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이승만은 대한제국 황제의 밀사가 아니었다.

허구인물 전우치 2015. 10. 31. 21:27

이승만은 독립 운동 열등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감옥생활이 독립운동과 전혀 상관이 없었고,1 일본과 직접적인 대립이나 갈등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과 직접 투쟁한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자서전에 지나치게 자신과 일본의 관계를 과장하거나 거짓말마저 섞었다. 실제 이승만은 일상 생활에서도 일본 경찰관에게 고문 당해서 손가락이 불구가 되었다고 평생 동안 거짓말을 하고 다녔을 정도로2 자신도 다른 독립운동가들처럼 일본에게 희생당한 독립 운동가인척 하였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나오자 마자 일본이 자신을 적대시하고3 일본 경찰이 감시했다고4 자서전에 버젓히 거짓말을 적어 놓았다. 알다시피 이승만은 일본 공사 임권조(林權助 하야시 곤스케)의 도움으로 조기 석방되었다.5 즉 이승만은 러일 전쟁 과정에서 친일 논리를 펼쳤기에 일본으로서는 이승만에게 적대감을 표시해야 하거나 감시해야 할 필요성이 전혀 없었다.


이승만이 일본의 문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시기는 이승만이 미국에 있던 1905년 7월이다.6 대한제국 정부 내부의 친일파가 밀고했다면서 일본이 요주의 인물로 지정한 이용익 밑에서 일 하던 이명상이 미국에 나가 있는 이승만을 포츠머스 평화회의에 보내면 어떠 하겠느냐고 안을 내고 박용화와 이용익이 일을 주선하기로 하였다는 내용의 주한 일본 공사의 보고서에 등장한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일본 공사는 바로 이승만을 조기 석방 시켜 준 임권조(林權助 하야시 곤스케)였다. 이승만이 일본에 적대적이거나 위험 인물이었다면 임권조는 절대로 이승만을 특별 사면시켜 달라는 이승만측의 사적인 청탁을 받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 공사 임권조는 이승만의 존재에 대해서 전혀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가 대한제국 정부를 염탐하는 과정에서 요주의 인물로 지정해 놓은 이용익을 감시하여 작성한 보고서 내용의 일부에 이승만을 언급하였을 뿐이다. 즉 이승만은 이전에는 일본의 감시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이 사건의 내부 밀고자는 박용화일 가능성이 높다. 박용화는 네 달 뒤인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 체결 때 구완희 등과 함께 일본군을 이끌고 황궁을 포위해 대포를 일렬로 세우고는 황제를 협박하여 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승만은 민영환과 한규설이 자신을 주미 공사로 임명하려고 주청을 올렸는데 일본 사람이 반대하여 무산되었다고 주장했으나 이 내용은 오직 이승만의 자서전에만 등장한다.7 이 대목은 이승만이 얼마나 간교한지를 잘 보여 준다. 이승만은 황제가 싫다면서도 대한제국의 밀사라는 명분은 얻고 싶어 한다. 기록 남기기를 광적으로 좋아했던 이승만은 꼭 결정적인 증명이 필요한 대목에서는 절대로 사실적인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이승만은 황제를 적으로 여겼지만 황제가 내리는 주미 공사라는 벼슬은 하고 싶어서 일본인이 반대해서 무산됐다는 거짓말을 늘어 놓으며 안타까워 하는 척 했다.  이승만은 권력욕이 유난히 강해서 13살 때부터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번번히 낙방한 탓에 벼슬에 한이 맺혀 있었다. 기독교인 이승만이 자신의 모든 인생 여정에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별의별 악랄한 짓을 저지르게 되는 탐욕의 시초였다.

 

만약 민영환과 한규설이 실제 국무 회의에서 이승만을 주미 공사로 천거했다고 쳐도 일본으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러일 전쟁 시기에 친일을 주장하던 이승만이기에 주미 공사 임명을 환영했을 것이다. 더구나 1905년 8월 이승만이 자신은 대한제국의 대변인이 아니라 친일단체 일진회의 대변인이며,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기뻐한다고 미국 언론에 밝혔듯이 이승만은 여전히 친일적 사고를 하고 있었다.


