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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고기는 한민족만의 독창적인 소육(燒肉) 중 하나다.

허구인물 전우치 2018. 10. 9. 06:53

최근 논란이 된 황교익의 불고기 일본 기원설이 눈에 들어 오길래 읽었지만 근거가 너무 말이 안 되어 일요일 반나절 동안 불고기의 역사를 찾아 보았다. 글을 간단하게 쓰고자 많은 자료들을 생략하였고, 전문으로 인용하지 않고 축약하기도 했으며, 출처만 나열하기도 하였다.


들어가는 말

 

황교익은 2010년 5월 1일자 서울 타임즈 기고에서 처음으로 "불고기는 우리 것이 맞는가? 과연 불고기는 우리 민족만의 독창적 음식인가에도 많은 의문이 있다"고 공개 발언을 하였다.

 

근거로 일반적인 한국어의 음식명 조어 방식에서 벗어난다는 점을 들었다. '떡+볶이, 제육+볶음, 감자+튀김, 김+말이, 김치+찌개, 된장+찌개, 삼계+탕, 대구+탕, 아구+찜 같은 「재료 + 조리법」 구조가 아니라, 불고기는 「조리법 + 재료」 구조다'라고 하였다. 한편 '비빔밥, 군고구마, 볶음국수처럼 「조리법 + 재료」 구조로 뒤집어 진 것도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유독 '불 + 고기 작명 방식은 燒肉(소육)의 불 + 고기 작명 방식이고, 일본어 야끼니꾸를 한자로 燒肉으로 쓴다'고 하였다. 이 표현은 불고기가 야끼니꾸의 영향을 받았다는 느낌을 주려는듯 하다. 

 

이를 뒷바침 하듯이 기고문의 서두에서 "우리의 불고기와 일본의 스키야키(조선시대 말에 생선으로 만든 일본의 전골 요리였다), 야키니쿠, 이 셋은 비슷하면서 조금씩 다른 음식이다. 일제시대에 분명히 서로 관여하고 분화하였을 것이다. 그 관여와 분화의 시발 음식이 무엇이냐를 두고 한일 간에 민족적 자존심 대결을 벌이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런 논란을 벌이는 것 자체가 우리한테 별로 이득이 안 된다"고 발언하였다.

 

2015년 10월 13일 광주광역시 서구 라마다 플라자 광주호텔 5층에서 열린 광주일보 리더스 아카데미에서는 ‘불고기’라는 명칭은 1930년대에 한글학자 김윤경이 일본어 ‘야끼니꾸(燒肉)’를 직역한 말이다라며 더 나아 갔다.

 

2018년 9월 말과 10월 초에도 불고기라는 단어는 야끼니꾸를 국어학자 김윤경이 1930년대 번안한 단어라는 주장을 반복하였다. 다만 야끼니꾸가 일본에서 유래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물러 섰다.

 

그러면서 이효석이 1939년 여성(女聲)에 실은 글을 끄집어 내어 이효석도 불고기라는 말 대신에 야끼니꾸라는 일본 말로 불렀으니 불고기라는 단어가 야끼니꾸에서 유래한 단어가 맞지 않느냐고 재차 강조 하였다.

 

황교익은 야끼니꾸(燒肉)라는 단어 쓰기에서 燒肉(야끼니꾸)로 단어 쓰기 방식을 바꾸면서, 불고기라는 명칭을 빨라야 1920년대(TBS 방송 5일자에서는 1920년대 말)에 만들었을 것이라면서 燒肉라는 단어는 일본에서는 이미 1870년대에 등장했다고 주장하였다.

 

덧붙혀 불고기가 일본 음식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달콤한 간장과 자작한 물이 있는 (스키야끼식) 불고기가 그 영향의 흔적" 이라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변화하였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라고 주장을 확대하였다.


1. 번육(燔肉)

 

제사를 다룬 시경(詩經) 소아(小雅)편 초자(楚茨)에 "부엌 일을 공손히 하여 도마에 올린 제물이 매우 크니 혹은 구은 고기(燔), 혹은 구운 간(炙)이요, 부인이 청정하여 제기에 아주 많이 담았으니 손님을 위함이라네"라는 구절이 있다. 시경을 해설한 시경통론에서 "번(燔)은 번육(燔肉)이요(燔燔肉也), 적(炙)은 적간(炙肝)이다(炙炙肝也)"라고 하였다.

 

사기, 맹자, 춘추좌씨전 등에서 언급하면서 중국에서 제사에 번육을 올리는 것은 예법으로 자리하였다.       

 

번육은 조선에서도 제사용 구운 고기였다. 조선왕조 실록에 세종, 연산, 광해, 인조대의 기록에서 궁궐 제사에 쓰는 번육을 언급하고 있다. 김영의 계암일록(溪巖日錄)을 보면 민간에서도 1870년에도 번육은 제사용 고기였다.


