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다. <3편 >

허구인물 전우치 2015. 8. 21. 10:43

3. 김두한은 만주에서 김좌진 장군을 만났나?

 

"제가 1918년 음력 5월15일생으로 3·1운동 전에 태어났는데, 아버님이 만주로 떠나신 게 3·1운동 전 해라고 하니까 만 한 살 전입니다."

- 김두한, 제1화 부친 김좌진 장군 얘기, 노변야화, 동아방송 1969.10.14

 

"이때 생겨 난 혁명아가 바로 나 김두한이다. 6개월 간의 피신생활에서 아버지가 향리인 홍성을 들러 만주로 건너가려 하실 때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6개월의 태아가 되어 있었다."

- 김두한, 백야의 피난처가 된 나의 산실,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 김두한 회고기 1963.

 

1) 김두한이 몇 살 때 누구랑 만주에 갔다고 주장하나?

  

 구분 주장 주체  도착일 또는 
 거주 기간
김두한
나이 
동행자 주장 시기    비고
 만주 
 방문
 
매일신보1 1925. 9. 09 8세  생모  1925. 09. 15   중외일보는 한달만에 만주 방문에서 만주 거주로 말을 바꿈.
중외일보2 1927 10세 외조모  1930.02.18   
김두한3 1924 7세 외조모 1963   
김두한4 1923~1924 6세 외조모  1969.10.14    
김을동5 ? ?  삼촌  2006.06.14   
 만주
 거주
중외일보6 1919~1924 2~6세 생모,
외조모 
 1930.03.16  

 

모든 신문사는 사실 보도의 경우에 모두 내용이 일치해야 한다. 사실 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오보를 냈을 경우에는 정정보도를 낸다. 따라서 단순 사실 보도만 내야 하는 기사에서 이렇게 많은 오보를 냈다면 이는 특정 세력이 즉흥적으로 언론 통제를 했다는 뜻이다. 이후에도 정정 보도가 없다는 것은 김두한 관련 기사 자체가 중요성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기사를 작성했다는 것이다.

 

아니면 대부분의 신문사들이 어느 특정 집단이 그냥 불러 주는대로 똑같이 받아 쓰기 했는데,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어느 한 군데 신문사가 사실 여부를 검증했을 경우에도, 나머지 신문사들은 검증된 사실을 재검증하여 후속 보도를 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김두한 관련 소식은 어느 쪽으로도 일관성이 전혀 없다.

 

김두한의 만주 방문설을 보도한 곳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중외일보였다. 최초로 보도한 1925년 매일신보는 기생 김계월을 부각 시켰던 것에 반해 이후 1930년 중외일보는 어머니라던 기생 김계월 대신 외할머니를 등장 시켜서 김두한을 부각시키는데 촛점을 맞췄다.

 

6살 나이면 1923년에, 7살이면 1924년에, 8살이면 1925년에, 10살이면 1927년에 만주에 간 것이 된다. 김두한 자신은 7살에서 6살로 바꾼 이유는 자신이 학교 생활을 3년 했다는 거짓말에 억지로 꿰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김을동은 아버지 김두한이 김두한의 삼촌 손을 잡고 만주에 갔다고 주장하는데, 친삼촌은 김좌진의 동생 김동진을 말하는 것으로 작은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 김동진은 1928년 1월에 국민대표회의의 민사위원으로 선임되었기에 만주에는 이 무렵에 들어 갔다. 이때는 김두한이 11세 때로 김을동은 자신의 아버지 김두한이 8살 때부터 거지 생활을 했다고 하였으니 김을동의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외삼촌이라고 한다면 어머니의 오빠나 남동생이라는 소리다. 인력거를 타고 학교에서 느긋하게 집에 돌아 와보니 외삼촌이 100칸이나 되는 김두한 어머니의 드넓은 집을 술로 날려 먹고 도망치는 바람에 집달리가 차압 딱지를 붙히고 있어서 김두한은 그날로 거지가 됐다는데 언제 만주까지 데려다 줬는지 의문이다.

