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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농탕인가, 설농탕인가, 설렁탕인가?

허구인물 전우치 2021. 11. 13. 21:27

한식진흥원

 

1. 설렁탕의 어원

1)선농탕(先農湯)이라는 주장

선농탕은 과거 조선의 어느 왕 또는 세종대왕이 선농단에서 제를 지내고 나서 소를 잡아 국을 끓였다면서 그 국 이름이 선농탕이라고 주장하였다.

설넝탕 말이 낫스니 설넝탕 력사를 말하여 봅시다 설넝탕은 선농탕(先農湯)의 와뎐인데, 이 선농탕이 생기기는 옛날 어늬 임금이 뎍뎐을 할 때 임금 모신 만흔 신하와 수천 군중에게 뎜심을 내릴 때에 소를 그대로 함부로 뚜드려 넛코 국을 끄린 일이 잇섯는데, 이로써 국 일흠을 선농탕이라고 하엿담니다.
- 효해생, 동아일보 1924. 7. 13

설넝탕이 처음 생겨나기는 세종대왕 때라고 합니다. 세종대왕께서 그 당시에 동대문 밖에다 선농단을 두시고 해마다 왕께서 친경을 하시었는데, 어느 해 친경을 하시다 갑자기 비를 만나시었습니다. 비는 심히 오고 날은 점점 저물어 몹시 시장하신데 여어 신하와 함께 잡수실 음식이 없슴으로 할 수 없이 그 때 밭 갈던 소 한 필을 그 자라에서 잡아서 그대로 솥에다 맹물만 붓고 끓여서 소금을 타서 잡수시었는데 시장했던 관계도 있었지만 그 때 모시고 있던 신하들이 어찌나 맛있게 먹었던지 그 후에도 설넝탕을 끓여 먹게 되고, 이 법이 차차 여염에 전파하게 되어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라고 합니다.
- 매일신보 1937. 10. 22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내는 의식은 고려사(권16 지-향의)에 언급하고 있어서 고려시대에도 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농단 제에서는 제단 상에 규정한 각종 음식을 차려 올렸다. 고기류에는 소가 없다. 고기는 건어포, 사슴육포, 토끼젓, 식해, 돼지갈비, 사슴젓, 담해를 상에 올렸다. 제사의 마지막에는 희생을 삶았다.

조선에서는 태종이 희생의 대상을 정해 놓았는데, 서울에서 제를 지낼 때는 양 3마리와 돼지 3마리를 제물로 쓰도록 정했다(祭物, 京中牲用羊三豕三). 지방에서는 행정구역의 규모에 따라 양과 돼지를 2마리씩 아니면 1마리씩만 쓰도록 했으며, 노루나 사슴으로 대체할 수 있게 하였다. 후대 왕들이 규정을 대체로 지켰다. 가끔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선택하였다. 

따라서 설렁탕이 선농단에서 기원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주: 제사는 무당주의(샤머니즘)의 특성이다. 무당주의는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조상과 부모가 죽어서 귀신이 됐다고 믿고서 조상 및 부모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만들었다.

2)설농탕(雪濃湯)이라는 주장

설농탕이라는 표기는 1920년대에 등장했다. 설렁탕 국물이 눈처럼 하얘서 설농탕이라는 주장이다(조선일보 1972. 12. 1). 

이 표기는 반발에 부딪혔다. 

지금  길가에서 보는 설농탕(雪濃湯)이라고 하는 간판은 선농탕(先農湯)이라고 고쳐 써야 할 것입니다.
- 매일신보 1937. 10. 22

본시 한문은 아닌 것 같은데 雪濃湯이니 人切味니 하는 한자를 왜 구태어 씁니까? 일본 말에 아데지에 속하 무엇이라 합니까?
- 경향신문 1952. 5. 20

이에 대한 식자의 등한이 雪濃湯, 大邱湯이니 하는 억지 군도목에 둔감하고, 자질구레한 문제에만 소심하게 되는 결과가 되지 않았을까? 일본 말을 쓰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짓사이... (짓사이무즈까시이)가 될판.
- 동아일보 1955. 8. 10

설렁탕이 설농탕이라는 주장도 근거가 아에 없다. 