민영환과 한규설이 이승만에게 준 문서는 전 주한 미국 공사로 서울에 있을 때 안면을 익혀 두었던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 하원 의원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사적인 편지에 불과했다.8 그렇기에 존 헤이(John Hay) 국무장관과 만났을 때 그 귀중한 시간을 쓸데없는 대한제국내 미국 선교사들 이야기로 면담 시간 거의 모두를 낭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9 민영환과 한규설은 많은 것을 기대하였을 것이나 정작 이승만의 외교력은 겨우 차 한 잔 얻어 마시며 상대방이 주도하는 화술에 말려 든 수준에 불과하였다.


한 나라의 밀서라고 하면 반드시 공신할 수 있는 증명이 있어야 그 효력을 가진다. 그런데 이승만이 들고 간 민영환과 한규설이 보낸 편지에는 어떠한 공신력을 가진 증명도 없었다. 이승만이 들고 간 민영환과 한규설의 개인적인 편지는 휴 딘스모어에게 전달됨으로써 역할이 끝났다. 따라서 이승만이 황제가 민영환과 한규설을 의심하여 몰래 궁녀를 보내서 따로 만나자고 했는데도 거절했다고 자서전에 쓴 말은 거짓말에 불과하다.


이승만이 무려 19통이나 되는 자신 이승만에게 학비를 무상 지원해 달라는 추천서를 선교사들로부터 받아 낸 것을 보면 미국에 가는 주목적은 개인적인 이익 추구가 우선이었다.10 이승만에게 추천서를 써준 선교사 중 한 명인 존 프레스톤(John F. Preston)은 1903년에 대한제국에 입국하여 목포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한 상태였는데도 서울에 있는 이승만에게 추천서를 써 줄 정도면 이승만이 오래 전부터 미국으로 갈 준비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으로 가는 여비와 체류비를 대한제국 정부가 비밀자금으로 지원하지 않은 것을 봐도 이승만은 황제의 밀사가 아니었다. 이승만은 미국에 갈 여비의 일부를 이승만이 감옥에 있었을 때 경무청 감옥서 간수장이었던 이중진에게서 받았다.11 이중진이 동생 이중혁의 미국 유학길에 이승만이 동행해 주는 댓가로 준 것으로 보인다. 이로 보아 감옥서에서부터 미국 유학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정작 미국을 대상으로 한 황제의 밀사는 주일 공사 조민희였다.12 조민희는 1904년 12월 21일 주미한국공사관 고문직을 맡고 있던 콜롬비아대학13 총장 니덤(Charles W. Needham)을 통해 존 헤이 국무장관에게 한국의 독립과 유지에 힘써 달라는 황제의 공식 밀서를 전달하였다.14 니덤 총장은 22일 자신이 21일에 존 헤이 국무장관을 만나서 황제의 뜻을 전달했음을 편지로 작성하여 조민희에게 보냈다.15

 

니덤은 편지에서 조선을 둘러 싸고 벌어지는 전쟁 상황에서 미국 정부가 대한제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명확하게 미국의 입장을 전달하였다.16 즉 니덤은 개인적으로는 대한제국의 입장을 지지하지만 미국 정부는 대한제국을 돕지 않을 것임을 알려 주었다.


이미 황제의 밀사 조민희가 존 헤이 국무장관에게 밀서를 전달한 1904년 12월 21일로부터 2개월이나 뒤인 1905년 2월에야 이승만은 민영환과 한규설이 쌓은 친분 관계인 휴 딘스모어를 통해 존 헤이 국무장관을 만나 시간의 대부분을 한국 기독교 선교 이야기로 다 보내고 마지막에야 대한제국에도 청국에게 했던 문호 개방 정책을 펴 줄 것을 부탁한다는 말만 하고는 물러 났다. 문호 개방 정책을 부탁했다는 말도 오직 이승만 자서전에만 나타나는 이승만 개인의 주장일 뿐이다.

 

이승만은 자기가 출세하려고 미국으로 갔으면서도 침소봉대하여 자신이 대한제국의 밀사로서 미국에 간 것처럼 자서전에 거짓말을 늘어 놓았다.