 

중외일보는 1930년 2월 18일자 기사에서는 10살이 된 김두한이 1927년에 만주에 갔다고 하더니,7 불과 한달 뒤인 3월 16일자 기사에서는 김두한이 걸음마 무렵에 만주로 가서 6살 때까지 4년 정도 만주에서 살았다고 아에 엉뚱하게 모순된 기사를 실었다.8

 

설령 김두한이 만주를 방문했다고 쳐도 매일신보가 어떻게 알았느냐 하는 의문이 있다. 요시찰 대상이었던 김좌진은 소재 자체가 비밀이어서 조선총독부 아세아국 제3과에서 소재 파악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9 나중에 러시아 지배 지역 신시에 정착한  김좌진의 소재지를 알아 냈지만 접근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조선총독부가 김좌진을 체포하거나 암살할 수 없었다. 

 

중국에 있는 일본 영사관 무관과 영사관 경찰, 만주 관동군을 활용하고 있는 조선총독부마저 김좌진에 대해서 제한적인 정보 밖에 입수할 수 없는데 매일신보만이 서울에 가만히 앉아서 정확한 정보를 획득했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다. 이후 정작 중요한 사건이었던 김좌진의 암살 보도에 있어서도 신문들은 날짜도 늦은 초기 기사에서 암살 여부마저 확신하지 못하다가 뒤늦게야 일본 경찰의 정보 제공으로 암살을 공식화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한편 기생 김계월의 아들 김두한이 김좌진의 자식이라는 주장은 청산리 전투가 끝난 지 5년 뒤인 1925년에 최초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부터 시작하여 김좌진 장군이 암살당한 1930년 매일신보. 중외일보, 조선일보, 1932년 중앙일보로 이어졌다.

 

이는 김좌진이 한낱 기생과 놀아 나는 저속한 인물로 몰아서 평판을 깎아 내리려는 의도였다.

 

오숙근의 귀국을 유일하게 다룬 중앙일보는 1932년 12월 23일자 기사에 김좌진의 처 오숙근에게 촛점을 맞추어 오숙근이 만주에서 서울로 오기까지 이런저런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를 실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 졌다. 

 

중외일보가 1930년 2월 18일자 기사에서 기생 김계월의 아들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고 보도하였다. 다음 달 조선일보가 3월 18일자 기사로 기생 김계월의 아들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고 중점 보도했다.10 먼저 보도한 중외일보는 개성지국 기자가 소식을 전해 왔다고 하였으며, 조선일보는 개성의 김문한이 소식을 알려 왔다고 하였다. 

 

김을동은 자기 아버지 김두한이 8살 때 김두한의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사망했다고 했는데, 김좌진 사망 당시의 중외일보와 조선일보는 13살인 김두한의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생존해 있다고 보도하였다. 김두한은 외할머니와 개성에서 살고 있고, 어머니 기생 김계월은 함남에서 기생집을 차려서 생활비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사에는 시기의 오류가 나타나 있다. 1929년 11월에 개성으로 이사왔다고 해놓고는 1929년 3월에 개성을 떠나 함남 흥원에 기생집을 차렸다고 한 것이다.

 

이후 김좌진과 혼외 관계였던 나혜국이 김좌진의 친아들 철한과 친딸 은애를 데리고 1932년 1월 귀국하여 서울 종로구 운니동 21번지에 정착했을 때는 매일신보, 조선일보, 중외일보, 중앙일보는 모두 침묵하였다. 반면에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삼천리 잡지는 2회에 걸쳐서 나혜국과 김좌진의 친자녀들에 대한 내용을 특집으로 다루었다.11

 

2) 김두한의 복귀 주장

 

 김두한은 1963년 회고록에서는 7살 되던 해에 만주로 갔다가 며칠만에 돌아 왔다고 하였다.12 김두한은 6년 뒤인 1969년 동아방송 라디오에서도 6살에 만주에 갔지만 7살 되던 해인 1924년 2월에 귀국했다고 말했다.13 

 

