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다. <2편 >

허구인물 전우치 2015. 8. 20. 21:00

2. 청진동 기생 김계월이 김두한의 어머니인가?

 

기생 김계월이 김두한의 어머니라는 최초의 주장은 청산리 전투 5년 후인 1925년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하였다.

 

"김좌진과 김계월 8년만에 이역에서 해후 오랫동안 서로 그리워 하던 정랑 정부가 서로 만났다. 영고탑(寧古塔)에 근거를 두고 노령방면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과격파의 수령 김좌진(金佐鎭)은 자기의 정부(情婦) 전한성권번 기생 김계월(金桂月)(27)과 및 그 사이에 낳은 김두한(金斗漢)(8)을 데려가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써보았으나 국경의 경계가 엄중하여 오늘까지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바 이번 김계월도 정랑 김좌진을 생각하고 항상 민울히 지내던 중 지난 9일에 자기 모 박씨(朴氏)와 자식을 데리고 가산도구를 방매하여 여비를 만들어가지고 경성역을 출발하여 무사히 목적지에 이르러 8년만에 부부와 부자가 반갑게 대면하게 되었다더라." - "김좌진과 김계월, 8년만에 이역에 해후", 매일신보 1925. 9. 15.

 

이후 기생 김계월이 김두한의 어머니라는 기사는 김좌진이 암살당한 1930년의 4편과 1932년의 1편으로 모두 5편이 실렸다. 매일신보가 1930년 2월 13일자, 중외일보가 1930년 2월18일자와 3월 16일자, 조선일보가 1930년 3월 18일자, 중앙일보가 1932년12월 23일자에 각각 기생 김계월의 아들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금번에 피살된 김좌진 유족으로는 모 이씨(68), 처 오씨(43), 제 동진(34), 자 두한(11)의 네 사람이 있는데 어머니와 아내와 동생은 그가 피살된 산시 근처에서 거주하고 있다 하며 그의 아들 두한은 생모인 전조선권번 기생인 김계월과 함께 어디 가 있는지 이삼년째 행방불명이 되어 있다 한다." - 매일신보 1930.2.13

 

"짧은 로맨스 일편. 이제 붓대를 잠깐 돌리어 그가 만주로 망명하기 전의 생활의 일단을 소개하건대 그가 삼년동안 철창생활을 마친 뒤로부터 광복단 사건이 폭로되어 만주의 거치른 길을 밟을 때까지의 몇해 동안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실의 시대였다. 얼마간 있던 가산은 그동안 학교와 고아원 등 공공사업에 송두리채 다 집어 넣고 늙은 어머니와 그의 부인을 데리고 시내 중학동 어느 삭월세 집을 빌려 가지고 간구한 살림을 몇해 계속 하였다고 한다.

이 동안에 있어서 그는 한편으로 고달픈 생활을 하는 반동으로 굳은 지조와 무쇠 간장을 가진 무골한으로서의 그에게도 청춘이 청춘인지라 사랑을 속살거린 짧은 로맨스 한편을 남겼다. 그러나 이 역일장춘몽 그 주인공은 당시 청진동에 살든 김계월이란 기생이었으니 종로 네거리에서 법석대던 사람의 물결이 흩어지고 고요한 밤 공기가 장안의 거리를 싸고 돌 때에 그는 동지들의 까다로운 눈을 피해가면서 홍등의 그림자를 좇아 청진동 뒷골목으로 애인의 집 뒷문을 두드린 적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 중외일보 1930.02.18

 

이 기사들의 공통점은 항상 김계월이 기생임을 강조하고 있다. 더구나 정부(情夫)는 남편이 아니면서 정을 두고 깊이 사귀는 남자, 정랑(情郞)은 남자가 아내 이외에 정을 둔 여자라는 뜻으로, 이는 불륜임을 말한다.

 

우선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고 최초로 주장한 매일신보의 기사는 내용이 서로 상충한다. 매일신보는 1925년 김두한의 나이를 8세로 기록하더니 1930년에는 11세로 기록한다. 시간은 5년이 흘렀는데 매일신보에서는 김두한은 겨우 3살 밖에 나이를 더 먹지 않았다. 