2. 소육(燒肉)

 

조선은 구운 고기 음식 소육(燒肉)을 제사용 번육(燔肉)과 구분하였다.

 

인류가 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 일은 대체로 오래 되었고 넓은 지역에서 이뤄졌다고 수긍한다. 인종별, 민족별, 나라별로 불에 고기를 구워 먹는 행위는 일치하더라도 자신들의 언어로 서로 다르게 불렀다. 다만 문자 기록에 있어서 동일 문자체계일 경우에는 동일한 단어를 나중에 받아 들여 발음만 다르게 할 뿐 같은 단어를 공유하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동북아시아 한자 문화권이던 시기에 조선은 제사용이 아닌 구운 고기를 燒肉이라고 쓰고, 소육이라고 읽었다. 소육(燒肉)은 한국에서 문헌상 1462년 9월 29일조 세조실록(권29)에 태종의 고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태종은 봄가을 사냥 행사를 나가서 내관에게 승지를 부르라고 하여 찾지 못하겠다고 하니, 웃으면서, 연기 나는 곳에 가면 사냥 행사 때면 늘 그렇듯, 먼저 소육(燒肉)하고 나서 뒤에 술을 마시고 있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太宗嘗講武 命召承旨 內豎不知承旨所在 太宗笑曰, 尋出烟處去, 以承旨等每當駐駕, 必先燒肉後酒而飮故云.)

 

반면 일본에서 燒肉이라는 단어는 문헌상 1872년에 발행한 서양 요리를 소개하는 서양요리지남(西洋料理指南) 상권 28쪽에 설명 없이 단어로만 처음 등장한다. 이 책에 쓰인 단어 燒肉은 서양 요리 소육이지, 일본 요리 야끼니꾸가 아니다. 일본은 서양요리의 번안어로 한국의 소육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썼다.

 

따라서 한국의 소육이라는 한자 단어가 일본으로 건너 갔고, 일본인은 야끼니꾸라고 발음하였다.

 

일본 천무천왕은 불교의 영향, 군마 착출, 농사용 소의 수요에 따라 675년 살생과 육식 금지령을 내려 육류 섭취를 금하였다. 무려 1,3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1867년에 명치유신을 단행하여 1871년에야 명치왕이 육식을 허용하였다. 일본이 燒肉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서양요리지남(西洋料理指南)이라는 책을 출판하기 불과 1년 전이었다.

 

소육(燒肉) 요리법을 조선 책들은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조선 태종 때는 소육(燒肉)이 연기가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큰 불에 고기를 굽는 방식이었다면, 점차 숯불에 작게 소육(燒肉)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1715년에 발간한 산림경제 권2 치선(治膳)에 대나무 꼬챙이에 끼워 숯불로 소육(燒肉)을 하는데, 고기를 기름, 소금, 간장, 갖은 양념, 술, 식초에 버무려 재었다가 묽게 쑨 풀을 살짝 발라 뒤집어 가며 구운 다음에 익은 풀을 벗기고 먹는다고 하였다. 또한 참깨꽃을 가루로 만들어 고기 위에 뿌리면 기름이 흐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승정원 일기에 병자호란으로 인해 임금의 거동 길(輦路)마저 유지가 힘들어서 인조는 청국으로 사행을 떠나는 사신에게 제공하는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도록 명하였으나 소육만큼은 아침 점심 저녁 모두 빠지지 않고 상에 올려 주도록 하였다.

 

최덕중의 1712년 사행을 기록한 연행록에 보면 심지어 청국에서도 겨울에는 손 쬐기용 숯 말고도 소육용 숯을 따로 15근씩이나 받아낼 정도였다.

 

소육이라는 단어를 해방 직전까지 꾸준하게 썼다. 1941년에 중국 호북성 한구(漢口)를 방문한 유상근은 삼천리 제13권 제6호에서 현지보고라는 제목으로 조선인촌 조선인 식당의 가격표가 소육 1인분 70전, 육탕(肉湯) 40전, 갈비 1인분 70전, 갈비탕 1인분 70전이라고 하였다. 그 외 만두국 60전, 비빔밥 60전, 회갓 60전, 떡국 50전, 장국밥 50전, 쟁반 한 상 1원이라고 알렸다.


3. 난로회(煖爐會)

 

새로운 소육(燒肉) 조리법인 난로회가 조선에서 유행하였다.

 

이에 대해 고대 중국 이야기에 밝았던 홍석모는 동국세시기에 송나라에서 10월 1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나서 둘러 앉아 숯불에 고기를 구워 먹으며 술을 마셨다고 여원명(呂原明)의 세시잡기(歲時雜記)와 맹원로(孟元老)의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 기록되어 있다면서 송나라 풍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적었다.

 

세시잡기에는 고기를 구워 먹는다는 대목이 없고 "민간에서는 모두 술을 두고 난로회를 연다"고만 적혀 있다. 동경몽화록에는 "난로를 가운데 두고 둘러 앉아 술과 구운 고기(炙戀肉)를 마시고 씹는데 이를 난로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그런데 송과 같은 시대였던 고려에 대한 기록에는 난로회의 흔적이 없다.

