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이승만의 감옥생활 (1899~1904) <1편> 무고로 인해 죄 없이 체포

허구인물 전우치 2015. 9. 28. 15:46

이승만, 죄 없이 사복 경찰관에게 잡히다.

 

윤치호, 이상재, 이건호 등이 이끌던 독립협회는 1898년 2월 27일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 조차를 반대하고, 3월 1일 한국 러시아 은행 철수를 요구하며, 3월 7일 일본에게 조차한 석탄기지를 회수하라는 항의문을 대한제국 정부에 발송하고, 3월 10일에는 만민공동회라는 대규모 국민집회를 개최하였다. 이승만은 이 집회에서 총대위원에 선출되어 이후 집회 때마다 선동 연설에 열을 올렸다.1

 

러시아의 이틀 시한의 러군 철수 위협과 만민공동회 요구 사이에서 갈등하던 대한제국 정부는 3월 11일 밤 만민공동회의 결의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러시아군은 철수했고, 한러 은행도 철폐했다. 일본도 월미도 석탄고 기지를 반환했다.

 

1898년 10월 12일 친러파를 몰아내고 박정양, 민영환 등을 주축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 내각이 들어 섰다. 1898년 10월 28일에서 11월 2일까지 6일간 종로에서 관민공동회가 열려서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민이 한마음으로 힘을 합하여 전제 황권을 견고하게 할 것, 2.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3. 국가 재정을 탁지부에서 전관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4. 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5. 칙임관을 임명할 때는 정부의 자문을 받아 다수의 의견에 따를 것, 6. 정해진 규칙을 실천할 것이라는 헌의6조를 결의하였고, 황제가 수용하였다.

 

신정부는 중추원 신관제를 공포하여 11월 5일부터 최초의 의회를 개원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친러파는 반격을 가하여 신정부가 황제를 폐위하려 한다는 익명서를 뿌려서 황제를 흔들었다. 황제는 급히 독립협회 해산령을 내리고, 신정부를 해체하고 친러 정부로 회귀하였다. 이에 만민공동회가 6일 연속 경무청 앞에서 독립협회 구속자 석방 집회를 개최하였고, 고종은 2차례의 해산 시도가 모두 실패하자 독립협회 간부 17명을 석방하였다.

 

만민공동회 집회가 17일째에 접어 들던 11월 21일 친왕주의 황국협회는 보부상 2천명을 동원하여 만민공동회 집회를 기습해서 적지 않은 부상자를 만들어내고, 독립협회 회원 김덕구를 살해하였다.

 

다음 날 분노한 시민들이 만민공동회 집회에 참가하여 일부는 마포까지 진출해서 보부상들을 응징하였다. 1898년 11월 26일 고종은 독립협회의 복설을 허락하고, 50명 규모의 중추원의관제도를 시행하였다.

 

1898년 11월 29일 이승만은 중추원의관 종9품을 임명 받았다.2 독립협회의 몫중 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중추원 회의가 열리기 4일전 즈음인 12월 12일경 쓰네야라는 일본인이 독립협회 회장 겸 중추원 부의장 윤치호를 만나 박영효의 송환을 부탁하였고, 윤치호는 개인적 견해라면 모를까 공식적으로 박영효 송환을 언급하면 민중과 황실의 공격이 있을 거라면서 거절하였다.3

 

쓰네야가 대한제국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살펴보면 당시 독립협회와 이승만이 왜 일본에 호의적으로 변해 갔는지 이유를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서재필이 일본 육군 유년 학교를 졸업한 것을 비롯해서 독렵협회 회원들이 적지 않게 일본 육군 유년 학교를 나왔고, 그 밖에도 다양한 일본 학교에서 공부한 인연들도 작용하였다.

 

1898년 10월 27일 일본의 정치사회단체들인 동아회, 동문회, 동방협회 등이 통합하기로 결정하고, 11월 2일 동아동문회(東亞同文會)로 출범하였다. 동아동문회 회장은 일본 귀족원 의장 근위독마(近衛篤麿 고노에 아츠마로)이었다. 근위독마는 대륙경영에 심취한 인물이었다.

 

근위독마는 한중일 동양인 삼국이 동맹을 맺어 백인 서양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동문동종제방친선(同文同種諸邦親善)'을 주창하였다. 한중일이 같은 한자를 쓰니 동문이고, 한중일 사람이 같은 피부색이니 동종이므로 '대동단결(大東團結)'하자는 것이었다. 동아동문회는 일본이 청국과의 전쟁에서 이기자 '청일동맹론'을 내세워 상해에 일본식 학교를 세우고 청국인들을 가르쳤다. 이러한 생각은 나중에 대동아공영론의 모체가 되는 하나의 자양분이었다.