 

중외일보는 김좌진이 1917년 광복단(대한광복회) 사건에 관여했다고 주장해 놓고는(1930.02.18) 한달 뒤에는 김좌진이 세상을 포기하고 놀다가 기생 김계월과 바람이 났다고 말을 바꾼다.

 

"김계월과 김좌진 그가 서로 밀월의 인연을 맺기는 지금으로부터 십오년전의 일이었으니 그해 계월은 경성 다동권번에 기적을 두고 있었고, 김좌진 그는 환경에 불만을 가지고 세상 일은 내가 알바가 아니라는듯이 돌아 다니며 놀던 해이었으며, 지금 있는 두한 소년도 그때 두 사람의 정겨운 수확이었다."

- 중외일보 1930.03.16

 

더구나 이 기사에서 김좌진이 만주로 떠나기 직전 몇 년간 어머니 이중규와 처 오숙근과 함께  서울 시내 중학동에서 삯월세 생활을 했다고도 주장하였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 무렵 김좌진의 노모와 처는 홍성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김좌진 역시도 홍성을 기반으로 광복회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17년 9월에 만주에 들어 간 김좌진이 농사 지을 돈을 마련해서 오라는 편지를 계속 부치자 오숙근은 1918년 가을에서야 만주로 가기 위해서 시동생 김동진과 함께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하였다.

 

자기 집 노비들을 풀어 주고 전답 판 돈도 나눠 주고 호명학교를 세우고 대한광복회에 가입하는 등 나름대로 출사표를 던진 지사가 생활이 어려운 3패 기생을 꼬드겨서 생활비도 안 주고 기둥서방처럼 기생이 자는 문을 기웃거리면서 색이나 탐한다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이다. 당시 김좌진은 만주로 떠날 차비도 없을 정도로 극도의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더욱 기생과 정분이나 나눌 여유로움은 없다고 봐야 한다.

 

"강도에 성명하용? 돈 받자 결의형제. 그러나 자기의 넉넉하던 가산도 그리저리 다 없애버리고 떠날 여비까지 없게 되었음으로 전라도 모처에 가서 돈 삼천원을 변통하여 가지고 그의 활동의 대부분을 남겨 놓은채 만주로 향하여 떠나셨다는데 그때 목도한 사람의 말을 들으면 생면부지 남의 집에 들어가 인사도 없이 돈 삼천원을 내라하매 주인이 놀라 『당신이 누군데 무엇에 쓰려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는 태연한 기색으로 『강도가 돈 달라는데 용도는 알아 무엇하며 성명을 물어 무엇하느냐』고 호통을 하였다. 주인이 무엇에 눌리었는지 그의 행동의 비범함에 맘이 났든지 현금 삼천원을 내어 놓으매 그제야 그는 자기가 김좌진이라는 것과 이 돈을 결코 헛되이 쓰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결의형제를 한 후 유유히 그 집을 나선 일도 있다 한다." - 동아일보 1930.02.15

 

1918년의 3천원은 어마어마하게 큰 돈이었다. 1925년 일어난 고소 사건을 보면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성복리 16,400평짜리 땅이 시가 8천원이었다.(미성년자제를 유인해 부정이득과 호유, 동아일보 1925.11.30)

 

매일신보는 1925년 기사와 1930년 기사에서 김계월이 한성권번 소속이었다가 조선권번으로 조합을 옮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1925년에 김두한이 8살로 되어 있으니, 늦어도 김계월은 1917년부터는 한성권번에 속해서 기생 생활을 시작해야만 한다. 그래야 양력 1918년 6월에 기생 김계월이 김두한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김두한의 양육을 위해서 일시 휴직을 할 수는 있어도 돈을 벌어야 하므로 퇴직을 하지는 않기에 조합원 자격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권번 조합원은 아무 기생이나 될 수 없었고, 아무 때나 될 수 없었다. 기생 권번을 설립하려면 해당지역 경찰서에 신청서와 함께 조합원 명단을 제출하여 경찰서장이 심사를 통해 허가를 내줘야만 권번의 활동이 가능했다. 조합원이 바뀌면 역시 경찰서에 변동 신고를 해야 했다.