그런데 김두한은 자신의 1963년 회고록과 1970년에 기고한 잡지 세대에서는 1924년 2월에야 강원도 속초에서 고깃배를 타고 밀항하여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김좌진을 만났다고 하였다.14

 

 

 

<1910년대 나무 고깃배, 파시 >

 

3) 당시의 현실

 

1923년이나 1924년 겨울에 속초에서 블라디보스톡에 갔다는 것은 억지다. 속초 인구는 1925년 당시 6,979명으로 외국인은 일본인 100명, 그외 외국인 6명이 전부였다.15  이 의미는 속초에는 블라디보스톡까지 국제 선박항로를 개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배를 타고 해외로 나가려면 도항권을 발급 받아야 하기에, 도항권이 없으면 불법으로 동네 사람에게 돈을 주고 부탁해서 흔히 쓰는 목제 범선이나 목제 고깃배를 전세 내서 몰래 타고 나가야 한다. 하지만 속초에서 명태나 잡던 조선 소형 목선은 블라디보스톡까지 갈 수도 없을 뿐더러 더우기 배 밑창에는 숨을 공간이 없다.

 

 

 

<1937년 11월의 속초 신항. 신항을 완공하여 기선도 정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도심이 청초호 내륙에서 항구 주변으로 바뀌었다.>

 

그나마 안전하게 가려면 기선 고깃배라도 이용해야 했지만 기선 고깃배에도 배 밑창에 안 들키고 숨을만한 공간은 없다. 막상 기선이 정박할 수 있는 부두가 1920년대에는 속초에 없었다. 1934년에 착공하여 1937년에 완공한 신항이 생기면서야 일본인 소유의 기선 고깃배도 정박할 수 있었다.

 

1919년 3월부터 다른 나라로 여행하려면 여행권을 발급 받아야 했다. 조선에서 해외로 나가는 육로는 기차가 가장 수월했다. 당시 조선을 떠나 만주로 가는 이주자는 연 1만~1만5천명이었고, 다시 조선으로 귀국하는 자는 연 3~4천명으로, 활발하게 조선인의 국외 이동이 압록강과 두만강 국경에서 이뤄지고 있었다.16  신의주 경찰서 앞에는 아침부터 여행권을 받으려고 농부들부터 사업가까지 길게 줄을 서야 하는 불편을 겪었다.17

 

김두한이 러시아로 밀항을 했다던 1923년에는 봄부터 러시아에서 여행권이 없이 다니다 잡히면 무려 6개월간이나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으며, 잠자리를 제공한 사람에게는 러시아 돈 4천원의 벌금형 처분을 했다.18 중국과 일본이 파견하는 간첩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었기에 동양인에 대한 검문검색은 당연했다. 일단 배에서 내리면 항구에서 여행권 내지 도항권을 제시해야 했고, 기차를 타면 또 다시 검문을 받아 여행권을 보여 줘야 했다.

 

여행권 제도를 일시 폐지했던 시기인 1923년 1월에는 겨울이라 압록강과 두만강이 얼어 붙자 도강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국경 경찰대와 충돌이 빈번해졌으며, 국경 도시 신의주역 기차 안에서의  검문은 여행권 제도를 실시하던 때보다 오히려 더 심하게 이루어져 불평이 쏟아졌다.19 그러자 몇 개월 후 다시 여행권 제도를 시행했다.20

 

 

<조선 교통 약도, 1940>

 

여행권만 있으면 기차 타고 서울에서 목단강까지는 19시간이면 도착했다. 김두한 일행이 여행권을 발급 받아  남만주 철도를 이용했으면 앉아서 서울에서 목단강까지 수월하게 갈 수 있었기에 속초에 갈 필요가 없었다. 수배자만 아니면 누구에게나 나오는 것이 여행권이다. 거주증명서와 호적등본만 있으면 내주는 것이 여행권이다. 더구나 일제 강점기에는 연좌제가 없었다.

