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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도리탕은 일본어 섞인 말, 닭볶음탕은 우리 말!

허구인물 전우치 2016. 6. 1. 22:08

오늘 나온 노컷 뉴스에 닭탕에 얽힌 소식이 실렸다. 한국식품연구원 권대영 박사는 닭도리탕이 순 우리 말이라고 주장하였고, 국립국어원은 도리치다라는 단어는 어원이 없다고 맞섰다.

 

 

1. 도리치다라는 단어는 언제부터 나타나나? 그 뜻은 무엇일까?

 

한국식품연구원 권대영 박사 "닭을 도리쳐서 만든 게 닭도리탕, 순우리말" 31일 한국식품연구원 권대영 박사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식품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들이 보여주기 식으로 비상식적인 결정을 하니 닭도리탕의 '도리'가 일본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권 박사는 "모든 걸 상식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 할머니들이 닭도리탕을 먹을 당시 일본어를 알지 못했다. 닭요리에 굳이 또 '새'를 붙여 음식 이름을 어렵게 부를 이유도 없다. (국립국어원이) 우리 어원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닭을 도리쳐서 만든게 닭도리탕"이라며 "'닭을 도리치다'라는 말이 있었다. 우리나라 음식은 닭으로 찜을 만들면 '닭찜'이라 불렀다. 재료 뒤에 과정이 들어간 거다. 닭을 도리쳐서 만든 탕이니까 '닭도리탕'은 순우리말로 맞는 단어"라고 설명했다. 권 박사는 "조어시 마지막엔 탕, 국, 찜, 찌개, 무침 등 종류가 들어간다"며 "찜인데 닭을 도려내면 닭도려찜, 도리쳐서 만들면 닭도리찜 같은 식이다. 오이무침도 그렇지 않느냐. 말 가운데 불필요한 '새'를 넣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부연했다.
- 권대영, 노컷뉴스 2016. 06. 01


1961년 12월 28일 발간하고 1982년 11월 25일 수정증보판을 낸 이희승 편저, 민중서림 국어대사전에는 아에 도리치다라는 단어 자체가 없다. 즉 도리치다라는 단어를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수 십년간 널리 써 온 말을 국어사전에 실지 않을리가 없다. 이전의 어떠한 초창기 국어사전에도 사람들이 생활에서 쓰지 않았기에 도리치다라는 괴상한 단어를 실지 않았다.

 

도리치다라는 단어는 김원일이 1983년 문학과 지성사를 통해 발표한 불의 제전이라는 소설에 최초로 등장한다.1 더우기 김원일이 만들어 낸 단어 도리치다의 뜻은 권대영이 말하는 뜻과는 전혀 다르다. 1983년에 최초로 만들어진 단어 '도리치다'의 뜻은 "똬리 치듯 둥글게 말아 앉다"이다.

 

실제로도 1598년 경에 나온 음식디미방부터 해서 이후로 닭도리탕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던 시기까지 한글로 쓰여진 닭고기 요리법에 도리치다라는 단어가 들어 있지 않다. 근래 출판한 요리책에도 닭고기 요리법에 도리치다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보다시피 도리치다라는 단어를 닭도리탕이라는 중첩된 일본식 이름의 요리가 생겨난 이후에야 새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도리질은 아닐까 하지만, 국어 대사전에 실린 도리질은 ① 말귀를 겨우 알아 듣는 어린 아이가 어른이 시키는대로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재롱, ② 거절하는 뜻으로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짓을 뜻한다.

 

식품연구원 권대영이 뜻하고자 하는 단어는 도리어 내다가 가장 유사하지만, 이 마저도 "돌려서 베내다"라는 뜻이다. 즉 상한 부분이나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낸다는 뜻이다. 닭의 뼈와 살을 분리한다면 발라낸다고 하지 도리어 낸다고 하지 않는다.

 

도리다라는 단어도 있지만, 뜻은 돌려서 베내다이다. 오리다와 가까운 말이라서 가위나 칼로 필요한 부분만 따로 잘라낸다는 뜻이기에 이 역시 맞지 않다. 닭을 토막낸다고 하지 도려낸다고 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오이를 잘게 썰어서 소금에 절인 뒤에 기름에 볶아 만든 음식"이라는 뜻의 외보도리라는 단어가 있기에 도리는 한국 말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도 있다. 외(오이)+보도리의 조합이기 때문에 뜻이 부합되는 보도리라는 단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국어사전에 실린 보도리는 뜻이 다른 보와 도리(서까래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나무)가 합쳐진 단어다.

 

심지어 윗도리와 아랫도리를 들먹이면서 도리탕의 도리가 우리 말이라는 억지를 부리는 웃지 못할 일마저 있다. 윗도리와 아랫도리의 도리는 '부위'나 '영역'을 의미한다. 윗도리를 따뜻하게 입어라는 말은 허리 윗쪽 신체 부위가 따뜻하게 옷을 입으라는 뜻이고, 아랫도리를 내놓고 다닌다고 하면 허리 아랫쪽 신체 부위를 노출시킨채 다닌다는 말이다. 다른 예로 치맛도리라고 하면 치마 아랫 부분을 말한다.

 

윗도리와 아랫도리에 쓰인 '도리'는 '다리'와 같은 말로서, 윗다리, 아랫다리의 다리가 변형된 말이다. 예를 들면 윗다리 지방이라고 하면 금강 이북을 말하고, 아랫다리 지방이라고 하면 금강 이남을 말한다. 윗다리 농악이라고 하면 경기 충청의 농악을 말하고, 아랫다리 농악이라고 하면 호남과 영남의 농악을 말한다.

 

게다가 권대영은 음식을 하던 당시의 할머니들이 일본어를 못했다고 하지만 글과 말은 다르기에 당시에 글을 모르던 할머니들도 말로 하고 듣는 일본어 단어들을 열 단어 넘게 쉽게 알고 있었다. 일상생활에서 널리 쓰였기 때문이다. 여전히 지금도 일제강점기 이후에 태어난데다 일본 글자를 못 읽고, 일본어를 말 할 줄 몰라도, 조부모 및 부모 세대의 영향으로 자신이 말하는 단어가 일본어인줄 모른채 식당 등에서 흔하게 쓰고 있다.

 

이로써 한국식품연구원 권대영의 주장은 사실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아주 쉽게 입증하였다.

 


2. 닭도리탕이라는 일본어 섞인 조어는 언제 등장 했는가?

 

도리탕이라는 단어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초반에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서 왜색의 영향을 받아 처음으로 생겼다.

 

해방후 1969년에 출판한 '한국현대사 신생활 100년'에 1863년부터 1945년까지의 각 지방 향토 음식 소개에서 평안도 음식으로 '닭도리탕'을 언급하었다.2 즉 닭도리탕이라는 단어가 1969년에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하였다. 1924년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과 1925년의 해동죽지(海東竹枝)는 각각 서로 다른 요리법의 '도리탕'을 말하고 있다3. 이 세 개의 문헌은 평안도 평양과 황해도 개성 두 곳을 언급하였다.

 

따라서 도리탕이라는 단어는 일제강점기 1920년대 초반에야 평양과 개성에서 요리사들이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황해도 개성과 평안도 평양에서 닭고기 요리를 만들던 조리사들 가운데 일부가 손님들에게 도리탕이라고 소개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도리'라는 단어는 정작 평양과 개성 사람들도 쓰지 않았기에 현재까지도 평안도나 황해도 방언에서 전혀 도리라는 단어에 대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도리'라는 단어는 평안도와 황해도 사람들마저 아에 어원과 뜻을 모르는 정체불명의 단어다. 이는 '도리'라는 단어가 닭을 뜻하는 일본 말 とり(도리)에서 왔으며, 평안도 닭고기 요리사들이 받아 들였음을 의미한다.

 

언론에서는 '닭도리탕'이라는 단어는 1982년 9월 22일자 동아일보에 최초로 등장한다.

 

"생활 속의 日帝(일제)잔재 歪曲(왜곡) 계기로 본「털어내야 할 먼지」들 <3> 「우리 말 다듬는 일」급하다. ~ 심지어 이런 웃지 못할 조어(?)까지 생긴다. 닭을 일본어로「도리」라고 하는데 음식점 간판에「닭도리탕」이 있는가하면 「모찌」가 떡인데 「모찌떡」이라고 부르는 판국이다"라고 하였다.

