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황제의 성은으로 연속 감형 받다.
1899년 11월 17일 이승만은 징역종신에서 감 1등 15년형으로 감형 받았다.1
1899년 11월 25일 이승만은 징역15년에서 감 1등 10년형으로 감형 받았다.2
1899년 1월 9일 이승만이 무고를 당해 죄 없이 조선은행 광장에서 사복경찰관들에게 체포되자, 그때 함께 있었던 감리교 의사 셔먼은 즉시 미국 공사관으로 달려가 도움을 청했고, 공사 알렌은 대한제국 외부로 찾아가 이승만이 셔먼에게 통역사로 고용되었기에 협정에 따라 사전통고 없이 체포할 수 없으므로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3
조미수호조약 제10조에 따르면 죄를 범한 조선인이 미국인의 주택이나 배에 숨을 경우 먼저 해당국 공사관에 통지한 이후 조선 경찰이 체포할 수 있게 하거나 미국 영사관이 체포하여 조선 경찰에게 인도하여야 하며, 미국인은 조선인 범죄자를 숨겨 주어서는 안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미국 공사 알렌은 사전 통지해야 하는 절차를 문제 삼아서 불법이라고 우겼다.
1월 17일에는 미국 공사 알렌이 공식적으로 외부에 공문을 보내어 이승만의 죄목과 재판 경과에 대해서 문의하였고,4 정부는 아직 범죄 유무를 판단할 수 없어 재판을 시작하지 않았다고 회신하였다.5
그러다 1월 30일 이승만이 동료 죄수들의 협박과 회유를 못이겨 함께 탈옥 하다가 잡히자 미국 공사 알렌은 침묵하였다.
탈옥수 이승만이 사형을 피할 수 없는 대명률 옥수탈감 및 반옥재도조(獄囚脫監及反獄在逃條)로 처벌 받지 않고, 대명률 포망편(捕亡編) 죄인거포조(罪人拒捕條) 위종자률(爲從者律)로 사형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의도적인 도움이었다.
사형을 면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봐주기인데도 종신형을 선고 받은지 불과 4달만에 15년형으로 감형되었고, 15년형으로 감형된지 불과 8일만에 다시 1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이승만은 황제의 크나 큰 성은을 입었다.
이승만이 독립협회 간부도 아니고, 아직 학생 신분으로 만민공동회 집회 때 총대위원이 되어 선동 연설 몇번 하기는 했어도 인맥이 깊지 않은데다가 손을 내밀 수 있는 곳이 배재학당이었지만 배제학당 선교사들이 기댈 곳은 미국 공사 알렌이 유일하기에 외국 관료 알렌이 타국의 내정에 간섭을 한다해도 한계가 있었다.
남은 쪽은 독립협회였지만, 이승만이 중추원 회의 때 친일 반역자 박영효 천거에 지지하는 거수를 하는 바람에, 그 여파로 민중이 등을 돌려 버리자 민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정부가 힘으로 독립협회를 무너뜨린 상황에서 독립협회에서 도와 줄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배재학당 학생 이승만과 가장 많이 어울린 것으로 잘못 알려진 서재필은 독립협회와는 거의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서재필은 독립된 독립신문사 사장으로서 독립신문 발행에 열중하다가 이승만이 잘못된 선택으로 박영효 찬성 거수 사태를 터뜨림으로써 독립신문마저 타격 받자, 독립신문 유통비용 정산도 못하고 급히 미국으로 피해야 할 정도였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사장직과 중추원 고문직, 배재학당에서 맡은 주 몇 시간의 수업에 더 치중하였다. 교내 웅변 연습 동아리인 협성회를 서재필이 지시했다고 하지만 협성회 결성과 관련해서 서재필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서재필은 독립신문 발행에 열중이었지 배재학당 학생 동아리 활동과도 거리가 멀었다.
이로 보면 독립협회는 서재필의 미국적이지만 일본에 우호적인 독립신문 발행파, 친일적 독립협회파, 친일적 서양 기독숭배 감리교 실리파, 완전 친일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배경에는 일본의 적극적인 독립협회 포섭 공작도 있지만, 서양인 선교사들이 일본이 대한제국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평가해서 일본에 우호적이어서 친일을 하도록 조언했었던 점도 있다.
이승만은 만민공동회 시위에서 선동 연설로 잠깐 눈에 띄었으나, 아직은 어떤 조직에서 핵심 간부로 발탁될 만큼 높은 평가를 받지 않았다. 특히 이승만이 가난하고 친족이 빈약하다는 것이 약점이었다. 독립협회 간부들은 재력이 뒷받침 되었다.6 누구나 회비만 내면 독립협회 회원이 될 수 있었지만 독립협회 간부가 되려면 유명세와 함께 큰 돈을 낼 수 있어야 했다.
