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법적 부인 박승선이 있는데도 프란체스카와 혼인신고 하다.
이승만이 죄가 없어서 얼마 뒤에 풀려났을텐데도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감옥서 병원에서 만난 동료 죄수들의 협박과 회유에 넘어가 1899년 1월 30일 함께 탈옥하다 잡혀서 진짜 죄인이 되자 이승만의 부인 박승선은 3월에 적극적으로 구명 호소에 나섰다. 3월 23일부터 황제에게 바치는 상소문을 들고 인화문 밖에 엎드려 자기를 가두고 남편은 풀어 달라면서 대신 죄를 청하기 시작했다.1
27일에 궁내서 순검이 이승만의 부인 박승선에게 일전에 칙임관 외에는 황제에게 직접 상소 할 수 없도록 법규가 정해 졌으니 상소할 일이 있으면 중추원에 헌의하라고 하면서, 중추원 회의를 통해 가결되면 의정부에 통첩하고, 의정부에서 황제에게 상주할 것이라고 알려 주자 박승선은 중추원에 가서 헌의를 신청하였다.2 그러나 중추원은 헌의할 조건이 아니라면서 거절해 버렸다.3
박승선은 중추원이 헌의를 받아 주지 않자 29일에는 돈례문으로 자리를 옮겨 엎드려 상소하던 중 경무사가 총순에게 손을 끌고라도 강제로 물리쳐 보내라는 명령을 내리자 집으로 돌아 가야만 했다.4
박승선은 본은 음성이고, 1875년 음력 6월 9일(양력 7월 11일) 부 박백계와 모 이씨 소생으로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 오봉산 고천 마을 쪽 기슭에서 태어나,5 이후 황해도 연백군 관천리 59번지에서 생활하였다.6
박승선이 두 살 무렵 남편이 죽고, 젊은 과부는 업어 간다는 말이 귀에 들어 오자 박승선의 어머니 이씨 부인은 서울 남산 아래 용산구 후암동에 있는 친정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7 박승선에게는 박병선이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이승만의 아버지 이경선은 조상대대로 살던 황해도 해주를 떠나 황해도 평산으로 옮겨 살다가 이승만이 태어나 3살이 되자 서울로 이사를 했다. 남대문 밖 종로 2가 염동에 살다가 서울 중구 낙동으로 옮긴 뒤 이승만이 11살 때 서울 용산구 후암동으로 이사를 하였다.8 이승만은 아버지 이경선이 술로 재산을 탕진하였기 때문에 자주 이사를 다녔다고 하였다.9
이경선이 술을 좋아하여 재산을 탕진하여 점점 집을 줄여 나갔다는 말이 타당한 것은 서울에서만 해도 이경선이 이사한 경로를 보면 4대문에서 점점 멀어 지면서 더 싼 집을 찾아 옮긴 것에서 알 수 있다.
동갑내기인 이승만과 박승선은 16살 때인 1891년 결혼을 하였다.10
이승만이 박승선과 결혼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 박승선은 이승만의 아버지 이경선이 얻은 점괘를 내세우고 있다. 이경선은 6대 독자 이승만을 혼인시키려고 점을 쳐서 맹인에게 장가를 가야 출세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경선은 진짜 맹인에게 아들을 장가 보낼 수 없어서 고민하다가 마침 앞집에 사는 박승선을 보게 되었는데 오른쪽 눈 언저리에 약간 푸르스름한 반점이 있기에 그 것을 액땜이라고 생각하여 아들과의 결혼을 주선했다는 것이다.11
박승선이 양아들 이은수에게 구전한 바에 따르면 1896년에 첫째 아이를 사산했다고 한다.12 그리고 나서 1898년 12월 아들 이봉수(아명 이태산)를 출산하였다. 계속 애를 태우다가 결혼한지 무려 7년만에 태어난 아들이니 6대 독자 집안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처음부터 박승선과의 결혼 생활을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박승선에게서도 느껴진다. 박승선은 양아들 이은수에게 결혼한 이후로 내외가 한 번도 말다툼 한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같은 을해생으로 산꼭대기에 난 불(山頭火 산두화)과 같아서 서로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13
박승선은 남편을 위해 무려 7일간이나 궁 문 밖에서 엎드려 자신을 대신 가두고 남편을 풀어 달라고 매달리다가 옥중 뒷바라지를 하게 된다. 반대로 자신을 위해 고생한 박승선을 향한 이승만의 애정을 찾아 볼 수 없다.
