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이승만, 장인환 정명운 의사 통역을 거부하며 비난하다!

허구인물 전우치 2016. 7. 15. 07:45

 

1908년 당시의 페리 선착장

1. 친일파 더햄 와이트 스티븐스


더햄 와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는 워싱턴 디.씨에서 태어나 1871년 오벨린 대학을 마치고, 다시 하워드 대학교에 편입하여 1873년 졸업하였다. 스티븐스는 1873년 10월부터 1883년 7월까지 미국 외무성 소속으로 주일공사 존 빙햄(John A. Bingham) 아래서 중견 관리(Legation Secretary)로 동경에서 근무하였다. 스티븐스는 일본의 요청에 의해 미국 외무성 직업을 그만 두고 1883년 11월부터 주미 일본 공사 사도종칙(寺島宗則 테라쉬마 무네노리) 밑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스티븐스는 주미 일본 공사관에서 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 1884년 11월 동경으로 발령 받아 외무 대신이자 전권대사였던 정상형(井上馨 이노우에 가오루)을 수행하여 11월 18일 조선에 입국하였다. 주한 일본공사 죽첨진일랑(竹添進一郎 다케조에 신이치로)이 선동하고 뒤에서 조종하였던 친일 갑신반란 직후 분개한 한성 시민들이 일본 공사관을 불태우고, 일본군 40여명을 처형한 사건을 빌미로 삼은 일본측 피해 배상을 규정한 한성 조약 체결에 관여하였다. 스티븐스는 다시 워싱턴 디.씨에서 1887~1893년까지 근무하였으며, 1900년과 1901년에는 일본인 이민자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하와이에서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스티븐스는 1904년 9월 상순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 외부 소속 외교 고문관으로 내정 받았다. 1904년 12월 27일 외부 대신 이하영, 탁지부 대신 민영기와 정식으로 외교고문고빙 계약을 체결 하였다. 1905년 11월 7일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였다. 이후 일본은 자신들의 군국주의로 인해 미국에서 반일본파가 증가해서 일본인의 미국 이민을 금지할 것을 우려하여 스티븐스를 워싱턴 디.씨로 보내 무마하려고 하였다.


스티븐스가 일본을 떠나기 전 동경 경교구 목만정(木挽町)에 있는 전중옥(田中屋)에서 전별회를 가졌는데 전신(電信)과장 폐원희중랑(幣原喜重郎 시데하라 기주로)이 불참하여 참석자가 서양에서 꺼려하는 숫자인 13명이 되는 바람에 기생 한 명을 자리에 앉혀서 참석자를 14명으로 만들었다. 스티븐스는 다음 날 유서를 3통 작성하여 1장은 조선 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에게, 1장은 일본 외무대신 임동(林董 하야시 다다스)에게, 1장은 통감부 총무부 외사과장 과도계차랑(鍋島桂次郞 나베시마 게이지로)에게 남기고서 미국 워싱턴 디.씨로 향하였다고 한다.


스티븐스는 1894년 북미 비평(The North American Review)에 '조선에서의 중국과 일본(China and Japan in Korea)'이라는 글을 기고한 것을 시작으로 뉴욕 타임즈에도 기고문을 발표하여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강압 당하고 있지 않다는 등 일본을 대변하여 왔었다.


1908년 3월 3일  스티븐스는 동경을 떠나 4일 횡빈에서 일본환(日本丸 니뽄마루)을 타고 3월 20일 금요일 샌 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페어먼트 호텔(Fairmont Hotel)에 묵었다.

 

스티븐스는 샌 프란시스코 도착 다음 날인 3월 21일 지역 신문 더 샌 프란시스코 콜(The San Francisco Call)에 "일본은 대한제국에서 한인을 위해서 미국이 필리핀에서 필리핀인을 위해서 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중이며, 단지 당면한 상이한 조건들에 맞게 대처하여 방법만 수정할 뿐입니다(Japan is doing in Korea and for the Koreans what the United States in doing in the Philippines for the Filipinos, modifying its methods only to suit the somewhat different conditions with which it has to deal.)"라고 발언하였다. 또한 "일부 계층은 새로운 질서를 결코 받아 들이지 않겠지만, 진짜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군중의 무리는 일본인을 친구로 여기기 시작하였습니다(There are certain classes in Korea that never will be reconciled to the new order, but the mass of the people, the real backbone of the country, are already beginning to regard the Japanese as good friends.)"라고 하였다.


같은 날 21일에 샌 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에는 "관료들도 나라의 유일한 희망은 옛 제도의 개혁에 있다고 보기 시작했으면서도, 관료들은 그렇지 않은 반면에 농민들은 일본을 환영하였습니다(The peasants have welcomed the Japanese, while the official class has not, even the officials are beginning to see that the only hope for the country lies in a reorganization of the old institutions.)"라고 주장하였다.


내슈아 텔리그래프(NASHUA TELEGRAPH)는 3월 23일자 기사에서 스티븐스가 도착 기자 회견에서 '한인들은 일본에 의한 보호라는 큰 혜택을 누려 왔으며, 일본의 보호를 더욱 호의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the Korean people have been greatly benefited by Japanese protection and that they are beginning to look more favorably upon it.)'고 말했다고 하였다.


2. 샌 프란시스코 한인들, 스티븐스에게 참회할 기회를 주다.


스티븐스가 타고 온 일본환에는 대한관동창의장(大韓關東倡義將) 이인영(李麟榮)이 일본의 침략에 맞서 해외 동포들도 싸워야 한다고 쓴 격고재외국동포문(檄告在外國同胞文)을 소지한 이름 모를 애국자가 타고 있었다. 이를 전해 받은 공립협회(共立協會)의 공립신보 편집장 정재관(鄭在寬)이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에 제안하여 함께 3월 22일 일요일 오후 한인 감리교 교회에서 공동 모임을 열고 낭독하자 다들 숙연해졌다.


모임 도중 샌 프란시스코 한인 감리교 교회를 설립한 전도사 양주삼(梁柱三)이 스티븐스가 토요일에 한 발언이 실린 더 샌 프란시스코 콜 일요일판을 들고 와서 전해 주었다. 대동보국회 소속 이학현(李學鉉)이 번역하여 일어서서 큰 소리로 읽어 내려 갔다. (전도사 양주삼은 미국에서는 목회활동을 하면서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서울에서 감리교 교세 확장에 기여할 때는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이내 모임에서 참석자들은 스티븐스를 응징해야 한다는 쪽을 선택하였다. 이학현이 강경론을 주도하였다. 장인환, 전명운 등 수 명이 연단으로 몰려가 기꺼이 스티븐스를 처단하겠다고 자원하였다. 토의한 결과 처단에 앞서 스티븐스와 대화하여 자신의 발언을 정정하게 함으로써 참회하고 살아 날 기회를 먼저 주어야 한다는 의견을 채택하였다. 저녁 8시에 최종적으로 공립협회에서는 정재관(鄭在寬)과 최유섭(崔有涉)을, 대동보국회에서는 문양목(文讓穆)과 이학현(李學鉉)을 스티븐스와의 면담 대표로 선정하였다.


정재관, 최유섭, 문양목, 이학현은 밤 9시 조금 넘어 스티븐스가 묵고 있는 페어먼트 호텔에 도착하여 스티븐스에게 대한제국에서의 활동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이 말을 믿은 스티븐스는 로비로 내려와 사교 춤 방이 있는 북쪽 복도로 자리를 옮겨 대표 4명과 대화를 나누었다. 일행은 호텔로 가면서도 스티븐스가 만나 줄 것이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지만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


이학현이 통역을 맡아 더 샌 프란시코 콜에 한 발언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냐고 따져 물었다. 스티븐스는 책임질 수 있다고 하였다. 대한제국인이 일본인들에게 학살 당하고 있지 않느냐고 하자 스티븐스는 그런 일이 없다고 말하였다. 대한제국 정부 관료들을 제거하고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도 그렇지 않다고 답하였다.