 

숯불이 뜨겁기에 더워서 가을, 겨울, 봄에야 난로회를 즐겼다. 난로회는 숯불 위에 올려 놓은 전철(煎鐵) 또는 번철(燔鐵)이라고 부르는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고 테두리가 넓적한 쇠판에 고기 구워 먹기가 특징이었다. 기존의 대나무 꼬챙이에 끼워 구워 먹던 방식과 달리한 새로운 방식의 유행이었다. 번철이 벙거지를 닮았다고 하여 철립위(鐵笠圍)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기름, 소금, 간장, 냄새가 강한 마늘과 파를 비롯한 각종 양념, 술, 식초를 썼다. 연암집(燕巖集)에서 청국을 다녀 온 박지원은 연배인 김술부의 집에서 눈 내리는 날 방 안에서 난로회를 열어 번철에 고기를 구워 먹다가 후끈한 연기와 고기 비린내, 마늘 냄새와 파 냄새가 옷에 배자 창문을 열고 피하였다고 하였다.

 

1800년대 들어 서 난로회의 소육 조리법에 변화가 있었다.

 

1849년에 홍석모가 펴낸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에서 난로회는 소고기를 기름, 간장, 닭알, 파, 마늘, 후춧가루 등으로 양념하여 굽는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달걀과 후춧가루를 추가하였다.

 

난로회는 일제의 침략 전까지 유행하였다. 박주대의 나암수록(羅巖隨錄)에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郵征局) 개소를 축하하며 밤에 난로회를 열었다고 하였다.


4. 전골과 스끼야끼

 

난로회의 유행에 쓰인 불판, 즉 번철의 등장은 전골을 발전시켰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번철의 가운데 움푹 파인 곳에 소고기나 돼지고기, 무, 오이, 채소, 나물 등 야채와 달걀을 섞어서 장국을 끓였고, 이를 열구자탕(悅口子湯), 속칭 신선로(神仙爐)라고 하였다.

 

1764년 조선통신사 정사(正使) 조엄(趙曮)이 이끈 통신사 일행은 일본 음식이 워낙 조선인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전 선배들의 소문을 들었는지 수행원에 아에 조선 음식 요리사를 포함시켜 일본에 갔다. 소고기 소육을 즐기다가 일본에 가서 생선 요리를 먹으려니 곤혹스러워서였다.

 

당시 조선인 통신사 일행을 영접하고 담당한 대마도의 일본인들은 통신사가 데려 간 요리사가 닭을 잡을 때 내는 닭의 울음 소리를 차마 들을 수 없다며 비난하다가 유학도이면서 왜 불교 교리를 들먹이냐는 반박을 당했다. 일본은 여전히 육식을 금한 왕실의 영향력 아래서 살아가고 있었다.

 

일본은 스끼야끼를 일미라고 하면서 자주 상에 올리고 적극 권하였다. 일본인은 스끼야끼를 게이샤와 풍류의 유혹을 이기는 맛이라면서 승기악(勝妓樂)이라고 불렀으며, 삼나무 장작 불에 끓인다 하여 다른 말로 삼자(杉煮)라고도 하였다.

 

스끼야끼는 소고기,야채와 나물로 하는 조선 전골과 다르게 생선과 나물을 넣고 끓였다. 스끼야끼 국물은 색깔이 하얗고, 탁했다. 

 

그리하여 정사 조엄은 대놓고 어떻게 감히 일본의 스끼야끼를 조선의 전골 요리인 소고기 열구자탕 맛에 비할 수 있느냐고 평가하였다. 생선 스끼야끼는 이미 부산 왜관을 중심으로 부산 지역에 알려졌으나 조선인의 입맛에는 맞지 않아 호응을 얻지 못한 일본 전골이었다.

 

1871년 육식 금지령을 거두자 스끼야끼 재료로 땅고기를 받아 들였다. 당시 일본은 문물 습득을 하려고 유럽에 많은 시찰단을 보냈고, 그 중 육류에 대한 요리법 습득도 있었다. 일본은 서양 육류 요리를 일본식 서양 육류 요리로 응용하려고 힘을 썼다. 대표적으로 돈까쯔(豚カツ)와 고로케(コロッケ)를 들 수 있다.

 

일제 강점기 1910년대 후반에는 스끼야끼가 비싼 식당에서 열구자탕을 밀어 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김재은은 1926년 3월 3일자 동아일보 기고문에서, 7년 전 비싼 식당에 갔더니 조선 요리라면서 내 온 음식을 보니 밥상 위에서 스끼야끼가 열구자탕 자리를 차지하였다면서 음식의 독립마저 잃어버렸다고 한탄하였다.