이승만이 감옥서 안에서 쓴 옥중세모14라는 한시에서 솜 옷 부쳐 준 아내가 보고 싶다고 했고, 회인15이라는 한시에서는 규방의 세월일랑 빨리 흐르게 하지 마라는 등 박승선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고 하지만 그냥 시를 위한 시에 불과했다.
이승만이 귀국해서 1955년에 쓴 제석이라는 한시를 봐도 알 수 있다. 平生除夕客中過 鄕思年年此夜多 異域送迎慣成習 在家還復憶歸家(평생을 섣달 그믐 나그네로 지내며, 고향 생각이 해마다 이 밤에 많아지는, 낯선 곳에서 보내고 맞이하다 보니 습관이 되어, 집에 있어도 집으로 돌아 가려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네)라고 하고 있다.
이 시에서 이승만이 말하는 진짜 자기 집으로 생각하는 집은 조상이 대대로 살던 황해도 해주 집도 아니고, 자신이 태어 난 황해도 평산 집도 아니고, 어린 시절을 보낸 서울 종로2가 염동 집이나 중구 낙동 집도 아니고, 박승선과 결혼 생활을 했던 용산구 도동 집도 아니며, 프란체스카와 살던 돈암장도, 경무대도 아니다. 그냥 시를 위해 쓴 집이라는 단어에 불과하다.
자신을 드러내고 미화하는 내용을 심지어 조작까지 해가면서 문자로 남기기를 즐기던 이승만이 감옥에서 남긴 기록 가운데 박승선에 대한 애정을 담은 비망록은 한 줄도 없고, 보낸 편지도 한 통 없다.
이는 이승만이 미국에 가서도 박승선에게 애정을 담은 편지 한 통 보내지 않은대서도 확인할 수 있다. 태극기와 음력과 양력이 같이 있는 달력을 보내 달라는 요구마저도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전하였다.
이승만이 자기 부인 박승선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면 자주 안부 편지를 부치고, 늘 이용하던 전보도 자주 쳤을 것이다. 거기다가 박승선을 아들 이봉수와 함께 하루 빨리 미국으로 불러 들이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부인이 곁에 있으면 객지 생활이 외롭지 않은 법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박승선을 불러 들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오직 아들 이봉수만 미국으로 불러 올 생각만 했다. 이승만이 미국에 온 때는 1904년 11월 28일로 이승만은 자신이 미국에 도착한지 불과 7개월만에 아들 이봉수를 미국으로 불러 들인다. 이승만은 자기 신분도 불확실하여 앞가림조차 하지 못하면서도 아들 이봉수를 일찍 불러 들인 까닭은 어린 아들을 미국 학문으로 키우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박승선이 시아버지 이경선 몰래 아들 이봉수를 미국에 보냈다고 하는 설이 있으나 정황이 맞지 않다. 왕처럼 군림하려는 독단적인 성격의 이승만은 평소에도 부인 박승선과 일을 상의하여 처리한 적이 없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버지의 이해 없이 이태선을 미국으로 불러 들였다면 부자간의 사이가 나빴다는 것이 되고 만다.
이승만은 아직은 자신이 도움을 받는 처지라 우호적인척 박용만에게 부탁하여 1905년 6월 4일 아들 이봉수를 미국으로 데려와서 처음에는 주미 대리공사 김윤정에게 맡겼다. 이승만이 자신의 아들을 선뜻 맡길 정도로 김윤정과 친했지만 나중에는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 대통령 면담후 교포일지라도 미국 국적을 가졌기에 미국 시민들인 하와이 거주 한국계 미국인들의 청원서를 말도 안 되게 대한제국의 공식 외교 문서로 만들라는 자신의 부탁을 거절했다고 평생 김윤정에게 매국노라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여름 방학이라 이승만은 휴가 겸 해서 이봉수를 데리고 선교사 조지 히버 존스(George Heber Jones)가 자신에게 소개한 필라델피아의 보이드(Boyd) 여사 집으로 찾아가 생활하다가 방학이 끝나자 맡기고 떠났다.16 이봉수는 1906년 2월 25일 회충약을 먹기 위해 금식하던 중 디프테리아라는 질병에 걸려 사망하고 만다. 이승만과 박승선을 연결해 주던 유일한 혈육마저 사망함으로써 이승만의 마음은 박승선에게서 완전히 멀어졌다.