 

 

제임스 게일이 1897년 1월 21일 일본 횡빈에서 펴낸 한영사전에 실은 설렁탕(셜넝탕)이라는 표기

 

3)설렁탕이라는 주장

南大門 안 市場近處에서 點心 兼 저녁 兼 설넝湯 한 그릇을 사 먹고 京城郵便局 압흘 지나 진고개通을 들어섯다. 
- 개벽, 1922. 3. 1

 

설넝은 한자로 표기할 수 없는 우리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설넝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설렁탕은 문헌적으로 처음으로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게일( James Scarth Gale)이 1897년 1월 21일 일본 횡빈에서 펴낸 한영사전(The Unabridged Korean-English Dictionary)에 셜넝탕( 셜넝탕 s. A stew of beef intestines etc.)이라는 표기로 나온다. 내용을 보면 설렁탕은 처음에는 주로 소 내장으로 끓인 국이었다.

 

1897년 8월 23일자 독립신문에도 셜넝탕이라고 썼다. 

이에 대해서 몽골어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친일파 최남선이 몽골어의 일본식 발음에서 유래했다고 황당한 주장을 하였고, 1970년대에 비슷한 주장이 나왔다.

몽고어에서 소나 양의 내장을 끓인 국을 설룬 또는 실루라고 하는데, 설렁탕은 곧 설룬에 한자 탕이 중첩된 말이니, 굳이 한자로 설농탕(雪濃湯)이라고 쓸 필요가 없는 말이다.
- 진태하, 동아일보 1977. 4. 14

몽골어로 탕은 슐(шөл)이다. 고기에 야채를 넣고 끓이면 너거태 슐 (ногоотой шөл) 이다. 갈비탕은 하위르가태 슐 (Хавиргатай шөл)이다. 조선에서는 불필요하게 하나의 글자를 중첩해서 만들어 쓴 명사가 없었기에 슐이 설넝으로 변했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셜넝탕이 설넝탕으로, 설넝탕이 설렁탕으로 변했다.

셜과 설은 같은 말로, 셜넝탕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던 19세기 말엽에는 ㅓ를 ㅕ라고 썼다. 서울을 셔울이라고 하는 식이다.

2. 설렁탕이 맛 있는 최초의 집 잠배설렁탕집과 새로운 유명세 이문식당

1)최초로 유명했던 설렁탕집 잠배설렁탕

조선인은 소고기를 매우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명의 황제도 조선인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소고기를 즐긴다고 말 하면서, 조선 사절단에게 소고기를 대접하였고, 청도 조선 사신들의 요구에 소고기를 구워 먹을 불고기용 숯을 따로 내어 줄 정도로 조선인의 소고기 사랑은 각별했다. 

양반은 한 겨울에도 눈밭에서, 추운 날에도 창문을 활짝 열고서도 연기에 눈물을 흘리며 방 안에서 불고기와 소고기 전골을 즐겼기에, 양반이 아닌 계층에서는 그 아래 등급과 부산물을 먹었을 것이다.

 

1770년대 박제가는 자신의 저서 북학의에서 조선은 매일 500마리의 소를 도축한다고 하였다. 

 

반대로 돼지는 사육이 까다로운데다 종자가 너무나 작아 선호하는 가축이 아니라서 키우는 집이 드물었다. 돼지고기를 즐기는 지나족 사신이 왔을 때 접대할 돼지마저 수급이 어렵자 왕명으로 경기도에 지나족 사신 접대용으로 돼지 200마리를 항시 키우도록 했다. 그렇지만 사육 마릿수를 유지하지 못 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지나족 사신들에게 자랑할만큼 아주 크게 키우는데 성공한 돼지는 포목 20필 가격으로, 소보다 2배나 비쌌다.  

따라서 왕성한 소고기 소비에 의해 발생하는 많은 양의 소 부산물을 활용한 음식도 발달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설렁탕은 서울 칠패 시장에서 가장 먼저 등장했다. 서울에서는 이현시장(동대문 안), 칠패시장(남대문 밖), 소채시장(남대문 안), 어류시장(남대문 안), 종루시장(종로)이 융성하였다. 이중에 이현시장과 칠패시장은 금난전권을 피하려고 만들었기에 시전만큼은 아니나 무척 오래된 시장이다. 이현시장, 종루시장과 더불어 전국 지방 곡물 상인들이 모이던 남대문 밖 칠패시장에도 주막 거리를 형성하였고, 칠패시장 안의 잠배 설렁탕집이 매우 유명했다. 