일행 중 격분한 정재관이 주먹을 날렸고, 스티븐스는 쓰러졌다가 벌떡 일어섰다. 앉아 있던 일행 모두 일어 서 등나무 의자를 들어 휘두르자 스티븐스는 턱에 맞고는 뒤로 물러나 벽에 등을 기댄채 같이 등나무 의자를 들어 막았다.


스티븐스가 도와 달라고 고함을 지르자 호텔 직원들과 레이몬드 앤 위트컴 여행사 직원 찰스 쿡(Charles A. Cook)이 달려와 의자를 뺏으며 중지 시켰다. 스티븐스는 이마가 찢어지고 오른 손 엄지 손가락을 삐었다. 경찰관 두 명이 출동하였다가 스티븐스가 처벌을 원치 않아 호텔을 떠났다.


3. 장인환 의사와 전명운 의사가 스티븐스 처단에 나서다.


스티븐스와 면담하였던 정재관, 최유섭, 문양목, 이학현 일행은 교회로 돌아가 공동 모임에 스티븐스가 완고하게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고 결과를 보고하였다. 공동 모임은 스티븐스 처단 계획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스티븐스가 밤에 이동할 것에 대비해서 페어먼트 호텔에 사람들을 보내서 밤새 동태를 살피도록 하였다.


다음 날 월요일 이른 아침 공동 모임 사람들은 페어먼트 호텔 안으로 들어가 어제 밤 일로 스티븐스에게 사과하고 싶다고 호소하면서 어디 있는지 알려 달라고 하였다. 식당 등 여기 저기 찾아 헤맸으나 스티븐스의 종적을 알 수 없었다. 드디어 한 호텔 직원에게서 스티븐스가 오전 10시에 워싱턴 디.씨행 열차를 탈 것이라는 소식을 알아 내었다.


공립협회 회원 전명운과 대동보국회 회원 장인환은 길목인 페리 선착장 건물 앞에서 아침도 거른채 오전 9시부터 스티븐스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티븐스가 오클랜드 역에서 기차를 타려면 반드시 페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건너야만 했다. 오전 9시 30분경 스티븐스가 일본 총영사 소지장조(小池張造 고이케 조조)와 함께 차 지붕이 없는 호텔 승용차(hotel bus)를 타고 도착하여 먼저 내려서 운전사에게 요금을 지불하고, 선착장 짐꾼에게 자신의 짐들이 어떤 것인지 알려 주고 있었다.


전명운이 다가가 손수건으로 감싼 검은색 리벌버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으나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전명운이 사용한 총은 조잡한 싸구려 권총으로 총열도 짧았지만 결정적으로 탄창 회전축이 고장나서 탄창이 회전을 하지 않았기에 불발하였다. 전명운은 당황하지 않고 즉시 기압 소리를 내며 크게 팔을 휘둘러 권총 손잡이로 스티븐스의 옆 얼굴을 가격하였다. 전명운은 거리 북쪽 시장쪽으로 달아 나려고 몸을 빼려고 했고, 스티븐스는 쓰러지면서 호텔 승용차 문에 엉덩이를 찧은 탄력을 이용해서 전명운을 잡으려는 순간 총 소리가 울렸다.


가까이서 지켜 보던 장인환이 스티븐스를 향해 니켈 도금을 한 은색 리벌버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으나 빗나가서 스티븐스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몸을 틀었던 전명운의 정면 오른쪽 가슴으로 총탄이 들어가 폐를 관통하였다. 즉각 장인환이 다시 사격하여 총탄이 몸을 움츠리며 숙인 스티븐스의 등 오른쪽에서 어깨뼈 쪽으로 뚫고 들어 갔다. 세번째 총탄은 몸을 돌려 움츠린 스티본스의 등 오른 쪽에서 엉덩이 뼈 쪽으로 들어가 박혔다.


장인환이 네번째로 발사하려는 순간 몰래 뒤로 다가 온 세무소 직원 해리 섹스턴(Harry Sexton)이 장인환의 뒷머리를 주먹으로 뻗어 쳤고, 순간적인 충격을 받은 장인환은 손에서 권총을 놓쳤다. 이에 장인환은 거리의 북서쪽을 향해 달려 나갔다.


전명운과 장인환이 달아나자 숨죽이고 있던 군중들은 비로소 살인자들을 때려 잡자고 외쳤다. 근처에 순찰차를 세워 놓고 있던 순찰대원 제임스 맥그래스(James McGrath)와 에드워드 오우언즈(Edward M. Owens)는 총소리를 듣고 현장으로 달려 와서 제임스 맥그래스는 부상 당해 제대로 뛰지 못하는 전명운을 체포하였고, 에드워드 오웬스는 걸음이 느린 장인환을 따라 잡아 체포하였다.


경찰은 장인환을 중앙 경찰서(Central Police Station) 유치장 독방에 수감하였다. 장인환은 갇힌 다음 날인 3월 24일 스티븐스가 대한제국 국민의 죽음에 책임이 있고, 일본을 위해 대한제국의 상황을 왜곡했기에 저격했다는 내용의 글을 작성하여 지역신문 더 샌 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기고하였다. 이학현이 번역을 하였고, 기자가 교정하였다.


스티븐스는 호기를 부려 샌 프란시스코 일본 총영사 소지장조가 호텔 승용차 뒷문을 열어 주어 자리에 앉을 때까지 아무렇지 않은듯이 꼿꼿이 서서 미소 지었다. 스티븐스를 실은 차량은 90여미터 떨어진 항구 응급병원(the Harbor Emergency Hospital)으로 향하였다.


체포된 전명운도 이후 도착한 응급차를 타고 항구 응급병원으로 갔다.


4. 전명운 의사, 항구 병원에서 스티븐스와 마주하다.


스티븐스는 항구 응급병원에서 신문기자에게 자신이 저격 당한 일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몰려와서 에워 싸고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이 때 간호사 두 명의 부축을 받으면서 전명운이 들어 섰고, 둘은 시선이 마주치자 서로 침묵했다.

 

전명운은 이내 스티븐스에게 대한제국 사람들이 학살당하기를 바라는 일본의 간첩이라서 총으로 쏘았다고 호통을 쳤다. 간호사가 더 이상의 말을 막고 전명운을 병상 위에 눕혔다. 스티븐스는 잠잠해지자 경멸 어린 작은 목소리로 "불쌍한 자여. 나는 당신네 사람들을 위해 3년간 일하면서 그들을 친구로 여겼소. 당신은 왜 그런지 이해를 못하고 있소. 당신이 날 쏜 것을 탓하지 않겠소. 당신은 조금 어리석고 더 이상의 것을 알지 못하고 있소. 나는 시간이 당신이나 당신처럼 약간은 어리석은 자들이 오늘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알게 해주리라고 여기오. (you poor little thing. I have worked for your people for three years and I know them as my friends. As for you why, you don't understand. I don't blame you for shooting me. You are a little fool and don't know any better. I hope the time will come when you and little fools like you will realize what you have tried to do this day.)"라고 비꼬며 대꾸하였다.


항구 응급병원에서 응급 처치가 끝나자 전명운과 스티븐스는 같은 구급차를 타고 중앙 응급병원(the Central Emergency Hospital)으로 향하였다. 샌 프란시스코 일본 총영사 소지장조와 그 일행도 탑승하여 스티븐스 곁에 앉았다.