이승만이 박승선을 미국으로 부를 생각이 없었다는 것은 여러 부분에서 보였다.
우선 당시에 결혼한 많은 여성들이 성만 있고 이름이 없었듯이 박승선도 처음에는 박씨 또는 박소사라고 불렸지 본명이 없었다. 이승만 부인 박씨는 1917년에야 자기 이름을 박승선이라고 지어서 신고하였다.17 그런데 박승선이 자기 이름을 만들고 처음으로 한 일은 갖 태어난 이은수를 양자로 입적한 일이었다. 이로 보아 이승만이 박승선을 미국으로 불러서 미국에 가려고 이름을 만든 것이 아닌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승만이 박승선을 현대 여성으로 변화 시켜서 미국으로 불러 들일 생각이었다면 이봉수가 미국으로 오기 전 반년 동안 시간이 있었을 때 박승선이 서양식 교육을 받도록 했어야 정상이었지만, 정작 박승선은 1911년에 일본 장기로 유학을 갔다.18
이승만이 귀국하기 전 박승선은 개종을 해서 상동 예배당에서 서양인들에게서 영어를 배우며 생활하다가 1910년 10월 10일 이승만이 귀국하자 반갑게 만나러 갔지만 이승만은 차갑게 대했다.19
6년 만에 귀국한 이승만은 부인 박승선에게 떠나는 선교사를 따라 일본으로 가서 영어를 배우라는 상황에 안 맞는 말을 했고, 박승선은 남편 이승만이 하라는대로 1911년 12월 말에 일본 장기로 영어 공부를 하러 갔으나, 병을 얻어서 3개월만에 귀국하였다.
이승만은 6년만에 재회한 부인과 함께 하지 않고서 5월과 6월에 한 달 넘게 서울 YMCA 브로크만(Frank M. Brockman) 협동총무와 함께 전국 순회전도에 나섰다.20 이후에도 이승만은 서울 YMCA 건물 3층에서 먹고 자고 하다가 1912년 3월 26일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가버렸다. 박승선이 장기에서 귀국해서 창신동 625번지 집에 돌아왔더니, 함께 미국으로 가겠다고 했던 남편 이승만은 알리지도 않은채 몰래 미국으로 떠나고 없었다.
1923년에서 1924년까지 2년 동안 이승만이 쓴 가계부를 보면 지출 항목에서 자기 부인 박승선을 위해서는 단 1센트도 쓰지 않았다.21
이유 없이 남편의 사랑을 못 받은 젊은 아내 박승선은 돈 나올 데도 없는대도 술로 재산을 탕진한 늙은 술 중독자 시아버지를 끝까지 봉양하다가 사망한 뒤에는 시집 간 시누이가 둘이나 있어도 나서지 않자 연고자로 나서서 혼자서 장례를 치루고, 평산군 신암면에 있는 6,000평이나 되는 묘역을 팔아 치우지 않고 고스란히 소유주를 남편 이승만으로 해서 이전해 놓고서22 33년을 더 수절하며 기다리다가 끝내 배신당할 정도면 며느리와 아내의 도리를 다 하고서 이승만의 마음이 돌아 오기를 기다렸다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런데 기독교인 이승만은 집에 생활비 한 푼 보내기는 커녕 하와이 교민들이 주는 독립 자금으로 오스트리아 출신 과부 프란체스카와 바람을 피우다 박승선과 이혼도 하지 않은채 프란체스카와 결혼식도 하면서 이중 결혼을 해서 미국에 결혼신고를 따로 하는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
기독교에서도 절대 용납하지 않는 죄악이다. 기독교인 행세를 하던 이승만에게는 아내 이외에 여자를 탐하여 음란을 일삼았으니 죄악이고, 천주교 집안 프란체스카에게 있어서도 남의 아내만 탐한다고 10계명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남의 집 남편을 탐해도 10계명을 어기는 죄악이다.
나아가 기독교인을 자처하던 이승만은 한인기독학원을 건립한 후 날마다 진행한 채플 설교 시간에 한인 남자는 한인 여자와 결혼해야 하고, 한인 여자는 한인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강조한 자신의 가르침을 스스로 위배하고 말았다.23 이는 이승만 자신이 정한 한인기독학원 지침 가운데 두번째 항목인 한국인의 주체성 확보마저 어긴 것이다.24
프란체스카가 이승만이 법적 혼인 상태로 법적 부인이 있는 남자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25살의 나이 차이를 무릅쓰고써 이중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승만이 노총각 행세를 하며 프란체스카를 속였다는 소리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이승만은 4.19 시민혁명으로 쫓겨나기 전까지 언론을 통제하여 자신이 이전에 결혼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감추었다는 점이다.
