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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에 찬 국방 홍보영화 인천 상륙작전이 아닌 숨겨진 작전 실화

허구인물 전우치 2016. 8. 4. 13:57

뉴스를 보니 지난 주에 국방 홍보영화 인천 상륙 작전을 개봉했다고 한다. 인천 상륙작전 준비 작전 중에서 엑스레이(X-Ray) 작전을 다뤘다고 한다. 그래서  인천 상륙작전 준비 작전 가운에 인천 앞 바다에서 국군이 수행한 작전들을 살펴 보았다.

 

 

인천상륙작전(작전명 크로마이트 CHROMITE) 준비 작전 중에서 국군이 인천 앞 바다에서 참가한 작전은 대표적으로 '리(Lee)' 작전, '엑스 레이(X-Ray)' 작전, '트러디 잭슨(TRUDY JACKSON)' 작전이다. 이 3개의 작전은 순차적으로 모두 하나로 연결되는 인천 상륙작전 준비 작전이다.

 

1. 남한 해군 사령관 미 해군 중령 루시


1950년 6월 29일, 국제연합군(United Nations Forces) 사령관 겸 미국 극동군 사령부(FECOM : Far East command) 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한강 방어선을 시찰한 후, 1944년에 JSC 924 B 문서로 수립해 놓았던 인천 상륙작전 계획을 실행할 생각을 하였다.


1950년 7월 4일, 맥아더는 서울에서 북한의 통신선을 끊는 것을 목표로 한 인천 상륙작전 회의를 열었다. 7월 22일을 작전 날짜로 정하였다.


7월 8일, 국군이 연패하여 후퇴를 거듭하자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 계획을 중단하였다.


7월 10일, 미국 극동 해군 사령부(NAVFE : United States Naval Forces Far East, 사령관 해군 소장 Turner Joy) 소속 중령 루시(Michael J. Luosey)가 남한 해군 사령관(the Commander, Republic of Korea Naval Forces)에 취임하였다.


루시는 부임 첫 몇 주간은 연합군 해군을 편제하였고, 병참 보급 체계를 수립하였다. 또한 연안 순찰 구역을 확정하였다. 군산에 국군 해병대 600명을 상륙시켰으나 북한군의 남진을 막기에 역부족하자 며칠 후 다시 재승선시켰다. 이후 2주간에 걸쳐 군산에서 단기 상륙 작전(short-duration landing operations) 훈련을 시켰다.


7월 22일, YMS 513이 철포 부근에서 보급선을 격침시켰고, 일주일 후 PC 702과 PC 703이 인천 서부로 보급품을 실고 가던 북한군 발동선 12척을 나포하였다.

 

7월 23일, 인천 상륙작전(작전명 크로마이트 Chormite)을 입안하였다.

 

7월 25일, 병력용 상륙정(Landing craft)은 7.62m의 조수가 필요했고, 전차 상륙정(LST)은 8.84m의 조수가 필요했는데, 인천 연안의 평균 조수는 7미터에 불과했으며, 최고 조수 높이가 10미터였다. 다가오는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에 조수 높이가 9.5m가 되지만, 전략적으로 효과가 가장 좋은 9월 15일을 인천 상륙작전 전개일로 판단하였다.


또한 조석표에 의하면, 만조 시간은 일출 45분후 06시 59분과 일몰 37분후 19시 19분이라서 상륙 작전을 일출 직후와 일몰 직후로 나누어 전개해야 한다는 개념을 수립하였다.


8월 첫째주, YMS 302이 합동작전으로 보급품을 운송하던 북한군 기동정과 범선을 파괴하였다.


8월 7일, 미국 극동군 사령부 작전참모부(G-3 Section)에 구체적인 인천 상륙작전 계획을 세울 합동 전략기획 및 작전단(JSPOG : Joint Strategic Plans and Operrations Group, 단장 작전참모장 준장 라이트(Edwin K. Wright)을 설치하였다.


8월 9일부터 전차 상륙정(LST)이 군산 근처 오창도에 군수품을 보급하였다.

 

8월 12일, 작전참모부(G-3) 합동 전략기획 및 작전단(JSPOG)에서 인천 상륙작전을 더 구체화 한 작전계획 100-B를 수립하였다.

 

8월 13일에서 20일까지 남한 해군은 15척의 적선을 격침시키고, 39척을 나포하였다. PC 702와 소해정은 많은 적선을 가라 앉히고 고립된 국군 병사들을 구출하였다.

 

 

2. 인천상륙작전 준비작전


미국 극동 해군 사령부가 남한 해군에 하달한 작전 목표는 영국 경순양함 케냐( Kenya )와 캐나다 구축함 애더배스큰(Athabaskan)의 지원을 받으면서 초계정과 상륙정을 이용하여 인천 근해에서 정찰 장비 운용, 기습, 섬 상륙전 등의 수행이었다.

 

1) 성공한 '리(Lee)'  작전

 

남한 해군 사령관 중령 루시는 남한 해군 1함대를 동원하여 덕적도와 영흥도를 점령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PC 702의 지휘 아래 PC-701, 704, YMS-513, JMS-301,307,309, PG-313이 캐나다 구축함 애더배스큰, 영국 경순양함 케냐의 화력 지원을 받으면서 합동으로 덕적도와 영흥도에 상륙하여 전투를 하도록 하였다.


상륙전 작전을 이끌 PC 702 함장 중령 이희정의 성을 따서 작전명을 '리'(Lee)로 정하였다.


8월 16일과 17일에 각 함정에서 차출한 110명으로 상륙 육전대를 편성하여 육전대장에 PC 702 항해장 중위 장근섭을 임명하였다.