스티븐스는 오후 2시에 성 프랜시스 병원(St. Francis Hospital)로 옮겼다. 전명운은 오후 5시에 래인 병원(Lane Hospital)으로 이동했다.


5. 샌 프란시스코 한인 동포들, 장인환 전명운 재판 비용을 마련하다.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스티븐스를 처단하는데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신속하게 처단 당일 23일 밤 9시 30분에 한인 감리교회에서 2차 공동 모임을 열어 장인환과 전명운의 재판을 도울 대책을 논의하였다.


최유섭, 문양목, 정재관, 이일, 김영일, 이용하, 백일규를 판사전권위원에 선임하였다.


이 날 밤 공동 모임에 참석한 40여명은 700여원을 기부하였다.  11시 30분에 산회하였다.

 

이는 스티븐스 처단을 즉흥적으로 결정하기는 했지만 스티븐스 처단을 계획적으로 실행하였음을 보여 준다. 일사분란한 모임의 진행과 더불어 겨우 40명이 앉은 자리에서 무려 700원이나 되는 현금을 기꺼이 기금으로 냈다는 사실은 명백하게 미리 거사를 준비했고, 여러 상황의 결과를 설정하고서 그에 맞게 후속 대처를 효과적으로 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 모임을 시작으로 본토, 미국, 멕시코, 중국, 만주, 일본 등 각지 한인들이 기부하여 7,390달러를 모금하였다. 심지어는 샌 프란시스코에서 유학중이던 청국 유학생들도 기부금을 보내 왔다.

 

6. 스티븐스 죽다.


3월 25일 스티븐스가 저녁 6시 마취 후 시작한 수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밤 11시가 지나 사망하였다. 사망 직후 시신을 시체 보관소로 보냈고, 검시 외과의 클라크(J. R. Clark)가 부검을 진행했다. 입회 한 검시 배심원들은 데비드 맥케이(David Mackey), 그래함(J. W. Graham), 타프(E. L. Tharp), 키튼(P. H. Keaton), 피트(H. C. Peet), 캄(M. A. Calm), 막스 로젠필드(Max Rosenfeld), 도넬리( P. H. Donnelly), 린퀴스트(O. W. Lindquist), 니콜라스 핸슨(Nicholas Hanson)이었다. 검시 배심원들에 입회 아래 부검 결과 사인은 복부의 총상으로 인한 충격과 출혈이라고 판정하였다.


부검을 마친 스티븐스의 시신을 장례식장으로 옮겼고, 스티븐스의 누나와 여동생, 매형이 일주일 후 고향 워싱턴 디.씨에서 성 존스 성공회 교회 영결 예배후 안장하였다.


이후 4월 중순 일본은 순종에게 특별위휼금으로 50,000만엔을 내도록 강요하여 총 150,000만엔을 스티븐스 가족들에게 위로금으로 전달하였다.


7. 장인환 의사와 전명운 의사를 기소하다.


장인환과 전명운을 각각 체포한 오우언즈와 맥그래서는 중앙 경찰서 유치장 독방에 가두어 두었던 장인환을 중앙응급병원으로 데려가 간이 침대에 누워 있던 전명운과 대질 신문하였다. 하지만 장인환과 전명운은 서로가 끝까지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철저하게 부인하였다. 장인환은 전명운을 전혀 모른다고 부정하면서, 자신이 총으로 스티븐스를  쏜 것은 사실이라고 순순히 인정하였다. 경찰은 대질신문 결과 장인환과 전명운은 공범 관계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3월 27일 스티븐스가 3월 25일 수술중 사망함으로써 장인환과 전명운을 살인혐의로 전격 기소히였다.


통역을 샌 프란시스코 감리교 한인 교회 전도사 양주삼이 맡았다. 장인환과 전명운 둘 다 스티븐스를 처단하기 직전에도 전도사 양주삼이 설립한 한인 교회 건물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도움을 받았었다.


4월 4일 즉결 심판 판사 콘랜(Conlan)은 장인환에 대한 예심을 진행하였다. 이학현, 최유섭, 문양목이 방청석에 자리했고, 일본 측에서는 총영사 소지장조 등이 지켜 보았다.


검찰측은 일본 정부가 고용한 지방 검사보(Assistant District Attorney) 제임스 핸리(James Hanley)와 지방 검사보 사무엘 나이트(Samuel Knight)를 특별 검사로 지명하였다.


장인환과 전명운 의사의 변호사로 내이슨 카글린 (Nathan Coghlin)과 라버트 페렐(Robert Ferrell)을 선임하였다. 내이슨 카글린과 라버트 페렐 모두 변론을 자처하였다.


아일랜드계인 내이슨 카글린은 32살로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협회 회원으로 주에서 많은 고객을 확보한 유능한 변호사로서, 이후 공화당에 발탁되어 주 의회  4선 의원을 지내면서 지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라버트 패렐은 지역 신문기사에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내이슨 카글린은 장인환 의사가 수감된 뒤에도 계속해서 가석방을 위한 법률 행위를 대리하였다.


통역에는 샌 프란시스코 감리교 한인 교회 양주삼이 나서서 장인환 옆 자리에 앉았다.


증인으로 중앙응급병원 의사 줌발트(P. H. Zumwalt), 검시 담당관 외과의사 클라크(J. R. Clark), 페어몬트 호텔 승용차 운전사 슈나이더(A. F. P. Schneider), 호텔 심부름꾼 에드워드 핀레이(Edward B. Finley)가 출석하였다.


4월 8일 예심에서는 증인으로 세무소 임시과세평가인 헨리 섹스톤(Henry A. Sexton),  루돌프 스프렉클스(Rudolph Spreckels) 회사 운전사 린든 크레인(Lyndon D. Crane), 저격 사건 목격자 운전사 윌리엄 반 보스(William Van Voss), 형사 콘론(Conlon), 경찰관들인 번스(Burns)와 맥그래스(McGrath) 그리고 오우언즈(Owens) 등이 출석하였다.


4월 9일 전명운을 래인 병원에서 중앙 경찰서 유치장으로 이송 수감하였다. 건강 상태가 나빠서 예심을 진행할 수 없었다.


4월 10일 즉결 심판 판사 컨낸(Conlan)은 장인환에 대한 예심을 끝냈다. 장인환을 보석 석방 불가 방침과 함께 살인죄 혐의로 상급 법원(the Superior Court)에 기소하였다.


6월 8일 오후 2시에 에디가(Eddy Street) 경찰서 즉결 심판 판사 캐배니스(Cabaniss)가 검사측 증인 6명을 출석시킨 가운데 전명운 의사에 대한 예심을 시작하였다.


6월 13일 오전 11시 30분 에디가(Eddy Street) 경찰서 즉결 심판 판사 캐배니스(Cabaniss)의 법정에서 전명운에 대한 2차 예심을 열었다. 총기 소유자와 총기 사용에 대한 심리를 진행하였다.


6월 27일 오후 2시 전명운은 서약서를 제출하였고, 즉결 심판 판사 캐배니스는 보석 석방하였다.


8. 장인환 상급 법원에서 재판 날짜를 정하다. 


장인환의 스티븐스 살인 혐의에 대한 상급 법원에서의 재판을 7월 26일부터 판사 캐럴 쿡(Carroll Cook)의 재판정(Judge Cook's department of the Superior Court)에서 열기로 하였다.


장인환 의사의 변호사로 존 배러트(John J. Barrett)도 상급 법원 재판에서 변론에 참여하였다. 존 배러트는 30대 중반으로서 해즈팅스 법대(the Hastings Law School)를 1896년에 졸업했고, 연수과정을 마치고 변호사가 되었다.