 

동아동문회는 대한제국에서도 경성학당, 한남학당, 달성학교, 일어금성학교, 원흥학교, 원산공립학교 등 학교 운영비를 지원하고, 일본어 교사들도 파견하여 일본식 교육 체계를 구축하려고 시도하였다.

 

항서양 대동아단결을 내세운 근위독마의 수족이 바로 쓰네야(항옥성복 恒屋盛服 쓰네야 세이후쿠)이었다. 항옥성복은 박영효를 언급한 조선개화사를 썼고,4 해외식민지론도 써서 식민지 정책과 식민지 선택 및 일본인 해외 이주를 다루었으며,5 한국시찰보고서도 작성하였다.6

 

항옥성복은 근위독마와 같은 국가주의자로서 청일전쟁 후 청일동맹론을 내세운 동아동문회 간사를 맡았고, 이후 귀족원 의장 근위독마의 사주를 받아 두산만(頭山満 토우야마 미츠루) 등과 함께 대러시아 강경 단체인 국민동맹회(国民同盟会)를 조직하여 러시아와 전쟁할 것을 주장하였다.

 

항옥성복은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를 지원하면서 조선과 대한제국의 내정에도 간섭하였다. 항옥성복은 나아가 일본이주조합인 일본식민협회를 설립하여 일본의 가난한 농민들과 도시 빈민들을 대한제국으로 이주시켜서 일본내 인구증가에 따른 계층간 소득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서기도 하였다. 특히 일본인들이 대한제국에 이주하게 되면 수출보다는 내수에 치중하여 농상공업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일본은 또한 일본으로 망명한 친일적 개혁파들을 중점 대상으로 정해 포섭 공작을 펼쳤다. 대동아 단결을 내세워 서양과 싸우는 일본과 하나 될 때 대한제국도 서양 제국주의로부터 안전하다는 논리로 포섭하여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 동조자들을 끌어 모을 수 있을만큼 많은 돈을 지원해 주었다.

 

항옥성복이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의 후견인이었으니, 대한제국에서의 박영효 세력 확대를 꾀하는 과정에서 중추원이나 독립협회 안에 존재하는 친박영효 인물들에게 지급하는 돈에 항옥성복이 관여했음은 자명하다.

 

이승만도 역시 당시 다른 독립협회 회원들처럼 항옥성복을 만났거나, 만나지 못했어도 최소한 그의 사상적 영향력 아래 있었다. 이승만은 대동합방론에 대해서 관계자들에게서 교육을 받고 육필 원고마저 받아 읽어서 잘 알고 있었으며, 깊은 감명마저 받았다.7

 

이승만은 실제로 1904년에 쓴 독립정신에서 일본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서술하면서 심지어 한국인은 일본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출옥 후에는 1905년 미국에서 자신이 친일단체 일진회를 대표한다고 미국 언론에 발언하였으며, 황제의 공식 청원서가 아닌, 하와이 교민들을 동원해 급조한 청원서를 들고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를 만났다.

 

대동합방론은 일본을 중심으로 한중일이 하나가 되어 서양의 침략에 맞서 전아시아가 공영을 이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동합방론이 준정등길(樽井藤吉 다우이 토키치)의 저작이기는 하나 용어의 차이일뿐 내용은 동아동문회의 주장과 같다.

 

1898년 12월 16일 중추원은 정부에 필요한 인재를 건의하기로 하여 거수를 많은 받은 순서로 민영준, 민영환, 이중하, 박정양, 한규설, 윤치호, 김종한, 박영효, 서재필, 최익현, 윤용구 이렇게 11명을 선정하였다.

 

윤치호는 이승만이 이건호 등의 권유로 박영효 천거에 찬성했다고 하였다.8 그런데 이승만과 이건호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다. 이승만과 동갑인 이건호는 광흥학교 교장이면서 독립협회 제의였다.9

 

박영효 천거 부분이 논란이 되었다. 박영효와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황제에게는 원흉이었다. 서재필은 다행히도 탕척을 받아 중추원 고문과 독립신문사 사장에 임명 받았지만, 박영효는 1895년 모반사건에도 연루된 혐의로 여전히 용서 받지 못한 역적이었다.

