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17

이승만의 감옥생활(1899~1904)<6편>조강지처 놔두고 이중 결혼

이승만, 법적 부인 박승선이 있는데도 프란체스카와 혼인신고 하다. 이승만이 죄가 없어서 얼마 뒤에 풀려났을텐데도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감옥서 병원에서 만난 동료 죄수들의 협박과 회유에 넘어가 1899년 1월 30일 함께 탈옥하다 잡혀서 진짜 죄인이 되자 이승만의 부인 박승선은 3월에 적극적으로 구명 호소에 나섰다. 3월 23일부터 황제에게 바치는 상소문을 들고 인화문 밖에 엎드려 자기를 가두고 남편은 풀어 달라면서 대신 죄를 청하기 시작했다.1 27일에 궁내서 순검이 이승만의 부인 박승선에게 일전에 칙임관 외에는 황제에게 직접 상소 할 수 없도록 법규가 정해 졌으니 상소할 일이 있으면 중추원에 헌의하라고 하면서, 중추원 회의를 통해 가결되면 의정부에 통첩하고, 의정부에서 황제에게 상주할 것이라고 알려 ..

이승만 2015.10.14

이승만의 감옥생활(1899~1904)<5편>을사오적의 도움으로 감형

이승만, 황제의 성은으로 연속 감형 받다. 1899년 11월 17일 이승만은 징역종신에서 감 1등 15년형으로 감형 받았다.1 1899년 11월 25일 이승만은 징역15년에서 감 1등 10년형으로 감형 받았다.2 1899년 1월 9일 이승만이 무고를 당해 죄 없이 조선은행 광장에서 사복경찰관들에게 체포되자, 그때 함께 있었던 감리교 의사 셔먼은 즉시 미국 공사관으로 달려가 도움을 청했고, 공사 알렌은 대한제국 외부로 찾아가 이승만이 셔먼에게 통역사로 고용되었기에 협정에 따라 사전통고 없이 체포할 수 없으므로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3 조미수호조약 제10조에 따르면 죄를 범한 조선인이 미국인의 주택이나 배에 숨을 경우 먼저 해당국 공사관에 통지한 이후 조선 경찰이 체포할 수 있게 하거나 미국 영사관이 체포하..

이승만 2015.10.13

이승만의 감옥생활(1899~1904)<4편>체포에 저항한 죄로 종신형

이승만, 체포에 불응하며 항거한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다. 1899년 1월 30일 오후 5시경 이승만은 육혈포를 들고 최정식, 서상대의 뒤를 따라 탈옥을 감행하였으나, 불과 몇 분도 안 되어 이승만은 현장에서 시위 2대 병정 최영식에게 체포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맨 앞에 선 최정식이 길을 열려고 육혈포로 총탄 세 발을 쏘아 압뢰 김윤철의 등에 총상을 입히고 말았다. 1899년 2월 1일 경무청은 이승만을 한성 감옥서에서 불러 올려 저녁까지 자세히 신문하고는 도로 한성 감옥서로 보냈고, 고등재판소로 신문 결과를 넘겨 조율하였다. 이승만은 육혈포와 관련한 경무청 신문에서 최정식이 사람을 시켜서 육혈포를 한성 감옥서로 들여 왔다고 진술하였다. 재판을 일주일여 남겨 놓고 고등재판소는 이승만이 사용한 증거물인 ..

이승만 2015.10.06

이승만의 감옥생활(1899~1904)<3편>고문 당했다고 거짓말

이승만, 고문 당했다고 거짓말하다. 대한제국의 갑오경장 개혁에 따른 형벌제도 정비 대한제국 이전에는 형벌에 사형, 유형(귀양), 장형(곤장), 태형(회초리), 도형(노역)이 있었기에 지금 의미의 징역형 형벌을 받는 감옥이 존재하지 않았고, 미결수가 법원 공판에 참석하면서 판결이 날 때까지 지내는 전옥이 있었다. 즉 판결이 나면 사형으로 죽거나, 멀리 귀양을 가거나, 매를 맞고 집으로 가거나, 매 맞은 후 노역을 하러 배정받은 관서로 가야 하기에 판결이 남과 동시에 기결수는 전옥을 떠난다. 따라서 전옥은 구치소 개념이었다. 서울에는 의금부 전옥서, 좌포도청 전옥서, 우포도청 전옥서 그리고 종로 서린동 전옥서가 있었으며, 한성 전옥서는 종로 서린동 전옥서를 말한다. 전옥서들은 규모가 작아 40~100명 정도..

이승만 2015.09.29

이승만의 감옥생활 (1899~1904) <2편> 꾐과 협박에 넘어가 탈옥

이승만, 꾐과 협박에 넘어가 탈옥하다. 이승만은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이유 없이 무고를 당해 체포되어 지내다 한성 감옥서 병원에 입원하였다. 감옥서 병원 안에서 최정식과 서상대를 만났다.1 이로 인하여 어핍지존한 혐의로 갇힌 매일신문 편집인 최정식2과 간성군수로 재직할 때 건봉사 승려들에게 교수형 판결을 내리고 엽전 8,500냥을 가로챈 죄로 징역 15년형을 선고 받은 서상대3의 탈옥에 가담하라는 회유와 협박에 시달렸다.4 최정식은 이승만과 매일신문 기자생활을 함께 했던 사이었다. 탈옥은 최정식이 주도하였다. 1898년 10월 12일 자정에 시위 1대대 4중대 2소대 병정 장재우가 시위 1대대 참정 문희선의 부탁으로 궁내부 관인을 가지고 나오다가 경무청 별순검에게 잡혔는데 위조한 관인임이 밝혀졌다.5 1..

이승만 2015.09.28

이승만의 감옥생활 (1899~1904) <1편> 무고로 인해 죄 없이 체포

이승만, 죄 없이 사복 경찰관에게 잡히다. 윤치호, 이상재, 이건호 등이 이끌던 독립협회는 1898년 2월 27일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 조차를 반대하고, 3월 1일 한국 러시아 은행 철수를 요구하며, 3월 7일 일본에게 조차한 석탄기지를 회수하라는 항의문을 대한제국 정부에 발송하고, 3월 10일에는 만민공동회라는 대규모 국민집회를 개최하였다. 이승만은 이 집회에서 총대위원에 선출되어 이후 집회 때마다 선동 연설에 열을 올렸다.1 러시아의 이틀 시한의 러군 철수 위협과 만민공동회 요구 사이에서 갈등하던 대한제국 정부는 3월 11일 밤 만민공동회의 결의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러시아군은 철수했고, 한러 은행도 철폐했다. 일본도 월미도 석탄고 기지를 반환했다. 1898년 10월 12일 친러파를 몰아내고 박정양..

이승만 2015.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