 

 

  1. 이승만이 감옥생활을 하게 된 죄는 탈옥하다가 체포에 불응하고 반항한 죄였다. 탈옥하기 이전에는 미결수였기 때문에 아무런 죄가 없었다. 더구나 대질신문을 통해 혐의가 없음이 드러나 곧 석방될 시점에 미련하게 탈옥하고 말았다. [본문으로]
  2. ① 메리 홍 (100세), 제54회 이승만 1부, 한국사전, KBS1 2008. 08. 30 숙희야, 제 이름이 숙희인데 그렇게 저를 부르시며 흰 머리 좀 뽑아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 분은 자리에 앉거나 할 때면 늘 손끝을 호호 부는 습관이 있었어요. 왜 그렇게 손을 호호 부는지 궁금하더라고요. ② 베티 김(89세), 제54회 이승만 1부, 한국사전, KBS1 2008. 08. 30 학교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요. 갑자기 이승만 박사가 몸을 떨기 시작했어요. 이상하게 숨을 떨면서 손가락을 호호 불었어요. 나중에 어머니한테 설명을 들었는데, 그분이 감옥에 있을 때 고문을 심하게 받아서 생겨난 행동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우리는 와 그는 진정한 영웅이구나라고 생각하고 그를 다르게 봤죠. ③ 강원용, 역사의 언덕에서, 한길사 2003년 211~212쪽 이박사의 측근으로 미국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이명원이라는 사람의 소개로 돈암장에 들어가 이박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의 심정은 마치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 같았다. 우리들은 위대한 애국자를 직접 만난다는 감격에 차서 차렷 자세로 잔뜩 긴장을 하고는 이박사를 기다렸다. 그런데 한순간 이박사가 불쑥 나타나서는 마치 오랫동안 알아 온 사이라도 되는 냥 친근한 태도로 대하는 것이었다. 아니, 자네들이야 나와 한 식구나 마찬가진데 그렇게 형식적으로 대할 것이 뭐 있나. 내 방으로 들어 와. 그러면서 우리를 온돌로 된 자기 침실로 데리고 들어 갔다. 우리가 침실에 들어가 앉자 그는 서랍을 열어 깨엿을 꺼내더니 손수 망치로 깨서 한 조각씩 우리에게 먹으라고 권했다. 우리는 황송해서 차마 받아 먹을 수가 없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아냐 아냐. 왔으니까 뭘 먹어야지. 내 아들이라고 해도 좋고 손자라고 해도 좋은 사람들인데... 기독 청년들이라면 내가 기독교인이니 내 아들이고 손자들 아닌가. 그가 너무나 스스럼 없이 대하는 바람에 우리는 그 엿을 받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와 얘기하는 도중 이박사는 자기 손끝을 후후 불며 얼굴을 찌푸리곤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손을 다친 줄 알고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아니, 이 박사님. 엿을 깨다가 손을 다치신 것 아닙니까? 아냐. 내가 왜놈들한테 붙들려 갔을 때 고문당한 손이 지금도 종종 아파서 그래. 그 말을 듣고 우리는 울컥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런 애국자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는 일제시대에 일경에게 체포된 일이 없었다. [본문으로]
  3. 이정식, 이승만 자서전, 이승만의 청년시절, 동아일보사 277쪽, 그 전에는 한국 정부가 나의 원수였는데 석방된 후에는 한국의 독립을 주창한다고 하던 일본 사람들이 나를 적대시하기 시작하였다. [본문으로]
  4. 이정식, 위의 책, 279쪽, 지금까지 한국의 독립을 주장한다고 하며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친구라고 자칭하던 일본인들은 내가 1904년 8월 서울의 감옥에서 석방된 후로부터 나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본문으로]
  5.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81쪽 이승만은 러일전쟁 와중에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도움으로 30세 되던 1904년 8월 9일 석방되었다. [본문으로]
  6. 駐韓日本公使가 믿을 만한 某大臣의 內報라 하여, 1905년 7월 14일, 고종시대사 6집, 국사편찬위원회, 駐韓日本公使가 믿을 만한 某大臣의 內報라 하여 日本外務大臣에게 報告한 바에 의하면 近間 開催될 平和會義를 機會로 在美 李承晩으로 하여금 某 國 政治家에 대해 目下 韓國이 日本으로부터 非常한 虐待를 받고 있는 情況을 말하고 列國 特히 美國의 厚意로 韓國의 獨立을 保持케 하도록 힘쓰게 하려는 秘密會議를 宮中에서 行하였는데 이의 밑일은 李明翔(注意人物 李容翊의 部下)이며 朴鏞和와 李容翊이 斡旋을 專爲하였다 하다. [본문으로]
  7. 이정식, 이승만 자서전, 이승만의 청년시절, 동아일보사 279쪽, 민공과 한장군은 황제에게 나를 주미 공사로 임명하도록 권했으나, 일본 사람이 반대하기 때문에 황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본문으로]