8월 18일, 육전대는 06시 15분에 개시한 캐나다 구축함 애더배스큰, 영국 경순양함 케냐의 포격이 끝나자 06시 35분에 덕적도 남동쪽에서 상륙하여 감금 당한 주민 9명을 풀어주고 북한군 26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며, 08시에 덕적도의 가장 큰 마을인 진리를 점령하였다. 산을 넘어 북쪽 북리에서 발동선을 타고 도주하던 북한군 패잔병 7명을 생포하였다. 14시에 덕적도 작전을 종료하였다.


8월 19일, 육전대는 덕적도에 소년들로 구성한 대한청년단을 재조직하고 21시에 떠났다.


8월 20일, 06시 다시 영국 경순양함 케냐와 캐나다 구축함 애더배스큰이 함포 지원 사격을 계속하는 동안 북한군이 섬 안쪽으로 후퇴하자 영흥도 북쪽 2곳 돌출 해안에 상륙하였다.


8월 20일, 영흥도 포격을 마친 캐나다 구축함 애더배스큰은 무인도인 팔미도로 이동하였고, 대원들이 팔미도 등대에 설치해 놓은 통신 시설을 파괴하고 등대 출입문을 폐쇄하고 철수하였다.


8월 20~23일에 걸친 영흥도 산악전에서 북한군 6명 사살, 생포 33명, 소총 28정 노획 성과를 올렸고, 잡혀 있던 국군 육군 4명을 구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1소대 1분대장 일등병조 박동진 등 전사 4명, 부상 7명의 피해를 입었다.


8월 24일, 육전대는 함명수 정보대와 인수인계를 하고, 대한청년단을 조직한 후 영흥도에서 철수했다.


리(Lee) 작전을 통해 덕적도와 영흥도를 점령함으로써 이 두 섬 사이로 흐르는 인천까지의 유일한 뱃길인 동수도와 서수도를 안전하게 확보했다는 점은 전략적 가치를 지녔다.


2) 성공한 '엑스 레이(X-Ray)' 작전

 

8월 13일, 부산항 제1부두 해군 본부는 덕적도와 영흥도 점령 작전에 맞춰 해군정보국 소령 함명수에게 덕적도에 공작 거점을 만들 것을 지시하였다.


함명수는 해군 정보국 소속 중위 김순기, 소위 임병래, 소위 장정택을 각각 분대를 이끌 책임자로 선발하였다. 


8월 16일 17명의 함명수 공작대는 해양 공사 사무실에 집결해서 8월 17일 민간인 발동선 백구(白鷗)를 타고 부산을 출발했다. 도중에 목포 부근에서 고장이 나서 해군의 예인을 받아 대흑산도에 정박하여 고치고 나서 다시 인천 앞 바다 영흥도를 향해 뱃길을 나섰다.


8월 24일, 함명수 공작대는 소탕전으로 평정한 영흥도에 01시 30분에 도착하여 상륙 육전대와 만나 인수인계를 마쳤다. 소령 함명수는 해군 참모본부에 활동 거리상 덕적도보다는 영흥도가 더 적합하다고 건의하여 영흥도를 거점으로 확보하였다.


함명수 공작대는 영흥 초등학교를 본부로 삼았다. 중위 김순기는 인천에 고정 잠입하였고, 소위 장정택과 소위 임병래가 교대로 인천에 침투하여 접선하였다. 섬 경비는 육전대가 맡아 목포 경비부 소속 육전대 병조장 한봉규가 학병으로 구성한 20여명의 대한청년단을 이끌고 섬 경계 근무에 나섰다.


함명수 공작대는 먼저 인천 지역 기존 공작원 권 아무개와 김 아무개, 전 아무개를 찾아가서 만났다. 다행이도 이들은 변절하지 않았다. 마침 전 아무개가 인천 보안서에서 근무하고 있는 점을 적극 활용하여 인천 보안서 발행 통행증을 발급 받아 인천 출입의 자유를 확보하였다. 함명수는 대원들이 방어진지 구축 공사장 인부로 취직하여 병력과 장비의 이동과 월미도 고사포와 해안포의 위치를 탐지하고, 인천 서쪽 상륙 지점인 적색 해안의 암벽 높이를 확인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함명수는 통행증을 발급 받은지 3, 4일만에 엑스레이 작전을 종료하였다고 하였다.


함명수는 영흥도에 거점을 마련한지 7일후 미국 극동 사령부 작전참모부 예하 합동 전략기획 및 작전단 소속으로 육안 관측을 위해 영흥도에 도착한 미군 대위 클라크(Eugene F. Clark)에게 취합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3) 절반의 성공 '트러디 잭슨(TRUDY JACKSON)' 작전


(1) 인천 수로


서해에서 인천으로 진입하기 위한 수로는 오직 자월도, 소이작도, 대이작도, 사승봉도, 상공경도, 하공경도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덕적도 사이, 동쪽으로는 영흥도 사이의 뱃길만이 유일한 진입 수로다. 서쪽 수로를 서수도라 하고, 동쪽 수로를 동수도라 하였다. 동서 수도는 팔미도 앞에서 하나의 수로로 합쳐져 팔미도 서쪽으로 흐른다. 연합군은 이 합쳐진 수로를 '날으는 물고기 물길(Flying Fish Channel)'이라고 칭하였다. 맥아더는 인천 상륙 작전을 서수도를 선택하여 전개하였다.


(2) 대위 유진 클라크(Eugene Franklin Clark)

 

클라크는 1934년 징병제로 입대해서 1943년 장교로 진급하여 세계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865 전차 상륙정(LST 865) 정장을 지냈다. 미국 해군에서 16년을 근무한 39세의 클라크는 전차 상륙정 지휘 경험을 인정 받아 8월 7일에 편제해서 인천 상륙작전 계획을 수립하던 작전참모부(G-3) 예하 합동 전략기획 및 작전단(JSPOG : Joint Strategic Plans and Operrations Group)에 차출되어 지리 분과(Geographic Branch)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3) 통역관 해군 대위 연정(延禎)


연정은 일본 중앙대학교 졸업후 학도병으로 끌려 갔다가 해방 이후 좌익 조선학병동맹에 가입하였고, 1945년 8월 30일 설립한 좌익 조선국군준비대에서 외교부장을 맡았던 전력이 있다.


