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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한국 최초의 다방에 얽힌 이야기

허구인물 전우치 2015. 9. 18. 22:00

 

이번 주 신문 기사에 대한제국 궁중 서양요리 전례관이었던 프랑스 출신 손탁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1. 커피


한국에서 커피를 일컫던 이름들

 

커피(coffee)를 과거에 여러 이름으로 부르고 글로 적었다.

 

한글 표기로는 가피차(독립신문 1898. 10. 10), 카피차(독립신문 1899. 10. 14), 커피(동아일보 1922. 11. 27), 카피(동아일보 1926. 09. 01), 콥히(매일신보 1927. 11. 03), 고히(동아일보 1934. 02. 02), 코히(매일신보 1937. 01. 01)가 나타나는데 점차 커피라고 가장 널리 썼다.

 

한자 표기로는 咖啡(가배)(한성순보 1884. 02. 17) 또는 加皮茶(가피차)라고 하였다. 청국인은 咖啡(가배)를 카페이(kāfēi)라고 발음 하였다. 조선에서는 가배라고 읽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문서에 커피를 공식적으로 한문으로 咖啡(가배)라고 표기 하였다.

 

가피차라는 한자 표기는 "송교 청향관 가피차(加皮茶) 파는 집에서 진요리를 염가로 정결히 하오니 첨군자(여러분) 왕림하셔서 시험 삼아 맛을 보시오. 송교 청향관 고백"이라면서 1900년 11월 24일 황성신문에 최초로 등장한다

 


한국 최초의 커피에 대한 기록

 

커피의 존재를 훨씬 이전에 알고 있었지만 문헌상으로는 한성순보1884년 2월 17일자 기사에 처음 나온다.

 

"마치 남객이근내(사우스 캐롤라이나)와 야이치(조지아)의 면화와 서인도 제도의 가배(珈琲) 및 연초와 노서안납(루이지애나)의 사탕과 밀사실비(미시시피) 연안 여러 주의 곡물 및 축산과 프랑스의 견백(명주)과 영국의 면포, 도기, 철기는 이 모두가 혼자만 부유하고 혼자만 모자라는 것이다."
한성순보 1884. 02. 17

 

 

한국인 최초로 커피를 마신 사람

 

외교관이나 무역상 등 서양인 혹은 청국 상인의 머슴이 되어 시중을 들던 조선인 노동자들 가운데 어느 한 명이 커피를 가장 먼저 마셨다. 그 다음으로 외국인들에게서 커피를 소개 받은 왕과 관료들이 마셨다.

 

문헌상으로는 가장 먼저 커피를 마신 조선 사람은 조선 왕 고종이다. 이후 고종은 대한제국 황제에 올라 덕수궁에 정관헌(靜觀軒)이라는 서양식 회랑을 지어 놓고 서양음악을 들으면서 커피를 마셨다.

 

학부협판에서 물러난 김홍륙이 공홍식에게 대마초를 주면서 황제를 독살하도록 사주하자, 전선사 주사 공홍식은 은전 1천원을 주기로 하고 보현당 고직 김종화로 하여금 황제가 마시는 커피에 대마초를 타도록 했다. 1898년 9월 12일 만수성절에 김종화가 보현당에 아무도 없자 화로 위에 올려진 커피 관에 대마초를 넣었다. 황제는 냄새가 이상하다 하여 마시지 않았으나, 황태자가 마셔서 구토와 함께 점차 인사불성에 빠졌다. 이 사건으로 대한제국 황제가 평소 커피를 마셔 왔다는 것이 드러나 최초로 커피를 마신 한국 사람으로 기록에 남게 되었다.

 

 

 

            <

독립신문 1896.10. 08>


한국 최초의 커피 광고

 

1896년 10월 8일자 독립신문에 최초로 커피 판매 광고가 실렸다.