 

보다시피 언론에서 최초로 닭도리탕을 언급한 기사에서도 닭도리탕은 일본어가 섞인 일제의 잔재라고 비판하고 있다.

 

일본에서 들어 온 화투를 봐도, 해방후 가장 나중에 고안한 '고스탑'이라는 이름의 놀이에서도 새 5마리를 모두 모으면 '새 다섯마리'라거나 '오조(五鳥)'라고 하지 않고 새 5마리라는 뜻을 가진 일본 말 고도리ご(5) + とり(새)라고 불렀다. 이는 일본 말의 잔재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닭을 일본어로 にわとり(나와도리)라고 한다. 직역하면 마당의 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にわ(나와)를 빼버리고 보통 닭을 とり(도리)라고 부른다. 그래서 やき とり(야키도리)라는 단어도 직역하면 새구이가 되지만, 일본인들에게는 닭꼬치구이라는 뜻으로 통용하고 있다. 일본 기업 とり沢(도리사와)도 직역을 하면 새 골짜기가 되지만 새를 파는 회사가 아니라 다양한 닭고기 가공식품을 파는 회사다.  일본 남부 대분현(오이타) 별부(別府 벳부)를 대표하는 음식 とり天(도리텐)도 새 튀김이 아니라 닭 튀김이다. 따라서 닭탕을 닭도리탕이라고 부르면 뜻은 닭닭탕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도리가 우리 말 또는 한자라고 하는 주장이 나왔다.

 

음식평론가 윤덕노는 2011년 11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 도리탕의 '도리'는  일본어가 아닌 한자일 수도 있다고 하면서 근거로 1925년 해동죽지에 도리탕(桃李湯)이라는 닭탕이 등장하고, 전 해인 1924년에 나온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도 도리탕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점을 내세웠다.4

 

그런데 1924년과 1925년이면 일제강점기가 무려 14년이 더 된 시점으로 일본어가 사회에 충분히 스며든 시기다.

 

최영년은 해동죽지(海東竹枝)에 일본어 도리(とり)를 한자로 적을 수 없었기에 다른 한자의 음을 빌려 와서 도리(桃李)라고 적었을 뿐이다. 이는 France(프랑스)를 佛蘭西(불란서)라고 음역한 것과 같다. 만약 도리탕(桃李湯)이 고유 명사로서 유명한 평양의 특산물이었다면 그 무렵에 언론에서 언급할 법 하지만 일절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더구나 설령 풍부한 상상력으로 닭국에 복숭아와 배를 넣는다고 가정해도 이 두 과일을 수확하는 철 자체가 서로 맞지 않다.

 

최영년이 해동죽지에서 드물게 한글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기에 충분히 도리탕을 한글로 적을 수 있었지만, 구태어 한자로 음역까지 한 이유는 도리탕이 제목이어서다. 주제가 되는 사물명이나 행사명을 제목으로 쓰면서 모두 한자로 적었다. 한글 단어는 하나의 주제를 끝내면서 한자로는 이렇게 쓰는데 사람들은 한글로 이렇게 부른다더라 하는 식의 대목에서만 사용했다. 예를 들면 "聰耳酒 舊俗 上元 人人飮酒 名之曰 귀발기술"이라는 식이다.5 그러므로 도리가 우리 말이었으면 뒤에 한글로 도리라고 적어서 따로 표기해 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도리탕에서 도리는 한자어도, 우리 말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최영년은 도리탕을 닭의 뼈마디를 따라 토막내어 반나절 동안 삶으면서 표고 버섯을 넣고, 파, 마늘, 생강같은 향이 강한 채소를 더하여 만든다고 하였다. 또한 최영년은 도리탕을 계학(鷄臛)이다라고 했다. 계학은 푹 고아 국물이 진한 닭곰국을 말한다. 10세기 5대 10국 시대 초나라 2대왕 마희성의 고사에 등장할 정도로 계학이라는 음식이 도리탕보다 훨씬 더 오래 되었기에,6 닭국과 관련하여 조선에서 수백년 간 써오고 있는 연계탕이라는 말 대신에 갑자기 평양과 개성에서만 도리탕이라고 이름을 달리했다는 것이 이상하다. 이는 도리탕이라는 말이 일제강점기에 일본어의 영향으로 새로 생긴 말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이용기가 쓴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용기는 한글로 닭볶음이라고 요리 제목을 써 놓고 조리법도 한글로 소개하면서 송도에서는 닭볶음을 도리탕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개성에서는 도리탕이라 하여 파, 후춧가루, 기름, 깨소금, 마늘 등의 양념을 넣어 만든다고 하였다.

 

개성 사람들도 평양 사람들처럼 일본어에 물들어서 탕(湯)에 일본어 도리(とり)를 붙혀서 도리탕とり(鷄)+탕(湯)으로 부른 것에 불과하다. 이용기는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을 한글로 썼기에 일본어 'とり'를 소리나는대로 한글로 '도리'라고 적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핵심적으로 평양의 도리탕은 '닭국'인데 반해 개성의 도리탕은 '닭볶음'이라는 사실이다.

 

평양에서나 개성에서나 조리 방식과 상관없이 '도리탕'은 일본식 이름이었다. 이 두 도시를 빼고는 모두 닭국을 연계탕, 닭볶음을 닭볶음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따라서 평양과 개성의 일부 요리사들이 왜색에 물들지 않고서야 다른 지역 사람들은 다 닭탕을 연계탕, 닭볶음을 닭볶음이라고 하는데 자기들끼리만 도리탕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서울에서 발간한 잡지들도 물론 순 우리 말 닭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지만, 닭과 닭탕을 언급할 때는 도리와 도리탕이라고는 전혀 부르지 않았고, 연계(軟鷄)와 연계탕(軟鷄湯)이라고 자주 표현하였다.7

 

하지만 도리탕이라는 이름이 평양과 개성에서도 오래 존재하지는 못했다. 해방 다음 해인 1946년에 친일파 최남선은 자신이 1937년 1월 30일부터 9월 22일까지160회에 걸쳐서 매일신보에 기고하였던 '조선상식문답'을 내용을 추가하여 책으로 펴냈다. 지방별 유명 음식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면서 평양의 유명음식으로 냉면과 어복장국, 개성의 유명음식으로 엿과 돼지고기를 꼽으면서도 도리탕은 언급하지 않았다.8 해방이 되기도 전에 도리탕이라는 말은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았다.

 

점차 이후에 출현하는 주방장들과 식당 주인들은 도리가 일본 말인지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저 도리탕이라고 부르던 사람들에게서 배우면서 물려 들은대로 도리탕이라고 하다가 닭을 덧붙혀서 닭도리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정말 끈질긴 일제의 잔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쉽게 닭탕이라고 부르면 되는 일이었다.

 

 

3. 국립국어원이 무엇을 잘 못 했다는 것인가?

 

1992년 11월 문화부는 국립국어원이 대중식당과 시장,백화점,잡화상 식품부 등과 서적에 쓰이는 식생활 관련 용어 4천여단어를 조사하여 일본어투의 외래어와 한자어 281개, 맞춤법 60개 등 341개의 용어를 개선하여 '식생활 관련 용어 순화안'으로 발표하였다.9


이때 국립국어원은 닭도리탕을 일본어투 외래어로 규정하여 순화시킨 용어로 '닭볶음탕'이라는 단어를 발표하였다.

 

문헌으로만 보면 1924년에 이용기가 쓴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 도리탕은 닭볶음이라고 나와 있기에, 국립국어원이 닭볶음탕으로 순화한 것은 틀린 선택이 아니었다.


다만 사람들이 닭도리탕을 볶음보다는 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 닭볶음탕이라는 순화용어를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기를 망설이게 했다. 국립국어원이 이런 점을 간과하고 닭탕과 닭볶음탕 사이에서 닭볶음탕을 선택함으로써 단지 일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 뿐이다.

 

 

4. 전통 닭탕과 1980년대에 다시 등장한 이름 닭도리탕

 

전통적으로 한국의 닭고기 요리에는 닭조림10, 한자로 연계증(軟鷄蒸)이라고 쓰던 닭찜,11 닭구이12, 한자로 계전(鷄煎)이라고 쓰던 닭전13, 뜨거운 조각으로 먹던 계육열편(鷄肉熱片)14, 닭탕이 있었다. 한편 닭찜에는 소 갈비살와 돼지 다리살, 돼지 새끼보를 섞어 찐 잡증(雜蒸)도 있었다.15 또한 닭 국물을 내어 각종 요리에 썼다.16

 

한국의 전통 닭탕에는 냉탕, 온탕이 있다.


