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 상궁의 딸 박계숙이 김두한의 어머니인가?
"어느 날 선친께서는 지금의 서울 근교 야산(사직공원 뒤)에서 동지들과 회합을 가지셨다. 이 회합에는 백린, 윤성 등 30여 명의 독립투사들이 결집하여 이색적인 산상회담을 열고 있었는데, 일경은 이 정보를 미리 알고 이중 삼중으로 포위한 후 포위망을 착착 압축해왔다고 한다. 당황한 산상의 동지들이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백야는 “내가 일경을 유인할 테니 동지들은 어서 속히 몸을 피해 먼저 대륙으로 망명하시오.”라고 말하면서 왜경들 앞에 홀연히 자태를 나타냈다고 한다. 백야는 두 손을 들고 왜경 앞에 항복하는 양 꾸미고 수갑을 채우려는 순간 순경 3명을 한꺼번에 때려 눕혔다. 그리고 그들이 소지했던 권총을 나꿔채 여러 발을 공중 발사하여 적의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후 산상의 동지들에게 피신로를 마련해주고 나서, 자신도 피하기 위해 달아나셨다고 한다. 발악하는 추격대들을 뒤로 하며 허둥지둥 서울 문 안으로 들어선 아버지는 갈 곳이 없어 지금의 사직동에 자리 잡고 있던 어느 양반촌에 들어가셨다고 한다. 분초를 다투는 위기에서 백야는 어떤 양반집의 담을 뛰어 넘어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 운명의 집이 바로 나의 산실이 되었다.
궁전의 상궁이셨던 나의 외조모님에게는 딸이 한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나의 생모가 되신다. 호각소리가 사방에서 울리고 밖은 철통같은 경비망이 퍼졌다. 나의 선친께서 뛰어든 집은 궁녀 박 상궁의 딸 박계숙의 공부방이었다. 놀란 어머니께서는 강도가 침입한 줄 알고 안채에 연결된 요령줄을 흔드시려는 찰나 아버지 백야는 ‘내가 김좌진이오’라고 말했다. 이때 나의 생모는 흔들려던 요령줄을 멈추고 방안에 아버지를 들어오게 하신 후 책을 넣어두는 책장을 열고 아버지의 몸을 감추어 주었고, 방안에 남겨진 신발 자국을 걸레로 말끔히 닦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뒤를 쫓아 방문 앞에 다다른 왜경이 검문을 하겠다고 하자 어머니께서는 주저하지 않고 책장의 열쇠를 꺼내 여는 시늉을 태연자약하게 연출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선수에 눌렸던 왜경이 때마침 들려온 추격대 집합 호각소리에 따라 물러갔기 때문에 위기일발의 순간을 모면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함께 내쉬었다고 한다. 왜경이 돌아간 후 한참 있다가 문을 열어본 어머니는 또 한번 놀라셨다고 한다. 왜경이 물러간 것을 안 아버지께서 곤한 단잠에 들어 있으셨으니 말이다. 연일 주야를 막론하고 동분서주하던 혁명아는 몹시 고단한 법 ……. 나의 외조모와 어머니는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궁리 끝에 데리고 있는 하인들을 재산상의 이유라며 그날로 하향시키고, 모녀가 손수 아버지 백야의 시중을 드신 모양이다. 이때 생겨난 혁명아가 바로 나 김두한이다.
6개월 간의 피신생활에서 아버지가 향리인 홍성을 들러 만주로 건너가려 하실 때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6개월의 태아가 되어 있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백발노인으로 변장하고 여정에 오르게 되었다. 기약 없는 이별을 서러워하는 어머니께 아버지께서는 “혁명가는 예고 없이 떠나는 법이오”라고 말할 뿐 냉정을 견지했다고 한다. 떠나는 아버지를 붙들고 어머니께서 태아가 있음을 고하자 아버지는 아들을 낳으면 두한(斗漢)이라 하고, 딸을 낳으면 두옥(斗玉)이라 부르라 하시면서 홀연히 집을 떠나셨다고 후일 어머니가 말해주었다. - 김두한, 백야의 피난처가 나의 산실,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 김두한 회고기 1963.
김좌진이 사직공원 뒤 야산에서 백린, 윤성 등 30여 명의 독립투사들과 만난 사실 자체가 없다. 따라서 김좌진은 사직동에서 일본 경찰과 싸울 일도, 도망칠 일도 없었다.
김좌진은 1911년 서울에서 석유 판매 간판을 걸어 놓고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들통나 투옥되었다. 김좌진은 2년 6개월 간의 형을 마치고 1913년 9월 출옥한 후 바로 홍성으로 귀향해서 활동하다가 얼마 후 홍성 헌병대에 체포되어 10개월간 구금되었다. 김좌진은 1915년에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만주로 떠나기 전까지는 홍성을 기반으로 항일운동을 하였다.
박 상궁은 실제로 존재한 인물이었나?