 

동아일보 1928년 10월 19일자 기사에 따르면, 배움이 있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산층 이상 조선인은 국산 물건을 전혀 쓰지 않고, 오직 일제 물건만 쓰다 보니, 먹는 것도 스끼야끼를 먹어야 문화 음식을 먹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1929년 12월 1일자 별건곤 잡지에서는 신식을 추구하는 가정에서는 스끼야끼를 해 먹는다면서 소고기에 양파를 올려 간장을 붓고서 볶는다고 하였다.

 

친일파 윤치호 역시 손님 접대 음식이 스끼야끼였다. 친일파 소설가 김동인은 전골이라는 단어 대신 스끼야끼라는 단어를 일부러 썼다. 조선요리와 서양요리 중심이라던 태서관(太西舘)은 얼마 안 있어 스끼야끼 전문 요리점으로 바뀌고 말았다.

 

반대로 독립운동가 홍양명(洪陽明)은 1934년 11월 1일 개벽 신간 제1호에 실은 상해악몽이라는 글에서 중국 상해 숙소 건물에서 라트비아 사람이라면서 자신이 필리핀에서 살았었다고 하며 필리핀 사람이 아니냐고 묻고는 아니라고 부인하자 일본인이냐면서 스끼야끼가 최고의 맛이라고 떠들자 악몽으로 느꼈다.

 

1931년 1월 3일자 동아일보가 양고기를 가정에 소개 하면서 양고기 스끼야끼 조리법을 실었다. 하지만 파, 미나리, 참기름, 소금, 장 등은 여전히 조선 전골 재료였고, 일본 조미료 미림이 스끼야끼의 실체였다. 더 해서 불 안 땐 불판에 참기름을 조금 뿌리고 불을 지펴서 뜨거워질 때까지 고기, 미나리, 파 등을 넣어서 뜨거워 지면 급하게 익히라고 한 설명에서도 스끼야끼가 아니다. 재료가 조선음식 재료로서 일본의 스끼야끼가 아니다.

 

1931년 6월에 나온 동광 제22호에서 러시아 작가 가린 미하일로프스키는 함경도 회령을 방문하여 조선식으로 저녁을 먹었다면서 닭백숙, 소고기 전골, 너비아니 등 7가지 음식에 빵을 섞어 먹으니 맛 있다고 하였다. 이 역시 전골이 일본 스끼야끼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또한 주막에서 여전히 전골은 막걸리 안주로 내어 오는 조선 사람 입맛에 맞춘 음식이었다.

 

1921년~39년 사이에 동아일보는 쑥갓 전골, 조개 전골, 채소 전골, 두부 전골, 닭 전골, 양 전골, 낙지 전골, 전복 전골, 우육 전골 등 다양한 전골 조리법을 소개 했다. 1938년 3월 21일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아이의 돐잔치 손님 상에도 전골을 냈다고 하였다.

 

3.1 만세 운동으로 투옥되기도 했던 당대 최고 화가 나혜석은 프랑스 파리 여행중 3.1 만세 운동 교도소 동기 천도교 간부 최린을 만나 불륜을 저질러서 3.1 만세 운동 가담자들을 변호했던 변호사 남편 김우영에게서 1932년에 이혼 당하였다. 나혜석은 남은 인생을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살게 되면서 1935년 6월 1일자 삼천리 제7권 5호에서 표주박에 기름을 치고서 부순 튀각, 고비 나물, 도라지 나물을 넣고, 두부 전골 국물을 부어 비벼 먹었다고 하였다.

 

동아일보 1921년 3월 27일자 기사에 의하면 두부 전골은 절에 가야 돈을 주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절밥이었다. 이후 민간에 널리 퍼지면서 고기를 추가한 두부 전골로 변하였다.

 

고기를 넣은 두부 전골 요리법은 동아일보 1937년 12월 24일 기사에 나와 있다. 두부, 고기, 표고 버섯, 미나리(석이 미나리), 숙주, 달걀, 홍무, 죽순, 녹말, 무가 재료라고 하였다. "두부를 서푼 가량 둑게로 점여 납작스럼하게 썰어 정육을 곱게 다져 양념해서 두부에다 잎혀서 두부 한 쪽을 맛추저서 녹말을 무처 철에 부치고, 숙주는 아래 위 잘러 살작 데쳐 기름에 볶가 가진 양념 합니다. 표고, 죽순도 채쳐 기름에 볶아 양념하고, 미나리와 홍무도 살작 데쳐 먼저 것과 가치 기름에 볶아 노른자 흰자를 각각 부처 채칩니다. 무도 채처 나물하듯 함니다. 그 다음 저육을 채처 양념해 남비 밑에 깔고 그 우에다 붓처 논 두부를 담고 맨 우에 다 준비해 논 숙주 미나리 외 여러 가지를 다 색 마추어 펴 노코 국물은 장물을 슴슴하게 타서 붓고 끄립니다".

