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책 독립정신을 쓰다.
일본의 통치권을 벗는 그 날로 우리나라 예수교국으로 만들어
현금 만주에서 조직된 한국 임시정부 내각의 국무경으로 선택된 이승만 박사는
오늘 연합 통신원을 대하여 말하기를 "이번 독립 운동 인도자들의 주의는
한국으로 동양의 처음되는 예수교국을 건설하겠노라" 하더라.
- 신한민보 1919. 04. 07
독립투쟁을 하는 임시정부의 지도자로 선정되면 보통 어떻게 독립투쟁을 해 나갈 것인지 방향과 구체적인 투쟁 노선을 선언하는 법인데, 이승만은 황당하게도 기독교 국교화라는 엉뚱한 소리를 언론에 발표하였다.
①국민: 황성신문 4,003회, 대한매일신보 1,037회,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 2,633회, 독립신문 135회, 한성순보 109회.
②인민: 황성신문 6,574회, 대한매일신보 1,378회,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 4,941회, 독립신문 1,384회, 한성순보 57회.
③백성: 황성신문 555회, 대한매일신보 203회,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 265회, 독립신문 1,778회, 한성순보 209회.
④신민: 황성신문 1,171회, 대한매일신보 79회,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 729회, 독립신문 179회, 한성순보 19회.
- 각 신문사별로 국민, 인민, 백성, 신민이라는 단어가 쓰인 기사의 수.
신민은 도리, 직분, 충성 등과 관련지어 사용했고, 백성은 보호, 교화, 섬김의 대상, 개별적인 사람 등과 관련지어 사용했으며, 인민은 백성이 확장된 개념으로 집단적, 동포적, 정치 참여적 등과 관련지어 사용했고, 국민은 전체적, 외국에 나가 있는 한인과 국내 한인을 모두 포함하는 민족적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이승만도 단어를 혼용하여 사용하면서 대체로 당시 형성된 쓰임을 따르고 있으며, 백성과 인민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였다.
1895년부터의 대한제국 소학교 교과서
교과서 이름 책수 교과서 이름 책수
萬國地誌 泰西新史攬要 한문 2책
(만국지지) (태서신사람요)
萬國略史 국문 2책 輿載撮要
(만국약사) (여재촬요)
朝鮮歷代史略 한문 3책 公法會通 3책
(조선역대사략) (공법회통)
朝鮮歷史 3책 地璆略論 상하
(조선역사) (지구약론)
國民小學讀本 士民必知 한문
(국민소학독본) (사민필지)
小學讀本 西禮須知
(소학독본) (서례수지)
尋常小學 3책 牖蒙彙編
(심상소학) (유몽휘편)
新訂 尋常小學 3책 夙惠記略
(신정 심상소학) (숙혜기략)
朝鮮略史 國文 小地球圖 착색
(조선약사) (국문 소지구도)
近易算術 상하 小地球圖 착색
(근역산술) (소지구도)
簡易四則算術 東輿地圖
(간역사칙산술) (동여지도)
백순재, (2)開化期 敎科書의 編纂 및 그 內容, 敎科書 編纂, Ⅱ. 近代敎育의 普及, 근대문화의 발생, 한국사 20 근대, 국사편찬위원회
이승만이 독립정신을 쓰면서 사용한 책 중에는 1895년에 발행한 대한제국 소학교 교과서도 여러 권 들어가 있었다. 독립정신을 쓰는 동안 이승만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공법회통이 소학교 교과서였다. 만국약사, 태서신사람요도 소학교 교과서였다.
이승만의 독립정신은 간단하게 말해서 기독교를 국교로 삼겠다는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다.
이승만의 국가에 대한 개념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습의 국가다.
"나라를 세우고 정부를 두어 정치를 마련하며 법률을 정하는 것이 다 사람의 일신상 자주 권리를 보호코자 함이니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약한 자의 목숨은 강한 자의 고기가 될 것이요, 어린 아이가 가진 떡은 어른의 음식이 될지니, 제 몸에 딸린 권리를 어찌 지탱하리오. 불가불 평균하게 법을 세워 대소강약 물론하고 제 분수 안에 속한 권리는 저마다 있어서 능히 빼앗을 자 없나니, 이 것이 곧 나라를 설립한 본의라.
