엄동이면 노란 움파를 고기 사이에 꿰어 주기도 한다. 그런데 무교탕반의 특색은 손님 보는 앞에서 말아 주는 데 있다. 방에 앉아 지켜보며 기다리는 손님이 군침이 돌도록 한다.
- 조풍연, 경향신문 1987. 7. 24

일부에서 국물을 떠서 그릇에 옮겨 붓는 것을 그럴듯 하게 여기게 하려고 한자를 구태여 찾아서 쓰다 보니, 토렴을 마치 식은 밥이나 식은 국수에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가 밥이나 국수에 부었던 국물을 도로 국물통에 따르고 다시 뜨거운 국물 붓기를 반복해서 국물로 밥이나 국수를 데우는 것인냥 악용하는 악질 상인도 있다. 그렇게 하면 밥물과 국수물에 의해 국솥 안의 국물이 탁해지고, 오염된다. 찬 국수나 찬 밥을 데우고 싶었으면 따로 끓이고 있는 물을 준비해서 그 끓고 있는 물로 데웠어야 한다.

토렴은 退染(퇴렴)이다. 떨어뜨릴 퇴(退), 적실 렴(染)이다. 국물을 붓는다는 단순한 뜻에 불과하다. 즉 장국밥에서는 갖 지어 뜨거운 하얀 쌀밥을 담은 그릇에 갖 끓인 뜨거운 장국 국물을  붓는다는 뜻이다. 갖 지은 밥을 담은 그릇에 갖 끓인 장국물을 부어서 내간다. 이는 시의전서 장국밥 조리법에도 잘 나타나 있다. 

무교탕반 식당이 언제 폐업했는지는 모르나, 서민의 식당으로서 1953년에도 영업을 하였다.

상공장관으로 취임하게 된 윤보선 장관은 7일 시장실에서 마지막 간부회를 열고 퇴임 인사를 하였던 바, 간부 일동은 그 자리에서 윤장관의 송별연을 하자는 동의가 있어 의론이 구구하였는데, 장관은 "당신네들의 경제적인 면으로 보아 도저히 부당한 일이니, 나를 위하여 참으로 송별연을 하여 주려면 곧 무교탕반집으로 가서 탕반 한 그릇식을 놓고서 하자"는 장관의 동의에 간부 일동은 파격적이요, 평민적인데 감동하고 하오 12시부터 장관 송별연을 무교탕반집에서 하였다 한다.
- 동아일보 1949. 6. 9

종업원에게 위생복을 착용시키지 않은 다음 업자들에게 대하여 24일부터 3일내지 5일간의 단기간 영업 정지 처분을 내리었고, 앞으로위반 업자는 더욱 철저하게 적발할 것이라 한다.
서울탕반, 무교탕반, 장성옥 = 3일간
한양옥, 하원 = 5일간
- 경향신문, 1953. 7.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