馬上𩌻棍
[增]
今制𩌻長六尺五寸, 子𩌻一尺六寸. 撰竹裹皮, 施筋或朱或漆.
지금 제도에 도리깨의 길이는 6척5촌이고, 갈라져 나온 도리깨는 1척6촌이다. 가죽으로 싸맨 대나무로 만들고, 힘줄에 또한 붉거나 검게 옻칠을 한다.
茅元義曰 鐵鏈夾棒本出西戎馬上用之以敵漢之步兵. 其狀如農家打麥之耞. 以鐵飾之利於自上擊下. 故漢兵善用者巧於戎人.
모원의가 말하기를 "쇠사슬을 끼운 몽둥이는 본래 서융에서 나온 것으로서 한의 보병과 대적하여 말 위에서 썼다. 그 형상이 농가에서 보리를 치는 도리깨와 같았다. 쇠로 꾸미면 이로우니, 위에서 아래로 친다. 그리하여 한의 병영에서 잘 쓰는 자는 서융인보다 교묘했었다"라고 하였다.
[주]
무경총요에 나온 말이다. 무경총요는 송 인종의 명으로 증공량이 1040년에 편찬하였다. 鐵鏈夾棒 本出西戎 馬上用之 以敵漢之步兵 其狀如農家打麥之連枷 以鐵飾之 利用自上擊下 故漢兵善用者巧于戎人.
南豊雜記曰 狄靑[字漢臣宋西河人官樞密使] 征儂智高[宋廣南盜賊] 半夜度崑崙關[在廣州] 縱騎二千出賊後 鏢牌爲 馬軍所突皆不能駐, 馬上鐵蓮耞擊之遂皆披靡.
남풍잡기에 이르기를 "적청[자는 한신, 송 서하인으로서 관직은 추밀사]이 농지고[송 광남 도적]를 정벌하는데, 야반에 곤륜관[광주에 있다]을 넘어 기병 2천을 거느리고 적의 뒤로 출동하였더니 수리검과 등패로 보위하고 있음으로 마군이 돌격하는 바 죄다 자리를 지키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말 위에서 쇠사슬 도리깨로 쳐서 마침내 모두 쓰러뜨렸다"라고 하였다.
續大典曰 𩌻芻 出馬後 以右手執𩌻向後擧 又以兩手向前擧 因向左右各一揮每一擊後 輒左右一揮. 六芻相距各二十八步, 左右相距自馬路三步[案. 𩌻芻雖是武科試取之法 亦具擧擊之勢故錄之]
속대전에 이르기를 "편추는 말이 나간 후 오른손으로 뒤를 향하여 채찍을 들고, 또 두 손을 앞을 향하여 들며, 그대로 좌우를 향해 각 한 번씩 휘둘러 매번 한 번 친 뒤에 언제나 좌우로도 한 번씩 휘두른다. 6추는 서로 각 28보씩 거리를 두고, 좌우로 서로 마로에서 3보씩 거리를 둔다"라고 하였다[안. 편추는 비록 이 무과 시취의 법이기는 하나 역시 들어 치는 세를 갖추었음으로 기록한다].
案
今馬上連耞棒較步連耞棒差短其相連處步則一環馬則三環. 俱棒首及耞兩端鉆以鐵葉. 惟馬上連耞棒耞下端鐵葉遍釘 鐵乳矗矗[音蜀聳上䫉高起也]
지금 마상연가봉을 보연가봉과 비교하면 짧음의 차이가 있고, 연결한 곳에 보병은 곧 1개의 고리가 있고, 기병은 곧 3개의 고리가 있다. 모두 봉의 머리 및 도리깨 양끝에 철엽을 박았다. 오로지 마상연가봉의 도리깨 아래 끝 철엽에 고르게 못을 박아 철꼭지가 삐죽삐죽하다[음은 촉(蜀)이고, 위로 솟은 모양새는 높게 솟구쳐 있다].
禮記圖式 所載者六鐶相連, 武備志所載者耞四觚, 鐵鎻句連, 長如耞. 耞之長減其棒三分之二. 今所用者連鐶促短無全力. 嘗聞丙子之難禁旅禦敵于高陽大路一擊而無不敗衄[音忸挫也. 敗北曰 衄]. 葢不但連鐶促短以其柄弱故也. 當正其制使其柄圍差大句連六鐶耞用四觚鐵葉加乳釘. 則集衆長而爲擊器之最也.
예기도식에 소재한 것은 6개의 고리를 서로 연결하였고, 무비지에 소재한 것은 네모나고, 쇠사슬과 고리로 연결하였으며, 길이는 도리깨와 같다. 도리깨의 길이가 줄어 들어 그 봉은 3분지 2로 줄었다. 지금의 경우에 쓰고 있는 것은 연결고리가 좁고 짧아 전력으로 쓸 수 없다. 전에 들으니 병자년의 난에 고양의 큰 길에서 금군이 적을 막다가 일격에 패뉵(衄)[음은 뉴좌(忸挫)이다] 당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모두 연결고리가 좁고 짧을뿐만 아니라, 그 손잡이도 약한 까닭이어서였다. 당연히 그 제도를 바르게 하여 그 손잡이 둘레를 차이나게 하고, 큰 고리로 여섯 고리를 도리깨에 연결하며, 네 모서리에 철엽을 쓰고서 꼭지못을 더해야 한다. 즉 장점을 모으면 공격 무기에 있어서 최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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