- 이승만, 독립정신, 태평양잡지사 1917, 30~31쪽
이승만이 생각하는 독립을 유지하는 방식은 당시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듯이 역시 교육이었다.
"성질을 의론컨데 청인의 풍후함과 일인의 강악함을 고르게 겸비하여 완고질박한 성품도 있으며, 영리민첩한 재주도 가졌나니 교육만 잘 시키며 인도만 바르게 하면 족히 동양에 부강을 이루고 어렵지 않을지라."
- 이승만, 독립정신, 태평양잡지사 1917, 17쪽
그런데 그 교육의 목표는 전혀 달랐다. 이승만이 생각하는 교육은 기독교였다. 이는 선교사들의 논리와 일치한다. 대한제국이 독립을 유지하려면 교육이 필요한데 그 교육은 기독교를 믿어 교리를 배우는 일이다.
"이것이 곧 지금 세계상 상등 문명국의 우등 문명한 사람들이 인류사회에 근본을 삼아 나라와 백성이 일체로 높은 도덕 지위에 이름이라. 지금 우리나라 이 쓰러진 데서 일어나려하며 썩은 데서 싹이 나고자 할진데 이 교로써 근본을 삼지 않고는 세계와 상통하여도 참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요, 신학문에 힘써도 그 효력을 얻지 못할 것이요, 외교를 힘써도 깊은 정의를 믿지 못할 것이요, 국권을 중히 여겨도 참 동동 지위에 이르지 못할 것이오, 의리를 숭상하여도 한결 같을 수 없을 것이요, 자유 권리를 중히 하려해도 평균한 방한을 알지 못할지라. 우리는 마땅히 이 교로써 만사에 근원을 삼아 각각 나의 몸을 잊어 버리고 남을 위하여 일하는 자 되어야 나라를 일심으로 받들어 영미 각국과 동등히 되게 하며 이후 천국에 가서 다 같이 만납시다. 건국 4237년 6월 29일"
- 이승만, 독립정신, 태평양잡지사 1917, 234~235쪽
독립정신에는 어떻게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지 나와 있지 않지만, 이승만이 독립정신을 탈고한지 두 달 후인 1904년 8월에 신학월보에 기고한 '교우들이 힘쓸 일'이라는 사설에서 잘 드러내고 있다.
"바라건대 우리 교우들은 지뢰포를 밟고 적진에 들어가는 저 군사들을 본받아 일심으로 나아가 적군을 하나씩이라도 항복 받기로 힘쓸지라. 우리의 적군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만 진리를 알지 못하고 방해하려 하는 자며, 우리 군기는 다른 것이 아니라 성경 한가지 뿐이니, 성경의 이치를 전국에 전파하여 사람마다 지금 무슨 처지에 있으며 어찌하면 우리가 동포와 나라를 일체로 구제할 것이며, 동포와 나라를 구제하려하면 정치 법률에 있지 아니하고 교화로써 사람의 마음을 풀어놓음에 있는 줄로 깨닫게 하여, 하나라도 돌아와 우리와 함께 일꾼이 될진데 얼마만에 전국이 모두 충군애국하며 자주독립하는 동포가 될지니, 무슨 걱정이 있으며 무엇이 부족하리오, 어서 바삐 일들하여 전국 사람이 하나도 모르는 자 없도록 힘쓰고 나갑시다."