 

박영효의 천거에 찬성 거수한 의관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박래동, 심의승, 서정진, 이석규, 박동진, 한긍리, 최익현 등이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찬성하여 든 손의 수만 헤아렸을 뿐 어떤 중추원 의관이 누구에게 거수하였는지는 기록하지 않았기에 정확하게 전체를 알 수 없었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1899년 1월 3일 박영효에게 손을 든 사실이 밝혀진 이승만, 신해영, 어용선, 변하진, 홍재기를 충추원 의관직에서 파면하였다.11

 

이승만이 대반역자 박영효를 지지하자 민중은 분노하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등을 돌려 버렸다.12 궁궐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술 취한 군인들을 동원해서 중추원 회의를 중단시켜 버렸고, 민중은 호응하여 이승만 일당에게 반역자라고 욕을 퍼부었다.13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민중의 지지로 부흥했으나, 이번에는 반대로 민심을 거스르자 민중의 힘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이승만의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동 하나 때문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불과 몇년만에 민중에게 버림 받아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승만은 궐기한 민중이 무서워 치외법권 지역인 배재학당으로 도망쳐 숨어 지냈다. 민중의 분노가 가라앉으면서 신변의 위험이 사라질 즈음 엉뚱하게도 경무청에서 모반죄로 신문을 받던 강성형이 허위 진술로 무심결에 떠오른 이승만의 이름을 언급함으로써 아무런 죄도 없는 이승만은 졸지에 경무청의 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강성형이 가담한 모반죄는 황제를 폐위시키고 의화군 이강을 황제로 옹립하여 박영효 내각을 세우겠다며 유세용, 강성형, 오성학 등이 일을 꾸미다가 포섭하려던 친위대 제3대대 정위 신창희, 부장 이민직이 오히려 고발하여 1898년에 적발한 사건이다. 이는 당시 고발을 접수한 상관 이근용의 계책이었다.

 

자신이 엉뚱한 일로 수배 당한 사실을 모르고 있던 이승만은 감리교 의사 셔먼(Harry C. Sherman)이 근처 환자의 집을 방문하러 가겠느냐고 묻는 말에 숨어 지내던 생활이 지루하던 참이라 흔쾌히 승낙하고는 함께 배재학당을 떠났다. 조선은행 광장에서 사복 경찰관들이 이승만을 우연히 발견하여 체포해 감옥서에 입감했다.14

 

경무청에서 이승만과 강성형간의 대질신문 결과 이승만의 무고함이 밝혀졌으나 칙령에 따라 모반 사건을 처리했기에 임의로 무혐의 방면할 수 없었다.15

 

이승만과 강성형간 대질신문을 한 경무사 이근용은 "이승만이 가서 이규완을 방문하여 다른 나라에 의뢰하는 것을 묻고 여기에 오래 머무를 수 없다고 언급하였다기에 그 마음 쓰는 바를 가히 헤아리기 어려워, 강성형과 대질함에 이르러 그 사실이 없다 하는고로 하나의 일을 거짓으로 꾸민 것이나, 역모에 이름 올린 자를 찾아가 그 거취를 설명한 것은 유달리 아주 해괴한 바, 구초에 나온 자는 따로 탐문하여 붙잡아야 한다"고 보고하였다.16

 

이규완은 한때 미국에서 머물렀다. 이승만은 선교사에게서 듣고 막연하게 상상하는 것을 넘어서  직접 미국 생활을 한 이규완에게서 실제 경험담을 들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일젼에 피착되엿던 리승만씨는 경무텽에셔 붓터 재판하는데 아모 죄가 업는고로 무죄방면이 된다더라. "
- 제국신문 1899. 01. 19

 

 