 

하지만 1918년도 한성권번 명단에 김계월은 없다. 다른 성씨에서도 계월이라는 이름은 없다. 1918년 당시 한성권번 소속의 김씨 기생은 다음과 같다.

 

강소춘(姜素春)·강정희(姜貞姫)·강채희(姜彩姫)·강초월(姜初月)·고산월(高山月)·곽산옥(郭山玉)·곽화용(郭花容)·구보연(具寶妍)·김계선(金桂仙)·김계향(金桂香)·김금홍(金錦紅)·김금희(金錦姫)·김기화(金琦花)·김난향(金蘭香)·김녹주(金綠珠)·김단계(金丹桂)·김매화(金梅花)·김명선(金明仙)·김명주(金明珠)·김벽도(金碧桃)·김벽성선(金碧城仙)·김봉선(金鳳仙)·김봉희(金鳳姫)·김산옥(金山玉)·김산호주(金珊瑚珠)·김삼주(金三珠)·김설도(金雪桃)·김설홍(金雪紅)·김소홍(金小紅)·김숙자(金淑子)·김순이(金順伊)·김연연(金娟娟)·김연옥(金妍玉)·김영희(金英凞)·김옥심(金玉心)·김옥희(金玉姫)·김일점홍(金一點紅)·김일지홍(金一枝紅)·김일타홍(金一朶紅)·김정희(金晶姫)·김죽엽(金竹葉)·김진옥(金眞玉)·김채봉(金彩鳳)·김채선(金彩仙)·김춘외춘(金春外春)·김춘운(金春雲)·김취련(金翠蓮)·김학희(金鶴喜)·김행화(金杏花)·김홍도(金紅桃)·김화연(金花妍)·김화중선(金花中仙)·김화중월(金花中月)·김화홍(金花紅)

- 송방송, 한성권번 [漢城券番], 한겨레음악대사전, 보고사 2012. 11. 2.

 

1917년이나 1918년에 김계월이 조선권번 조합원일수도 없는 것이 조선권번은 대동권번과 대정권번에서 탈퇴한 기생들의 연합체로 1923년에야 결성했기 때문이다. 또한 청진동은 종로권번에 속했다.

 

한편 1908년 9월 관기제도를 폐지하자 남편이 있는 서울 관기 30여명이 1908년 10월에 한성기생조합을 설립한 후 1913년 남도 기생(경기 이남)들을 받아 들여 광교조합으로 이름을 개칭했다가, 다시 1914년에는 일본식 명칭 권번으로 바꿔야 했음으로 한성권번으로 이름을 바꿨다.

 

한성권번 기생들은 서울 관기출신으로, 관기는 남편이 있는 기생이었기에 자부심이 강했고, 남편이 있으니 아무리 돈을 줘도 함부로 몸을 팔지 않고 궁중 가무를 공연했다. 이들을 1패 기생이라고 부르며, 1패 기생들만이 홍산을 쓰고 다닐 수 있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만약에 김계월이 한성권번에 속했다고 한다면 김계월에게는 법적 남편이 있었다는 뜻이고, 김계월은 당시 한성권번의 상징이었던 몸을 팔지 않는다는 표시인 홍산을 쓰고 다니는 1패 기생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마치 당시 기생 권번들 중에서 유일하게 매춘을 하지 않았던 한성권번에 김계월이 있었던 것처럼 날조해서, 가상 인물 김계월이 아무에게나, 심지어 총독부 관점에서 불량선인이었던 김좌진에게도 몸을 팔았다는 기사들을 특정 세력이 조작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외 권번들도 역시 출신 지역별로 뭉쳐서 결성했다. 현실은 대부분이 몸을 파는 3패 기생들으로서 청산을 쓰고 다녀야 했다. 상인들이 많이 살던 다동에 자리 잡은 대정권번(다동권번)은 주로 평양 출신들이 주축이었다. 평양 출신 기생들은 노래와 춤을 못하면서 얼굴만을 내세워 인기를 얻는다고 권번들 내에서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그 무렵에는 경성부에서 800여명의 기생이 활동하고 있었다.