- 이승만, 교우들이 힘쓸 일, 신학월보 1904. 8
이승만은 지뢰를 밟으며 적진에 들어가 싸우는 병사들처럼 맹렬하게 전도에 나서서 사람들을 교회에 다니게 만들면 정치가 바르게 바뀐다고 믿었다. 100년이 지난 후인 지금 기독교인은 급증했지만 정치는 전혀 변화가 없으니 이승만의 예측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항상 교회 본의로써 딸려 나오는 고로 교회에서 사람이 많이 생길수록 정치의 근본이 스스로 바로 잡히나니 이러므로 교화로써 나라를 변혁하는 것이 제일 순편(순조롭고 편함)하고 순리된 바로다. 이것을 생각지 않고 다만 정치만 고치고자 하면 정치를 바로 잡을만한 사람도 없으려니와 설령 우연히 바로 잡는다 할지라도 썩은 백성 위에 맑은 정부가 어찌 일을 할 수 있으리오, 반드시 백성을 감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한 후에야 정부가 스스로 맑아질지니 이 어찌 교회가 정부의 근원이 아니리오."
- 이승만, 두 가지 편벽됨, 신학월보 1903. 9
이승만은 교회에 열심히 다니기만 하면 하나님이 만국공법으로 나라를 지켜 준다는 망상에 빠져 들었다. 당시의 만국공법은 강대국들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서로의 이해가 얽히면서 충돌이 증가하자 서로가 조금씩 물러서서 공동의 원칙을 내세워 충돌을 회피하면서 식민지 확보 경쟁을 하려는 일종의 완충 장치였다.
이승만이 믿어 마지 않던 국제법은 일본제국의 대포로부터 대한제국을 지켜주지 못했다. 만국공법은 일본군의 대포 1문보다 가치 없는 것이었다.
"이 공법을 어느 나라가 홀로 세우거나 만국이 합하여 법관을 내고 정한 것은 아니로되 교화 높은 나라들이 힘을 굽혀 준행하매 한 두 강포한 나라가 있어 잔약한 나라를 법외로 대접하고 욕심을 부리고차 할지라도 적은 나라가 능히 거절하여 받지 아니하는 권리가 있나니 이것이 공법의 힘이요.
설령 적은 나라가 무리함을 당하고도 거절치 못할 경우이면 각국이 시비하여 강한 자로 하여금 무리함을 행치 못하게 하는 것도 또한 공법의 힘이니 공법의 힘이 이렇듯 장한지라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만은 다만 세계에 교화와 문명이 아직도 한결같지 못하여 혹 강대한 세력을 믿고 어두운 나라들을 대하여 공법을 법리고 불의를 행하는 자도 종종 없지 아니하매 어우둔 나라들은 저희가 공법을 알지 못한고로 남이 업수이 여겨 이렇게 하는 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하는 말이 만국 공법이 대포 한 자루만 같지 못하다 하여 위력을 써서 세상을 대하려 하매, 인하여 나도 또한 공법을 버리고 세력을 믿으려 하는 날에는 남에게도 대단히 위태하려니와 자기에게도 극히 염려될 바라. 이런 나라에게 자주 권리를 허락하는 것은 철 모르는 아이에게 잘 드는 보검을 맡김과 같아서 그것으로 제 몸을 상하는지라 마땅히 빼앗아서 임의대로 못하게 할지니 이러므로 나라가 어두운즉 대소 강약을 물론하고 능히 공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여 독립 권리를 보전치 못하는 바라. 이 어찌 공법의 편벽됨이리요.
대개 공법의 본의인즉 천리와 인정을 따라 세계 만국과 만국만민이 일체로 평균한 이익과 권리를 보전케 하고자 함이니 각국의 교화가 퍼져서 문명이 한결같이 될진데 응당 이 공법이 아니 행하는 데 없이 되려니와 만일 한 두 나라라도 개명치 못한 구석이 있을진데 불가불 공법 권한의 구별이 있을지다. 가령 개명한 나라들은 다 만국이 통행하여 한 지방이라도 열리지 않은 곳이 없으며 한 사람도 열리지 않은 자 없게 하는 것이 공번된 이익이라 하나니 이것이 참 나의 좋은 것을 세상과 함께 하자는 공번된 뜻이거늘 어두운 나라에서는 이 뜻을 모르고 말하기를 나는 남의 새것도 원치 아니하며 남의 옛것도 바라지 않을 터니이 나 혼자 문 닫고 이전같이 따로 살겠노라 할진데 이것이 어찌 자유 독립 권리라고 제 마음대로 하라 하리오. 부득이 압제하여 공번된 뜻을 따르고 편벽된 생각을 바르게 할지니 이것이 곧 자주독립 권리에 손해되는 큰 근본이라. 만일 한 두번에 곧 깨닫고 마음을 돌이켜 날로 개명에 나아가 공법의 뜻대로 행하여 피차에 이익을 얻고자 할진데 타국이 무단히 간예할 계제도 없겠고 남의 법외에 행위를 모르고 받을 이치도 없을려니와 종시 깨닫지 못하여 일향으로 개명을 반대할진데 마침내 사분오열 하거나 속국과 보호국 되는 화를 면치 못할지라.