 

동아일보 뿐만 아니라 1920년~41년 사이의 잡지 동광, 별건곤, 삼천리도 전골과 스끼야끼를 구분하였다. 조선 전골이 스끼야끼의 영향을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마저 1938년 12월 5일자 기사에서 기름져서 몸에 해로운 음식으로 곰국, 전골, 간유를 꼽으면서 전골과 스끼야끼가 다른 점을 인정하였다.

 

한국의 전골은 일본의 스끼야끼와의 경쟁에서 일제강점기 초기 부유층과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한 일본 음식 유행에 흔들리기도 했지만, 일본의 달콤한 왜간장(공장 대량생산 산분해 간장) 맛에 넘어가지 않고 원래의 전골 맛을 지켜냈다.


5. 너비아니

 

너비아니라는 단어는 1919년 상주 군수로 부임한 친일파 심환진이 그 곳에 전해져 온 요리책을 베껴서 며느리 홍정(洪貞)에게 전한 시의전서(是議全書)라는 책에서 기원하였다.

 

시의전서에 너비아니는 연한 고기를 얇게 저며서 칼등으로 두들겨 부드럽게 해서 갖은 양념에 재어 굽는 고기라고 하였다. 갖은 양념이 무엇인지 나열하지 않아도 조선인은 마늘을 빼지 않고 꼭 넣는 점은 자명하다.

 

그런데 1939년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의 우육구이(너비아니, 쟁인고기)편에 나오는 조리법은 너비아니 조리법이 아니라 일본 스끼야끼 조리법이다.

 

“고기를 얇게 저며서 그릇에 담고 간장과 파 이긴 것, 깨소금, 후추, 설탕을 넣고 잘 섞어서 굽는다”고 하였는데, 조선 음식의 핵심인 다진 마늘과 참기름이 사라져 버렸다. 즉 일본인이 싫어하는 마늘과 참기름을 빼버리고, 단 것을 좋아하는 일본인 입맛에 맞게 설탕을 듬뿍 쳤다.

 

신식 요리법이라면서 기존의 너비아니를 일본인 입맛에 맞게 바꿔 버린 것이다.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너비아니라는 단어를 가져다 썼다.

 

 

동아일보 1940년 식탁표라는 제목의 기사들을 보면 너비아니도 해방 직전까지 꾸준하게 가정 식탁에 오르는 음식이었다. 1934년 03월 01일자 별건곤 제71호에서 백수 황달이도 10원이 생기자 제일 먼저 막걸리 안주로 삼을 정도로 너비아니는 맛있는 음식이었다.

 

너비아니에 대한 찬사는 동아일보 1930년 1월 20일자 소설에 잘 나와 있다. "기름이 이글이글 끌허 올으는 "너비아니"의 냄새를 마튼격으로 코를 벌름거렷다. 성품 급한 위인은 벌서 말을 잡어 타고 말머리를 고개편으로 두고 달리기 시작햇다."


5. 불고기

 

"『이것 안 되엇습니다. 매우 未安합니다』하고, 厥도 哄咲 하며, 눈읫 불을 흘리엇다. 厥의 얼굴은, 마치 이글이글 타는 숫불우에, 노치여 잇는 불고기덩이 가탓다."

- 빙허생, 타락자, 개벽 제22호, 1922. 04. 01.

 

순 우리 말인 불고기라는 단어가 1922년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났다.

 

이후 국어사전과 요리책에서 불고기라는 단어는 너비아니라는 단어와 경쟁 관계였다.

 

1947년에 발행한 큰 사전(을유문화사) 2권에 너비아니가, 1950년에 발행한 큰 사전 3권에 불고기가 처음 실렸다. 너비아니 : 저미어 양념하여 구운 쇠고기, 불고기 : 숯불 옆에서 직접 구워 가면서 먹는 짐승의 고기라고 하였다.

 

1958년 수정증보 표준 국어사전(장문사)에서는 불고기가 사라졌다. 1968년 표준국어사전(성문사)에서는 너비아니가 사라지고, 불고기가 다시 등장하였다. 1968년 표준국어 사전에서는 불고기 뜻을 "쇠고기 따위 육류를 구운 음식이다"하면서 불고기에 소고기도 포함하였다.

 

1973년 신콘사이스 국어사전(학습연구사)은 불고기를 "살코기를 얇게 저며 양념하여 구운 짐승의 고기"라고 하여 불고기를 양념구이로 확대하였다.

 

너비아니는 1977년 국어대사전에서부터 다시 실리기 시작했다.

 

한국 요리책에는 1958년에야 '고등요리실습'에서 불고기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참고 표준어로는 너비아니라고 하든지 또는 고기구이라고 한다. 속칭 불고기라고 하지만 상스러운 부름이다"라고 하여 불고기를 너비아니의 상스러운 별칭으로 여겼다.

 

가장 잘 되어 있는 이희승 편저 민중서림 국어대사전을 보면, 너비아니를 "저미어 양념해서 구운 쇠고기"라고 하였고, 불고기를 "살코기를 얇게 저며서 양념을 하여 재었다가 불에 구운 쇠고기 등의 짐승의 고기"라고 하였다.