전일에는 南門 박 잠배(紫巖) 설넝탕을 제일로 처서 동지 섯달 치운 밤에도 10여 리 박게 잇는 사람들이 맛치 녀름날에 貞陵 물마지나 악바위골 藥水 먹으러 가덧이 爭頭를 하고 갓섯지만은 지금은 시내 각처에 설넝탕 집이 생긴 까닭에 그것도 時勢를 일엇다.
- 별건곤 1929. 9. 27

2) 파란만장 이문식당

잠배 설렁탕의 유명세를 타고 남대문 시장과 종로시장 등 서울 시내에도 설렁탕집들이 생겼다. 반면 잠배 설렁탕집은 경인철도 신설, 신도심정책에 의한 시장 재배치 등으로 인한 칠패시장의 쇠락과 맞물려 소비자의 접근성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서울 시내 설렁탕집 가운데 언론에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린 식당은 불행하게도 상한 고기를 팔다가 1915년 매일신보에 실린 새문안 설렁탕집이다.  

새문안 설넝탕집은 경찰서의 명령서도 못 보았는지 상한 고기를 함부로 팔기 때문에 위생에 적지 않은 방해가 되어요. 좀 경고하여 주세요. 일문모
- 매일신보 1915. 9. 27
 
설렁탕은 서울에서 가장 싼 음식이면서 맛이 있다고 소문이 나면서 엄청난 인기 음식이 되었다. 서울 시내 모든 설렁탕집은 여름에는 냉면을 팔았다. 즉 원래 냉면을 팔던 냉면집들이 겨울 장사 거리를 발견한 것이다. 서울 시내에 1920년 25곳에 불과했던 설렁탕집은 불과 4년만인 1924년에는 100곳으로 늘었다. 

그 중에서 장교 설렁탕, 일삼옥 설렁탕, 이문 안에 있는 설렁탕집이 널리 이름을 알렸다. 이문 안 설렁탕은 이문식당을 지칭한 것인지, 이문 안에 있는 모든 설렁탕집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후에 사람들이 이문 안 설렁탕집들 중에서 이문식당만을 기억하는 것으로 보아 이문식당을 지칭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시내 설넝탕집도 數로 치면 꽤 만치만은 其中에는 鍾路 里門 안 설넝탕이라던지 長橋설넝탕, 一三屋 설넝탕이 전날 잠배 설넝탕의 勢道를 繼承한 듯하다. 
- 별건곤 1929. 9. 27

댱교 설넝탕은 맛조케 잘 하기가 다른 설넝탕에 비길바가 안인 까닭이외다. 경성 사람치고는 댱교설넝탕이 조흔줄을 다 알지요. 
- 동아일보 1924. 7. 13

이 중에서 이문식당이 가장 많이 언론에 등장했고, 이문식당 주인 홍종환(洪鍾煥)도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서울시 종로구 청진동 139번지에서 우육도매상을 하던 1921년에 판매대금을 받지 못한채 오히려 작당한 거짓말까지 듣자 경찰에 신고하면서 언론에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했고(동아일보 1921. 9. 6), 얼마 후 인사동 167번지에 이문식당을 개업했다.(동아일보 1924. 1. 20) 직후 화재로 인해서 화신백화점 바로 뒤 인사동 268번지로 이전하였다.(동아일보 1932. 11. 17).  식당 개업 직후 선동해서 도부조합에 가입한 인부 18명을 해고 당하게 만들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조선일보1925. 12. 16). 

홍종환은 이문식당을 빨라야 1923년 무렵에 개업했다.

 

경성부 청진동 139번지에 사는 우육도매업자 홍종환은 경성부 적선동 150번지 사는 우육상 하는 김경명과 광희정목 102번지에서 사는 우육행상자 김점동을 걸어 얼마 전에 종로 경찰서에 고소를 제기하였는데,
- 동아일보 1921. 9. 6

 

시내 인사동 167번지 음식점 홍종환의 집에서 재작 18일 하오 5시 50분경에 불이 나서 동 6시 10분에 진화하얏는데 원인은 아해들의 작란으로 석유등을 깨뜨린 까닭이요, 손해는 십오원이라고.
- 동아일보 1924. 1. 20

 

당연히 홍종환은 이문옥을 개업한 적이 없다. 세간에 떠도는 홍종환이 1902년에 이문옥을 개업했네, 1907년에 이문옥을 개업했네 하는 말은 낭설에 불과하다. 이문식당 주인 홍종환은 1932년에 37세였다(매일신보1932. 2. 8). 이 기사를 근거로 하면 1902년에 홍종환은 6살이었다. 

