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준은 1904년 2월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통역사로 일본군 제12사단 병참감 대곡희구장(大谷喜久藏 오따니 기꾸조) 육군 소장을 따라 청국에까지 진출했다가 대한제국에 들어 왔다.
송병준은 독립협회 회원이었던 윤시병, 유학주, 염중모, 윤길병, 홍귀섭 등을 포섭하여 같은 해 8월 18일 유신회를 조직하였다.
이틀 뒤인 20일에 송병준이 다시 회의를 열었는데, 이때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칙령으로 총순과 순검을 파견하여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일본군 12사단 헌병들이 나서서 막으며 경무청 순검이 칙령을 시행치 못하게 만들었다.1 송병준은 유신회를 일진회로 개명하였고, 회장에 윤시병, 부회장에 유학주를 추대하였다.
윤시병은 1898년 3월 남궁억, 고희준과 더불어 독립협회 총대위원에 선출되었고, 1898년 11월 30일 이승만과 함께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어 중추원 의장 대변 의관이 되었다.2 다음 달 12월 23일에 중추원 의관에서 면관되었다. 러일 전쟁시 상륙한 일본군의 통역사로 일을 하였다.
유학주는 독립협회 회원이었으며,3 만민공동회 시위 집회 때 임시의장을 맡아 이승만과 함께 활발하게 활동하였다.4 따라서 일진회 회장 윤시병과 부회장 유학주는 어떤 식으로든지 과거 독립협회 동지 이승만과 접촉했음은 자명하다.
언론에 밝고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이승만은 일진회 창립식 때 일본군 12사단 헌병이 출동하여 식장을 보호하면서 대한제국 경찰의 해산 집행을 협박하여 방해하였다는 황성신문의 기사를 읽어 보았을 터이니 처음부터 일진회가 친일단체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진회 뒤에는 좌뢰웅철(佐瀨熊鐵 사세 구마테츠)이 자리 잡고 있었고, 일진회의 고문으로는 망월용태랑(望月龍太郞 모치츠키 류타로), 신곡탁남(神谷卓南 가미타니 타크미나미)이 있었다.5 좌뢰웅철은 민비 시해에도 가담한 자였다.6 신곡탁남은 1906년 경성일보 기자가 되었으며, 망월용태랑은 석탄 채굴 및 판매 회사 임원으로 있으면서 1905년에는 제주 해역 조업권을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받아 냈다.
이렇듯 일진회는 성립 당시부터 친일 단체였다. 이승만이 대한제국을 떠나던 무렵인 1904년 11월 상순 이용구가 조직한 잔존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진보회와 통합하면서7 일진회 회원 수는 원 일진회원 3,670명에다 진보회원 117,735명이 가세하여 총 121,405명으로 증가하였다.8 일진회와 통합한 진보회 회원들은 1904년 11월 상순부터 평양, 황주, 진남포 등에서 일본의 철도공사, 일본군의 병참 업무에 무임금 노역을 자원하여 협조하고 있었다.9
이승만은 1904년 11월 4일 오후 1시 서울을 떠나 제물포에서 5일 오후 3시에 에스 에스 오하이오(SS Ohio)를 타고 출발하여 목포를 거쳐 부산에 도달하였다.10 이승만은 일본 신호(神戶 고베)를 거쳐 11월 2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11월 30일 목사 윤병구와 함께 11시 30분에 에스 에스 시베리아(SS Siberia)를 타고 호놀룰루를 떠나 12월 6일 오전 10시 샌프란시스코에서 내려서 지내다가 12월 17일 로스엔젤레스에 도착하여 머물다가 12월 26일 오후 8시 산타페 열차를 타고 로스엔젤레스를 출발하여 시카고를 경유해서 12월 31일 오후 9시에 워싱턴에 도착하였다.11
이승만은 1905년 1월 주미 한국 공사관을 방문하여 공사대리 신태무, 서기관 홍철순, 3등 참서관 김윤정과 인사하면서 친분을 맺었다.12 이승만은 1905년 초 주한 미국 공사를 지냈던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 하원 의원에게 민영환과 한규설이 보내는 편지를 전달하고, 2월경에 휴 딘스모어를 통해서 존 헤이(John Hay) 국무장관과 30분간 대면하여 대한제국 기독교 선교 활동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가 대화 말미에 대한제국에도 개방 정책을 펴달라고 말하였다고 자서전에 남겼다.
대한제국 밀사 주일 공사 조민희가 보낸 황제의 밀서를 1904년 12월 21일에 존 헤이 국무장관과 만나서 전달한 친한파로 주미한국공사관 고문직을 맡고 있던 니덤(Charles W. Needham)이 콜롬비아 대학13 총장으로 있었다. 이승만은 워싱턴으로 니덤을 찾아가 주한 선교사들의 추천서를 보여 주어 2학년에 편입하였다.
1905년 4월 23일 부활절 행사 때 이승만은 장로교 햄린(Lewis T. Hamlin)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1905년 6월 4일 이승만은 박용만이 자신의 아들 이봉수를 미국에 데려 오자,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3등 참서관 김윤정에게 잠시 맡겼다. 6월 19일 이승만은 선교사 조지 히버 존스(George Heber Jones)가 전에 소개해 준 필라델피아에 있는 보이드(Boyd) 여사 집을 찾아가 여름 방학 내내 숙박을 신세 지고는 아들 이봉수마저 부탁하였다.14 이봉수는 1906년 2월 25일 디프테리아에 걸려 사망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미국 대통령은 1905년 7월 10일 러일 강화 회담 장소로 포츠머스를 선택했다고 발표하였다.15 루즈벨트는 러일 강화 회담 장소로 포츠머스를 수 주 전에 미리 선정해 놓고 있었다.16
미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d Taft)는 6월 30일 워싱턴을 떠나 7월 1일 시카고에서 기차로 4일 캘리포니아에 도착하였다. 5일 버클리를 출발하여 8일 샌프란시스코에 당도하였다. 1905년 7월 8일 에스 에스 만주리아(SS Manchuria)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905년 7월 14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그날 다시 출항하여 24일 새벽 4시 30분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17
이 과정에서 윤병구 목사는 와드맨(John W. Wadman) 감리사와 앳키슨(Alatau Leonard Charles Atkinson) 하와이 주지사 대리의 도움으로 하와이에 들른 미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에게서 자신과 이승만을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소개하는 소개장을 받을 수 있었다.18
미육군 장관 태프트는 대통령 루즈벨트의 딸 앨리스 루즈벨트(Alice Longworth Roosevelt)와 수 십명의 상원의원 부부 동반 모임과 함께19 일본, 필리핀, 중국, 대한제국, 일본을 거쳐 에스 에스 시베리아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1905년 6월30일부터 10월 23일까지의 기간 중에서 대한제국에서 보름정도, 일본에서 보름정도, 중국에서 18일정도, 필리핀에서 25일정도 머물렀다.