미국인 의원도 많은 돈을 독립협회 운영비로 냈다.7 독립협회에 일본인 명예 회원 고하송지조(古河松之助 후루카와 마쓰노스케)도 있었는데 기부 내역은 알 수 없지만 의사였기에 독립협회 운영비를 냈을 것이다.8
독립협회 명예회원 일본인 의사 고하송지조는 1905년 2월에는 경무고문 환산중준(丸山重俊 마루야마 시게토시)의 통역보좌관이 되어 언론 통제에 협조했고, 1906년 1월 25일부터 1906년 5월 17일까지 4개월간 중앙신보를 발행하기도 했으며, 1909년에는 일본인 한성신보의 주간도 맡았다. 고문정치는 1904년 8월 22일 일본에 의에 강제로 체결한 제1차 한일협약(韓日協約)에 따라 일본인이 대한제국 내각의 각 부처마다 고문으로 들어가 내정에 간섭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가난한 이승만은 감옥에서 회심하여 당시 대한제국에서 가장 선교 활동이 활발했던 영국 성공회에 적극 가담함으로써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도움을 받았던 경험이 밑천이 되어, 이후 대한제국 선교를 위해 원조를 꾸준히 하는 기독교 교회 단체들을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한 도구로 삼았다.
단적인 예로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한인 교회와 한인 단체를 완전하게 장악하게 되면서부터 힘을 갖게 되어 더 이상 남이 주는 월급을 받지 않고, 항상 우두머리로서 단체의 회비를 손아귀에 넣고 자기 마음대로 쓰게 된다. 역시 기독교인 이승만도 교회를 사유물로 삼는 전형적인 한국인 목사들의 부패한 습성을 그대로 잘 보여 준다.
그런데 의외로 이승만의 감형에 직접 관여한 사람은 법부 대신 권재형이었다. 이승만과 권재형 사이의 연결고리는 이상재였다.
의정부 찬정 권재형은 1899년 10월 9일 법부 대신에 임용되고 칙임관 1등에 서임되었다. 부임 2달후인 12월 19일에는 모반, 강도, 살인, 통간, 편재, 절도 이 6범에 해당되지 않으면 각 1등을 감하라는 특사조치를 내린 황제의 명에 따라 이승만을 포함한 21명의 형량을 감형시켜 주었다. 이는 권재형의 상소에 의한 것이었다. 감형 조치를 받은 죄수들은 평리원 고등재판소 소관 황만기, 박윤대, 송일회, 한춘식, 이인식, 김창수, 이승만, 조석구, 윤성여, 최성진, 천장옥, 문성언 12명과 한성재판소 소관 김수현, 이행백, 김노미, 안명수, 이순천, 채규하, 임동근, 안광선, 천재순 9명이었다.9
감형 받은지 불과 8일 후인 12월 19일에 특사조치를 받은 죄수 21명에 한하여 다시 각 1등을 감형시켜 주는 특사조치를 또 시행하였다.10
상급심인 평리원 고등재판소까지 거친 죄수들 중 감형 대상자들인 황만기, 박윤대, 송일회는 동학 농민 의거 관련자들이었고, 한춘식과 이인식은 순검으로 어고 절도범을 잡으려다 실수로 회극문 안으로 들어가 궁궐문을 침입한 죄였고, 조석구는 감옥서장 일때 이승만이 탈옥하는 바람에 처벌 받았으며, 윤성여, 최성진, 천장옥, 문성은은 프랑스 사람을 학대하고 재산을 빼앗은 죄였다. 김창수는 죄명을 알 수 없다.
감형 대상자들에게는 의미 있는 공통점이 없다. 한춘식과 이인식은 실수였고, 조석구는 안스러운 면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외에는 대한제국 정부 입장에서는 감형 시킬만한 타당성이 사실상 없었다. 특히 프랑스인을 학대하고 집을 파괴하고 재산을 가로챈 죄는 통념상으로도 감형 받기에는 부적절하다. 이들은 단지 법부에서 감형 불가 대상으로 규정한 모반, 강도, 살인, 통간, 편재, 절도 6범에 속하지 않아서 감형 대상이 된 것이다.
설득력이 없는 감형 기준을 정해 이승만을 감형 혜택에 포함시킨 법부 대신 권재형은 독립협회 창설 주역이었다.
1896년 10월 독립협회는 회장 겸 회계장 안경수, 위원장 이완용, 위원 김가진, 김종한, 민상호, 이채연, 권재형(權在衡), 현흥택, 이상재, 이근호, 이재정, 유기환, 박기양, 김승규, 간사원 송헌빈, 이건호, 남궁억, 심의석, 정현철, 팽한주, 오세창, 이근영, 현제복, 문태원, 이계필, 구연소, 박승조, 박용규, 홍의관, 안영수, 서창보, 이종하가 간부진을 구성하고 있었다.11
7월 독립협회 창설 초기 간사원은 송헌빈, 남궁억, 심의석, 정현철, 팽한주, 오세창, 현제복, 이계필, 박승조, 홍우관이었다.12
11월 말 독립신문사 사장 서재필이 초대한 만찬에 함께 한 사람들은 내부대신 박정양, 군부대신 민영환, 농상공부 대신 이윤용, 외부협판 고영희를 비롯해 독립협회 간부들인 외부대신 이완용, 법부협판 권재형, 농상협판 민상호, 한성판윤 이채연, 회장 안경수, 위원 김가진이었다.13
법부 협판 권재형은 독립협회 회장이자 중추원 의관인 이경수, 군부대신 이윤용, 협판 민영기, 농상 협판 이채연, 모든 간사원, 장공들과 함께 모화관 독립문 신축 터와 독립 공원지 터를 둘러 보았다.14
이때의 독립협회 간부진은 독립문 건설 과정에서 황제를 존경해야 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기에 정부와 독립협회의 관계가 매우 좋았다.15 황제는 배재학당이라고 이름을 내리고, 촉망 받는 소수 관료들도 학생으로 파견하여 서양식 교육을 받게 하면서 재정적 지원도 했었다.