닭 냉탕은 문헌상으로는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보면, 정조가 1797년 음력 2월 9일부터 16일까지 수원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에서 올린 초계탕(醋鷄湯)이 대표적이다.17 초계탕 재료는 다 자란 닭(묵은 닭), 달걀, 식초, 참기름이었고, 이후 녹두녹말, 파, 잣을 추가하였다.18

 

닭 온탕은 계개장이라고도 부르던 연계탕이 가장 대표적이며, 그외 대구를 섞는 닭대구국19, 닭에 소고기.소고기 머리고기.소 내장 끝 부분을 넣어 궁중에서 먹던 칠계탕(七鷄湯)20, 파 흰뿌리를 많이 넣어 국물을 내면서 식초를 넣고 달걀을 많이 풀어 끓이는 총계탕(蔥鷄湯)21, 해삼을 넣은 금중탕(錦中湯)22, 삶아서 쓴 맛을 없앤 도라지를 넣고 중탕으로 끓이는 칠향계(七香鷄)23가 있다. 그 외 소 갈비살와 돼지 다리살, 돼지 새끼보를 섞어 끓인 잡탕(雜湯)도 있었다.24


문헌적으로 연계탕은 1773년(영조 49년 음력 2월 21일) 승정원 일기에서 처음으로 보이는데 궁중 잔치 음식에서 연계탕과 아저증(애저찜)을 제외하라고 명하였다.25 연계탕은 궁중에서만 먹는 음식이 아니라 널리 백성들이 먹는 음식이었다. 1801년 음력 2월 26일에 경상도 기장현으로 유배형에 처해 진 심노숭이 1801년 7월 21일(음력 6월 11일) 집주인이 아침 밥으로 연계탕을 끓여 주었는데 제법 맛있었다고 하였다.26 닭을 끓여 먹는 닭국은, 16세기에 지은 음식디미방도 소개하고 있듯이, 인류가 아주 오래 전부터 해 온 손 쉬운 요리법으로 시대에 따라 닭국의 명칭이 변해 왔을 뿐이다. 그런데 연계탕이라는 이름을 일제강점기에도 대중들이 많이 불렀다.

 

한국의 전통 닭탕인 연계탕의 재료는 잘게 찢은 닭고기, 파, 미나리 삶은 물, 밀가루 물 등이고, 조리법은 육개장 만드는 법과 같았다.27 


1920년대 말엽의 언론 기사들을 보면 닭탕 보다는 닭찜이 넓게 퍼져서 사람들이 선호하는 닭고기 요리였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일어난 닭 백숙을 파는 연계탕집, 즉 닭탕집이 식당으로서 서울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때는 1926년이고, 아울러 평양에서 갖 유행한 구운 갈비집도 같은 해에 서울에 처음으로 생겼다.28

 

1920년대 초중반에는 개성 사람들이 탕보다 국물을 좀 적게 해서 닭고기를 볶기도 하였다.29

 

1939년에는 가정에서 미역을 넣어 끓이는 '닭탕'(닭고기 미역국)을 동아일보가 소개하기도 하였다.30

 

1982년 11월 25일 수정증보판 민중서림 국어대사전에 실린 닭고기 요리는  '닭고기 덮밥, 닭고기 무침, 닭곰, 닭곰탕, 닭구이, 닭국, 닭김치, 닭백숙, 닭볶음, 닭생채, 닭적, 닭전골, 닭조림, 닭죽, 닭찜, 닭튀김'이다.


닭과 인삼을 함께 달여 약용으로 쓴 최초의 기록은 김윤식이 1884년에 쓴 일기장인 속음청사(續陰晴史) 음력 9월 16일자에 나타난다. 약 이름이 삼계고(蔘鷄膏)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푹 고아서 액체로 마시는 형태로, 건강이 나빴던 김윤식은 개 머리고기에 인삼을 넣고 달인 구두고(狗頭膏)와 함께 먹었다.31 인삼을 넣고 닭고기를 고아서 우려 낸 국물이 맛이 없었음은 자명하다.


귀양살이를 하던 심노숭이 1803년 음력 6월 7일 복날에 동네 사람과 돈을 합쳐 소라와 전복을 회로 썰고 연계탕을 끓여 함께 소주를 마시며 놀았지만 연계탕에 인삼을 넣지는 않았었다.32 김윤식이 복용했던 닭과 인삼을 함께 달인 삼계고는 한참 이후에 통닭 뱃속에 인삼과 재료를 넣고 삶는 방식으로 연계탕에 응용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삼계탕은 복날에 먹는 음식이 아니라 여름에 장기 복용하는 보신탕이었다. 1924년 7월 19일부터 총독부 중추원 조사과에서 조사에 나서 11월 20일에 보고한 조선 풍습에 관한 특별조사 보고서에서 삼복에는 개고기를 다양하게 요리해 먹었고, 중류층 이상은 6월부터 3개월간 삼계탕을 고아서 국물을 매일 정력제로 마셨다고 하였다.33

 

인삼과 찹쌀을  닭 뱃 속에 넣고 물을 부어 통채로 삶는 방식으로 복날에 먹는 음식으로서 계삼탕이라는 이름은 6.25 전쟁이 끝나고 1956년에 처음으로 언론에 등장한다.34 이렇듯 복날에 삼계탕을 먹는 풍습은 6.25 전쟁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계삼탕은 삼계탕이라는 이름으로 1963년에 언론에 등장하는데 이 당시에도 여전히 인삼은 비싼 약재여서 삼계탕을 아무나 먹을 수 없었다.35 


마지막으로, 언론에서 1982년에 최초로 닭도리탕을 일제의 잔재라고 문제 제기를 하기 전에, 5년 앞서 발행한 당대 가장 뛰어난 요리 서적인 한국요리에서 이미 닭도리탕이 아니라, 닭볶음탕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었다. 이는 국립국어원의 닭도리탕에 대한 정의와 왜색어 추방보다 훨씬 더 앞섰다.

 

개성에서 출생한 왕준련은 1977년에 발간한 저서 한국요리에 닭볶음탕이라는 제목의 요리를 기술하였다.

 

닭볶음탕. 재료 닭 1마리, 목이버섯 10개, 당근 1/2개, 생강즙 찻술 1, 후추가루 찻술 1/3, 간장 1/2컵, 마늘 1통, 파, 2뿌리, 화학조미료 찻술. 만드는 법 ① 닭은 깨끗이 손질하여 머리와 발을 자르고, 칼등으로 뼈를 가볍게 두들겨 먹기 좋은 크기로 토막을 친다. ② 당근은 얇게 썰고, 목이버섯은 물에 불려 적당한 크기로 뜯어 둔다. 파는 곱게 제쳐 둔다. ③ 남비에 기름을 두르고, 토막 친 닭고기를 고루 익게 볶는다. 거기다 생강즙, 간장, 육수 반컵을 넣어 은은한 불 위에 올려 끓인다. ④ 다른 남비에 기름을 두르고 당근을 볶다가 목이버섯을 넣고 볶는다. 거기다 간장, 소금, 화학조미료 등으로 맛을 들인다. ⑤ 닭고기가 푹 물렀으면, ④를 그 위에 얹어 살짝 뜸을 들인다. 이 것을 그대로 내 놓으면 찜이 되고, 국물을 많이 잡으면 닭볶음국이 된다.

- 왕준련, 한국요리, 범한출판사 1977, 102쪽

 

이처럼 닭을 토막 낸다고 했지, 정체 불명의 존재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이 쓰지도 않은 괴이한 단어인 도리치다를 사용하지 않았음을 재확인 할 수 있다.

 

또한 개성 출신인 왕준련은 자신의 고향 개성 요리에서 순대를 고향 음식으로 꼽았지, 닭도리탕을 언급하지도 않았다. 평양 고향 요리로도 노리를 들었지, 닭도리탕이라고 하지 않았다. 나아가 황해도 고향 음식을 해주의 되비지탕, 안악의 율란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1980년대 들어 일부 식당에서부터 닭탕의 재료가 고추가루, 감자, 양파 등으로 변하였고, 일본어 도리가 섞인 닭도리탕이라는 이름을 다시 또는 새롭게 부여했고, 1980년대 초반에 퍼져 나갔다.