 

국어학자들은 너비아니 고기를 소고기로, 여전히 불고기를 짐승의 고기라고 하고 있다. 이는 국어학자들이 짐승의 고기가 무슨 뜻인지 몰라서 저지른 오래 되고, 계속 하는 오류다.

 

수육(獸肉)을 한글로 풀면 짐승의 고기다. 한글학자들은 단순하게 짐승의 고기라고만 하는데 머물렀다. 이희승 국어대사전에도 수육(獸肉)을 "짐승의 고기"라고 정의했다. 최근에 와서야 불고기를 "쇠고기, 돼지고기 따위의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짐승의 고기"라고 앞에 말을 조금 추가하였다. 여전히 국어학자들은 수육(獸肉)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불고기 설명에서 짐승의 고기라는 표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육(獸肉)을 20세기 초까지 드물게 집에서 기르는 가축의 뜻으로도 썼었다. 과거에 가축을 달리 이르는 말들 가운데 하나가 수육이었다. 이 맥락을 모르니까 한자어 獸肉을 한글로만 풀어서 짐승의 고기라고만 하니, 불고기가 야생 동물을 잡아 만든 구이 요리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너비아니는 소고기만을 지칭하지만, 불고기는 집에서 기르는 모든 가축의 고기를 이용한다. 따라서 불고기에 대한 설명에서 '짐승의 고기'가 아니라 '가축의 고기'라고 표현해야 한다.

 

새로운 소육(燒肉) 요리를 불고기 또는 군고기라고 부르며 1920년대에 대중화에 크게 성공해서 평양에서 냉면과 더불어 인기 많은 음식이 되었다.

 

전국적인 소고기 산지인 평양에서 불고기 요리가 융성함은 당연하였다. 더불어 고기를 듬뿍 얹을 수 있어서 냉면도 유명해졌다. 모란봉 소나무 숲에 수 많은 장사꾼들이 모여 들어 손님들에게 불고기를 팔았고, 방문객들도 나름대로 소고기와 화로를 챙겨와 자리를 폈다.

 

이로 인해 연기가 가득하여 소나무가 시름시름 죽어가니 1935년 5월 일시적으로 모란봉에서 일체의 불고기 조리를 금지하여 옥외 영업도 중단시켰다. 1938년 4월에도 다시 한 때 모란봉에서 군고기를 금지시켰다.

 

일본에서는 전시체제를 내세워 육식 금지령을 내려서 일본인은 고기를 못 먹는데도 평양에서는 아랑곳 하지 않고 전국에서 가장 많이 소고기를 소비하자 1941년 10월 평안남도 경찰 보안과에서는 모든 평양 시내 식당이 불고기는 1인당 570그램, 갈비는 1,140그램, 스끼야끼는 380그램만 팔도록 했다. 편법 장사를 막기 위해 반드시 1인당 얼마가 아니라 무게로 팔도록 하면서, 자리를 옮겨 앉아 새로운 손님인척 다시 주문하는 것도 금지하였다.

 

보다시피 불고기와 스끼야끼는 별도로 동시에 존재하는 각기 독립적인 음식이었다.

 

 


6. 야끼니꾸

 

1933년 한 일본 신문사가 일본에 한국의 소육(焼肉) 요리를 소개했다.

 

동경조일신문(東京朝日新聞)은 1933년 3월 25일자 기사에서 "취미의 조선요리, 색다른 소고기 요리(趣味の朝鮮料理 風変りな牛肉料理)라는 제목을 달고, 소육과 심장(焼肉と心臓) 요리법을 실었다.

 

재료는 상등의 소고기, 대파, 설탕, 간장, 참기름, 참깨, 후추, 달걀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재료를 보면 역시 마늘이 빠져 있기에 일본식으로 변형한 것을 알 수 있다. 조리법은 가볍게 두드린 소고기와 썰은 대파를 양념에 잘 섞어서 센 불에 빠르게 구워서 뜨거울 때 먹는다고 하였다.

 

일본인들은 당시의 달걀 사용법에 대해서 여전히 궁금해 하고 있다. 달걀을 어떻게 썼는지 1849년의 동국세시기에 '난로회에서 소고기를 기름, 간장, 달걀, 파, 마늘, 후춧가루 등으로 양념하여 굽는다'고 하여 잘 나와 있다.

 

이 기사를 통해 소육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 갔다는 점과 고기 소육과 내장 소육이 함께 일본에 전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작 한국의 소육이 일본 전역에 퍼진 시기는 한국의 광복, 즉 일본의 패망 직후부터다.

 

패망한 일본에서 식량난이 심각했다. 이로 인해 먹는 장사는 무조건 돈을 벌었다. 자본력이 약했던 재일교포들은 작은 식당을 열어 일본인 도축장이나 정육점이 버리는 소와 돼지의 내장을 가져다 구워서 팔기 시작했다.