이승만이 이중 결혼을 하고도 숨겼기 때문에 국민들은 무려 1년 동안이나 이승만의 불륜 상대 프란체스카가 이승만의 법적 부인인줄 알고 영부인으로 인정하며 속은 것을 생각하면 분노할 일이다. 현대사에서 불륜녀를 영부인으로 내세워 국민을 속인 대통령은 이승만이 전세계에서 유일할 것이다.
1948년 8월 15일부터 1949년 8월 27일까지는 이승만 대통령 영부인은 박승선이다.
해방을 맞아 귀국한 이승만 곁에는 서양 여자가 다정하게 서 있었다. 박승선이 들인 양자 이은수가 어머니를 대신하여 아버지 이승만을 만나러 돈암장에 찾아 갔으나 비서 임영신의 훼방으로 만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25 이는 이승만의 지시로 보인다.
1949년 5월 16일 이승만은 이기붕에게 시켜 친족관계 부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하였고, 피고들의 주소지가 파악되지 않는다는 거짓 이유로 궐석재판으로 진행하여 원고 이승만 승소 판결을 내리고 이승만의 호적에서 부인 박승선, 양아들 이은수와 손자 손녀 등 7명을 모조리 제적시켰다고 당시 담당 판사 한격만이 언론에 밝혔다.26
그런데 한격만은 박승선이 재혼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재혼을 하려면 먼저 이승만의 호적에서 이혼사유로 제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박승선은 이승만이 몰래 박승선을 호적에서 제적하기 전까지 이승만의 법적 부인이었다.
가족들 모르게 자신의 호적에서 가족들을 제적시킨 이승만은 1949년 8월 28일 일체의 가족관계를 법률상 말소하고서 종로구 이화동 1번지로 호적을 전적한 다음, 이듬해 1950년 4월 프란체스카와의 혼인신고를 종로구청에 하였다.27
박승선은 서울시 숭의동에 있는 양아들 이은수의 13평짜리 집에서 손자손녀들과 함께 살다가 9.28 서울 수복 이틀 전에 북한 인민군이 살포한 유인물을 찢어버렸다는 이유로 끌려 간 후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28
- 독립신문 1899. 03. 25 남서 장동 사는 박부인이 자기 남편 감옥서에 갇힌 전 의관 이승만씨의 일로 상소를 받들고 그저께부터 인화문 밖에 엎대었다더라. [본문으로]
- 제국신문 1899. 03. 27 감옥셔에 갓친 즁츄원 젼 의관 리승만씨의 부인이 자긔를 가두고 자긔 남편을 노와 달나고 인화문 밧끠셔 샹소를 하너라고 잇흘을 업디엿더니 궁내셔 슌검의 말이 칙임관 외에는 샹소를 못하기로 향일 관보에 쟝뎡이 낫고 샹소 할만 한 일이 잇스면 즁츄원으로 헌의하면 즁츄원에셔 회의하야 의졍부로 통쳡하면 의졍부에셔 샹쥬하는 거시어늘 여긔셔 백날을 잇슬지라도 격식이 틀녀 그 샹소를 밧아 드리지 못하겟스니 즁츄원으로 가라 하기로 그 부인이 즁츄원으로 가셔 헌의셔를 드린다더라. [본문으로]
- 독립신문 1899. 03. 28 남장동 사는 박부인이 자기의 남편 감옥서에 갇힌 전의관 이승만씨의 일로 상소를 받들고 궐문 밖에서 대죄하더란 말은 이왕 기재 하였거니와 장소 구폐 조목이 나린 후에는 칙임관 외에 바로 상소를 못한다 하는 고로 박부인이 어저께 그 헌의서를 안고 중추원에 들이려 하거늘 중추원에서 말하기를 중추원에 헌의할 조건이 아인즉 받을 수 없노라하여 도로 보냈다더라. [본문으로]
- 제국신문 1899. 03. 29 경무사가 춍슌의게 지휘하되 돈례문 밧게셔 샹소하는 리승만씨의 쳐를 효유야 만일 아니 가가거든 손을 잇글고라도 물니쳐 보내라고 하엿다더라. [본문으로]
- 한국일보 1975. 03. 18 3면 인간 이승만, 한국일보 1975. 03. 18 3면 서울동대문구청에 이승만 박사의 제호적이 남아 있다. 이 제호적의 기록은 여러가지로 말이 엇갈렸던 이승만 박사의 첫번째 결혼을 풀이하는 실마리가 된다. 제호적에 나타난 이박사의 본적은 경성부 창신동 625. 사유란의 첫번 기술은 명치45년 3월17일 경성부 견평방 수전동 22통 8호로부터 전거란 것이다. 그리고 호주 이승만에 대한 기록으로 전호주 이경선의 사망으로 인하여 대정원년12월4일 호주가 됨이라고 적고 있다. 