배심원 12명을 예비 포함해서 타머스 브래디(Thomas Brady, 937 Fillmore street), 잔 대이비스(John Davis, 1633 Webster street), 헨리 울킹(Henry Wolking, 415 Haight street), 프레드 엘리어트(Fred A. Elliott, 338 Castro street), 콘닐리우스 이건(Cornelius Egan, 2628 Nineteenth street), 패트릭 라이언스(Patrick Lyons, 1927 Bush street), 맥뉴(E. P. McKnew, 1431 Nineteenth street), 프랭크 셰이미스(Frank Seames, 333 Ivy avenue), 제임스 켄첼(James W. Kentzel, 2105 Golden Gate avenae), 얀 엔데(J. H. yon Ende, 1321 Sixth avenue), 허튼(D. Hurton, 2888 Twenty-third street), 오닐(E. C. O'Neill), 이가리(C. Egari) 등으로 결정하였다.


통역은 그 동안 즉결 재판 과정에서는 한인 감리교 교회 전도사 양주삼이 담당하였으나, 샌 프란시스코를 떠나 다른 주에 가야 할 사정이 생겼다면서 빠졌다.


9. 이승만, 독립운동가 전명운과 장인환 의사의 법정 통역을 거부하다.


1903년 9월 안창호(安昌浩), 박선겸(朴善謙), 이대위(李大爲), 김성무(金聖武) 등이 상항친목회(桑港親睦會)를 설립하여 샌 프란시스코 전체 한인 20명 중 9명이 가입하였고, 이후 한인 유입이 늘자 1905년 4월에 확대 개편하여 공립협회로 개칭하였다.


공립협회 발기인이었던 장경(張景)이 안창호와 싸우고 뛰쳐 나가 1905년 12월 안정수(安定洙), 김찬일(金燦一), 유성춘(柳成春), 김우제(金愚濟), 변창수(邊昌洙), 김승제(金承濟) 등과 함께 대동교육회(大東敎育會)를 설립하고는 1907년 3월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로 이름을 바꿨다.


장경 등은 대동교육회를 대동보국회로 단체명을 바꾼지 5개월 후인 1907년 8월 하순 조직의 세를 불리기 위해 장경을 포함 회원 5명의 피를 그릇에 모아 붓으로 이승만에게 회장을 맡아 달라는 내용의 혈서를 각자 1장씩 써서 총 5장을 보냈다. 충성을 맹세 받은 이승만 개인에게는 자랑할만한 일이었지만 일반적으로 상식을 넘어 선 매우 이해하기 힘든 괴이한 짓이었다.


이승만은 8월 29일 혈서를 받고는 고민하다가 10월 초순에 답변을 보냈다. 대동보국회는 이승만의 편지를 단체지 대동공보(大同公報)에 10월 3일자와 10일자로 게재하였다. 이승만은 고종과 민영환이 자기 말을 안 들어서 조선이 망했다는 과대망상에 젖은 광오한 발언을 하였다. 또한 미주 한인들이 자신의 말을 안 들어서 분열되었다고 다시 엉뚱한 발언을 하였다. 지금은 모두가 공부해야 할 때라면서 샌 프란시스코에 있는 두 단체가 통합을 하고, 자신의 말에 복종해야만 회장을 하겠다고 하였다. 이는 안창호 등 기존 미국내 독립운동가들을 하찮게 여기는 무례한 발언이었다. 대동보국회에서 다시 기별하면 가을이나 겨울 사이에 방문하겠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자신이 말한 기간에 샌 프란시스코를 방문하지 않았다.


그 다음 해인 1908년 3월 23일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친일파 스티븐스를 처단하였고, 상급 법원 재판 개시일이 7월 26일로 결정나자,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법원에서 통역을 맡길 대상으로 이승만을 지목하여 초청하였다.

 

이승만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취업해서 돈을 벌기 보다는 자주 백인 감리교 교회만 찾아 다니면서 간증해 주고 사례금을 챙기는 쉬운 방법을 선택하였다. 1,000달러가 넘는 큰 돈을 받기도 하였는데, 이승만은 개인 기록에 그 내역을 기록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이승만을 한반도에서 감리교 세 확장의 디딤돌로 삼으려는 감리교단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이승만보다 영어를 더 잘 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법정 통역으로 굳이 지목한 이유를 추론해 보자면 미국 교회내 이승만의 백인 인맥이 더 넓을 것으로 보고 재판에서 효과를 얻으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은 1908년 6월에 이미 하버드 대학원 석사과정을 끝낸 상태였다. 하지만 경제 과목 학점 미달로 석사학위를 취득할 수 없었다.

 

이승만은 7월 11일부터 15일까지 콜로라도주 덴버의 그레이스 감리 교회를 빌려 개최한 애국동지대표회에 참석하여 회장에 선발되어 회의를 주재하였다.

이승만이 7월 18일에 샌 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 환영회를 밤 11시까지 열어서 환대하였다.

그렇지만 이
승만은 한 달 동안 샌 프란시스코에서 지내면서 독립운동가 장인환과 전명운 의사의 통역은 아에 하지 않은채 오직 권력에 대한 탐욕만 드러냈다. 이승만은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를 통합하여 한 사람의 지도자 아래 두고서 업무를 지휘하도록 해야 한다면서 그 지도자는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다녔다.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 모두 독재 성향을 보이는 이승만을 거부하고 말았다.

 

이승만은 한 달간의 공작이 실패하자 로스 엔젤레스에 들려 남캘리포니아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신흥우(申興雨)를 만나고는 학교 기숙사로 도로 가버렸다. 또한 다음 달인 9월에 프린스턴 대학원에 입학해야 했으니 더 이상 머물 시간도 없었다. 이승만이 소식을 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8월이 지나서야 신흥우가 이승만 대신에 법정 통역을 맡았다.(신흥우도 귀국 후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이승만은 자신이 애국자 장인환과 전명운의 법정 통역을 거절한 이유에 대해서 개인 기록에 구구절절이 거짓말만 늘어 놓았다.


"내가 하버드 대학에 재학하고 있을 때 일본이 한국을 말살하기 위해서 한국 정부의 고문으로 앉혀 놓았던 더함 스티븐스(Durham Stevens)가 두 한국 사람에 의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암살되었다. 그는 미국에 돌아와서 일본을 위해 선전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리고 안중근이 이등을 하얼빈에서 살해했다. 신문에는 한국 사람들은 잔인한 살인광들이며 무지몽매해서 그들의 가장 좋은 친우인 이등과 스티븐스를 살해하였다는 기사들이 가득 실리곤 하였다. 어떤 학생들은 나와 이야기 하는 것을 두려워 했고, 나의 역사학 교수는 나를 얼마나 무서워 했던지 나의 석사 논문을 나에게 우송해 주고는 떠나기 전에 나를 만나 주지 않았다."


"하르빈과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은 이 두 살해 사건은 일본의 선전기관들이 한국 사람들을 흉도들이고 최악의 악당들이라고 묘사하는데 대대적으로 이용되었다. 나는 그때 캘리포니주에 갈 일이 있었는데 일본의 선전에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한국 사람을 대하는 것을 두려워 하였다."


1) 신문 기사들에 대한 이승만의 거짓말


이승만이 "신문에는 한국 사람들은 잔인한 살인광들이며 무지몽매해서 그들의 가장 좋은 친우인 이등과 스티븐스를 살해하였다는 기사들이 가득 실리곤 하였다"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다.


독립운동가 장인환과 전명운의 친일파 스티븐스 처단 쾌거에 대해서 어떤 미국 신문사도 한인들이 잔인한 살인광이라는 기사를 작성하지 않았다. 샌 프란시스코 지역 신문은 오히려 대한제국의 애국자라고 표현하였고, 장인환과 전명운이 쓴 기고문과 면담, 한인 단체들과의 대화, 역사적 배경 등을 충분하게 기사화 해주었다. 그 외 지역은 객관적 사실 보도를 했다.