이문식당은 마지막으로 언론에 등장하는 1939년까지 선행과 범죄를 오가며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이문식당은 1929년부터 1932년까지 매년 직업소개소에 떡국을 무료로 제공하여 언론이 두 차례나 미담 기사로 다루었고, 직원들이 고객과 내부 양심신고 직원 폭행과 어린이 학대를 해서 수 차례 언론에서 보도했으며, 탄산소다 사용, 구더기 섞인 냉면 판매, 식중독 발생으로 영업정지 처분을 받아서 다시 언론이 이름을 올렸다.

대한민국인사록에 의하면 홍종환은 1949년에는 54세로, 이 때 직업은 한국축산주식회사 취체역, 동양가축흥산주식회사 취체역 사장, 중앙축산협회 재정위원, 서울축산협회 부회장직 등 여럿이었고, 이인여관, 태양인쇄소, 한일제제소 등도 소유하고 있었다.

1923년 무렵에 홍종환이 개업한 이문식당이 언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35년 1월 29일자 조선신문에 실린 광고 "경성부종로 이문식당 홍종환 전화 광(주:광화문) 1742"이후 두 번째이자 마지막 이문식당 광고인 1953년 12월 10일자 자유신보 광고를 보면 "이문의 설넝탕 전일과 여히(주:옛날과 같은) 이문식당"이라고 하고 있다. 1935년과 1953년 광고 모두 "이문식당" 광고가 있다.

 

1947년 9월 1일자 조선경제신보 설렁탕 광고에 "잼배옥 설농탕 도동1가 100(번지)"가 있고, 1948년 10월 10일자 국제신문 설렁탕 광고에 "설렁탕 전문 이문설렁탕 전3(주:중앙전화국3국) 1407 鐘路和信裏(주:종로 화신백화점에서 안쪽)"가 있으며, 1949년 11월 4일자 서울신문 설렁탕 광고에 "종로의 명물 이문설넝탕"이 있다.

 

유사한 상호를 쓰는 전혀 다른 설렁탕집들이 같은 종로 안에서 가깝게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문설렁탕도 있고, 이문설넝탕도 있으니, 이문설농탕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1953년 이문식당 광고에서는 홍종환의 이름이 빠져 있다. 이는 북한이 홍종환을 납치해 가서다. 휴전후 재등장한 이문식당은 전일과 여히라는 광고 문구로 보아서 자식이 물려 받아 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납북 당시 홍종환의 직업을 이인(里仁)여관 주인으로 기록했지만, 납북 당일 주소지를 보면 여전히 이문식당을 운영하였다. 홍종환이 265~268번지 주소를 함께 사용한 것을 보면, 265번지는 이문식당이었고, 266~268번지는 이인여관 겸 자택으로 보인다.

납북 피해자 기록에 따르면 홍종환은 1896년 12월 30일생으로, 서울에서 태어 났으며, 본적이 서울시 종로구 청진동 139번지이다. 납북 당하던 날의 주소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265번지였다. 장남 홍순옥은 분가하여 종로구 청진동 139번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홍종환이 20대에 청진동 139번지에서 육류 도매업을 한 것을 보면 최소한 홍종환의 아버지 때부터 물려 주고 물려 받은 집터임을 알 수 있다. 

홍종환은 1950년 8월 10일 오후 4시경 인사동 265번지에서 북한이 설치한 종로 내무서 직원에게 끌려가 납북 대상자로 판정을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9월 17~18일경 새벽에 도보로 이동을 시작해 강북구 우이동 소나무 숲에 집결해 있다가 당일 해가 진 후 동두천 국도를 따라 납북 당했다. 홍종환과 가깝게 지내던 조재완(서울 성북구 수유동)이 홍종환이 끌려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소재 파악에 나서 우이동 출구에서 옷가지를 건네 주려고 시도 했으나, 제지 받아 전달하지 못 했다.  


한편 이문설농탕이라는 어느 한 식당이 과거에 이문식당을 인수했기에 이문설농탕이  가장 오래된 설렁탕 식당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신뢰할 수 없다.

이문식당을 1921년과 1924년 사이에 개업했으니, 1902~1907년 사이에 개업했다는 주장부터 사실이 아니다.