연정은 1945년 11월 09일 김구, 이승만, 여운형, 지청천이 고문으로 참석한 전국군사준비위원회 결성식 때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이 때 노선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후 연정은 군사 영어 학교에서 익힌 영어 실력으로 인천지구 해군 사령부 김포 파견대에서 소위 계급으로 복무하면서 1946년 10월부터  607 정보대(607th Counter Intelligence) 지휘관 소령 니콜스(Donald Nichols)를 알았다.

 

니콜스는 1951년에는 6004 공군 정보 중대(6004th Air Intelligence Service Squadron)로 초청 받았다. 니콜스는 북한군 후방에 있는 조도라는 섬에 잠입해 있다가 중공이 선을 보였으나 아직 미국이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소련제 미그-15가 1952년 4월 17일 격추 되자, 침투하여 잔해를 사진으로 찍고 각 부품을 기록하여 복귀한 공로로 수훈 십자 훈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을 받았다.


연정은 니콜스와의 인연으로 당시 한국어 통역관이 부족했던 미국 극동군 사령부에서 정보참모부(G-2) 예하 합동 특수 작전단(JSOB) 소속 제트 부대(Z‒Unit, 소령 잭 캐논(Jack Y. Canon))에서 통역관으로 활동 했을 것이다. 이후 미국 정부로부터 3개의 은성 훈장(Silver Star)을 받았다.


1949년에 일본 주둔 미국 극동군 사령부 정보참모부에 한국어 통역관이 겨우 2명 뿐이었다. 반면 일본어 통역사는 풍부하여 일본에서 활동하던 441 방첩대(441st CIC : 441st Counter Intelligence Corps)에는 일본어 통역사만 무려 1개 중대 인원이나 되었다.


연정은 휴전 이후 중령까지 진급하였으나 주일 미군의 힘을 배경으로 불법적으로 일본으로 출입국 하면서 자동차를 포함하여 온갖 상품 밀수를 통해 치부하였다.


(4) 예비역 육군 대령 계인주(桂仁珠)


계인주는 일본군 중령 출신으로 만주국 일본 대사관 무관으로 복무한 친일파다. 계인주는 1947년 수원 경찰서장이 되었으나 수원 검찰청과 반목하다가 5월 말에 양주 경찰서장으로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1948년 9월 초순 동대문 경찰서장직을 사직하고 군에 투신하여 1949년에는 중령 계급으로 김구 암살범 안두희 군법 재판에 배석 재판관으로 참여하였다. 1949년 8월 3~5일 사이에 대령으로 진급하여 여전히 안두희 군법 재판에 배석 재판관으로 근무하였다.


계인주는 안두희 재판이 끝나자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근무하였다. 육본 정보국 산하에 1948년 무렵에 생겨 난 육군 첩보대(육군4836부대) 관련 업무도 하였을 것이다. 육군 첩보대는 1950년 3월 혹은 7월에 영문으로 HID(Headqua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라고 표기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미국 극동군 사령부 정보참모부(G-2)  참모장 소장 윌러비(Charles A. Willoughby)가 마지막 미국인 점령군(American occupation troops)이 남한에서 일본으로 철수할 때 북파 공작 필요성을 인식하고 1949년 6월에 한국 연락소(KLO : Korea Liaison Office)를 만들었다.


1949년 12월에 한국 연락소(KLO 켈로) 소속 공작원 16명이 북한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한국 연락소(KLO) 소속 북파 공작원들은 1950년 3월 10일 보고서에서 북한이 남침 일정을 3월이나 4월에서 6월로 늦추었다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미국 극동군 사령부 정보참모부 참모장 윌러비는 3월 하순에 한국 내전이 봄 아니면 여름에 발생할 것이라고 발언하였다.


이후 북한의 6월 남침으로 인해 더 많은 인간정보 요원이 필요해짐에 따라 1950년 여름 한국 연락소(KLO) 규모 확대에 나섰다. 즉시 일본 주둔 441 방첩대(CIC) 인력 일부를 남한에 파견하여 한국 연락소 세포들을 모아 조직을 강화하였다. 한국 연락소는 서둘러 소작농들을 사단급 규모의 인간정보 요원으로 모집하였고, 신설한 작전 연락 사무소(TLOs : Tactical Liaison Offices)는 인간정보 요원으로 채용한 소작농들을 개략적으로 낙하 훈련을 시킨 후 수송기에 태워 적 후방에 투하시켜서 정보를 수집한 후 복귀하도록 하였다.


한국 연락소 세포들은 현역 국군 장교들이었다. 휴전후 한국 연락소 세포들은 본래의 자기 계급에 따라 국군에 장교로 재배치 받았지만, 나머지 농부 출신 공작원들은 한국 연락소(KLO), 곧 미군이 고용한 민간인 신분으로 북파 공작을 했었기에 나중에 국군에 입대할 때 의무복무제에 따라 훈련병으로 입대해야 했던 것이다.


중공군의 침입으로 인해 사단급 규모였던 한국 연락소(KLO)를 더 확대 개편하여 1951년 5월 극동군 사령부 예하 정보참모부(G-2) 예하 극동군 사령부 파견단 8240부대 (FEC/LG : Far East Command / Liaison Group 8240 AU : 8240 Army Unit) 예하 극동군 사령부 주한
파견대 8240 부대(FEC/LD(K) : Far East Command / Liaison Detachment (Korea) 8240 AU)로 편제하였다.