 

고스찰키(A. Gorschalki). 서울 정동. 막 볶은 모카 커피 파운드당 75센트, 자바 커피 파운드당 70센트.
- 독립신문 1896.10.08

 

독일인 고스찰키가 운영하는 상점에서는 커피 등의 식료품 이외에도 다양한 물건을 팔았다. 대한제국 사람들도 출입하였다.(독립신문 1898. 7. 9)

 

막 볶은 모카 커피 파운드당 75센트 판매가는 대한제국 중산층이 사서 마실만한 가격이었다.

 

동아시아가 은본위제를 하면서 본위화폐로 멕시코 은화를 기준으로 삼았다. 멕시코 은화는 순도 88.8%로 무게는 27그램이었다. 1880년대 1달러는 1엔이었다가, 1890년대 중반 2달러가 1엔으로 달러의 가치가 떨어졌다.

 

일본 은화 1엔은 대한제국 5냥 은화와 동등하였고, 일본의 20전 은화는 대한제국 1냥 은화와 같게 평가 받았다.(조선과 일본의 통화환율에 관한 건, 7.구문전보왕복공 4, 일본공사관 1894. 08. 20) 일본 20전 은화는 40센트와 같으니까 1달러는 대한제국의 은화 2.5냥과 같고, 40센트는 대한제국의 1냥 은화와 같다.


대한제국 은화 1냥은 엽전 4냥의 가치를 가졌다. 쌀 상품 1되 가격이 엽전 3냥 2돈, 중품이 엽전 3냥, 하품이 엽전 2냥 7돈이었다.(독립신문 1896년. 06. 09) 독립신문 1년 구독료는 1달러 30센트였다.

 

고스찰키가 파는 1파운드 무게의 75센트짜리 커피는 엽전 5.2냥쯤 되니 쌀 하품 두 되를 팔면 살 수 있었다. 조선의 도매업에서는 은병을 사용했으나, 소매업인 5일장에서는 쌀을 주요 화폐로 사용했으니, 조선 초 모내기 농법 도입 이후 봄철 가뭄과 여름철 홍수만 겪지 않으면 그 만큼 조선의 쌀 수확량은 많았다. 일제가 농부 가족이 1년 동안 먹을 쌀을 제외하고 강제로 수매해 식량부족에 시달리던 일본으로 실어가자 농사를 포기하는 농부가 늘면서 한국인은 굶주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1900년부터 일본의 농간에 의해 대한제국의 화폐가치는 급속도로 매년 하락하여 멸망할 때까지 엄청난 고물가에 시달리게 된다. 10여년 간은 커피는 부자들이나 마실 수 밖에 없었다.

 


대한제국 정부의 커피 지방 보급

 

대한제국은 개항장(開港場) 및 개시장(開市場)에 감리서를 설치하고 통상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개항장 개설 목적은 관세 수입을 늘리기 위한 것이다. 전라도 무안이 1897년 개항하였다. 의정부 찬정도지부대신 민영기는 무안 감리서로 보낼 물품 지원비로 1,817원40전을 의정부 의정임시서리찬정 서정순에게 청구하였다.

 

물품 구입 예산 내역에 가배차 종구대(種具臺) 24개 18원 80전, 가배차 관(罐) 2개 70원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일본 상인에게서 구입할 예정이었다.(외부소관 무안항 감리서 대용물품 칭매비를 예산외 지출 청의서 제145호 1898. 08. 08.)

 

이로 보아 전국의 감리서에는 통상 업무로 접촉하게 될 외국인을 접대하기 위해 커피를 비치해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커피와 서양요리에 필요한 기구들을 빌려 주기도 하였다.(통첩 제15호 1899. 05. 19)

 

문헌상으로는 한겨울에 가정에서 커피 타는 법이 중외일보 1926년 12월 22일자에서 최초로 소개하였다.  우유가 커피 맛을 나쁘게 한다면서 우유 대신 조금 더 비싼 크림을 넣는 것이 좋다는 내용이다. 조선에서는 우유나 크림을 넣어 커피를 마시는 방식이 퍼졌으며, 커피가 이미 대중에게 확산되어 소비가 이루어 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2. 다방

 

끽다점이라는 용어는 문헌상으로는 1900년 03월 17일자 황성신문에 최초로 등장한다.