결론적으로 닭도리탕이라는 일본 말이 섞인 단어는 해방후 잠잠하다가 1980년대에 닭탕의 재료가 바뀌면서 다시 등장하여 퍼진 일본어투의 조어다.

 

 

<도리치다라는 단어는 국어 사전에 아에 없고, 보도리는 뜻이 전혀 다르다.> 이희승, 국어대사전, 민중서림 1982년 증보판

 

국어국문학회, 국어 새사전, 1958

 

 

James S. Gale, 한영자전 A KOREA - ENGLISH DICTIONARY, 1897

 

 

  1. 최동호, 김윤식, 소설어 사전, 고려대학교출판부, 2000. 03. 31, 435쪽, 도리치다 : 똬리 치듯 둥글게 말아 앉다. *심동호는 안방 아랫목에 도리치고 앉아 걸레로 마루를 훔치는 꼭지에게 숭늉 한 그릇 가져오라고 이르곤 졸라맨 넥타이 매듭을 늦춘다.(김원일/불의제전) [본문으로]
  2. 권규순 편집, 한국현대사, 7권, 신생활 100년(1863-1945), 신구문화사 1969, 47~48쪽, 2. 향토 요리 우리 나라는 좁은 면적의 땅이지만 각 지방마다 기후 · 토질 · 습관이 다르고 산물이 다르므로 각 지방마다 특이한 음식들이 있다. 특히 남 · 북의 차이는 아주 현저하여 주식을 보더라도 남쪽 지방은 보리밥이 주식이고, 북쪽 지방은 기장밥 · 조밥이 주식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식탁의 기본 부식품인 김치 담그기도 북에서는 시원하고 삼삼하게 담그는데 반해, 기온이 높은 남쪽은 맵고 짜게 담가서 자극성을 많게 한다. 이에 각 지방에 따라 독특한 풍미를 지닌 향토 요리의 대표적인 것을 몇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서울에는 설농탕 · 육상궁 통김치 등이 있고, 경기도 지방에는 개성의 감 · 감동젓 찌개 · 경단 · 무우 찜 · 닭젓국 · 조롱 떡국 · 녹두 칼국수 · 보쌈 김치 · 수원의 갈비 · 양주의 메밀 국수, 여주의 산병, 용인의 늙은 오이지 등이 특색이다. 충청도는 서산의 어리굴 젓과 담북장 · 청국장 · 생떡국 · 칼국수 · 콩국수 · 호박 풀대 죽, 공주 깍두기 등이 별미이다. 전라도는 광주의 애저를 비롯하여 전주의 해장국 · 비빔밥과 기타 지방의 갓 쌈김치 · 갓 소박이 · 깻잎 김치 · 파지 고추 김치 · 굴젓 등이 유명하다. 경상도는 가죽 자반 · 석이 버섯 · 표고 버섯 등 버섯류의 나물 무침 · 매실주 · 유과 및 통영의 멸 간장 · 무우 멧 젓이 별미로, 이 지방은 짜고 매운 것이 특색이다. 강원도는 감자 경단 · 감자 떡 · 감자 범벅 · 감자 부침 · 산채 나물 · 옥수수 범벅 · 도토리 묵 · 상수리 묵 · 머루주 · 팥 국수 · 오징어 순대 · 오징어 젓 · 북어 식해가 특미이다. 함경도는 가자미 식해 · 고등어 회 · 동태 순대 · 동태 젓 · 부레 찜 · 수수 부구미 · 수수 죽 · 좁쌀 떡 · 회 냉면이 유명하다 . 평안도는 기장 가루 떡 노치 · 닭 도리탕 · 녹두 부침 · 만두 · 냉면 · 어북 쟁반 · 원반 죽 · 동치미 등이 일미이다. 황해도는 오징어 떡 · 잡곡 전 · 남매 죽 · 큰 박 만두 · 분지 장아찌 · 된장 떡 · 김치 순두부가 유명하다. 제주도는 전복 · 소라 등의 각종 회, 자리 회 · 게역 · 메밀 방떡 · 도래 떡 · 오메기 떡 · 제편 · 좁쌀 찰떡 등이 유명하다. 그러나 이상에서 본 각 지방의 독특한 요리도 근래에 이르러서는 점차 없어져 가고 있다. / 큰 박 만두는 호박 만두로 대체 된 것으로 보이고, 게역은 미숫가루다. / 1969년도판, 1971년도판, 1974년도판, 1980년도판 모두 내용이 똑같다. 편집자는 8명이며, 신생활 100년편은 권규순이 편집하였다. [본문으로]
  3. 1)이용기,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 1936, 닭복금(鷄炒) 닭의 고기는 연계가 조흐니 살과 뼈재 자질구러하게 토막처서 내장도 함께 써러너코 물을 치되 자질자질하게 붓고 맛발은 새젓 젓국을 조곰 간간하게 치면 고기가 슴가하야 간이 들테이니 장을 치지 말며 파힌 것을 만히채 처너코 깨소곰과 호초가루를 넉넉히 치고 만화로 복그면 국물도 주러서 지질지질하고 먹으면 뼈에 살이 버서지도록 복나니 젓국 맛은 국보담 간간하여야 비리지 안코 술안주에 적당하야 비위에 꼭 맛는고로 제일 조타하나니 만일 닭이 묵엇거든 맹물에 너코 앵도나무가지를 꺾거 너코 끄리면 물을터이니 그졔야 나뭇가지는 버리고 그 국물에 젓국처 끄리나니라 송도서는 이것을 도리탕이라하고 약념을 파와 호초가루와 기름과 소곰과 마눌 등 물을 너코 만드나 대채 음식에 약념이 만이 만드러 너으면 도리여 맛을 분별할 수 업나니 닭에 기름과 깨소곰을 치는 것은 조치 아니한 것이니 닭게 기름이 제절로 조흔 기름이 나나니 소용 업고 마눌은 닭게 합당치 아니하니 단지 팟대가리와 호초가루만 치는 것이 조흐니 조흔 새졋 젓국이 맛나는대 제일이니라 또 옛법은 닭 한마리를 법대로 하야 정이 씻고 몬저 참기름 석량 중에 복가서 파와 마눌과 소곰 닷돈 중에 칠분쯤 익혀 장 한숫가락과 호초가루와 회향과 물 한사발을 크게 하야 솟헤 여러가지와 한테 너코 익도록 하야 살마내되 조흔 술을 조곰 너으면 더욱 조흐니라 또는 닭과날저육을 분반하야 국직하게 썰고 졋국에 위와 가티 약념하야 물을 치고 끄릴제 풋고초를 만이 써러 너코 끄려먹으면 술안주에 상둥이니라. (닭은 영계가 좋다. 닭을 뼈째 작게 토막을 치고 내장도 함께 썰어 넣고 물을 자작하게 붓는다. 새우젓 젓국을 조금 간간하게 쳐서 고기에 심심하게 간이 들도록 한다. 장은 치지 말고 파 밑동을 채 쳐서 많이 넣고 깨소금과 후춧가루를 넉넉히 친 다음 아주 약한 불에서 국물이 자작해지도록 볶는다. 뼈에서 살이 떨어지도록 잘 볶아야 하며 젓국으로 국보다 간간하게 간을 해야 비리지 않고 술안주로도 적당하다. 닭이 묵은 닭이면 물에 앵두나무 가지를 찢어 넣고 끓이게 되면 잘 무른다. 다 무르면 나뭇가지를 꺼내버리고 젓국을 넣고 끓인다. 송도에서는 도리탕이라 하여 파, 후춧가루, 기름, 깨소금, 마늘 등의 양념을 넣어 만든다. 음식에 양념을 많이 넣으면 오히려 맛을 잘 분별할 수 없게 된다. 닭에 기름과 깨소금을 치는 것은 좋지 않다. 닭에서 저절로 좋은 기름이 나므로 기름을 더 넣을 필요가 없으며 닭에 마늘을 넣는 것도 합당치 않다. 파 밑동과 후춧가루만 넣는 것이 좋으며 좋은 새우젓 젓국으로 맛을 내는 것이 가장 좋다. 닭 한 마리를 깨끗하게 씻고 참기름 3냥을 넣고 볶은 다음 파와 마늘과 소금 5돈을 넣고 칠 분 정도 익힌다. 장 한 숟가락, 후춧가루, 회향, 물 한 사발을 함께 넣고 삶아 익히되 좋은 술을 조금 넣고 익히면 더욱 좋다. 닭과 돼지고기를 반씩 나누어 굵직하게 썰고 젓국을 넣고 위와 같이 양념을 한다. 물을 넣고 끓이되 풋고추를 썰어서 많이 넣고 끓이면 술안주로 최고이다.) / 이하 조리법에 관해서 인용한 참고문헌의 괄호 안에 삽입한 현대화 문장 부분은 한국전통지식포탈의 현대문을 그대로 가져다 썼음을 밝힌다. 2)최영년, 해동죽지, 장학사, 1925, 중편, 음식명산(飮食名産) 112쪽, 桃李湯 此是鷄臛 産於平壤城內帶 骨寸切雜和蔈葷 半日烹飪肉 甚腴軟 世稱浿上之名産. 도리탕(桃李湯)은 계학(鷄臛)으로 평양 성내 일대에서 만든다. 뼈마디를 잘라 표고 버섯과 훈채(파, 마늘, 생강 같은 강한 채소)를 잘 섞어 반나절을 삶으면 연해져 세상에서는 패강 위쪽의 명산물이라고 칭한다. [본문으로]