이로써 보면 이박사의 창신동 취적은 1912년(명치45년과 대정원년은 같은 해이다)이후의 일이다. 4.19 뒤 처음 공개된 이 제호적(한국일보 1960년9월17일자)이 화제를 모았떤 까닭은 박씨 부인의 존재가 처음으로 일반에 알려 졌고, 이은수라는 이름이 장남으로 등재돼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이 제호적 자체에도 모를 점이 많았으나, 지금은 여러가지가 밝혀졌다. 먼저 제호적에 의하면 박씨 부인의 본은 음성. 아버지 박백계씨와 어머니 이씨 사이의 장녀로 1875년생이다. 생일은 음력 6월9일(이박사의 생일이 2월 19일의 음력인 것으로 보아 박씨의 생일도 음력일 것이다). 따라서 이박사와는 4개월 어린 동갑이다. 그리고 제호적은 취적 당시 박씨라고만 했던 부인이 1917년 박승선이라고 명명하여 신고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본시 우리나라 여인들은 이름이 없다가 호적제도의 정비와 함께 이름을 지었고, 남편의 이름 자를 따서 명명하는 일이 흔했다. 승선이라는 이름도 비슷한 경우 같다. 다만 해외에 망명중이던 이박사는 부인의 명명과는 무관할 것이다. 다음은 제호적상의 장남 이은수씨(58)다. 현재 인천 숭의동에 살고 있는 은수씨는 박씨 부인의 양자다. 따라서 은수씨를 이박사의 친자로 기록한 제호적은 사실과 다르다. 그러나 은수씨는 박씨 부인 그리고 이박사의 첫번 결혼에 관한 가장 중요한 증인이다. 한가지 예로 이박사와 박씨 부인이 동갑이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은수씨는 어머니는 혼자 지내시는 외로움 속에서 이런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같은 을해생 산두화(山頭火)라 잘 안맞는가 봐. 그래서 저는 부모가 동갑이라 알고 있었습니다. 박씨가 태어난 곳은 경기도 시흥군이다.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으나 오봉산의 고천 마을 쪽 기슭이라고 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고천이란 시흥군 의왕면 길천리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박씨는 두 돌이 되기 전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젊은 과부를 업어 간다는 말에 질린 어머니 이씨는 딸을 데리고 서울의 친정으로 돌아 왔다. 친정 집은 바로 도동 남묘 곁에 있었다. 박씨 모녀는 이박사네와 비슷한 시기에 도동으로 이사온 셈이다. 이박사와의 결혼은 16세 때. 혼인이 이뤄진 경위에서 대하여 박씨는 재미 있는 얘기 한토막을 아들에게 들려 주었다. 6대 독자를 몹시 아꼈던 이박사의 아버지는 아들의 점을 친적이 있었다. 그때 나타난 점괘는 봉사한테 장가가야 출세한다는 것이었다. 이 일로 걱정을 하던 아버지 눈에 뛴 것이 외가에 의지하여 지내는 박씨였다. 박씨는 오른쪽 눈 언저리에 약간 푸르스름한 반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으로 봉사라는 점괘를 때우려 했다는 것이다. 이 혼담을 듣고 놀란 것은 승만 청년이었다.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을 했고 처녀가 정말 봉사인지 아니진 궁금했다. 그래서 그는 남묘 옆 처녀 집 부근에 잠복하여 처녀를 직접 보기로 했다. 박씨는 이 눈치를 채고 문 밖을 얼씬하지 않았다. 골탕을 먹이자는 짓궂은 생각이었다. 승만 청년은 며칠을 두고 잠복을 계속 했다. 3일이 지나자 박씨는 안됐다는 생각이 들고 한편으로 볼테면 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물동이를 이고 우물께로 나아 갔다. 밖을 지키던 총각은 신부감이 봉사 아님을 확인하고 돌아 갔다. 설화 속의 로맨스같은 얘기지만 이박사와 박씨의 성품을 짐작케 하는 얘기다. 은수씨가 전하는 박씨의 회고담은 전회에 살펴본 여러가지 이설중 이박사의 1891년 결혼설, 부부의 동갑설과 일치한다. 그리고 폭로기 이승만의 비밀과 흡사하다. 그러면 부부의 혼례는 어디에서 이뤄진 것일까. 도동에서 이뤄 졌다고 생각함이 상식적인데 황해도 평산설이 나오는 까닭은 무엇인가. 은수씨의 생각은 평산 쪽에 기운다. 어머니한테 물은 대로는 결혼 당시 이박사의 외할머니 고씨가 고향에 생존해 있었으며, 결혼 뒤 3개월 동안 도동 집에 머물다 갔다는 것이다. 