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다. <5편 >

허구인물 전우치 2015. 8. 21. 22:08

5. 김두한 생모와 외조모가 청산리 전투 때문에 고문 당해서 1925년에 죽었나?

 

김두한은 청산리 전투가 1925년에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청산리 전투는 5년 전인 1920년에 발생했다.

 

1)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청산리 전투 때문에 고문 당했나?

 

김두한은 자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은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며, 원인은 청산리 전투후 일본 경찰에 어머니가 끌려 가셨던 탓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두한은 가지도 않은 만주에서 귀국한 후에 청산리 전투가 일어났다며 시간까지 착각하고 있다.

 

"짧은 며칠 간을 보내고 우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 후 청산리 대첩이 있은 후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일경에 투옥되었다."

- 모란강 역두(驛頭)에서 부자 상봉,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 김두한 회고기 1963.

 

"세계 전사상 희귀한 청산리 대첩의 전과를 올리셨다. 이를 갈던 일본 경찰은 끝내 나의 외조모님과 어머님마저 투옥시켜 어린 나를 고아로 만들어 거리로 내몰았다." 

- 김두한, 예비 검거된 외할머니와 어머니,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 김두한 회고기 1963.

 

김좌진 가족 중에서 경찰에 잡혀 간 사람은 친동생 김동진 밖에는 없다.1920년 주비단 사건 연루 혐의로  수사를 받고 다음 해인 1921년 12월에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29년부터 형 김좌진 장군과 함께 만주 중동현에서 한족연합회 결성에 참여하여 활동을 하다가 1937년 7월 7일 만주에서 일본군에게 잡혀 끌려와 다음해 3월에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김좌진의 처 오숙근과 딸 김옥남은 일본 경찰의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고 기차 타고 만주로 갔다.

 

김좌진은 1917년 9월 만주에 도착하자 얼마 후부터 수 차례 오숙근에게 농사 지을 돈을 마련해서 만주로 오라고 편지를 보냈다. 이에 오숙근은 1918년 가을 시동생 김동진과 같이 홍성을 떠나 서울에 도착했다. 하지만 김동진이 병을 얻고 또한 처가 사망하여 낙향하자 오숙근은 서울에 머물러야 했다. 다음 해인 1919년 봄에 만주로 들어가려 했으나 3.1운동이 일어나 교통 통제가 심해 도로 서울에 주저 앉았다. 이후 오숙근은 서울에서 활동하던 김좌진의 9촌 조카 김준한을 만주에서 함께 살자고 설득했다. 1919년 10월에야 김준한을 길잡이 삼아 딸 김옥남과 함께 만주에서 김좌진과 상봉했다.(김준한 예심신문조서, 조선총독부 재판소 예심계 1921.10.26)  김옥남은 병에 걸려 16세의 나이로 1926년 김좌진 곁에서 사망했다.(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김성숙 장건상 정화암 이강훈의 독립투쟁, 민음사 2005.12.10)

 

김준한의 경우에도 1920년 주비단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수사를 받고 다음 해인 1921년 12월에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일상적인 삶을 살던 김두한의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잡아다 고문했다는 주장은 허구다. 

 

2) 김두한의 어머니는 1925년 사망했나?

 

"내가 일곱 살이 될 때 일경(日警)은 나의 외조모와 어머니를 예비 검속했다."

- 김두한, 서문,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 김두한 회고기 1963

 

"내가 7살 되던 해로 기억한다. 나는 동해안 어느 나루터에서 (지금의 강원도 속초 지방) 우리들을 호송차 밀파된 독립군 병정(兵丁)을 따라 고깃배와 밑창에 숨어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닿았다. 며칠을 기차로 여행했다. 모란강 역에 닿으니 중국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고 생전 처음 서양 사람들을 많이 보았는데 나는 어떤 중국인 복장을 한 거구의 사람 품에 안겼다. 그 분이 내 아버지 백야 김좌진 장군이었다.나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버지를 쉽게 식별해 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혈륜이란 무서운 것이다. 나를 번쩍 들어 품에 안으신 아버지께서는 마차에 외할머니와 나를 태우고 깊숙한 산중으로 몇 십리나 달렸다. 짧은 며칠 간을 보내고 우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 후 청산리 대첩이 있은 후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일경에 투옥되었다. 나 소년 김두한이 다리 밑의 신세가 되어야만 했던 기구한 수난의 역정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고난은 유일한 친구이므로!"

- 김두한, 모란강 역두(驛頭)에서 부자 상봉,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 김두한 회고기 1963.

 

"어머니와 할머니가 예비검속을 했어요. 어머니 할머니가 안계시니까 여덟 살 먹은 놈이 완전 거지가 된 거죠."

- 제4화 부친 김좌진장군을 만주에서 만나고 온 얘기, 노변야화, 동아방송 1969.10.17

 

"공지영: 아버지에 대한 선입견이나 오해 중 바로 잡고 싶은 것이 있다면? 김을동: 아버지가 8살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면서 다 잃으셨어요."

- 김을동,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2006. 06. 14.

 

"김현정: 그런데 고아로 알려졌었는데요? 김을동: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를 낳아준 어머니는 서울에서 살다가 8살 때 돌아가셨어요."