 

물론 일본인도 1933년 소개 받은 조선의 내장 소육 요리의 영향으로 '호르몬 구이(焼き)'라는 내장 구이를 먹었으나, 1940년대 전시체제에서 육식 금지를 당하여 사라졌다.

 

재일교포들은 소육 장사로 자본 축적에 성공하자 내장 구이에서 벗어나 지금과 같은 고기를 굽는 구이 방식으로 파는 명월관, 태창원, 천산원, 식도원 같은 대형 음식점을 차려서 가족 경영체제에서 종업원을 고용하는 체제로 확장시켜 시장을 더욱 키워 나갔다. 이 시기에도 일본인이 운영하는 소육 식당이 하나도 없어서 재일교포들이 일본 소육 시장을 개척하여 독점하였다.

 

1965년까지는 한국 요리점 또는 조선 요리점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나, 한일 수교를 하면서 국제적 관계를 고려하여 야끼니꾸 식당이라는 표현으로 바꾸고 일본 시민권을 취득하는 등 일본화를 표방하였다. 그러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다시 한국화 성향을 드러내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황교익은 불고기가 야끼니꾸의 영향을 받았으며, 불고기가 야끼니꾸의 번안어라는 주장을 하면서 그에 대한 근거로 3가지를 내세웠으나 모두 엉터리다. 

 

1920년대에 야끼니꾸라는 말이 한국 신문에 등장했다고 주장하지만, 1920년대에 한국에서 야끼니꾸라는 단어를 쓴 신문사는 한 곳도 없다. 황교익이 일본에서는 1872년에 등장했지만 한국에서는 1920년대 말에야 처음 등장했다고 우기는 야끼니꾸라는 단어는 야끼니꾸가 아니라 조선의 고유 한자어 燒肉이라는 단어다. 燒肉이라는 단어는 문헌만 보아도 이미 조선 태종 때부터 흔하게 써 온, 조선이 조합한 조선식 한자 단어로서 소육이라고 발음하지 야끼니꾸라고 발음하지 않는다.

 

한편 1920년대의 燒肉이라는 단어는 동아일보 1922년 8월 12일자 막심 고리끼의 체르카시를 번역한 소설 속 "燒肉과 茶를 시켰다"는 대목으로 나온다. 황교익은 이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야끼니꾸라는 단어를 한국내 언론에서는 1941년 7월 30일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평양의 명물 불고기 가격 인상을 진정"이라는 제목을 달고, 본문에 "평양 명물인 야끼니꾸(燒肉) 가격을 올려 달라는 진정이 있어 세인의 주목을 끌고 있다"라고 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모든 신문사 가운데 유일하게 야끼니꾸라는 단어를 쓴 매일신보마저 야끼니꾸가 일본의 요리가 아닌 한국 평양의 명물 요리 불고기라고 말하고 있다.

 

즉 한국의 불고기를 일본인이 야끼니꾸라고 부른 것 뿐이다. 한국이 1933년 일본에 소육이라는 음식을 소개해 주기 전에는, 1870년대에 일본이 소육이라는 단어만 야끼니꾸라는 발음으로 조선에서 받아 들였지, 야끼니꾸라는 이름의 일본만의 실제 고기 요리가 없었다.

 

황교익은 다른 근거로 이효석이 1939년 6월에 여성(女聲) 4권 6호에 기고한 "평양 사람은 대개 골격이 굵고 체질이 강장하고 부한 편이 많은데, 행여나 야끼니꾸의 덕이 아닌가 혼자 생각에 추측하고 있습니다. 다만 야끼니꾸라는 이름이 초라하고 속되어서 늘 마음에 걸립니다. 적당한 명사로 고쳐서 보편화 시키는 것이 이 고장 사람의 의무가 아닐까 합니다. 말이란 순수할 수록 좋은 것이지 뒤섞고 범벅하고 옮겨 온 것은 상스럽고 혼란한 느낌을 줄 뿐입니다"라는 글을 들고 있다.

 

이효석은 문헌상 일제강점기 모든 한국인 중에서 유일하게 평양 불고기를 야끼니꾸라고 혼자 적었다. 이미 각종 언론과 잡지는 불고기라고 일상적으로 적고 있고, 사람들이 불고기라고 부르고 있는데도 이효석 혼자서만 불고기를 야끼니꾸라고 하면서 '야끼니꾸라는 이름이 초라하니까 적당한 이름을 붙혀서 보편화 하자'는 현실과 전혀 안 맞는 말을 하였다.