샌 프란시스코 일본 총영사 소지장조의 기고문 몇 편을 빼면, 1908년 3월 25일자 뉴욕 타임즈에 기고한 친일파 미국인 조지 래드(George Trumbull Ladd)만이 한인을 부정적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2) 미국 시민 여론에 대한 이승만의 거짓말


이승만이 "나는 그때 캘리포니주에 갈 일이 있었는데 일본의 선전에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한국 사람을 대하는 것을 두려워 하였다"고 한 말 역시 거짓말이다.


미국인들은 사정을 알고 나면 장인환 전명운 의사에게 호의적이었다. 따라서 스티븐스 처단이후 미국인들이 한인을 무서워 하여 피했다는 이승만의 거짓말은 허무맹랑하다. 

 

캘리포니아 사람들의 여론은 장인환 전명운 의사에게 우호적이었다. 샌 프란시스코 지역에서 명성이 높던 변호사 3명이 모두 변론을 맡아 주었다. 또한 배심원 판결에서도 배심원들은 일본 영사관의 총공세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좋게 판결해 주었다. 또한 장인환이 수감되자 많은 샌 프란시스코 시민들이 가석방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였다.

 

일본이 급하게 스티븐스를 미국으로 보낸 까닭 역시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등 군국주의로 인해 미국내 여론에 반일 정서가 증가하면서 일본인에 대한 미국 사회의 이민 금지 여론이 강해지기 전에 미리 조치를 취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일본은 열도 무력 통일 이후 안정기를 맞자 인구가 늘면서 만성적인 식량부족에 시달리자 대한제국과 남미 등으로 일본인 해외 이민을 적극 장려했고, 미국의 경우에 하와이가 일본계가 가장 많이 몰려 살고 있던 상황에서 미국의 일본인 이민 금지는 타격이 크기에 적극적으로 선제적 대처를 하려고 스티븐스를 미국에 보내서 공작을 하도록 하였다.

 

샌 프란시스코에는 버젓이 한인계 감리교 교회가 있어서 미국인과 함께 예배하는 일이 없었기에 미국인들이 교회에서 한인을 보면서 두려워 해야 할 일이 없었다. 이승만은 한인들이 대주는 돈으로 백인들이 묵는 호텔에서 하는 일도 없이 무려 한달이나 공짜로 먹고 자면서 무사히 지내다가 떠났다.

 

이승만은 미국 언론과 여론에 있지도 않았던 반한 감정이 있었다고 거짓말 하면서 자신의 치부를 덮기 위해 오히려 목숨을 걸고 민족 해방에 나선 애국자 안중근, 장인환, 전명운을 비난하였다.

 

3) 학위 수여에 대한 이승만의 거짓말

 

"나의 역사학 교수는 나를 얼마나 무서워 했던지 나의 석사 논문을 나에게 우송해 주고는 떠나기 전에 나를 만나 주지 않았다"고 거짓말 하였다.

 

이승만은 1908년 6월에 하버드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쳤다. 이승만이 하버드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받은 학점을 보면 경제 D학점, 정치 B/B학점, 역사 B/B/B/C 학점을 받았다.  하버드 대학에서는 D학점이 낙제 학점이라서 이승만은 경제에서 D를 받음으로써 자연스럽게 석사 학위를 취득할 수 없었다.


1909년 여름학기 수업을 통해서 낙제했던 경제를 피해 미국사를 선택해서 B학점을 받아 학점을 채워서야 1910년 2월 23일 가을학기 졸업식에서 겨우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1909년 여름 학기 때 이승만에게 2개월간 미국사를 가르쳤던 역사학 교수는 강의 때만 이승만의 얼굴을 보았고, 학점 평가를 한 이후에는 이승만의 얼굴을 볼 이유도 없었으며, 석사 학위 수여 담당자도 아니었다. 이승만의 석사 학위는 교무과에서 1910년 2월 23일 가을학기 졸업식에 맞춰 이승만에게 전달해 주었다.


그러므로 역사학 교수가 애국자 안중근, 장인환, 전명운이 대한제국의 적을 처단했다고 자신을 회피하여 만남을 피하고서 석사학위증만 우편으로 보내 줬다는 이승만의 말은 거짓말이다.

 

미국의 역사는 영국의 식민지배에 맞서 무장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독립 전쟁사였다. 그런 미국의 역사를 가르쳤던 역사학 교수였기에 역사관이 미국적이었다면 오히려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의 처지를 위로하고 조국 해방에 대한 용기를 북돋는 면담을 했을 것이다.


10. 장인환 의사의 하나님, 이승만의 하나님 


장인환은 일찌기 서울 정동의 독일 영사관 건너 편에 있던 미이미교(美以美敎 감리교) 제일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미국에 와서도 변함 없이 감리교 교회에 출석한 변함 없는 감리교 신도였다. 평생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을 정도로 금욕주의자이기도 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여러분의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내신 성탄 예물과 새해 문안 카드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받고 이에 정성되고 기쁜 뜻으로 여러분에게 회답하여 나를 이같이 사랑하시는 정을 표하고자 하옵나이다. 나는 우리 주 예수의 사랑하시는 안에서 육신과 영혼이 다 평안하고 즐거이 지내며 또한 하나님께 우리 민족을 전진하게 하며 발달하게 하여 피차에 사랑하고 단합하여 장차 우리의 잃어 버린 나라의 자유를 회복하고 인민을 노예 가운데서 구원하게 하기를 쉬지 않고 기도하며 또한 태평복락을 누리게 되기를 기도하옵나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심으로 우리 주를 십자가에 고난 받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게 하였으니 우리도 그 십자가를 의지하여 서로 사랑할 것이라. 사랑은 오래 참으며, 사랑은 믿으며, 사랑은 바라며, 사랑은 낙심하지 않고 영원히 힘 쓰나니 여러분은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노라. 또 다시 여러분에게 감사하고 나의 사랑하는 마음과 기도하는 뜻으로 사방에 있는 여러 형제 자매에게 문안하나이다. 건국 기원 4247년 1월 27일 캘리포니아 산 퀴인턴 감옥 장인환 상."


장인환은 기독교인으로서 왜 살인을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1916년 12월 30일 캘리포니아 주립 샌 퀜튼 교도소(San Quentin State Prison) 지도위원회에 보낸 서신에서 밝혔다.


장인환은 평양 사람 신영호가 사업차 서울에 갔다가 몸이 아파 병원에 갔더니 일본 의사의 전화를 받은 일본 경찰이 데려가서 불태워 죽이고, 일본인들이 전염병이 발생한 마을을 폐쇄하여 주민들을 굶겨 죽이는 등의 사례를 열거하고, 그 사례가 실린 덴버 포스트(Denver Post) 신문 기사를 동봉하여 보낸다고 하였다. 또한 일본인들이 24개의 규제를 만들어 기독인들을 탄압하여 심지어는 허가 없이는 설교를 할 수 없고 기독교 신앙 고백도 제한 받고 있다고 하였다. 장인환은 계속해서 한인과 한인 기독교인을 탄압하는 잔혹한 행위를 하는 자들을 합법적으로 죽이는 방법을 몰라서 불법적으로 죽였고, 불법적으로 살인한 점을 뉘우치고 있다고 밝혔다. 즉 신앙적 양심에 따라 잔혹한 자를 처단한 것은 당당하며, 합법적으로 처단할 방법이 있었다면 합법적으로 죽였을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같은 감리교 교인 이승만은 장인환 의사와 전명운 의사의 법정 통역을 거부하면서 그 이유로 시간이 부족하여 오래 있을 수 없고, 예수교인 신분으로 살인재판 통역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기독교인은 살인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던 이승만은 후일 자신의 종신독재 욕망을 위해 경찰을 동원해서 국민을 집단 살인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승만이 매우 교활한 성품을 가졌음이 여기에서도 드러났다.