  8. Robert Tarbell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Dodd Mead and Company 1954, 81쪽, In the meantime, Rhee presented letters from Prince Min and General Hahn to Senator Hugh A. Dinsmore from Arkansas, who had served a term as American minister in Seoul, and who was very sympathetic to the Koreans. Dinsmore was delighted to hear from his two old friends and promised to arrange an interview for Rhee with Secretary of State John Hay, the famous author of the Open Door policy for China. 그 사이 이승만은 민공과 한 장군이 알칸사스 출신으로 서울에서 미국 공사를 지냈던 하원의원으로 한국에 대해 아주 호의적인 휴 딘스모어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었다. 딘스모어는 두 오랜 친구로부터 듣게 되어 기뻐했고, 이승만을 위해 중국 문호개방 정책 저작자인 존 헤이 국무장관과의 면담을 주선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본문으로]
  9. Robert Tarbell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Dodd Mead and Company 1954, 83쪽, Mr. Hay expressed his feeling that the Koreans must love the missionaries, and he added, "As long as the Koreans do not start any anti-Christian movement, there will be no trouble. Of course what he had in mind was the anti-Christian and anti-foreign Boxer movement in China. Rhee assured him that since the opening of Korea to intercourse with Western nations no single missionary in the country had ever suffered any harm or indignity of any kind. Then Rhee concluded, "We Koreans ask you, Mr. Secretary, to do for Korea what you have done for China/' Hay seemed pleased at this reference to his Open Door policy, and then, in the presence of Senator Dinsmore, he said, "I will do everything I can to fulfill our treaty obligations, either personally or representing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whenever the opportunity presents itself." 헤이씨는 한국인은 선교사들을 사랑해야 하고, 추가적으로 한국인이 어떠한 반기독교 행동을 하지 않는 동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면서 자신의 느낌을 털어 놓았다. 당연히 중국에서의 반기독교, 반외국인 의화단 운동을 염두해 둔 것이었다. 이승만은 한국이 서양 국가들과 통상하기 위해서 개방한 때부터 나라 안에서 어떠한 선교사도 어떤 해나 어떠한 종류의 모욕으로도 고통 받지 않았다고 장담하였다. 그리고 이승만은 우리 한국인은 국무장관이신 당신께서 중국을 위해 했던 것을 한국을 위해서 해주시를 바란다고 마무리하였다. 헤이는 자신의 문호 개방 정책을 언급한 점을 기뻐한 것으로 보였으며, 말하기를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개인적으로나 미국 정부를 대신하여서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하겠다고 하였다. [본문으로]
  10. 유영익, 이승만의 삶과 꿈, 중앙일보사 1996, 42쪽,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게일, 언더우드, 벙커, 질레트(Philip L. Gillett ), 프레스톤(John F. Preston) 등 한국 내의 저명한 선교사들로부터 미국 교계 지도자들 앞으로 쓴 추천서 19통을 두둑히 챙겨 두었다. 추천서에서 이들 선교사는 이구동성으로 이승만이 정치범으로 7년간 감옥생활을 할 때 40여명의 동료 죄수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사실을 강조하고 그가 장차 한국 기독교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을 장담하면서 그에게 2~3년 간의 교육 완성 기회를 베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본문으로]
  11. Robert Tarbell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Dodd Mead and Company 1954, 76쪽, He was provided with a student passport and with messages to the Korean legation in Washington, which he concealed in the false bottom of his trunk, Then accompanied by Lee Chung Hyuk (who took the anglicized name of Howard Leigh) he left Korea ostensibly to study in the United States. Their fare was supplied in part by Lee Chung Chin, who had been the deputy warden of Seoul Prison during their long imprisonment. 이승만의 자신의 짐가방 이중 바닥 밑에 숨겨 둔 워싱턴 공사관에 보내는 전갈과 함께 학생 여권을 발급 받았고, (영국식으로 하워드 리로 이름을 정한) 이중혁이 동행하여 겉으로는 미국에서 공부하려고 가는냥 한국을 떠났다. 그들의 승선비는 그들의 오랜 투옥 동안 한성감옥서의 간수장이었던 이중진이 일부를 지원하였다. [본문으로]