이문설농탕이 이문식당을 홍종환이 1902년에서 1907년 사이에 개업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황당하게도 "노인들의 기억에 따르면"이다.(서울신문, 2004. 9. 14) 게다가 이로써 이문설농탕이 1900년대 초부터 오래도록 그 한 자리에 있었다는 느낌마저 갖게 했다.

이문식당을 개업한 홍종환은 1902년에 불과 6살에 불과했기에 이문옥을 개업하지 않았다. 또한 1902~1910년 사이에 한국의 식당은 일본식 상호명인 옥자를 붙히지 않았다.

제36조, 該洞(해동)의 保證(보증)을 受(수)한 後(후)에야 廚店(주점)을 設(설)하믈 許(허)할 事(사).
- 향약규정 급 향회조규, 내부 1895. 3. 10(음력)

조선은 음식점에 대한 허가제도를 1895년에 도입했다. 향약규정 및 향회조규에 의거 음식점을 하려면 해당 지역 동네의 향회에서 보증을  받으면 개업을 할 수 있도록 정했다. 상호명을 제출해야 한다는 조항이 없었다.

현재와 같은 형태의 음식점 허가제는 일제가 이식하였다. 

第一條 料理店營業ヲ爲サムトスル者ハ左ノ事項ヲ具シ居留民總代役場ヲ經テ所轄警察官署ニ願出テ許可ヲ受クヘシ其ノ營業ノ場所ヲ變更セムトスルトキ亦同シ

(제1조 요리점 영업을 하려는 자는 좌 사항을 구비하여 거류민 총대역장을 경유하여 소재지 관할 경찰서에 제출하여 허가를 받아야 하며, 기타 영업의 장소를 변경하더라도 역시 같다.)
一 族籍、住所、氏名、年齡 (족적, 주소, 씨명, 연령)
二 樓名、屋號 (루명, 옥호)
三 營業ノ場所 (영업장소)
四 營業用家屋ノ圖面 (영업용가옥 도면)
- 요리점 급 음식점  취체규칙, 경성이사청령, 통감부 1908. 5. 16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아 가는 과정에서 일제는 열도의 만성적 식량부족으로 한국으로 대거 이주중인 일본인의 음식점 개업 허가에 대한 규칙을 1908년 통감부 이사청령으로 발표했다. 호적, 주소, 이름, 나이, 상호명 루(樓) 또는 옥(屋), 영업지 주소, 영업장 도면을 거류민 대표에게 확인 받아 관할 경찰서에 제출하도록 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일본식 상호명 옥이 등장했다. 발표 직후 거류민 대표를 거치지 않고서 바로 허가 신청서를 관할 경찰서에만 제출하도록 바꾸었다.

第一條 料理店又ハ飮食店ノ營業ヲ爲サムトスル者ハ左記事項ヲ具シ所轄警察署又ハ警察署ノ事務ヲ爲取扱ス憲兵官署 ニ願出テ許可ヲ受クヘシ其ノ營業ノ種類及場所ヲ變更セムトスルトキ亦同シ (제1조 요리점 또는 음식점을 영업하려는 자는 좌기 사항을 구비하여 소재지 관할 경찰서 또는 사무를 취급하는 헌병관서에 제출하여 허가를 받아야 하며, 기타 영업의 종류 및 장소를 변경하더라도 역시 같다.)
一 族籍、住所、氏名、年齡 (족적, 주소, 씨명, 연령)
二 樓名、屋號 (루명, 옥호)
三 營業ノ場所 (영업장소)
四 營業用家屋ノ圖面 (영업용가옥 도면)
- 요리점, 음식점 취체 규칙, 조선총독부 1911

주권을 빼앗자 일제 총독부는 1911년부터 요리점 음식점 취체 규칙에 따라 대한제국인도 음식점 영업을 하려면 일본인처럼 경찰서나 경찰서가 없는 지역은 관할 헌병대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따라서 이문식당이 음식점 허가를 한성부에서 받았다거나, 경성부에서 받았다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오직 경찰서의 허가만 받으면 되었다. 위생 업무 역시 관할 경찰서가 담당하였다. 경찰서의 음식점  허가 제도를 1945년까지 유지하였다. 