 

이승만은 종교 생활마저도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에 따라 달리 하였다. 이승만이 체포에 불응하며 반항한 죄로 감옥 생활 할 때는 당시 대한제국에서 선교 활동을 가장 왕성하게 한 기독교 교파는 영국 성공회였고, 이승만은 수감 생활에서 성공회 선교사 벙커(Dalziel A.Bunker)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다. 출옥 후에 미국으로 유학 갈 때는 학비를 무상으로 해달라는 청원 편지의 대부분을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한테서 받았으며, 이로 인해 미국에서도 장로교 목사 햄린(Lewis T. Hamlin)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이승만은 미국에서 곧바로 감리교로 교파를 바꾸었다. 바로 미국 한인들이 거의 다 감리교인이었기에 감리교에 속해야 자신에게 더 큰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대한제국은 미국 공사 알렌(Horace N. Allen)의 조언으로 미국 이민을 추진하려고 1902년 11월 수민원(綬民院)을 설치했으나 이민 신청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알렌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Henry Gerhard Appenzeller)에게 도움을 청했고, 아펜젤러는 다시 인천 내리 교회 목사 존스(George H. Jones)에게 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득해 보라고 부탁하였다. 이로 인해 미국 초기 이민자들은 모두 감리교인들이었다.


교도소 교육 담당 목사 쉐퍼(A. C. Shepher)는 가석방과 관련하여 1916년 8월 19일에 교도소장 제임스 존스톤(James A. Johnston)에게 보낸 편지에서 장인환의 기독교 신앙 생활 태도를 호평하였다.


"I have known this man ever since I have been in my present position. He has been a regular and devout attendant at the at the Chaplain's services. He has in every way deported himself as a meek and sincere Christian man and I think I can safely say that on the record of his behavior and general conduct here, he deserves the very highest consideration at the hands of the officials. I feel that he is entitled to my very heartiest recommendation.(저는 직책을 맡은 이후로 이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저의) 교도소 목회에 규칙적으로 독실하게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유순하게 스스로 바르게 처신하고 있고, 진실한 기독교인이기에, 확실하게 말해서 그의 지나 온 행적과 이 곳에서의 전반적인 행동에 있어서 그는 담당 직원들의 처분에서 최고의 배려를 받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가 저의 매우 진심 어린 추천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낍니다.")


11. 장인환 전명운 의사에 대한 재판을 계속하다.


8월 17일 속개한 상급 법원 공판에서 장인환 의사의 변호인단은 장인환의 스틴븐스 처단은 애국적 광분(patriotic Insanity)에 의한 행동이라고 변론하였다. 


12월 7일 장인환 의사의 변호인단은 스티븐스의 죽음은 총격 부상의 결과가 아니라 부주의하고 미숙한 수술의 결과라고 변론하였다.


12월 8일 즉결 심판 판사 캐배니스는 전명운 의사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12월 16일 장인환 변호인단의 스티븐스의 죽음은 총격 부상의 결과가 아니라 부주의하고 미숙한 수술의 결과라는 변론에 대해서 당시 검시 외과의 클라크를 출석시켜 심리를 진행하였다. 검시의 클라크는 스티븐스의 사망 원인인 복막의 염증은 총격 부상에 의한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검찰측에서는 목격자 세무소 직원 해리 섹스턴을 다시 출석시켜 당시의 상황을 재차 환기시켰다.


12월 24일 장인환 의사는 배심원 비밀투표 결과 2급 살인죄 유죄 판결을 받았다.


배심원들은 8차례에 걸쳐 비밀 투표를 실시하였다. 1차 비밀투표에서 7명은 유죄 선고(conviction), 5명은 무죄 선고(acquittal)에 기표하였다. 4차 비밀투표에서 3명은 1급 살인(murder in the first degree), 5명은 2급 살인(murder in the second degree), 4명은 과실치사(manslaughter)에 기표하였다. 6차 비밀투표에서 8명이 2급 살인, 3명은 과실치사에 기표하였다. 8차 비밀투표에서 만장일치로 2급 살인으로 판결하였다. 

 

샌 프란시스코 시민들인 배심원들이 얼마나 장인환의 애국적 행위에 대해서 동조적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판결이었다. 과정별 투표 가운데 최초 투표에서 12명의 배심원중 무려 5명이나 명백하게 살인인데도 무죄 선고에 투표할 정도였다. 철저하게 다수결에 의거하고 법리에 따라 장인환이 최대한 우호적으로 얻을 수 있는 판결은 2급 살인죄였고, 투표 결과도 그렇게 나왔다. 스티븐스 처단 이후 미국내 반한 여론이 심했다는 이승만의 거짓말과 다르게 미국인들은 스티븐스를 처단한 장인환에게 우호적이었다.

 

1909년 1월 2일 판사 캐럴 쿡은 장인환 의사에게 2급 살인죄 유죄 판결에 따라 징역형 25년을 선고하였다. 장인환 의사는 캘리포니아 주립 샌 퀜튼 교도소에 갇혔다.


12. 장인환 의사의 감옥 생활


1909년 1월 10일 장인환은 캘리포니아 주립 샌 퀜튼 교도소에 수감번호 23295번으로 입소하였다. 형기 절반일은 1916년 1월 10일이고, 만기일은 1924년 4월 10일이었다. 수감되던 해의 나이는 33세로 미혼이었다.


장인환은 교도소에서 영어, 수학, 의류 재단, 교역에 관한 교육을 받으며, 매주 기독교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였다. 장인환은 수감 다음 날부터 바로 노역을 하였다. 1909년 1월 11일부터 10월 31일 까지 황마 제작소에서 일하였고, 1909년 10월 13일부터 1912년 9월 19일까지 세탁소에서 일하였으며, 1912년 9월 19일부터 양복점에서 재단 일을 배우고 있었다.


장인환은 평북 선천에 대동 고아원을 설립하는데 발기인으로 참여 하였고,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대동 고아원 총무로 선정된 이병준이 100원을 기부해 달라는 부탁을 하자 1911년 3월 11일 상항 공동회에 자신의 이름으로 100원을 기부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상항 공동회는 15일 표결을 통해 회원 4분의 3의 찬성으로 기부를 실행하였다. 이병준은 2천2백원을 모금하여 선천 북교회 목사 양전백에게 송금하였고, 총 9천원을 들여 대동고아원을 1927년 1월 첫째주에 완공하여 원장을 양전백, 총무를 이병준, 서기를 최봉세, 재무를 주현칙, 간사를 노정권과 김학현이 맡아 3월부터 고아를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교도소 생활 5년 후인 1914년에 캘리포니아주 초창기 변호사 제도 도입에 앞장 서고 주 의원을 지낸 집안의 대를 이은 네이던 카글런(Nathan C. Coghlan) 변호사가 가석방 서신을 보내는 등 가석방 심사를 신청했으나 주립 지방 검사 브레넌(C. H. Brennan)의 반대에 의해 9월 26일 거부 당했다.


1916년 3월 4일 서3가 327번지(327 West Third Street, San Francisco)에서 아더 카드웰 회사(Arthur Cardwell & Co)라는 이름으로 부동산과 대출 및 보험업을 하던 아더 카드웰(Arthur Cardwell)이 가석방을 청원하고, 동년 8월 9일 교목 쉐퍼가 가석방 대상자로 추천하였으나 거부 당했다.