미육군 장관 태프트는 7월 24일 일본 횡빈(橫濱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여독을 푼 뒤 26일 동경(東京 도쿄)으로 들어가 28일 오전까지 머물렀다. 동경에 머문 시간은 이틀이었지만 27일 아침 미육군 장관 태프트는 일본 수상 계태랑(桂太郎 가쓰라 타로)의 요청에 따라 일본은 필리핀을 공격하지 않고, 미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인정한다라는 일명 태프트 - 가쓰라 각서를 교환하였다.
일본 수상 계태랑과 비밀 각서를 교환하던 당시 미육군 장관 태프트는 대통령 루즈벨트의 지시로 임시 국무장관의 신분이었다.20 당시 국무장관은 엘리후 루트(Elihu Root)였다. 따라서 루즈벨트는 이미 태프트 - 가쓰라 각서에 어떤 내용이 담길 것인지 알고 있었다.
7월 29일 경도(京都 교토)로 이동한 임시 국무장관 태프트는 국무장관 루트 앞으로 일본 수상 계태랑과 대한제국 및 필리핀 현황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음을 전보로 전달하였다. 태프트 - 가쓰라 각서 보고서 내용에 루트 국무장관에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본의 아니게 국무부의 역할을 침해하게 되어 예민했었다고 적었다. 대통령 루즈벨트는 태프트 - 가쓰라 각서 내용을 승인하였다.
윤병구 목사는 하와이 교포 4,000여명의 서명이 담긴 청원서를 들고 이승만이 보이드 여사 집에서 아들과 함께 여름 휴가를 즐기고 있던 필라델피아에서 합류하여 역시 같은 필라델피아에서 살고 있던 서재필을 찾아가 대한제국 독립보존 청원서 내용을 검토하였다.21 윤병구와 이승만은 8월 3일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가 머물고 있던 뉴욕주 롱아일랜드 오이스터 베이(Oyster Bay)에 있는 유일한 호텔에 여장을 풀고는 행정부 서기관 대리 벤자민 반즈(Benjamin F. Barnes)에게 육군장관 태프트의 소개장을 제출하였다.22
다음 날 4일 아침 행정부 서기관 대리 반즈가 대통령 루즈벨트와의 면담 시간을 통보해 주었다. 4일 오후 3시 이승만과 윤병구는 미국 대통령 별장 사가모어 힐(Sagamore Hill)에서 루즈벨트와 면담하면서 하와이 교민들의 대한제국 독립유지 청원을 받아 들여 포츠머스 러일 강화 회담에서 의제로 다뤄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승만의 말대로라면 루즈벨트는 하와이 시민들의 청원서를 대한제국 공사관을 통해서 접수하면 제출하겠다라는 이상한 말을 하고는 청원서를 받아 들이지 않고 면담을 마쳤다.23
윤병구와 이승만은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와의 4일 오후 면담을 갖기 앞 날인 3일에 미국 언론에 자신들은 대한제국이나 대한제국 황제를 대변하지 않고 수 천명의 회원을 가진 친일 일진회를 대변한다고 밝혔다.
"We wish it distinctly understood that we are not representatives of the Emperor." said Mr. Yoon. the spokesman, "for our Emperor dose not now represent the best interests of the people of Corea. There has been a wonderful awakening in Corea within the last few years, but it has all taken place among the lower classes. The officials are tainted with the influence of Russia. A great soeiety with many thousands of members is growing rapidly throughout the empire, and one of these days will take hold of affairs and conduct the government. The name of this soeiety is Il Chin Hoi,which, translated, means 'The Daily Progress.' As the epresentatives of this great society we have been delegated to call on the President and lay a memorial at his feet. "
"우리는 제국의 대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알아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변인 윤씨가 말 하였다. "우리 황제를 위한 대한제국 국민의 최우선 이해 관계를 대변하지 않습니다. 낮은 계층 사이에서 발생하기는 했지만 지난 몇년간 대한제국에서는 놀라운 자각이 있었습니다. 정부 당국은 러시아의 외압으로 썩었습니다. 수 천명에 달하는 회원을 가진 거대한 협회가 제국 도처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며, 조만간 정부의 업무와 운영을 맡게 될 것입니다. 이 협회의 이름은 일진회로서 번역하면 뜻이 매일 진보한다입니다. 이 원대한 협회의 대표자들로서 우리는 위임 받은대로 대통령을 방문하여 청원서를 발 밑에 놓고자 합니다."
- New York Daily Tribune 1905. 08. 04
기자가 대한제국이 멸망하게 된다면 러시아와 일본 중 어느 쪽을 선택하겠느냐고 질문하자 이승만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선택하였다. 이승만의 머리는 여전히 항서양 대동아 단결이라는 일본의 선동에 세뇌되어 있었다.
If Korea were to lose her independence what rule would she prefer, Russinan or Japanese? "Plesae", broke in Mr. Rhee in pleading tone, "please don't compare the two. Russia is looked upon by us as the avowed enemy of all the ancient races in the Far East. If it came to resisting Russian sovereignty the so-called yellow peoples of Asia would stand together as a unit. But it has been intimated that the Korean Governmint had pro-Russian learnings, was suggested. It is quite possible that the tainted Russian 'diplomacy' has got in its work among the advisers of the Emperorm but the common people in Korea are pronounced in their opposition to Russia and everything Russian. "
만약 대한제국이 독립을 잃게 되면 러시아 또는 일본 중 어느 쪽의 통치를 선호합니까? "부디"라고 이 박사가 변론하는 어조로 끊었다. "부디 둘을 비교하지 마십시오. 러시아는 우리들에게서 극동에서 모든 고대 인종의 적으로 공언되었습니다. 만일 러시아의 통치에 저항해야 한다면 아시아의 황인종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하나의 단위로 함께 일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대한제국 정부는 제안 받은 친러시아 학문을 넌지시 알리고 있는 중입니다. 부패한 러시아 '외교'가 황제의 조언자들 사이에서 받아 들여졌지만, 대한제국 안에서 일반인들은 러시아와 러시아인의 모든 것을 반대한다고 말하였습니다."