 

"(영국의 만국박람회) 영국에서 글래스고시의 만국박람회를 명년 하기에 개설한다는 일은 기보하였거니와 금에 해당 박람회의 상세를 거한즉, 즉 영제국의 그 속국, 영토, 식민지의 산물제작품과 제외국에 출품을 거개 진열할 일, 미술역사, 고사학, 철도 및 운륜, 전기 성력, 기계, 해상기관 부인부 및 유희의 류, 19세기 미술의 진상을 설명할 조각 및 회화, 창가, 악기 등인데, 요리점, 끽다점, 기타 휴식소는 회장내에 설치하고, 우편 통신, 은행 기타 제반 편의한 일은 출품인 및 공공 일반 편리를 위하여 회장내에 설치한다더라." 
- 황성신문 1900. 03. 17

 

끽다점은 다방의 일본식 한자 표기다. 그런데도 대한제국 시기에도 끽다점이라는 일본식 표현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커피점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동아일보 1925.11.20) 1930년 이후부터 과거에 쓰던 다방이라는 말을 다시 쓴다.

 

 

 

 


한국 최초의 식당 커피점

 

윤용주가 1899년 8월 24일 이전에 개업한 서양 요리점이 한국 최초의 식당 커피점이다.

 

"홍릉 앞 전기 철로 정거장에 대한 사람이 새로 서양 요리를 만들어 파는데 집도 정결하고 음식도 구비 하오니 내외국 손님들은 많이 오시면 소청대로 하여 드리이다." - 독립신문 1899. 08. 24

 

REFRESHMENTS!
Yun Yong Ju has opened Refreshment Rooms at the Queen´s Tomb Terminus, close to the line, where refreshments if all kinds may be obtained including, Tea, Coffee, and Cocoa, etc.
Special attention given to the needs of foreigners. 다과! 윤용주가 왕비릉 종착역에 식당을 개업했으며, 선로에 가깝고, 다과는 차, 커피, 코코아 등을 포함해 모든 종류를 만족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외국인의 필요에 각별히 더 신경 씁니다.
- 독립신문 영문판 1899. 08. 31

 

대한제국 황제는 이전 조선 왕조 때 일본인들에게 시해 당한 민비를 잊지 못해 가끔 민비의 묘가 있는 청량리로 행차하였는데 늘 번거로웠고, 주민들에게 피해를 끼쳤다.

 

이에 대한제국 황제는 10만 달러를 들여서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고 홍릉이 있는 청량리까지 전차 선로 공사에 착공해 1897년 12월에 완공하고 1898년 5월 17일 개통식을 치뤘다. 전차는 정원 40인용 8대와 귀빈용 1대를 운행하였다.

 

전차비는 상등의 경우 경교-종로 2전5분, 경교-동대문 5전, 종로-동대문 3전6분, 경교-청량리 7전5분, 동대문-청량리 5전이었다. 하등의 경우 경교-종로 1전5분, 경교-동대문 3전, 경교-청량리 5전, 종로-동대문 1전5분, 종로-청량리 3전5분, 동대문-보제원 1전5분, 동대문-청량리 3전, 보제원-청량리 1전이었다.(황성신문 1899. 05. 26)

 

1900년 4월 9일부터는 비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청량리에서 남대문, 청량리에서 경교까지의 두 노선은 매일 밤 10시까지 운행하였고, 막차는 밤 10시 청량리에서 출발하여 전기창에 도착하였다.(황성신문 1900. 04. 09)

 

윤용주는 자본력도 갖추고 있었고, 시대의 흐름에 빠르게 대응하는 사람이었다. 대한제국 최초의 전차가 청량리에 놓인지 1년 후인 1899년 8월에 청량리 종점에 서양 요리점을 차리고 서양인들을 상대로 커피, 코코아, 차 등을 판다고 과감하게 장기간 광고하였다.

 

중국 망명 한국 정부 내내 총독부는 홍릉이 있는 청량리를 자연의 경치가 좋은 곳으로 일본인들에게 조선 여행 안내서에 늘 소개하였다. 지금은 홍릉 수목원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윤용주는 당시의 교통 수단에 있어서 천장산 자락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려야 하는 청량리 전차역에 커피점을 내어 여유 있는 방문객을 대상으로 커피와 음식을 팔았다.