하지만 독립협회가 세운 독립문에 조각된 태극기를 보면 독립협회가 겉과 속이 다른 단체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당시 태극기를 책자에 소개할 때마다 의도적으로 제 각각 항상 태극기의 사괘를 마음대로 그리거나 위치를 조작하였다. 독립문의 태극기는 조선이 선택한 태극기가 아니다.조선은 1882년 5월 22일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직전에 황제의 명으로 통리기무아문 외교 담당부처 동문사에서 태극기를 창제하였다.
1898년 2월 27일 독립협회는 초대 회장 안경수의 임기가 만료되자 제2대 회장에 이완용, 부회장에 윤치호, 서기 남궁억, 회계 이상재, 윤효정, 제의 이건호, 정교, 양홍묵을 선출하였다.16
그런데 1898년 독립협회 전 초대 회장 안경수가 친일파 역적 박영효와 연결되더니 정부와 황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독립협회가 돌변함으로써 정부와 독립협회의 우호 관계가 깨졌다.
독립협회 전 초대 회장 안경수는 1897년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더니 이후 황해도 관찰사에다 경기 재판소 판사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898년 7월 김기황의 소개로 찾아 온 우남규에게 박영효가 나오면 변이 있을 것이니 현 황제가 태상황으로 물러나고, 황태자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면서 현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하지 못하도록 회극문만 잘 지키면 된다며 문호와 파수 유무를 지도를 놓고 자세히 말하면서 동조자로 이용한, 이남회, 김재은, 이충구 등이 있다고 말하자, 우남규는 상관 이학균에게 보고 하고, 이학균은 군부 대신 민영기에게 말하였다.17 안경수는 들통나자 즉시 일본으로 도망쳤다.18
1898년 8월 28일 독립협회는 제3대 회장에 윤치호, 부회장에 이상재, 서기에 박치훈, 한만용, 회계에 이일상을 선출하였다. 임원에는 이채연, 남궁억, 정교를 선출하였다.19
1896년 창립 때부터 1898년에도 남아서 독립협회 활동을 한 사람은 독립협회 부회장 이상재와 독립협회 임원 한성판윤 이채연이다. 이채연은 이승만이 감형 받던 1899년에도 한성판윤 직무를 수행 중이었다. 독립협회에서는 이상재와 이채연만이 법부 대신 권재형과 소통이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즉 이 두 사람이 이승만을 위해 법부 대신 권재형에게 청탁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했다.
이승만은 공식 한국 정부가 탄생하여 초대 대통령이 되자 1956년에 대통령 공보실에 지시해서 공보실 발간 유일한 인물 일대기인 월남 이상재선생 약전을 집필하도록 할 정도였고, 이상재가 사망한지 30년 후인 1957년에는 직접 묘 이장 장소를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노고산 자락 금바위 쪽으로 정하여 묘를 옮기도록 하였다.
독립협회 전 제2대 회장 이완용은 전라북도 관찰사에다 조경묘, 조경단, 경기전 제조를 겸임하고 있었고, 독립협회 제3대 회장 윤치호는 함경도 덕원 부윤으로 나가서 지역 주민들에게서 큰 사랑을 받고 있었기에 서울 일에 관여하기 힘들었다. 또한 윤치호는 중추원 회의에서 박영효에 대한 천거가 민심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대하던 입장이라서 박영효 천거 지지 거수로 풍파를 일으킨 이승만에 대해서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승만을 감형시켜 주었던 독립협회 창립 위원 법부 대신 권재형은 1903년 권중형으로 이름을 바꾸더니 1905년 독립협회 제2대 회장 이완용과 더불어 을사조약 체결에 찬성하여 을사오적(乙巳五賊)으로 역사에 오욕을 남기고 말았다.
제3대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마저 친일파가 되고 말았다. 이로써 독립협회 역대 회장 모두가 친일파였다.
일본으로 피신했던 전 초대 독립협회 회장 안경수는 대한제국에 부임하던 일본 공사 임권조(林權助 하야시 곤스케)와 함께 일본 서부 유조선 주식회사 소유 장문환을 타고 1900년 2월 7일 인천항으로 입국하여 공정한 재판을 자청하였다.20
19일에 유생 이문화 등은 중추원에 안경수를 역모로 다스려야 한다고 글을 올렸고,21 21일에는 일본 공사관 서기관 국분상태랑(國分象太郞 코쿠분 쇼타로)이 외부를 찾아가 상인들이 상민청원서를 보내 안경수 사건 재판에 간섭하면 민란으로 규정해 군대를 동원하여 제압하겠다고 협박하였다.22 재판이 길어지자 6월 24일 재판관 이유인이 반역자는 누구나 죽일 수 있다는 옛 말을 들어 개인적으로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죽고 말았다.23 안경수도 친일파로 죽었다.