상궁은 궁녀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직으로 정5품의 벼슬이다. 상궁은 다시 제조상궁, 부제조상궁, 대령상궁(지밀상궁), 시녀상궁, 보모상궁이라는 직책에 각각 임명된다.
상궁이 되려면 궁에 들어 온 나이는 각각 달라도 10대 후반 같은 나이가 되면 함께 계례를 치루어 정식으로 나인이 되고 난 이후 15년을 넘겨야 한다. 궁녀가 다시 사회로 복귀할 수 있는 통로는 궁에서는 오직 왕족만 죽을 수 있다는 궁의 법도에 따라 곧 죽기 직전에야 요금문으로 나가는 길이었다. 궁에서 나온 죽기 전의 궁녀들은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서 궁녀 마을을 이루며 살거나, 봉은사나 대각사 같은 서울 안에 있던 절에 시주하고 임종을 준비했다.
즉 박 상궁이 상궁 신분으로 궁 밖으로 나가려면 임종을 맞이한 늙은이거나, 죽음을 앞 둔 불치병 환자여야 한다. 그런데 죽음에 임박한 상궁 신분이 궁 밖으로 죽음을 맞이 하려고 나가면, 궁에서는 따로 궁녀들을 딸려 보내 죽음을 확인하고 장례를 마친 다음에야 복귀해서 그 과정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설령 처녀적에 궁 밖으로 나왔다고 해도 남자와 결혼할 수 없다. 나인이 되는 계례의식을 할 때 머리를 올려 형식상 왕과 결혼하여 왕의 부인이 됐기 때문에 평생 수절해야 한다. 따라서 퇴역한 상궁에게 다른 남자의 성씨를 가진 딸이 있으면 아이의 아비 포함해서 중형을 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박 상궁이 궁을 떠나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려면 기존의 대한제국 국법을 깨뜨릴 아주 강력한 사건이 발생해야 한다. 박 상궁이 상궁 생활을 얼마나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신체적으로 임신 가능하다고 가정하고, 일본이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후, 궁녀를 쫓아내던 1911년 초에 궁을 나와 그 해에 바로 결혼하여 박계숙을 낳았다고 쳐도 딸 박계숙은 1917년에는 겨우 6살의 여자 아이다. 만5세 아이는 임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김두한은 1918년에 태어날 수 없다.
의문으로 가득 찬 김두한의 출생
"6개월 간의 피신생활에서 아버지가 향리인 홍성을 들러 만주로 건너가려 하실 때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6개월의 태아가 되어 있었다."
- 백야의 피난처가 나의 산실,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 김두한 회고기 1963.
김두한은 나이만큼은 일관되게 1918년생임을 주장하고 있다. 생월일은 음력 5월 15일이기에 양력으로는 6월 28일이다.
김좌진은 1915년 11월 최익환, 이기필, 감익룡 등과 군자금 모집 중에 또 체포되어 예심에서 무혐의로 풀려 났다. 이후 중국 안동에서 중국 화폐를 위조해서 진폐와 교환하여 군자금으로 쓸 계획을 세웠다. 김좌진은 송인황, 김광렬, 김석연, 김석범 등과 함께 홍성에서 1917년 5월부터 위조지폐 사업을 위한 군자금 조달에 나섰다. 일본 경찰은 중국 안동에서 보고한 정보를 바탕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1918년 1월 홍성경찰서에 관련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이성우, 독립군 지도자 백야 김좌진장군, 통권270호 현대사회문화연구소 2000, 이성우, 1910년대 독립운동과 광복회 충청도 지부)
대한광복회는 김좌진을 만주 부사령으로 임명했고, 1917년 8월 16일 김좌진은 서울 종로 인사동 광복회 조직원 기생 어재하(魚在河)의 집에서 송별회를 갖고(울산포스트 2007.08.17), 1917년 9월에 서울에서 경의선을 타고 하루만에 봉황성을 거쳐 만주에 도착했다.(박영석, 백야 김좌진 연구, 국사관논총 제51집 ) 당시 기차로 신의주에서 봉천(심양)까지는 6시간 걸렸다.
김두한의 주장대로라면 김두한은 출생 자체가 의문투성이다. 김두한은 김좌진이 자신의 태중 6개월째에 만주로 떠났다고 주장했다. 김좌진은 1917년 9월에 만주에 도착했다. 따라서 김두한은 이듬해 1월에 출생해야 정상이다. 그리고 잉태 되었을 때인 1917년 3월에는 김좌진은 위조지폐 사업을 지휘하기 위해 홍성에 머물고 있었기에 서울에서 김두한의 어머니를 만나는 일 자체가 발생할 수 없었다. 따라서 김좌진이 김두한의 어머니와 6개월간 동거했다는 주장은 틀린 말이다. 더구나 당시 통념상 결혼식을 마친 밤도 아니고 부모가 있는 집에서 낯선 남녀가 얼굴을 보자 마자 몇 시간 뒤부터 잠자리를 함께 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박 상궁은 날조된 인물이다. 아니면 성인 박계숙의 과거를 철저하게 조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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