이박사는 그때까지 일가친척이 많이 살던 고향에서 혼례를 하고 외할머니와 함께 상경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올리버 박사가 이승만에 적었던 이박사의 22세 결혼설이 그의 첫아들 태산의 나이와 들어 맞는다는 점은 전회에 지적했다. 이에 대하여 은수씨는 중요한 반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박씨는 은수씨를 내 세째 아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태산을 낳기 2년전 박씨는 첫아기를 사산한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태산의 나이를 근거로 결혼한 시기를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들에게 여러가지 회고담을 들려주는 가운데 박씨는 우리 내외는 결혼한 뒤 한번도 말다툼 한 적이 없었다고 여러차례 강조했다고 한다. 이 말은 적어도 결혼초기 이박사의 첫번 도미 때까지는 사실이다. 그러나 1910년 1차 귀국했을 때는 이미 사정이 달라졌던 것 같다. [본문으로]
- 경향신문 1965. 08. 09 수수께끼 속에 파묻혀 있던 전대통령 고 이승만 박사의 호적이 그의 사위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약 1개월전에 호적등본을 내감으로써 의문의 화제를 일으켰다. 고 이박사는 1916년 3월 18일 그의 아버지 이경선(1835년6월12일)씨가 사망함으로써 호주가 됐는데, 이 당시의 호적등본에 의하면 이박사는 청년회 학생부 총무로서 부인 박승선(91 생사불명)씨와 장남 은수(49)씨, 며느리 안연옥(47)씨 그리고 장손 양일(23), 손녀 영자(23), 한라(20), 명신(18) 등 일곱 식구로 호적에 기재되어 있다. 이박사의 호적부와 그의 아버지 고 이경선씨의 호적부에 나타난 그의 가족 관계를 살펴 본다. 이박사는 그의 아버지 이경선(1835년6월12일생)씨와 할아버지 이규창(서울 창신동=구경성부 산종신방 홍수)동 9통 2반)씨를 선친으로 가지고 있음이 이경선씨의 흔적에 의해서 나타났다. 이경선씨의 호적에 의하면 이박사는 이경선씨와 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인 박씨와 결혼한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부인 박씨는 박백계씨와 이씨 소생으로 태어나서 황해도 연백군 연백읍 관천리 59에 살고 있었음도 확인됐다. 이박사는 그의 아버지 이경선씨가 1912년 12월 4일 사망. 1916년 3월 18일 호주가 됐는데 그 당시의 이박사는 서울 창신동 625에서 살면서 부인 박승선씨 등 가족 7명을 호적에 입적시킨 것이다. 그의 호적에 의하면 직업은 청년회 학생부 총무로 되어 있다. 고 이박사의 당시 호적은 초대 대통령 당시 1949년 7월 28일 당시 서울지방법원의 허가에 의해서 8월 28일 일체의 가족관계가 법률상 말소, 이화장인 종로구 이화동 1번지로 전적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 4월 프란체스카 여사와 결혼 신고를 종로구청에 냄으로써 그의 가족은 오늘날까지 그의 호적에서 찾아 볼 수 없게 됐다. 그의 적자로 알려진 이은수(49)씨는 인천시 모교회 장로로 있으면서 처자 등 6식구를 거느리고 있다. 또 고 이박사의 부인으로 되어 있는 박승선씨는 6.25당시 행방불명됐다. 이 가족들은 황해도 연백군에서 살다가 1.4 후퇴 때 월남한 것으로 알려 졌다. 이박사의 호적부에 의하면 본부인 박씨와 결혼한 날짜가 없고, 장손과 장손녀(1943년7월15일생)는 쌍둥이임도 밝혀 졌다. [본문으로]
- 한국일보 1975. 03. 18 3면, 같은 기사 [본문으로]