 

일본인들도 서울에 식당 커피점을 차렸다. 문헌상으로는 최초의 일본인 식당 커피점은 1908년 10월 25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소택신태랑이 운영하던 끽다점이다. 당시 모든 커피점이 요리를 팔았기에 역시 소택신태랑의 끽다점도 식당 커피점이었다. 초기 일본인들의 끽다점은 대한제국내 일본인단, 즉 대한제국 안에 확고한 일본인 지역사회를 구축하던 시기라서 일본인끼리 서로 일치성을 다지는 사랑방 역할에 머물렀다.

 

 

 

           <대불호텔>


한국 최초의 호텔 커피

 

미 해군의 선상 요리사로 조선에 들어 온 호리 큐타로가 인천에 서양식 붉은 벽돌로 3층 건물을 지어 1888년에 개업한 대불호텔이 한국 최초의 호텔 커피점이다. 침대 방이 11개, 다다미 방이 24개였다. 객실 요금은 시세의 2배를 받았는데, 상급이 2원 50전, 중급이 2원, 하급이 1원 50전이었다. 영어 시중이 가능했다.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던 궁내부 특진관이며 특명전권공사 민영환, 학부협판 윤치호, 2등참서관 김득련, 3등참서관 김도일 일행도 대불호텔에 숙박하였다.

 

 

 

 

 

<한성빈관 (손탁 호텔)>


한국 유일의 국영 호텔 커피점

 

1895년 대한제국 황제는 궁의 서양요리 담당 전례관 프랑스 출신 독일 국적의 손탁에게 러시아와의 연락망 협조 및 황제 탄신 경축회를 잘 치룬 공로로 서울 정동 29번지 소재 1,184평 넓이의 한옥 한 채를 하사하였다.

 

1898년 3월 16일에는 아관파천에 기여한 공로로 손탁에게 이전에 하사한 땅에 방 5개짜리 서양식 건물을 지어 수옥헌(潄玉軒)이라고 이름 짓고 경영을 맡겼다. 수옥헌은 친대한제국 외국 외교관들의 사교모임 장소가 되었지만 협소하여 불편하였다.

 

1902년 10월 대한제국은 황제의 돈(내탕금)으로 2층짜리 서양식 건물을 지어 한성빈관이라 하고 손탁에게 경영을 맡겼다. 사람들에게 한성빈관보다는 손탁 호텔로 더 잘 알려졌다. 한성빈관은 예약제로만 운영하였다.

 

1904년 3월과 11월에 대한제국 강제합병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손탁 호텔에 묵었다.  손탁은 대한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자 프랑스 칸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다.

 


한국 최초의 커피 전문점이자 음악 다방

 

흔히 다방하면 차와 커피 등 음료를 주로 팔면서 음악을 틀어주는 다방을 떠올린다.

 

음악 다방에 대한 수요를 일본 유학 출신들이 창출하였다. 일본에서는 다방의 최전성기가 1929~1930년 무렵이었다.(시골띠기 동경견문록, 유치진, 동아일보 1934.07.03) 이때 일본에서 유학하던 한인 학생들은 동경에서 다방 문화를 즐기다 귀국해서 국내에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다방이 없는 현실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정우상, 홍차 한잔의 윤리, 동아일보 1936. 03. 24)

 

당시 서울에서 큰 규모의 청목당, 금강산 등 일본인 소유의 식당에서도 홍차와 커피를 팔았지만, 여전히 요리 판매가 중심이었고 커피보다는 홍차 소비가 더 컸다. 대한제국내 일본인 지역사회가 홍차와 커피 중에서 홍차를 훨씬 더 선호하여서였다. 가장 크게는 음악이 빠져 있었다.