1951년 12월 10일에는 극동군 사령부 주한 파견대 8240 부대를 통제하는 부대로 기존의 극동군 사령부 파견단 8240부대 외에 한국 정찰 활동 합동 사령부(CCRAK : Combined Command Reconnaissance Activities, Korea)가 생겨나고, 상급 지휘부는 기존의 극동군 사령부 예하 정보참모부(G-2)에서 극동군 사령부(FECOM : Far East command) 예하로 바뀌었다. 또한 극동군 사령부 주한 파견대 8240 부대 안에 새롭게 유격반(Guerrilla Section)를 신설하고 빨치산 부대(Partisan Units)를 구성하였다. 이는 기존의 정보 수집 활동에서 빨치산 투쟁으로 부대 운영 목적을 변경하였음을 뜻한다.


1952년 초 미국 극동군 사령부(FECOM) 예하 극동 육군부대 본부(HQ, AFFE : Head quarter, Army Forces Far East) 예하 한국 정찰 활동 합동 사령부 8242부대(CCRAK, 8242 AU) 예하 극동군 사령부 주한 파견대 8240 부대(FEC/LD(K) 8240 AU)로 바뀌었다. 정보참모부(G-2) 예하로 특수 작전 사단(SOD : SPecial Operations Division)을 두어 극동군 사령부 파견단 8240부대 (FEC/LG )를 지원하도록 했다. 극동군 사령부 주한 파견대 8240 부대에 신설하였던 기존의 빨치산 부대(Partisan Units)를 주한 연합국 빨치산 부대(UNPFK : United Nations Partisan Forces, Korea)로 변경 하였다.


주한 연합국 빨치산 부대(UNPFK)는 규모가 커지면서 1952년 7월 11일에 주한 연합국 빨치산 보병부대(UNPIK : United Nations Partisan Infantry, Korea)로 명칭을 바꾸었다.


1952년 9월 27일에 지휘부를 미국 극동군 사령부(FECOM) 예하에서 다시 미국 극동군 사령부 정보참모부(G-2) 예하로 바꾸었다.


1952년 12월 극동 육군부대 본부(HQ, AFFE)는 육군 구성군 사령부(ACC : Army component command)로 확대 개칭하였다.


1953년 3월 7,000명 수준이었던 빨치산 부대 규모를 두배인 14,000명 정도로 늘렸다.


1953년 9월 한국 정찰 활동 합동 사령부(CCRAK)는 극동 정찰 활동 합동 사령부(CCRAFE : Combined Command Reconnaissance Activities Far East = 8177th Army Unit)로 명칭을 바꾸었다. 예하에 극동 육군 부대(AFFE: Army Forces Far East)를 신설하였다.


클라크는 자신의 수기에서 북한의 남침 이전부터 연정과 계인주가 미군을 위해서 일하였다고 말하였다. 이로 보아 계인주는 1949년 겨울에서 1950년 봄까지 육군 정보국에서 근무하면서 미국 극동군 사령부 정보참모부와 인연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계인주는 육본 정보국에서 일하면서 국방부 장관인 신성모를 북한과 내통한다고 음해하다가 1950년 6월 둘째 주에 정보학교 교장으로 전보조치 당하면서 시흥에 있던 고등 군사반 입소를 명 받았다.


계인주가 고등 군사반에 입소한지 2주도 안되어 북한이 남침하자, 육군본부로부터 김포지구 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 받고는 정보학교로 복귀하였다.


북한 육군 6사단에게 수적 열세를 느낀 계인주는 6월 28일 몰래 탈영하여 도주하였다. 이후 경기, 충청, 호남은 북한 육군 6사단에게 파죽지세로 점령 당하였다.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계인주가 실종된 것으로 판단하였고, 참모장 중령 최복수가 사령관을 대리하였다. 계인주는 육본이 수원으로 이동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원으로 갔고, 다시 대전으로 갔다는 소리에 대전으로 갔다가 한강 방어선이 붕괴한 사실을 알고는 곧장 가족을 데리고 부산으로 탈영하였다.


계인주의 부하였던 중령 최수복은 끝까지 김포 공항을 지키려고 지휘차량을 타고 돌진 하던 중 전사했고, 신임 사령관이 된 중령 우병욱은 끝까지 싸우다 부천 원미산에서 권총 자결하였다.


계인주는 회고록에 자신이 국방장관 신성모에 의해 파면 당했다고 하였다. 파면은 강제 예편을 말한다.  따라서 계인주는 더 이상 군인이 아니라 육군 대령 출신 민간인이었다. 미군에 군무원으로 취업했다는 의미다. 


계인주는 회고록에 자신은 맥아더의 명령으로 인천 상륙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일본 동경에서 머무르고 있었는데도 국방부 장관 신성모가 행방불명으로 취급하여 파면시켰다고 적어 놓았다. 그런데
상륙작전 계획을 수립하느라 일본에 7월 중순부터 한 달간이나 머물렀다는 말은 거짓이다. 인천 상륙 작전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는 작전참모부(G-3) 예하 합동 전략기획 및 작전단(JSPOG)을 8월 7일에야 설치하였다.


계인주가 미국에게서 받은 유공훈장(有功勳章, the Legion of Merit)에서도 파면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계인주는 '부대원급' 유공훈장( the Legion of Merit, in the Degree of Legionnaire)을 받았다. 
 

유공훈장에는 4등급이 있으며, 가장 낮은 등급인 부대원급 유공훈장은 육군 규정 672-7(Army Regulation 672-7)에 의해 1등급 최고 사령관, 2등급 각 군 사령관, 3등급 장군, 함대 사령관, 대령, 연안 해군 부대장 등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신분이 받는 유공훈장이다.