- 손세일, 孫世一의 비교 傳記 (1) -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월간조선 2001년 8월호 (중략) 그리고 지리상으로 해주는 한양과도 그다지 두절된 곳이 아니었다. 이런 조건 때문에 李璜이 이곳을 이주지로 삼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략) 敬善은 집을 줄여 평산으로 이사했다. (중략) 한양으로 올라온 敬善은 처음에 남대문밖 鹽洞(염동)에 자리를 잡았다가 이태 뒤에 駱洞(낙동)으로 옮겼고, 承龍이 열한살 되던 해에 다시 至德祠(지덕사)가 있는 桃洞의 雩守峴(우수현) 밑으로 이사했다. 雩守峴은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을 때에 기우제를 지내는 마루턱이었다. 李承晩은 이 雩守峴 밑의 오막살이집에서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았다. [본문으로]
- 이정식,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젊은 시절, 248쪽 한때 그는 부자였으나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 나의 모친에 의하면 내가 태어날 무렵 집안에는 재산이 없었다고 한다. 너의 아버지는 여자나 도박에는 흥미가 없었지만 친구와 술을 위해서는 있는 대로 모두 내놓았다는 것이었다. 그가 친구들과 술잔을 주고 받을 때엔 세상에 어떤 일도 그보다 더 귀한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 한국일보 1975. 03. 18 3면, 같은 기사 [본문으로]
- 위의 기사 [본문으로]
- 위의 기사 [본문으로]
- 위의 기사 [본문으로]
- 이승만,「獄中歲暮」,채역집 談懷夜夜抵晨鷄 却感流光憶舊 人與蟄蟲深處穴 臘梅酒熟思供老 新絮衣來戀見妻 屈指今冬餘十日 三年驥繫閑蹄 [본문으로]
- 이승만,「懷人」,채역집 莫敎閨裏歲華流 其奈鏡鸞孤影遊 獨鳥頻驚羈枕月 歸鴻遙帶故園秋 每因思苦歌蓮曲 幾度愁添上柳樓 欲問他鄕憔悴意 人間離別恨難收 [본문으로]
- Robert Tarbell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Dodd Mead and Company 1954, 101~102쪽 [본문으로]
- 한국일보 1975. 03. 18 3면, 같은 기사 [본문으로]
- 이은수 은터뷰 LA. 1998. 11.20,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63쪽 재인용 1911년 일본 나가사키에 3개월 동안 유학했고, 1923~1927년간 보종학원이란 학교를 운용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 강준식의 정치비사, 대통령 스토리 이승만 ① 월간중앙 2010년 3월호 그 무렵 박씨 부인은 남편이 있는 미국으로 갈 생각으로 상동예배당의 서양부인에게 영어를 배우며 따로 살고 있다 남편이 금의환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으나 이승만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본문으로]
- 맹청재, 이승만의 종교활동과 종교정책에 관한 연구, 목원대학교 2004 31쪽 이러한 선교활동의 연장으로 그는 1911년 여름(5~6월)에 서울 YMCA의 브로크만(Frank M. Brockman) 협동총무와 함께 한달 이상 전국을 돌아 다니며 순회전도를 했다. 이때 그는 「기차를 타고 1,1418마일, 배를 타고 550마일, 말 또는 나귀를 타고 265마일, 우마차를 타고 50일 마일, 걸어서 7마일, 가마 또는 인력거를 타고 2마일」 도합 2천3백마일(3천7백 킬로미터)을 누비면서 13개 선교구역을 방문하고, 33회의 집회에서 7,535명의 학생을 만났다. 그는 남으로는 광주, 전주, 군산까지 북으로로는 평양, 선천까지 방문하여 그 지방 학교들에 학생 YMCA를 조직하고, 기독교 유지들과 인연을 맺었다. [본문으로]
- 이덕희,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북앤피플 305~322쪽. 이승만이 자신의 여러 기록들을 날조하였기에 이 가계부 역시 신뢰하기 힘들다는 점이 있다. [본문으로]
- 손세일, 孫世一의 비교 평전 (23) -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월간조선 2004년 1월호 그의 부의록 끝에 平山郡新岩面에 있는 2정보의 그의 묘역 지도와 함께 「山主 李承晩」 「緣故者 朴承善」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본문으로]