다음 해인 1917년에도 신청하였으나 1월 27일에 거부 당했다.


1918년 5월 31일에도 장인환과 지속적으로 개인적인 서신을 교환하였던 소피 시터(S. Seeter)가 가석방을 요청하였으나, 담당 기관은 역시 거부하였다.


1916년 6월 2일  바틀리 브루넌(Bartley Zun Brunnen)은 장인환을 가석방하면 로스 엔젤레스 루카스가 152번지(152 Lucas Avenue, Los Angeles)에 소재한 사업장에서 숙식을 제공하고 월 25달러를 지급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교도소측에서는 장인환을 기초생활수급자(public charge)로 추천하려고 하였으나, 1916년 7월 14일 북미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 of North America)에서 장인환이 은행에 740달러를 예금하고 있으니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지 않을 것임을 서한으로 통지하였다.

 

1916년 7월 14일 북미대한인국민회(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회장 강영소는 장인환을 가석방해 주면 퍼시픽 빌딩(359 Pacific Ave, San Francisco)에 있는 북미대한인국민회 인쇄소에 고용하여 숙박 시설을 제공하고 월 40달러를 급여로 지급하겠다고 하였다. 장인환이 가석방 조건을 어기면 즉시 페리 빌딩 13호실에 있는 가석방 관리 직원에게 보고할 것을 약속하였다. 교도소 지도위원회(the State Board of Prison Directors)는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1918년 5월 31일 교포 조 파울 수터(Paul Suter Cho)는 장인환을 가석방하면 일자리와 집을 제공하겠다고 하였다. 

장인환은 1918년 9월 20일에 교도소 지도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가석방 지역을 교포 조의 사업장이 있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Oakland)로 해달라고 청원하였지만 소원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
1918년 10월 초 교도소측은 장인환이 출소하면 국외 추방하려던 계획을 취소하였고, 이에 지속적으로 장인환을 가석방 하고, 추방을 하지 말아 달라고 청원해 오던 워스가 1932번지(1932 Worth St. San Francisco)에서 앤드류의 장소(Andrew’s Place)라는 상호명으로 사업을 하던 소피 시터가 10월 9일 감사 편지를 전달하였다.


1918년 10월 7일 교포 황(S. S. Whang)은 매슨가 1242번지(1242 Mason St, San Francisco)에 있는 자신의 세탁소에서 수선과 세탁 일에 고용하여 숙식 제공 없이 주급 24달러, 일당 4달러를 지급하겠다고 하였다. 교도소 지도위원회는 좋은 조건이라고 판단하였다.

 
1919년 8월 2일 한인들에게 만행을 저지른 일본인의 잔혹한 행위를 목격한 사실을 기고한 영국인 맥킨지(McKenzie)의 글을 읽고 장인환을 돕기 위해 박사 버클리(C. F. Buckley)가 장인환의 애국심을 인정하는 서신을 교도소장에게 보냈다. 장인환은 이 편지가 교도소에 배달오기 전에 이미 본인의 모범 생활과 더불어 많은 샌 프란시스코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가석방으로 출소한 상태였다.

 

"You have in your prison a Korean convict in whom I am greatly interested. At the  time he shot one of our people at the Ferry, I had read a long article by an Englishman named Mckenzie who described as he saw them, the vilest atrocities penetrated on these people by the Japanese, and I thought that it was enough to drive insane any poor devil who had seen such inhuman conduct practiced on his people. Patriotism is a splendid attribute and I think this homicide was simply the result of ardent patriotism nothing else. Could you suggest in any way this unfortunate may be benefited? (제가 큰 관심을 두고 있는 한인 죄수가 교도소에 있습니다. 그가 페리에서 우리 국민 한 사람을 쐈을 때 일본인이 한인들에게 지독히 잔혹하게 가하는 것을 목격한 영국인 맥켄지씨가 쓴 장문을 읽고는 저는 자신의 국민에게 비인간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보면 어떤 불쌍한 사람이라도 충분히 광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애국주의는 훌륭한 특성이며, 저는 이 살인이 간단하게 무엇보다도 열렬한 애국주의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소장님, 이 불행이 득이 되도록 어떻게든 제안하실 수 있겠습니까?)"


13. 장인환 의사, 가석방 처분을 받다.


장인환 의사는 교포들과 샌 프란시스코 시민들의 적극적인 노력 끝에 가석방으로 1919년 1월 10일 오전 7시에 캘리포니아 주립 샌 퀜튼 교도소 문을 나섰다. 

 

저녁 8시 북미 총회는 샌 프란시스코 한인 감리교 교회에서 장인환 의사 가석방 환영회를 열였다.

 

음 날 11일에는 전명운 의사가 찾아 와 장인환 의사를 위로 하였다.
 

14. 장인환 의사

 

 


장인환은 1876년 3월 10일 평양 출신인 부모에게서 평양에서 태어났다. 6살이던 1882년 어머니를 여의고, 1888년 12살(만11세)에 공립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892년 16살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학업을 중단하였다. 평양의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운영하던 잡화점에서 2년간 1894년까지 일하였다. 1895년 독립하여 여러 지역을 이동하면서 보따리 장사를 시작하였다. 이후 서울로 거처를 옮겨 정동 감리교 제일교회에 출석하면서 세례를 받았다. 

 

1904년 하와이 노동 이민에 응모하여 선발되자 2월 13일 시베리아(S.S. Siberia)를 타고 뱃길에 나서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하여 코할라(Kohala) 지역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가 되었고, 1906년 7월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해 샌 아르도(San Ardo)에서 철도 시설 공사장에서 2개월간 일하였다. 8월 8일 대동보국회에 가입하여 회원이 되었다. 일 하던 중 등 근육이 삐어 공립병원에서 입원 생활을 하였다. 해이트가(Haight Street)에 있는 식당에서 1907년 1월까지 3개월간 일하였다. 잭슨가(Jackson Street) 하숙 집에서 3개월간 일하였다. 알래스카 통조림 공장에서 8월까지 일하였다. 샌 호제이 브라운(San Jose Braun)이 운영하던 기숙학교에서 2개월간 일하였다. 밴 네스가(Van Ness Avenue)에 있던 집에서 가사 일을 하였다. 

 

그러다가 장인환은 1908년 3월 21일 스티븐스의 망언을 듣고 분개하여, 스티븐스를 자신이 처단하겠다고 나서서 대동보국회쪽 요원으로 선정되었다.


장인환은 가석방된 이후 한인 이규화가 운영하던 양복점에서 일하다가 6월 초에 백인이 운영하는 마켓가(Market Street)에 있는 양복점에서 주급 20달러를 받고 일하기 시작했다.


1924년 4월 10일 장인환의 형기가 완전히 만료되자 캘리포니아 주지사 프렌드 리차드슨(Friend Richardson)이 1889년에 통과된 성문법 제264장 제7조와 제20조에 의거 장인환이 해방되었다고 영을 발하였다.


1926년 6월 초 선천 대동 고아원 총무로 임명된 장인환은 모금 활동을 위해 17일 로스 엔젤레스, 리들리(Reedley), 다뉴바(Dinuba), 스탁턴(Stockton), 새크라멘토(Sacramento), 맥스웰(Maxwell) 자치구 등 한인촌 방문에 나섰다. 7월 15일 샌 프란시스코로 돌아 왔다. 8월 4일에는 하와이를 방문하여 모금 활동을 하고 12월 16일 샌 프란시스코로 복귀하였다.


장인환은 황보정걸과 세탁소 동업을 시작하였다.


장인환은 고향 평양에 가기로 결정하고 1927년 3월 20일 오후 2시 샌 프란시스코 한인 감리교 교회에서 전별회를 갖고, 오후 저녁 6시에는 대한인국민회 상항지방회와 대한여자애국단 상항지부가 연합으로 개최하여 26명이 모인 만찬회에 참석하였다.


