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 상륙한 청인의 수는 1883년 72명에서 1884년 4월 2일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을 체결하자 꾸준히 증가해서 1890년에는 정착인이 967명으로 늘었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는 산동성과 가장 활발하게 교류를 했었다. 자연스럽게 초창기 화교도 95%가 산동성 출신이었다. 이로 인해 한국 초기 중화요리는 산동요리(山東菜)가 중심이 되었다. 여기에 이후 광동요리와 북경요리가 가세하였다. 한국에서 산동요리는 인천 중화루(中華樓)와 공화춘(共和春)이 중심이었고, 북경요리는 서울 아서원(雅敍園)과 대관원(大觀園)이 중심이었으며, 광동요리는 서울 사해루(四海樓)와 금곡원(金谷園)이 중심이었다. 서울 아서원과 대관원도 산동 출신 화교가 개업했으나, 판매 요리는 북경요리였다. 화교는 초기에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