 

1941년 10월 23일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조차도 "불고기"라고 기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명확하게 표기하였다. 황교익은 개연성마저 희박한 이효석의 발언을 가지고 불고기가 야끼니꾸의 영향을 받은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황교익은 한글학자 김윤경이 1965년 12월 20일자 경향신문에 "세종대황이 창제하신 한글은 역시 세계적으로 훌륭한 글이라고 찬양하는 그는 처음에는 생소하고 듣기 어색했지만 벤또 대신에 도시락이, 돔부리 대신에 덮밥이, 야끼니꾸 대신에 불고기라는 말이 성공한 것은 얼마나 좋은 예냐고 지적한다"라고 한 기사를 본 것인지, 엉뚱하게 1930년대에 김윤경이 야끼니꾸의 번안어로 불고기라고 직역을 했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하지만 불고기라는 단어는 1930년대 이전인 1922년 빙허생의 소설 타락자에 등장한다. 그러니 김윤경이 1930년대에 야끼니꾸를 불고기라고 번역할 수 없다. 불고기는 애초부터 불고기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상식적으로도 일본어 일소 운동을 할 수 없었다. 외래어 청산 운동을 해방 이후에야 실시했다. 실제로 1945년에서 김윤경이 야끼니꾸를 언급한 1965년까지 외래어, 즉 일본어 일소 운동은 1949년에 한 번 있었다.

 

대중일보와 경향신문에 따르면 1949년 10월 9일 한글날을 맞이하여 한글학회는 한글전용촉진회와 함께 왜식간판 일소 운동을 진행하였다. 충청매일은 10월 12일과 14일에 서울 시청에 모여 토의한 결과 안건으로 올린 72개의 왜식어 가운데 최종적으로 간추려서 선정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최종 선정한 48개의 왜식어 안에는 스끼야끼는 있었어도 야끼니꾸라는 단어는 없었다. 따라서 김윤경의 발언에는 신뢰성이 없다.

 

곤다테효(獻立表)=차림표,
가바야끼(蒲焼)=생선 양념 구이,
야끼도리(焼鳥)=새 구이 (주: 닭꼬치),
시오야끼(塩焼)=소금 구이,
덴뿌라(天婦羅)=튀김,
돈부리(丼)=덮밥
텐동(天丼)=튀김 덮밥,
오야코동(親子丼)=고기알 덮밥
다마고돈부리(卵丼)=달걀 덮밥,
우나동, 우나기돈부리(鰻丼)=뱀장어 덮밥,
가스노꼬(数の子)=사용금지 (주: 말린 청어알), 
다시(出汁)=맛국 (주: 양념용 국물),
고노와다(海鼠腸)=보류 (주: 해삼 내장),
다마고도지(卵とじ)=사용금지 (주: 건더기가 푼 달걀에 달라 붙게 끓인 국),
다꾸앙(澤庵)=일본 짠지,
모찌(餠)=찹쌀떡,
미주타끼(水炊き)=백숙,
야끼메시(焼飯)=볶음밥,
아까다시(赤だし)=붉은 된장국,
오싱꼬(お新香)=일본 백김치,
스시(壽司)=초밥,
엔도마메(ピース)=사용금지 (주: 완두콩),
스모노(酢の物)=초무침 안주,
사시미(刺身)=생선회, 
가마보꼬(蒲鉾)=생선묵,
젠사이(前菜)=전채,
시르꼬(汁粉)=단팥죽,
소바(蕎麦)=보류 (주: 메밀),
와테이쇼꾸(和定食)=일본 정식,
벤또(辨當)=도시락,
오리즈메(折詰)=나무 도시락,
스끼야끼(壽喜燒, 鋤焼)=일본 전골,
돈까스(豚カツ)=저육 커틀렛,
곤야꾸(蒟蒻)=곤약,
오뎅(御田)=꼬치안주,
요깡(羊羹)=팥편 밤편 묵과자,
센베이(煎餠)=누른 과자,
오꼬시(粔籹)=강정 과자,
당고(団子)=경단,
아지노모도(味の素)=맛나니 (주: 화학조미료),
우동(饂飩)=가락 국수,
모리소바(盛り蕎麦)=찬합 국수,
아부라게(油揚)=유두부,
요세나베(奇鍋)=냄비 지짐,
우니(ウニ)=성게 젓,
이삔료리(一品料理)=단찬 (주: 한 가지만 나오는 요리),
가따크리꼬(片栗粉)=얼레지 가루
쓰께모노(漬物)=절임,
쓰끼다시(突出し)=부찬 (주: 곁들이 반찬).

(오류를 따져 한 단어를 추가하여 49 단어로 늘렸다. 위 기사들은 식사 전에 나오는 야채를 이르는 젠사이(前菜)를 단팥죽이라고 적어 놓았다. 따라서 단팥죽의 일본 이름은 시르꼬(汁粉)이므로 별개로 추가하였다.)


이는 신문 통계를 봐도 확인할 수 있다. 1945년에서 1965년까지 기사에서 야끼니꾸라는 단어는 1965년 김윤경의 발언 이외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해방 이전에도 매일신보 기사 1회를 제외하면 야끼니꾸라는 단어를 쓴 신문사는 한 곳도 없었다. 반면 불고기라는 단어를 해방 이전부터 신문 기사에 자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