  1. 독립신문 1898. 3. 12 [본문으로]
  2. 황성신문 1898. 12. 02 [본문으로]
  3. 윤치호 일기 1898. 12. 27 About the 12th of December, I met Tsuneya, who is generally supposed to be devoted to Pak Yong Hio. He asked me to propose in the meeting the recall of Pak. To this said I: "That is impossible. The People's Party as opposed to the government, is incomparably weak. Any mention of Pak in the meeting will expose us to the attacks of the Palace and the ignorant populace. No, let some private person mention Pak's case in a memorial, as I am told there is a scheme to that effect now on foot. But I have been for the past 12 12월 12일경 박영효 추종자로 생각되는 쓰네야를 만났다. 그는 박영효를 소환할 수 있도록 중추원 회의에서 발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여기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정부에 대항하는 인민파는 비교도 안되게 약하오. 회의에서 박에 대한 어떠한 언급을 하던지 간에 궁궐과 무지한 민중의 공격을 받을 것이오. 일부 사적인 사람이 비공식적으로 박의 경우를 언급해야 하는데, 내가 말한대로 의도한 계획을 지금 시작하였소. 하지만 나는 지난 열두달 내내 안된다고 말해 왔소. [본문으로]
  4. 조선개화사 원문을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http://viewer.nl.go.kr:8080/viewer/viewer.jsp [본문으로]
  5. 해외식민지론 원본을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http://kindai.ndl.go.jp/info:ndljp/pid/800866 [본문으로]
  6. 한국시찰보고서 원문을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http://www.jacar.go.jp/DAS/meta/image_B03050443000?TYPE=jpeg [본문으로]
  7. Robert Tarbell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Dodd Mead and Company 1954, 43~44쪽 The amount of undercover intrigue in that period passes belief. The Japanese were especially active. Using the reformist Korean nationalists who had sought refuge in Japan, they undertook to make friends with the Independence Club members in the new Privy Council. They posed as the real champions of Korean independence, warning that Japanese help was needed against Russia, China, and the Western imperialists. A number of the expatriates returned from Japan to Seoul and commenced spending money freely to entertain the Privy Council members. Rhee was too young and inexperienced to be wholly aware of their aims or of the source of their funds. He had many secret talks with these men concerning the formation of a Dai Dong Hap Bang a Confederation of all the Peoples of the Great East. The program was an early forerunner of Japan's later plan for an All-Asian Co-Prosperity Sphere. Gradually the expatriates revealed that their plans called first for Il Lo Chun Chainga. war between Japan and Russia; and then for II Mi Chun Chainga war between Japan and the United States. Japan, they argued, was doing all it could to protect the Far East against Western encroachment. China and Korea must join with them in this holy cause. They showed Rhee extensive manuscripts, mapping out detailed plans for these two wars. He was deeply impressed by the motives they professed, for it was all too clear that the East was indeed being inundated by the West. 첩보 활동 규모에 강한 호기심이 생겼는데 그 시기에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일본인들은 적극적이었다. 일본으로 망명한 개혁가 한국인 민족주의자들을 이용했는데, 그들은 새로운 중추원 안의 독립협회를 친우로 만드는데 착수했다. 한국 독립의 진정한 대변자임을 자처하면서, 러시아, 중국, 서양 제국주의자들과 맞서는데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경고하였다. 망명자들 일부가 일본에서 서울로 돌아와 중추원 의관들을 대접하는데 돈을 자유롭게 쓰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너무 어리고 경험이 없어서 전혀 목적이나 돈의 출처를 알지 못했다. 이승만은 대동아 전민족의 연합 '대동합방' 성립에 관련된 이 사람들과 많은 비밀 대화를 나눴다. 그 계획은 나중에 일본의 '전아시아 공영' 계획을 위한 일본의 초창기 선구적 안이었다. 점차 망명자들은 먼저 러시아 일본간의 러일전쟁과 이후 미국과 일본간의 미일 전쟁이라고 부르는 그들의 계획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본이 극동 아시아를 서양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한국과 중국은 이 성스러운 대의에 그들과 함께 동참해야 한다. 그들은 이승만에게 광범위한 육필 원고들, 이 두 전쟁에 대한 매우 자세하게 세워진 계획을 보여 주었다. 이승만은 그들이 공언한대로 동양이 참으로 서양으로부터 침식당하는 것이 아주 확실하기에, 그 동기에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 [본문으로]