 

"명과(明菓)나 금강산에서는 그래도 제법 커피다운 커피를 대접하지만 거기야 차를 파는 가게지 다방은 아니다. 그 다음 음악인데, 남촌의 다방들은 대개 명곡들을 많이 갖추어 두고 걸기도 조백이 있이 걸어 들을 만하지만, 북촌 다방에를 들어서면 음악을 하는 게 아니라 발악을 하는 그놈 재즈에 신경이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정신이 나갈 지경이다." - 채만식, 다방찬(茶房讚), 조광 1939. 7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식당 커피점들은 일본 유학을 갔다 온 한인 청년들이 바라던 느긋하게 몇 시간이고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와 홍차를 마시는 담배 연기 자욱한 그런 다방이 아니었다.

 

"40년전 서울에는 커피나 홍차를 내는 끽다점이 진고개에 단 한집 있었을 뿐이다. 그 뒤 10년 남짓에 그래도 여남은 집이나 다방이 생겼다. 소공동에 유치진씨가 하던 프라타누가 있었고, 시청 앞 중국인가의 일각에 이순석군의 낙랑이 있었다. 10전짜리 커피 한잔에도 꿈이 있었고 환상이 있었다." - 김소운, 다방 엘레지, 동아일보 1966. 04. 19

 

진고개에 단 한 집 있었다는 1926년의 끽다점은 충무로 3가 일본인 소유의 이견(二見 후다미)을 말한다. 1936년 3월 24일자 동아일보에 홍차 한잔의 윤리라는 제목으로 쓴 정우상의 글을 보면 이야기의 흐름상 이견도 음악을 틀어주면서 차와 커피를 주로 파는 커피 전문점이 아니었다.

 

"6,7년전만 해도 서울에는 순끽다점으로 변변한 것이 있는 것 같지 않아 동경서 끽다취미(그때 이런 말이 유행하였던 것 같이 기억 된다)를 알고 온 학생들에게 여간 큰 불만이 아니었는데 그때와 비교해 보면 급속도의 발전이다. 그러나 이 다방에서 가장 나의 흥미를 끌은 것은 이러한 외부적인 것보다도 벌써 초저녁부터 가득 가득 차 있는 젊은 손님들이었다. 이들은 여기와서 차를 마시고 듣고 싶은 음악을 듣는 동안 모든 세상 일을 잊고 있지 않는가." - 정우상, 홍차 한잔의 윤리, 동아일보 1936. 03. 24

 

 

 

<카카듀, 관훈동 146번지. 지금은 5층 건물이 들어 서 있다.>

 

1926년 초겨울 성탄절 직전 한국 최초의 커피 전문점이자 음악 다방인 카카듀가 서울 종로구 관훈동 146번지 2층 건물 지하에 둥지를 틀었다.

 

1940년 2월 14일자 조선일보 기사 '은막 천일야화라'는 제목의 글에서 안석영은 카카듀가 안국동 네거리 못미쳐 그 길에 처음 생긴 서양식 건물로 이성용이 병원을 하던 아래층에 있었다고 했다.

 

"옛날 인사동(仁寺洞) 지금은 관훈정(寬勳町)일 게다. 안국동 네거리를 나갈려면 못미처 이 길에 처음 생긴 양옥집(옛날 이성용씨 병원 밋층)에『카카듀』라는 찻집(茶房)이 생겻스니 이것이 서울의 찻집의 야릇한 풍속의 시초다."
- 안석영, 다방(茶房) 카카듀에 나타난 하와이의 아가씨 미쓰 현(玄), 조선일보 1940. 02. 14

 

 

<1926년 이성용(26) 마리아(23) 부부. 마리아는 독일 게르만족이 아니라 독일에 머무르던 천대 받는 소수 민족 집시 출신으로, 집시들도 흡수 당하지 않으려고 내부적으로 타인종 뿐만 아니라 같은 살색의 타민족과의 결혼마저도 금기시하는 관습이 지금도 매우 강하기에, 당시에 집시가 혼혈 결혼을 허락했다는 자체도 굉장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 의학박사로 잘 알려진 이성용은 언론 발표로만 보면 학문의 고장 유럽, 당시 의학 강국이었던 독일에서 불과 3년 반만에 세균학과 병리학이라는 두 가지 전공으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한국인 역대 최단기간 해외 석박사 취득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성용은 경성 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21년 9월 15일 오전 9시 50분에 서울에서 떠나 일본 횡빈에서 배를 타고 이동하여 1922년 1월 22일 며칠 전에 독일 베를린에 도착하였다. 의학 박사 취득 후 1925년 11월 23일에 귀국하였으니, 3년 반만에 세균학과 병리학 복수 전공으로 의학 석박사를 모두 취득하였다.