그러므로 국방부에서 계속 계인주를 군 현역으로 인정하고 있었다면, 4등급인 '부대원급' 유공훈장이 아니라, 대령부터 받는 3등급인 '서기관급' 유공훈장(the Legion of Merit, in the Degree of Officer)을 받았을 것이다.


계인주는 1951년 5월 한국 연락소(KLO)를 극동군 사령부 주한 파견대 8240 부대로 확대 개편하자 자신이 지휘관으로 임명 받았다고 회고록에서 주장하였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휴전후 더 이상 미군에서 일 할 수 없게 되자 언어가 전혀 불편하지 않은 일본으로 이민을 떠났다. 이후 미국으로 다시 이민을 갔다.


(5) 성공적인 영흥도 활동


8월 23일, 미국 극동군 사령부 정보참모부(G-2 Section, 정보참모장 소장 윌러비(Charles A. Willoughby))는 CIA 소속으로 주로 지도를 편찬하는 ''육해군 합동 정보 조사단' 조사(JANIS : Joint Army and Navy Intelligence Studies)', '해군 무관 보고', '사진 분석 보고서'를 토대로 해결책을 찾기에 고민하였는데, 여전히 높은 파도, 갯벌, 낮은 조수, 을미도에 숨겨진 실제 무기가 얼마나 되는지 등이 괴롭혔다.


적색 해변의 경우 사진 분석을 통해 암벽의 높이를 대략 3.5m로 파악하여 알루미늄 사다리를 준비하고, 예비용으로 나무 사다리도 준비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즉시 대판(大阪 오사카)에 있는 일본알루미늄 주식회사에 4.4m짜리 알루미늄 사다리 60개를 주문하여 열흘 안에 납품하도록 하였으나, 생산 능력 부족으로 14일 안에 납품하도록 기한을 조정하였다.


미국 극동군 사령부 예하 정보참모본부(G-2)는 목표 지역에 대한 직접 관측에 의한 무전 보고를 초기계획입안에 반영하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그래도 추산해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 확고하였다.


정보참모부(G-2)는 육안 관측 작전을 예하 합동 특수작전단(JSOB : Joint Special Operation Board)이 수행하도록 하였다. 합동 특수작전단(JSOB)은 육안 관측을 수행할 적임자로 같은 미국 극동군 사령부 예하 작전참모부(G-3)에서 근무 중이던 대위 클라크(Eugene F. Clark)를 차출하였다.

 

클라크를 선발한 이유는 클라크가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전차 상륙정 정장으로 복무했고, 근무 부서마저 작전참모부 예하 인천 상륙 작전 계획을 수립하던 합동 전략기획 및 작전단의 지리분과이기에 최적임자여서다.

 

8월 26일, 인천 상륙 작전을 전개할 10군단을 창설하였다.

 

8월 26일 클라크는 극동군 사령부가 입주해 있는 제일상호(第一相互 다이이치) 보험회사 건물의 대위 에드워드 피서(Edward Peacer) 사무실에서 정보참모부(G-2) 예하 합동 특수 작전단(JSOB)을 지휘하고 있던 예비역 소장 대거(Holmes E. Dager)와 만나 작전 명령을 직접 하달 받았다.

 

참모부 입장에서는 갯벌에서 상륙용 주정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 전차 상륙정 정장 출신인 클라크의 풍부한 경험에서 나오는 논리적 선택, 해변 갯벌에 대한 육안 관측의 결과를 얻어 상륙 계획에 반영하려는 목적이었다.


8월 27일 아침 클라크는 동경에서 대구로 날아가 통역관인 해군 대위 연정과 예비역 육군 대령 계인주를 선발 하였다. 연정은 용치호라는 가명으로, 계인주는 김남산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클라크는 회고록에 계인주와 연정이 북한의 남침 이전부터 미군의 요원으로 활동하였다고 하였다. 클라크는 이 둘의 개인적인 자질이 좋다고 판단하였다.


8월 28일, 미국 정부는 인천상륙 작전 맥아더 계획을 승인하였다.


클라크는 계인주와 연정에게 영흥도 민
심을 얻기 위한 대민작전 목적으로 준비해야 할 한식의 종류를 물었고, 쌀과 말린 생선을 준비해야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클라크는 연정이 영어를 잘 하고, 또한 연정과 계인주가 중국어와 일본어에 뛰어나다고 생각하였다. 클라크는 쌀 90kg과 말린 생선 32kg, 자신이 먹을 전투 식량 30곽을 준비하였다. 그외 약간의 무기와 위스키, 한국 돈을 마련하였다.


8월 31일 클라크 일행은 영국 구축함 채러티(HMS Charity)를 타고 영국 경순양함 자메이카(HMS Jamaica)의 호위를 받으며 일본 좌세보(佐世保 Sasebo)항을 떠나, 부산에 도착하였다. 연정은 부산에서 30여명의 소년병을 선발해서 대기하고 있었다.

 

당시 소년병은 주로 고아원에서 생활하던 고아가 대부분이었고, 그 외 피란 중 부모를 놓치고서 거리를 배회하다가 수용소에서 지내던 아이들이었다. 부모가 없어서 전사하더라도 유족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서 소년병으로 차출하였다. 이들은 거의 다 사격 훈련을 한 번도 받지 못했고, 소총도 지급 받지 못 한채 작전에 끌려 갔기에 막상 전투에서 사격할 줄을 몰라서 일방적으로 피격 당해서 피해가 컸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소년병들이 떼죽음을 당했던 영덕군 장사리 상륙 전투를 들 수 있다. 

 

연정이 미리 선발해 둔 30여명의 소년병들을 태우고, 9월 1일 07시에 약속 장소인 덕적도 근해에 도착하여 한국 해군 함정 PC-703(함장 중령 이성호)으로 옮겨 탔다. 이 함정에는 엑스레이(X-Ray) 작전을 지휘했던 소령 함명수가 승선해 있었다.