하나님의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듯을 살필진데 하나로 버릴 것이 없어 모든 사람에게 쓰임이 되게 하심이라. 다만 사람이 다 알지 못하여 항상 지식의 정도를 따라 개명되나니 이는 여러 말로 설명할 것이 없는지라 가령 밖에 곡식을 뿌리며 물에 고기를 낚으며 산에 사냥하는 것은 세상 사람이 다 알거니와 금은 동철이며 석탄 석유와 기타 모든 천조물로 되어 무궁히 감추어 우리 인류의 쓰게 만드신 것은 혹 아는 자도 있으며 혹 모르는 자도 있고 여간 안다는 자도 또한 등분이 많아서 혹은 대강만 캐어내며 혹은 기계와 제조가 늘어 그 정긴함을 다 하기에 이르고 어떤 나라에서들은 학문과 지혜가 발달되어 심지어 형질하여 쓰게 만드는 자가 참 주인이 되는 법이니 이는 아무쪼록 천지만물을 다 사람의 쓰는 바 되고자 함인즉 헛일 함을 중히 하지 않고 실상 효력을 인연하여 권리가 생기는 본의라."
- 이승만, 독립정신, 태평양잡지사 1917, 24~26쪽
나라가 위태로울 때 강대국들로부터 만국공법의 적용을 받으려면 강대국들이 믿는 기독교를 믿으면서, 평소에 친하게 지내 놓아야 한다는 게 이승만의 외교 독립운동의 핵심이다. 정말 비현실적인 외교 논리다.
"외교를 친밀히 하는 것이 지금 세상에 나라를 부지하는 법으로 알아야 할지니 만일 외교가 아니면 형세가 외로워서 남의 침탈을 면할 수 없는 고로 세상에 아모리 강한 나라도 외교상에 벗어 나는 것은 대단히 두려워 하는바라 사람이 무인 지경에 혼자 있으면 짐승의 해도 막을 수 없으려니와 강포한 자가 거리낄 것 없이 침탈할지니 여럿이 모여 있어야 아이가 가진 떡도 감히 빼앗지 못할지라. 나라가 외로이 있으면 강국이 졸지에 침로할지니 여러 나라가 합아여 한 이웃이 되어 서로 관계를 맺고 지낼진데 남이 어찌 나의 약함을 인연하여 법외에 일을 행하리오. 내가 먼저 공법의 뜻을 어기지 말고 공평정대하게 행세하며 각국들과 친밀하여야 정의가 두터울진데 타국이 의리상 친구로 알아 언제든지 내가 남에게 억울함을 당할 때에는 경위로 힘껏 도와 줄지니 이는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도와주는 자 많이 생기리라. 이것이 곧 잔약한 나라들이 강국 사이에 있어 능히 보존하는 근본이오. "
- 이승만, 독립정신, 태평양 잡지사 1917, 211~212쪽
기독교를 믿는 강대국끼리도 싸움을 하고, 더구나 당시 기독교 국가들끼리 서로 경쟁과 협력을 통해 지구를 구역별로 나눠 가지면서 전세계를 식민지화 하던 상황에서, 조선이 외교만 잘 하면 저절로 지켜지리라고 믿은 이승만의 생각은 그 자체가 어리석다. 이승만이 말하는 외교적 수단은 일단 나라가 부강하고 대등한 군사력을 가진 이후에야 통용하는 것이다.
