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 감옥서 2

이승만의 감옥생활(1899~1904)<3편>고문 당했다고 거짓말

이승만, 고문 당했다고 거짓말하다. 대한제국의 갑오경장 개혁에 따른 형벌제도 정비 대한제국 이전에는 형벌에 사형, 유형(귀양), 장형(곤장), 태형(회초리), 도형(노역)이 있었기에 지금 의미의 징역형 형벌을 받는 감옥이 존재하지 않았고, 미결수가 법원 공판에 참석하면서 판결이 날 때까지 지내는 전옥이 있었다. 즉 판결이 나면 사형으로 죽거나, 멀리 귀양을 가거나, 매를 맞고 집으로 가거나, 매 맞은 후 노역을 하러 배정받은 관서로 가야 하기에 판결이 남과 동시에 기결수는 전옥을 떠난다. 따라서 전옥은 구치소 개념이었다. 서울에는 의금부 전옥서, 좌포도청 전옥서, 우포도청 전옥서 그리고 종로 서린동 전옥서가 있었으며, 한성 전옥서는 종로 서린동 전옥서를 말한다. 전옥서들은 규모가 작아 40~100명 정도..

이승만 2015.09.29

이승만의 감옥생활 (1899~1904) <2편> 꾐과 협박에 넘어가 탈옥

이승만, 꾐과 협박에 넘어가 탈옥하다. 이승만은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이유 없이 무고를 당해 체포되어 지내다 한성 감옥서 병원에 입원하였다. 감옥서 병원 안에서 최정식과 서상대를 만났다.1 이로 인하여 어핍지존한 혐의로 갇힌 매일신문 편집인 최정식2과 간성군수로 재직할 때 건봉사 승려들에게 교수형 판결을 내리고 엽전 8,500냥을 가로챈 죄로 징역 15년형을 선고 받은 서상대3의 탈옥에 가담하라는 회유와 협박에 시달렸다.4 최정식은 이승만과 매일신문 기자생활을 함께 했던 사이었다. 탈옥은 최정식이 주도하였다. 1898년 10월 12일 자정에 시위 1대대 4중대 2소대 병정 장재우가 시위 1대대 참정 문희선의 부탁으로 궁내부 관인을 가지고 나오다가 경무청 별순검에게 잡혔는데 위조한 관인임이 밝혀졌다.5 1..

이승만 2015.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