- 김을동, 90년 도올 글 이슈화 싫어 참아왔다, CBS 김현정의 뉴스쇼, 2011. 11. 04

 

일제 강점기 때 감옥에는 한 번도 안갔어도 그래도 경찰서 유치장에는 몇번 들락거렸던 조폭 김두한은 정작 예비검속이 뭔지도 모르고 있다. 아니면 거짓말 한 것이다. 예비검속은 미리 조폭 등 대상자 명단을 작성해 놓고서 금지된 행동을 할 것 같으면 미리 체포해서 경찰서 유치장에 3일간 가뒀다가 풀어 주는 것이다. 그래도 안심이 안되면 다른 법률을 걸어 며칠 후에 또 체포해서 유치장에 3일간 가두는 것을 반복하기도 하였다. 필요한 시기에 대상 인물의 행동에 미리 제약을 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실시하였다. 요즘 개념으로 하면 영장 없이 긴급체포하여 48시간 동안 유치장에 가둬 둘 수 있는 법규를 악용한 것과 같다.

 

하지만 김두한이 말하는 생모와 외조모의 경우는 예비검속이 아니라 범죄 혐의를 특정하여 정식으로 체포한 경우에 속한다. 그런데 생모와 외조모는 특정 범죄 혐의가 없었기에 체포당할 일이 없었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에는 연좌제가 없었다. 연좌제는 해방후 독재자 박정희와 전두환이 써먹던 악습이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때는 피를 나눈 부자지간이라도 누구는 독립군이 되어 일본 경찰에게 쫓기고, 누구는 친일파가 되어 권력을 누리며 살 수 있었다.

 

김두한 집안은 내부적으로는 김두한의 주장처럼 박계숙 어머니설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기생 김계월 어머니설에 대해서도 김두한이 8살 때 사망했다고 말하면서 외부적으로 이쪽 줄도 놓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허구의 인물 기생 김계월이 유일하게 김두한이 김좌진을 만주에서 만났다는 주장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다.

 

 

3) 어머니 박계숙의 중매로 1944년에 결혼한 김두한

 

김을동의 주장에 의하면 김두한이 여덟살 때 죽었다던 어머니는 박계숙이라는 이름으로 1944년 봄에 김두한을 이재희와 결혼 시킨다.  실제 호적을 보면 김두한과 이재희는 혼인신고를 3년이나 뒤인 1947년 7월 25일에 하였다.

 

"김두한의 화려한 여성편력에도 그의 마음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던 여인. 본처인 이재희 여사(87년 작고)다. 두 사람은 김좌진 장군의 부인이자 김두한의 어머니인 박계숙 여사의 중매로 만났다. 아들이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자 박 여사가 직접 나선 것이다. 어느 날 아들을 보기 위해 종로를 찾은 박 여사는 "집안의 대는 이어야 한다. 명망가 집안의 참한 규수가 있으니 이제 가정을 꾸려라. 남자는 결혼을 해야 진짜 어른이 되는 거다." 박 여사가 말한 참한 규수가 바로 이재희씨였다. 이씨는 전주이씨 효령대군 18대 손으로 조상 대대로 서울에 살았다. 안동 김씨 후손임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김두한은 결혼할 상대가 가문있는 집안의 처자라는 사실에 얼굴도 모른 채 부모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두사람은 1944년 봄에 결혼했다. 김두한의 나이 27세였고, 이재희씨는 21세였다. 그러나 말이 부부지 김두한은 집보다 밖에 머문 경우가 훨씬 많았다. 이씨는 안동김씨의 며느리로 4대 봉사까지 지냈지만 김두한은 몇 년간 집에 안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자연히 가정 경제는 이재희씨가 책임져야했다. 이씨는 삯바느질로 어렵게 생활하며 딸을 키우고, 남편을 내조했다. 당시 삯바느질은 기생들을 상대로 해야 돈을 벌 수 있었지만 이씨는 "양반집안 며느리가 기생의 옷을 바느질 할 수는 없다"고 고집, 집안 살림은 더욱 곤궁했다."

- 박종진, 김두한, 그를 사랑한 부인과 여자들, 레이디경향 2002년 12월호

 

어느 날 김좌진 장군의 부인이자 김두한의 어머니인 박계숙 여사가 아들을 보기 위해 종로를 찾아왔다. 어른이 된 아들이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자 혼례를 올리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박계숙 여사는 혼인을 서둘렀다.

"너도 이제 머리를 올릴 나이가 됐다. 아무리 친구가 좋다고 해도 집안의 대는 이어야하지 않겠니. 명망가 집안의 참한 규수가 있으니 너도 이제 가정을 꾸려라. 남자는 결혼을 해야 진짜 어른이 되는 거다."
박계숙씨가 말한 참한 규수가 바로 이재희씨였다.

이재희씨는 효령대군 18대 손으로, 조상대대로 서울에 살았다. 그 때는 지금처럼 연애 결혼이라는 게 거의 없었다. 대부분 부모님이 정해준 배필과 결혼하는 게 상례였다. 박계숙씨의 소개로 알게 된 김두한과 이재희씨는 곧 결혼식을 올리고 신접살림을 차렸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김을동씨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늘 바쁜 사람이었어요. 집에 머무는 경우가 드물었죠. 집에 들어와도 잠시 잠을 주무시다가 곧 일어나서 다시 외출을 하셨죠. 어렸을 때는 왜 그렇게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는지, 서운한 감정을 갖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고 저를 키우기 위해 삯바느질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만저만한 고생이 아니었죠. 그래도 어머니는 묵묵히 아버지를 내조하고 당신의 자리를 지켰어요.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어머니를 고생시킨다고 생각해 섭섭한 마음이 더 들었던 모양입니다."

- 취재 정연진, 사진 이명헌, 장군의 손자 김경민이 말한 내 아버지 김두한, Sa Vie(싸비) 2002년

 

 

결론적으로 박 상궁 딸 박계숙의 무덤도, 기생 김계월의 무덤도 모두 발견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