 

이렇게 쉽고, 안전하며, 시간을 절약하는 교통편이 있는데도, 러일간 대치 상황에서 돈도 훨씬 더 많이 들면서 시간도 오래 걸리고, 아에 위험한 밀입국을 선택했다는 자체가 만주행이 거짓임을 말해 준다. 간첩을 색출하려고 국경출입 검문을 강화하던 러시아로 밀입국 해서 다시 러시아 관할 만주로 이동했다는 소리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 

 

쫓기던 김좌진도 1917년 9월 경의선을 타고 만주로 들어 갔다. 김좌진의 처 오숙근과 딸 김옥남, 김좌진의 9촌 조카 김준한도 함께 1919년 10월 편하게 경의선을 타고 만주에 도착했다. 1932년 1월 나혜국과 김좌진의 친아들 김철한, 친딸 김은애도 기차를 타고 경성에 들어 왔다. 김좌진의 처 오숙근도 기차를 타고 입국했다.

 

심지어 김두한이 김좌진을 만주에서 만났다는 가짜 기사를 쓴 매일신보조차도 김두한이 경성역에서 기차를 타고 떠났다고 주장하였다.21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김두한은 엉뚱하게 밀항선을 탔다고 말을 하였다.

 

 

결론적으로 김두한은 만주에 가지 않았다.

 

 