  4. 윤덕노, 동아일보 2011. 11.03, 우선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발행된 ‘해동죽지(海東竹枝)’에 한자로 도리탕(桃李湯)이라고 쓴 음식이 나온다. 「도리탕은 계확(鷄F)으로 평양이 유명하다. 닭 뼈를 가늘게 잘라 버섯과 양념을 섞어서 반나절을 삶아 익히면 맛이 부드러운데 세상에서는 패수(浿水)의 특산물이라고 한다」고 적었다. 확(F)은 고깃국으로 탕과는 달리 국물이 별로 없는 음식이다. 패수는 평양을 흐르는 대동강이다. 해동죽지의 설명을 보면 고추장(고춧가루)으로 양념을 하지 않았고 감자가 없을 뿐 지금의 닭도리탕과 거의 일치한다. 사용한 양념을 훈(훈)이라고 했으니 자극성이 강한 파, 마늘을 쓴 모양이다. 1924년에 초판이 발행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도 도리탕이 보인다. ‘닭볶음(鷄炒)’을 설명하며 「송도(松都)에서는 도리탕이라고 하고 양념으로 파와 후춧가루, 기름과 깨소금, 마늘 등을 넣고 만든다」고 했다. 해동죽지에서는 도리탕을 평양의 특산물이라고 했으니 개성 북쪽인 관서(關西)지방 음식으로 보인다. 닭볶음인 도리탕은 일제강점기 때 발달한 음식이고 일본인이 닭을 발음할 수 없어 일본말로 도리탕이라고 했다는 것이 왜색 용어라는 주장의 핵심이다. 하지만 해동죽지는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최영년(崔永年)이 우리나라 민속놀이와 명절풍습, 명물음식 등을 기록한 책이다. 한문으로 쓰였지만 필요한 경우 한글로 토를 달았다. 때문에 도리가 일본말이라면 새 조(鳥)라는 한자를 놔두고 일본어 발음인 ‘토리(とり)’를 다시 한자인 ‘도리(桃李)’로 음역했을 이유가 없어 보인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나오는 도리탕도 마찬가지다. 송도 사람들만 굳이 닭볶음을 일본말을 섞어 도리탕이라고 부른다고 해석해야 할 근거가 없다. 그렇다면 닭도리탕의 도리는 새의 일본어 발음이 아니라 ‘아랫도리’의 도리처럼 우리말일 수도 있고 한자어일 수도 있다. [본문으로]
  5. 최영년, 해동죽지, 장학사, 1925, 중편, 명절 풍속(名節風俗), 95쪽, 聰耳酒 舊俗 上元 人人飮酒 名之曰 귀발기술. (총이주. 옛 풍속에 정원 대보름에 사람마다 술을 마셨는데 이를 귀밝이 술이라고 이름 하였다.) [본문으로]
  6. 승정원 일기, 1649년(효종 원년) 음력 8월 26일, 若以此爲不近於理, 而不以爲信, 則阮籍之蒸肫, 馬希聲之鷄臛, 亦可謂之不近理, 而不以爲非乎? [본문으로]
  7. ①돌이, 학보, 첫가을 農村實情探査記, 별건곤 제9호, 1927.10.01, ② 청오, 『참외』로맨스, 별건곤 제14호, 1928.07.01, ③京城라듸오, 별건곤 제19호, 1929.02.01, ④김진구, 北隊, 별건곤 제22호, 1929.08.01, ⑤京城名物集, 별건곤 제23호, 1929.09.27, ⑥避暑地 夜話, 별건곤 제42호, 1931.08.01. [본문으로]
  8. 최남선, 조선상식문답, 동명사, 1946, 문: 지방적으로 유명한 음식은 어디 무엇입니까? 이루 다 말하겠습니까만 서울은 그만 두고 개성의 엿과 저육(猪肉), 해주의 승가기, 평양의 냉면과 어복장국, 의주의 대만두, 전주의 콩나물, 진주의 비빔밥, 대구의 육계장, 회양의 곰의 기름정과, 강릉의 방풍죽, 삼수갑산의 돌배말국, 차호의 홍합죽 등이 다 사방에 이름난 것입니다. [본문으로]
  9. 한겨레, 1992. 11. 22, 감주→단술, 닭도리탕→닭볶음탕 등 식생활 용어 순화안 확정. 문화부는 요식업소나 각종 요리 관련 서적, 강좌 등에서 쓰이고 있는 잘못된 관련 용어와 외래어를 다듬은 '식생활 관련 용어 순화안'을 확정해 발표했다. 이 순화안은 국립국어연구원이 지난 해부터 서울 시내 한식집. 중국집. 양식집. 일식집. 분식집 등 대중식당 80여 곳과 시장. 백화점. 잡화상의 식품부 등에서 쓰이거나 교과서.요리책 등에 나와 있는 식생활 관련 용어 4천여개를 조사.연구해 이 가운데 일본어투 용어를 비롯한 외래어와 한자어 281개, 맞춤법 등의 규정에 맞지 않는 용어 60개 등 모두 341개의 용어를 어법에 맞게 다듬은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쓰이는 말─순화안) △감주─단술 △개수통─설거지통 △공기─빈그릇 △깅깡─금귤 △넥타─(으깬)과일즙 △다방─찻집 △닭도리탕─닭볶음탕 △덴뿌라─튀김 △레스토랑─식당 △사라─접시 △소맥분─밀가루 △스시─초밥 △야끼만두─군만두 △우동, 가케우동─가락국수 △모밀─메밀 △상치─상추 △사라다─샐러드 △케익─케이크 △함박스테이크─햄버그 스테이크 △강력분─차진 밀가루 △곰장어─먹장어 △다대기─다짐, 다진 양념 △마호병─보온병 △분식─가루음식 △생선묵─어묵 △스넥코너─간이음식점 △스탠드바─선술집 △오뎅─꼬치(안주) △무우─무 △도우넛─도넛 △소세지, 쏘세지─소시지 △초코렛, 쵸코렛─초콜릿 △핏자─피자 [본문으로]
  10. 시의전서(是議全書), 1800년대말, 닭조림. 달죠림도 이와 갓치 하나니라.(닭조림도 생치장조림과 같이 만든다.) 조리법- 닭을 토막내어 잘라 갖은 양념에 버무린 다음 진간장에 조린다. [본문으로]