이로 보아 독립협회는 청에 맞선 독립과 러시아에 맞선 독립을 추구했을 뿐이지 일본에 맞선 독립은 목적이 아니었다. 독립협회의 친일적 정서는 이승만을 초기에 친일적 환경에 빠져 들게 했다.
러일전쟁 시기인 1904년 8월 9일 이승만은 30세의 나이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해 준 덕분에 석방되었다.24
문득 이승만의 감형이 이승만이 김구 시해범 안두희에게 베푼 감형 특혜와 닮았다.
김구 시해범 안두희는 1949년 8월 5일 종신형을 선고 받았으나 3개월만인 11월 국방장관 명령으로 15년형으로 감형 받고, 남침 이틀만인 1950년 6월 27일 잔형 집행정지로 가석방되고, 동년 7월 10일 국방장관 특별명령 4호로 포병장교 소위로 원대 복귀하고, 동년 9월에 중위로 진급하고, 1951년 3월 대위로 진급하고, 1952년 2월 15일 국방부 장관의 명령으로 잔형을 면제 받고, 동년 12월 25일 소령으로 진급하고, 1953년 2월 15일에 완전 복권되었다.
- 황성신문 1899. 12. 20 본년 음력 10월 15일 이승만 거포구인죄(拒捕敺人罪) 징역 종신 감 1등 15년. [본문으로]
- 황성신문 1900년 1월 11일 본년 음력 10월 23일 이승만 거포구인죄 징역 15년 감 10년. [본문으로]
- Robert Tarbell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Dodd Mead and Company 1954, 48쪽 Dr. Sherman immediately went to the American legation and, together with Dr. Horace Allen, the U.S. minister, called at the Korean Foreign Office to protest Rhee's arrest. They demanded his release on the grounds that he was serving as a temporary interpreter for an American physician, and according to existing agreements could not be arrested without previous notice being given. Negotiations proceeded for several weeks. To make sure that Rhee was not tortured in the jail, Mr. Stripling, the American adviser to the police department, made frequent visits to see him. It is possible that the efforts in his behalf might shortly have secured his release, but the Pai Jai students became impatient. 의사 셔먼은 즉시 미국 공사관에 가서 미국 공사 알렌 박사와 함께 외부에서 이승만 체포에 대해 항의하였다. 그들은 미국 의사에게 임시 통역사로 근무중인 그를 현행협정에 따라 사전 통고없이는 체포할 수 없으니 현지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협상은 몇 주간 진행되었다. 이승만이 감옥 안에서 고문 당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경무청 미국인 고문관 스트립플링이 자주 방문하여 그를 보았다. 그를 도우려는 노력들이 조금이라도 그의 석방을 담보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배재학당 학생들은 초조해졌다. [본문으로]
- 외부에서 미국 공사의 조회로서 이승만의 죄목과 재판 경과에 대해 법부에 조회 제1호 1899. 01. 17 現에 美公使의 來函을 接하온즉 內開 前日韓人 李承晩 以美國醫士通辯事 往于該處時 忽被捕捉 未曾煩瀆者 乃因確知該人 必爲早速明審後 自可辨白故也 今聞該人 已經裁判 幷明無罪 而迄未蒙放 故該僱主美國人等 切有關係于該人是否放送 是以特煩 另行査照 俾該囚勿被些害 卽速放還禱甚等因이온바 準此照會하오니 査照하오셔 該 李承晩의 裁判已經未經과 罪犯有無와 放釋與否 備細示明하오셔 以便作覆케하심을 爲要.議政府贊政外部大臣 朴齊純議政府贊政法部大臣 李道宰 閣下主任 交涉 局長 課長 大臣 協辦光武三年一月十七日光武三年一月十七日 起案 [본문으로]