  1. 매일신보 1925. 9. 15 김좌진과 김계월 8년만에 이역에서 해후 오랫동안 서로 그리워 하던 정랑 정부가 서로 만났다. 영고탑(寧古塔)에 근거를 두고 노령방면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과격파의 수령 김좌진(金佐鎭)은 자기의 정부(情婦) 전한성권번 기생 김계월(金桂月)(27)과 및 그 사이에 낳은 김두한(金斗漢)(8)을 데려가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써보았으나 국경의 경계가 엄중하여 오늘까지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바 이번 김계월도 정랑 김좌진을 생각하고 항상 민울히 지내던 중 지난 9일에 자기 모 박씨(朴氏)와 자식을 데리고 가산도구를 방매하여 여비를 만들어가지고 경성역을 출발하여 무사히 목적지에 이르러 8년만에 부부와 부자가 반갑게 대면하게 되었다더라. [본문으로]
  2. 중외일보 1930.02.18 그리하여 그에게서 나온 아이들이 금년에 열다섯살 된 김두한군이라고 한다. 오년전 부자상봉. 지금으로부터 5년전에 두한군이 그의 할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 만주로 갔을 때에 그는 출산되는 것도 보지 못한 자기 아들을 십년이 지난 후에 그리운 젊은 그날을 추억하면서 손목을 처음으로 잡았다고 한다. 두한군의 어머니 되는 김씨는 그후 사정이야 있건 없건 작별 말 한마디 없이 떨치고 간 낭군을 원망할바 없이 그 아들을 아홉살 될 때까지 기르고 풍운아의 남편을 운명만 한하며 지금은 서울을 떠나 원산에 있는 그의 친척 집에 가서 만주벌로부터 불어 오는 찬바람을 한스럽게 쏘이고 있다 한다. [본문으로]
  3. 김두한, 모란강 역두(驛頭)에서 부자 상봉,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 김두한 회고기 1963 내가 7살 되던 해로 기억한다. 나는 동해안 어느 나루터에서 (지금의 강원도 속초 지방) 우리들을 호송차 밀파된 독립군 병정(兵丁)을 따라 고깃배와 밑창에 숨어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닿았다. 며칠을 기차로 여행했다. 모란강 역에 닿으니 중국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고 생전 처음 서양 사람들을 많이 보았는데 나는 어떤 중국인 복장을 한 거구의 사람 품에 안겼다. 그 분이 내 아버지 백야 김좌진 장군이었다.나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버지를 쉽게 식별해 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혈륜이란 무서운 것이다. 나를 번쩍 들어 품에 안으신 아버지께서는 마차에 외할머니와 나를 태우고 깊숙한 산중으로 몇 십리나 달렸다. [본문으로]
  4. 김두한, 제1화 부친 김좌진 장군 얘기, 노변야화, 동아방송 1969.10.14 여섯살 적에 아버님이 아들이 하나라 보고 싶다고 하셔서 지금의 속초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생선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어요. 도착하니 독립군들이 마중나와서 목단강 쪽으로 안내해서 아버님을 상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이범석 장군도 계셨어요. [본문으로]
  5.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2006.06.14 공지영: 아버지에 대한 선입견이나 오해 중 바로잡고 싶은 것이 있다면? 김을동: 아버지가 8살 때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면서 다 잃으셨어요. 그때 할아버지는 만주에 계셨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청계천 다리 밑에서 깡통밥 얻어 먹으면서 자라셨어요. 아버지는 삼촌 손에 의해 딱 한번 할아버지 얼굴을 구경할 정도였죠. [본문으로]
  6. 중외일보 1930.03.16 그리하여 계월은 늙은 친정 어머니 박취향(朴聚香)과 어린 두한을 이끌고 쓰라린 생활을 얼마동안 하다가 사랑에 바친 몸이 그대로 있을 수 없다하여 심약한 여자의 몸으로 남편을 찾아 북만으로 가서 해림 목단강이라는 곳에 집을 정하고 밖에서 운동하는 남편에게 조금이라도 뜻있는 내조를 하려 하였으나, 호방한 김좌진 그는 잔약한 애인의 안타까운 내조를 받고 싶어도 하지 아니하였으며 동시에 그것을 받을 겨를조차 없도록 분주골몰하였다. 그럭저럭 그곳에서 수년을 지내는 동안에 계월이 모친은 수토불복으로 마침내 중병에 걸려 목숨이 서산에 기운 해와 같이 되매 그는 죽은 백골이나마 고국산천에 묻히도록 하여 달라는 간청이었음으로 계월은 병든 어머니와 함께 다시 탐탁지 아니한 고국에 돌아오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 경우를 당하여 제일 어려운 문제는 두한이의 양육 문제이었다. 여기 대하여 두한의 부친 김좌진 그는 만주에 두어서 자기가 길러야 사람다운 자식을 만들겠다는 것이었고, 계월의 모녀는 자기네가 데리고 가서 기르겠다는 것이어서 피차에 주장을 세우다가 마침내는 계월 모녀의 주장이 서게 되어 여섯살 먹은 두한은 다시 부친의 앞을 멀어지게 되었다. [본문으로]
  7. 중외일보 1930.02.18 [본문으로]