1946년에야 음식점 허가권을 경찰서에서 신설한 기획부 산하 후생국으로 이관하였다. 다시 음식점  허가 권한을 도지사와 시장에게 이관한 때는 1948년 1월로 법령 158호로 음식점 등의 허가권을 도지사와 시장에게 이관하고서 경찰의 의견을 반영 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민원에 의해 동년 7월에 법령 25호를 발표해서 음식점 허가권을 완전히 도청과 시청으로 이관하였다. 

1921~1924년 사이에 개업한 이문식당을 이문설농탕의 유원석(70)이 광복 전에 인수 해서 공평동 46번지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1907년께 홍씨라는 사람이 구화신백화점 뒤의 한옥집에서 시작했는데, 광복전 현재의 유원석(70) 할머니가 인수, 바로 옆인 현재의 집으로 옮겼다."
- 일간스포츠 1987. 10. 26

거짓말이다.

 

1950년 8월 중순에 납북 당한 홍종환은 여전히 이문식당 주인이었다. 게다가 1953년 12월 10일자 자유신보 광고에 "이문의 설넝탕 전일과 여히 이문식당"이라는 광고가 실려 있어서 6.25 동란 이후에도 이문식당은 인사동 265~8번지에서 영업을 유지했다. 그러므로 해방 전에 인수했다는 말은 사실이 전혀 아니다. 

이문 설농탕은 1949년 11월 4일자 서울신문에 실은 "종로의 명물 이문설넝탕"이라는 광고가 이문설농탕 광고인냥 하는데, 이문설농탕이 상호명이었다면서 광고를 이문설넝탕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한다는 것도 이상하다. 이문설넝탕으로 영업을 했다가 전쟁 중이나 이후에 이문설농탕으로 상호등록변경을 신청해서 허가 받아 바꿨어야 설명이 된다. 그런데 소유주도 바뀌고, 점포명도 바꾸며, 장소도 바꿨으면 이도저도 아닌, 전혀 새로운 점포로 봐야 한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이문식당은 1953년에도, 이문설넝탕 또는 이문설농탕이 아니라, 여전히 이문식당이었다.

또 해방 며칠 전인 1945년 8월에 인수했다고 해도 유원석의 나이는 1945년에 불과 28세였다. 홍종환이 20대 중후반에 이문식당을 개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육류 도매업으로 돈을 충분히 모았기에 가능했다. 나아가 홍종환이 1924년 마산 형평사 축하식에서 28살인데도 축사를 할 정도로 도축업계에서 영향력이 큰 것으로 보아 집안 대대로 도축 및 육류 유통업을 해서 상당한 재력을 형성 했을 것이다. 반면에 배경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묘령의 28살 여인이 느닷없이 장사가 잘 되어 매각 가격이 높았을 이문식당을 쉽게 인수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도축장 인부 18명을 해고 당하게 만들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등 주로 나쁜 사건으로 언론에 이름을 자주 알려서 동종 업계에서 유명한 홍종환의 이름을 알 수 없다면서 홍씨라고 지칭한 점도 이상하다. 홍종환을 모른다면 설렁탕과 전혀 무관한 다른 일을 했다는 뜻인데, 느닷 없이 주방에서 설렁탕을 척척 끓여 내면서 반찬도 척척 만들었다는 것도 의아하다.

 

1987년의 거짓 발언 뒤 유원석은 말을 바꿔서 50년대 후반쯤에 공평동 46번지 설렁탕 식당을 넘겨 받아 생전 처음으로 설렁탕 장사를 시작하였다고 스스로 말을 번복하였다.(한국경제1994. 1.4) 

이후 이문설농탕은 유원석이 1960년에 양모씨가 운영하던 이문설농탕을 넘겨 받았다고도 말을 보태었다. 

"전씨의 어머니 유원석(2002년 작고)씨가 1960년 양모씨로부터 이문설농탕을 인수해 지켜오다 아들인 전씨에게 물려줬다."
- 서울신문, 2004. 9. 14

 

"전 사장은 "1904년 이문옥이라는 이름으로 설렁탕을 팔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던 것을 1960년 전 사장의 어머니인 고(故) 유원석씨가 인수해 이문설농탕으로 이름을 바꿨다."
- 뉴스타픽 2017. 11. 4

 

이 주장이 혹시라도 사실이라면 1960년에도 이문식당의 흔적은 인사동 265~8번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홍종환에게서 양모씨에게, 양모씨에서 유원석에게 인수인계가 이뤄 졌다는 어떠한 물증도 밝혀진 바가 없다. 홍종환은 이문 식당 운영 도중에 1950년 8월 10일 끌려 갔다가 납북 당했기에 양모씨에게 식당을 팔 수 없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의 이문식당만을 기억한다.