- 고등재판소 보고 제7호 接한 內開 部訓令 第七號를 奉準內開 現接外部照會 第一號內開에 前日韓人 李承晩 以美國醫士通辯事 往于該處時 忽被捕捉 未曾煩瀆者 乃因確知該人 必爲早速明審後 自可辨白故也 今聞該人 已經裁判 幷明無罪 而迄未蒙放 故該雇主美國人等 切有關係於該人是否放送 是以特煩 另行査照 俾該囚勿被些害 卽速放還禱甚等因이온바 準此照會하오니 該 李承晩의 裁判已經未經과 罪犯有無와 放釋與否를備細示明하오셔 以便作覆케 할 事로 玆에 訓令하니 此를 依하야 施行事等因이온바 在囚 李承晩을 姑未審斷이옵기 玆에 報告하오니 査照하시믈 爲望等因이온바 據此査하오니 該 李承晩을 未經裁判하얏사온즉 罪犯有無도 亦難預揣이옵기 玆에 照會하오니 照亮하심을 爲要.議政府贊政法部大臣 兪箕煥議政府贊政外部大臣 朴齊純 閣下光武三年一月二十三日光武三年一月二十二日 [본문으로]
- 이달 이튿날 보조금 낸 사람들은 안경수 십원, 이완용 오백원, 김가진 십원, 이윤용 백원, 김종한 삼십원, 권재형 삼십원, 독립신문사 삼십원, 고영희 이십원, 이채연 이십원, 현흥택 오십원, 이상재 십원, 김각현 십원, 이근호 이십원, 남궁억 십원, 조성협 십원 독립신문 1896. 07. 21 독립협회에 보조금 수립 왕태자 전하께서 하사 천원, 김준하 이원, 김세정 이원, 조종서 십원, 이준영 오원, 합계 일천십구원 이라더라. [본문으로]
- 독립신문 1896. 07. 14 독립협회 보조금 새로 수립한 것 미국 의원 커들너 부인 십육원 수하동 관립 소학교 학도 등 이원 도합이 십팔 원. [본문으로]
- 독립신문 1898. 06. 05 돌아간 일요일 독립 협회 회원들이 모여 토론 하는데 본 회에 명예 회원 일본 의사 고하송지조씨가 연설 하기를 내가 일본 사람으로 대한 독립 협회 회원에 들었으니 여러 회원네가 혹 나를 의심 하실 듯 하기에 이에 설명 하오니 그리들 아시오 내가 근본 일본 사람으로 대한에 와서 사오년 수토를 먹으니 일본은 곧 나의 제일 고향이요 대한은 곧 나의 제 이 고향이라 내가 어찌 대한을 한갖 남의 나라로 여기리요 기간에 듣고 본즉 충의 있는 제공께서 나라를 위 하여 자주 독립의 기초를 견고하게 하시고 백성을 위 하여 문명 부강의 사업을 면려토록 하시기에 내 비록 외국 사람일지라도 흠앙 하는 마음으로 이 회 중에 들어 왔소 지금 동서양 세계 형편을 보건대 서양 호랑이들이 서양서는 다 먹고 더 먹을 것이 없는 고로 우리 동양으로 와서 큰 고기 덩어리를 보고 욕심을 내어 삼켜 먹으려고 입에 침을 질질 흘리는 모양이니 동양 형세가 어찌 위급지 아니 하리오 대한 일본 청국은 동양에 가장 중요한 나라로 인종이 또한 같은 동포 형제라 청국이 망 할 지경이면 대한과 일본이 합력 하여 구원 하겠고 일본이 망할 지경이면 대한과 청국이 합력 하여 구원 하겠고 대한이 망 할 터이면 일본과 청국이 구원 하겠으니 비유하건대 한 동리에 세 사람의 집이 있는데 한 사람의 집에서 불이 나거나 도적이 들거드면 그 이웃에 사는 두 사람의 집에서 어찌 무심히 문만 닫히고 있어 그 한 사람의 집에서 화재와 적환을 혼자 당 하게 하리오 그러 한즉 불가불 한 일 청 삼국 인민이 이제는 잠들을 깨고 모두 동심 합력 하여 서양 호랑이의 환 될 것을 방비 하여야 옳겠소 하였다니 외국 사람도 충의 있는 이는 남의 나라에 와서도 위국 애민 하는 목적에 이렇게 열심으로 향 하는데 하물며 대한 신민 되고야 우리 나라의 자주 독립 하는 권리와 우리 동포 형제의 문명 부강 하려는 사업에 어찌 추호인들 범홀히 여기리요 아무쪼록 일심 애국 하여 세계 만국의 공등 대접을 받도록 힘들을 쓸지어다. [본문으로]
- 官報 光武 3年 12月 19日, 法部大臣 權在衡, 本年 陰曆 10月 11日 謀叛·强盜·殺人·通奸·騙財·竊盜 6犯 外에는 各一等을 減하라는 特赦詔勅을 欽奉하여 平理院 및 漢城府裁判所의 罪囚 中 減等者 21名을 開錄 上奏한 바 允許하다. 平理院所管 懲役罪人은 黃萬己·朴允大·宋一會·韓春植·李寅植·金昌洙·李承晩·趙錫求·尹成汝·崔星振·千長玉·文聖彦 等 12名이며 漢城裁判所所管 懲役罪人은 金守鉉·李行栢·金老味·安命洙·李順千·蔡奎夏·林東根·安光善·千在淳 等 9名이다. [본문으로]
- 官報 光武 3年 12月 30日, 本年 陰曆 10月 23日의 特赦詔勅에 따라 이에 앞서 本年 陰曆 10月 11日의 特赦詔勅에 依하여 各減一等한 바 있는 平理院 所管 懲役罪人 李承晩 等 12名과 漢城府裁判所 所管 懲役罪人 金守鉉 等 9名을 다시 減一等하다. [본문으로]
- 독립협회 윤고 1896. 10. 19 본회에서 매일 2도식 잡지를 편찬하되 본국역대의 개혁소유와 우내만국의 치난흥폐와 고금 정치의 만국일치하던 사적을 증명하고 수사논설하며 본회 회원과 각부 부군과 재야 유지 제공에게 정람하여 본회의 애국애민의 뜻과 유질유문의 의를 표명하고 차기 원지의 상당한 가치를 수하야 편찬 인쇄는 소비를 구제하고 본회의 공용을 충보코져하야 자의 통보하오니 조량하심을 망함. 건양원년 10月 19日 회장 안경수, 위원장 이완용, 위원 김가진, 김종한, 민상호, 이채연, 권재형(權在衡), 현흥택, 이상재, 이근호, 이재정, 유기환, 박기양, 김승규, 간사원 송헌빈, 이건호, 남궁억, 심의석, 정현철, 팽한주, 오세창, 이근영, 현제복, 문태원, 이계필, 구연소, 박승조, 박용규, 홍의관, 안영수, 서창보, 이종하. [본문으로]