 

이성용은 귀국하여 서울 중구 정동 22번지에서 병원을 하다가, 관훈동 146번지에 서양식 건물을 지어서 1926년 12월에 입주 하였다. 

 

1926년 10월 6일자 동아일보에 정동에서 하던 병원 광고를 실었기에 관훈동 신축 건물 입주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11월이다. 관훈동 건물에서는 1층을 병원으로 쓰고, 2층을 살림 집으로 썼다.

 

"부내 관훈동 146번지 독일 의학박사 이성용씨의 부인 메리씨는 7일 오후 0시 15분경에 신룡산으로부터 동대문으로 가는 전차가 조선은행 앞에 이르렀을 때 승강구 반대편으로 뛰어 오르다가 전주에 부딪혀 경상 하였다고."
- 중외일보 1927. 02. 09

 

"관훈동에 새로 세운 병원 아래층으로부터 이박사의 뒤를 따라 그들의 살림집인 2층을 향하고 올라갈 수록 차림과 소제는 더욱 정돈되어 있었고, 상록색의 바이나 하츠 바움=크리스마스 트리가 서 있었다." 

- 매일신보 1927. 01. 01

 

영화 '심청전, 개척자'(1925), '장한몽, 산채왕, 봉황의 면류관'(1926)을 감독했던 이경손이 하와이에서 온 현씨 성의 묘령의 여인과 함께 카카듀를 운영했다.

 

"이 집은 이씨의 데카당 취미를 반영하여 촛불을 키고 인도 풍습의 마포 테블 크로쓰에다 봉산 탈춤의 가면을 걸어 놓고 간판 대신에 붉은 칠한 박아지 세 쪽을 달아 놓아 한때 서울거리에 이채를 띠었다. 숙영낭자전, 춘희를 감독한 미모의 이경손과 하와이에서 살다 왔다는 에그조틱한 여인과의 공동경영인 이 다방 카카듀는 그 무렵 젊은 사람들의 가슴을 타게 하는 곳이었다. "
- 이봉구, 한국 최초의 다방 카카듀에서 에리자까지, 세대, 제2권 통권11호 1964. 04

 

카카듀의 뜻은 프랑스 혁명 시기 경찰의 눈을 피해서 모이는 비밀 장소였던 술집의 이름이라고 하였다.(이봉구, 한국 최초의 다방 카카듀에서 에리자까지, 세대 제2권 통권11호 1964. 04)

 

다방 카카듀에서 에리자까지라는 제목으로 다방의 역사에 대한 원고를 잡지 세대에 기고한 이봉구는 카카듀의 실내 장식에서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것(데카당)을 추구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정작 카카듀는 문학 활동을 하는 동경 유학생들이 귀국후 문학 모임을 계속하기 위한 장소로서  유럽의 살롱문학 형식을 흉내낸 것이었다.

 

동경 유학생들 중심으로 김진섭, 김상용, 손우성, 서항석, 정인섭, 이선근, 김삼규, 함대훈, 유치진, 이헌구 등이 문학 활동에 뜻을 같이 했다. 이들은 방학 때 귀국하여 졸업후 경성에서 계속 함께 모일 장소로 미리 다방을 열어 김진섭이 카카듀라고 이름을 붙히고, 이선근이 여러 생각을 내고, 정인섭이 실내 장치와 조명을 설치했으며, 이경손이 멋지게 턱시도를 차려 입고 차를 나르면서 카카듀의 경영을 맡았다.(해외문학파의 활동, 문단 반세기, 동아일보 1973. 06. 09)

 

동경 유학 출신 문학가들은 자신들을 해외 문학파라고 불렀으며,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대해서는 억지로 꿰맞추는 관념 혹은 도식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고, 민족문학에 대해서는 복고적이거나 통속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순수문학을 지향하겠다고 길을 정했다.(해외문학파의 활동, 문단 반세기, 동아일보 1973. 06. 09)

 

따라서 멋지게 턱시도를 입고 우아한 언행으로 커피를 나르던 지적인 이경손이 카카듀를 상업적으로 성공시키기는 애초부터 힘들었다.

