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8월 17일 북한 몽금포 항구 기습작전 참가 지휘관들에게 훈장을 수여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발단
해방후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의 뒤를 잇는 정식정부 수립 1주년 기념 관함식(1949년 8월 16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1949년 8월 10일, 이승만 대통령한테까지 자랑했던 주한군사고문단장 윌리엄 라버츠(William L. Roberts) 준장의 호화 유람선이 사라졌다.
(1949년 8월 10일 해군 인천 경비부 소속 안성갑 하사가 라버츠 준장의 소형 유람선을 몰고 월북했다.
남로당원 여동생의 사랑을 얻고자 라버츠 준장의 유람선을 훔쳐 오면 결혼시켜 주겠다는 말에 저질렀다.
이후 다른 함정을 몰고 오라는 지시를 받고 1950년 봄 서울에 잠입해서 대기하다가 해군 특무대에 체포되었다.)
인천 경비부가 라버츠 준장에게 사실을 숨긴채 연평도, 덕적도, 백령도 항구 등을 수색했지만 찾지 못했다.
라버츠 준장은 자신의 소형 유람선이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되자 즉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알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해군총참모장 손원일을 경무대로 불러 세워 놓고 면전에서 질책했다.
경과
해군에 비상이 걸렸다.
서해 첩보부대장 이태영 소령이 황해도 몽금포에 라버츠 준장의 유람선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해군총참모장 손원일이 경무대로 호출 받았을 때 보좌했던 함명수 소령의 제안대로 작전을 입안하였다.
작전목표는 라버츠 준장의 유람선을 획득 이송하는 것이고, 여의치 않으면 그 자리에서 폭파였다.
PG 313 충무공정, JMS 301 대전정, JMS 302 통영정, JMS 307 단천정, YMS 507 광주정이 엄호하기로 했다.
함명수 소령이 이끄는 20명의 특공대원이 야간 기습 상륙작전을 하기로 했다.
1949년 8월 16일 02시 정대사령 이용운 중령의 승인 아래 인천항을 떠났다.
1949년 8월 17일 새벽 백령도 남쪽과 몽금포 서쪽으로 우회하여 몽금포 근해에 도착했다.
1949년 8월 17일 06시 무장태세를 점검하고 몽금포 항구로 진입을 개시했다.
북한군 해안경비병들이 초소와 정박한 함정에서 사격을 가했다.
함명수 소령이 이끄는 특공대원들은 5척의 고무배에 분승하여 항내로 돌격했다.
함정들은 진입하면서 포격을 가해 특공대원들을 엄호해야 했지만 북한군의 거센 사격에 주춤 거렸다.
JMS 302 통영정 공정식 정장은 동기생 함명수가 위태롭다고 판단하고 항내 진입을 강행하였다.
특공대원들이 탑승한 고무배 뒤를 따르며 좌우현의 기관총으로 엄호사격을 가하여 보호에 나섰다.
상륙 지점 수십미터를 남겨 두고 고무배 5척 가운데 4척이 기관 고장으로 멈춰 버렸다.
함명수 소령이 탄 고무배만이 전진했다.
북한군의 총탄에 함명수 소령은 넓적다리 관통상을 당했다.
JMS 302 통영정 공정식 정장은 고무배에 뛰어 들어 함명수 소령을 PG 313(충무공)에 실었다.
공정식 정장은 다시 MS 302 통영정에 승선하여 37mm 대전차포로 쏘면서 부두로 돌진했다.
결과
MS 302 통영정은 대전차포 사격으로 북한 경비정 4척을 격침 또는 대파했다.
MS 302 통영정 병사들은 제18호 경비정에 수류탄 투척후 승선하여 장교 1명 포함 승무원 5명을 생포했다.
MS 302 통영정 병사들은 북한 해군 35톤급 제18호 경비정을 나포했다.
라버츠 준장의 유람선을 남포항을 거쳐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으로 옮긴 상태였다.
PG 313 충무공정에서는 군의관이 병사의 헌혈로 함명수 소령의 총상을 응급처치하였다.
되살아 난 군함 살 돈 걷기
1949년 6월 1일 해군은 함정건조기금갹출위원회를 구성 해군총참모장 손원일을 위원장으로 임명했었었다.
장교는 월급의 10%, 병조장은 월급의 7%, 수병은 월급의 5%를 각각 군함건조 기금으로 내도록 했었었다.
해군부인회는 바자회를 열었었다. 외교부는 외교관 부인들에게 수예품을 팔았었다.
그러던 중에 몽금포 기습 전투를 전개했고, 승전 소식이 펴졌다.
4개월 3일만에 해군장병은 810만원을, 해군 부인회는 42만원을 모았다. 정부는 4만5천달러를 지원했다.
해군총참모장 손원일과 주미대사 장면이 협력하여 대잠수함 작전에 투입하였던 USS PC 823 구매에 나섰다.
USS PC 823은 길이 52.9m, 배수량 459t, 속력 18노트 성능이었다.
미국해양대학이 포를 해체하고 엔선 와이트 해드(Ensign White Head)로 개명후 실습선으로 쓰고 있었다.