- 독립신문 1896. 07. 04 이 일에 발기인은 안경수 이완용 김가진 이윤용 김종한 권재형 고영희 민상호 이채연 이상재 현흥택 김각현 이근호 남궁억 제씨들이 시작 하였고 회석 의장 겸 회계장은 안경수씨가 되고 위원장은 이완용씨가 되고 위원은 김가진 김종한 민상호 이채연 권재형 현흥택 이상재 이근호 제씨가 되고 간사원은 송헌빈 남궁억 심의석 정현철 팽한주 오세창 현제복 이계필 박승조 홍우관 제씨가 되고 이달 초이튿 날 보조금 낸 사람들은 안경수 사십 원 이완용 백원 김가진 십 원 이윤용 백원 김종한 삼십 원 권재형 삼십 원 독립 신문사 삼십 원 고영희 이십 원 이채연 이십 원 현흥택 오십 원 이상재 십 원 김각현 십 원 이근호 이십 원 남궁억 십 원 조성협 십 원 도합이 오백 십 원이더라 여기 모였든 사람들에 열심을 본 받는 사람들이 있으면 다소간에 심지어 막 벌이꾼 까지라도 낼듯 하고 돈 낸 사람의 이름은 아직 신문에 내고 또 목패에 써서 우선 독립문 짓는 데로 붙일 터이요 만일 돈이 한 이만 원 들어 오거드면 크게 석탑을 모으고 석탑에다가 이름들을 새길 줄로 의논이 되었다더라 누구든지 조선 독립을 경사로이 여기고 대군주 폐하의 성덕을 감격히 여기고 문명 진보 하는 것을 사랑 하는 사람들은 다소간에 보조금을 속속이 조선 은행소로 보내기를 우리는 바라노라. [본문으로]
- 독립신문 1896. 12. 01 지나간 토요일 저녁에 독립신문 사장이 조선 관인들을 청하여 저녁을 즐겁게 소일하였는데 온 손님들은 내부대신 박정양씨, 군부대신 민영환씨, 농상공부대신 이윤용씨, 외부대신 이완용씨, 안경수씨, 김가진씨, 외부협판 고영희씨, 법부협판 권재형씨, 농상협판 민상호씨, 한성판윤 이채연씨, 제공이 참석 하였더라 [본문으로]
- 독립신문 1896년 09. 03 팔월 삼십일일 중추원 의관 안경수씨와 군부 대신 이윤용씨와 협판 민영기씨와 농상 협판 이채연씨와 법부 협판 권재형씨가 독립문 모든 간사원과 장공들을 데리고 새문 밖 모화관에 나가서 독립문 세울 터와 독립 공원지 만들 땅과 독립관 건축 할 곳을 보고 마련하여 예산을 한즉 돈이 부족이 되오니 이런 큰 경사에 외국 사람들도 기뻐 하거늘 하물며 조선 인민이야 누가 기뿐 마음이 없으리요. 그런즉 조선 전국 인민들은 물론 빈부 귀천 남녀 노소 하고 돈 다과를 물론 하고 보조금들을 내기를 바라오. 관민간에 말로만 임금과 백성을 사랑 한다고 하니 이런 때에 어디 애군 애민 하는 마음을 보겠노라. [본문으로]
- 독립신문 1896. 07. 04 후세라도 내외 국민들이 이 독립문과 독립 공원지를 보거드면 건양 원년에 누구 누구가 돈을 얼마 얼마를 내야 전국 인민을 위하여 양생과 운동 하는 데를 만들어 놓고 조선 자주 독립 한 것을 경사로이 여겨 영생 불멸할 표를 하였다고 할 터이니 물론 누구든지 조선 인민이 되어 임금을 존경하고 국기를 높이 달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다소간에 추렴을 내야 대정동 조선 은행소에 있는 안경수씨에게로 보내거드면 안경수씨가 신문사로 보조금 낸 사람의 이름과 돈 수효를 기별 하여 매일 광고 할 터이요 역사는 속히 시작 한다고 하더라 누구든지 이 사연을 알 것 같으면 자기 형세대로 보조금을 낼 터이요 이 사업이 잘 되거드면 추렴 내였던 사람들은 다 세계에 애국 애민 하는 사람들로 나타날 터이니 이일 하나를 가지고 보거드면 조선도 차차 공심들이 생겨 동포 형제들을 위 하여 무슨 사업이든지 하려는 뜻이 보이지 아니 하오. [본문으로]
- 독립신문 1898. 03. 05 돌아간 일요일 오후에 세 시에 독립 협회 회원들이 의례히 독립관에 모여 회를 열었는데 회장 안경수 부 회장 이완용 서기 정교 제씨는 임기가 찬 고로 다 면림하고 다시 투표 하여 회장 이완용, 부회장 윤치호, 서기 남궁억, 회계 이상재, 윤효정, 제의 이건호, 정교, 양홍묵 제씨로 택정 하고 절영도 일절로 기시 외부 대신 서리 민종묵씨에게 편지로 물어 보자는 의논들 하노라고 전전 일요일에 결정한 긴 담뱃대 금하는 것이 위생에 요긴하다는 문제는 이미 경무청에서 먼저 금단 한 것인 고로 이 문제 토론은 치지하고 이 다음 일요일에 토론 할 문제는 대한국 토지는 선왕의 간신하고 크신 업이요 이 만 인구의 사는 땅이니 한자와 한치라도 다른 나라 사람에게 빌려 주면 이는 곧 선왕의 죄인이요 이천 만 동포 형제의 원수로 결정한다는 문제를 가지고 강론들 할 터이니 많이 와서들 들으시며 회원들도 싣고 없는 이들은 다 와서 참례를 하시오. [본문으로]
