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 2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다. <12편 >

12. 김두한은 징용 당한 조선인을 위해 반도의용정신대를 만들었나? "스물다섯이 됐을 때가 태평양 전쟁 말기인데 해남도로 가라는 징용장이 나왔어요. 그때는 이미 미국 잠수함이 바다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남도에 가면 물귀신 되기 십상이었지요. 나 말고도 서울에 있는 주먹 3천명에게도 징용장이 나왔어요." - 김두한, 제10화 해방될 때까지 주먹생활 하던 이야기, 노변야화, 동양방송, 1969.10.24 "나는 경시청으로 들어가 단도직입적으로 단게 국장을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사복을 입은 한 사람이 어디서 왔느냐고 놀랍다는 어투로 물었다.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김좌진」이라고 새긴 명함을 내밀고 이런 사람이 왔다고 전하라고 했다. 그는 명함을 들고 들어 갔다. 아까와는 다른 융숭한 태도로 나를 국장실로..

김두한 2015.08.23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다. <11편 >

11. 김두한은 조선 상인들을 보호 했나? 총독부가 청계천을 기준으로 청계천 남쪽에 지금의 명동(명치정)과 을지로(황금정), 충무로(본정) 등 신시가지를 조성하여 서울에 들어 온 5만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은행, 백화점, 극장 등 신흥 상업지구로 개발해서 살기에 좋았기에 거지들마저 종로보다는 본정으로 몰려 들었다. 반면 청계천 북쪽 종로는 기존의 조선인 상권이 신흥 일본 상권의 시장 장악에 밀려 축소되었다. 청계천 남쪽 일본인 백화점 소비자의 60%가 조선인일 정도로 조선인마저도 청계천 이남으로 걸음을 옮겼다. 종로에서는 골목길로 상권이 이동해 주로 다방, 술집, 식당 등이 생겨나 서민층을 상대로 하는 유흥지역으로 변했다. 여기에 극장이 추가 되었다. 불량배들이 돈 안들이고 하루..

김두한 2015.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