- The New York Times 1905. 08. 04
"The Russians have ever been the enemies of our people." said Mr. Yoon. "They stand for everything that is hateful and deceitful, and we rejoice that the Japanese are winning in this war."
"러시아는 여전히 우리 사람들의 적입니다." 윤씨가 말 하였다. "그들이 주장하는 모든 것들이 악의적이고 기만적이라서 우리는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있음을 환호합니다."
- New York Daily Tribune 1905. 08. 04
또한 윤병구는 8천명의 하와이 한인을 대표한다고 언론에 밝혔다.24 하와이 교민들은 한국계 미국인들이다. 따라서 대한제국 공사관을 통해서 미국 시민들의 청원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제출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루즈벨트는 하와이 교민들을 미국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미국 시민들이 스페인으로부터 쿠바를 독립시키자는 여론을 형성하여 확산 시키자, 언론들도 동조하면서 미국 정부는 1898년 4월 스페인과의 전쟁을 결정한 적이 있었다. 미국이 스페인으로부터 쿠바를 독립시킬 때 루즈벨트는 직접 거친 기병대(Rough Rider)라는 군사 조직을 결성하여 쿠바 산환계곡에서 전투를 지휘했었다. 그 유명세로 뉴욕 시장이 되었듯이 루즈벨트는 시민 여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경험이 있었다.
루즈벨트는 하와이 교민들의 청원서는 미국 시민들이 자신의 정부에게 시민 여론을 전달하는 것이라서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을 거쳐야 하는 대한제국의 외교 문서가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루즈벨트는 대한제국 독립 보존운동을 대한제국 몇 사람의 사적인 활동으로 격하시켜서 미국 사회에서 대한제국 독립 지지 여론 형성 가능성을 미리 차단해 버렸다.
루즈벨트는 뉴욕 시장이었을 때부터 이미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1900년 8월 28일 독일 대사이자 친구였던 스턴버그(Hermann Speck von Sternberg)에게 "I should like to see Japan have Korea. She will be a check upon Russia, and she deserves it for what she has done. But I do earnestly hope there will be no slicing of China. It will be bad for everybody in the end. 본인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하는 것을 보아야만 합니다. 대한제국은 러시아에 대한 확인이 될 것이고, 대한제국이 지금까지 한 행동에서 그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대한제국에 중국의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기를 정말 진심으로 바랍니다. 끝에 가서는 모두에게 나쁘게 될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25
루즈벨트는 대통령이 되어서는 친한파로 알려진 국무장관 존 헤이에게 보낸 편지의 아랫 부분에 친필로 "We cannot possibly inerfere for the Koreans against Japan. They [the Koreans] couldn't strike one blow in their own defense. 우리는 한국이 일본에 대항하는 것에 도저히 개입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국가 방위에서 타격 한 번 주지 못했습니다"라고 적었으며, 일본 대표단 친구들에게는 "sooner or later it will be better for Japan to takeover Korea. I rather think that Japan should takeover Korea for the sake of the Koreans and for Asia. 당장이든 나중이든 일본이 대한제국을 손에 넣는 것이 낫습니다. 아시아나 대한제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일본이 대한제국을 탈취해야만 합니다"라고 하였다.26
다른 한편으로 미숙한 이승만은 간교한 루즈벨트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더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승만은 공명심에 들떠서 그저 주미 공사 대리 김윤정에게 미국 시민권자들인 하와이 교포들의 청원서를 대한제국의 공식 외교 문서로 만들어 달라는 황당한 요구를 하였다. 이는 공문서 위조에 해당하는 범죄다. 위조한 외교문서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외교 마찰을 불러 올 뿐이다. 따라서 김윤정은 대한제국 정부의 공식 승인 없이는 공문서 위조를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비록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김윤정이 친일파로 변절하기는 했지만, 워싱턴 공사 대리 신분이었던 당시에는 대한제국 공무원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법규를 준수하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생각이 짧아 한번 더 생각하지도 않고 화를 내어 김윤정 탓만 하면서 평생 저주하였다. 이승만은 김윤정에게서 자신을 돕기로 약속을 받고 주미 대한제국 공사 대리로 승진시켜 줬는데도 일본과 손잡고 자신과의 약속을 깼다고 자서전에서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승만이 김윤정을 승진시켜 줬다는 증거나 김윤정이 당시에 일본과 손잡은 증거는 없다.