  8. 윤치호 일기 1898. 12. 27 on the 16th instant one or two radicals, 崔正德, 李承晩 etc., no doubt with the advice of 李健鎬 etc., proposed in the Privy Council to recommend to the Government the recall of Pak Yong Hio! 이달 16일에 한둘의 급진분자들인 최정덕, 이승만 등이 의심할바 없이 이건호 등의 권고대로, 박영효를 소환하여 정부에 추천하도록 중추원에서 제안하였다! [본문으로]
  9. ①황성신문 1899. 12. 07 사립광흥학교를 신문 밖 유동 이전 기영집사청으로 이설하는데 과정은 일어, 산술, 역사, 지지, 법률, 경제, 행정학, 강연, 작문, 체조오. 입학시험은 음력 본월 20일로 23일까지 하되 국한문 독서와 작문이오. 개학은 10월 1일로 퇴정하오나 추후 원하는 학인도 허입하겠사오니 여러 분은 기한내에 찾아 오시기를 바람. 사립광흥학교주 박예병, 교장 이건호, 교사 신해영, 어용선, 김용제, 권봉수, 남순희. ②독립신문 1898. 03. 05 돌아간 일요일 오후에 세 시에 독립 협회 회원들이 의례히 독립관에 모여 회를 열었는데 회장 안경수 부 회장 이완용 서기 정교 제씨는 임기가 찬 고로 다 면림하고 다시 투표 하여 회장 이완용, 부회장 윤치호, 서기 남궁억, 회계 이상재, 윤효정, 제의 이건호, 정교, 양홍묵 제씨로 택정 하고 절영도 일절로 기시 외부 대신 서리 민종묵씨에게 편지로 물어 보자는 의논들 하노라고 전전 일요일에 결정한 긴 담뱃대 금하는 것이 위생에 요긴하다는 문제는 이미 경무청에서 먼저 금단 한 것인 고로 이 문제 토론은 치지하고 이 다음 일요일에 토론 할 문제는 대한국 토지는 선왕의 간신하고 크신 업이요 이 만 인구의 사는 땅이니 한자와 한치라도 다른 나라 사람에게 빌려 주면 이는 곧 선왕의 죄인이요 이천 만 동포 형제의 원수로 결정한다는 문제를 가지고 강론들 할 터이니 많이 와서들 들으시며 회원들도 싣고 없는 이들은 다 와서 참례를 하시오. [본문으로]
  10. 독립신문 1898. 12. 26 [본문으로]
  11. 황성신문 1899. 01. 07 [본문으로]
  12. 윤치호 일기 1898. 12. 27 Having done this, in order to save themselves, they persuaded the People's Meeting to endorse the foolish ect. No sooner than the People's Party endorsed the act of the Privy Council in the proposed recall of Pak than the tide of popular sentiment turned against the Independence Club and the People's Meeting. 제안한 다음에는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어리석게도 만민공동회에 공개 지지를 하도록 했다. 즉시 인민파는 중추원의 행동에 대해 지지하고 나섰고, 그러자 민심의 흐름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The Palace seized upon this opportunity and ventured to use force for the dispersion of the meeting. Drunken soldiers were sent in large numbers to harass, insult and beat the leading speakers of the meeting on the 22nd and 23rd inst. The people cussed the popular leaders as traitors for trying to force Pak, the archtraitor, on the Emperor etc.궁궐은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 중추원 회의를 무산시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달 22일과 23일에 술 취한 군인들을 대거 보내어 침입하도록 해서 회의를 이끌던 자들을 모욕하고 구타하였다. 민중들은 박영효를 강요하려고 시도하는 반역자들인 유명 지도자들, 황제에 대한 대반역자들을 욕하였다. [본문으로]
  13. 위의 글 [본문으로]
  14. Robert Tarbell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Dodd Mead and Company 1954, 48쪽 one day Dr. Harry C. Sherman, an American Methodist doctor, asked Rhee if he would like to go out with him to call on a patient who lived near by. Rhee was extremely restive under his confinement and eagerly went with him. They had walked only as far as the vicinity of the near-by Japanese consulate, on the Square of the Bank of Chosen, when several plainclothes policemen rushed up, arrested Rhee, and took him off to jail. 어느 날 감리교 의사 해리 셔면이 이승만에게 근처에 사는 환자에게 함께 가겠느냐고 물었다. 이승만은 자신이 숨어 지내는 것에 대해 극도로 안절부절하지 못하였기에 흔쾌히 셔면과 함께 나섰다. 그들이 겨우 일본인 거주지 부근, 조선은행 광장까지 걸었는데, 사복 경찰관들이 달려들어 이승만을 체포해서 감옥서에 집어 넣었다. [본문으로]
  15. 독립신문 1899. 01. 13 수일 전에 전 의관 이승만씨가 무슨 일에 관계가 되어 경무청에 취착이 되었다더니 지금 들은즉 강성형의 구초에 이승만씨의 이름이 난 고로 양인이 대질 심문 한즉 강씨의 말이 나는 이승만씨를 인사한 때가 없노라 함에 경무사가 묻기를 그러하면 왜 이승만의 이름을 불렀나냐 한즉 강씨의 말이 나를 초심할 때에 민회 사람과 동모한 이가 없나냐 하고 작고 묻기에 이승만의 이름을 많이 드른 고로 엉겁결에 불렀노라 함에 경무청에서는 이승만씨가 죄 없는 줄은 알았으나 칙령으로 잡은 고로 임의로 놓지 못하고 곧 고등 재판소로 넘겼다 하더라. [본문으로]
  16. 경무사 이근용, 보고서 제2호 1899. 01.11 李承晩段 徃訪圭完 而問 倚頼 他國하고 以不可久留於此로 言及 則其所用心을 難可料度 而至於與盛馨對質에 以無其實故로 一事粧撰이오나 故訪逆名之人 而說明其去就는 殊極駭恠이온바 出於口招者는 另令詗捕하오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