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회 2

김두한과 하야시 결투는 사실인가?

1. 박정희 군사 반란 정권의 영화 검열 친일파 남로당 공산군사반란 핵심 출신 박정희는 2차 군사반란에 성공한지 일주일만인 1961년 5월 23일에 '아아 백범 김구선생'과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등 국내영화 34편과  외국영화 56편을 불순영화로 보고 재검열에 들어갔다.1 내무부, 문교부, 공보부가 공동으로 6개월간이나 심의하여 한국영화 '오발탄'과 외국영화 6편을 상영금지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2박정희는 1962년 1월 19일 한국 최초의 영화에 관한 기본법인 영화법을 만들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제6차 상임위원회에서 의결을 거쳐 1월 20일 법률 제995로 공포하였다. 제10조에 공연자가 영화를 상영하고자 할 때는 공보부 장관에게 허가를 받아야 하고, 제15조에 일정한 사유가 있을 때 공보부 장관은 ..

김두한 2015.11.06

우미관 김두한까지 언론에 나타난 서울 조폭의 역사

폭력배의 역사에서 낭만파 주먹 시대가 존재한 적이 없다. 협객도 존재한 적이 없다. 건달도 존재한 적이 없다. 조폭 1세대의 출현 배경 서울, 특히 종로에 조선인 조폭들이 집중적으로 출현한 배경을 유흥업종의 등장과 밀집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총독부는 청계천 이남에 일본인 거류 지역을 설정하고 개발에 들어가 황금정(을지로), 본정(충무로), 명치정(명동)이라는 5만명 일본인 거주 신도심을 건설하였다. 상대적으로 종로에 비해 규모가 컸고, 도시적이었으며, 자본을 집중하고 있었다.반대로 종로는 낙후 지역으로 전락하여 주로 요리점, 다방, 술을 파는 카페, 바, 기생집 등 유흥업종 상점들이 이면도로나 골목길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종로에는  몸을 안 파는 전통 관기 출신 외에 몸 파는 기생이 800명~ 1,00..

김두한 2015.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