 

 

 

<낙랑파라, 소공동 105번지. 1981년 도로에 편입하면서 소공동 지번 105는 사라졌다.>

 

한국 최초로 흑자를 기록한 커피 전문점이자 음악 다방

 

1931년 이순석이 서울 중구 소공동 105번지에 낙랑파라를 개업했다.

 

동아일보 1994년 4월 11일자 '정도 600년 서울 재발견'이라는 특집기사에서 낙랑파라는 플라자 호텔 옆에 있었다고 하였고, 1964년 4월에 발간된 잡지 세대에 '카카듀에서 에리자까지'를 기고한 이봉구는 낙랑파라가 중국음식점 대려도 건너 편에 있었다고 하였다. 대려도 건너 편 플라자 호텔 옆은 소공동 105번지다.

 

이순석은 동경 우에노 미술학교 도안과를 졸업한 후 친일파 박흥식 소유인 화신상회 진열 유리창에서 연필 소묘를 해주다가 그만 두고 낙랑파라를 시작했다. 낙랑파라는 소공동 태평로 2가 플라자 호텔 옆 강철과 석재로 올린 3층짜리 건물에 있었다. 문 앞에는 파초를 심어서 이국적인 정취를 나타냈다. 2층을 화실로 사용했고, 1층 낙랑파라 널마루 위에 톱밥을 깔아 사막을 연상케 하였다. 금요일에는 백타라는 음반 회사의 신곡 음반을 틀어주고, 때로는 전람회도 개최하였다. (끽다점평판기, 삼천리 제6권 제5호 1934. 05. 01)

 

낙랑파라 이전까지는 다방 주인들은 따로 고정적인 수입원을 가지고 있었고, 손해를 보면서도 다방을 운영해 나갔다.(이봉구, 한국 최초의 다방 카카듀에서 에리자까지, 세대 제2권 통권11호 1964. 04)

 

낙랑파라는 커피 전문점 역사상 최초로 흑자를 유지했다. 그 요인을 청색지에 실린 경성다방성쇠기를 쓴 필명 노다객이 분석하였다.

 

"성공의 주인을 생각해 보면 장소를 대담한 곳에 앉힌 것이 의외로 성공하여 내지인 손을 많이 끌 수 있었고, 또한 종로 근방 차점의 가장 큰 폐단이었던 기생이나 주정꾼 출입이 태무하여 다객의 취미에 적당한 기분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 등에 있지 않았던가 한다. 금요일마다 명곡신보를 돌리고 어느 해엔가는 노문호 투르게네프 백년제를 거행하여 유명해졌다." - 노다객, 경성다방성쇠기, 청색지 1938. 5

 

멕시코 다방이 맞은 편에 낙원회관이 들어서고 주변에 명월관 같은 기생 부르는 요리집들과 극장이 있어서 취객들과 기생들에게 시달리다가 지역 상권 특성에 맞게 끝내 술집으로 영업을 바꾸고만 점과 비교하면 낙랑파라의 성공요인에 대한 설명을 수긍할 수 있다.

 

이순석이 낙랑파라에 투자한 돈은 설비비 1,100원, 유동자금 500원, 선전비 30원 등이었다. 차 뿐만 아니라 케익과 과일 등도 팔았다. 매월 1일 수지는 매상고 300원에서 원가 및 잡비 200원을 뺀 남은 100원이 순이익이었다. (박옥화, 인테리 청년 성공 직업(1), 삼천리 제5권 제10호 1933. 10. 01)

 

1936년 배우 김연실이 낙랑파라를 인수하여 낙랑으로 이름을 바꿨다.(매일신문 2013. 12. 26)  낙랑은 매월 천이삼백원의 매상을 올렸다. 인사동의 비너스도 매월 약 천원의 매상을 기록했다. 이때부터 다방의 황금기가 시작하었다.