1949년 10월 17일 미국이 요구하는 판매 가격 그대로 1만8천달러에 구매하였다.
1949년 12월 뉴저지 호보켄 부두에서 2달간의 수리가 끝나자 인수요원들은 직접 701이라고 번호를 그렸다.
1949년 12월 24일 뉴욕 해안경비대 제 8부두로 이동하였다.
1949년 12월 26일 오전 10시 뉴욕 해안경비대 제8부두에서 백두산이라고 명명식을 했다.
1950년 1월 26일 하와이 진주만에 도착하였다.
1950년 3월 규정 문제로 2개월여 논란 끝에 3인치 함포 1문 설치를 완료했다.
1950년 3월 20일 하와이 진주만을 출발했다.
1950년 4월 10일에 진해항에 입항했다.
2015년 몽금포 기습 전투 지휘관 훈장 수여
태극무공훈장 JMS 302 통영정 정장 공정식 소령
을지무공훈장 정보부대 특공대장 함명수 소령
충무무공훈장 서해 첩보부대장 이태영 소령, PG 313 충무공정 정장 이종철 소령,
화랑무공훈장 YMS 503 광주정 정장 남철 소령, JMS 301 대전정 정장 김상질 소령.
참고:
JMS는 일본 해군이 쓰던 180톤급 소해함으로서 미군사고문단을 통해 일본에서 수리 후 11척을 넘겨 받았다.
JMS-301 대전
JMS-302 통영
JMS-303 대구
JMS-304 태백산
JMS-305 두만강
JMS-306 단양
JMS-307 단천
JMS-308 토성
JMS-309 대동강
JMS-310 덕천
JMS-311 통천
JMS 311 통천정을 1948년 5월 7일 남로당 선원들이 귀항중 정장 김원배 소위와 부장 백경천 병조장을 살해하고 납북했다.
YMS는 미 해군이 쓰던 기뢰 회피용 목선이다. 18척을 넘겨 받았다.
YMS-501 금강산
YMS-502 경주
YMS-503 광주
YMS-504 개성
YMS-505 김해
YMS-506 강계
YMS-507 강릉
YMS-508 강화
YMS-509 가평
YMS-510 강경
YMS-511 경산
YMS-512 구월산
YMS-513 김천
YMS-514 길주
YMS-515 운남
YMS-516 공주
YMS-517 고원
YMS-518 고성
YMS 511 경산정은 1948년 2월 21일 제주도 서북방 비양도에서 좌초했다.
YMS 517 고원정을 1948년 5월 15일 남로당원이 제주 근해에서 납북했다.
YMS 508 강화정을 1949년 5월 11일 부장 이송학이 정장 이기종과 정대사령 황운서를 살해하고 납북했다.
PG는 일본 해군이 패망하여 건조 중단한 선체를 조함창에서 완성하여 1947년 2월 7일에 명명식을 가졌다.
PG-313 충무공정
1944년 9월 14일 일본 해군은 비행기 조종사 구출 겸 어뢰 발사를 목적으로 건조에 착수했었다.
기중기와 어뢰 4문을 장착하려고 했으나, 1945년 7월 조선인 기술자들이 파업해서 건조를 중단했었다.
1946년 7월 15일부터 설계변경 등 재건조에 착수했다.
1947년 2월 2일 건조를 마쳤다. 길이 46.6m, 폭 6.7m, 배수 287t, 최고 속력 18노트였다.
건조비는 공비 669,000원, 재료비 21,904,000원, 부속품비 1,387,000원으로 총계 23,960,000원이 들어 갔다.
그외
1946년 9월 15일 최초로 1대를 넘겨 받은 후 차례로 들어 온 미해군 상륙정(LCI) 6척이 더 있었다.
1946년 12월 4일 넘겨 받은 미해군 유조선 YO-1 구룡 1척이 더 있었다.
몽금포 기습작전 시기의 함정 배치
인천 1정대
YMS-501 금강산, 502 경주 , 503 광주, 513 김천
JMS-302 통영, 307 단천, PG 313 충무공
부산 2정대
YMS-506 강계, 509 가평, 510 강경, 516 공주
JMS-304 태백산, 305 두만강, 306 단양
목포 3정대
YMS-505 김해, 514 길주
JMS-301 대전, 303 대구, 309 대동강, 310 덕천
여수 훈련정대
YMS-504 개성, 507 강릉, 512 구월산
LCI-105(상륙정)
진해 훈련정대
YMS-515 운남, 518 고성,
JMS-308 토성
진해 통제부
YMS-508 강화, 511 가야산
YO-1 구룡 (유조선)
'남북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 (0) | 2018.04.28 |
---|---|
상주 사드(THAAD) 레이더 기지 배치 논란과 대안 (0) | 2016.09.03 |
허구에 찬 국방 홍보영화 인천 상륙작전이 아닌 숨겨진 작전 실화 (0) | 2016.08.04 |
황강댐 위치로 본 황강댐 방류와 수공 논란의 진실 (0) | 2016.0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