- 독립신문 1898. 07. 15 하루는 정위 김원계씨가 이학균씨를 찾아 보고 말하되 우남규씨를 보러 갔더니 우씨의 말이 김기황씨의 소개로 안경수씨를 보러 간즉 안씨가 세상 일이 잘 되지 아니 하고 필경 박영효씨가 나오면 무슨 변은 있을 터이니 다른 사람의 손에 이 정부가 변 하면 우리는 무료 하게 될 터이니 우리가 여럿이 합력 하고 우리 나라 옛 전례를 의지 하여 대황제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께 전위 하시고 황상 폐하께서는 태상황으로 안녕히 계시게 하자 하며 궐내 지도 한 장을 내어 놓고 각 처 문호와 파수 유무를 자세히 가르치며 가로되 회극문에만 군사를 세워 두어 잘 막았으면 황제 폐하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하시지 못하실 터이요 우리 내응은 이용(龍)한 이남회 김재은 이충구 제씨라 하더라 한즉 김원계씨는 이 말을 듣고 모르는 체 할 수가 없어서 자기의 상관 이학균씨에게 보고 한즉 이학균씨는 이러한 중대한 말을 듣고서야 덮어 두었다가 만일 일이 있는 지경이면 지정 볼고한 죄는 면하지 못할지라 재삼 생각하되 바로 말하는 길 밖에는 없는고로 기시 군부 대신 민영기씨를 보고 일장 들은 말을 가감 없이 보고 한즉 민씨가 이학균씨를 데리고 황제 폐하께 들어 가서 전후 사연을 품달 하였더니 며칠 아니 되어 옥사가 일어난즉 만일 우남규씨나 김기황씨를 놓치면 형적없이 고변한 죄를 이학균씨가 무릅쓸 터인고로 곧 기시 경무사 이종건씨에게 편지하여 우김앵씨를 증거인으로 잡아 가둔 후에는 이학균씨는 자기 할 도리와 발명은 다 하였은즉 이 옥사에는 조금도 상관 없다 하더라. [본문으로]
- 독립신문 1899. 11. 17 평리원 재판장 조윤승씨가 법부에 보고한 내개에 피고 신석린의 안건을 겸사의 공소로 말미암아 심리한즉 신석린이가 일본에 도망하여 있는 안경수와 윤효정이가 도망한 이후로 여러 번 서신을 통한 것은 신석린의 발명하는 말이 다 이 한헌 따름이라 이르나 그러나 음력 보년 팔(八)월 十六일에 안경수에게 보낸 편지 사의를 자필로써 들이는데, 가로되 근일 형편은 한결로 전일과 같다 하였고, 그 가로되 제일 권력 있는 사람은 아무 아무라 하였고, 그 가로되 태감의 사정인즉 성의가 비록 十분이나 해촉 하셨으나 좌우에서 시의 하는 무리가 만 하여 능히 뜻과 같지 못 하다 이른 것은 다만 전설을 이행민에게 얻어 들은 것이라 하였고, 그 가로되 기태(琦台)도 또한 내감을 위하여 주선 한다 이르고, 이른 것은 짐짓 말을 하여 안경수의 뜻을 탐지하고자 함이라고 이르나, 그러나 이것인즉 스스로 변백 하는 증거가 없고, 본국 형편을 타국에 통기 한 것은 그 사실이 신석린의 공초가 명백 하기로 신석린을 대전 회통 금제조에 본국 사정을 누설 하는 자 율에 비추어 형률 명례 제 十조를 의지하여 태 一百 유 三년에 처한다 하였기로 신석린을 원의률에 의지 하여 처판 하는 뜻으로 법부 대신이 상주하여 봉지내에 의주하라 하옵셨더라. [본문으로]
- ①독립신문 1898. 08. 30 독립협회 임원 중에 회장과 부회장과 두 서기와 회계 하나와 사법위원 제인과 제의 삼인과 경찰위원 제인과 사찰위원 제인이 다 임기가 찬 고로 돌아간 일요일에 회중에서 공의 하고 선정 하였는데 회장은 윤치호씨요, 부회장은 이상재씨요, 서기는 박치훈, 한만용 양씨요 회계는 이일상씨요, 그 남머지 임원은 돌아오는 회에 다시 공의 선정 한다더라. ②독립신문 1898. 09. 06 독립협회 사법위원이 임기가 찬 고로 다 해 하고 그 대에 이채연, 남궁억, 정교 삼씨로 돌아간 일요일에 사법위원을 선정 하였다더라. [본문으로]
- 황성신문 1900. 02. 10 傳說을 聞한즉 再昨年夏間에 日本으로 亡命하얏던 安駉壽氏가 長門丸을 搭乘하고 本月七日에 仁港에 到泊한 後審辦을 請하기 爲하야 自現할 次로 法部大臣及警務使에게 書札을 送하고 更히 再昨夜에 電報하되 明日京仁鉄道의 第一次發行汽車를 乘하고 入京하겠노라 함으로 警廳에서 醫務官朴潤秀氏及巡檢十名을 永登浦停車塲까지 送하고 또 總巡巡檢十三人을 加派하야 安氏를 護押하야 昨日上午十一時半에 入京하야 警務廳에 入한 後巡檢房에 拘留하얏는데 明日아니면 再明日에는 平理院으로 移送하리라고들 하더라. [본문으로]
- 황성신문 02. 19 安駉壽氏가 不理院에 人囚하얏슴에 平服한 自本人 數名이 隨護하더니 向卽撤去하고 政府에셔 巡檢 二十名과 兵丁 數十名을 加派守護하는데 傅聞한즉 平理院에셔 巡檢을 派送하야 流配한 閔泳綺氏 等을 裁判次로 押上한다하고 儒生 李文和氏 等은 中樞院에 獻議하야 安氏를 逆律에 旅하자 하얏더라. [본문으로]