영흥도에 상륙하여 함명수 공작대가 본부로 사용하는 영흥 초등학교로 이동하였다. '리(Lee)' 작전을 수행하였던 해군 육전대 소속 병조장 한봉규가 이끌고서 섬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14세에서 17세 사이 청소년으로 구성한 대한청년단 단원 20여명이 있었다. 여기에 연정이 부산에서 데려 온 소년병 30여명이 합류하여 50여명으로 수가 늘어 났다. 클라크는 실고 온 쌀과 말린 생선을 주민들에게 주어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후 클라크는 함명수 공작대로부터 그동안 취합해 놓았던 정보를 인수 받았다. 함명수는 월미도와 인천항 해안포의 숫자나 위치, 병력 규모, 병력 이동, 상륙 지점 중 한 곳인 적색 해변의 암벽 높이 등을 포함했다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갯벌에 들어 갔을 때 어느 지점에서 얼마만큼 몸이 빠져드는지 시험한 내용도 있었다고 하였다. 


클라크는 발동선을 타고 동수도, 서수도, 날으는 물고기 물길 등을 직접 육안으로 관측하면서 조수 높이, 파도 높이, 갯벌의 상태  등을 확인하였다. 이미 클라크를 파견하기 이전에 조수 높이, 파도 높이는 알고 있었기에 작전 개시일은 9월 15일로 변함이 없는 상태에서 육안 관측 목표 지점은 3곳의 상륙 지점 중 한 곳인 청색 해안의 갯벌 지역이었다. 상륙정이 별탈 없이 지나갈 수 있는지 갯벌 상태 확인을 순조롭게 진행하였
다.


(6) 영흥도 소년병들과 주민들의 죽음만 불러 온 쓸모 없는 팔미도 등대 점화


클라크는 우연히 함명수 공작대 분대장 소위 장정택에게서 팔미도 등대 이야기를 들었다. 팔미도는 수 년간 출입금지 지역으로 사람이 살지 않으며, 어부들도 가지 않고, 오직 등대지기만 가끔 들린다는 사실을 장정택에게 꼬치꼬치 캐물어서 알게 되었다.


9월 3일 클라크는 팔미도에 직접 올라가 등대를 살펴 보았으나 잠긴 문을 열 수 없어서 그냥 영흥도로 철수하였다.


9월 9일 클라크는 다시 팔미도에 들어 가 준비해 간 도구로 강제로 문을 열고 등대를 조사하였다. 부착된 제품 설명서를 보고 조명 장치가 프랑스 파리에서 제작한 일반형 석유등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름통에는 석유가 반이 남아 있었고, 등대불을 켜보니 건전지가 닳아서 사용할 수 없는 등불 방향 조종 장치만 빼고 나머지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클라크는 다른 섬에 있는 등대들도 조사하여 등대가 세 군데에 있는데 북한군이 파괴했다고 보고하였다고 회고록에 남겼다.


팔미도 등대 점화는 본래 부여 받은 임무에는 없었다. 그런데 클라크는 독자적으로 팔미도 등대불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합동 특수작전단(JSOB)에 무전을 통해 등대를 켜야 한다고 적극 의견을 개진하였다.


클라크는 회고록에 "I'd have to advise Tokyo and ask when they wanted Palmi-do Light in operation. 나는 동경에 (팔미도 등대를 켜야 한다고) 권고했어야만 하였고, 그리고 언제 팔미도 등대불을 작동시키기 원하는지 문의했어야 했다"고 적어 놓았다. 이처럼 팔미도 등대 점화는 클라크의 개인적인 선택이었다.


즉 팔미도 등대는 등불을 켜도 그만 안 켜도 그만인 사안으로 인천 상륙 작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 필요 없는 사안이었고, 결과적으로는 클라크 개인의 잘못된 선택이 영흥도 주민들이 학살 당하는 피해만 불러 왔다. 자신을 돕던 함명수 공작대까지 큰 피해를 당하게 만들었다.


클라크의 조언을 받은 미군 합동 특수작전단(JSOB)은 힘들이지 않고 공적을 하나 더 얻을 수 있는 기회라서 인천 상륙작전 개시일 15일 0시 30분에 팔미도 등대불을 켜라고 하였을지도 모른다. 실제 팔미도 등대불을 켜라는 명령이 내려졌는지 여부는 오직 죽은 클라크의 양심만이 안다.


팔미도의 등대를 클라크보다 훨씬 먼저 확인하고 등대 출입문을 잠근 부대원들은 캐나다 구축함 애더배스큰 해군 병사들이었다. 8월 20일 영흥도 점령 작전에서 포격을 마치고 팔미도에 상륙하여 등대에 갖춰져 있던 무전기를 파괴하고 등대 문을 잠그고 철수하였다. 따라서 이때 등대 상태를 확인하여 보고하였고, 보고를 받은 상부에서도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더 이상의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다음으로 연정과 계인주가 받은 훈장을 봐도 팔미도 등대 점화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계인주가 받은 '부대원급' 유공훈장은 1950년 10월 6일부터 25일까지 수행한 작전의 공적을 인정하여 1951년 12월 14일에 선정한 것이다.

 

한편 계인주는 회고록에서 9월 9일 팔미도 등대 탐색 당시 등대불 방향을 동수도 쪽으로 고정해 놓고 떠났다고 하였으나, 상륙 작전은 서수도를 따라 이뤄 졌으며, 동수도와 서수도가 합쳐진 날으는 물고기 물길은 팔미도 서쪽으로만 흐르기에 계인주의 주장은 거짓이다.


연정은 은성 훈장(Silver Star)을 3개나 받았는데, 첫번째 것은 신의주 공략전에서의 공적을 인정 받은 것이고, 두번째 것은 원산에 상륙하여 흑사병 창궐 여부를 확인한 공적을 인정 받은 것이며, 세번째 것은 1953년 5월 18일에 해군 본부 서울 분실에서 받은 것이다. 모두 팔미도 등대 점화와는 무관하다.