김윤정은 경성부 필운동 174번지가 원적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주미 공사 업무를 일본 주미공사 일치익(日置益)에게 인수인계하고, 모교인 콜로라도 주립대학 총장을 통해서 이등박문의 등용 추천서를 받아 귀국하였다.27 다음해 1906년 8월 태인군수로 나가고, 같은 해 11월에는 인천부윤로 승진하여 인천항 재판소 판사와 동년 12월 관립 인천일어학교장을 겸임하였다. 1907년 5월에는 공립 인천보통학교장까지 겸임하면서 동년 9월에 훈4등 유출강지로 태극장을 받고, 11월에는 일본 태자를 수행한 공로로 일본국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사직을 하지 않고 승진을 거듭하여 총독부 중추원 참의, 충북도지사 등을 역임하였다. 해방이 되어 위태롭다고 느꼈는지 김윤정은 78세의 노구를 이끌고 미군정 하지 중장에게 자신을 등용해 달라고 진정서를 내고 독촉하다가 면회강요죄로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하였다.28 김윤정은 1947년에서 1948년 사이에 사망하였다.29
<The New York Times, Friday, August 4, 1905>
- 황성신문 1904. 08. 22, 維新會員이 再昨日下午二時 한 廣橋下 紙墨都家에 金集하엿난되 警務廳에셔 勅命을 奉承하고 摠巡과 巡檢을 派送하야 解散함을 曉諭하엇더니 日憲兵이 不可曰此會人員의 言諭이 不可한 바 貴巡檢의 捉去를 不待하고 日本司令部로 一幷 捉去할 터이니 第觀下回가 未晩이라 하기로 巡檢이 弛禁함에 臨時會長 尹始炳氏 等이 開會하고 維新의 目的을 說明하되 自 上으로 維新一字를 未洽하시난 旨意가 有하시다니 會名을 改正하야 一進이라 稱하고 主旨를 當中에 公佈하얏난매 一은 帝室을 安寧케할 事오 二난 政府를 改革할 事오 三은 人民의 生命財產을 保護할 事오 四난 施政과 財政을 整理할 事라하고 會名改正함을 政府에 通告하고 委員을 擇定하야 該會의 規則을 議定하기로 可决하고 通常會君 每 土曜日 下午二時로 决定하고 特別히는 當此 多事之秋하야 不在此 限하여 下午四時에 仍以閉會하얏더라. [본문으로]
- 독립신문 1898. 04. 07, 중추원 의관 五十인을 그그저께 밤에 정부에서 뽑았다 하기로 그 성명을 좌에 기재하노라. 고영근 이남규 홍종억 이교석 윤시병 남궁억 심은택 이시우 윤이병 원세성 이병응 김병일 홍종우 이관제 박하성 리기 김규필 송수만 유맹 현제창 윤하영 홍재기 송달현 김영우 윤시영 정인목 이덕하 최석창 김연식 박영락 윤석영 유석준 이준덕 강상기 유문수 도진삼 박래동 이병소 양홍묵 정항모 최정덕 신해영 김상범 이승만 어용선 홍정우 조한우 변하진 이규환 손승용 [본문으로]
- 독립신문 1896. 04. 07, 그저께 독립 협회 회원 중에 경무청에 포라 당하였다는 제씨를 들은 대로 대강 기재 하노라 부회장 이상재 회원 윤하영 유맹 방한뎍 염중모 김구현 현제창 이건호 정항모 김두현 조한우 홍정우 정교 남궁억 한치유 최윤근 유학주 제씨인데 그중 최윤씨는 성명록에 들지 아니한 고로 어저께 놓였다더라 경무 관리들이 독립 협회 사무소에 가서 회중 문서들과 수다한 돈과 기외 모든 집물을 다 수험 하여 가져 갔다더라. [본문으로]
- 독립신문 1898. 11. 28, 일전에 부상패들이 인화문 밖에 진복 하여 있는 공동회 관민을 짓쳐 들어올 때에 공동회 임시 회장은 유학주씨요 언단에 올라 연설 하는 이는 이승만씨라 이승만씨가 연설 하기를 우리가 여기 진복 하여 풍찬 노숙 하는 것이 옷들을 탐 하느냐 밥을 탐하느냐 다만 한다는 일이 모두 나라를 위 하고 동포를 사랑 함이라 지금 들은즉 못된 간세배가 부상패를 불러 우리 만민을 치라하여 부상패들이 지금 목전에 당도 하였는지라 우리가 죽더라도 충애하는 의리는 가지고 죽을 터이니 신민의 직분에 죽어도 또한 천추에 큰 영광이로라 할 즈음에 과천 군수 김영수씨가 손에다 큰 뭉치를 들고 내두르며 수천 명 부상패를 거느리고 공동회석을 에워싸며 어지럽고 지독한 몽둥이들은 시석이 분분한 전장에서 못지 안 한지라 이 때에 여러 관민들은 그 무상패의 몽둥이에 상하여 부득이 물러나는데 임시 회장 유학주씨와 연설하던 이승만씨는 가장 의리가 추상같아 언연 부동하다가 길씨가 도랑하여 이리 저리 뛰놀며 무인지경 같이 하는 것을 이승만씨가 너무 분히 여겨 길씨를 붙잡으며 크게 꾸짖어 가로되 너도 명색이 국록지신이요 너도 소위 대한 백성이지 네 어찌 간세배와 부동 하여 부상패를 모집 하여 충애하는 우리 만민을 치느냐 하며 횔항할 즈음에 길씨는 몸을 빼어 좌우 충돌 하는지라 어떤 유력한 갓 쓴 부상 하나가 이승만씨를 꼭 안어 잡거늘 이승만씨가 더욱 충분 하여 그 부상을 뿌리치니 다른 부상들이 벌써 에워 싸는지라 이승만씨가 자기의 가졌던 약한 지팡이로 휘두르며 수천 명 부상이 삼대 같이 둔취한 데를 헤치고 배재 학당 앞길로 나서며 땅을 두드리고 하늘을 부르짖며 통곡 하거늘 이승만씨의 부친이 자기 아들을 안고 또한 통곡 하는지라. 어떠한 이가 이승만씨의 부친을 대하여 말 하기를 어찌하여 아들을 그런 위태한데 다니게 하느뇨 한데 이승만씨의 부친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 자식이 만일 패려한 일을 하거드면 그 아비된 도리에 마땅히 엄금 하려니와 당당한 충애의 의리로 나라를 위 하고 동포를 사랑하여 다니는 것을 어찌 금 할 수 있느냐 하였다니 이승만씨의 충애에 열심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 부친의 당당한 의리는 세계에 더욱 드문 줄로 공론이 있다더라. [본문으로]
- 김병제, 진보회와 일진회의 비화, 혜성 2권 제1호, 개벽사 1926. 6, 133~134쪽, 때에 경성에는 진보의 창립보다 좀 앞서서 일즉 독립협회 도당이던 윤시병, 윤길병, 윤갑병, 염중모, 홍귀섭 등이 처음에 유신회를 발기하였다가 일진회로 개명하고, 일병의 보호하에 겨우 명맥을 지속하던 중 그들은 진보회의 대기함을 보고 놀랍고도 기뻐서 당시 진보회 회장 이용구를 면회하고 합동하기를 청하게 되었다. 이용구도 역시 정부가 진보회를 동학당으로 지목하여 일병을 교촉 공멸케 된 위기에 직면한 것을 살피고 이 해 11월에 진보회와 일진회가 합하여 진보회원으로 일진회원이 되게 한 후 윤시병은 일진회 본회장이 되고 이용구는 13도지방총회장이 되게 되었다. 그와 같이 합동통일된 일진회는 경성에 본부를 두고 13도에 지부를 두고 360여군에 지회를 두어 현대식 중앙집권제로써 조직하고 도지부에는 지부회장 즉 지회에는 지회장을 선출하여 각 그 회무를 총관케 하여 일시에 전국 정계를 정렴하고 정치의 경신을 도하여 민간폐막한 자를 사실(査實)하여 제커게 하되 그 징계하는 동시에 일일 반환케 하고, 무명잡세를 혁파하며, 총대를 정하여 비정을 탄핵하는 등 민권을 떨치게 하니 때의 지방관원은 전전긍긍하여 일진회 풍하에 추령시종하게된 감이 있었다. 이마만치 권위를 잡게 된 일진회 안에는 그의 최고 간부인 이용구, 손병준 등이 원지도자인 손의암이 밖에 있고 정치적 교양과 훈련이 적은 회원을 세포로 하니만치 본회의 강령과 창립의 목적과는 상위되는 행동으로 회무를 전횡하게 되어 서로는 황해 평안 등지의 회원 3천여명을 징발하여 경의군용 철도 징설의 공역을 보조하게 하고, 북으로는 함경도 지방의 회원 수천명을 징발하여 일본군 북진대의 군수품 수송에 노역케 하니 이에 일즉부터 이용구, 송병준 등의 용사에 의혹을 품었던 지방 인사들은 이와 같은 거조에 대하여 이용구 이하 중요 간부에게 허다한 질문과 엄중한 항의로써 일진회 자체에는 장차 대동요가 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일진회의 전신 진보회의 창립은 손의암의 지휘로써 일거 3개월내에 정부를 개혁하고 국정을 갱신하여 내로 동학의 자유권을 획득하자던 목적이었으나 이 일을 주간하게 된 이용구는 그 최초 목적대로 운동을 진행시키지 못하고 당시 일본군 사령부 기밀계통역인 손병준과 악수하여 일을 의논하게 되었으니 송병준의 흑막에는 좌뢰웅철(佐瀨熊鐵 사세 구마테츠)이란 사람이 잠영해 있고, 또는 일진회의 고문으로는 망월용태랑(望月龍太郞모치츠키 류타로), 신곡탁남(神谷卓南 가미타니 타크미나미)이란 사람이 있었었다. 그렇게 되고 보니 실제로는 일진회의 회무를 그들 일본 사람 몇이 좌우하게 된 셈이었다. 