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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바위

허구인물 전우치 2022. 12. 12. 19:32

성협, 투전, 민속화첩

금병촌(今村鞆 1870~1943)은 경찰관으로서 경찰 업무와 관련 있는 한국의 대상을 조사하는데서 출발하여 점차 개인적 취미와 연관 있는 대상을 조사하여 조선과 관련한 많은 책을 출판하였다. 1912년 조선사회고(朝鮮社会考) 출판, 1923년 조선의 제-나염수필: 비오무리테(朝鮮の俤・螺炎随筆 鼻を撫りて) 출판, 1930년 역사민속 조선만담 및 선의 조선, 한국 연안 선로 개시 전말(船の朝鮮 韓国沿岸航路開始顛末) 출판, 1933년 인삼신초(人蔘神草) 출판, 1934년 인삼사 출판, 1937년 선좌승타포구-조선풍속자료집설(扇左縄打毬匏―朝鮮風俗資料集説) 출판, 1939년 이조실록 풍속 관계 자료 촬료 출판, 1941년 고려이전의 풍속관계촬요를 출판하였다.

1904년 법정대학 전문부 법률과를 졸업하고, 1908년 한국에 입국하여 경시정(警視正:총경) 충청북도 경찰부장직으로 한국에서의 경찰관 생활을 시작하였다. 경찰 업무와 관련하여 자신이 경찰관의 입장에서 작성한 한국에 대한 첫 기록물이 1909년 11월에 만든 조선풍속집이다.

1. 賭博の 種類別 名稱
朝鮮に□ては賭博の事を雜技賭技ノルム博戱博奕等と稱す. 其技の 種類頗多く 各地多少風を異にせろ大略の如し.
1.鬪箋 或は偸箋油套套箋投箋と稱す箋又錢字を用ゆ.
2.骨牌 或は骨佩胡牌江牌と稱す
3.花鬪 或は花套畵鬪と稱す
4.擲柶 或は四木戱栗柶四戱と稱す
5.馬田 或は樗表樗蒲等と稱す
6.矢岩爲 或は矢岩回從京畵六字賭六字錢と稱す
7.十人契
8.討錢 或は打錢擲錢五冠地錢串錢立錢兄弟穴錢等と稱す
9.詩牌
10.雙陸

도박의 종류별 명칭

조선에서는 도박의 일을 雜技(잡기), 賭技(도기), 노름, 博戱(박희), 博奕(박혁) 등이라고 칭한다. 그 기술의 종류는 꽤 많아서 지역에 따라 다소 모습이 다르지만 대략 같다.

(1) 鬪箋(투전): 혹은 偸箋(투전), 油套(유투), 套箋(투전), 投箋(투전)이라고 부르는데, 箋(전) 대신 錢(전)字를 사용하기도 한다.
(2) 骨牌(골패): 혹은 骨佩(골패), 胡牌(호패), 江牌(강패)라고 부른다.
(3) 花鬪(화투): 혹은 花套(화투), 畵鬪(화투)라고 부른다.
(4) 擲柶(척사): 혹은 四木戱(사목희), 栗柶(율사), 四戱(사희)라고 부른다.
(5) 馬田(마전): 혹은 樗表(저표), 樗蒲(저포) 등으로 부른다.
(6) 矢岩爲(시암위): 혹은 矢岩回(시암회), 從京畵(종경화), 六字賭(육자도), 六字錢(육자전)이라고 부른다.
(7) 十人契(십인계)
(8) 討錢(토전): 혹은 打錢(타전), 擲錢(척전), 五冠(오관), 地錢(지전), 串錢(곶전), 立錢(입전), 兄弟穴錢(형제혈전) 등으로 부른다.
(9) 詩牌(시패)
(10)雙陸(쌍륙)

矢岩爲
矢岩爲は一人の胴元あリ一枚の紙に一,二,三,四,五,六の數字を記したるも置き各自思ふとてろに金錢を張リ置き別に一よリ六よでの目を盛リたろ骨子又は玉を壺に入札揺リて之を伏也,芋しさ數の出たるものを勝となす. 胴元は勝者に賭け金の二倍を交附し其數た合はざるてき張金は全部胴元に取らる.

시암위

시암위(矢岩爲)는 한 명의 노름판 주인이 한 장의 종이에 1,2,3,4,5,6 숫자를 적고, 각자 생각하는 곳에 돈을 건다. 따로 1에서 6까지 새긴 골자(骨子:주사위) 또는 옥(으로 만든 주사위)을 작은 종지에 넣고 흔들어서 나온 수와 같으면 이긴다. 노름판 주인은 승자에게 건 돈의 2배를 내주고, 다른 수에 건 돈을 전부 노름판 주인이 갖는다.
- 금촌병(今村鞆) , 유희 도기, 조선풍속집 1909. 11

시암위 예시, 노름판 주인은 2를 맞춘 도박꾼에게 건 은자의 2배를 지급해야 한다.