 

다른 유명한 기생 김계월은 경성부에 존재했었다. 신문에 2번 등장하는 낙원동 종로권번 김계월일 것이다.

 

"휘문고보교장 임경재씨의 긴 얼골과 6,7월 장마에 알강이 다 떠러지고 웃둑하게 선 밀집대 가튼 키도 볼만하다. 학교 선생님을 기생에 비하는 것은 미안하지만은 선생이나 기생이나 생은 일반인즉 비해 말하야도 무관할 듯하다. 그로 만일 기생의 배죽엽(裵竹葉), 김계월(金桂月), 창령 부호 하재구의 애첩된 김취홍(金翠紅), 요새이 또 기생 나오랴고 들먹들먹한다는 윤옥엽(尹玉葉) 등과 일석에 회합하야 춤을 한번 춘다 하면 그들의 양수(주: 양쪽 소매)는 남산, 북악의 소나무 가지를 툭툭 치고 그림자는 한강철교에까지 비칠 것 갓다. 이것은 좀 풍장이 말 갓다."
- 관상자, 경성의 인물백태, 개벽 제48호, 1924.06.01

 

  아랫 기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가족은 지금 전부 그의 근거지이던 길림성 모처에 있다는데 그의 칠십 노모와 그의 아내며 그의 아우되는 김동진씨를 합해 세 식구가 있다 하며 시외 모처에 씨의 서자 한 사람이 있으리라는데

- 동아일보 1930.02.13

 

 

의문으로 가득 찬 김두한의 출생

 

"6개월 간의 피신생활에서 아버지가 향리인 홍성을 들러 만주로 건너가려 하실 때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6개월의 태아가 되어 있었다."

- 백야의 피난처가 나의 산실,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 김두한 회고기 1963.

 

김두한은 나이만큼은 일관되게 1918년생임을 주장하고 있다. 생월일은 음력 5월 15일이기에 양력으로는 6월 28일이다.

 

김좌진은 1915년 11월 최익환, 이기필, 감익룡 등과 군자금 모집 중에 또 체포되어 예심에서 무혐의로 풀려 났다. 이후 중국 안동에서 중국 화폐를 위조해서 진폐와 교환하여 군자금으로 쓸 계획을 세웠다. 김좌진은 송인황, 김광렬, 김석연, 김석범 등과 함께 홍성에서 1917년 5월부터 위조지폐 사업을 위한 군자금 조달에 나섰다. 일본 경찰은 중국 안동에서 보고한 정보를 바탕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1918년 1월 홍성경찰서는 관련자들을 체포했다.(이성우, 독립군 지도자 백야 김좌진장군, 통권270호 현대사회문화연구소 2000,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과 광복회)

 

대한광복회는 김좌진을 만주 부사령으로 임명했고, 1917년 음력 8월 16일 김좌진은 서울 종로 인사동 광복회 조직원 기생 어재하(魚在河)의  집에서 송별회를 갖고(울산포스트 2007.08.17), 1917년 9월에 서울에서 경의선을 타고 하루만에 봉황성을 거쳐 만주에 도착했다.(박영석, 백야 김좌진 연구, 국사관논총 제51집 ) 당시 기차로 신의주에서 봉천(심양)까지는 6시간 걸렸다.

 

김두한의 주장대로라면 김두한은 출생 자체가 의문투성이다. 김두한은 김좌진이 자신의 태중 6개월째에 만주로 떠났다고 주장했다. 김좌진은 1917년 9월에 만주에 도착했다. 따라서 김두한은 이듬해 1월에 출생해야 정상이다. 그리고 잉태 되었을 때인 1917년 3월에는 김좌진은 위조지폐 사업을 지휘하기 위해 홍성에 머물고 있었기에 서울에서 김두한의 어머니를 만나는 일 자체가 발생할 수 없었다. 따라서 김좌진이 김두한의 어머니와 6개월간 동거했다는 주장은 틀린 말이다.

 

결론적으로 한성권번 조합원 명단에 이름이 없는 기생 김계월은 가공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