그런데다가 일러전쟁은 어느덧 종결을 맺게 되어 일본이 대승을 얻고 보니 동양의 대세는 일본의 세력에 의하여 좌우하게 되었으며 또한편으로는 일본군 사령부를 배경으로 한 일진회가 정곙 파문을 일으키게 되어 한정부에서는 일본 공사관에 이 일을 항의하게 되니 결국 일본 공사관과 군사령부간에 충돌이 생길뿐 아니라 당시 임권조(林權助 하야시 곤노스케) 공사는 일진회의 고문이던 신곡탁남을 목하전(目賀田種太郞 메가타 다네타로)과 같이 재정 고문으로 추천하고 망월용태랑은 일본으로 동경으로 귀환시켜서 일불구(一不久)에 한경(韓京)으로 오게 되었는데 이등(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이 오는 날은 일진회와 군사령부와의 관계를 단연코 끊게 된 경우이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관계와 사정이 밑에서 송병준의 상당역인 좌류와 송병준, 이용구 세 사람이 을사 11월 7일 밤 일본 요리옥 청화정에서 일진회의 난국 전향책으로 밀의한 결과 마침내 외교권 위임 선언서를 중외에 발포하게 되었었다. 그리하자 몇 날이 지나지 못하여 동월 17일에 일한조약을 체결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소위 을사5조약이라는 것이다. 이에 손의암은 동경에 있어서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이용구를 불러 선언서의 내용과 선언을 발포하게 된 이유를 묻고 크게 토책하여 가로되 보호와 독립은 근본이 다른 것이니 보호를 받고자 하면 독립을 버려야 하고, 독립을 하고자 하면 보호를 버려야 하나니 어찌 보호라는 이름 아랫 독립을 얻고자 하는 우거가 천하 어디에 있으냐 하고 분연히 일어나 다시 동학도중을 재조직하여 타일 권토중래를 획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을사 12월 1일에 동학을 천도교라 개명하여 천하에 광포하고 그 이듬해 병오 1월에 의암은 급속히 경성으로 귀환 하였었다. [본문으로]
- 혼마 규스케, 역자 최혜주, 일본인의 조선정탐록 조선잡기, 김영사, 2008, 276쪽, 이것을 현실화 한 것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었다. 시바 시로柴四郞, 쓰기나리 히카루月成光, 다케다 노리유키, 아다치 겐죠安達謙藏, 쿠니모토 시게아키國友重章, 후지카쓰 아키라藤勝顯, 삿사 마사유키佐佐正之, 사세 구마테쓰佐瀨熊鐵, 오자키 마사요시,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등 56명이 참가하였다. [본문으로]
- 김병제, 진보회와 일진회의 비화, 혜성 2권 제1호, 개벽사 1926. 6, 133~134쪽, 같은 글 [본문으로]
- 韓國駐箚軍司令官 落合豊三郞, 一進會 현황에 관한 조사보고, 韓駐參第598號 1904. 11. 22, 국사편찬위원회 [본문으로]
- 韓國駐箚軍參謀長 落合豊三郞, 進步會員의 철도공사, 군아, 공공 경영 사업에 無價出役者 대책에 관한 件, 韓駐參第588號 1904. 11. 16, 국사편찬위원회, 軍司令官 앞으로 보낸 進步會員의 自願勞役에 관한 報告. 平壤에 있는 吉岡 憲兵大尉의 보고에 의하면, 1. 평양 부근에서의 進步會는 군용철도공사의 청부 및 北陸土木會社에 인부를 기부하고 싶다는 뜻을 同地의 병참사령관에게 출원하였으므로 同官은 이를 가납하였으나 진보회 측에서는 무임으로 노동하겠다는 출원이어서 同官은 이를 허가하지 않고, 1일에 한화 60錢씩을 지급하기로 되어 당초에는 1일 50명씩이 출역하고 있었으나 목하 1일 100명씩이 나와 교대출역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 한 번도 임금을 수령하지 않았다고 한다.2. 黃州 부근에서의 同 회원도 역시 이달 상순에 약 200명이 철도공사의 인부로서 출역하기를 同地의 공사 청부 有馬組에 출원하였으나, 당시 인부가 부족한 때였기 때문에 이를 쾌락하였더니 이들 역시 임금을 원하지 않고 자꾸 무임노역을 간원하여 따라서 有馬組에서는 黃州兵站支部에 그 취지를 신고한 결과 출역 인부에 대한 상당한 임전을 저축해 두었다가 恤兵部 또는 同地의 일어학교 창립비로 헌금하기로 상호교섭이 성립되어 목하 출역하고 있다고 한다.3. 鎭南浦에 있어서도 同地 부근의 進步會員으로부터 노역을 이곳의 병참사령관에게 출원하였기 때문에 사령관은 이를 받아들여 목하 날마다 4~50명씩이 매립 공사에 출역하는데 이들 역시 임금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숙박료만을 지불하고 있다고 함. 위를 보고합니다. 1904년 11월 15일 憲兵隊長 [본문으로]
- Robert Tarbell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Dodd Mead and Company 1954, 76쪽, on November 4, 1904, at 1:00 P.M. they left Seoul, after a tearful farewell from Rhee's father, who was deeply stirred by mingled feelings of wanting him to stay and wanting him to go. Upon arrival at Chemulpo harbor (now Inchon) they secretly boarded the S.S. Ohio, which lifted anchor the following day at 3:00 P.M. Brief stops were made at Mokpo and Pusan, at each of which Rhee was fearful lest they be taken from the ship.11월 4일 오후 1시 그들은 떠나 보내느냐 남게 하느냐 하는 마음이 뒤섞인 깊히 술렁거리던 아버지와 슬픈 작별 뒤로 서울을 떠났다. 제물포항(지금은 인천)에 도착하여 에스 에스 오하이오에 몰래 승선하였고, 배는 닻을 걷어 올리고 다음 날 오후 3시에 잠시 목포와 부산에서 머물렀는데 그때마다 이승만은 배에서 내려지게 될까봐 두려워 하였다. [본문으로]
- 이정식 지음, 권기붕 옮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청년시절, 동아일보사, 279~283쪽. [본문으로]
- 위의 책 [본문으로]
- 콜롬비아 대학은 1910년 이후 조지 워싱턴 대학으로 이름을 바꿨다. [본문으로]
- Robert Tarbell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Dodd Mead and Company 1954, 101~102쪽 [본문으로]
- Frank Jones Brewing Co. Ltd., A Souvenir of the Treaty of Portsmouth New Hampshire 1905, Announcement made of the selection of Portsmouth as the place of meeting on July 10, 1905. [본문으로]
- Portsmouth Herald, July 11, 1905 Will Be World Wide: Portsmouth's Fame Certain to Extend Throughout the Globe: Meeting of Peace Embassy an Event of Highest Importance: City Selected by the President As the Scene Of The Deliberations Several Weeks Ago. [본문으로]