3월 29일 장인환은 샌 프란시스코 항구를 떠나 고향 평양으로 향했다. 4월 21일 새벽 5시 40분에 평양역에 도착한 장인환은 대동강변에 있는 선교리 104번지 삼촌 장명진의 집에 짐을 풀었다. 5월 5일 오후 5시 평양 시내 우춘관에서 조만식, 김동원을 비롯해서 평양 유지 20여명이 장인환 귀국 환영회를 열어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6월 10일 오후 3시 평양 남산현 교회에서 목사 오기선의 주례로 평양 정의 여자고등보통학교를 갓 졸업한 18살의 윤치복과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많은 여성들이 중년이 되어버린 장인환과 결혼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장인환은 결혼을 했으면서도 처 윤치복을 남겨두고 혼자서 10월 27일 샌 프란시스코 항구에 당도하여 시베리아(S.S. Siberia)에서 내려서 재입국 증명서를 노동성에 제출하여 통과하였다.


1928년 2월 말 장인환은 동업하던 황보정걸에게서 세탁소 지분을 전부 사들여서 2월 마지막 날인 29일부터 독자적으로 운영해 나가기 시작했다.


장인환은 1930년 5월 10일부터 아파서 누워 지내다 통증이 심해지자 1930년 5월 14일 공립병원에 입원하였는데 심각한 배설기능 상실이었다. 대한인국민회 상항 지방회는 김동우에게 모금 업무를 맡겨 치료비 70원을 모았다.


대한인국민회 상항 지방회가 장인환을 사립병원인 안식일교회 위생병원으로 옮겨서 진단한 결과 암이라고 판정 받았다. 한인 사회에 짐이 되지 않으려고 장인환은 1930년 5월 22일 00시 15분에 병원 3층 입원실에서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장인환을 콜마(Colma)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1962년 정부는 장인환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75년 8월 8일 오전 11시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 선열 묘역에 이장하였다.


15. 전명운 의사

 

 


전명운은 1884년 6월 25일 서울 중구 명동 성당 부근에서 포목전을 하던 전성근의 3형제 아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2세에 모친을 잃고, 16세에 부친상을 당했다. 큰 형을 도와 포목전 일을 하면서 조순희와 결혼하였다. 일부에서는 이 무렵 한성학원에 다녔다고 하나, 이 시기에 한성중학교는 있었지만 한성학원은 없었다.


1902년 12월 22일 영국 함선 갤릭(SS Gaelic)을 타고 인천항을 떠나 1903년 1월 13일 하와이에 도착한 것으로 시작된 한인의 미국 이민은 계속되어, 전명운은 영국 함선 도릭(SS Doric)을 타고서 1903년 9월 21일 하와이 호눌룰루항에 도착하였다. 오아후(Oahu) 섬 북서쪽 와일루아(Wailua)의 모쿨레이아(Mokuleia) 지역 농장에서 일하였다.


1904년 9월 23일 전명운은 샌 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도움을 받기 위해 한인 감리교 교회를 찾아가 교회 건물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일 자리를 찾아 다녔다. 철도 공사장에서도 일을 하였고, 부두에서도 일을 하다가 방직공장 보일러 화부와 스탁톤 지역 농장에서 일을 하였다. 1903년 9월 22일 안창호, 이대위, 장경, 박영순, 김성무 등이 샌 프란시스코 지역 한인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든 친목회에 가입하였다. 친목회는 다음 해 4월 5일 공립협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조직을 확대하고 사업을 확장하였다.


전명운은 학업을 위해 미국에 왔지만 학비를 벌 수 있는 안정적인 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 전명운은 단기간에 목돈을 쥐기 위해 샌 프란시스코보다 월급을 2배나 더 많이 주는 알래스카에 있는 통조림 공장에서 일을 하였다. 일본인 감독이 임금을 체불하는 등 한인 노동자와의 문제가 끊이질 않자 대신 해결해 주면서 일 처리 능력을 인정 받아 샌 프란시스코로 돌아 온 후에는 신한민보에 광고를 실는 등 한인들에게 알래스카 어업 일자리를 주선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1908년 3월 21일 스티븐스의 망언이 터져 나왔고, 전명운은 스티븐스를 처단하겠다고 자원하여 공립협회 쪽 요원으로 선발되었다.


1908년 6월 27일 조건부 보석으로 석방된 전명운은 공립회관에 머물다가 8월 경 변호사와 상의하여 샌 프란시스코를 떠나 미국 동부에서 유럽으로 건너 가 10월에 연해주에 도착하여 블라디보스톡 한인촌에서 이치권이 운영하던 여관에 머물렀다.  러시아어를 배우기 위해 학교에 다녔지만 돈이 없어서 월사금 1원 50전을 내지 못하였다.


전명운은 연해주에 머무는 동안 안중근, 엄인섭, 정순만, 함동철 등을 만났다. 이들 10여명은 다음 해인 1909년 3월 죽음으로써 구국 투쟁을 하겠다며 의지의 표시로 왼손 네 번째 손가락 한 마디를 자르고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였다. 안중근은 그해 10월 26일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을 처단하여 구국투쟁을 실천하였다.


1908년 12월 8일 즉결 심판 판사 캐배니스에 의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09년 10월경 다시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유럽을 거쳐 뉴욕으로 들어가 시기를 알 수 없지만 다시 샌 프란시스코에 돌아왔고, 1915년 무렵에 부인 조순희와 재회하였다.

1917년과 1918년에는 만테카(Manteca, California)에서 세탁소를 하였다.

 

1917년 4월 6일 만테카 한인 지방회 실업부원에 선정되고, 다음 해 1918년 12월에 만테카 한인 지방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세탁소를 정리하고 한인들이 집중적으로 벼 농사를 하던 멀리 떨어진 윌로우스(Willows)로 이사하여 여관을 하면서 일자리 주선을 하였다.


1919년 1월 11일 장인환이 전날 10일에 가석방 되자 찾아가 위로하였다.


1919년 2월 윌로우스 한인 지방회 부회장이 되어 지속적으로 국민회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 2월 큰 아들 전영덕이 13살 나이에 스키를 타다가 죽고, 다음 달 3월에는 부인 조순희가 사망하였다.


전명운은 남은 아들 알프레드와 딸 경숙, 경령을 고아원에 맡기고 로스 엔젤레스에서 세탁소 직원으로 일을 하였다.


1935년 봄 전명운은 아들과 딸 둘을 고아원에서 데려와 함께 살았으나 남은 아들 알프레드마저 수영하다가 익사하였다.


1937년 전명운은 철도 건널목 간수가 되었다. 이 시기에 장녀 전경숙을 유학생 이태모와 결혼시켰다. 사위 이태모는 무선전신 관련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하여 통신부대에서 근무하던 중 일본군에 강제 징병당한 한인 포로들을 교육시켜 서울 등 각 지방에 침투시킬 요원으로 양성하는 냅코 계획(Napko Project)에 교관으로 차출되어 참가 하였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전명운은 한인국방경위대(Korean Brigade 맹호군)에 가입하여 12월 29일부터 훈련을 받았다.


1947년 11월 18일 저녁 7시에 전명운은 63세의 나이에 로스 엔젤레스의 북그랜드가 232 번지(232 North Grand Avenue, Los Angeles)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로스 앤젤레스의 캘버리(Calvary) 천주교 묘역에 안치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국립묘지로 이장하려고 하였으나 손녀의 반대로 중단했다가, 1994년 4월 8일 오후 2시 국립묘지 애국 선열 묘역으로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