 

"근대 도시에 있어 거리의 공원이라고 할 끽다점은 서울에도 자꾸 늘어가는 중인데 모두 그 성적이 호황으로 우선 인사동의 비너스(마담 복혜숙 여사)는 매일 평균 매상고 10원 월 약 1,000원이요, 장곡천정의 낙랑(마담 김연실 여사)도 매일 평균 40원 월 천 2,3백원을 내인다고 한다."  - 삼천리 기밀실, 서울 끽다점의 호조, 삼천리 제9권 제1호 1937. 01. 01

 

 

우후죽순 음악 다방

 

서울 인사동 삐-너스

서울 종로 멕키시코

서울 장곡천정 낙랑

서울 종로 뽄, 아미

서울 명치정 에리자

서울 명치정 따이나

서울 남대문통 뽀스통

서울 관철동 백합원

- 서울 다방, 삼천리 제7권 제10호 1935. 11. 01


"봄이 되면 명치정 다방구는 너무나 음산한 맛이 잇다. 봄으로 더부러 것는 사람의 발거름을 멈추기에는 해방된 태양의 자애를 빌어야 할 것이 아닐까? 오히려 겨울이면 치워서 그 넓은 길을 피하기까지 하는 장곡천정의 다방이 훨신 친밀성을 느끼리라.
서울의 다방다운 다방의 새 기원을 지어준 <낙랑>이 여기 잇고, 그 다음으로 7년의 역사를 가진 <플라타느>는 서울서도 가장 친밀하고 가정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다.
새로 생기는 <나전구>도 이 새봄을 기달려 남창을 열 것이요, <미모자>는 훨신 규모가 째여서 <명랑>보다도 안일의 순간을 제여한다.
음악을 찾는 이는 <엘리자>로 더 멀리 <돌체>의 탐탁한 적은 문을 뚜들리기도 하리라. 이 봄을 장식할 고흔 멜로듸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본 아미>를 조아하는 이의 발거름은 아직도 <명과>나 <금강산>을 바리지 아니 할 것이나, <미령>의 일층은 잠시 태양과 친할 포근한 멧 개의 자리를 갖추어 잇고, <프린스>는 봄밤의 그림자를 가득히 품어 잇다.
혼자 무유히 <썬니>의 이층에 올으면 검은 비로-드의 남벽이 정다운 손낄을 기달리고 <다이아>나 <성림>의 아메리카적 기분을 조와하야 발거름을 멈추는 단골 손님도 잇으나, <노아노아>의 흰 원주곽을 거처 넓은 백색 공간, 더높이 한 층계를 올을 수도 잇다.
그러나 <백룡>은 언제나 화려가 경허에 흐르지 안은 매혹으로 넉넉히 시간을 저바리고 안저 잇을 수 잇으며, 더욱 페치카의 정취는 겨울보다도 봄밤의 온기를 전하기에 더 정다웁지 안을까?
치위가 물너가고 조바위 대신 여호 목도리의 남일이 차차 퇴치되여 가는 때 종로 네거리 앞을 밀리는 발거름도 자리가 잡혀진다. 전차를 기달리는 동안 또 거리를 휘돌아 단이는 이들은 예저기서 지기 친우에게 손을 내밀어 <아세아>와 <올림피아>로 잠시 쉬이러 드러간다.
<영보> 밀림 안엔 떠드는 소리가 높아지고 <뉴-홈>은 아직도 단조한 중에 편히 쉬 일자리를 작만해 있으리라. 종로와 안동 네거리 중간에 걸처있든 <은령>이 그 소리를 감춘 후 서대문에 채 미처 <자연장>은 빌리야드를 즐기는 손님을 부르며 봄을 기대리고 잇다."
- 이헌구, 보헤미앙의 애수의 항구, 1 다방 보헤미앙의 수기, 삼천리 제10권 제5호 1938. 05.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