- /June 30 – July 1: Washington to Chicago/July 1-4: Train to California/July 5–8: Berkeley and San Francisco/July 8: Aboard the Manchuria/July 14: Hawaii arrival and departure/July 24: Yokohama /July 26: Tokyo/July 28: Tokyo; train to Kyoto/July 30: Kyoto to Kobe/August 1-5: Nagasaki to Manila/August 11: Visit to Bacoor & Cavite/August 12: Train to Malolos/August 13: Depart from Manila on ship Logan through the islands/August 14: Iloilo/August 15: Parro, Molo/August 16: Bacolod/August 17: Zamboanga/August 18: Jolo/August 19: Celebes Sea (?)/August 20 - 21: Across Mindanao from Malabang to Camp Overton/August 22: Cebu/August 24: Tacloban/August 25: Legazpi/August 27-29: Sail back to Manila/August 30: Manila/August 31 – September 2: Sail for Hong Kong/September 2 - 6: Hong Kong/September 3: Guangzhou/September 6 – 11: Voyage to Tianjin/September 11: Anchor at Dagu/September 12: Arrival at Tianjin, train to Beijing/September 13: Beijing/September 14: Beijing, audience with the imperial court/September 18: Tianjin Dinner with Yuan Shi-kai/September 19: Battleship Ohio to Chemulpo; train to Seoul; palanquin to legation/September 20: Lunch with Emperor at Palace/September 22: Garden Party by Prince Yii at old East Palace. /September 23: Luncheon by Hayashi, the Japanese minister; dinner by German Minister/September 24: Attend athletic school boy activies by Japanese education committtee. /Train to Daegu /Japanese boat from Pusan to Shimonoseki/October 5: Canadian Mail Steamer to Yokohama/October 8•06:10 Leave Yokohama (横浜発)•07:07 Arrive in Shinbashi (新橋着)•Breakfast at Tsukiji Seiyoken (築地精養軒ニテ朝食)•09:00 Leave from Ueno (上野発)•13:50 Arrive in Nikko (日光着)/October 9•Round trip to Chugushi in Chuzenji (中宮祠 (中禅寺)往返)•Lunch at Lakeside Hotel (レーキサイドホテル昼食/October 10•08:54 Leave Nikko. Lunch on the train (日光発 汽車中ニテ午餐)•14:30 Arrive at Ueno (上野着)•Did not return to Yokohama. Night at the Embassy (横浜には戻らず 公使館泊 )/October 11•11:30 From Shinbashi Alice leaves for Yokohama by Train (新橋発汽車ニテアリス嬢帰浜)/October 12•Sightseeing, Shopping (市内遊覧、買物)/October 13•Going out in the morning (午前中 外出)•12:30 Lunch at Oriental Hotel Annex (午餐 (オリエンタルホテル別館))•14:00 Depart Hotel (ホテル出立)•15:25 Return to US by SS Siberia (サイベリア号にて帰国の途に)/October 23: Arrival in San Francisco [본문으로]
- 전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84쪽, 태프트가 중간 기착지 하와이에 들렀을 때 감리교 목사 윤병구는 와드맨(John W. Wadman) 감리사와 앳킨슨( Atkinson) 주지사 대리의 도움을 얻어 자신과 이승만을 루즈벨트에게 소개하는 소개장을 받았다. [본문으로]
- 그 일부는 다음과 같다. Senator and Mrs. Dubois (ID), Sen. and Mrs. Scott (WVA), Sen. and Mrs. Newlands (NEV), Sens. Allison (Iowa), Daniel (VA), Foster (LA), Long (KS), Patterson (CO), Stone (MO), and Warren (WYO). [본문으로]
- 태프트- 가쓰라 조약, Indeed, Secretary Taft added that he felt much delicacy in advancing the views he did, for he had no mandate for the purpose from the President, and since he left Washington Mr. Root had been appointed Secretary of State and he might seem thus to be trespassing on another's department. He could not, however, in view of Count Katsura's courteous desire to discuss the questions, decline to express his opinions which he had formed while he was temporarily discharging the duties of Secretary of State under the direction of the President and he would forward to Mr. Root and the President a memorandum of the conversation. 명확하게, 태프트 장관은 덧붙힌다면 대통령으로부터 결과를 대한 위임을 받지 못한채 그가 행한 견해의 진전과 그가 워싱턴을 떠날 때부터 루트씨가 국무장관으로 있었음으로 그는 따라서 다른 부처에 불법으로 침범한 것으로 보이는 것에 보다 예민하게 느꼈다. 대통령의 지시로 국무장관직을 임시로 수행하는 동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에 대해 의논하기를 바라는 가쓰라 백작의 정중한 소망의 관점에서, 그에게 전달한 대로 의견을 표해 달라는 것을 거절할 수 없었고, 루트 국무장관과 대통령께 대화록을 보낸다. 가쓰라 백작이 말하기를 같은 내용을, 비밀리에, 코무라 남작에게 보낸다고 한다. [본문으로]
- 김삼웅, 독부 이승만 평전, 책보세, 2012, 65쪽 윤병구와 이승만은 필라델피아에 체류중인 서재필을 찾아가 탄원서의 자문을 받고 워싱턴으로 가서 루즈벨트 대통령의 면담을 요청했다. /면담을 요청한 곳은 워싱턴이 아니라 대통령의 여름 별장 뉴욕주 롱아일랜드 오이스터 베이 였다. [본문으로]