- 손세일, 孫世一의 비교평전(28)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월간조선 2004년 6월호 이승만은 매일 있는 채플시간에 설교를 했는데, 그는 남학생들에게는 한국여자와 결혼할 것, 여학생들에게는 한국남자와 결혼할 것을 강조했다. [본문으로]
- 이덕희,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북앤피플 102쪽 초대 교장은 한인여학원의 교사였던 핫슨(Mabel Hartson) 여사였다. 한인여학원의 영문 정관에 학교의 목적이 순전히 교육과 자선(purely educational and eleemosynary purposes)이라고 간단히 언급하고 있었는데, 이 목적 이외에 이승만은 한인기독학학원을 위해 4가지 지침을 작성해 두었다. 첫째는 교육과 종교 활동을 지향하는 것이며, 둘째는 한국인의 주체성을 확보하는 것이며, 셋째는 젊은이들의 지도력을 양성하고 기금 모금을 하며, 넷째는 사회교육을 지향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 동아일보 1965. 08. 09 어릴 때 고 이승만 박사이 양자로 입적되었다가 자신도 모르게 제적된 이박사의 양자 이은수(49 인천 숭의 감리교회 장로)씨의 거처가 최근 밝혀져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씨는 10세 때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 625에 살던 이박사 부인 박승선씨에 의해 양자로 입적 8.15 당시까지 박여사와 같이 평양 진남포 등지로 전전 했는데 당시 서울 동대문 구청 호적에는 이 박사와 박여사, 이씨 그리고 이씨의 처 강씨와 이씨의 딸 셋 등 7명이 올라 있었다고 한다. 이씨는 이박사 환국후 돈암장으로 이박사를 만나러 갔으나 임영신 여사(당시 비서실장)가 면회를 안시켜 주었다고 한다. 그후 49년 이박사가 동대문 구청에서 종로구청으로 전적을 할 때 이씨도 모르게 부인 박씨와 이씨 등 6명은 호적에서 말소되고, 종로구청 호적상에는 프란체스카 여사와 이박사와의 혼인계출이 되어 있더라고 이씨는 말하면서 자기는 적자가 아닌 양자임을 밝히고 일부 신문보도가 잘못됐음을 지적했다. 이와같이 말한 이씨는 혈연관계 없는 양자로 입적 되었떤 나는 그들을 마음의 어버이로서 길이 모실 뿐 이제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이박사의 유해가 운구돼 오기 전날도 아무도 모르게 이화장으로 조상을 다녀 왔다고 하는 이씨는 현재 양공사(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 27의 6)에 적을 두고 건축업에 종사, 이곳 숭의동 집(건평13평)에는 장녀를 출가 시키고, 5남매 7식구가 중류 생활을 하고 있는데 9.28 수복 2일전 공산북괴 비라를 찢었다고 박승선씨는 북괴군에 납치된 후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본문으로]
- 동아일보 1965. 08. 10 고 이승만 박사의 양자로 입적되었던 이은수(49)씨가 그의 말대로 자신도 모르게 호적에서 제적된 경위가 당시(49년5월16일) 이박사가 원고가 되어 제기했던 친족관계 부존재 확인소송을 담당했던 한격만씨에 의해 확인되었다. 동사건은 당시 서울지방법원장 한격만(현신문윤위원장)씨를 재판장으로 한 재판부가 심리, 피고측이 출정하지 않은 가운데 궐석재판으로 원고측에 승소판결된 사실이 9일 확인되었다. 당시 재판장이던 한격만씨는 이날 사실 조사를 충분히 한후 내린 판결이며, 당시 경찰에 지시해서 피고에 대한 소재 수사를 했으나, 소재불명이었다. 사실 조사에서 이씨가 본부인 박승선씨와 협의 이혼, 부인 박씨는 개가했던 것으로 밝혀 졌다. 당시 이 소송은 이기붕씨 명의로 신청되었는데 원고가 대통령이라는 신분을 참작, 일체 보도관제를 했었다고 밝혔다. [본문으로]
- 경향신문 1965. 08. 09, 같은 기사 [본문으로]
- 동아일보 1965. 08. 09, 같은 기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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