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효 2

이승만의 감옥생활(1899~1904)<4편>체포에 저항한 죄로 종신형

이승만, 체포에 불응하며 항거한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다. 1899년 1월 30일 오후 5시경 이승만은 육혈포를 들고 최정식, 서상대의 뒤를 따라 탈옥을 감행하였으나, 불과 몇 분도 안 되어 이승만은 현장에서 시위 2대 병정 최영식에게 체포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맨 앞에 선 최정식이 길을 열려고 육혈포로 총탄 세 발을 쏘아 압뢰 김윤철의 등에 총상을 입히고 말았다. 1899년 2월 1일 경무청은 이승만을 한성 감옥서에서 불러 올려 저녁까지 자세히 신문하고는 도로 한성 감옥서로 보냈고, 고등재판소로 신문 결과를 넘겨 조율하였다. 이승만은 육혈포와 관련한 경무청 신문에서 최정식이 사람을 시켜서 육혈포를 한성 감옥서로 들여 왔다고 진술하였다. 재판을 일주일여 남겨 놓고 고등재판소는 이승만이 사용한 증거물인 ..

이승만 2015.10.06

이승만의 감옥생활 (1899~1904) <1편> 무고로 인해 죄 없이 체포

이승만, 죄 없이 사복 경찰관에게 잡히다. 윤치호, 이상재, 이건호 등이 이끌던 독립협회는 1898년 2월 27일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 조차를 반대하고, 3월 1일 한국 러시아 은행 철수를 요구하며, 3월 7일 일본에게 조차한 석탄기지를 회수하라는 항의문을 대한제국 정부에 발송하고, 3월 10일에는 만민공동회라는 대규모 국민집회를 개최하였다. 이승만은 이 집회에서 총대위원에 선출되어 이후 집회 때마다 선동 연설에 열을 올렸다.1 러시아의 이틀 시한의 러군 철수 위협과 만민공동회 요구 사이에서 갈등하던 대한제국 정부는 3월 11일 밤 만민공동회의 결의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러시아군은 철수했고, 한러 은행도 철폐했다. 일본도 월미도 석탄고 기지를 반환했다. 1898년 10월 12일 친러파를 몰아내고 박정양..

이승만 2015.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