- The Washington times. August 04, 1905, Many More Visitors For the President. OYSTER BAY, Aug. 4. - After the peace people leave Sagamore Hill today. The president will receive a number of other visitors. Among these wiIl be George Smalley, correspondent of the London Times, who will introduce Sir Donald McKens Wallac and Dr. Dillon, the representative of the London Telegraph. Messrs, Smalley and Dillon, it is understood, are coming primarily to request permission to be present on the Mayflower during tomorrow's ceremony. Two Koreans the Rev. P. K. Yoon and Syngman Rhee, of Seoul who came here yesterday afternoon to lay a memorial at the feet of the president, have not yet been granted an audience, and it is more than likely that they will be obliged to depart without seeing the Executive, Acting Secretary Barnes Intimated this morning that the president would probably decide to refer them to the Korean legation at Washington. 두 명의 한국인 윤병구 목사와 서울의 이승만은 대통령의 발 아래 청원서를 두고자 어제 오후 왔으나 아직 접견을 보장받지 못했고, 그들을 워싱턴에서 한국 공사관으로 부르기로 대통령이 결정하면 오늘 아침 개인적으로 행정부의 서기관 대리 반즈를 만나지 못하고 떠나게 될 공산이 더 크다.If they are denied permission to see the President it will be a sad blow to the quiet little envoys who have traveled thousands of miles to execute their mission. They claim to represent the great progressive party in Korea known as II Chin Hol, which, translated, means the "Society of Daily Progress." They assert that the Korean Emperor does not represent his people, but is under foreign domination. The Society of Progress is anxious for the President to declare his friendship for Korea at this time in order to avert the partition or the absorption of the little country by the Japanese or Russians.그들이 대통령을 접견하는 것이 거부되면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려고 수천 마일을 여행한 참으로 작은 외교관들에게는 슬픈 충격이 될 것이다. 그들은 일진회로 알려진 번역하면 매일 진보하는 협회라는 한국의 거대한 진보 정당을 대표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한제국은 그 국민을 대변하지 않으며 외국의 지배 아래 있다고 단언했다. 진보협회는 일본이나 러시아에 의해 작은 나라의 분할 또는 흡수를 벗어나기 위해 이 시간 대통령이 한국에 대한 우호 선언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본문으로]
- 이 부분은 Robert Tarbell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Dodd Mead and Company 1954에 나오는 내용이다. 즉 이승만의 자서전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본문으로]
- The New York Times 1905. 08. 04, We are not the accredited representatives of the Korean Government. said Mr. Yoon. We represent the common people of Korea, and it is on their behalg we have come to see your President. Among the present crisis has brought about the 8,000 Koreans who reside in Hawaii. It is those people I represent. Though Korea has been the seat on war, neither Russia nor Japan has any right to claim suzerainty over Korean territory. All the common people on this country stand together for the preservation of the integrity of Korean territory and the maintenance of her absolute independence. 우리는 대한제국 정부의 공식 대표가 아닙니다라고 미스터 윤이 말하였다. 우리는 대한제국 일반인들을 대표하여, 그들을 대신해서 여러분의 대통령을 뵙고자 왔습니다. 현시국의 제반 문제들은 하와이에 살고 있는 8,000 한인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저는 이들을 대표합니다. 대한제국이 전쟁 상황에 놓여 있기는 해도 러시아나 일본은 대한제국 영토에 어떠한 종주권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 나라의 모든 일반인들은 대한제국의 온전한 보존과 완전한 독립의 유지를 위해 함께 일어 설 것입니다. Were you not correctly reported, then, in San Francisco, when you were quoted as saying that you hoped for Korea's ultimate independence? Mr. Yoon was asked. No,: he replied. Korea is independent now. True, we have made a treaty with Japan since the war began a treaty with Japan since the war began. This trearty has been misunderstood by the world. It was written in Chinese characters. In it was used the word meaning 'protection.' That word has been translated to read 'protectorate.' As I understand it, 'protectorate' in English stands for something not at all implied in the Chinese word. The Chinese word means protection, pure and simple, not protection with control. 여러 분이 대한제국의 궁극적인 독립을 희망한다고 말한 바를 인용한대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맞지 않게 보도했었습니까? 미스터 윤은 물었다. 아니오라고 그는 대답했다. 대한제국은 지금 독립해 있습니다. 진실로 우리는 전쟁이 시작된 때로부터 일본과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조약을 세계가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조약은 한자로 쓰여졌습니다. 그 안에서는 단어는 '보호'라는 뜻으로 쓰여져 왔습니다. 그 단어는 보호국으로 번역되어 읽혀지고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영어로 된 보호국은 한자에 있어서 모든 것을 함축한 뭔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한자의 뜻은 보호, 순수하고 간단한 것이지 통제하는 보호가 아닙니다.If Korea were to lose her independence what rule would she prefer, Russinan or Japanese? Plesae, broke in Mr. Rhee in pleading tone, please don't compare the two. Russia is looked upon by us as the avowed enemy of all the ancient races in the Far East. If it came to resisting Russian sovereignty the so-called yellow peoples of Asia would stand together as a unit. But it has been intimated that the Korean Governmint had pro-Russian learnings, was suggested. It is quite possible that the tainted Russian 'diplimacy' has got in its work among the advisers of the Emperorm but the common people in Korea are promounced in their opposition to Russia and everything Russian. 