유럽 기독교 국가들은 남미에 기독교를 전파하고는 기독교를 믿는 남미인들을 농장 노예들로 삼았다. 심지어 유럽 기독교인들은 아프리카에서의 노예 사냥 고갈로 남미로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 수급이 원활하지 않자 일부는 밀림 속으로 달아나 숨어 살던 인디오 여자들을 사냥해서 가둬 놓고 강간하여 주기적으로 아이를 낳게 해서 노예로 충당하기도 할 정도였다. 미국 기독교인들은 북미 인디언을 무려 1천만명이나 죽이고 땅을 차지하였으며, 하와이 왕국마저 무너뜨리고 미국의 땅으로 삼았다.
유럽이나 미국이 기독교를 믿어서 강대국이 된 것이 아니라 천년간 세계 최강국 로마에서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왕위 쟁탈을 정당화 하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왕권신수설을 퍼뜨리기 위해 유일신 교리를 가진 기독교를 받아 들여서 비로소 기독교가 로마 황제의 비호 아래 유럽에 퍼졌듯이 마찬가지로 강한 힘을 가진 유럽이 기독교를 계속 수용한 것이지 기독교 자체가 유럽을 강하게 만든 것이 아니다.
권력 투쟁 속에서 왕권 정통성 인증의 도구로 전락한 기독교는 각 나라의 왕권신수설을 내세운 왕들과 손을 잡고 유럽을 중세시대 1천년 암흑기에 빠뜨려 인류의 문명과 문화적 진보를 가로 막은 최악의 종교였다. 기독교 신학은 철학이 낳은 아들이었으나, 이후 천년간 철학은 아들인 기독교 신학의 시녀가 되어야 했다. 과학은 철학이 일찍 낳은 아들이었으나 동생 신학에 의해 죄인이 되어 천년간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다. 이는 교회가 이 왕은 하나님이 보증한 왕입니다라고 한 마디 해준 것에 비해 엄청난 특혜를 받아 오용하였다.
반대로 지금 기독교를 믿는데도 가난한 나라들이 널려 있으며 기독교가 없어도 강대한 중국과 일본, 인도도 있다. 이것은 지금 한국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엄연히 5천년 역사에서 단 한번도 변함없이 가장 많은 신도를 보유한 종교는 불교다. 그렇다고 한국의 경제발전은 순전히 불교도들의 헌신이라고 말 할 수 없듯이 기독교의 종교적 번성 때문에 한국의 경제가 발전했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반대로 한국 교회는 한국 경제 발전 단계의 흐름에서 열매만을 따먹으면서 편하게 기대어 성장했다.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수출 전략이 전환되고,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과 낮은 임금을 감내하면서 참았기에 수출이 신장될 수 있었다.
반면에 한국 교회는 가장 힘든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힘을 준 것이 아니라, 유럽에서는 150여년 전에, 십일조 원조국가 구약성경의 나라 이스라엘마저도 더 이상 걷지 않는 십일조를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전히 강요하는 것도 부족해서 점점 더 헌금 가짓수를 80여가지로 늘려가며 금전 착취의 강도를 높혀 왔다. 그러면서도 노동환경 개선에 나서기는 커녕 저임금 강노동 산업재해가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호도하면서 인내하면 축복 받는다고 하면서 산업 발전 단계에서 노동자들의 희생을 더욱 방치하였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노동자들의 소득도 오르게 되는데, 한국 교회가 한 일은 그 소득에 맞춰 헌금에만 욕심을 낸 것이 아니라 명색이 개신교라고 하면서도 신약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낸 적도 없고, 내라고 한 적도 없는 근거 없는 십일조 내는 사람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 백억원, 천억원짜리 교회들을 짓기 시작했다.