  11. ①안동 장씨, 음식디미방, 1598년 경, 연계찜. 연계를 안날 져녁의 잡아 갓고로 다라 둣다가 이튿날 아뎍의 잔짓 업시뜨더 안것 내고 핏끼 업시 마이 씨어 가장 단 건쟝을 체예 걸러 기름 두운이 노코 자소닙과 파 염교가나리 싸하라 생강 호쵸 쳔쵸가루 약념하여 진가루조차 한데 개면 즙이 되거든 지령 져기 노화 가야 닭긔 소옥 녀허 밥보자로 싸매야 사그르싀 담아 소테 물 붓고 듕탕하여 떠 가장 무르뽑듯게 닉거든 내여 노화 식거든 쓰라. 눅게 하는 즙도 건쟝 거르고 여러 가지 약념하여 진진가루 즙을 눅게 하여 띠면 가장 죠하니라. 즙이 눅으면 돌기 즙소옥의 드러 띠이노니라. (고기가 연한 영계를 하루 전날 저녁에 잡아 거꾸로 매달아 두었다가 다음날 아침에 잔 깃털까지 모두 제거하고 내장도 꺼낸 다음 핏기가 없도록 충분히 씻는다. 아주 단 걸쭉한 장을 체에 거른 후, 기름을 흥건히 넣고 자소잎, 파, 부추를 잘게 썰어 생강, 후춧가루, 천초가루로 양념을 하고 밀가루를 넣고 함께 개어 즙액을 만든다. 여기에 간장을 조금 넣고 개어 닭 속에 넣은 다음 밥보자기로 싸매고 사기그릇에 담은 다음 솥에 물을 붓고 중탕하여 쪄낸다. 잘 물러 털을 뽑을 수 있을 만큼 푹 익으면 꺼내어 식힌 다음 사용한다. 즙액은 걸쭉한 장을 거르고 여러 가지 양념과 밀가루 물을 묽게 섞어 만드는데, 닭이 즙 속에 잠기어 쪄지게 되며 이렇게 하면 맛이 아주 좋다.) ②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1795년, 7책 37쪽, 誕辰慶賀 饌品, 軟鷄蒸一器. 軟鷄十三首熟猪半脚黃肉二兩生蔥二丹眞油菉末各五合胡椒末五分眞末一夕石耳蔈古各二合鷄卵十箇醬五合. ③이용기,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 1936, 연게찜(軟鷄蒸) 연계를 퇴하야 알만치 살마 가지고 잘게 뜨더 뼈는 다 골나내고 퇴한 물을 식혀서 밀가루를 가름하게 푸러 물에 너코 저어가며 가루가 익을만 하거든 연계를 뜨더 노은 데다가 붓고 간장을 처 간 맛추고 호초가루 처 넘우 질지 안케 석거 합에 담고 이 위에 말한 잡탕 고명을 언지나니라 잡탕 고명을 다 아니하고 계란 붓칠 것과 석이버섯과 왼고초를 모다 가늘게 실가티 써러 언고 실백만 언저도 조흐니라 연계찜은 죽순과 연근을 너으면 맛이 매우 조흐니라 또는 닭이 난지오륙십일이면 만드나니 법대로 정하게 하고 아래로 내장을 빼너코 쇠고기와 제육과 한테 난도하야 소곰과 장과 소엽과 파와 호초와 생강과 기름과 밋닭의 내장과 모다 난도하야 닭의 뱃속에 죄다 처너코 봉하야 솟헤 물붓고 물으도록 삼되 약넘이 나문것은 국물에 너코 밀가루를 조곰 풀거나 록말을 덩이 안지게 풀고 장치 고집을 만드러 노코 닭이다 쪄졋거든 쪼개여 졉시에 담고 집을 붓고 실백잣을 뿌리고 계란을 힌자 누른자를 각각 지저 실가티 써러 그 위에 언고 먹나니라 연계를 두달이 못되여 어린 병아리를 먹으니 보기에 넘우깜찍하나 이런 깜찍한 일은 귀인드리 만이 하나니라 어느 귀인은 닭의 꽁문이가 맛이조타하야 꽁문이만 멧백개를 모아 국을 만드러 먹엇다하니 그 자손이 오날날 닭의 냄새나 맛는지 모르노라. (영계를 뜨거운 물에 튀겨 털을 뽑고 알맞게 삶아 뼈는 다 골라내고 잘게 뜯는다. 털 뽑을 때 쓴 뜨거운 물을 식혀 밀가루를 풀어 넣고 저어서 가루가 익을 만 할 때 영계 뜯어 놓은 것에 붓는다. 간장을 쳐서 간을 맞추고 후춧가루를 쳐서 합에 담는다. 너무 질지 않게 하고 잡탕 고명을 위에 얹는다. 잡탕 고명을 모두 하지 않고 달걀 부친 것과 석이버섯과 통고추를 가늘게 실같이 썰어 얹고 잣만 얹어도 좋다. 죽순과 연근을 넣으면 맛이 매우 좋다. 태어난 지 오십일에서 육십일 정도 된 어린 닭으로 만든다. 깨끗하게 씻어 아래로 내장을 빼내고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다지고 소금, 장, 소엽, 파, 후추, 생강, 기름, 닭 내장 등도 모두 다진 다음 닭 뱃속 넣고 봉한다. 솥에 물을 붓고 무르도록 삶는다. 양념 남은 것은 국물에 넣고 밀가루를 조금 풀거나 녹말을 덩이 지지 않게 푼 다음 장을 쳐 즙을 만들어 놓는다. 닭이 다 쪄졌으면 쪼개어 접시에 담고 즙을 붓고 잣을 뿌리고 달걀흰자와 노른자를 각각 지져 실같이 썰어 얹는다.) [본문으로]
  12. ①안동 장씨, 음식디미방, 1598년 경, 닭구이: 닭을 자바 소옥을 빼고 씨슨 후의 목을 노흐로 잘라 매고 소옥애 물을 가득 부어 갓고로 다라 하루밤이나 〃마니 지내거든 그저야 짓 뜻고 사지 떠 소금 발라 구우되 물을 여러 번 바르다가 기름지령 발라 구우면 생치도곤 나으니라. 쌀믄 닭이라도 물을 여러 번 바르다가 기름지령 드려 구우면 됴하니라. 생치도 믈을 몬뎌 만이 바르고 구우면 됴하니라. (닭을 잡아서 내장을 제거해내고 씻은 다음에 노끈으로 목을 묶는다. 닭 뱃속에 물을 가득 붓고 거꾸로 매달아 하룻밤 이상을 지낸 다음에 털을 뽑아 제거하고 소금을 바르고 굽는다. 닭에 물을 여러 번 바른 다음 기름간장을 발라 구우면 그 맛이 꿩고기보다 좋다. 삶은 닭이라도 물을 여러 번 바르다가 기름간장을 발라 구우면 좋고 꿩고기도 역시 물을 먼저 많이 바르고 구우면 좋다.) ②시의전서(是議全書), 1800년대말, 닭구이: 달구이도 이와 갓흐나 지렁에 재여 굽나니라. (닭구이도 생치구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는데 간장에 재웠다가 굽는다. 조리법- 털을 뽑고 성냥불로 남은 털을 그슬려 없앤 후 가슴 쪽 살을 2~3쪽으로 저미고, 다리는 한편만 잘라 간장에 재우며, 종이에 물을 묻혀 싼 다음 굽는다.) [본문으로]
  13.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1795년, 7책 37쪽, 誕辰慶賀 饌品, 鷄煎 蛤煎一器. 高八寸軟鷄五十首大蛤六百六十箇菉末五升鷄卵一百五十箇眞油二升鹽二升五合 [본문으로]
  14. 진작의궤(進爵儀軌) 1828(순조28년), 권2, 3쪽, 饌品, 鷄肉熱片二器. 高一尺1寸陳鷄四十首 [본문으로]
  15. 진작의궤(進爵儀軌) 1828(순조28년), 권2, 6쪽, 饌品, 雜蒸一器. 胖半半部昆者巽猪胎各一部猪脚牛內心肉各半部陳鷄一首全鰒三箇鷄卵海蔘各十箇菁根五箇水芹二丹生葱一丹生薑二合朴古之半半吐里蔈古石耳胡椒末各一合實相子五夕眞油良醬各五合 [본문으로]
  16. 안동 장씨, 음식디미방, 1598년 경, 닭국물: 큰 잔치면 암닭 서너 마리나 가마의 물 만이 붓고 꼬하 프러지거든 체예 바타 두고 온갓 음식 약념하면 죠하니라. (큰 잔치를 치룰 일이 있으면 암탉 3~4마리 정도를 가마솥에 넣고 물을 많이 붓고 고아 닭고기가 풀어지면 체에 밭쳐서 국물을 얻은 다음, 여러 가지 음식에 사용하면 좋다.) [본문으로]