클라크도 은성훈장을 받았다. 1951년 9월 13일에 클라크 일행이 고무배를 타고 30km 거리의 거친 연안 파도를 뚫고 상륙하여 중공군이 190m 폭으로 설치한 지뢰 지대를 헤치고 적 후방에 침투해서 그 지역에서 오랫 동안 활동해 온 공작원과 접선하여 그 부근 마을에 다시 연락망을 구축하고 14일에 복귀한 공적이었다.


맥아더의 회고록 회상(Reminiscences)에서도 팔미도 등대 점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맥아더는 “I noticed a flash—a light that winked on and off across the water. The channel navigation lights were on. We were taking the enemy by surprise. The lights were not even turned off. 섬광, 하나의 불빛을 알아 차릴 수 있었는데 물 너머에서 깜박이고 있었다. 수로 항해등이 켜져 있었다. 우리는 적을 기습하는 중이었다. 항해등마저도 꺼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선실로 되돌아 갔다.


맥아더는 북한군이 등대불도 끄지 않고 있을 정도로 무방비 상태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기습 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 지고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즉 맥아더는 클라크의 등대 점화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9월 7일 클라크는 발동선을 타고 돛단배 3척과 함께 이동 중에  북한군 발동선 4척과 마주쳤다. 한 척은 37mm 대전차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대전차포를 쏘았으나 맞추지 못하였다. 클라크는 재빨리 50구경(12.7㎜) 기관총으로 반격하여 대전차포를 장착한 발동선을 먼저 격침시키고, 두 번째 무장 능력을 갖춘 다른 한 척을 난파시켰다. 그 사이 나머지 2척은 도주하였다. 이 해상 전투에서 북한군 18명을 사살하고 3명을 생포하였다.


직후 클라크는 상부에 무전 보고하였고, 미국 구축함 핸슨(USS Hanson)이 와서 대부도 북한군 주둔지에 포격하였다. 항공모함 프린스턴(USS Princeton)은 77 타격부대(TF 77) 함재기를 띄워 기총 소사하였다. 이후 항공모함 프린스턴은 9월 13일부터 14일까지 함재기로 소형 대포 4~5문을 배치하고 있었던 월미도에 네이팜탄을 쉬지 않고 퍼부어 불바다로 만들었다.

 

여기까지는 해전에서 승리도 거두고 해서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그러나 일주일 후 북한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비극이 발생하였다.


북한군은 우연한 해상 전투에서 영흥도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또한 그 미군 한 명 때문에 전투 직후 미국 구축함과 항공모함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대부도를 공격한 점을 더욱 이상하게 여겨 미군을 생포하고 영흥도를 대대적으로 소탕할 계획을 세우고 준비에 나섰다.


9월 14일 북한군은 대부도에 있던 병력을 동원하여 낮과 밤 두 차례 영흥도를 급습하였다. 

 

함명수는 13일 클라크 일행이 영흥도를 떠나자 자신의 공작대도 같은 날 철수 명령을 받아 영흥도를 떠났기에 17명 대원 중에서 뒷정리를 위해서 6명이 남아 있는 상태였으며, 적의 병력 규모는 대대급이라고 하였다. 소위 임병래와 삼등병조 홍시욱은 나머지 대원 4명에게 배를 타고 탈출할 시간을 주기 위해 적군을 유인하다가 포위망을 벗어 날 수 없게 되자 총으로 자결하였다고 하였다. 나머지 4명은 숨겨 둔 배를 타고 영흥도에서 탈출하여 살아 남았다고 하였다.

 

클라크 일행은 14일에도 여전히 영흥도에 머물고 있었기에  이들이 13일에 떠났다는 함명수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월미도에는 방어 병력이 겨우 소련제 76mm 야포 4~5문을 가진 1개 포대 100여명이 주둔하고 있었던 상황에 반해서 전략적 가치가 떨어지는 대부도에는 대대 병력이 주둔한다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왜 함명수 공작대 6명은 50여명이나 되는 대한청년단 소년병들과 함께 북한군과 싸우려고 하지 않았으며, 50여명이나 되는 대한청년단을 이끌던 병조장 한봉규는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클라크 일행도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이 부분이 감춰져 있다. 당사자들은 납득할 수 있는 말을 남기지 않거나 아에 침묵하였다. 인천 상륙 작전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영흥도 주민들이 학살 당하도록 놔누고 자신들만 피해야 했다는 논리도 가당치 않다.

 

노획한 경기 지역 북한군의 통신 내용을 보면 북한군은 이미 2주 전부터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눈치채고 대대급 병력 이동을 지시하거나 전투태세 준비를 독려하고 있었다. 다만 인천 상륙전에 동원하는 부대의 규모가 얼마나 될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니면 부산 점령이 더 빠르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함명수의 발언에 대해서 함명수 공작대 일원이었던 당시 16살 군속 김남규는 다르게 말을 하였다. 13일 밤 다른 작전 명령을 받기 위해 함명수는 김남규를 비롯한 공작원 몇 명을 태우고 영흥도를 떠나 PC 703에 승선해 있었다고 하였다.

 

14일 오후 영흥도로 복귀하였는데 영흥도 앞 암초에 헤엄 치느라 속옷만 입은채 숨어 있던 함명수 공작대 대원 병조장 이 아무개를 발견하여 구조하였다. 병조장 이 아무개를 통해 북한군의 습격 사실을 알게 되자 함명수가 PC 703에 긴급 무전을 통해 화력 지원을 요청했다고 하였다.