  12. 林 公使,「ニーダム」 ヨリ趙民凞ニ與ヘタル書面寫差出, 機密第九七號 1905. 06. 15 「ニーダム」 ヨリ趙民凞ニ與ヘタル書面寫差出機密第九七號當方電報第二一五號ヲ以テ稟申致候 「ニーダム」 ヨリ趙民凞ニ與ヘタル書面寫別紙差進候間御査閱相成度候 敬具三十八年六月十五日[上件 Copy]Washington, December 22nd, 1904To His Excellency,Mr. Min Hui Cho.Sir :I called upon the Honorable Secretary of State yesterday and presented verbally the hope entertained by His Majesty the Emperor, Communicated through you to me, that this government should, so for as consistent with existing treaty relations with all concerned, exercise a proper influence in the final adjustment of Eastern affairs for the maintenance of the integrity and independence of Korea. This communication was very graciously received by the Secretary, who expressed a deep interest in Korea and I sincerely trust will be of some benefit to His Majesty's Government. It is apparent that nothing can be done by a friendly nation until negotiations commenced, making for peace in the unfortunate struggle now going on around your country. That the war in the Orient may soon be brought to a termination, honorable to all concerned to it, is, I am sure, the hope of mankind.It will give me very great pleasure to be of service at any time in advancing the best interests of Korea.Please convey to His Majesty my best respects and esteem, and believe me,Your most obedient servant,Chas. W. Needham.Sent through the Korean Legation. 니담이 조민희에게 준 서면 사본 제출기밀 제 97호 이쪽 전보 제215호로써 품신한 니담이 조민희에게 보낸 서면 사본 별지를 보내드리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경구.1905년 6월 15일[한국 황제의 희망을 美 국무장관에게 전달한 찰스 W. 니담의 서신 사본]Washington, December 22nd, 1904To His Excellency,Mr. Min Hui Cho.Sir :워싱턴, 1904년 12월 22일조민희 각하귀하.본인은 어제 국무장관에게 이 정부는 한국의 독립과 위상의 유지를 위해서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최종 결정에서 현존하는 조약 관계의 일관성에 맞게 올바른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본인에게 전달한 황제께서 간직하신 희망을 부탁하였습니다. 한국에 깊은 흥미를 나타내신 국무장관께서는 이 대화를 아주 관대하게 받아 들이셨고, 본인은 황제의 정부에 어떤 이익이 될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습니다. 지금 귀국 주변에서 진행중인 싸움에서 평화 협상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우호국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은 명백합니다. 동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곧 모든 관련 국가들에게 명예롭게 종식되어야 함을 인류의 희망으로 본인은 확신합니다.한국 최대 이익 증진에 언제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본인에게는 매우 큰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폐하께 본인의 최고의 존경과 경의를 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당신의 충실한 봉사자찰스 W. 니담한국 공사관을 통해 발송됨. [본문으로]
  13. 1910년이 지나서 The George Washington University로 대학 이름이 바뀌었다. [본문으로]
  14. 고정휴, 러일전쟁 전후의 고종 외교, 한민족독립운동사, 국사편찬위원회, 1904년 12월 고종은 주미한국공사관 고문직을 맡고 있던 콜롬비아대학 총장 니덤(C.W. Needham)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이 진력하여 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밀서를 헤이국무장관에게 전달하였다. 이때 헤이는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만을 표명했을 뿐 어떠한 인질도 주지 않았다. [본문으로]
  15. 林 公使,「ニーダム」 ヨリ趙民凞ニ與ヘタル書面寫差出, 機密第九七號, 같은 글 [본문으로]
  16. 林 公使,「ニーダム」 ヨリ趙民凞ニ與ヘタル書面寫差出, 機密第九七號, 같은 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