矢岩爲(시암위)를 일본어로 발음하면 "야이와이"다. 야이와이의 발음이 사람과 사람을 거치면서 야바위로 변하였다. 이는 영어 올인을 오링으로, 복불복을 복골복으로 썼던 것과 같다. 야바위는 중국의 오래된 도박인 주사위 3개로 하는 투보(骰寶)의 축소판이다.

 

매번 거는 판돈에 상한선을 두면 노름판 주인은 구태여 속임수를 쓰지 않아도 저절로 돈을 버는 구조다. 이런 점에서 야바위가 왜 속임수 도박의 대명사가 되었는지 의아하다. 따라서 야바위가 어떻게 사기 도박의 대명사가 됐는지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은 야바위라는 단어를 매우 빠르게 널리 쓰기 시작하였다.

近日(근일) 京城內(경성내)에 無賴輩類(무뢰배류)가 三五(삼오) 作隊(작대)하야 各坊曲(각 방곡)으로 出沒(출몰)하며 靑年子弟(청년자제)를 誘引(유인)하야 「야바위」라는 雜技(잡기)를 設(설)하고 金錢(금전)을 欺取(기취)하는 故(고)로 家産(가산)을 蕩敗(탕패)하는 者(자)가 比比有之(비비유지)한다 함으로 某處(모처)에서는 此(차)를 掃除(소제)하기 爲(위)하야 現今(현금) 嚴密(엄밀)히 注意(주의)하는 中(중)이라더라.
- 매일신보 1912. 1. 23

1934년 신문기사에서 초기 시암위에서 현재 형태의 야바위 도박으로 변하는 중간 과정을 알 수 있다. 경구장이라는 간판을 내건 도박장에서 하는 야바위 노름을 다룬 기사다.

 

이 것은 소위 야바위 노름이라 하는 것이니, 한 푼 걸고 노름을 하여 맞히기만 하면 5배를 준다는 것이다. 노름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기다란 책상을 놓고, 그 책상면을 우묵이 파되 바깥쪽이 높고, 안쪽이 낮게 한 다음 다시 공이 멈출듯 말듯한 정도로 오묵오묵하게 자국 여섯을 내되, 그 것을 원형으로 배열하여 놓고 각각 자국마다 번호를 매겨 가지고 손님이 돈 십오전을 내이면 시골 노름꾼들이 쓰는 투전쪽 같은 소위 유기권이라는 것 다섯 장을 주고 공을 준다. 그러면 손님은 그 표를 자기 앞에 써 놓은 일,이,삼,사,오,육의 번호중에서 마음 내키는 번호에 표를 몇 장이고, 마음껏 걸고 공을 굴리는데, 그 굴린 공이 이 편에 표를 놓은 곳의 번호대로 가서 서면 그 것이 즉 맞힌 것이니 5배를 준다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니, 도적놈이니 하는 가진 욕설을 다 들어 가면서 고리대금을 한대도 앉은 자리에서 5배 장사라는 것은 될 수 없는 일이라, 요행심 많고, 허욕 치미는 시골 사람들은 모처럼 왔던 서울 길에 돈을 따 가지고 서울 선물이나 좀 낫게 사가지고 가리라는 생각으로 한 번 걸어 두 번 걸어 차츰차츰 빠지는 줄 모르고 하다 보면 처음에 십오전 즉 맞힌 것이니 약조대로 5배를 준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일원 오십전이 되고, 이원이 되고, 삼원이 됐나? 처음에는 장난이, 두 번재는 그것 맹랑하다는 생각이 나고, 세 번째는 억새에 손 벤다고 슬며시 분하고, 네번째는 먼저 잃은 돈이 아까워서 그 것을 찾자니까 또 한다. 그래서 한 번 한 번 하는 것이 주머니에 있는 것이 한정이라, 십원이면 십원, 오원이면 오원 모조리 털어 바치고 얼굴이 멀쓱하니 뒷통수를 치는 것이다. ... 손님이 걸면 한 번도 제자리에 맞는 법이 없고, 주인이 하면 일정한 위치에 반드시 공은 정지하는 것이었다. 주인이 그 판에다가 손을 대는 일도 없고, 몸을 대는 일도 없으되, 이와 같은 이상한 형적을 보이는 것이었다. 한 번 보아, 두 번 보아, 보는 사이 어느 덧 기자는 공이 굴러갈 때마다 옆에 섰는 주인의 다리가 이상히도 힘 주고 뻣뻣하게 땅바닥을 밟은 것을 보았다. 그와 동시에 노름하는 대의 다리가 그대로 놓여 있지 않고 땅바닥에 묻힌 것을 보았고, 주인의 발이 땅을 밟을 때마다 땅에 묻힌 다리가 올랐다 내렸다 하는 것이 보였다. 
- 조선일보 1934. 5. 12

그러다 현재 사람들이 야바위라고 알고 있는 야바위 형태로 변한 것을 1960년대 만평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아희평, 동아일보 1968.4.3

야바위를 이후 모든 종류의 사기 도박을 지칭하는 뜻으로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