- 황성신문 1900. 02. 21 전설을 들은즉 나유석, 원직 등 제씨가 안경수씨 사건에 대하여 평리원에 무슨 청원한바 있더니 경문한즉 일공관 서기관 국분씨가 외부에 가서 상민청원서를 논박하여 물리치며 왈 안씨 재판은 국법이 있거늘 상민들이 중추원을 따르며 간섭함은 무정부와 다르지 않는지라 만일 금하지 아니하면 이와같은 민란은 병사의 위엄으로써 억제하여 다스리겠노라 하였다더라. [본문으로]
- 고종실록 1900. 05. 28 평리원재판장임시서리 경무사(平理院裁判長臨時署理警務使) 이유인(李裕寅) 등의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바라건대, 신들은 듣건대 옛말에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 고 하였으며, 또 난신 적자(亂臣賊子)는 사람들 누구나 죽일 수 있다 라고 하였습니다. 춘추(春秋) 시대 이후로 역적 무리들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아! 애통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을미년(1895)의 변란은 천지가 열린 이후 만고(萬古)에 없었던 극도로 흉악하고 참혹한 일입니다. 우리 대한(大韓)의 신민(臣民)으로 당일에 같이 죽지 못하고 질긴 목숨이 구차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홍릉(洪陵)을 쳐다볼 때면 피눈물이 눈앞을 가리며 초목도 슬퍼하고 하늘의 태양도 빛을 잃었습니다. 신들이 울분을 참고 원통함을 품은 채 울음소리를 삼키면서 가슴을 끓이며 밤낮으로 고대한 것은 기어이 흉악한 역적을 붙잡아 머리를 자르고 간을 도려내어 함께 통곡하면서 위로는 하늘에 계시는 우리 황후의 밝은 영혼에 고하고 아래로는 전국 동포들의 망극한 슬픔을 위로하는 것이었습니다.아! 우리 조종(祖宗)의 영령과 천지의 신명께서 크게 분노하여 날뛰던 물고기가 결국 통발 속에 들어오는 날이 있게 되었습니다.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안경수(安駉壽)와 권형진(權瀅鎭)은 자수한다고 핑계대고 태연히 귀국하였으니 혈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잠시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신들은 모두 잡아들이고 신문하는 직임과 사법(司法)의 임무를 맡고 있으니 절치부심하면서도 규례에 구애되어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번 죄인을 심리하기 시작하자 하루를 보내는 것이 한 해 같았습니다. 지금 두 역적들이 전후로 공모한 죄상이 자수하여 공초한 데서 모두 드러났으니 실정을 이미 알아냈고 죄안도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세상 천하에 어찌 어머니를 죽인 원수를 절차를 기다려서 복수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분통이 터져서 미처 아뢰지 못하고 마음대로 교형(絞刑)에 처하는 경솔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들은 제 손으로 복수한다면 죽더라도 광영이라고 여겨서 외람됨을 가리지 않고 거행하였으니, 법의 처분을 받기 위해 서로 와서 대죄(待罪)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천지 부모와 같으신 성상께서는 신들이 격식을 위반한 것과 관련하여 속히 죄를 다스리시어 나라의 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법관(法官)이 법을 위반하였으니 어찌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본문으로]
-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81쪽 이승만은 러일전쟁 와중에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도움으로 30세 되던 1904년 8월 9일 석방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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