 

몇 시간 후 PC 703이 도착하여 영흥도에 포격을 실시하였고, 함명수 공작대는 15일 오후까지 영흥도에 상륙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즉 함명수 공작대는 북한군과의 전투를 기피한 것이다. 김남규는 15일 오후에야 영흥도에 올라가 보니 임병래와 홍시욱, 다른 공작원 한 명이 전사해 있었고, 대한청년단 20여명 역시 죽임을 당해 있었으며, 일등병조 김상진은 이후 실종 3일후에 생환하였다고 말하였다.

 

클라크 역시 북한군이 영흥도로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클라크는 영흥도에서 싸우느냐 영흥도를 떠나느냐 선택할 수 있었고, 클라크는 영흥도에서 피하는 쪽을 선택하였다. 클라크는 자신의 회고록에 "The two main things we had to keep in mind were getting the islanders away if it became necessary and putting the Palmi-do light in operation at 00:30 tomorrow morning. 핵심적인 두 가지로 필요하게 되면 섬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것과 팔미도 등대불을 내일 오전 00시 30분 작전에 맞춰 켜는 것을 명심해야 했었다"고 기록하였다.

 

북한군은 14일 밤에도 다시 영흥도를 공격하였다. 김남규는 14일 밤 쳐들어 온 북한군에  의해 병조장 한봉규가 이끌었었던 대한청년단 소년병 20여명이 죽임을 당한 상태였다고 하였다. 미 해군 당국이 발행한 Fleet Operations in a Mobile War: September 1950-June 1951에서도 14일 밤 북한군이 영흥도를 공격해 오자 클라크와 연정은 팔미도로 도망쳤다(fled)고 하였다. "The North Koreans returned the night of 14 September with a larger flotilla. This time Clark and Lieutenant Youn Joung fled to Palmi-do. 북한 사람들은 9월 14일 밤 대규모 소함대와 함께 다시 왔다. 이 시간 클라크와 대위 연정은 팔미도로 도망쳤다."

 

클라크의 회고록에도 클라크는 14일 밤 영흥도를 떠난 것으로 나와 있다. "That took care of the plans for tonight. Yonghung-do was beginning to seem more like an enemy prison camp than our own operations base. The trip to Palmi-do, with its prospect of action, should relieve this feeling. 오늘 밤 실행할 계획들을 점검했었다. 영흥도는 우리의 작전 기지가 아니라 점점 더 적들의 감옥 수용소로 보이기 시작했었다. 팔미도로 가는 이동이, 그것의 작동 가능성으로, 이 기분을 풀어 주어야만 한다."


50구경 캘리버 기관총을 가지고 있던 클라크는 싸우기 보다는 배를 모는 선장 이 아무개, 연정만 배에 태우고 영흥도를 떠나 북한군이 없는 팔미도로 피신해 버렸다. 계인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기에 이 날 섬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섬에 남아 있던 함명수 공작대 대원들과 대한청년단원들은 해상 전투 한 번 없이, 병력 손실이 전혀 없이 섬에 상륙한 적군의 화력 앞에서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였다.


섬에는 육전대 병조장 한봉규가 지휘하는 대한청년단원들인 14세에서 18세 사이의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소년병 50여명과 함명수의 말대로라면 함명수 공작대 대원 6명이 전투원의 전부였다.


북한군이 영흥도에 상륙하기 전에 해상에서 먼저 최소한 몇 척 정도는 격침 시켜야 섬에서 유격전을 펼치기에 한결 나았다는 뜻이다. 클라크의 발동선에는 여전히 50구경 기관총이 장착되어 있었기에 충분히 해상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클라크 일행과 함명수 공작대는 자신들만 살겠다고 대한청년단 소년병 15명과 주민 50여명을 북한군의 총탄에 죽게 내버려 두었다
. 섬에서 가장 막강한 무기인 50구경 기관총을 소지하고 있던 클라크가 도망쳐 버린 섬에서 소년병들과 섬 주민들을 지킬 수 있는 병력이 전혀 없었다. 함명수 공작대마저도 PC 703이 함포 사격을 하고 있는데도 무장하고 영흥도에 상륙해서 북한군과 싸우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숨겨 둔 배를 타고 탈출한 함명수 공작대원 4명은 대한청년단 소년병을 한 명도 데리고 나오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빠져 나왔다. 클라크 일행 역시 최소한 자기들이 데려 온 30여명의 소년병들이라도 책임지고 구출해야 했으나 영흥도에 방치하고 자기들만 살겠다고 북한군을 피해 팔미도로 도망을 치었다.


클라크가 전투 식량을 30곽만 준비하고, 담배를 즐기던 클라크의 라이터 기름이 도중에 떨어질 정도로 여분을 준비하지 않은 것을 보면 클라크 스스로 육안 관측 기간을 열흘 이내로 잡은 것이다. 따라서 클라크가 시간을 질질 끌면서 팔미도 등대 점화에 개인적인 욕심을 부리지 않고, 본연의 임무에만 만족하여 청색 해안 갯벌의 상태에 대한 육안 관측을 마쳤던 날 섬을 떠났으면 애초에 해상 전투도 발생하지 않았다. 임무는 임무대로 완수하고 영흥도 섬 주민들과 영흥도 대한청년단이 클라크 대신 희생당하지 않아도 되었다.

 

 

<인천 앞 바다, 비어수로>

 

 

<남한 해군 사령관 미 해군 중령 루시>

 

 

<함명수>

 

 

<대한청년단(소년병), 권총 찬 해군 대위 연정, 예비역 육군 대령 계인주, 영흥도 대한청년단 단장 해군 목포 사령부 소속 육전대 병조장 한봉규 추정, 미 해군 대위 클라크>

 

 

<통역관 해군 대위 연정의 근무 부서와 해군 대위 클라크의 소속 부서>

 

 

<월미도에 배치했던 북한군 소련제 76mm 야포(M1942 ZiS-3) 5문중 1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