  17.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1795년, 7책 38쪽, 誕辰慶賀 饌品, 醋鷄湯一器. 陳鷄一首鷄卵五箇醋眞油各二合 [본문으로]
  18. 진작의궤(進爵儀軌) 1828(순조28년), 권2, 16쪽, 饌品, 醋鷄湯二器. 陳鷄六首鷄卵十箇菉末一升實相子一合生葱五丹醋五合 [본문으로]
  19. 안동 장씨, 음식디미방, 1598년 경, 닭대구국: 암닭 두 마리과 셩히 마른 대구 세 마리를머리뼈지히 한데 녀허 뮝믈의 고타가 젼지령 한 되 참기름 한 되 생강 호쵸 쳔쵸 교합하야 승겁게 타 다시 고하되뼈 녹도록 고하 함담이 맛고 다 프러지거든 눅으며 되기를 묵 하드시 놋그릇싀 퍼 시기면 얼의거든 살문 고기 빗듯 열게 삐저 초지령의 먹나니라. 믈을 만이 하여 고하되 물이 업서 가거든 더 부어 극히 꼬하야 삐쳣거시란 주어 바리고 쁘되 기름 한 되 너모 만하니 짐쟉하여 녀허 하라. (암탉 2마리와 잘 마른 대구 3마리를 머리 부분까지 모두 물에 넣고 고다가 진간장 1되, 참기름 1되, 생강, 후추, 산초 섞은 것을 싱겁게 탄 다음 다시 곤다. 뼈가 녹도록 충분하게 고아 간이 알맞게 되고 다 풀어져 되직하게 되면 묵 만들 때처럼 놋그릇에 나눠 퍼 담는다. 식어서 엉기게 되면 삶은 고기 자르듯 얇게 비스듬하게 잘라 초간장을 찍어 먹는다. 물을 많이 넣고 고아야 하며 물이 줄어들면 물을 더 붓고 아주 충분하게 고아야 한다. 뼈는 제거해 낸 다음 사용하며, 참기름은 1되 사용하라 했으나 너무 많은 것 같으면 적당하게 조절해서 넣어도 된다.) [본문으로]
  20.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1795년, 7책 37쪽, 誕辰慶賀 饌品, 七鷄湯一器. 陳鷄三首黃肉四兩頭骨昆者巽各一部生猪肉四兩猪胞半部鷄卵二箇秀魚半尾全鰒一箇搥鰒四立海蔘三箇實栢子一夕實荏子二升菉末蔈古各一合靑苽五箇 [본문으로]
  21. 유중림, 증보산림경제, 1700년대 중반, 권8, 治膳, 鷄肉膳, 蔥鷄湯方 肥雌鷄去毛治浄,用蔥七束切去鬚葉,只用蔥白。以水三四椀許下鼎中,以蔥白與鷄同納鼎水中。又以好醋清醬香油各一鐘子(香油少减許),灌於鼎中。用文武火爛煮至於鷄骨可以拔出,然后以鷄卵六七個和於汁中而食之,則其味甚佳矣 물 3~4사발이 담긴 솥에 깨끗이 씻어 손질한 살찐 암닭과 파 7묶음의 흰 부분을 넣는다. 식초와 청장, 참기름도 각각 한 종지(참기름은 조금 양을 줄여도 된다)씩 솥에 붓는다. 닭 뼈를 발라낼 수 있을 정도로 푹 삶은 다음 달걀 6~7개를 깨서 닭 삶는 국물에 풀어 넣고 먹는다. 맛이 아주 좋다. 조리법- 1) 살찐 암탉의 털을 제거하고 깨끗이 씻어, 파 7묶음을 뿌리와 잎을 제거하고 흰 부분만 쓴다. 2) 물 3~4사발을 솥에 붓고 파 흰 부분은 닭과 함께 솥에 넣는다. 3) 좋은 초 1종지, 청장 1종지, 참기름 1종지를 솥에 붓는다. 4) 불의 강약을 조절하면서 닭 뼈를 발라낼 수 있을 정도로 푹 삶는다. 5) 달걀 6~7개를 깨서 닭 삶는 국물에 풀어 넣는다. [본문으로]
  22. 진작의궤(進爵儀軌) 1828(순조28년), 권2, 2쪽, 饌品, 錦中湯二器. 陳鷄四十首鷄卵海蔘菁根各二十箇朴古之一吐里蔈古六合良醬一升實相子四夕胡椒末六夕 [본문으로]
  23. 유중림, 증보산림경제, 1700년대 중반, 권8, 治膳, 鷄肉膳, 七香鷄法 陳肥雌鷄去毛治浄,從下作穴出其腸肚。另用桔梗煮浸去苦味一鉢,薑四五片,蔥一握,川椒一握,清醬一鐘,醋油各半鐘子,右七味和雜納於鷄腹內,滓如有餘同盛於砂瓦缸中,用油紙封其口,又以砂楪盖之,鼎水中湯候熟食之。鷄味中第一上品也。살찐 묵은 암탉은 깨끗이 털을 뽑아 손질하고 아래 쪽의 배를 갈라 내장을 들어낸다. 별도록 삶아서 쓴 맛을 담궈 없앤 도라지 한 사발과 생강 4~5조각, 파 한 줌, 천초 한 줌, 청장 한 종지, 초와 기름을 각각 반 종지를 준비한다. 모든 양념을 함께 버무려 닭의 뱃속에 넣는다. 양념이 남았으면 닭과 함께 사기그릇이나 질항아리에 넣고 유지로 입구를 단단히 봉하고 사기접시로 덮어 물이 담긴 솥에 넣어 중탕하여 익으면 먹는다. 닭고기 중에 맛이 으뜸이다. [본문으로]
  24. 진작의궤(進爵儀軌) 1828(순조28년), 권2, 2쪽, 饌品, 雜湯二器. 胖半部昆者巽二部頭骨三部牛內心肉猪脚猪胎各一部陳鷄二首鷄卵海蔘各三十箇全鰒十箇菁根二十箇靑苽四箇朴古之一吐里良醬一升蔈古六合實相子胡椒末各五夕 [본문으로]
  25. 영조 49년(1773년) 음력 2월 21일, 승정원 일기, 有大讀奏 司饔院 進宴物膳單子, 命除 軟鷄湯·兒猪蒸 어전에서 사옹원에서 궁중 잔치에 쓸 음식 목록을 아뢰자, 연계탕과 아저증(애저찜)을 빼라고 명하였다. [본문으로]
  26. 沈魯崇, 南遷日錄, 상권, 1801년 음력 6월 11일, 十一日, 晴. 昨夜不如厠, 睡頗穩, 臍痛亦少止, 果是服香之效耶. 朝飯, 主人烹軟鷄, 作湯饋之, 頗有味. [본문으로]
  27. ①안동 장씨, 음식디미방, 1598년 경, 수증계. 살진 암닭을 죄 뜨더 마되 글희고 엉치 안가슴을 마이 두드려 노긔를달오고 기름 반 죵죄나 쳐 그 고기를 드리쳐 닉게 봇고 맨물 가득 부어 장작 집픠여 끌히되 토란알 한 되 쉰무우젹 모가치 싸하라 한되 녀허 이윽이 쌀마 그 고기 다 무르거든 고기와 나물을 건디고 그 물에 지령 마초 타 고기를 도로 녀허 한 소솜 끌혀 내쟝내 업슨 후 진가루 두 쟈꾹마치 타 늘근 동화젹 모 기뢰마곰 외도 길즉〃〃 싸하라 녀코 잔 파 염교 한 줌식 겻〃치 묵거 녀허 가루끠와 나물 닉을 만하거든 너른 대뎝의 잡최 버리듯 나물과 고기를 겻〃치 노코 국 뜨고 우희 계란 부처 잘게 싸하라 쇵강 호쵸가루조차 삐허 쓰라. (살찐 암탉을 쥐어 뜯어 마디게 끓이고 엉치, 안가슴을 많이 두드려 노구솥을 달구고 기름을 바종지쯤 쳐서 그 고기를 들이쳐 익도록 볶고 맹물을 가득 부어 장작을 지펴 끓이되 토란알 한되, 순무적 모같이 썰어 한데 넣어 이윽토록 삶아 그 고기가 다 무르거든 고기와 나물을 건지고 그 물에 간장을 알맞게 타서 고기를 도로 넣어 한 소끔긇여 내장냄새가 없어지면 밀가루를 두 국자만큼 타서 늙은 동아적 노길이 만큼 외도 길쭉길쭉 썰어 넣고 잔파, 역교 한 줌씩 곁곁이 묶어 넣어 가루 푼 것과 마눌이 익을만하거든 넓은 대접에 자채 벌이듯 나물과 고기를 곁곁이 놓고 국물을 뜨고 그 위에 계란 부쳐 잘게 썰어 생강, 후춧가루를 뿌려 쓴다.), ②시의전서(是議全書), 1800년대말, 연계국: 계개장은 연계를 백슉하여 건져 뼈 다 츄리고 뜨더 육개장 하듯 하되 만일 육종 읍시면 파 미나리 살문 것과 양념 갓초와 계육과 갓치 가로즙하여 쎠도 조흐니라. (계개장은 영계를 백숙으로 끓여 건져내어 뼈를 다 추리고 살을 뜯어낸 다음 육개장 만드는 것처럼 한다. 