만약 대한제국이 독립을 잃게 되면 러시아 또는 일본 중 어느 쪽의 통치를 선호합니까? 부디라고 이 박사가 변론하는 어조로 말을 끊었다. 부디 둘을 비교하지 마십시오. 러시아는 우리들에게서 극동에서 모든 고대 인종의 적으로 공언되었습니다. 만일 러시아의 통치에 저항해야 한다면 아시아의 황인종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하나의 단위로 함께 일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대한제국 정부는 제안된 친러시아 학문을 넌지시 알리고 있는 중입니다. 부패한 러시아 '외교'가 황제의 조언자들 사이에서 일이 되어지는 것이 제법 가능했지만, 대한제국의 일반인들은 러시아와 러시아인의 모든 것을 반대한다고 말하였습니다.Mr. Yoon replied: We have not comingm, but we earnestly hope he will give us a hearing. We look upon the United States as our oldest friend by wirtue of the fact that she was the first nation to negtiate a treaty with Korea. This treaty is still in force, and has been taken as a standard in other teaties made by Korea whth Western nations. We turn naturally to this country. All that we ask is that the American people and its President give sympathetic understanding to the attitude of the awakened thought of Korea. Mr. Yoon said that since the war the patriotism of the Korean people had been stimulated into new life, and that the mew ideas had been crystallized by the formation of a society among the people of Korea almost national in scope. This socety, which is konwn as the Il-Chin-Hoi, or the Brotherhood for Daily Progress, has chosen for its slogan at this time, Korea for the its slogan at this time, Korea for the Koreans.미스터 윤은 전쟁 때부터 대한제국인의 애국심은 새로운 삶으로 기운을 돋우고 있으며, 새로운 생각은 거의 대부분 민족 범위에서 한국인들 사이에서 사회 단체의 형성으로 구체화 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사회단체는 일진회 또는 매일 진보 협회로 알려졌으며 이 시간 구호는, 이 시간 구호는 대한제국, 대한제국인을 위한 대한제국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본문으로]
- Letter from Theodore Roosevelt to Hermann Speck von Sternberg, Theodore Roosevelt (Author), Elting Elmore Morison (Editor), John Morton Blum (Editor), John J. Buckley (Editor), The Letters of Theodore Roosevelt, The Years of Preparation: Vol. 2, 1898-1900 (Volumes 1 and 2), Harvard University Press, 1951, 1,394쪽, I should like to see Japan have Korea. She will be a check upon Russia, and she deserves it for what she has done. But I do earnestly hope there will be no slicing of China. It wil be bad for everybody in the end. [본문으로]
- Terence Roehrig, From Deterrence to Engagement: The U.S. Defense Commitment to South Korea, Lexington Books 2006, 115쪽, In a handwritten note at the bottom of a letter to John Hay, the president's secretary of state, Roosvelt noted, we cannot possibly inerfere for the Koreans against Japan. They [the Koreans] cuuldn't strike one blow in their own defense. In the negotiations led by Theodore Roosevelt to end the Russo-Japanese War, Roosevelt is reported to have told a member of the Japanese delegation with whom he was friends, sooner or later it will be better for Japan to takeover Korea. I rather think that Japan should takeover Korea for the sake of the Koreans and for Asia. [본문으로]
- 동아일보 1946. 04. 29, 친일파 김윤정, 하지에게 등용을 진정하다 면회강요죄로 취조. 시내 弼雲町 金潤晶(78)은 소위 韓日합병 당시 워싱턴 주미대리공사로 있다 일본 주미 공사 일치익(日置益)에게 조선공사관을 접수시킨 다음 출신교인 ‘껄레데트’대학 총장의 소개로 伊藤博文의 등용 추천을 얻어 조선에 돌아와, 泰仁군수로부터 仁川부윤을 거쳐 忠北지사 중추원참의를 역임하여 從三位勳二等의 꼬리표가 붙기까지 왜정에 바친 충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인데, 미군이 진주한 후 하지 중장에게 ‘자기는 친일파도 반역자도 아니니 등용을 해달라’는 진정서를 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다시 李承晩 金九 金奎植에게 대리공사증서 이등박문의 추천장 등에 영문번역을 첨부하여 같은 진정서를 제출했다가 역시 추출을 당하면서도, 누차 오만하게도 전화로 회답을 독촉하는 등 면회를 강요하여 27일 제일관구 경찰청에 면회강요죄로 취조를 받게 되었다. [본문으로]
- 위의 기사 [본문으로]
- 서울신문 1949. 06. 25, (상략) 1945년에 내가 처음 환국하여 조선호텔로 들어올 적에 모든 동포가 환영하는 중에 김윤정이 따라와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후에는 다시 보이지 않더니 근자에 들으니 벌써 세상을 떠났다 합니다. (하략)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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