보다시피 한국에서의 기독교는 이승만의 바람과는 다르게 편벽됨으로 인하여 전혀 다르게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모습으로 변질하였다. 기독교인 이승만의 삶 자체도 거짓과 죄악 투성이었다. 요즘은 교회 안에서마저 빈부에 따른 신분적 차별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학벌의 소외와 차별도 교회 안에서마저 이루어 지고 있다. 그리고 대형 교회들의 기독교 종교 시장의 독점도 매우 심각한데, 중소형 교회들이 수십년을 바쳐 개척해서 안정화 시켜 놓은 지역 종교 시장에 대한 지점 혹은 가맹점식 교회 차리기를 동원한 침탈은 매우 우려스럽다.
대한제국은 문어와 오징어처럼 인연이 닿은 모든 서양 국가에 다리를 다 하나씩 걸치고 각종 천연 자원 개발 사업권의 특혜를 주면서 전방위 총력 외교를 펼쳤지만, 나라 자체의 힘이 없으니 아에 일본에게 외교 활동을 차단 당하여 외교력을 발휘할 기회조자 잃고 말았다. 이승만이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매주 교회에서 기도 열심히 하면서 외교력 하나로 대한제국을 지켜냈을 거라고 믿을 사람은 없다.
항일 시기 때 신사참배에 저항한 목사들은 수십명에 불과하다. 해방후 자신의 신사참배에 대해서 사과한 목사는 아직까지도 한경직 목사 한명 밖에 없을 정도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 소래노회가 노회 차원에서 신사참배에 대해서 사과했다. 천주교는 교황이 신사참배를 허용한 점을 사죄한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개신교는 전두환이 반란으로 정권을 잡고서 내란을 일으켜 무고한 광주 민중들을 학살할 때 청와대에서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를 비롯해서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목사들이 살인자 전두환에게 축복을 내려 달라고 하나님에게 축원기도를 했다. 세월이 흘렀어도 그 자리에 참석했던 목사들 가운데 어느 한 명도 자신의 신앙적, 역사적 과오를 뉘우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기독교가 불의한 정치를 개혁한 것이 아니라 불의한 정치에 기독교마저 타락한 결과를 보여 주었다.
결국 한국을 해방시킨 것은 이승만의 외교력이나 기독교가 아니라 외국간 군사력 충돌의 결과였다. 엄밀하게 한국은 군대를 서울에 입성시키지 못했기에 승전국이 되지 못했다. 한국 광복군이 서울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뒤를 이어 바로 상해 임시 '한국' 정부가 입국 했다면, 미군이 한국을 지배하지 못했다. 또한 친일파도 살아 남지 못했다.
중경 임시 대한민국 정부의 늦은 대처로 인해 한국은 핵폭탄 2발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승전국 미국이 갖게 된 전리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리품 신세인 한국의 영토를 놓고서 승전국 미국과 패전국 일본이 연필로 선을 그으면서 주거니 받거니 한 것이다. 외교 잘 하고 영어 잘 한다는 이승만은 미국이 독도를 제외할 때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런 쓸모 없는 외교력이 이승만 외교력의 실체였다.
전리품 인수식이 끝나자 미국은 합동작전을 수행했던 또다른 동료 승전국 러시아에게 한반도의 절반을 전리품으로 양도해야 했다. 동북아 질서를 이승만의 외교력이 아니라 타국들의 군사력이 재편하였다.
반면 독일의 식민지였던 프랑스는 영국에 임시정부를 두고서 본토에서는 빨치산 활동을 펼쳐 매국노들을 처형하면서 게릴라 작전으로 독일군을 괴롭혔고, 영국에서는 정규군을 양성하며 미래를 대비하였다가 미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하자 영국 주둔 프랑스군은 전투를 회피한채 무조건 달려서 파리에 가장 먼저 입성하여 프랑스 국기를 올리고 연합군이 올 때까지 파리를 사수했기에 미국 및 러시아와 동등한 승전국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해방후 기독교 신자 이승만은 자신의 종신 독재 사욕을 채우려고 공권력을 악용해서 국민을 학살하는 반민주주의, 반자유, 반인권 범죄를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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