만일 고기류가 없으면 파와 미나리 삶은 것에 양념을 갖추어 넣고 계육과 같이 밀가루 물을 풀어 넣어도 좋다.) 조리법- 닭을 삶아 살을 잘게 바르고, 다른 재료는 마름모 모양으로 썬다. 파와 미라리는 살짝 데쳐 잘라 넣는다. 갖은 양념을 넣고 기름장으로 간을 맞추어 끓인다. 이때 다른 고기가 없으면 파와 미나리를 삶아 양념을 갖춰 닭고기와 같이 밀가루 물을 풀어 넣어도 좋다. ③서유구,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1835년경, 肥雌鷄去毛及膓肚, 葱去鬚葉, 水三四椀, 入鐺煑一沸, 更入好酥羙醬香油各一鍾, 文武火煑爛, 然後將鷄子六七個就鐺叩破殼, 灌入黃白于鐺內, 更煑數沸。《增補山林經濟》살찐 암탉을 잡아 털과 내장을 제거하고 파는 뿌리와 잎을 버리고 물 3~4사발과 함께 솥에 넣어 삶아 한소끔 끓어 오르면 또 좋은 술, 맛 좋은 장과 참기름을 각각 한 종지를 넣고 약한 불과 강한 불로 번갈아 가며 푹 삶는다. 계란 6~7개를 가마솥 가장자리에서 깨서 넣고 다시 몇 번 더 솟구치게 끓인다. 《증보산림경제》 조리법- 1) 살찐 암탉을 잡아 털과 내장을 제거한다. 2) 파는 뿌리와 잎을 버리고 물 3~4사발과 함께 솥에 넣어 삶는다. 3) 한소끔 끓어 오르면 좋은 수유, 맛 좋은 장과 참기름을 각각 한 종지를 넣고 약한 불과 강한 불로 번갈아 가며 푹 익도록 삶는다. 4) 계란 6~7개를 풀어서 가마솥에 넣고 다시 끓인다. /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수증계는 이름 그대로 물로 찌는 닭이나, 요리법을 살펴보면 탕과 같아서 탕으로 분류하였다. [본문으로]
  28. 별건곤 제23호, 1929. 09. 27, 경성명물집, 軟鷄湯과 갈비. 元山에 軟鷄집이 잇는지는 벌서 오랫고 平壤에도 근래에 갈비집이 생겻다 한다. 서울에는 3년 전까지도 軟鷄湯이나 갈비 구어 파는 집이 업섯더니 典洞 大口湯집에서 白熟軟鷄와 갈비를 구어 팔기 시작한 뒤로 여러 식당이 생긔여 집집마다 사진판에 박은 것처럼 依例이 大邱湯, 白熟軟鷄, 군갈비를 팔게 되엿다. 지금은 大邱湯집 外 몃집에 불과하지만은 하여간 軟鷄湯과 군갈비는 서울의 음식에 한 명물이 되얏다. 맛이야 무슨 특별한 것이 업지만은 먹기에 편리한 까닭에 누구나 환영한다. 올치 된장찌개, 깍둑이, 장김치 가튼 것도 시골 가서는 서울것 가튼 것을 먹을 수 업다. 외국에 간 사람이 자기의 가족보다 서울의 김치 깍둑이 생각이 더 간절하다는 것도 無理가 안이다. [본문으로]
  29. 이용기,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 1936, 닭복금(鷄炒, 같은 내용. / 이용기는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을 1924년에 처음으로 썼다. 1936년판도 내용이 같다. [본문으로]
  30. 동아일보, 1939.08.12, 오늘 저녁엔 이런 반찬을. ▲닭탕 ◎재료, 닭,파,간장,깨소금,참기름,후추가루,마늘,미역, 만드는법 닭을 잡어 끌른 물에 튀해 가지고 정히 다러서 물을 넉넉히 붓고 푹 무르게 곱니다 다 고아젓거던 열어서 뼈는 다 추려내고 잘게 찌저 가진 양념을 함니다. 다소 풀풀헌 미역을 당것다정히 씨서서 빼대고 잎만 자질구러 하게 찌저 닭고기와 한데 무치고 고은 국물에다 다시 너코 끄립니다. 미역을 안너코 가는 파를 끌른 물에 숨만 죽여 너면 더욱 좃습니다. 파를 느실 때는 육개장으로 하면 더욱 좃습니다. [본문으로]
  31. 김윤식, 속음청사(續陰晴史), 1884년 음력 9월, 상권 20~21쪽, 十四日晴, 余服雌雉膏, 朝來可有動靜, 平山宗人雨善·益泳來見, 金堤金鍾南來見, 夜服狗頭膏, 閒基安生鍾和來見。十五日 雨, 昨服狗頭膏, 朝起痛勢如失, 誠可異也, 安生去, 雨善叔姪及金鍾南辭去向京, 付家書。十六日晴, 朝服蔘鷄膏, 終日身氣不好, 是停滯而然也, 朴元澤來言, 渠兄明日發京行云, 付家書, 禮山倅寄書竝送錢。 [본문으로]
  32. 沈魯崇, 南遷日錄, 상권, 1803년 음력 6월 7일, 初七日、晴極熱。童輩之父、醵錢爲所謂伏日遊、軟鷄湯、螺鰒鱠酒、甚大、余亦買燒酒、爲飮。厭食近甚、食輒爲泄、欲寓味、使德玉、自渠家爲純麥豆飯、數日食之、亦苦厭、又助泄、悶不可言。夕後、見月出川上、濯足 [본문으로]
  33. 柳鎭爀, 특별조사의 건, 총독부중추원 조사과, 1924. 11. 20, 60~61쪽, 6) 六月 (상략) 三伏 比期犬肉ツ食フトキハ發汗ツ促シ暑サツ袪シ虛ツ補フト稱シ蒸,焼,汁,雜炊等種々ニ調理ツテ盛ソニ食 (중략) 夏ノ三ケ月間每日蔘鷄湯皍チ人蔘ツ雌鷄ノ腹ニ入レテ前出シタル液ヲ精力藥トシテ飮用ス中流以上ニ牲テ之ツ飮用スル者多シ (하략) / (상략) 三伏. 이 기간에 개고기를 먹으면, 땀내는 것을 촉진하여 더위를 물리치고, 허한 기운을 보충해준다고 한다. 찌고, 굽고, 끓이고, 섞어 끓이고(雜炊) 등 여러 가지로 조리해서 왕성하게 먹는다. (중략) 여름 3개월간 매일 삼계탕, 곧 인삼을 암탉의 배에 넣어 우려낸 액을 정력 약으로 마시는데, 중류 이상에서 마시는 사람이 많다. [본문으로]
  34. 동아일보, 1956. 12. 28, 한국의 세시풍속 연중행사기(25). 계삼탕. 삼복 더위에는 계삼탕을 먹으면 원기가 있고, 또 연중에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 하여, 사람들은 많이들 먹는다. 계삼탕이란 닭을 잡아 털을 뽑고 배를 따서 창자를 낸 뒤 그 속에 인삼과 찹쌀 한 홉, 대추 4,5개를 넣어서 푹 고아서 그 국물을 먹는 것이다. [본문으로]
  35. 심연섭, 경향신문 1963. 07. 29, 월부로 산 보약. (상략) 가수요는 복장, 교양 뿐만 아니라 몸까지 보살펴 주려 한다. 학연도 인연인지 동창이랍시고 고학생이 찾아와 인삼이 들었다는 고귀궁중보약 단지를 떠맡긴다. 학연이 가수요라는 허점을 찔렀으니 버틸 도리가 없었을 밖에. 어느 모로 생각하나 보약을 먹을 처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넉달 월부로 낙착되고 말았다. 고려인삼의 영효에 대해서는 평소에 늘 들어 왔지만 그 실효에 접할 기회는 없었다. 몸이 그 신세를 져야할 만큼 허하지도 않았던 탓도 있겠으나 더위에 약하면서도 삼계탕의 효력도 시험 못해 본 것은 그 놈의 삼이 워낙 비싸기 때문이다. (하략)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