예전 일정 땐 종로 화신 뒤에 이문식당이라고 있었어요. 장안에선 제일 설농탕을 잘 한다는 집이었어요. 통금시간이 없을 때니까 술꾼들이 새벽 한두시만 되면 쓰린 속을 풀려고 모여 들곤 했지요. 그때 쯤 되면 국물이 제일 진했고, 진짜 설농탕을 맛 볼 수 있었던 거에요.
- 정인섭, 조선일보 1972. 12. 1

 

청년 시절의 이문식당을 기억하면서 같은 자리에 있는 불과 13년전의 이문식당을 기억하지 못 할리가 없다. 이로써 유원석은 인사동 265~268번지 이문식당을 양모씨에게서 인수한 것이 아니라, 공평동 46번지에 있는 어느 설렁탕집을 누군가에게서 인수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양모씨 또는 어떤 이가 인사동 이문식당을 인수했다는 흔적이 전혀 없다. 

덧붙혀 유원석이 1950년대 초 피난길에 만난 지휘자 정명훈의 모 이원숙과 부산 광복동에서 식당을 동업했다고 하였다.(서울신문 2004. 9.14) 이 부분도 맞지 않는다.

 

다른 기사에서는 부산 피난길에 이원숙을 만나서 남포동에서 고려정이라는 냉면집을 3~4년간 동업했다고 한다.(뉴스타픽 2017. 11. 4) 광복동에서 했다더니 남포동으로 동네를 바꾸었다.

 

이원숙이 부산에서 식당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다. 이원숙은 동덕여고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 명동에서 고려정이라는 규모 있는 한식집을 경영했다. 1949년 동덕여중이 학예회를 무료로 하겠다고 허가를 받고는 입장권을 받고 고려정에서 하기로 하여 물의를 일으킨 것으로 보아 이원숙은 6.25 동란전부터 명동에서 고려정이라는 한식 식당을 운영했다. 1953년 10월 13일 국방부정훈회 주최로 육해공군전몰장병유가족 좌담회를 고려정에서 개최하였다.

 

이원숙은 서울에서 5살 아이와 11개월 유아의 생명을 잃고서 1951년 12월에 부산에 피란 가 있던 남편을 찾아 갔고, 정명훈을 잉태하여 1953년 1월 22일에 서울에서 출산하였다. 새 생명을 잉태하여 반듯하게 썬 음식만 먹고, 예쁜 과일만 가려 먹을 정도로 태교에 신경을 쓰고 있었기에 부산에서 식당을 동업할 마음가짐도 아니었다. 이원숙이 부산에 머문 기간은 출산을 고려하면 길게 잡아도 1년이 채 안 되었다.

 

1945년 9월 8일에 내린 통행금지령을 무려 47년이나 지나서야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국제 사회에서 국가 인상을 좋게 하려는 의도로 1982년 1월 5일에 마침내 해제하였다. 이 여파로 술집의 영업 시간도 풀려서 아침까지 영업하는 술집이 80%나 될 정도였다. 이로 인해서 설렁탕 식당들은 대호황을 누렸다.

 

이문설농탕도 이때 여느 설렁탕 식당처럼 많은 수익을 올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문설농탕은 1996년에 대대적인 재단장을 해서 콘크리트 벽면 타일 부착 외벽을 한옥 형태로 꾸몄다.(경향신문 1997. 1.16)

 

이렇게 되자 이문설농탕 한옥을 일제 강점기에 지었다는 헛소문이 퍼지기조차 했다.(日帝 때 지은 기묘한 2층 한옥, 문화일보 2013. 10. 18) 이제는  이 말을 사실로 믿는 사람들마저 나타나서 오세훈이 도심 재개발 사업으로 100년 넘게 장사하던 건물인 유서 깊은 한옥을 철거해 버렸다고 안타까워 하는 지경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불확실하고 미비함으로 인해서 이문설농탕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설렁탕 식당으로 단 하나라도 볼 수 없다. 

이문의 설넝탕 전일과 여히 이문식당, 자유신보 1953. 12. 10

 

현 지도에 표시한 과거 위치 및 지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