  8. 중외일보 1930.03.16 [본문으로]
  9. 김좌진의 소재지에 관한 건, 기밀 제413호 아세아국 제3과 1921.10.06 / 불령단 관계 잡건 [본문으로]
  10. 조선일보 옛날 신문 보기 검색에서 1930년 3월 17일자와 1930년 3월 18자 기사는 김두한 검색에 나타나지 않는다. 2015년 8월 무렵에는 김두한을 검색하면 3월 18일자 기사는 떴는데 이 마저도 검색에서 사라졌다. [본문으로]
  11. ①총사주면 원수갑허 故 金佐鎭 따님 恩愛, 불쌍한 고아들, 삼천리 제4권 제5호 1932년 05월01일,②남편 김좌진의 초혼, 미망인 나혜국 여사 방문기, 삼천리 제4권 제3호 1932년 03월01일 [본문으로]
  12. 김두한, 모란강 역두(驛頭)에서 부자 상봉,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 김두한 회고기 1963 짧은 며칠 간을 보내고 우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 후 청산리 대첩이 있은 후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일경에 투옥되었다. [본문으로]
  13. 김두한, 제4화 부친 김좌진장군을 만주에서 만나고 온 얘기, 노변야화, 동아방송 1969.10.17 이듬해 일곱살 되던 2월에 왔는데 그곳에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한쪽은 공산당, 다른 한쪽은 마적, 그리고 일본. 마적만 수만 명이었는데, 둘로 나뉘어 있었죠. 일본군으로부터 돈을 받는 가짜 마적과 진짜 마적이 있었거든요. 아버님은 될 수 있으면 저를 후계자로 만들려고 했지만 정세가 워낙 험했어요. 일본은 중국을 먹으려고 스파이란 스파이 다 들어오죠, 한국 사람으로 가장한 일본 사람 앞잡이도 들어오고 마적이 들끓고 러시아에 공산화 바람이 불어 조선 민족도 둘로 갈라져 버렸어요. [본문으로]
  14. ①김두한, 모란강 역두(驛頭)에서 부자 상봉,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 김두한 회고기 1963, 내가 7살 되던 해로 기억한다. 나는 동해안 어느 나루터에서 (지금의 강원도 속초 지방) 우리들을 호송차 밀파된 독립군 병정(兵丁)을 따라 고깃배와 밑창에 숨어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닿았다. ②김두한, 이별로부터 시작된 생애, 내가 휩쓸던 거리와 골목들/ 김두한, 세대 제8권 통권81호, 세대사 1970.04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와 헤어진 나는 1924년 2월 외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만나려고 서울에서 차를 타고 묵호로 갔었고, 그곳에서 다시 고깃배를 바꿔 타고 우라지보스톡을 거쳐 목단강역에 내렸다. 역전에는 한 사나이가 우리를 가다리고 있었는데 그 분은 키가 크고 눈썹이 검은 분이었다. 그 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인 김좌진 장군이었다. [본문으로]
  15. 조선국세조사보고, 속초시청 [본문으로]
  16. 동아일보 1923.05.02 [본문으로]
  17. 동아일보 1922.04.03 [본문으로]
  18. 동아일보 1923.04.10 남부 우수리 지방에 있는 한 노국 관헌의 여행자 취체는 최근익 엄중하여 재주증명 또는 여행권을 지니지 아니한 혐의에 의하여 구금된 자는 수십명에 달하였는대 피등은 일절 육개월간의 징피에 처하고 차를 숙박케 한 자도 노화 4천원의 벌금을 과한바 적군(赤軍)은 차로써 일중관헌의 밀정침입을 방지 위함이라 칭한다더라. [본문으로]
  19. 동아일보 1923.01.10 압록강과 두만강이 모두 결빙되어 얼음을 타고 국경을 출입하기가 편리하게 되어 그 방면의 경관과 무장한 독립당원의 충돌도 자주 있는 까닭에 경찰관의 신경이 또다시 극도로 날카로워진 까닭인지 빙상으로 왕래하는 조선인에 대한 경찰관의 검사와 취조가 더욱 더욱 엄밀하여질 뿐만 아니라 증명의 빙거할 것이 없다는 이유로 그전 같으면 증명서만 보고 그대로 보내일만한 사람에 대해서도 일일히 엄밀한 조사를 할뿐만 아니라 철도도 안동현을 거쳐 출입하는 사람에 대하여도 또한 그와 같은 바 특히 만주 방면에서 들어오는 사람에 대해서는 신의주에서 다수의 순사가 기차에 올라서 일일히 검사 심문을 하며 행장과 신체를 수색하여 만일 과격파 사람의 사진 한장이라도 행장에 있거나 이상한 편지 쪽 하나라도 몸에 지녔든지 순사의 심문에 대하여 대답이 조금이라도 모호한듯이 생각하면 그 사람이 상당한 신분이 있는 것도 불계하고 무슨 긴급한 일로 오는 것도 불계하고, 선천이나 곽산 근처에까지 와서는 기차에서 끌어 내려서 신의주까지 다시 데리고 가서는 조사하여 본 결과 아무 일도 없는 고로 어름하여 돌려 보낸 까닭에 의외의 손해와 고통을 받는 일이 실로 적지 아니 하다는데. [본문으로]
  20. 동아일보 1923.08.05 여행권도 없이 지난 1일 밤에 부모가 자는 동안에 몰래 경성을 떠나 황임성을 따라 세 사람은 신의주에 이르러 3일 밤에 관헌의 눈을 숨기어 국경을 넘으려다가 마침내 발각되어 목하 네 사람은 신의주 경찰서에 구류중인대 그들의 부친이 되는 박명은 작4일밤자로 신의주로 향하였다더라. [본문으로]
  21. 매일신보 1925. 9. 15, 같은 기사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